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4화
진소유의 개인 촬영은 끝났다. 하지만 그녀는 돌아가지 않고 스튜디오에 자리를 잡았다. 아직 작업이 남았기 때문이다.
‘하양이와의 합동 촬영.’
하지만 장하양의 촬영은 순조롭지 않았다.
그녀는 본인의 매력을 최대한으로 발산하는 데 실패했다.
진소유와 비교하면 초라하기까지 한 모습은 촬영장 여기저기서 한숨이 나오게 만들기 충분했다.
진소유도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녀의 한숨이 지닌 의미는 다른 이들과 달랐다.
‘이겼다.’
달뜬 한숨이 연신 그녀의 입가에서 나왔다. 승리를 확신한 자 특유의 흥분감이 눈빛에 맴돌았다.
“아토무, 어떻게 된 거야.”
진소유에게서 살짝 떨어진 거리. 타츠야와 아토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토무는 피로감이 배인 목소리로 말했다.
“몰라.”
“사전 미팅에서도 저랬어?”
“그땐 저거보다 나았지.”
“컨디션 난조인가.”
“그딴 건 상관없어.”
맞다. 그런 건 상관없다.
세상은 만전을 기할 순간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 어떤 직업인이든 요구받는 그 순간 최대한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어야 한다.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아토무가 자조했다.
연습이란 퍼포먼스의 최대치를 올리는 게 아니라 최저치를 올리는 것이라고 했던가. 올라가기 위한 게 아니라 떨어지지 않기 위한 것.
그 어떤 난관에서도 모두를 만족시킬 최저치, 최소한의 전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연습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장하양은 연습 부족이었다.
“패션쇼에선 잘했는데.”
타츠야는 아토무를 위로하듯 말했다. 당연히 위로가 되진 않았다.
능력의 한계가 높으면 뭘 하는가? 발휘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다. 프로는 고점이 아니라 저점이 높아야 한다.
“뭐, 박 이사가 잘 케어하겠지.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봐.”
그렇게 둘의 이야기는 끊어졌다.
아토무가 더는 답하길 그만둔 것이다. 아마 그는 타츠야의 위로를 비꼼으로 해석하고 있겠지.
진소유는 타츠야의 위로가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성필이 기적적으로 장하양의 멘탈을 회복시켜 촬영에 제대로 임한다, 그런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지만.’
프로 운동선수들마저 경기에서 한 번 꼬이면 연신 실수하는 법이다. 경기 도중 멘탈을 회복하는 거의 불가능하다.
인간의 상태란 고작 초, 분, 시간 따위로 결정되지 않는다. 적어도 하루가 지나야 컨디션이 회복된다.
‘내가 이겼어.’
이겼으니.
‘대가를 받아야지.’
장하양의 상태가 어째서 안 좋아졌는지, 그런 건 궁금하지도 않다.
진소유가 보는 건 오로지 이 일이 끝난 다음의 일이었다. 이 일이 끝나고, 장하양과 자신의 관계는 달라질 것이다.
“죄송합니다.”
약 십 분 후, 성필과 장하양이 스튜디오로 돌아왔다. 아토무는 그 둘을 보자마자 날 듯이 달려가 따졌다.
“이봐요, 이런 식이면 안 됩니다! 아무리 사진과 포토샵이 기적의 기술이라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어요! 이대로면 지면에 싣지도 못한다고요!”
아토무는 뒤로 고개를 흘끗 돌려 보그의 에디터를 보았다.
에디터는 에어컨 바람 가득한 스튜디오 안에 있음에도 덥단 듯 부채만 부치고 있었다. 그에게 땀을 흘리게 하는 건 물리적인 온도가 아니라 마음의 답답함일 것이다.
아토무는 침을 꼴깍 삼킨 후 다시 성필에게 따져 물었다.
“하양 씨는 어바이비의 한국 홍보 모델 아닙니까! 후쿠요 히다카와는 자매와 다름없어요!”
“할게요.”
답한 건 장하양이었다.
“이제까지완 다를 거예요.”
아토무는 입을 다물었다.
만약 그가 상대하는 게 일반 모델이었다면 두말하지 않고 바로 잘라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촬영은 아토무 홀로 기획한 게 아니었다.
‘후쿠요 히다카’ 차원에서 기획한 것이기에, 그 마음대로 장하양을 쫓아낼 순 없었다.
아토무는 아주 오랜만에 이 단어를 꺼냈다.
“믿습니다.”
장하양은 고개를 끄덕이곤 아토무를 지나쳐갔다. 아토무는 장하양에게 확답을 받고도 불안한지, 다시금 성필에게 물었다.
“하양 씨가 나아진 건 맞습니까? 이 짧은 시간 동안 나아질 수는 있고요? 복용하는 약이라도 있어요?”
“없습니다. 하양이가 아까보다 잘할 거란 보장도 없고요.”
“……예?”
“그게 사람을 매니지먼트하는 일의 고단함이죠. 수식과 계산으로 해결되지 않으니까요. 매니저든 프로듀서든, 최종적으로 할 수 있는 건 믿는 거뿐이에요.”
“그게 뭔……!”
성필이 아토무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옷과 마찬가지예요. 만들어서 시장에 내놓은 순간, 디자이너의 손을 떠납니다.”
“…….”
“할 일은, 아시죠?”
믿는 것뿐.
아토무는 떨떠름하게 촬영 세트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눈썹을 꿈틀댔다.
아주 조금이지만.
‘아까와는 달라.’
촬영장의 모두가 달라진 기운을 느꼈다.
의아해하는 아토무를 성필이 지나쳐갔다. 그리고 포토그래퍼의 근처에 섰다.
장하양은 성필을 보았다.
성필도 장하양을 보았다.
눈이 맞은 후, 장하양은 진정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보았다. 카메라를.
* * *
‘하양아, 너 되게 오만해졌구나.’
그게 성필이 꺼낸 첫마디였다.
성필의 목소리는 차갑기까지 해서 장하양은 어깨를 흠칫 떨었더랬다.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기도 해서, 그가 평소보다 더 두려웠다.
자신이 오만하다고?
겸손한 게 아니라?
‘처음 음악방송 무대에 섰을 땐 안 그랬어? 예능은? 라디오는? 행사 무대는?’
성필은 장하양의 자격을 물었다.
과연 그녀는 그녀가 지금까지 서 왔던 모든 위치에 걸맞은 인물이었냐고.
장하양은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소녀연맹이 될 자격이 있는지조차 의심해왔던 세월이 길었으니까.
‘옛날에 설하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자기가 소녀연맹이 아니었더라면 감히 이런 안무를 받을 수나 있었겠냐고. 이런 춤을 춰보기나 했겠냐고.’
조아라는 정확히 그 반대로 말했었다.
자신이 소녀연맹이 아니었다면 감히 이런 곡을 받아서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느냐고.
멤버 전원이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있다. 그녀들이 받는 대우는 그녀 자신들의 장점보다, 소녀연맹이란 이름값으로 받는 것이었다.
‘다 부족해. 연예인들 전부, 연예인이 되려는 사람들은 전부 자신이 부족한 걸 알아. 그런데도 기회가 오면 무조건 잡아. 어떤 것이든 잡아야만 해.’
연예계는 운칠기삼이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들 소리소문없이 묻힐 수 있다. 실력이 없더라도 운 하나로 스타덤에 오를 수 있다.
운이란 그토록 중요하다.
소수만이 거머쥘 수 있는 기회. 그걸 위해 안타까운 선택을 하는 이들마저 존재한다.
이름 한 번 알리려 필사적으로 벽을 향해 몸을 부딪치는 이들이 널리고 널렸다.
‘그거 알아? 연예인은 공무원이 아니야. 실력을 쌓아서 상대적으로 공정한 기회를 얻어 시험을 치러 될 수 있는 게 아니야. 극소수의 인간만이 쥘 수 있는 기회를, 타인을 짓밟으면서 얻어내야 하는 일이야.’
성필은 장하양을 가리켰었다.
‘너 한 번 텔레비전에 얼굴 비추게 하려고, 잡지에 얼굴 한 번 나오게 하려고, 우리 회사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
연예인이 빛을 내는 무대 뒤의 어둠 속엔 연예인을 빛내기 위한 백 오피스가 존재한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담당 연예인의 성공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네가 이곳에 온 거, 네가 여기서 사진을 찍는 거, 보그 재팬에 출연하는 거. 전부 다 너 혼자만의 일이 아니야. 네 어깨에 가로 엔터 30명, 웨벡스 사무소 수백 명의 무게가 걸려 있어.
수백 명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인간이 계산할 수 없는 운이 맞아떨어져 마침내 거머쥔 기회 속에서 장하양이 하는 것.
본인이 짓밟고 밀어내고 떨어뜨린 이를 동정하고 있다.
‘하양아.’
성필이 다시 말했다.
‘너 되게 오만해졌어. 최고란 자리는 하하호호 웃으면서 모두가 행복한 가운데 따낼 수 있는 게 아니야. 항상 만전의 상태로, 최상의 상태에서만 최고를 향한 계단을 오를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장기적인 안목으로 최고의 기량을 갖춘 후 도전하면, 장기적으로 연예인 생명이 끝나버린다.
이곳은 엔터테인먼트 업계.
수많은 젊은 별들이 본인의 몸을 불태우며 빛을 내는 장소.
붉게 타오르며 파편을 흩날리는 이들을 동정할 여유 따위는 없다.
‘미아 씨에 관한 일은 마음껏 괴로워해. 죄책감을 느낄 수도 있어.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 수도 있고. 하지만, 미아 씨를 동정하지는 마. 모욕이야. 미아 씨에 대한 동정 때문에 일을 망치지 마. 실례야.’
장하양이 할 일은 발아래에 깔린 경쟁자들을 향해 동정의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자신이 이 자리에 오를 최소한의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게 탑에서 떨어진 이들을 향한 최소한의 예의다.
‘받은 일을 잘 해내지 못하거나 실수할 수도 있어. 그런데, 실수할 거면 이건 기억해.’
성필이 장하양의 어깨를 붙잡고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그의 눈빛이 장하양의 눈을 고정시켰다.
‘성공하면 한 걸음 나아가지만, 실수 한 번이면 열 걸음 물러나야 해. 네가 받는 모든 일이 승부처야. 최선을 다해.’
성필은 대답을 요하듯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장하양은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온 성필의 손을 매만졌다. 그리고 그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장하양이 말했다.
“제 꿈은, 최고의 아이돌이에요. 하지만 타인을 짓밟고 올라간단 생각은 한 적 없어요. 짓밟고 싶지도 않아요.”
어깨를 붙잡은 성필의 힘이 약해졌다.
“하지만 그게 최고가 되기 위해 감수해야 할 일이라면, 얼마든지 할게요.”
장하양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제 앞에 서 계셔주세요.”
자본주의는 다수의 승자를 허용하지 않는다.
극소수의 승자를 위해 대다수의 패배자를 만들어내는 구조.
연예계는 그 정점이다.
재능과 자본이란 벽으로 이루어진 울타리는 누구도 쉽게 넘을 수 없다. 장하양은 매우 운이 좋게도, 회사의 사람들과 함께 그 울타리를 넘을 수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그런 일을 해왔다.
그리고 울타리를 넘은 후, 뒤를 돌아본 일은 없었다. 계속 나아갈 뿐이었다.
울타리에 걸려 절망한 이들에게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고, 그런 일은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미아, 나의 친구.
그녀의 결정은 안타깝다.
위로해주고 싶다.
하지만 동정할 수는 없다.
동정해선 안 된다.
“이사님의 꿈을 좇을게요. 앞에 계셔주세요.”
정상을 향한 길은 멀기에, 눈물을 흘리며 애가(哀歌)를 읊을 시간은 없다.
* * *
장하양의 포즈는 아까보다 훨씬 더 부드러워졌다. 포토그래퍼 또한 아까보다 활기가 넘쳤다.
그제야 아토무의 표정도 부드러워졌다.
“아까보단 훨씬 좋은데…….”
아토무는 아직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장하양을 지켜보았다.
‘더 표현해 봐. 그래, 그렇게, 더, 좀 더.’
만인을 매혹할 듯이.
‘모자라.’
약 몇 분간, 장하양의 포징은 제자리를 맴돌았다. 처음 촬영에 들어갔을 때처럼 드라마틱한 성장세를 보여주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한계인가.’
이게 장하양이란 아이돌, 모델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인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이 정도로 만족하고 단념하는 수밖에.
‘끊어내.’
그렇지만 아토무는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장하양을 응원했다.
모델 중 어느 순간 몸에 걸려 있던 락이 풀리듯 개성이 만발하는 이들이 있다.
연습으로 쌓아서 이룬 힘이 아니라, 어느 순간의 깨달음으로 도달한 경지인 것이다.
모델들이 표현하길 마치 신이라도 들린 듯, 카메라 앞에 서면 해야 할 포즈가 떠오른다던가.
거울 앞이 아닌데도 거울 앞에 선 것처럼, 모든 동작이 치밀한 계산을 통해 드러나듯 절묘한 포징의 행렬.
운동선수가 존(Zone)에 들어가는 것과 같고.
가수가 콘서트에서 황홀경에 빠지는 것과 같은, 사방의 모든 자극을 끊어내고 오로지 본인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의식의 고양 상태.
‘지금 그 락을 끊어내.’
아토무는 장하양이 지금 당장 그 경지에 이르길 바라고 응원했다.
* * *
촬영 분위기가 좋아지고 있다.
하지만 장하양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하루키의 강의를 최대한 떠올리려 노력하며 본인의 개성을 발휘하려 노력했다.
자세 하나하나가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했다. 집중을 끊으면 금방 얼이 나갈 것만 같았다.
‘하양은 혹시 남자한테 사랑받은 적이 없어?’
하루키가 그리 물었었다.
그렇다.
장하양은 사랑받은 적이 없다.
하루키는 그게 장하양의 약점이라고 했다.
‘나의 약점.’
장하양은 사랑받으려 노력한 적이 없다. 정확히는 외적으로 노력한 적이 없다.
애교 가득한 미소를 연습한 적도.
무심한 듯 매혹적인 포즈를 연습한 적도.
거울을 보며 눈웃음을 연습한 적도 없다.
사람들은 장하양이 뭘 해도 까뒤집혔었으니까. 그녀의 존재 자체가 사랑받기 위한 충분조건이었다.
‘나의 약점은, 얼굴.’
사랑받으려 노력한 경험이 없다.
아이돌로서 환호를 일으키는 법은 안다.
아이돌로서 사랑받는 법은 안다.
아이돌로서 이쁨받는 법은 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사랑받은 경험이 없기에, 매혹할 수 없다.
어떤 표정이 상대의 가슴을 뛰게 하는지, 어떤 행동이 상대를 설레게 하는지, 어떤 눈빛이 상대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지, 장하양은 그 무엇도 알지 못한 상태로 나이를 먹어버렸다.
누구나 사랑을 이루기 위해 하는 일.
자신의 매력을 최대한으로 발산한다는 것 자체를, 장하양은 할 기회가 없었다.
그녀는 포징을 바꾸었다.
카메라를 바라보던 초점이 흐려졌다. 그녀의 초점은 카메라의 옆, 어둠 속에 선 성필에게 이르렀다.
‘박 이사님.’
장하양이 또 포즈를 바꾸었다.
‘사랑해요.’
장하양은 성필을 사랑한다.
그녀에게 성필은 세계의 전부였었고, 이제는 세계의 절반이었다.
성필이 장하양에게 건네주었던 ‘믿는다’는 말이 세계의 전부였었다. 그랬기에 마음속에 소중하게 보관해왔다.
그 말을 꺼내어 성필에게 보여주면, 그는 너털웃음을 흘리면서 밀어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언젠가 네가 그 말을 놓고 싶을 때가 올 거야.’
그건 어린아이를 달래는 어른의 말투였다.
부모의 손을 잡고 행복한 온기를 느끼는 아이에게, 부모가 ‘영원히 내 손을 잡을 순 없어’라고 하는 듯했다.
그럼 아이는 두렵고 불안해서 ‘평생 이러고 있을래’라고 한다.
부모는 웃으며 ‘나중엔 네가 싫어할 거야’라고 한다.
아이는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겠지.
장하양이 그러했다.
‘제가 어떻게 이사님의 말을 놓을 수 있겠어요? 버릴 수 있겠어요?’
세상의 전부이고 절반인데.
장하양은 성필을 볼 때마다 두려웠다. 영원히 그가 자신을 아이로만 바라볼까 봐.
그가 빌려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끝까지 읽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다. 물론 그녀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었다. 마지막 페이지의 초입까지만.
39살의 폴은 25살의 시몽을 차버린다.
폴 스스로도 괴로워한다.
그 이유는 나이였다.
도저히 좁혀지지 않는 세월의 차이.
폴은 젊은 시몽의 마음이 폭풍우 치는 바다와 같이 격정적일 것을 알기에, 최후엔 그 마음이 변해버릴 것을 알기에, 결국 열렬히 자신에게 사랑을 주던 시몽을 보내주었던 것이다.
장하양은 그게 자신의 미래일 것만 같아서 두려워서, 끝까지 읽지 않았더랬다.
‘하양은 혹시 남자한테 사랑받은 적이 없어?’
다시금 하루키의 목소리가 장하양의 머리를 쿵쿵 울린다.
‘사랑받을 수 없겠지.’
적어도 아이돌 일을 끝낼 때까지, 장하양은 사랑받는 경험은 누릴 수 없을 터다. 그게 장하양이 지고 나아가야 할 영원한 약점이다.
매혹과는 거리가 먼 유리 새장 안의 요정으로 남아 있어야겠지.
그야말로 꿈속의 아이돌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정면을, 성필을 보았다.
‘한 번이라도.’
장하양은 마음의 손을 뻗었다.
‘한 번만이라도 이사님이 나를.’
더 멀리 뻗어서 그의 마음에 닿으려 했다.
‘아이돌이 아니라 여자로 보아주신다면.’
안다.
그럴 일은 없으리란 것을.
프로듀서인 성필의 눈에 비치는 건 장하양이 아니라 아이돌인 하양일 테니.
장하양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연심을 마음속에 곱게 접어 넣어두는 것뿐이다.
산중에 숨겨진 난과 같이, 성필이 난의 향에 이끌려 스스로 들어오길 기다리는 게 장하양이 유일하게 기대할 만한 일이다.
“음?”
포토그래퍼가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그가 카메라를 내렸다.
장하양이 고개를 떨구고 멈춰 섰다.
촬영장이 술렁였다.
“잘하고 있어요.”
포토그래퍼가 장하양의 기운을 북돋웠다.
“하던 대로만 하면 돼요.”
장하양은 여전히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포토그래퍼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말했다.
“조금 쉴까요?”
그리고.
“아니요.”
장하양은 다시 포즈를 취했다.
포토그래퍼가 숨을 헛 들이쉬었다. 그는 허겁지겁 카메라를 들어 올려 피사체를 찍었다.
찰칵.
아까와 비교할 수 없는 룩(Look)이다.
눈빛부터가 달랐다.
포토그래퍼는 홀린 듯 사진을 찍었다.
정말로 홀린 것일지도, 매혹된 것일지도 모른다.
세트 위에 선 장하양을 바라보는 모두가 그러했다. 인간의 아우라가 갑자기 뒤바뀐 희귀한 상황을 마주하고, 신기함에 대한 호기심을 지니고 줄곧 그녀를 바라본다.
그리하여 매혹된다.
‘나에겐 사랑이 없어.’
그렇다고 사랑을 표현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진정한 예술은 결여에서 나온다.
예술가가 본인이 가진 것만을 표현한다면, 표현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의 예술은 얼마나 삭막할까.
인간은 상상으로 자신에게 없는 것을 채운다. 그 상상은 때론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더 아름답다.
언니.
‘소유 언니는 완벽해.’
하루키가 표현하길 스스로 완결됐고 완성됐다고 했다. 진소유는 자신이 지닌 아름다움을 극으로 발휘할 수 있다.
신기하지만, 동시에 지루하다.
스스로만을 비추는 만화경.
그 안에는 상상력이 없다.
‘나는 완벽할 수 없고, 사랑받을 수도 없지만.’
그렇기에 상상할 수 있다.
세속의 유혹과 아름다움을 악마의 것이라 규정하고 멀리했던 수도사들은 미(美)를 모를까.
오히려 훨씬 더 민감하다.
아름다움과 격리된 그들은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움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성당의 첨탑을 만들고, 찬란히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들고, 더없이 미려한 문장을 쓰고, 성당을 가득 채운 마리아와 성녀들의 동상을 창조해냈다.
결여되었기에 더 맹렬한 아름다움을 향한 열정.
‘보고 있나요, 이사님.’
이게 사랑받는 나.
당신의 달콤한 한마디와 따스한 손길을 상상하여 이룩해낸, 상상 속에만 존재할 사랑받는 자신.
에덴에서 온 관능.
‘저는 여자로서 이사님께 사랑받을 수 없어요.’
그러니.
‘아이돌로서 최고가 될게요.’
최고의 아이돌로서 사랑받겠다.
“됐…….”
포토그래퍼는 간신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길 관두었다. 이대로 계속된다면 영원토록 셔터만 누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더 시간을 끌어선 안 되기에, 겨우 욕망을 멈추었다.
“된 거 같은데요?”
아토무와 타츠야, 그 외의 관계자들이 포토그래퍼의 노트북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십수 명이 한데 모여 결과물을 확인했다.
“뭐야 이게.”
타츠야가 헛웃음을 뱉었다.
분명 실물로 볼 때는 같은 여자가 봐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관능적이고 매혹적이었는데.
“무슨 마법을 부린 거예요?”
사진으로 나타난 장하양의 모습은 신성하다 싶을 만큼 깔끔한 분위기만이 감돌았다.
세트장에 선 장하양과 사진 안의 장하양이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포토그래퍼도 얼떨떨하게 답했다.
“찍다 보니…….”
“우와아아아아악!”
아토무가 환호성을 지르면서 양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곤 타츠야를 껴안고, 포토그래퍼를 껴안았다.
아토무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포토그래퍼를 포옹하면서 들어올렸다.
“당신 내 작업 전담 포토그래퍼로 와! 꼭!”
방금 전까지 사바나로 가서 사자나 찍으라고 했으면서, 아토무는 뻔뻔하게도 포토그래퍼를 찬양했다.
포토그래퍼를 내려놓은 아토무는 타겟을 바꾸었다.
세트장으로 달려가 장하양을 껴안.
“저리 가세요.”
“네.”
아토무는 세트장에서 빠져나와 장하양 대신 성필을 끌어안았다.
그러고선 혼자 환호성을 지르면서 세트장 이리 저리를 뛰어다녔다.
타츠야는 주의 깊게 방금 찍은 장하양의 사진을 확인했다.
‘진짜 뭐지.’
장하양은 ‘후쿠요 히다카’의 모노그램으로 이루어진 브라톱에 검은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었다.
포즈는 골반을 옆으로 빼고 양팔을 들었다. 양손은 반대쪽 팔꿈치와 마주하여 겨드랑이가 훤히 드러난다.
타츠야가 주목하는 건 그녀의 시선이었다.
장하양은 정면을 보고 있었다.
‘이 포즈는 잘못하면 천박한 느낌이 나서, 웬만해선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리는 법인데.’
장하양은 자신만만하게도 정면을 보았다.
모델로서의 경험 부족 때문일까?
타츠야가 픽 웃었다.
‘아냐, 굳이 다시 안 찍어도.’
이쪽이 훨씬 낫다.
장하양은 모델로서 락(Lock)을 풀었다.
어떡해야 자신이 가장 아름다운지, 사람들을 매혹할 수 있는지 깨달은 것이다.
* * *
촬영을 끝내고, 성필과 장하양은 ‘후쿠요 히다카’ 건물 내부의 커피숍으로 왔다.
커피가 100엔밖에 하지 않았다.
프라푸치노나 에이드도 200엔을 넘지 않았다.
장하양은 배가 고팠는지 초콜렛칩 프라페를 시켜서 단숨에 비워냈다. 성필이 그 모습을 떨떠름하게 바라보자, 장하양이 시원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천국의 계단 40분 정도 타면 돼요.”
“그거 엄청 힘들잖아. 나도 20분 넘어가면 다리에 쥐 날 거 같은데…….”
“저는 몸매 관리의 프로니까요.”
장하양은 몸을 으슬으슬 떨더니 핫 커피를 주문하여 자리로 가져왔다.
그러자 성필이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하양아, 아까는 내가 말이 과격했지?”
“네? 아니요, 전혀 아니에요. 이사님 말이 맞는걸요.”
“미안해.”
성필이 사과하자 장하양이 당황했다.
“아, 아니, 제가 잘못한 건데 왜…….”
“내 감정을 담았었어.”
“……저한테 한 조언에요?”
“조언…… 이라고 불러주면 고맙긴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너무 나 좋을 대로만 말한 거 같아.”
“왜…….”
“미아 씨한테 이입해서.”
성필은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장하양은 그의 웃음에 담긴 슬픔을 보았다.
“나도 미아 씨 같은 경험이 있어. 내가 정말 바라는 기회를, 다른 누구는 너무나 쉽게 얻어내는 거지.”
성필은 전생의 윤상열을 떠올리며 말했다.
“내 모자람만 되새기게 되는…… 동시에 상대를 질투하게 되는…… 그런 끔찍한 기분이 들어. 그 사람이 가깝다면 더하지. 그냥 풍문으로 들은 얘기면 그냥 기분 나쁘고 끝인데, 옆에 있는 사람이면 앞으로도 계속 봐야 하니까.”
그래서 성필은 장하양이 미아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것을 보곤 화가 났었던 것이다.
어른답지 못했다.
“하양이의 마음은 알아. 네가 여기 있어도 되냐고 물은 건, 아이돌이란 이유로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이 선망하는 기회를 너무 쉽게 얻어낸 거 같단 뜻이지?”
“…….”
“그게 비겁하게 느껴질 수 있어. 있지. 이해해.”
인터넷 기사의 댓글이나 커뮤니티만 보아도 아이돌의 그런 행태에 불만을 표하는 이들이 많다.
아이돌이란 이유로 쉽게도 배우가 되고.
아이돌이란 이유로 쉽게도 뮤지컬에 출연하고.
영화에 나오고, 예능에 출연하고, 아이튜브 채널이 흥하고, 참 여러 방면에 나오고…….
사실 장하양의 반응은 매우 정상적이다.
“그렇지 않아? 남들이 ‘아이돌이란 이유로 배역 따내고 찔리지도 않냐?’고 했을 때, ‘내가 인기 있어서 된 건데 어쩌라고? 내가 알아서 한다’란 태도면 난리가 나겠지. 아마 모든 아이돌이 겪는 고민이고 딜레마일 거야.”
막말로 장하양이 미아의 이야기를 듣고도 ‘걔는 왜 그런대? 난 그냥 내 할 일 하는 건데’란 반응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루키를 포함한 주변의 반응도 좋진 않았겠지.
인기 있는 아이돌이 여러 방면에 진출하여, 타 직종이 동경하는 기회를 비교적 쉽게 얻어내는 건 부조리하기도 하다.
성필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란 건 잡은 이상 네 거야. 미안한 마음은 가져. 대신 일에는 최선을 다해. 네 능력을 증명하는 게, 그 기회를 얻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그나마 위로가 될 거야.”
성필은 뭔가가 떠올랐는지 주먹을 꼭 쥐면서도 장하양을 향해 환히 웃어 보였다.
“나도, 내 기회를 가져간 인간이 동정하면서 ‘난 못하겠어’라고 하면 기분이 썩 좋진 않을 거야. 이왕 결정된 거니, 그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단 걸 증명하는 쪽이 훨씬 보기 좋지. 그러니까…….”
“알겠어요.”
장하양도 성필처럼 환히 웃었다. 성필이 억지로 지은 웃음보다 훨씬 밝아서 그림자 한 점 지지 않을 듯했다.
“아직 제가 일을 가릴 수준은 아니니까요. 언제나 만전의 상태에서 싸울 순 없단 건 알아요. 오늘로…….”
오늘에 이르러서.
“완전히 이해했어요.”
“……그래.”
성필은 그녀의 마음을 온전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씁쓸하게 미소만 지으면서 커피를 마셨다.
“미아 씨랑은 앞으로도 못 만나?”
“그건 모르겠어요.”
“복잡하네. 혹시라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일단 이야기를 들을 거예요. 미아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다시 친구로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어요. 절대 동정하진 않을게요. 그쵸?”
“그래. 그게 제일 비참해.”
물론 윤상열은 성필을 동정한 적 따윈 없지만 말이다.
사람이 여럿 몰리는 회의에서 동정하는 척 정도는 했었다. 그때마다 얼마나 주먹으로 얼굴을 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고 보니 회귀하기 전 최후의 회의에서, 성필은 윤상열을 발로 찼었다. 그걸로 당했던 모욕들은 갚은 셈 칠까.
“이사님.”
장하양이 팔을 테이블에 대고 양 손등으로 턱을 괴었다. 그러고 성필을 바라보았다.
성필은 그녀를 향해 ‘뭐 하냐?’는 눈빛을 보냈다. 그런데도 장하양은 포즈를 풀지 않았다.
성필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얘 끼 부리는 거 좀 봐라. 모델이라고 여기저기 매력 발산하고 다녀도 돼?”
“약속 기억하세요?”
“약속?”
당연히 기억한다.
장하양과 맺은 최초의 약속.
“네가 아이돌로 실패하면 그에 들인 노력을 돈으로 보상…….”
“아뇨, 그거 말고요. 저 입단 테스트 끝난 후에 한 약속이요.”
“입단 테스트라고 하니까 무슨 배틀물 만화 같잖아. 뭐, 기억하지. 최고의 아이돌 되면 소원 들어준다고 했잖아.”
장하양이 말하길 집 하나 사주는 정도의 난이도라던가.
아마, 사줄 수 있을 듯하다.
지금 가로 엔터의 성장세를 보자면 집 한 채 정도야 못 사주겠는가. 이왕이면 서울은 말고, 지방 소도시 정도의 집값이면 좋겠다…….
“아뇨.”
장하양이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저었다.
“하, 하양이 너 왜 그래.”
“뭐가요?”
“왜 자꾸 애교를 부려…….”
“애교로 느끼시는 이사님이 이상한 거 아닐까요?”
“그래, 다 내 잘못이다. 근데 다른 약속?”
장하양과 또 다른 약속을 맺었던가.
뭐였지?
“저 정산받으면 같이 놀이공원 가기로 하셨잖아요.”
“내가? 진짜? 지어낸 거 아니야?”
장하양이 눈썹을 음울하게 떨어뜨렸다.
“역시 먼저 말씀드리길 잘했네요. 이사님이 기억하실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벌써 정산받은 지 일 년이 다 돼가니까요. 영원히 기억 못 하셨겠네요…….”
“아, 아니, 진짜? 내가 그랬어?”
장하양 목말 태우고 가로 엔터 한 바퀴 도는 거 말고 다른 약속이 남아 있었다니.
‘과거의 나는 대체?’
연습생 시절 멤버들의 기운을 살려준다고 정말 오만 가지 약속을 다 한 모양이다.
“사장님한테 놀이공원 표 받고 멤버들이랑 갔을 때요, 약속했잖아요.”
“……아!”
드디어 성필이 약속을 기억해냈다.
대체 몇 년 전인지도 모르겠다.
3년은 지났나?
“갈까요?”
“응?”
“지금. 디즈니랜드.”
“지금?”
성필이 당황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장하양이 재빨리 물었다.
“이사님, 오늘 저 촬영 어땠어요?”
“어땠냐고? 말이 필요 없지!”
진심이었다.
전생의 진소유 또한 모델로 유명했다.
정말 안 나오는 잡지가 없다시피 했었다. 물론 전생엔 ‘후쿠요 히다카’ 앰배서더가 아니라 다른 브랜드의 앰배서더였지만.
장하양은 그런 진소유와 호각을 이뤘다고 봐도 좋았다.
“소유 언니보다 더요?”
“내 눈엔 하양이가 제일 잘했어.”
“그럼 저 더 노력할 필요 없는 거 아니에요?”
“아니, 말이 그렇단 거지.”
성필의 눈에는, 그래, 장하양이 훨씬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이란 게 무조건적인 외적 조건이 아니라 전체적인 면을 고려한 것이긴 했지만.
전체적인 면이란 건 지인 찬스와 장하양에게 들인 정을 뜻한다.
즉, 편애란 것이다.
‘그래도, 내 감상만은 아니려나.’
촬영장의 분위기도 장하양을 절대 가볍게만 보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아토무가 괜히 골을 넣은 축구선수처럼 세트장을 뛰어다닌 게 아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에슬레저 룩을 팔 수 있으리라 확신한 것이다.
“그러면.”
장하양이 손등에 괴고 있던 턱을 떼어내곤 일어났다. 그리고 성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요, 디즈니랜드.”
“진짜? 진심이야? 지금 가자고?”
장하양은 어디서 준비해왔는지 핸드백에서 선글라스를 꺼냈다. 모자는 이미 쓰고 있던 터라 그대로 준비가 끝났다.
“너 그 꼴로 가면 파파라치 다 붙……!”
장하양은 종이백에서 프리사이즈 와이셔츠와 헐렁한 트레이닝복 바지, 운동화를 꺼냈다.
“이제 됐어요?”
성필이 침을 꼴깍 삼켰다.
“나, 나, 무서운 놀이기구 못 타.”
“…….”
“…….”
“…….”
“회, 회전목마 같은 것만 타면 갈 수 있…….”
“가요.”
장하양이 성필의 손목을 낚아채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즐길 수 있는 건 즐기고 싶어요. 즐거움은 조금이라도 미루고 싶지 않아요.”
“너무 갑작스럽잖아……!”
“이렇게 안 하면 이사님이 또 약속 잊어버리실 거잖아요.”
“미안하다 내가 진짜…….”
장하양은 크게 웃으면서 성필을 돌아보았다.
“빨리 가요, 여…….”
“한 번만 더 그 단어를 꺼내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고 했을 텐데? 이번엔 진짜다, 장, 하, 양.”
“여, 기서 조금만 기다려달라구요. 옷 갈아입고 올 테니까요…….”
“…….”
성필은 본인의 머리를 귀엽게 콩 때렸다.
“에헷.”
“여보.”
장하양이 새된 웃음과 함께 화장실로 뛰어갔다.
성필은 얼이 빠져서 그녀의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맥없이 웃었다.
‘어떻게 우리 애들은 진짜 애들밖에 없을까.’
저 모습을 보고 누가 24살의 아이돌이라고 믿겠는가. 꼭 미성년자에다가 막 데뷔한 그룹을 몇 년째 키우는 기분이다.
아이돌이 사회 경험이 적어서 이런다기엔 장난기가 확연히 많긴 하다.
4년 후에도 저러진 않을까 걱정이다.
‘아니 뭐, 니체가 최고의 인간은 어린아이와 같다고 했으니까.’
이것도 좋겠지.
* * *
얼마 후.
성필은 출근하는 길에 보그를 한 권 구매하여 회사로 왔다. 연습실에선 멤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필이 보그를 바닥에 두고 앉았다.
멤버들이 그의 뒤로 우르르 몰려왔다.
성필은 비닐 포장을 뜯어내고 목차를 확인했다. 그리고 ‘후쿠요 히다카’의 화보가 실린 페이지를 열었다.
성필은 침을 꼴깍 삼키면서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장하양, 진소유 합동 화보 2쪽.
진소유 화보 3쪽.
장하양 화보…….
“3쪽.”
장하양과 진소유, 동점.
무려 ‘후쿠요 히다카’ 화보에서 ‘후쿠요 히다카’의 앰배서더와 호각을 이뤘다.
성필이 감동하여 뒤로 돌아보기도 전, 그는 등에서 느껴지는 무게 때문에 몸을 앞으로 크게 기울여야만 했다.
장하양이 거의 업히듯이 성필을 뒤에서 덮친 것이다.
“제가 이겼어요!”
“무거워 하양아…….”
“스쿼트는 몸무게 2배로 들면서 고작 제가 무거우세요? 응? 무거우세요?”
“힘주지 마!”
“아타시(나)도 할래요!”
장하양, 보그 재팬 화보 촬영.
케이팝 걸그룹 중 세 번째 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