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2화
“아름답다니…….”
조아라는 성필의 남부끄러운 말을 오래도 들어 왔다.
하지만 이토록 적나라한 표현을 들은 적은 처음이다. 정확하게는, 적나라한 건 표현이 아니라 성필의 칭찬이 향하는 대상이었다.
조아라의 몸 말이다.
“아저씨 그거 성희롱이에요.”
“네가 나한테 ‘오, 가슴’이라고 하는 거보단 덜 희롱적이잖아.”
“남이 살인했다고 나도 살인해도 된단 건 말 안 되는 거 알죠? 상대한테 윤리를 강요하는 첫 번째 조건은 자기가 그 윤리를 지키는 거예요.”
“오, 아라 똑똑한데?”
“또 그렇게…….”
조아라가 고민 넘치게 ‘으응……’ 소리를 내면서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성필은 바로 잘못을 깨닫고 사과했다.
“미안, 애처럼 대해서.”
“그거 때문이 아니라…… 에휴.”
성필이 아름답다고 칭찬하더라도 조아라에게 용기가 생길 리 만무했다. 조아라가 평가받는 대상은 성필이 아니라 민시화였으니까.
게다가 성필은 직업 자체가 평가하는 사람이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아름답다’나 ‘굉장하다’는, 그야 진심이 담겨 있겠지만, 꽤나 입에 발린 말이다.
“아저씨는 우리 후임 걸그룹 애들한테도 막 그럴 거죠?”
“뭐어…… 필요하면 하겠지.”
“그렇게 희귀성 없는 말로 내가 기운이 나겠어요? 하다못해 한의사님이 했으면 놀라기라도 했겠다.”
“내 칭찬으론 부족한 거야……?”
“쓰읍, 귀여운 척하지 마요.”
“내가 귀여워……?”
“말꼬리 끌지 말라고요.”
조아라는 사칙연산을 이해하지 못하는 초등학생을 가르치듯 손가락을 하나씩 펴 가면서 설명했다.
“내가 쌤쌤한테 검사받으려는 춤은요, 신체를 되게 많이 타요. 개성이 들어갈 틈이 없어요.”
정해진 테크닉을 완벽하게 해내는 게 지상 조건이다. 조아라가 어설프게 개성을 살려봤자, 민시화의 눈에 곱게 보일 리 없다.
개성이란 것도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이가 발산해야 가치가 있는 법이다.
“그치만 아라야, 네가 전문 무용수가 되려는 것도 아니잖아. 표현법을 배우러 가는 거 아니야? 배우들도 표현력을 올리려고 무용을 배우기도 해. 네가 너무 무겁게 생각하는 거 아닐까?”
“나랑 같이 쌤쌤 보고서도 그렇게 말하기예요?”
“뭐…… 쌤쌤은 아니, 민시화 선생님은 확실히 무섭긴 하지만.”
“시작부터 탈락자가 정해져 있는 분야라고요.”
어깨가 좁은 수영선수 지망생이 학생부에서 꿈을 접듯. 키가 작은 농구선수 지망생이 팀에서 자연스럽게 배제되듯.
무용 또한 재능이란 발판이 있어야만 겨우 출발선에 설 수 있는 분야이다.
“그런 거에…….”
자신의 부족함과 추함만 계속 확인하는 일 따위, 재밌을 리 없다.
“아저씨도 연습생 오디션에 얼굴 평범한 애 오면 바로 탈락시킬 거잖아요. 괜한 희망 안 주기 위해서라도 직설적으로 말해야죠. 쌤쌤이 준 시험은, 사실상 직설적으로 ‘하지 마’라고 하는 거랑 같아요.”
조아라는 길고 긴 변명을 마쳤다.
“그래서 안 갈 거예요.”
“아라야, 니진스키 알아? 바슬라프 니진스키.”
“……아뇨. 누군데요?”
“무용의 신이라고 불렸던 발레리노야. 그 사람은 키가 163cm였어.”
조아라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발레리노가요? 나랑 똑같네?”
“응. 다리는 짧고 굵고, 얼굴도 별 볼 일 없었어. 그런데도 무용의 신이라고 불리게 된 거야. 발레의 맹주국인 러시아에서 말야.”
신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것도 조아라의 마음을 움직이기엔 부족했다.
조아라는 아까 놀란 게 거짓말이었단 것처럼 흥미 없단 투로 말했다.
“어느 분야든 그런 사람 한 명씩 꼭 있잖아요. 재능 없어도 노력만 하면 된다, 그렇게 애매한 희망 주는 인간들. 애초에 엄청 희귀한 경우고.”
“그렇지. 그럴 수 있지. 그런데, 니진스키도 너처럼 생각해서 발레를 시작 안 했으면 어땠을까. 인류는 무용의 신을 잃었을 거야. 인류가 만든 문화의 가지가 더 얇아졌겠지.”
이야기가 거기까지 이르자 조아라는 헛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 나를 무용의 신이랑 비교하는 거예요?”
“꼭 그렇단 건 아니고. 아라 너한테 가능성이 있단 걸 말해주고 싶은 거야.”
“뭐요. 무용의 신의 가능성?”
“안무가.”
“안무가?”
“응. 아라는 춤(Dance)에 재능이 있지만, 안무(Dance―making)에도 재능이 있어.”
“근데 난 안무 작품 만들어본 적 없는데요. 해본 적도 없는 분야인데, 재능이 있는지 아저씨가 어떻게 알아요?”
“‘롱 포’ 때 해봤잖아.”
“겨우 15초…….”
“겨우 15초더라도, 네가 만든 안무였어. 안무가로서 최대한 많은 춤을 경험해봤으면 해.”
그러고 보니, 옛날에도 성필은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만약 조아라가 댄스 씬에서 계속 활동했으면, 후일 유명한 팝스타들에게마저 안무를 주는 안무가가 되었을 거라고 했던가.
“아저씨도 진짜 거짓말 잘하네요.”
“……거짓말?”
“근데, 일관성 있는 거짓말쟁이라서 마음에 들어요. 때 따라 시기 따라 말 바꾸는 사람은 아니야.”
“당연하지, 진심이니까.”
“아 됐어요.”
조아라가 털털하게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만…….”
“네가 아름답단 것도 진심이고.”
“……진짜.”
같은 말이라도 타이밍에 따라서 어감이 전혀 다르구나.
“더 하다간 사랑한단 말도 나오겠네. 그만해요.”
“아라야, 너 미국에서 컨템퍼러리 댄스 배워서 알겠지만 춤의 혁명은 인체의 획일성을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
“그만하라고 했잖아요.”
“그럼 민시화 선생님한테 갈 거야?”
“일단 나가요.”
“뭐? 우리 회의하고 있는데 내가 어딜 나…….”
나갔다.
가로 엔터 이사이자 총괄 프로듀서 박성필을 쫓아낸 조아라는 홀로 의자에 기대어 생각을 가다듬었다.
조아라는 민시화를 보는 게 두렵다.
아니, 그녀를 보는 게 두려운 건 아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는 게 두렵다. 콤플렉스로 여기던 몸매가 부각된 무용복을 입고, 그 콤플렉스를 극대화할 춤을 추는 자신을 보는 게.
두렵다.
‘이건 꼭…….’
조아라의 마음은 방어기제를 발동시켰다.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굳히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불러온 것이다.
학교 음악 시간이었다.
수행평가로 가창을 하게 됐다.
노래 부르기.
조아라가 가장 자신 없는 것이었다. 그때의 조아라는 어땠는가?
‘대충 했지.’
나는 노래를 못 부르는 게 아니야.
어차피 내신에 안 들어가니까 대충할 뿐이야.
조아라는 창피함을 감추기 위해 그리 생각했고, 그리 행동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러했으니.
이것도 같다.
‘못할 걸 뻔히 아는데 진지하게 해봤자 비웃음만 살 뿐이야.’
18살의 조아라였다면, 연습생 시절을 거치지 않았던 조아라였다면, 아이돌이 아닌 조아라였다면.
여기서 도망쳤다.
하지만 현재의 조아라는 일어났다.
‘일단 확신을 얻자.’
부끄러움을 없애자.
이 상태로 민시화 앞에 서면 창피함 때문에 연습한 실력의 반도 안 나올 거다.
매를 미리 맞는다 치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자. 다른 사람…….
‘누구로 하지.’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결심한 그녀는 방을 나서려 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손혜빈이 들어왔다.
“언니?”
조아라가 놀라자 손혜빈이 그의 어깨를 붙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아라야.”
“네, 네?”
“너 내가 왜 은퇴했는지 알아?”
“아…… 돈 벌 만큼 벌어, 서?”
“늙어서야. 나이가 들어서 은퇴했다고. 객관적으로 나이가 든 건 아닌데, 주변에 어린애들이 있어서 비교되기 싫었어.”
“네……?”
좁은 개울의 흐름처럼 빠르기 그지없는 고백의 폭포. 조아라는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네?’란 말만 반복했다.
“그렇잖아. 나이 들어서도 제자리를 지키기 힘든 업계잖아. 점점 떨어지는 성적을 직시할 바에야 깔끔하게 물러나자고 생각했어.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알아?”
“……아, 아뇨?”
“존나 후회돼! 그냥 계속할 걸 계속 후회된다고! 난 춤을 추고 싶었는데! 춤추고 노래하고 싶을 뿐이었는데, 그깟 주변 시선 신경 써서 걍 은퇴해버렸다고! 아니, 그것보다 더 후회되는 건 젊었을 때 이거저거 다 안 해본 거야!”
손혜빈의 눈동자엔 불꽃이 있었다.
그 불꽃은 조아라란 재료로 타올랐다.
손혜빈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조아라에게 투사했다. 그녀가 자신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길 바라 필사적으로 설득했다.
그제야 조아라도 상황을 파악했다.
성필이 손혜빈에게 이른 것이다.
“너도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다 해! 그깟 비웃음 좀 받으면 어때? 너도 20대 후반 돼서 이렇게 생각할걸? ‘아, 인생이란 이렇게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거였구나’라고! 나이 들어서 무용복 입으면 더 쪽팔려! 지금 익숙해져야 해! 지금 입어! 조금이라도 피부가 맑고 곱고 탄력 있을 때 뭐든 해봐!”
“어…… 알았어요.”
“어, 진짜?”
“네.”
손혜빈은 얼떨떨하게 조아라의 어깨를 놓았다.
“진짜?”
“네.”
“나 자기 계발 강사나 할까?”
“대신이라긴 뭐한데, 내 춤 봐줄래요?”
“어? 뭐, 어, 좋지?”
조아라는 손혜빈을 지나쳐 문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문 옆에 웅크리고 있는 성필을 보았다.
“아저씨도요.”
“어? 뭘?”
“못 들은 척하지 마요.”
“그래.”
“운 좋은 줄 알아요.”
“그치. 운이 좋지. 누구보다 먼저 아라의 춤을 보는데.”
“그거 말고. 아저씨가 아름답다고 하는 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춤을 보게 될 거니까요.”
성필은 삐질삐질 땀을 흘리면서 조아라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손혜빈이 보였다.
“누나, 알겠지만 아라가…….”
“내가 너 하루 이틀 보니. 알아.”
“고마워…….”
* * *
연습실.
조아라는 무대에 섰다.
관객이 성필, 손혜빈 두 명뿐인 무대였다.
피부처럼 달라붙은 무용복을 입은 그녀는 오디션을 보듯 정갈한 자세로 두 사람의 앞으로 걸어와 섰다.
연습실은 모든 면이 거울이다.
그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안 창피해.’
타인에게 이 모습을 보이면 창피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혼자 보아도 창피한 모습을 타인에게 보일 때 창피하지 않을 리 없으니까.
그러나 조아라는 스스로 놀랄 정도로 평온했다.
“그럼…….”
조아라는 심사위원을 보듯 두 사람을 응시했다.
둘은 조아라의 기운을 북돋으려 박수를 치거나 환호를 보내지 않았다. 그녀가 스트리트 댄스 테크닉을 선보일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그들은 조아라가 받을 중압감을 이해했기에 일부러 무표정을 유지했다. 아예 없는 사람인 듯 존재감을 발산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 선택은 옳았다.
조아라는 그들의 박수나 환호에 답하려 집중을 깨지 않아도 됐으니까.
“시작하겠습니다.”
음악이 흘러나왔다.
약 2분간 이어질 무용의 시작이었다.
조아라는 먼저 발끝을 세운 후 팔을 옆으로 뻗었다. 테크닉의 첫 동작이었다. 인간의 신체를 완전히 정면으로 전시하는 동작.
‘이건 춤, 그리고 테크닉.’
단순히 동작의 나열이 아니다.
손혜빈이 조아라에게 알려준 건 일종의 작품이었다. 확립된 하나하나의 동작을 순서대로 연결하여, 음악에 맞춰 춤으로 만들어낸 것.
시퀀스 무용이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시퀀스 무용은 클래식 발레.’
클래식 발레엔 창작 안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일부 있을 수 있겠지만, 이미 존재하는 동작들의 배열만 바꾸어 작품에 가져다 붙인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발레 댄서들은 발레 테크닉만 전부 터득하면 이후로는 작품에 등장하는 동작의 순서만 외우면 된다.
그랑 주테, 피루엣, 아라베스크…….
손혜빈이 만든 테크닉 안무도 이러한 것이었다.
‘이미 존재하는 동작들을 적절하게 배열해서 음악에 가져다 붙인 거.’
동작 자체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라베스크는 단순히 한 발을 들고 팔을 곡선으로 뻗어 올리는 동작일 뿐이다. 하지만 아라베스크가 ‘백조의 호수’에 등장한다면, 백조의 아름다운 날갯짓이 될 수 있다.
시퀀스 무용에서 춤의 의미를 결정하는 건 음악이다.
그리고 손혜빈이 선정한 음악은, 조아라가 생각하기에 명백히 의미가 있다.
주제는 사랑이다.
조아라의 동작은 구애(求愛)처럼 구성되어 있다.
‘애플 크러쉬 덕분에 표현하기 쉬울 거라고 생각한 건가.’
사실, 조아라는 이 춤을 연습하는 동안. 아니, 이 춤을 펼치는 현재에도 춤의 의미 따위는 생각하지 않아 왔다.
의미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춤에 대입할 여지가 없으니까. 개성을 넣어선 안 된다. 테크닉은 그저 완벽한 형태로 숙달하면 그만이니.
그런데.
‘만약 이 음악의 의미가 사랑이라면.’
조아라는 무의식적으로 춤의 곡선을 살려보았다. 그러자 표현 못 할 만족감이 찾아왔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댄서로서 고유감각이 극도로 발달했다. 눈을 감고 귀를 막더라도, 자신의 몸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느 위치에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만족스럽다, 라…….
‘테크닉을…….’
개성을 집어넣는답시고 정확한 자세를 어겼는데도 뭐가 좋다고 만족스러워하고 있지?
자기만족일 뿐인데.
어겨선 안 될 명확한 형태가 존재하는 춤이다.
완성도와 미의 기준도 명백하다.
평가 기준으로 보자면 감정 요인만 가득했던 동작인데 왜.
‘이럴 거면 난 왜 이걸 연습하면서, 거울을 보면서 괴로워했던 거지?’
차이점이 있다.
관객의 유무다.
자신이 세상에 다시 없을 무대 체질이라, 봐주는 사람이 있단 것만으로 신나는 건가?
아니다.
스트리트 댄스는 혼자 춰도 즐거웠다.
차이점은 있다.
단순히 관객의 유무가 아니라…….
‘아.’
그 순간 조아라는 깨달았다.
‘나, 시험 통과하겠다.’
아무런 인과적 맥락 없이 그런 확신이 들었다.
‘아라 씨, 에피파니를 아십니까?’
한구인의 강의에서 배웠던 단어다.
에피파니(Epiphany).
존재 본질의 현현. 신성의 실체화.
직관적으로 표현하자면, 갑작스러운 깨달음이다. 신비하기까지 한 경험.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을 생각해낸 뉴턴이 대표적인 예라고, 한구인이 말했었다.
‘더 일상적인 예를 들자면 일본의 소설가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화가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야구 경기를 보던 중 1번 타자가 깔끔한 2루 안타를 치자 에피파니를 경험했다고 한다.
‘나는 소설을 쓸 수 있어.’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정말 소설을 썼다.
간단한 맥락조차 존재하지 않는 신비스러운 깨달음이 조아라에게도, 바로 이 순간 찾아온 것이다.
‘나는 시험에 통과해.’
이 자유로운 움직임이 그 증거이다.
조아라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벽의 끝까지 스텝을 밟았다. 그녀의 둔중해 보이는 하체에 어울리지 않는, 무게란 게 존재하지 않는 듯한 걸음이다.
그녀의 다리 한 줄기 한 줄기에 새겨진 강철의 실이, 그녀의 다리를 위에서 끌어올리듯 들어내고 있었다.
에피파니는 그녀의 통찰력에 박차를 가했다.
‘안 창피해.’
오히려 자신감이 넘친다.
‘창피하긴커녕 계속 보여주고 싶어.’
이 춤을.
‘거의 영원히 출 수 있을 거 같아.’
관객, 성필이 있어서다.
그의 시선 덕분에 확신이 선다.
이런 비유는 적절하지 않다고 느끼면서도, 조아라는 성필의 시선을 이렇게 해석했다.
‘애인을 보는 눈 같잖아.’
대부분의 사람은 어지간히 몸매에 자신이 있지 않은 이상, 불특정 다수에게 몸매를 드러내길 꺼릴 것이다.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고서야, 미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거울로 계속 볼 수밖에 없으니까.
댄서인 조아라는 더하다.
누구보다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다.
그러나 타인의 시선이, 그 눈빛이 애인의 것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은.’
보통 사람의 눈과 다르니까.
애인에게 맨몸을 드러내길 두려워하는 인간은 없다. 그가,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리란 사실을 의심하지 않으니까.
사랑은 모든 결점을 가리고 장점만을 보이게 하니까. 그렇기에 어떤 부끄러움도 없이 당당하게 나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알지, 알아.’
성필의 눈이 진실된 사랑에서 비롯된 게 아니란 사실은 안다.
그렇지만 조아라의 경험이 그 시선을 사랑으로 해석하게 했다. 성필이 멤버들에게, 조아라에게 쏟는 관심과 열정은 사랑과 크게 다르지 않을 만큼 거대했으니.
‘그렇구나.’
성필의 앞이라서, 당연히 그가 자신을 아름답게 보아줄 테니까, 설령 무슨 짓을 하더라도 자신은 영원토록 아름다울 테니까.
‘내가 이렇게 될 수 있는 거구나.’
조아라는 춤을 추었다.
그녀는 팝스타들이 어떻게 무대 위에서 그토록 자신감이 넘치는지 알아냈다. 아이돌과 다르게 강압적인 회사를 통해 끊임없는 평가와 감시, 지적과 훈련을 거치지 않으니까.
그들은 자신이 왜 사랑받을 수 있는지 안다.
자신이 왜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지 안다.
왜 사랑받는지 안다.
‘이런 마음으로 무대에 올랐던 거였어.’
최후의 동작.
손으로 땅을 짚지 않는 옆돌기.
조아라는 하늘을 날아 가뿐히 바닥으로 착지했다. 바닥에 발을 디딘 조아라는 나무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서 있듯이 자그마한 흔들림도 없었다.
이윽고 그녀가 고아하게 팔을 뻗어 곡선을 그렸다.
“아저씨.”
조아라가 물었다.
“어땠어요?”
성필은 조아라가 바라는 답을, 진심에서 우러나온 답을 꺼내었다.
“아름다워.”
“또 사랑에 빠졌어요?”
“몇 번이고.”
몇 번이라도.
* * *
민시화는 조아라의 춤 시연이 끝나자 나직하게 물었다.
“내가 뭐라고 할 거 같니?”
“몰라요. 떨어뜨리려면 떨어뜨리던가요.”
성필은 조마조마하면서 민시화의 답을 기다렸다. 방금 조아라의 발언은 무례하기까지 했으니, 민시화가 좋게 봐줄 리 만무했다.
조아라 나름 민시화에게 무시당했던 복수를 할 거라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이럴 거면 왜 애먼 사람 붙잡고 2시간 동안 무용복 쇼핑을 한 거야…….
“그게 하고 싶은 사람 태도니?”
“되면 하고 아니면 말고, 그런 사람 태도죠.”
민시화가 하 웃었다.
“그럼 해.”
“……네?”
“안 하려고?”
“아니, 네?”
“하고 싶다면서. 그럼 해야지.”
“뭐, 평가나 그런 거 없어요? 아님 내가 기준에 맞았던 거예요?”
“평가 기준을 당당하게 공개하는 학교는 없지. 괜히 트러블 생기니까.”
“…….”
민시화는 똥 씹은 표정의 조아라를 재밌단 듯이 바라보았다.
‘내가 널 가르쳐주는 조건은 그냥 여기 다시 찾아오는 거였어.’
과제를 받고 직접 수행해보면 조아라 나름 판단이 설 거라고 생각했다.
직접 과제를 해본 조아라는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이런 종류의 무용에 적합한 몸이 아니란 것을 말이다.
‘보통은 지레짐작 포기하겠지.’
보통이 아닌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 하나라도 건지기 위해 수업받을 것이다.
대단한 용기라고 봐야 한다.
조아라는 춤에 문외한인 일반인이 아니라, 오랫동안 춤을 배워온 댄서였으니까.
댄서의 안목을 가지고도 한계를 극복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엄청난 용기를 지녔거나.
‘그냥 자아도취에 빠진 바보거나 둘 중 하나지.’
대충 춤을 연습했다면 바보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겠지만.
‘연습한 걸 보니 아주 죽어라고 한 모양이네.’
욕심이 난다.
물론, 아이돌로서의 그녀가 아니다.
아이돌을 관두고서 그녀가 어떤 댄서가 될지 궁금하다. 댄서가 아니라 코리오그래퍼(안무가)의 길을 택할 수도 있겠지.
나이를 생각하면 안무가 쪽이 더 현실성 있다.
이 나이 먹고 댄서로 뛰는 자신이 할 생각은 아니긴 하지만.
“어떡할래?”
조아라는 성필을 흘끗 보았다. 성필은 그녀 스스로 결정하란 듯 가만히 있었다.
이윽고 조아라가 본인의 가방으로 다가가 카드를 꺼냈다.
“개인 교습 10회요.”
“할부는 몇 개월로 해줄까?”
“일시불요.”
“오, 부자네. 아이돌은 역시 돈을 잘 버는 편이지?”
“아이돌이 돈을 잘 버는 게 아니라, 나니까 돈을 잘 버는 거예요.”
더 마음에 드네.
민시화가 카드를 긁곤 이제껏 보여준 적 없던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회원님.”
“걍 반말해요.”
“알겠어, 잘 부탁할게 조아라.”
“뭐 배워요?”
“안무.”
“무슨 작품요?”
“작품?”
“네?”
“안무 못 해?”
조아라는 당황해서 혀가 꼬였다. 민시화는 그녀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말했다.
“안무(Dance―making) 많이 땄다면서. 그럼 당연히 할 수도 있어야지.”
“아니, 그게…….”
“일단은.”
민시화는 구석에 놓인 아담한 쓰레기통을 보았다. 그곳에 씐 비닐봉지를 보곤 간단히 말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비닐봉지를 표현해볼까.”
“아, 아니, 잠깐만요. 나는 뭐, 안무 제작을 배우려는 게 아니거든요? 기량에 도움이 될 테크닉을 배우려는 거지 안무 제작은…….”
“안무(按舞)는, 단어 자체에 ‘만들다’란 뜻이 있어. ‘안무 제작’은 틀린 표현이야.”
조아라는 자신이 ‘백댄서’가 아니라 ‘보조 댄서’나 ‘백업 댄서’란 단어를 타인에게 강요할 때, 타인이 어떻게 느끼는지 깨달았다.
아니, 일상적으로 안무는 춤이랑 동의어잖아.
같은 의미로 쓰면 어때서…….
“근데 나는…….”
“춤은 언어야. 동의해?”
“……동의해요.”
“네 상태가 어떤지 알아? 단어만 많이 아는 상태야. 문장을 쓸 줄 알아야지. 너만의 어법을 가져야 해. 네 세계에서 춤을 잘 춘다는 건 남이 만든 걸 얼마나 잘 베끼느냐지?”
“베끼는 게 아니라 해석…….”
“너만의 어법으로 해석, 그렇지?”
조아라는 민시화와 대화하길 포기했다.
세상에, 제자가 바라는 걸 가르쳐주지 않는 선생은 처음 본다.
그녀의 강의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네, 해볼게요.”
재밌겠다.
민시화가 더 마음에 든다.
“‘해볼게요’가 아니라 ‘하겠습니다’가 맞지 않을까?”
마음에 살짝 안 들지도 모르고.
조아라는 동족 혐오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 * *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 2.
올해 말쯤 컴백하려면 최대한 빨리 컴백 타이틀곡을 선정해야 한다.
그걸 위해 조아라는 오늘, 즉 월요일부터 며칠간 정지음의 작업실에서 폐관 수련을 할 속셈이다.
성필과 함께.
아침 9시.
조아라는 정지음의 작업실 소파를 점거한 채 성필을 기다렸다. 정지음은 곤란한 얼굴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빠 왜요. 차 대출받아서 샀더니 금리 인상으로 이자가 올랐어요?”
“일시불로 샀거든.”
“미친, 우리보다 오빠가 더 부자 아녜요?”
“너흰 행사랑 콘서트도 돌잖아. 내가 너희보다 돈이 많으면 그건 횡령이 이뤄지고 있단 증거지.”
“암튼, 왜 그래요?”
“아니, 최근 이수연 작사가님이 이상해서.”
조아라는 소파에서 누워 있다 벌떡 일어났다.
“왜요?”
“시도 때도 없이 카톡을 보내셔. 아침부터 밤까지. 솔직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난감해. 왜 이러시냐. 심심하신 건가. 아침밥 먹었단 말을 며칠 연속으로 들으니까 대답할 말이 다 떨어졌어…….”
“오빠 좋아해서 그러는 거잖아요.”
“아 쫌 지랄 좀 하지 마라. 진짜 억지 우결충 에바야.”
“충? 충? 가로 엔터의 기둥한테 벌레라고요? 이거 그냥은 안 넘어가. 한 이사님한테 징계 건의서 올릴 거예요.”
“충성 충(忠)! 조아라 님 충성 충성!”
“근데 오빠 키로 군대를 가요? 빼주지 않나?”
“아쉽지. 한 10cm만 더 컸으면 안 갔을 텐데.”
그때 작업실 문이 열렸다.
둘 다 성필인 줄 알고 불평부터 쏟았다.
“아 성필이 형! 이사라고 지각하고 자꾸 그러면 가만 안 둡니다!”
“아저씨 제발 회사 밥 좀 그만 축……!”
한구인이었다.
“어, 한 이사님 안녕하세요.”
“한의사님 하이.”
“박 이사님은 대체 어떤 싸움을 하고 계셨던 걸까요. 저는 도저히 알 수가 없군요…….”
“한의사님이 여기 웬일이에요. 여기 아티스트 구역이라서 재무팀은 못 들어오는데.”
“박 이사님이 아프셔서 오늘 폐관 수련에 못 참여하신단 소식을 드리려 찾아왔습니다.”
“형이요?”
“예. 그럼 이만 가보…….”
조아라가 로켓처럼 뛰쳐나가 한구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깜짝 놀라 조아라를 돌아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안색이 안 좋아진 조아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저씨가 아파요? 왜요?”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2.
본격적인 시작의 순간.
총괄 프로듀서, 병가(病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