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513화 (513/760)

513화

누군가 아프다.

조아라는 살면서 이 말을 많이 들었다.

친구가 아파서 결석했다. 선생님이 아파서 결근했다. 부모님이 아프다, 친척이 아프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살면서 아프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누가 아프단 말을 들어도 ‘그렇구나’ 이외의 감상을 가지긴 어렵다.

말로는 ‘빨리 나아’라거나 ‘걱정된다’라곤 하지만, 자기 몸이 아픈 것처럼 생각할 순 없다.

그런데 왜일까.

“아저씨가 왜요?”

성필이 아파서 결근했다고 하니 위장에 추가 매달린 것처럼 속이 무거웠다.

조아라는 한구인을 붙잡고 집요하게 물었다.

“어떤데요?”

“그게…… 이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왜요?”

“박 이사님이 말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걱정할까 봐요?”

“…….”

“심각한 거라서 그래요?”

그제야 정지음도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낭패란 듯 표정을 굳힌 한구인을 보아하니, 성필의 결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뭐, 사고라도 당했어요?”

조아라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일본에서 있던 일이었다. 성필이 세이코를 구하기 위해 옥상에서 몸을 던졌던 때 말이다.

미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가끔 뉴스에서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진 의인의 이야기를 보긴 한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 아이를 밀어내고 대신 차에 치인 의인의 이야기도 들어보았다.

“그래서 말 못 해주는 거예요?”

의인(義人).

참 대단하고 멋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직접 눈으로 보니 미친 사람도 그렇게 미친 사람이 없다.

본 지 고작 한 달 남짓한 인간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다니? 정상적인 인간이 할 만한 행동이 아니다.

조아라는 성필이 그딴 짓을 저지른 것을 보고 생각했다. 타인의 목숨을 구한 의인들에게 용감한 시민상 따위를 줄 게 아니라,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훈계해야 한다고 말이다.

평범한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정의감, 물론 머리로는 이해한다. 그러나 가슴으론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조아라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니까. 세상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간이니까.

적어도 성필은, 조아라의 주변 사람들은 의인이 아니길 바란다.

“…….”

한구인은 끝끝내 대답이 없었다.

조아라는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그의 손목을 놓곤 그를 지나쳤다.

“아, 아라 씨 어디 가십니까?”

“아저씨 집이요. 병이든 상처든, 가벼운 거면 집에 있겠죠.”

“저도 가볼게요.”

“예?”

정지음도 조아라를 따라 한구인을 지나쳤다.

“오늘 같이 작업해야 할 프로듀서가 아프다잖아요. 예의상이라도 한 번은 봐야죠.”

둘이 작업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한구인은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박 이사님은 댁에 안 계십니다.”

“그럼요?”

한구인은 조아라의 눈을 피했다.

“병원에…… 계십니다.”

조아라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병원?

사람이 병원에 있단 건 심각한 상태란 뜻이다. 입원했단 의미이니까.

인생에서 가장 아팠던 경험이 독감이었던 조아라. 너무나도 끔찍한 고통이었건만, 그때도 병원에 입원하진 않았다.

입원해야 할 만한 큰 병.

입원해야 할 만한 큰 상처.

“왜, 요…….”

조아라는 한구인이 끝끝내 답하지 않았던 질문을 굳이 또 꺼내었다.

만약 성필의 모습을 병원에서 처음 본다면, 그 감정을 감당할 수 없을 듯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성필이 어떤 모습인지 듣고 싶었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스운 꼴을 보이지 않을 테니.

한구인은 이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는 것조차 꺼려진단 듯 몇 번이고 뜸을 들였다.

“말해줘요, 한 이사님.”

한구인이 놀랐다.

수년 동안 꿋꿋하게 ‘한의사님’이라고 놀리듯 불러왔던 조아라다. 그녀가 진지하게 ‘한 이사님’이라고 부르자, 그 또한 더는 진실을 숨길 수 없었다.

“……스.”

“네?”

한구인이 한숨을 깊이 내쉬고, 눈을 질끈 감았다.

“벤치 프레스를 하시다, 다치셨습니다.”

“…….”

“…….”

“다치셨다고 합니다…….”

침묵.

정적.

고요.

“네?”

“그으,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 * *

성필은 권강철 트레이너에게 3대 500(3대 운동의 중량을 합쳐 500kg 이상 수행할 수 있다는 뜻)에 관해 질문한 적이 있었다.

권강철은 진지하게 이리 말했었다.

“회원님의 목적이 아름다운 몸을 만드는 거라면, 무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 무거운 무게를 들면 괜히 부상의 위험만 커지니, 3대 몇 이런 건 신경 쓰지 않는 게 이롭죠. 무거운 무게를 드는 것, 즉 파워 리프팅과 보디빌딩은 엄연히 다른 분야니까요.”

권강철은 헬스인을 희화화하는 세태에 관해 구시렁거리곤, 의미 있는 강의를 해주었다.

“하지만 아예 의미가 없는 건 아닙니다. 회원님, 저는 2주나 3주 정도 운동을 안 하고 말입니다. 가슴에 힘을 이렇게 빡!”

권강철의 흉근이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오랫동안 힘을 주고 있으면, 다음 날 알이 뱁니다.”

“그냥 힘만 줬는데도요?”

“저 정도의 보디빌더라면 근육을 컨트롤하는 능력이 충분히 발달했으니까요.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물론 회원님도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한 세트를 무조건 20번 하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성필은 아직 명중률이 30% 정도밖에 안 되니까. 20번 동작을 수행하더라도, 정확하게 근육에 자극을 주는 건 고작 6회 정도다.

아니, 6회도 많이 쳐준 것이다.

그에 비해 권강철의 명중률은 100%다.

“저의 6회 수행과 회원님의 20회 수행이 같은 거죠. 하지만, 회원님도 거의 100% 확률로 근육에 자극을 명중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건가요?”

“무거운 무게를 드는 겁니다. 정확한 자세로만 한다면, 정확하게 근육에 충분한 자극을 주는 게 가능하죠. 그런 의미에서 3대 중량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필의 근육 수준을 판가름하는 지표로 의미가 있다. 일반적으로 근육은 커지면, 즉 발휘할 수 있는 힘이 크고 잘 발달하면 컨트롤하기 쉬워지니까.

그 이야기를 들은 지 어언 1년이 지났다.

성필은 벤치 프레스 시트에 앉았다. 그의 앞에 선 권강철 트레이너가 에너지 드링크를 권했다.

성필은 그것을 마셨다.

타우린과 카페인이 즉각적으로 성필의 신경을 각성시켰다.

“자, 회원님.”

“후우.”

성필은 손목을 털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짧게 외쳤다.

“악!”

해병대 정신으로, 성필은 벤치 프레스 시트에 누웠다. 누운 그의 눈앞으로 철봉이 보였다.

봉 양 끝에 걸린 원판의 무게는 합쳐서 120kg이었다. 봉 무게까지 합치면 140kg.이다.

약 3개월 만에, 성필은 벤치 프레스 무게를 갱신하고자 했다.

이게 성공하면 성필은 3대 450kg이다.

“회원님.”

권강철 트레이너는 누운 성필의 위로 올라갔다.

성필은 복부 양쪽에 닿는 권강철 트레이너의 허벅지 근육을 느꼈다. 마치 단단한 나사로 고정하는 듯한 느낌이다.

시선을 내리니 진지한 눈빛의 그가 보였다.

“안 되겠단 생각이 들자마자 저에게 말하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다치십니다.”

권강철이 봉의 중앙을 양손으로 쥐었다. 성필은 봉의 양쪽을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벤치 프레스 140kg.

무게 살짝 더 보태서, 리카 3명을 가슴 근육으로 들어 올리는 동작이다.

“갑니다.”

그러고선 권강철이 외쳤다.

“으얏!”

“이야아아아악!”

성필이 괴성을 내지르면서 봉을 랙에서 뽑아냈다. 그리고 봉을 흉근 중앙과 수직이 되는 위치로 가져왔다.

그의 팔이 미세하게 떨렸다.

“거의 혼자 뽑으셨습니다! 잘하셨어요!”

권강철이 그를 응원했다.

성필은 그 말을 들을 정신이 없었다. 모든 근육과 신경이 리카 3명을 드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성필은 천천히 팔을 내렸다.

내리고, 내리고, 마침내 팔이 굽혀졌다.

리카 3명을 거의 가슴에 닿을 위치까지 내렸다.

“으이야아아아악!”

성필은 다시금 괴성을 내지르면서 리카 3명을 들었다. 천천히, 마치 영겁처럼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세 명의 리카는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성고오오오옹!”

권강철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성필은 입을 꾹 다물고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발휘했다. 봉을 천천히 머리 쪽으로 움직여 랙에 꽂아, 손을 놓았다.

콰앙!

랙에 안착한 봉이 굉음을 내었다.

“흐아, 하아, 흐억, 허어, 흐어…….”

성필은 눈앞이 하얗게 변한 듯 초점 잃은 눈으로 누워 있기만 했다. 권강철은 그의 위에서 내려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해냈습니다 회원님! 해냈어요! 이제 회원님은 3대 450입니다!”

3대 중량 같은 거 신경 쓰지 말라던 권강철. 그가 누구보다 기뻐하고 있다.

“이야, 성필이 해냈나! 장하다 마!”

“축하한다 성필아! PT 남은 시간 때려치우고 술이나 마시러 가자!”

“3대 450! 3대 450! 3대 450!”

“어이 어이 꽤 하잖냐!”

“엄마 저는 커서 박성필이 될래요! 엄마 저는 커서 박성필이 될래요! 엄마 저는 커서 박성필이 될래요!”

성필을 응원하려고 모여들었던 구경꾼들, 헬스장 동료들이 성필의 업적을 찬양했다.

그것을 들으며 성필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해냈다.

해낸 거다.

리카 3명을 가슴만으로 들어 올렸어…….

“회원님!”

권강철이 일어나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의 눈가엔 감동의 눈물이 맺혀 있었다.

자신의 회원이 벽을 깼다.

그의 경험으로는, 이제 성필은 상위 1%에 이를 피지컬을 손에 넣었다. 아니, 상위 1%가 뭔가. 0.1%도 된다!

“축하드립니다! 저 트레이너 권강철, 감격스럽습니다! 회원님 체격에 140kg이면 완전 숙련자 수준입니다! 여기서 20kg만 더 들면 엘리트 선수고요! 더 노력합시다! 그리고 피트니스 대회를 제패하는 겁니다! 오늘부터 완전히 선수 식단과 프로그램으로……!”

“트레이너님…….”

“아, 예! 말씀하십시오!”

“저 어깨 나간 거 같아요…….”

“……예?”

삐뽀삐뽀.

피트니스 센터 건물 1층으로 구급차가 왔다. 성필은 들것에 실려 구급차로 들어갔다.

권강철은 구급 대원을 한 명 붙잡았다. 대원은 웬 우락부락한 남자가 자신을 붙잡자 거의 기겁하면서 떨쳐내려고 했으나, 할 수 없었다.

“통증의학과로 부탁드립니다.”

“……네?”

“통증의학과요, 통증의학과.”

“아, 예…….”

본인이 의사도 아닐 텐데 멋대로 분과까지 정해버리는 권강철.

대원은 그를 보면서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라고 생각했지만, 권강철의 진단은 정확했다.

응급실 당직 의사는 성필을 보고 말했다.

“이거 통증의 쌤 출근할 때까지 기다려야겠어요. 시급한 건 아니고, 진통제 드릴 테니까 내일 아침까지 참으셔야 할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괜찮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별로 아프진 않아서…….”

밤의 응급실.

성필은 왼쪽 어깨를 부여잡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곧 새벽이 찾아왔다. 그는 눈을 감았다.

감은 그의 눈가로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사장님한테 뭐라고 말하냐…….’

아라의 프로듀싱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날, 벤치 프레스를 들다가 다쳐버렸다…….

* * *

“그렇게 된 거야.”

성필은 병실로 아름답게 비춰오는 햇볕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와이셔츠 단추를 세심하게 잠근 후 재킷을 들었다.

“사장님한테 혼났어. 컨디션을 관리하는 것도 업무의 일환인데, 중요한 프로젝트 시작일에 다치다니. 할 말이 없더라고. 마음 같아선 오늘도 출근하고 싶었는데, 의사 선생님 출근 시각을 기다려야 했기도 하고…….”

성필은 재킷에 오른팔을 넣고 왼팔을 다음으로 넣으려 했다. 어깨가 비틀리자 알싸한 통증이 몰려와 인상을 찌푸렸다.

조아라가 뒤에서 그의 재킷을 잡고 팔이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아, 고마워. 아무튼, 지금이라도 출근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사장님이 회사에 얼굴 보이면 죽인다고 하셔서. 죽을 순 없으니까 뭐…….”

정장을 차려 입은 성필은 그제야 조아라와 정지음에게로 몸을 돌렸다.

“응, 뭐, 사장님이 오늘 최소한 오늘 하루만큼은 쉬라고 하셔서 쉬어야…….”

“아이고 이 화상아!”

조아라가 성필의 어깨를 찰싹찰싹 때렸다.

“아! 아악! 아라야 아파! 아파!”

“엄살 부리지 마요! 여기 다친 어깨 아니잖아요!”

“다친 쪽 아니라도 맞으면 아프잖아!”

“걱정해서 손해 봤네 진짜! 뭔 씨 운동을 하다 다치고 그러는데요! 건강하려고 운동하는 거 아녜요?! 근데 왜 다치고 지랄이냐고요!”

“벼, 벽을 넘으려면 부상을 감수해야…….”

“아이고 나 죽어…… 나 죽는다고오오!”

조아라는 계속 성필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그러다가 힘이 점점 약해졌다.

이윽고 두드리는 건지 때리는 건지 구분할 수 없어질 즈음, 조아라는 고개를 숙였다.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고.

“에이 씨 진짜…….”

조아라는 다급한 걸음으로 침대맡 선반으로 다가가 티슈를 집었다. 그녀가 티슈로 눈가를 톡톡 두드리곤 고개를 들었다.

성필은 희미하게 붉어진 그녀의 눈가를 보자 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그,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결근은 아닌 거 같아. 오늘은 아라가 곡을 선정하는 역사적인 날이잖아? 총괄 프로듀서가 있어야지, 응.”

“아프잖아요.”

“안 아파. 주사 세 방 맞으니까 아유, 그냥 날아갈 거 같은데?”

성필이 왼쪽 어깨를 과장되게 돌렸다.

“평상시처럼 일해도 문제 없…….”

“주사를 세 방이나 맞으니까 안 아프지! 세상에 난 주사 세 방 한 번에 맞는 인간 있단 거 들어본 적도 없어요!”

“…….”

“아니, 안 아픈 건 맞아요? 아까 재킷 입을 때 죽으려고 하더만!”

“죽을 거까지는…….”

“사장님 말대로 숨지기 싫으면 집에 가서 곱게 쉬어요! 알겠어요?!”

“어, 응, 알겠어…….”

“형, 걱정 마요. 제가 아라랑 잘해볼게요.”

“할 수 있겠어?”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조아라는 백설하와 달리 음악적 지식이 빈약해서,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안 왔으니.

정지음은 성필은 안심시키려 미소를 만들었다.

“저 뮤직 프로듀서예요. 총괄 디렉팅 같은 거 없어도 제가 알아서 다 잘해요. 형은 쉬기나 해요.”

“아저씨 병 수발들 사람은 있어요?”

“없는 거 알고 물어보는 거지?”

“아픈데 혼자인 게 제일 서럽잖아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지음 오빠한테 들었어요.”

정지음이 마음의 눈물을 또르르 흘렸다.

“보니까 밥도 못 차려 먹겠는데, 걍 오늘 나랑 지음 오빠가 아저씨 집에 있을게요.”

“어?”

“내가?”

“진짜 아저씨 수발 들어주겠단 거 아니거든요? 작업하자는 거예요 작업. 오빠 노트북 챙겨왔어요?”

“어, 챙겨왔지. 내 영혼의 단짝이니까.”

“그럼 됐네. 우리 숙소에서 전자 드럼 가지고 아저씨 집으로 가요.”

“아니 아니 잠깐. 뭐 그렇게 당연하게 내 집에 온단 얘기를 하고 있어? 누가 들여보내 준대?”

“뭐요.”

조아라가 성필을 노려보았다.

성필은 그녀의 눈빛보다 눈가에 주목했다. 아직도 눈물 때문에 희미한 붉은빛이 눈 주위에 남아 있었다.

마음이 무겁다.

“아님 사장님한테 죽는지 안 죽는지 시험해볼 겸 회사 갈래요? 내가 걍 아저씨 집에 쳐들어가는 거예요? 아저씨 아프다니까 도와주려고 그러지. 집안일 며칠 동안 못할 거잖아요.”

“…….”

성필은 숨을 길게 내뿜었다.

“그래, 오늘은 프로젝트의 시작점이야. 나도 이렇게 어이없이 날려 보내고 싶진 않아. 실은 우리한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 곡 선정, 혹은 작곡을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게 최우선 과제이니. 하루라도 허투루 쓸 순 없어. 아라 네 의지가 확고하다면, 받아들일게. 대신 조건이 있어.”

“팍 씨! 아저씨 때문에 이렇게 됐구만 뭘 폼 잡고 있어요? 조건? 뭔데요.”

“……30분만, 집을 정리할 시간을 줄래?”

“아 뭔 자취하는 대학생이야 뭐야. 시간 없으니 기…….”

“아라야.”

정지음이 만류하듯 조아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30분 정도는 드릴 수 있잖아.”

“……뭔데. 둘이 통하는 뭐가 있어요?”

그렇게, 곡 제작 폐관 수련 1일 차는 성필의 집에서 이뤄지게 됐다.

* * *

“아라쨩 아타시(나) 왔어!”

리카가 정지음의 작업실로 들이닥쳤다.

아무도 없었다.

“흥! 폐관 수련이라더니 쉽게도 자리를 비우네요! 누구는 일본 스케줄 끝내자마자 급하게 왔는데! 협력 프로듀서를 대하는 자세가 아니에요!”

리카는 투덜대면서 정지음의 소파에 풀썩 앉았다. 그리고 짐짓 삐친 티를 내면서 ‘흥! 흥!’ 고개를 이리저리 저었다.

그러고도 작업실은 조용했다.

정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리카는 소파에 깊이 몸을 묻었다. 그녀의 얼굴에 느슨한 행복이 나타났다.

‘헤헤, 폐관 수련이라니 MT 같아!’

다른 비유를 들자면 친구와의 파자마 파티나 캠핑이 있을 수 있겠다.

이 좁은 공간에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계속 음악을 하고, 밥을 먹고, 대화도 하고, 보드게임도 하고(리카의 희망 사항).

분명 재밌을 것이다.

30분 후.

‘점심시간은 지났는데?’

리카는 꿍하니 핸드폰을 확인했다.

조아라에게 연락하려던 순간, 그녀는 급히 폰을 테이블 위에 뒤집어두었다.

‘폐관 수련이란 거창한 이름을 내걸고서 작업실을 떠나? 아티스트십 위반이야! 아티스트의 영혼을 모욕한 아라쨩한테 화낼 거야! 박 이사님이랑 지음 오빠한테도!’

가로 엔터의 기둥이자 대들보이자 복덩이인 리카, 자신을 기다리게 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리카는 세 사람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세 사람이 화난 척하는 자신을 달래주는 광경을 상상하면서 행복하게 시간을 보냈다.

1시간 후.

“……늦네에, 다들.”

이러다 아타시(저), 할머니가 되어버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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