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화
“난 인생 관리 코치가 됐어야 해.”
민경섭이 프린터 앞에 서서 말했다.
시답잖은 소리이지만 부하 직원들 입장에선 시답잖게 들어선 안 됐다. 민경섭의 오른팔, 매니저 안이상이 비굴하게 손바닥을 비비며 답했다.
“아이고, 지당하신 말씀입니다요.”
“짜증 나니까 그만해.”
“팀장님이 시키셨잖아요…….”
민경섭은 매니지먼트팀의 과하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주로 팀장을 너무나 친근하게 여기는 문화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앞으로 예의를 갖추라고 했더니 역효과만 나버렸다.
“됐다. 내가 너희한테 뭘 바라겠냐.”
민경섭은 툴툴대면서 프린트한 종이 뭉치를 한 손으로 집어 들었다.
일본 체류가 결정된 리카의 스케줄표였다.
“근데 인생 관리 코치라뇨?”
민경섭이 스케줄표를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매니저 안이상과 김수희가 공손히 그것을 받았다. 눈으로 스케줄을 훑은 두 사람이 악마를 대하듯 민경섭을 쳐다보았다.
민경섭이 어깨를 으쓱였다.
“봐. 완벽히 정리됐지? 이대로만 하면 리카 일본 활동이랑 컴백 연습, 그리고 한국에서의 앨범 작업도 완전히 소화할 수 있어.”
“진짜 악마다.”
“빌 게이츠도 이렇게는 일 안 할 듯.”
둘의 말마따나 리카의 스케줄은 조금의 빈틈도 없이 짜여 있었다.
일본에서의 활동. 일본에서의 컴백 연습. 그리고 가끔 있는 한국 귀국과 앨범 작업. 이 모든 게 자그마한 틈조차 허용하지 않고 빽빽이 들어차 있다.
일론 머스크가 성공하기 전에 주 100시간, 120시간을 일했다고 하던가? 리카도 곧 그만한 성공을 거머쥘 수 있을 듯하다.
“자.”
민경섭이 무대에 선 배우처럼 과장된 제스처로 손을 까딱였다.
“찬양해봐.”
“매니지먼트의 악마!”
“매니지먼트의 귀신!”
두 매니저의 외침에 민경섭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땐 사회 초년생티를 풀풀 내면서 쫄아 있기 일쑤였던 둘이다.
그런데 이젠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던졌다.
‘몇 개월 하고 금방 나갈 줄 알았는데.’
원래 로드 매니저 중 오래 버티는 이들이 많이 없다. 여자는 더욱 그래서, 김수희는 금방 학을 떼고 나가버릴 줄 알았었다.
안이상도 마찬가지다.
딱 봐도 젊음을 실컷 즐기다가 돈 떨어져서 취직한 것 같은 인상이었다.
어느 정도 돈만 벌면 ‘개처럼 힘든데 돈은 쥐꼬리만 하네’라면서 도망갈 줄로만 알았다.
‘근데 벌써 2년을 채우다니.’
얼마 전, 안이상과 김수희는 가로 엔터의 정직원이 되었다.
가로 엔터 역사상 최초로 로드 매니저에서 정식 매니저로 올라온 인물들이란 뜻이다.
거의 평행선을 달리던 둘의 월급도 나름 드라마틱하게 올라서, 얼마 전 둘은 사장인 홍규헌 앞에서 충성 맹세(자발적)까지 한 참이었다.
“그런데, 리카가 정말 이거 다 소화할 수 있을까요?”
김수희가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민경섭은 별거 아니란 투로 답했다.
“이렇게 바쁜 적이 없던 것도 아니잖아.”
“그렇긴 한데요. 앨범 작업, 연습, 스케줄까지 죄다 병행하면서 이런 적은 없었잖아요. 심지어 나라까지 왔다 갔다 해야 하는데, 힘들지 않을까요.”
“야, 그걸 말이라고 하냐?”
당연히 힘들다.
힘들지 않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방법 따위 있을 리 없잖은가.
자본이 수백 수천억 정도 있어서 주식에 전부 박고 배당금 꼬박꼬박 받아먹는 걸 제외하곤 말이다.
“연예인이란 건 원래 이래.”
아이돌, 연예인들의 과로에 관한 기사가 심심찮게 나오는 이유가 다 있다.
인기란 안정된 뭔가가 아니다.
군대의 계급이나 게임의 레벨이 아니란 뜻이다.
언제든지 생길 수 있고 또한 사라질 수 있다. 당연히 사라지는 게 더 쉽다.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으니…….
“있을 때 열심히 해야지.”
어느 전직 아이돌이자 예능인이 ‘연예인 다 한철 장사야’라는 희대의 명언을 한 적이 있다.
민경섭은 그것을 보고 참으로 맞는 말이라고 여겼었다.
인기 있는 한철을 제대로 잡아야 한다.
안이상과 김수희는 그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끔찍한 스케줄을 보곤 여전히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아니, 스케줄 자체는 크게 하드하지 않다. 소녀연맹은 앨범 활동기마다 이만한 스케줄을 소화해왔으니까.
걱정되는 리카가 혼자이며, 그녀가 가로 엔터에서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부하 매니저들에게서 기대한 반응이 나오지 않자, 민경섭은 뻘쭘했다.
‘진짜 칭찬 한번 없네. 나 열심히 했는데…….’
일본어라곤 ‘기모찌이이(기분 좋아)’밖에 모르는 민경섭이, 웨벡스와 한국에서의 스케줄을 맞추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였던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마침내 완성해낸 황금 스케줄이다. 그런데 부하들의 인정 한 점 돌아오지 않으니 은근히 섭섭했다.
민경섭은 스케줄표를 가지고 사장실로 향했다. 사장실엔 선객이 있었는데, 이유이였다.
이유이는 열띤 어조로 말했다.
“우파루파 잠옷 1,000벌이 전부 팔렸대요! 콘서트 하루 만에요!”
이유이는 거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눈동자가 흥분으로 번들거렸다. 그런 이유이를 상대하는 홍규헌은 피로한 기운이 가득했다.
부하 직원의 보고(자랑)를 가감 없이 들으려니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와, 그게 다 팔려?”
민경섭은 웃으면서 홍규헌이 앉은 책상 앞까지 갔다. 그러자 또 다른 먹잇감을 발견한 이유이는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다니까요! 제 안목이 틀리지 않았어요!”
“그건 한 이사님…….”
“제가 지지했어요!”
“……그래.”
일본의 우파루파 신드롬은 심상치 않았었다.
어느 날, 한구인이 일본 방송 자료 화면을 가져왔더랬다.
일본에서 소녀연맹의 인기를 다룬 방송이었는데, 우파루파 머리띠나 후드, 잠옷을 입은 이들이 많았다.
그것을 본 한구인은 이렇게 말했었다.
‘저것들은 대체 누가 만든 겁니까?’
이유이가 중국일 거라고 답했다.
‘저희가 우파루파 공식 굿즈를 만들 순 없겠습니까?’
가로 엔터 중역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었다. 일본의 인기에 편승하기엔 늦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옷을 생산할 공장을 정하고, 시제품을 확인하고, 마침내 완성품을 양산할 때까지 우파루파의 인기가 지속되리라고 어떻게 확신한단 말인가?
그 구원 투수가 바로 이유이였다.
당시 그녀는 이러했다.
‘다녀올게요!’
어디에?
‘중국에요!’
중국인들은 사업 감각이 뛰어나다. 합법적인 방법으로도, 불법적인 방법으로도.
중국엔 패션 업계인들도 많이 활동하고, 이유이는 그쪽으로 진출한 선배들과 연줄이 조금 있었다.
그녀는 일본에 우파루파 관련 굿즈를 무단 생산하는 업체와 접촉, 그들과 공식적인 계약을 맺으려 했다.
현지에서 당일 디자인과 시제품 생산까지 끝낸 그녀는,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우파루파 굿즈들을 생산할 수 있단 확답을 받았다.
그럼 남은 건 홍규헌의 판단이었다.
‘이익 낼 수 있는 거 맞아? 확실해?’
홍규헌은 혼란스러워했었다.
이유이가 맡겨달래서 맡겼더니 일의 스케일이 엄청 커졌으니 말이다.
가로 엔터가 패션 관련 업체도 아니고, 직접 공장과 접촉해서 굿즈를 만들어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완성품 검수나 운송, 세금과 관련된 일은 다 어떡하는가?
여기저기 다 막히다가 돈만 날리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렇지만 이유이는 불도저였다.
‘저희가 하는 일은 그냥 도장 찍는 게 전부예요. 중국분들은 어차피 저희가 아니어도 무단으로(우파루파에는 저작권이 없다) 굿즈를 만드시던 분들이잖아요? 거기에 저희가 날개를 달아줄 뿐이에요. 사실상 저희가 날로 먹는 거라구요!’
디자인을 정해주고, 소녀연맹 공인 딱지를 붙여주는 게 날로 먹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유이는 모든 게 괜찮다고 했었다.
당연하지만, 괜찮을 리 없다.
홍규헌과 한구인은 며칠 밤을 새어 이유이의 제안을 검토했고, 몇 가지 사항을 조정한 후, 마침내 허가를 내렸다.
그리고 결과가 이것이었다.
“제가 말했죠! 팔릴 거라고 말했죠!”
자신감이 넘치는 이유이 말이다.
우파루파 잠옷 1,000벌은 소녀연맹 콘서트에서 전부 팔렸다. 그 외의 우파루파 굿즈들도 전부 매진이라고 한다.
잠옷 재고는 일본 어바이비와 협업하여 단기간 팝업 스토어를 열어 파는 중이다.
거기에 케이팝 아이돌들이 입었던 옷을 판매하는 글로벌 인터넷 쇼핑몰인 ‘케이팝 클로즈’에도 우파루파 잠옷을 넘겼다.
“대체 우파루파 잠옷이 뭐기에…….”
우파루파 공식 굿즈는 최초의 불안이 무색하게 꾸준히 흑자를 내고 있었다. 꾸준한 흑자라 하여도 큰돈은 아니지만, 이유이 홀로 기획한 일이란 점을 생각하면 매우 큰 성과였다.
홍규헌은 이유이의 자기 자랑과 보고를 조금 더 들어주곤, 칭찬을 듬뿍 해준 뒤 사장실에서 내보냈다.
“민 팀장.”
“네.”
“내가 어떤 기분인지 알아?”
“돈 벌어서 좋다?”
“좋지. 근데 주식 단타로 얼떨결에 돈 번 기분이야.”
주가가 오르는데 ‘왜 오르는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돈을 벌 수 없다고 한다.
홍규헌은 그 명언을 직접 체험한 기분이다.
이번 일은 오로지 이유이의 동물적인 감각에 의지하여 진행한 것이었으니까. 그녀의 본능이 실제로 효과를 발휘하자 얼떨떨했다.
“저는 사장님이 그거 허락해주실 줄 몰랐어요.”
“나도 몰랐어.”
“그래도 잘된 거 아니에요?”
“딱히…….”
홍규헌이 의외의 대답을 했다.
그녀는 탁자 아래에 있던 상자에서 우파루파 굿즈 몇 개를 꺼내두었다.
먼저 잠옷이었다.
홍규헌이 잠옷의 재질을 손으로 더듬었다.
“이거 품질이 너무 조악하지 않아?”
“뭐, 단가가 단가니까요.”
“돈이랑 자존심을 바꾼 기분이야.”
우파루파 신드롬은 확실히 가로 엔터에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이유이의 재빠른 대처가 아니었더라면, 가로 엔터는 단맛 한 번 못 보고 다른 이들의 배만 부르게 해줬을 것이다.
하지만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아이돌 굿즈는 한탕 해 먹자는 감각으로 만들면 안 되는 건데.”
아이돌 굿즈를 사는 이들이 어째서 사겠는가.
아이돌을 좋아해서, 그렇기에 상품을 소장하고 싶기에 구매하는 것이다.
물론 우파루파 굿즈는 일종의 유행이다.
하지만 소녀연맹의 이름을 빌린 유행이다.
“이런 걸 팬들에게 팔았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좀 그래.”
“다 알고 사는 거예요.”
“나는.”
홍규헌이 낮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소녀연맹이 싸구려가 되는 건 보기 싫어. 소녀연맹 본인들만이 아니라, 소녀연맹이란 이름이 엮인 모든 곳에서.”
홍규헌은 우파루파 잠옷과 머리띠를 다시 상자에 넣었다.
“다음부터는 특정 굿즈 생산까지 염두에 두고 앨범 작업을 진행해야겠어.”
“또 우파루파 같은 일이 있을까요?”
“그걸 미리 아는 게 성공의 조건이지. 민 팀장도 뭔가 느낌이 팍 오면 바로 말해.”
“저는 그런 쪽은 별로 감이 좋질 못해서요.”
“다음에 이런 일이 있으면, 더 나은 걸 만들고 싶네.”
홍규헌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어느 한 가지 아이템의 성공 후에도 만족하지 않고 다음을 기약하는 모습은, 민경섭이 보기에 상당히 모범적이었다.
사업가의 목적은 돈이다.
돈을 번 시점에서 만족할 수도 있을 텐데, 홍규헌은 그러지 않았다. ‘팔았다’에서 끝내지 않고 ‘더 나은 걸 만들 수 있었을 텐데’란 생각까지 뻗어간다.
“사장님, 에르메스 얘기 아세요?”
“에르메스? 명품?”
“네. 탐험가가 에르메스 가게를 찾아서 ‘이 가방 3년 동안 써도 안 망가지나요?’라고 물었거든요. 그랬더니 에르메스가 뭘 한 줄 아세요?”
직접 자신이 만든 가방을 가지고 사막 횡단 여행을 떠났다.
가방은 망가지거나 헤지지 않았다.
그러곤 본국으로 돌아와서 그 탐험가에게 이리 말했다.
‘괜찮을 것 같습니다’라고.
“회사 이름 달고 나오는 물건에 책임감 가시지는 거 보니까, 갑자기 떠올라서요.”
“민 팀장도 박 이사한테 물들었어? 아부를 귀가 녹도록 하네. 어떻게 나를 에르메스랑 비교해.”
“사장님 입꼬리는 진실을 숨기지 못하네요.”
민경섭은 홍규헌을 놀리면서 스케줄표를 내밀었다. 홍규헌은 미소와 함께 그것을 받아 읽었다.
“이게 최종이야?”
“네. 매니지먼트팀의 최종 결정입니다.”
매니지먼트팀의 최종 결정이라고 해봐야, 민경섭이 홀로 노력해서 이루어낸 결과이지만 말이다.
“일본에서 변수가 생기는 것까진 어떻게 대처할 수가 없겠지만요. 그건 웨벡스 쪽에게 맡겨야 할 거예요.”
“진짜 빈틈이 없네. 조금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을까?”
“웨벡스를 믿어야죠.”
하긴, 가로 엔터에 일본에서 이루어지는 일에 뭐라고 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나마 리카에게 가로 엔터 소속 매니저 한 명을 붙여주는 정도이다.
“……하하.”
스케줄표를 쭉 읽던 홍규헌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에 기쁨이 담겨 있었다.
“이게 얼마야 대체.”
“아예 리카를 일본에 솔로로 컴백시켜볼까요?”
“민 팀장, 벌써 프로듀서까지 노려?”
“진짜 인기가 압도적이잖아요.”
“뭐, 일본인이니까. 오케이, 그럼 이대로 진행하자.”
홍규헌이 최종적인 승인을 내렸다.
“박 이사한테 연락해.”
가로 엔터의 앞날은 밝기만 하다.
* * *
소녀연맹 리카 매니지먼트 권한 위임 연장.
현재 히무라가 회의실로 향하는 이유이자 가로 엔터와 새롭게 맺게 되는 계약의 이름이었다.
회의실로 향하는 히무라의 걸음은 가벼웠다.
옆에선 아이돌 관리실의 다른 직원들이 쉴 새 없이 히무라의 비위를 맞추었다.
“이제 중역분들도 실장님을 다르게 보실 겁니다.”
“소녀연맹을 매니지먼트한다고 했을 때 비난의 눈총을 주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하, 정말요! 이젠 실장님만 봐도 부끄러워서 눈을 내릴 거예요!”
히무라는 이러한 아부에 익숙했다.
그는 웨벡스 회장의 아들이었으니까.
익숙한 동시에 지겹고 역겹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오늘만은 아니었다.
그가 아부를 듣는 이유는 그의 판단 덕분이었으니까.
‘소녀연맹을 매니지먼트하겠단 내 결단이, 마침내 엄청난 이익을 거두었다.’
엄청난 이익이래 봤자 웨벡스 전체 매출의 0.1%도 안 되겠지만, 고작 한 사람의 결단이 매출의 약 0.1%에 이르는 이익을 내게 된 것이다.
연예인을 걸어 다니는 기업이라고 비유한 인간은 누구일까. 정말이지 맞는 말이다.
‘리카 씨의 인기는 내가 예상했던 것 이상이다.’
웨벡스 사무소가 가로 엔터에게 얻은 건 1년에 2개월간의 매니지먼트 권한뿐.
리카의 매니지먼트 권한을 몇 개월 연장해야만, 리카의 인기에서 비롯된 이익을 실현할 수 있다.
‘단순히 인기를 소진하는 게 아니야.’
히무라와 아이돌 관리 2실, 즉 웨벡스는 사력을 다하여 리카의 인기를 유지시킬 것이다.
파도가 온다.
리카를 그 파도에 태우고 세상 누구보다 높이 올려보낸다.
일본을 대표하는 스타마저 될 수 있도록.
‘이미 확정된 광고 매출만 수억 엔. 가로 엔터와 나눈다면 푼돈으로 변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지.’
리카의 인기와 인지도는 웨벡스의 힘을 빌려 계속해서 고공행진을 기록할 테니까.
수억은 곧 수십억 엔으로 변한다.
‘이번 안건의 확정은 곧 나의 승리 선언.’
혈연으로만 자리를 따낸 게 아니라는, 무엇보다 강력한 승리 선언이었다.
나, 히무라는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다.
그는 웨벡스 전체를 향해 이렇게 선언하는 것이다.
“이젠 에스타스의 컴백만 마무리되면 모든 게 순풍만범이겠군요. 실장님이 담당하시는 일이니 어차피 잘 되겠지만요!”
흔하디흔한 아부에.
“하하하!”
히무라가 호쾌하게 웃었다.
나쁘지 않은 기분, 아니.
아주 좋은 기분이다.
웨벡스의 미래는 밝기만 하다.
* * *
회의실.
히무라와 아이돌 관리 2실의 직원들이 매니지먼트 권한 연장 계약을 열심히 설명했다.
성필은 전문 변호사와 함께 앉아 그 설명을 듣고 따로 계약을 뜯어보기도 했다.
‘미리 확인한 것과 차이는 없어.’
주요 골자는 이러하다.
리카는 소녀연맹의 한국 컴백 전까지 일본에서의 활동을 연장한다.
그게 사실상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외에는 리카의 휴식이나 앨범 작업 시간을 보장하는 세세한 조항들이 가득했다.
‘내가, 우리 가로 엔터가 신경 써야 할 건 리카가 앨범 작업에 쏟는 시간이겠지.’
리카가 일본에 있는다고 컴백 연습을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발전된 화상 통화 기능은 실시간 안무 강의마저 가능하게 하니까.
물론 그렇게 연습을 진행시킬 생각은 없다.
가로 엔터가 트레이너를 일본으로 파견할 것이다. 그리고 화상으로 멤버들과 안무 완성도를 체크하고, 가끔은 한국으로 돌아와 완성도를 올린다.
그때 성필은 어깨가 쿡쿡 찔리는 느낌을 받았다. 옆을 보니, 한껏 오만해진 표정의 리카가 보였다.
리카가 눈썹을 마구 꿈틀댔다.
아마 만화에서 캐릭터들이 으쓱해하는 표정을 연기하고 싶은 듯했으나, 성필이 보기엔 지렁이가 꿈틀대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히무라 실장님 보이세요?”
리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잡고 싶어서 안달 나셨어요!”
성필은 다정하게 미소 지으면서 리카의 어깨를 꾹꾹 주물러주었다. 리카가 방실방실 웃었다.
“당연하지, 리카는 일본의 별이니까.”
“자랑스러우신가요!”
“응.”
“기쁘신가요!”
“응.”
“저를 데려오길 잘하셨죠!”
“언제나 그렇게 생각했어.”
리카는 헤프다 싶을 만큼 어벙하게 웃었다.
그녀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을 것이다. 올해 말, 그녀는 일본 활동만으로도 거금을 손에 쥐게 될 테니 말이다.
그 돈으로 집을 살지도 모른다.
고급 스포츠카를 몇 대나 장만할 수도 있고.
아니면 갑자기 사업을 시작할 수도 있다.
그 모든 미래가 행복하기만 하겠지.
무엇보다 기쁜 건.
“이제 명실상부, 아타시(저)는 가로 엔터의 기둥이에요!”
자기만 라이벌이 없다면서 정호환을 라이벌로 삼았던 리카.
코뮤니스트라면서 누구보다 주식 공부를 열심히 하여 금융 자본가가 되려는 리카.
본인의 중고 포토카드 가격이 다른 멤버들보다 낮다고 울상을 짓던 리카.
멤버들에 비해 부족하다고만 느끼던 리카.
그런 리카는.
“그렇죠, 이사님?”
이젠 긍정적인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크흠.”
보고하던 히무라가 헛기침했다.
성필과 리카는 고개를 꾸벅 숙이곤 다시 경청에 들어섰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사인해야 할 순간이 왔다.
성필은 히무라와 나란히 앉아 볼펜을 들었다. 계약서를 향해 펜을 가져갔다. 히무라는 그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때 성필이 손을 멈추었다.
“……박 이사님?”
성필은 리카를 보았다.
그의 옆에 앉은 리카를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리카, 외롭다고 안 울 거지?”
“여기까지 와서도 저를 놀리시는 건가요! 안 울어요! 이사님이나 울지 마세요!”
“그래, 그럼 사인한다?”
“제 의견이 중요한가요!”
리카가 허리에 손을 얹고 위풍당당하게 가슴을 펼쳤다.
“제 매니지먼트 권한은 박 이사님께 있잖아요! 아타시(저)는 박 이사님을 믿어요!”
“안 우는 거 맞지?”
“안 운다고 했잖아요?!”
성필은 쾌활하게 웃으면서 다시 계약서로 눈을 돌렸다. 그의 펜이 종이에 닿았다.
리카가 일본의 별로 떠오를 역사적인 순간.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 * *
어둠만이 깔린 밤.
가로등의 빛을 받은 눈이 기분 나쁘게 빛나고 있었다.
땅에서 자라난 듯한 희끄무레한 눈들이 카펫처럼 바닥을 장식한 가운데, 여자임이 분명한 인형(人形)이 보였다.
성필은 흩날리는 눈발 사이에서 다가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음엔 발뿐이었다.
눈이 반사한 빛은 그녀의 발을 비추었고, 가까워지며 점점 다리와 그 위를 드러내었다.
밤의 어둠도 가리지 못할 아주 가까운 거리가 되어서, 성필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리카가 후드를 벗었다.
“리카, 너 왜, 지금 일본에…….”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눈가에 그렁그렁한 눈물 때문인지, 그녀는 코를 훌쩍였다.
“아타시(저), 저, 멤버들이랑 떨어지기 싫어요……. 회사 분들이랑도 떨어져 있기 싫어요……. 박 이사님이랑, 이사님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
리카가 애원하듯 말했다.
“다시 보내지 마세요, 제발…….”
* * *
‘모두랑 함께 있고 싶어요…….’
리카는 무릎을 꿇은 채 그리 말했었다.
마치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오르게 하는 상황과 날씨와 계절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심장박동처럼 귀 가까이를 쿵쿵 울린다.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성필의 귓가에서…….
“이사님?”
히무라의 부름에 성필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퍼뜩 시선을 내려 계약서를 보았다.
[소녀연맹 리카 매니지먼트 권한 위임 연장]
‘지금?’
모든 게 이뤄지기 직전인 지금?
하필 이 타이밍에?!
성필은 오른쪽을 보았다. 당황한 얼굴의 히무라가 보였다.
왼쪽을 보았다. 역시나 의아한 기색의 리카가 보였다.
정면을 보았다.
화상 회의 때 보았던 가로 엔터의 모두가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웨벡스, 가로 엔터, 심지어 리카마저도 이 계약을 바란다.
‘그런데 나만.’
오직 성필만이 이 계약을 반대한다.
아니, 반대하게 될 것이다.
반대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