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8화
성필이 무어라 말하려 숨을 들이쉬었다. 그보다 빨리 리카가 성필의 손을 맞잡았다.
“이사님이 저를 걱정해주시는 건 기뻐요.”
기쁘다고 말하고 있으면서도, 리카의 표정은 전혀 기뻐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눈에 성필이 한 말은 걱정보다 불신의 증표로 보일 것이다.
“저를 아끼시는 마음, 알겠어요.”
성필은 리카를 아낀다.
그렇지 않고서야 계약이 이뤄지기 직전, 가로 엔터의 평판과 본인의 위신을 전부 걸고서 자리를 박차지는 않았을 것이다.
리카를 아끼기에, 염치 불고한 행동마저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리카의 눈엔 그리 보였다.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으신가요?”
리카가 성필의 손을 더욱 꼭 쥐었다.
그건 성필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성필이 잘못한 게 있으면 어머니는 그의 손을 꼭 쥐고 ‘성필이 화났어? 왜?’라고 다정히 묻곤 했다.
그때마다 성필은 ‘안 화났어’라면서 뽀로통히 답하곤 했지만, 결국엔 울면서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더랬다.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성필은 울 수 없으며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도 없다.
성필은 리카의 온기를 느끼며 가만히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에헤헤…….”
리카는 헐겁게 웃었다. 속쓰림을 감추기 위한 웃음이었다.
‘대체…….’
대체 성필의 눈엔 자신이 얼마나 어린아이로 보면, 얼마나 믿음이 가지 않으면, 히무라에게 그런 실례를 저지르면서까지 계약을 흐지부지시키려고 했을까.
아니, 성필은 리카를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까지 본심을 숨길 순 없었다. 그의 본심이 말했던 것이다. 리카는 할 수 없으리라고.
“제가 항상 아이처럼 해맑다고, 정말 아이로 보시는 건 아니죠? 아타시(저)는.”
리카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어른이에요. 외롭고 힘들다고 울진 않아요. 외롭고 힘들어도 참을 수 있어요. 견뎌낼 수 있어요.”
세상의 여느 어른들처럼.
“저를 믿어주세요.”
리카는 성필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저는 이사님이 없다고 울지 않아요. 이사님도 제가 없다고 울지 않으실 거죠?”
“…….”
성필은 눈을 가만히 감았다. 리카의 얼굴을 보고선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다.
여기서 성필이 어떤 논리를 펼치더라도 리카의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다. 그녀의 귀에 달게 들릴 리 없다.
성필의 태도가 ‘말린다’인 이상, 그녀는 성필이 자신을 못 믿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
‘리카의 한계점이 겨울이었다면…….’
그 이후로 리카의 짐을 벗겨주도록 하자.
아마 리카는 일본에 있으면서 하나둘 남이 모를 짐을 짊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내가 노력하면, 견디면 모두가 행복하다’라는 저주를 조금씩 키워가기 시작할 테지.
가로 엔터는 성장한다.
히무라는 인정받는다.
소녀연맹은 유명해진다.
리카의 인기가 일본을 휩쓴다.
리카는 부자가 된다.
그건 리카에게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같을 것이다. 멈추면 안 된다. 모든 연예인이 지니는 강박을 리카 또한 피해 가지 못할 것이다.
‘높이 올라갈수록 위가 아니라 아래를 보게 되는 삶.’
떨어지지 않으려 자신을 더욱 강하게 채찍질한다.
행복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 정말 ‘일’일 뿐인 삶으로 다가갈지 모른다.
‘그 전에…… 그 전에 잡으면 될 거야.’
그녀가 멈출 수 없어지기 전에 성필이 붙잡으면 된다. 꼭 나중이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성필은 인생 최초의 도전에 들어서려 했다.
미래를 본 분기점이 아니라, 분기점 이후에 미래를 바꾼다는 선택지를 골라보려 한다.
전생이었다면 절대 고르지 않았을 선택지다.
왜냐하면.
‘난 리카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
석세스 엔터의 박성필이었다면 담당 아티스트, 배우의 의견 따위는 가볍게 깔아뭉갰을 것이다.
회사 부하, 동료들의 의견도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성필에겐 미래를 본다는, 그 무엇보다 강력한 확신이 있으니까. 비록 후회할 미래에 도달하는 인과를 전부 알 수 없더라도, 결과만은 명확하다.
성필은 그 미래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악마가 될 수 있다.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로 엔터의 박성필은 그럴 수 없다.
그 어떤 이유보다, 리카에게 선택을 강요하여 미움받고 싶지 않다. 그녀에게 미움받는 것만은…….
“리카.”
성필은 마음을 정했다.
분기점 이후의 시점에서 미래를 바꿔볼 것이다.
리카가 일본에서 활동하는 시기.
혹은 리카가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아니면 리카의 계약이 다시 연장될 때.
지금이 아니라 나중으로 자신의 역할을 미루었다. 계속된 승리를 가져다주었던 자신의 능력을, 이 순간만큼은 의심할 것이다.
‘할 수 있을 거야.’
리카에게 더 신경을 써주면 되겠지.
일본에도 자주 들르고, 리카가 중압감을 느끼지 않도록 스케줄을 더 유연하게 바꾸고, 자주 연락하고, 그래, 그러면 될 거다.
굳이 이 시점에서 미래를 바꾸지 않더라도, 성필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많다.
‘그러면 될 거야. 분명 될 거야.’
마음을 정했지만, 그는 없어도 될 사족을 보탰다.
“짊어지는 것만이 삶이 아니야.”
리카는 성필의 사족에 다정히 답해주었다.
“저는 다른 멤버들만큼만 되고 싶은 거예요.”
성필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 * *
리카와 함께 가로 엔터와의 협의를 마친 후, 성필은 그녀와 같이 회의실로 돌아왔다.
히무라는 긴장된 손길로 성필에게 펜을 내밀었다.
성필은 탁자 앞으로 향했다.
[소녀연맹 리카 매니지먼트 권한 위임 연장]
이 계약서가 뜻하는 건, 향후 몇 개월간 리카의 매니지먼트 권한을 웨벡스에 양도한다는 것.
연예계에 있어 매니지먼트 권한이란, 연예인의 활동을 결정할 수 있다는 뜻.
방송 출연, 광고 계약, 이외 기획사가 적합하다고 판단한 모든 영리적 활동(금전적 대가를 획득하는 일), 혹은 명성 획득을 위한 활동(상징적 자본을 획득하는 일)을 결정하는 일.
그에 관한 권리를, 가로 엔터가 웨벡스 사무소에 한시적으로 위임함.
“……리카.”
“네.”
“안 울 거지?”
“안 운다고 했잖아요.”
“…….”
가로 엔터는 사인했다.
* * *
도쿄 제프(Zepp).
약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라이브 하우스다.
그 대기실엔 에스타스 멤버들이 한껏 긴장된 기색으로 앉아 있었다.
“…….”
유미는 평소처럼 멤버들을 격려할 수 없었다. 뭔가 말하려 해도 목에 돌덩이가 걸린 것처럼 끅끅 소리만 나왔다.
“이, 이 상태인데 노래나 부를 수 있으려나?”
다른 멤버가 장난삼아 말했다.
다들 목 막힌 듯 찍 소리도 내지 않는 걸 보고 한 말이었다.
안타깝게도 농담 소재로 썩 좋지 못했다. 멤버들의 얼굴이 사색이 된 것을 보니 말이다.
“할 수 있어.”
그때 유미가 단호하게 말했다.
“노래는 할 수 있어.”
긴장되어 찍 소리 한 번 내는 것조차 어려워도, 노래만은 부를 수 있다.
“죽도록 연습했잖아.”
이곳에 오고 나서 유미가 처음으로 미소 비슷한 것을 보였다.
“자다가 깨워도 정확한 음정으로 부를 수 있을 수준으로 연습했어.”
그리 말하는 유미는 감기 걸린 사람처럼 목소리가 칼칼했다. 오랫동안 말하지 않고 숨만 쉬어서 목구멍이 마른 것이었다.
그녀는 다급히 물을 마시곤, 다시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령 누가 우릴 무대에서 넘어뜨려도, 노래만은 정확하게 할 수 있어. 내가 알아. 내가 보증해. 그러니까 다들, 긴장은 여기서만으로 충분해.”
멤버들의 얼굴이 굳었다.
유미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분위기가 흘렀다. 하지만, 아까처럼 절절매는 것보다 지금처럼 진지한 분위기가 훨씬 낫다.
“얘들아.”
그때 대기실로 두 남자가 들어왔다.
“슈이치 오빠!”
그리고.
“히무라 실장님…….”
‘에스타스 비긴 어게인’이 진행되는 동안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던 히무라가 나타났다.
에스타스 멤버들은 그를 대하기 껄끄러워했다.
‘에스타스 비긴 어게인’ 전이야 히무라와 가장 가까웠지만, 근래 그는 에스타스에 관심이 없어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얼굴을 비추지 않았으니.
“실장님이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답니다.”
가로 엔터에서 케이팝의 정수를 배워온 슈이치(자칭). 그는 에스타스 매니지먼트의 주축으로 활동해왔기에 멤버들과도 친했다.
에스타스 멤버들은 슈이치가 공연 시작 전 격려차 들러줄 건 예상했었다. 하지만 설마 히무라가 올 줄은 몰랐다.
히무라는 슈이치를 지나쳐 에스타스 멤버들 앞으로 나왔다.
“에스타스.”
히무라의 얼굴은 근엄했다. 하지만 그의 부름엔 물기가 서려 있었다. 울음을 참듯이.
“너희는.”
히무라의 말이 한 차례 울먹임 때문에 막혔다. 슈이치가 격려하듯 그의 등을 두드렸다.
이윽고 히무라가 말했다.
“현재 일본에서 가장 뛰어난 퍼포먼스형 아이도루(アイドル)다.”
“…….”
유미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오기라도 하듯이 눈가를 찌푸렸다. 그녀는 히무라에게 답하는 대신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울지 마 얘들아. 메이크업 지워져.”
멤버들이 실소를 머금었다.
“우는 건 공연이 끝난 뒤로 하자.”
그리 말한 유미는 다시 돌아 히무라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선언했다.
“실장님, 기대하세요. 지금까지 저희한테 줬던 월급, 1년 안에 전부 갚을 거예요. 그 1년 후엔 그 몇 배로, 그리고 또 1년 후에는 소녀연맹만큼 벌 거예요. 그리고 또 다음 해, 그다음 해엔,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소녀연맹마저 넘어서…….”
당신의 기대와 믿음에 보답하겠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 안 해요. 더한 고난이 와도 전부 견디고 성공할 거라구요…….”
히무라가 대답하기도 전, 스태프가 시작 사인을 보냈다. 에스타스 멤버 전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들아, 가자.”
유미의 인도에 따라 멤버들이 무대로 향했다.
에스타스 비긴 어게인.
* * *
에스타스의 컴백곡 쇼케이스 무대이자 공연 첫 무대가 끝을 맺었다.
에스타스 멤버들은 엔딩 포즈를 풀자마자 유미를 중심으로 쪼르르 모여 정면을 응시했다.
그곳엔 성필과 리카가 심사위원처럼 진중한 분위기로 앉아 있었다. 둘의 뒤론 2,000명에 이르는 관람객들이 보였다.
리얼 다큐 예능 ‘에스타스 비긴 어게인’의 최종장.
1회에서 통렬한 비판을 가했던 성필과 리카로부터 인정받는 자리였다.
‘인정해주시겠지, 당연히…….’
유미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상식적으로 에스타스 멤버들의 퍼포먼스가 형편없더라도 ‘잘했네요’ 정도는 예의상 말해줄 것이다. 이건 예능의 최종화이기도 하니, 유종의 미를 거두잔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해줄 테니.
‘우리가 못한 건 아냐.’
오히려 연습 때의 기량을 넘어섰다.
평소엔 숨이 차서 음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던 부분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깔끔하게 소화했다.
춤도 군더더기 없었다.
그야말로 군무였다.
전원이 하나가 되어 퍼포먼스를 완성했다.
“네, 잘 봤습니다!”
리카가 먼저 마이크를 들었다.
관객이 2,000명이나 있을 텐데 자그마한 기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저들은 아마 ‘에스타스 비긴 어게인’의 시작부터 함께해 온 팬들일 것이다.
그들도 긴장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완성도 높은 퍼포먼스였어요!”
리카의 입에서 인정의 말이 나오자마자 한 멤버가 쪼그려 앉아 울음을 토해냈다.
유미는 뒤에서 들리는 울음소리에도 돌아보지 않았다.
우는 멤버를 격려하는 건 다른 이가 해줄 거라 믿고, 심사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예의를 지키고자 했다.
유미는 리더니까.
“여러분들은 아이돌이 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을 넘었어요!”
“……네?”
유미는 잔뜩 긴장했다.
‘에스타스 비긴 어게인’을 촬영하면서 제작진에게 얼마나 많이 골탕먹었는지 모른다.
‘서, 설마 이게 끝이 아니야? 깜짝 미션이 있어?’
다행히 리카가 말한 ‘첫 번째 관문’이란 깜짝 이벤트 같은 것을 뜻하진 않았다.
“노래와 춤은 아이돌로서 갖춰야 할 필요조건일 뿐이에요! 아이돌은 퍼포머일 뿐 아니라 엔터테이너예요!”
“아, 아, 네!”
그건 잘 알고 있다.
케이팝 아이돌보다 일본의 아이도루가 엔터테이너엔 훨씬 가까우니까.
완성된 퍼포먼스로 즐거움을 주기보다, 그야말로 엔터테인(Entertain) 자체에 초점이 맞춰진 게 아이도루다.
일본의 어떤 아이돌은 ‘그저 귀여울 뿐’이란 말로 본인의 직업을 완벽히 설명하기도 했었다.
“퍼포머일 뿐이라면, 그 사람의 무대는 공연을 펼치는 무대 하나밖에 없어요! 다른 비유로 들자면, 퍼포머의 전장은 무대뿐인 거예요!”
“…….”
“하지만 엔터테이너의 의미는 전혀 달라요!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직업! 아이돌이란 삶의 모든 게 엔터테인먼트가 되어야 해요! 당연하지만, 타인을 즐겁게 해주면서 본인이 즐겁지 않아선 안 되겠죠!”
아이돌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말해주려는 건가.
즐겁게 활동에 임하자 같은…….
“고통도, 고뇌도, 시련도, 고난도, 전부 본인이 짊어지는 거예요!”
아니었다.
“팬들에게 보여줘야 할 건 미소. 슬픔은 끝없이 삼켜야만 해요. 그런 삶을 살아갈 자신이 있나요!”
너무나 거창한 이야기였다.
이해하고 답하기 위해선 족히 십수 초는 필요하리라. 하지만 유미는 너무나 간단하고 빠르게 답했다.
“네.”
유미는 마이크를 들지 않았단 것을 깨닫고, 재빨리 마이크를 입가로 가져갔다.
“네! 노력했습니다! 오직 이날을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무대에 서서 노래 부르고, 팬분들을 미소 짓게 하고 싶단 마음만으로 이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니까…….”
엔터테이너로서, 모든 고난은 스스로 삼키고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어떠한 괴로움조차 견뎌내겠다.
엔터테이너의 괴로움이라고 해봤자, 무명의 설움을 삼키던 때에 비하면 배부른 고민일 테니까.
“멤버들을 위해서, 회사의 식구들을 위해서, 저는 언제까지고 밝게만 빛나겠습니다!”
대답이 끝난 직후 정적이 일었다.
유미는 침을 꼴깍 삼켰다.
리카는 그녀를 보고 씩 웃더니.
“아이돌이 되신 걸 환영합니다!”
그리 말하며 가볍게 박수 쳤다.
곧이어 관객들의 박수와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수천 명의 함성은 유미의 전신에 소름이 돋도록 만들었다. 이 모든 찬사가 자신을 위한 것, 아니.
‘에스타스만을 위한 것…….’
세상과 분리되는 기분이다.
수천 명의 환호와 기쁨이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켜 유미를 천상으로 인도한다.
이게 콘서트에서 뮤지션들이 느낀다는 황홀경이구나. 설탕보다 달콤하고 사랑보다 중독적인, 영원토록 느끼고픈 천국의 고양감.
그러나 그 고양감은 잠시였다.
박수와 환성이 그치자 성필이 마이크를 들었다.
유미는 다시금 긴장하여 그의 평가를 기다렸다.
“멤버들을 위해서, 회사의 식구들을 위해서, 그리고 아마 아까 유미 씨가 하지 못하셨을 말씀.”
성필이 미소 지었다.
“팬분들을 위해서, 맞죠?”
“……아, 네! 그렇습니다!”
유미가 허둥지둥하자 관객들이 웃었다. 그녀는 창피한 듯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좋은 마음가짐이네요. 하지만 무엇보다 저는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이 일을 하셨으면 해요. 만약 회사가 여러분께 소홀해지고 팬의 수가 크게 줄어든다면, 유미 씨는 아이돌을 하고픈 마음이 없어질까요?”
“…….”
“아니겠죠. 안 없어지셨죠, 유미 씨는. ‘내가 아이돌이 하고 싶다’는 마음이 남아 있었기에, 오늘 이 자리에 서실 수 있으셨어요.”
에스타스로 데뷔하고 나서 오랫동안 이어졌던 무명의 세월. 그 기간 유미를 지탱했던 건 오직 자신의 의지뿐이었다.
성필은 유미에게 말하다가 잠시 리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주 잠시여서 누구도 그 시선을 눈치챌 수 없었다.
“팬, 회사의 식구, 멤버, 모두 소중하지만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세요.”
“……넵.”
“아이돌, 에스타스 여러분.”
“……!”
성필의 입에서 아이돌이란 단어가 나오자, 유미는 더 이상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성필과 리카에게 비판을 듣고 한바탕 울었던 날로부터 몇 개월. 에스타스 멤버들은 겨우 인정받은 것이다.
소녀연맹의 리카와, 소녀연맹을 만든 전설적인 프로듀서인 성필에게.
마침내 인정받았다.
“그럼 불청객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리카, 가자.”
“여러분, 공연 잘 즐겨주세요!”
성필과 리카가 빠져나가자 무대엔 에스타스만이 남았다. 하지만 전혀 적적하거나 외롭지 않았다.
성필과 리카가 사라진 틈으로 관객들과 연결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유미는 거칠게 눈가를 닦으면서 마이크를 들었다.
“여러분,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저희는 여러분들 하나도 빠짐없이 팬으로 만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갑니다!”
새로 태어난 아이돌 에스타스의 첫 번째 공연.
그 광경을 무대 뒤에서 지켜보면서, 히무라는 유미 못지않게 굵은 눈물을 흘렸다.
가로 엔터와의 협업 계약을 체결한 지 2년.
에스타스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히무라의 꿈이 되살아났다.
‘오늘은 제프지만.’
언젠가 아레나로.
돔으로.
스타디움으로.
‘너희들은 앞으로 더 올라갈 거야.’
* * *
웨벡스 정문 입구에서 송별회 아닌 소녀연맹 송별회가 벌어졌다.
사실상 리카 송별회라고 부르는 편이 나았다. 분명 떠나는 건 소녀연맹과 성필일 텐데 마치 리카가 멀리 떠나가는 분위기였다.
“다들 목 씻고 기다리세요! 다음에 보는 아타시(저)는 전과 다를 거니까요!”
아프지 마. 건강하게 지내. 잘해야 해. 열도를 휩쓸어라 등등.
여러 격려의 말이 나왔다.
리카는 환히 웃으면서 답했다.
“정승처럼 돈 벌고 돌아갈게요!”
그러고 나서, 리카는 선전포고하듯이 성필을 검지로 가리켰다.
“이사님, 가로 엔터의 신사옥까지 몇 발자국 안 남았어요! 기대하세요!”
성필은 리카의 검지를 붙잡고 꺾었다.
“끼에에엑!”
“삿대질하지 마.”
“히도이(너무해)!”
“리카.”
성필은 리카의 검지만이 아니라 그녀의 손 전체를 잡았다.
“힘들면 언제든지 연락해. 일본에 자주 갈게.”
그에 리카는 골을 넣은 스포츠 선수가 동료와 악수하듯이 성필의 손을 꽉 쥐었다.
“하이(네)! 오실 때마다 놀라실 거예요! 선비는 사흘 떨어졌다가 만나면 다시 보아야 한다지만, 아타시(저)는 하루가 멀 정도로 유명해질 거예요!”
리카의 눈이 빛났다.
“아타시(저), 일본의 별이 됩니다!”
“……리카.”
“하이(네)!”
“정말 괜찮겠어?”
그리 묻는 성필의 말투는 끈적하기까지 했다. 리카의 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리카는 오늘이 오기까지 몇 번이나 성필에게 이러한 말을 들어왔다. 외롭진 않겠느냐. 잘할 수 있겠느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라.
그건 관심이었지만, 걱정에서 나온 관심이었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불신에서 나왔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이곳에 도달해서까지 성필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랬기에 저렇게 묻는 것이겠지.
리카는 입안에 감도는 쓴맛을 삼켰다.
‘말로는 증명할 수 없어.’
자신의 가치와 의지는 행동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다. 성필이 걱정했던 게 창피할 만큼 성공해서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기다려주세요.’
리카는 말 대신 미소로 성필의 질문에 답했다.
“…….”
성필도 미소와 함께 그녀의 손을 놓았다.
소녀연맹 일본 활동,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