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511화 (511/760)

511화

2라운드.

멤버들은 다음 종목을 결정하기 위해 종목표를 유심히 살폈다. 그때, 이미 종목을 결정했던 장하양이 쉬고 있는 백설하에게로 다가갔다.

“언니, 고르셨어요?”

“으응, 나?”

백설하는 부상 당했다.

어떤 종목을 고르더라도 제대로 수행할 순 없다. 그래서 탈락을 선언하고 쉬려 했건만.

“나 할 수 있는 게 없지 않나, 헤헤.”

“이건 하실 수 있어요.”

[팔씨름]

“아, 맞네. 이거면 할 수 있겠다.”

“그렇죠? 이걸로 하실래요?”

“으음.”

그래, 소녀연맹 자체 예능인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

“응, 팔씨름으로 할게.”

장하양이 기뻐했다.

동생 라인은 사랑하는 언니를 구워삶는 장하양을 빤히 바라보았다.

‘얼마나 이기고 싶은 거야?’

팔씨름은 상체만 이용하는 운동이기에 백설하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장하양이 백설하를 배려해서 종목을 골라준 것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영 미심쩍다.

팔씨름도 결국은 근력 싸움이고, 장하양에게 유리할 게 명백했으니까.

조아라가 이길 수 있던 건 댄스로 단련된 동시에 타고난 하체 피지컬 덕분이었다. 팔씨름에서조차 장하양을 이길 자신은 없었다.

“언니, 제가 도와드릴게요.”

“고마워 하양아.”

장하양은 백설하를 부축해서 팔씨름 테이블 앞으로 데려왔다. 마치 이성(異姓)을 조심스레 유혹하여 집으로 데려가는 모양새였다.

종목을 고른 백설하는 첫 타자였고, 그 첫 상대는 장하양이었다.

“하양아, 이번엔 살살해줄 수 있지……?”

“당연하죠. 고의로 언니를 다치게 하고픈 마음은 조금도 없는걸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긴다.’

팔씨름엔 요령이 있다.

팔씨름에 사용되는 건 당기는 근육. 즉, 이두와 등 쪽 근육이다. 이 힘을 이용하는 게 관건이다.

‘팔씨름은 상대의 손을 옆으로 넘기는 게 능사가 아니야.’

힘의 방향을 지배하는 자가 게임을 지배한다.

시작하자마자 전력을 다해 상대의 손바닥 방향을 자신 쪽으로 바꾼다. 즉, 상대의 손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그리고 손이 조금이라도 꺾인다면, 상대는 판세를 뒤집기 위해 훨씬 더 큰 노력을 들여야 한다.

‘손을 꺾는 걸 반칙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장하양은 양상헌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팔씨름에 대해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예능이라서 그런지 룰은 엉성해.’

꼼수? 요령?

‘전부 써서라도 승리한다.’

장하양은 백설하와 손을 맞잡았다.

백설하의 따스한 손을 쥐니 마음이 살짝 약해졌다. 그러나 장하양은 금세 마음을 굳게 먹었다.

자신은 인정에 휘둘릴 만큼 약하지 않다.

“하양아.”

“네?”

“밥 잘 먹고 있는 거 맞지? 손이 차가워.”

“아…… 저는 원래 손이 차갑잖아요. 처음 뵀을 때도 그걸로 놀라셔놓고선.”

“헤헤, 그랬었나? 그냥 걱정돼서.”

어쩜 사람이 이렇게 다정할까.

장하양은 죄책감을 느끼…….

‘아니. 승부엔 인정(人情)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 남는 건 승패뿐. 미지근한 인정 때문에 승부를 망칠 바에야, 비겁하더라도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기록을 얻어내겠다.’

“하지메(시작)!”

쾅!

테이블이 부서질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들 깜짝 놀랐다.

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

장하양이 졌다. 그녀는 얼떨떨한 얼굴로 백설하를 바라보았다. 백설하도 놀랐다.

“아, 으, 어?”

보통 팔씨름이 시작되면 서로 힘을 겨루며 팽팽한 긴장이 유지되곤 한다. 아무리 힘의 차이가 나더라도 바로 넘어가진 않는다.

그런데, 백설하는 시작하자마자 장하양의 손을 말 그대로 테이블에 꽂아버렸다.

“아, 아아!”

백설하가 깨달은 듯 웃었다.

“리카가 일본어로 시작 신호를 줘서 하양이가 못 알아들었잖아. 무효네 무효. 리카, 이번엔 한국어로 말해줘.”

“에, 에, 그런 건가요……?”

백설하의 설명은 구멍투성이였다.

그러나 다들 그 말이 옳다고 여겼다.

장하양이 ‘시작 사인을 못 들었다’라고 생각하지 않고선, 이 결과를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그, 그럼.”

리카가 맞잡은 두 사람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두었다. 그리고 ‘시작!’이란 말과 함께 재빠르게 떼어냈다.

콰앙!

이번에도 장하양의 손이 테이블에 꽂혔다.

반론의 여지조차 없는 완패였다.

“……어?”

백설하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나 의외로 강한…….”

“사기야아아아아아!”

장하양이 울부짖었다.

그녀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카메라로 다가갔다. 그리고 호소하듯이 커다란 제스처를 취하면서 소리쳤다.

“사기예요 여러분! 저거 보세요!”

장하양이 백설하를 가리켰다.

“무게 추가 있잖아요!”

백설하를 가리킨 게 아니라, 테이블 위에 올라온 백설하의 가슴을 가리킨 것이었다.

“그리고 시작하자마자 손 꺾는 건 반칙이잖아요! 사기예요! 다시 해야 해요!”

그걸 보면서 양상헌과 성필이 감탄했다.

양상헌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햐앙 씨 감이 좋은데요?”

“햐앙은 누구예요.”

“아, 너무 놀라서 혀가 꼬였네요…….”

그 말대로였다.

방송 예능에 출연해도 ‘아하하’란 웃음만 들려주고, 거의 리액션 자판기 역할만 하는 장하양이다.

그런데 오늘 체력장에선 예능의 분위기를 혼자 지배하고 있다.

무엇보다, 재밌다.

“하양 씨 진짜로 억울한 사람 같아요.”

“그러니까요. 프로듀서인 저도 하양이한테 저런 면이 있을 줄 몰랐어요.”

“하양 씨는 방송보다 자체 예능에서 빛을 발하는 스타일인지도 모르겠어요. 익숙한 사람 앞에서야 예능감이 발휘되는 거죠.”

“그럴듯하네요. 연예인 선배나 동료들이 있는 곳에서 저렇게 망가지는 건 부담감이 있을 테니까요.”

망가진(성필의 표현) 장하양의 광기 어린 호소 끝에 재경기가 결정됐다.

백설하는 무게 추를 테이블 위에서 제거하고 경기에 임했다.

결과는, 백설하의 승리였다.

“…….”

장하양은 영혼이 빠져나가선 구석에 웅크려 앉았다. 그리고 무슨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난 뭘 위해서 운동한 거지? 세상은 재능인가? 마이클 샌델이 옳았어. 상속받은 재산만이 아니라 재능에도 세금을 매겨야 해…….”

다들 장하양이 예능 리액션을 펼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팔씨름 결과.

백설하 4승 0패.

장하양 3승 1패.

리카 2승 2패.

조아라 1승 3패.

신아름 0승 4패.

백설하 승점 1점.

“다음은 이걸로 해요.”

두 경기 모두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한 신아름. 그녀는 승부욕이 강했기에 독기가 바짝 올랐다.

그녀가 선택한 종목은.

[팔굽혀펴기]

신아름은 팔굽혀펴기에 자신이 있었다.

옛날부터 백설하가 시켜서 자주 하기도 했고, 자신은 몸무게가 멤버들 가운데에서 가장 가벼우니까.

‘맨몸 운동은 몸무게가 낮을수록 유리해.’

턱걸이, 스쿼트, 팔굽혀펴기 모두 그렇다.

리카가 몸무게가 높은 사람은 평소에 아령을 달고 다니는 거라고 했던가?

그렇게 따지면 신아름은 다른 멤버들보다 아령 한두 개 덜 달고 있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은 거하게 빗나갔다.

“말도 안 돼…….”

백설하는 다른 멤버들을 훌쩍 뛰어넘은 팔굽혀펴기 횟수를 달성했고, 아직도 더해가는 중이다.

그녀는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단 듯이 계속해서 팔굽혀펴기를 했다.

백설하는 60회를 채운 후, 그제야 숨을 크게 몰아쉬면서 잠시 엉덩이를 올리고 쉬었다. 더 할 기세인 터라, 양상헌이 만류했다.

“그 정도면 될 거 같습니다.”

“아, 그런가요?”

백설하가 바닥에 무릎을 대고 팔굽혀펴기를 종료했다. 그때 장하양이 외쳤다.

“사기예요! 완충재가 있어요!”

“어……?”

“가슴 닿일 때 쉬는 거잖아요!”

“그게 될 리가 없잖아?! 무거우면 무거웠지 대고 쉬는 건 뭐야!”

“스포츠 브라 차고 다시 해요!”

“하양이 너 왜 그래?!”

장하양의 이의 제기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아름은 놀라서 백설하에게 물었다.

“쌤 팔굽혀펴기 왤캐 잘해요?”

“내가 너희 트레이닝할 때 팔굽혀펴기 계속 시켰었잖아.”

그 외에도 윗몸일으키기와 스쿼트도 규칙적으로 매일 하라고 일러두었다.

보컬이란 복부를 컨트롤하는 기술이 중요하며, 그 컨트롤은 근육으로 가능하다. 스승인 이인성의 오랜 가르침이었다.

백설하는 말만 하는 트레이너가 아니었다.

본인부터가 매일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스쿼트를 해왔다.

“시키려면 나도 할 수 있어야지.”

“와.”

“헤헤, 좀 멋져 보여?”

“인정.”

백설하 승점 1점.

신아름은 시원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옆에서 시원하게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장하양이 자꾸 뭐라고 했지만, 다들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그저 장하양의 예능 스피릿에 감탄을 표할 뿐. 장하양은 오랜만의 예능 출연이라서 그런지 활기가 넘친다.

성필과 양상헌은 감동했다.

“하양아, 이제 넌 완벽해…….”

“하양 씨가 주인공인 자체 예능을 하나 만들어드려야겠습니다.”

“꼭 해주세요…….”

장하양의 빠진 퍼즐, 유머.

유머러스한 장하양은 무적이다.

이후, 리카가 고른 손 안 대고 실에 매달린 도넛 먹기. 조아라가 고른 멀리 뛰기가 진행되었다.

도넛 먹기의 승자는 장하양이었고 멀리 뛰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진정한 승자는 백설하였다. 그녀는 아이돌로서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으니.

촬영분을 확인하던 성필과 양상헌은 백설하가 나오는 장면을 보곤 난색을 표했다.

“이거 노딱(노란딱지, 아이튜브가 불건전한 콘텐츠에 부여하는 페널티, 그 영상에 한정하여 수익 창출이 막힌다) 먹진 않겠죠?”

“순수한 스포츠니까, 뭐…….”

“……멀리뛰기는 그렇다 쳐도 폴짝폴짝 뛰면서 도넛 먹는 부분은 설하 뒷모습으로 써주세요.”

“넵.”

장하양 승점 2점.

백설하 승점 2점.

조아라 승점 1점.

장하양과 백설하, 동점.

최종결전.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섰다.

“언니, 봐 드리지 않아요.”

“나도. 대충할 생각이었는데, 점점 욕심이 생겨.”

“내전근은 괜찮으세요?”

“언제까지나 놀라고만 있진 않아. 그리고, 하양이한테 지고 싶지 않아.”

“네?”

“오늘 난 너의 추악한 면모를 봐버렸어. 승리를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무게 추 지적, 쿠션 지적) 모습을. 그런 사람한테 승자란 이름을 넘겨주고 싶진 않아.”

“재밌네요. 그렇게나 절박하다면 조건을 걸어요.”

“어떤?”

“리더 자리를 주셔야겠어요.”

백설하는 물론 멤버들도 깜짝 놀랐다. 그러나 곧 백설하는 평점을 되찾았다.

“그럼, 너는?”

“메인 비주얼 자리를 드릴게요.”

“공신력 전혀 없는 자리잖아!”

“아타시(저)도 도전할래요!”

“봐요, 메인 비주얼이란 건 탐내는 자가 항상 존재하는 자리예요. 가볍다고 생각하셨나요?”

“……좋아.”

“설하야!”

성필이 놀라서 백설하를 만류했다. 그러자 백설하는 그에게 그만하란 듯 손을 들었다.

“여기서 증명하지 못하면 계속 의심 어린 시선을 받겠죠. 소녀연맹도 이제 3년 차이니, 서열에 불만을 가지는 멤버가 나오는 것도 이해해요. 벌써 잊어버린 거죠.”

백설하가 리더인 이유를.

그러니 다시금 증명하겠다.

“하양아, 기억나게 해줄게. 내가 리더가 된 이유, 절대 잊지 않도록.”

“나이가 제일 많으셔서…….”

“됐어. 가타부타 쓸모없는 얘기로 체력을 빼고 싶지 않아. 증명은 보여줌으로써 이룬다.”

“나이…….”

“됐다니까?!”

마지막 종목은 양상헌이 고른다.

언니 라인은 긴장되는 눈빛으로 그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이윽고 그가 선언했다.

“유연성 대결입니다. 여러분이 앉으시면 발꿈치에 줄자를 댈 겁니다. 손을 가장 멀리 뻗으시는 분이…….”

“체력장이랑 상관없잖아요!”

백설하가 반발했다. 그녀는 유연성에 자신이 없었으니까.

“예? 체력장 때 꼭 하는 거 아닙니…….”

“다, 다른 걸로 해주세요. 체력이랑 관계가 없는 종목이잖아요…….”

그렇게 따지면 도넛 먹기는 체력이랑 상관이 있었나? 양상헌이 고민하고 있자 장하양이 말했다.

“아뇨, 유연성은 체력과 관련이 있어요.”

“어?”

“체력(體力), 신체의 힘. 유연성은 신체 능력을 판별하는 5대 기준 중 하나예요.”

근력. 지구력. 민첩성. 균형감각. 그리고 유연성.

장하양이 백설하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괜히 학교 체력장마다 하는 게 아니죠. 언니, 아시겠어요?”

“으…….”

결국 마지막 종목은 유연성 측정이 됐다.

장하양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백설하와 같은 집에서, 같은 방에서 살아온 지 어언 4년. 그녀의 유연성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오래도록 보아 왔다.

백설하는 춤을 연습할 때도 유연성 부족 때문에 여러 번 부상을 당하기도 했었으니까. 사실상 그녀는 근육 자체가 굳어 있다.

“그럼, 시작합니다!”

이번 싸움은 자신의 승리다.

문제는.

“흐그으읏!”

장하양의 유연성도 그리 좋진 않았다.

그녀는 땀이 날 정도로 팔을 뻗어서, 겨우 손끝이 발꿈치를 20cm 벗어났다.

여자가 평균적으로 남자보다 유연성이 뛰어난 것을 생각하면 절대 좋은 결과가 아니었다.

심지어 거의 목숨을 걸고, 인대가 다치는 것을 도외시하고서 낸 결과라기엔 너무 초라했다.

“흐억, 허억…….”

“언니 거창하게 말한 거 치고는 결과가 안 좋네요.”

“어, 어쩔 수 없잖아…….”

신아름의 태클에 장하양이 부끄러워하며 답했다.

“유연성이 좋은 건 근력 운동에 오히려 방해된단 말야…….”

“그래서 일부러 안 기르신 거예요? 어쩐지 요가 할 때마다 대충하더라.”

“하양이 너 요가 대충해?! 회사가 돈 써서 강사님까지 부르는데!”

“아, 아뇨, 이사님. 대, 대충한다기보다……. 다, 다른 거에 더 집중하려고…….”

가로 엔터, 트레이닝비 예산 20만 원 삭감.

아른거리는 한구인의 방긋거림과 함께 백설하의 차례가 되었다.

백설하는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손을 최대한 앞으로 뻗었다.

“끄, 끄으…….”

장하양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의 눈금을 바라보았다. 10cm, 12cm, 15cm…….

“자, 잠깐 타임!”

백설하가 벌떡 일어났다. 그에 장하양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끝이에요 끝! 제가 이겼어요!”

“아, 아니! 스포츠 브라 차고 올게!”

“네?! 그딴 건 상관없다면서요!”

“이거랑은 상관있어!”

백설하는 더한 반론이 들어오기 전에 연습실을 뛰쳐나갔다. 5분 후 돌아온 그녀는 확연히 흉부가 줄어들어 있었다.

장하양이 씹어 뱉듯 읊조렸다.

“비겁한…….”

“마음껏 떠들어.”

리더의 자리란 그토록 무거운 것이다.

백설하는 다시 줄자 앞에 앉아 손을 뻗었다.

15cm. 17cm. 19cm…….

장하양이 손톱을 토독 토독 씹었다.

19.5cm…….

“흐윽, 흑…….”

백설하가 울먹였다. 햄스트링이 아파서 정말 눈물이 찔끔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혼신을 다하여 손을 뻗었다.

마침내.

“21cm!”

백설하는 그대로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장하양은 무릎을 털썩 꿇었다.

백설하는 고통에 눈물을 지으면서도 기뻐선 벌떡 일어났다.

“이겼어요! 제가 이겼어요!”

백설하가 주먹을 하늘 높이 뻗어 올렸다.

“리더는 나 백설하야! 영원히 변하지 않아아아아아아!”

실의에 빠져 무릎을 꿇은 장하양, 그녀를 제외한 멤버들과 스태프들이 박수를 쳐주었다.

백설하는 어벙하게 웃으면서 카메라 앞으로 달려갔다. 정확히는, 카메라 뒤에 선 양상헌과 성필에게로.

그녀가 양손을 공손히 내밀었다.

“상품, 상품 주세요!”

“네, 뭘 드릴까요?”

“어?”

그건 생각 안 해봤는데?

“가로 엔터 임원진분들에게 부탁을 하나 할 수 있습니다.”

“어, 어어…….”

“10!”

“네?!”

“9!”

“어, 그, 그러니까…….”

8, 7, 6, 5, 4, 3, 2, 1.

땡.

“아쉽지만 선물은 없습니다!”

“아, 아아…….”

백설하가 울상을 지었다.

유연성 테스트 때문에 아직 눈가에 눈물이 남아 있어 너무나 처량하게 보였다.

“새, 생각났는데, 생각났단 말이에요오…….”

“네, 그럼 기회 더 드릴게요. 선물은 어떤 걸로 하실 거예요?”

“…….”

“거짓말이셨네. 땡!”

“끄흐윽…….”

[설하 씨의 선물은 촬영이 끝나고 스태프들이 맛있게 먹었답니다~ 설하 씨! 노래도 좋지만 앞으론 유연성도 챙기면서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요가 선생님 말 잘 듣고 착하게 지내렴~]

* * *

체력장 촬영을 마치니 저녁이었다.

멤버들은 피로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갔지만, 조아라만은 회사에 남았다.

“아라야 진짜 안 피곤해? 근육통도 있다면서.”

성필은 그녀를 걱정하며 물었다. 조아라의 반응은 담백했다.

“근육통이랑 회의랑 상관없잖아요.”

성필은 대견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사과 주스를 내밀었다. 그녀는 주스를 받곤 픽 웃었다.

“아저씨, 이거 봐요.”

“응?”

“애플 크러쉬라고 적혀 있어요.”

사과즙 음료였는데, 커다란 상표 위 작게 영어로 ‘Apple cursh’라고 쓰여 있었다.

“이거 저작권 요구해야 되지 않아요?”

“사과즙에 상표가 어딨어.”

성필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일단 곡이 최우선 과제, 맞죠?”

“그렇지. 지음이 작업실 가서 곡 살펴볼래?”

“아저씨 내가 작곡하겠단 거 잊어버렸어요?”

“하게?”

“뭐, 조금은요. 왜, 록밴드들 예비용 기타 리프 한두 개씩 가지고 있다잖아요. 나도 계속 드럼 치다 보니까 괜찮겠다 싶은 리듬 생겼어요.”

조아라가 드럼 치는 모습을 흉내 내면서 입으로 소리를 내었다. 그걸 보자니 성필은 마이클 잭슨이 생각났다.

마이클 잭슨은 작곡을 했다.

다만, 악기를 다룰 줄 몰랐기에 악기 연주자들에게 입으로 소리를 내주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음을 맞춰주면서.

성필은 마이클 잭슨이 비트박스로 ‘빌리 진’을 시연하는 영상을 보곤 소름이 돋기도 했었다. 과연 그의 머릿속에 들리는 음악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싶어서.

조아라의 머릿속에도 그런 음악이 있을까.

“록밴드들 앨범 작업하면서 폐관 수련 하고 그러잖아요. 멤버들끼리 시골에 가서 일주일 동안 악기만 만지고. 저도 그거 해보게요.”

“어떻게?”

“지음 오빠 작업실에서 드럼 끼고 사는 거죠.”

“지음이는 무슨 죄야.”

“월급 받으니까 당연히 해야죠. 뭐, 아니면 리카가 도와줄 수도 있겠고요.”

리카는 작곡 프로그램을 다룰 수 있으니, 조아라와 협업하면 그럴듯한 결과물이 나올지도 몰랐다.

“것도 아니면 쌤이랑 하거나요.”

“그것도 괜찮겠네. 설하는 피아노랑 기타 둘 다 다룰 수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하양이 옛날에 작곡 배운다고 했었잖아. 차도가 좀 있나?”

“언니 그거 금방 그만뒀어요. 어렵다면서요.”

“어렵긴 하지.”

기계를 만지고 모니터만 들여다보는 게 즐거울 리 없다.

작곡은 춤, 노래와 다르게 즉각적인 실력 향상을 판가름할 수 없기에 지겹다. 지겨우니 배움이 더딜 수밖에 없다.

‘그 과정을 이겨내고 작곡을 터득한 리카가 정말 대단한 거지.’

그걸 가능하게 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부정적인 감정, 열등감이었다.

리카가 멤버들에게 가진 열등감 말이다.

이번 일본 활동에선 성필에게 부정적인 미래를 보여주었던 리카의 열등감은, 한때는 그녀의 성장을 촉진하기도 했었다.

“A&R팀이 타이틀곡 후보 골라낸 거 듣긴 했는데, 막 느낌 오는 건 없었어요. 아저씨는요?”

“난 괜찮겠다 싶은 거 몇 개 있었지. 그런데 곡만 듣고 판단하는 건 좀 그렇긴 하지. 뭣보다 우리 아라의 아이디어가 중요하니까.”

“며칠만 시간 줘요. 내가 폐관 끝에 기가 막히는 곡 들고나올게요. 아, 그거 알아요? 오아시스 ‘슈퍼소닉’ 있잖아요, 그거 노엘이 30분 만에 쓴 거.”

“알지. 그 내용 나온 다큐 내가 보여줬었잖아.”

“맞네. 뭐, 나한테도 그런 기적 없으리란 법 없잖아요?”

“설득하려고 안 해도 돼.”

“네?”

“네가 한다면 믿고 기다릴게.”

조아라가 창피함을 견디려는 듯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럼 뭐 늙어 죽을 때까지 기다리든가요.”

“맞다, 아라야. 민시화 쌤 시험은 언제 보러 가?”

“아, 그거요.”

조아라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드럼채를 한 손으로 들고 휘휘 돌렸다.

“걍 뭐, 내가 알아서 할게요.”

“나랑 같이 가는 거 아니야?”

예전엔 무섭다면서 같이 가자고 했으면서.

“나 혼자 가도 돼요. 내가 애도 아니고.”

“…….”

성필은 전생에 조아라와 오래 알고 지냈다. 그래서 그녀의 버릇도 잘 알고 있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할 때의 버릇이라거나.

제 딴엔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는 체를 하곤, 괜히 다른 짓을 한다.

“혹시.”

성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가려고?”

조아라가 채를 떨어뜨렸다. 그러곤 ‘어떻게 아냐?’는 듯 놀란 눈빛을 성필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정신을 차렸다.

“아니 뭐, 시간 맞으면 가는 거고 아님 안 가는 거죠.”

“시간은 지금도 되고, 조만간은 타이트하지 않잖아. 잠깐만 갔다 오면 되는데. 설마 연습 게을리 해서 보이기 창피한 거야?”

성필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당연히 말이 안 된다.

일본에서 리카에게 항상 ‘아라쨩을 춤에 뺏겼어요!’란 말을 듣곤 했다. 조아라는 일본 숙소에서 민시화의 과제를 꾸준히 연습했던 것이다.

그러니 연습을 게을리했단 건 말이 안 된다.

“걍…….”

조아라는 거북한 기색으로 말을 끌었다.

“프로듀싱에 집중할 때니까…….”

“아라야. 걱정되는 거 있으면 말해줘. 무서우면 내가 같이 가줄게.”

“…….”

조아라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이 이상 숨겨봤자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쉽사리 입을 열었다. 여기서 부정하면 계속 성필이 이 일을 물어볼 테니까.

“걍 안 하게요.”

“왜?”

“나한테 별로…… 딱히…… 안 어울려요.”

“안 어울려?”

조아라는 용기를 내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말을 하기 위해선 반드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처럼, 그녀가 숨을 깊이 들어마신 후 겨우 목소리를 냈다.

“나는, 그거, 몸이 별로, 그, 못 생겨서…….”

“응?”

“그런 춤이랑은, 뭐, 안 어울리는 거 같아서요.”

“……네 몸이 못생겨?”

“…….”

조아라는 용기를 쥐어 짜낸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걍, 그렇다고요.”

무슨 소리지?

“무슨 소리야?”

성필은 무의식적으로 반박했다.

조아라가 너무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못생겼다니?”

“에이 씨, 자꾸 같은 말 하게 하지 마요. 그러니까 춤이…….”

“미추(美醜)를 따지자면 당연히 미(美)잖아.”

“네?”

“아름답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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