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화
“왜애애애애!”
‘후쿠요 히다카’ 디자이너 2팀 팀장, 이리에 아토무. 그가 절규했다.
“왜애애애애!”
“시끄러워.”
마하라 타츠야가 닥치라 해도 아토무는 계속 절규했다.
“왜 내가 소유가 아니라 하양인데! 이전 패션쇼에서도 내가 소유를 맡았는데! 왜 이번 보그 지면에 내가 아니라 네 옷을 소유한테 입히냐고!”
‘이 새끼는 빡대가리인가?’
현재 일본에선 진소유보다 장하양의 인지도가 압도적으로 높다.
세간의 인기를 구가하는 장하양을 맡는 쪽이 당연히 더 나을 텐데, 대체 왜 이 지랄을 떠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히다카 님이 너 배려해서 하양이를 맡게 해준 거잖아.’
‘후쿠요 히다카’의 차기 수석 디자이너 경쟁은 슬슬 승자의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하라 타츠야가 다음 수석의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 경쟁자인 이리에 아토무는 사실상 끈 떨어지기 직전의 연과 같았다.
그렇기에 ‘후쿠요 히다카’의 좋은 기회들은 타츠야에게 몰려오곤 했다. 차기 수석 디자이너의 호의를 얻으려는 술수들이다.
‘그게 불쌍해서 기껏 좋은 모델을 준 거구만.’
아토무는 그 일이 결정된 이후로 절규만 내뱉고 있다. 물론 그의 미의식이 장하양보다 진소유를 향하고 있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말이다.
“아하, 알겠다.”
갑자기 아토무가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고선 다 안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드디어 후쿠요의 배려를 깨달은 건가?
“다 너한테 배 보이고 누운 거지? 그래서 너한테 소유를 주고 나한텐 하양을 준 거잖아!”
깨닫긴커녕 격노하고 있다.
마하라는 그의 멍청한 모습을 몇 시간이고 즐겁게 바라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두면 계속 지랄을 떨 게 분명하니, 그에게 사실을 알려주기로 했다.
“아토무, 소유는 앰배서더야. 그치?”
“그래.”
“어느 나라 앰배서더야?”
“한국.”
“그럼 어디서 유명할까?”
“한국.”
“하양은 일본에서 유명해. 이번에 그 둘이 실리는 잡지는 보그 재팬이고. 네 옷을 하양이 입어준다고 하면 금방 완판될 거야.”
“내 옷은 소유가 입어야 빛을 발한다고!”
그냥 진소유가 좋은 거였나 보다.
타츠야는 그와 더는 말을 섞지 않고 저 멀리 가버렸다. 결국 분노를 삭이는 것만이 아토무의 일이 됐다.
잡지 촬영 사전 미팅 당일.
아토무는 차를 타고 미팅이 있는 스튜디오로 향했다. 핸들을 잡고 운전하는 동안 계속 궁시렁궁시렁 불만을 토해냈다.
‘제기랄, 소유를 뺏기다니.’
진소유는 탈(脫) 아이돌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인간이다. 비율이며 몸매며 외모며, 물론 외모는 너무 빛나는 터라 옷이 가려지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아무튼 완벽한 뮤즈이다.
그에 비해 장하양은 어떤가?
물론 장하양도 탈(脫) 아이돌이다. 다만 진소유와는 다른 의미로 탈 아이돌이다.
‘몸무게가 50kg 중반이라지? 어처구니가 없군.’
평소 아토무가 자랑스럽게 하고 다니는 말이 있다.
힐은 15cm 이상이 아니면 힐이 아니다.
여자는 50kg이 넘으면 여자가 아니다.
‘아이돌? 그래, 특이 취향인 인간들이 좋아하겠군. 세상에, 어떻게 그런 몸으로 패션 쪽 일을 받는 건지 이해가 안 돼.’
물론 장하양은 살이 찐 게 아니다.
시즌 준비 중인 피트니스 선수처럼 지방은 최대한 커팅된 상태로 근육을 채워 그 몸무게를 이룬 것이다.
그런데 아토무의 눈엔 그게 좋아 보이지 않았다. 쩍쩍 갈라진 근육? 어떤 사람이 좋아할까.
‘옷 입는 사람이라면 자고로 슬렌더하고, 라인이 부드럽게 떨어지고, 단단하기보다는 말랑하게 보여야지. 뭐야, 하양이 그 애는.’
스튜디오 주차장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아토무는 핸들에 머리를 쿵 박았다. 도저히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보그의 지면을 얻어냈다.
그래, 그건 좋다.
그런데 모델이 하양이다.
‘내 옷 중 하양 같은 여자를 위한 옷은 없어.’
아토무는 핸들에 머리를 박은 채로, 작년 패션쇼에서 보았던 장하양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마하라 타츠야의 역작인 ‘검은 바다’를 입었던 장하양은, 그야 물론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건 드레스 타입의 옷이었기에 가능한 아름다움이었다.
‘내 주력과는 멀어.’
아토무는 본인의 컬렉션을 머릿속에서 뒤져보았다. 장하양에게 어울릴 만한 게 있을까?
“아, 몰라.”
아토무는 신경질적으로 차 밖으로 나왔다.
문을 쾅 닫곤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중 그는 계속해서 다리를 떨었다. 장하양에 대한 생각을 지우니 떠오르는 건 하나뿐이었다.
‘이겨야 해. 이겨야 해. 이겨야 해. 이겨야 해.’
마하라 타츠야를 이겨야 한다.
보그에 실리는 순간, 일본 패션 업계의 모든 사람들이 타츠야와 아토무를 비교하게 될 것이다.
져선 안 된다.
모델이 중요하다.
모델이 중요한데…….
‘하양으로 어떻게 소유를?’
대체 이 일을 기획한 게 누구지? 어떻게 진소유와 장하양을 함께 붙인단 생각을 한 거지?
판매량에 눈이 먼 잡지사인가?
‘후쿠요 히다카’ 내부의 누군가인가?
진소유의 기획사? 장하양의 기획사?
누가 아이돌을 보그에 싣는단 생각을 한 거야. 배우도 아니고…….
문이 열렸다.
아토무는 고뇌를 안고 발걸음을 옮겼다.
‘아, 몰라.’
아무튼 이긴다.
아무리 자그마한 것이라도, 이러한 승리를 쌓아가며 반드시 ‘후쿠요 히다카’의 그랑 쿠튀리에가 된다.
* * *
미팅룸.
장하양과 나란히 앉은 성필은 갑자기 옷 소매를 코로 가져갔다. 슬며시 숨을 들이쉬니 ‘샤넬 넘버 5’의 잔향이 느껴졌다.
괜히 찔려서 옆을 보니, 장하양이 쳐다보고 있었다.
“…….”
“…….”
“여름, 이잖아. 땀 냄새 배었나 맡아본 거야.”
“……네.”
그때 문이 열리고 미팅 상대인 이리에 아토무가 나타났다. 그는 성필과 장하양을 보자마자 미소를 짓곤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이리에 아토무라고 합니다.”
“박성필 이사입니다.”
“장하양입니다.”
아토무는 성필, 장하양과 번갈아 악수했다.
일반적인 모델과의 자리였다면 아토무가 직접 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예의를 차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모델은 그저 주는 옷을 입기만 하면 되는 존재이니까.
다만, 이번 일은 특수했다.
그래서 아토무가 직접 왔다.
그는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았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건.”
갑자기 그의 기세가 바뀌었다.
비즈니스적인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진지한 표정과 깊은 투쟁심만이 감돌았다.
“저는 마하라 디자이너를 이길 거란 겁니다. 이번 화보에서 더 빛나는 건 하양 씨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촬영에 진지하게 임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건 일종의 경고였다.
아이돌은 카메라와 사진에 익숙하다지만, 모델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러니 아이돌로 살던 감각으로 만만하게 촬영에 임하지 말란 소리였다.
아토무는 본인의 지위에 걸맞은 아우라를 풍기며 장하양에게 경고한 것이다. 그녀가 겁을 먹고 조금이라도 더 노력하길 바라서.
그런데.
“저도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장하양이 되받아쳤다.
“저는 소유 언니를 이길 거예요.”
“……예?”
“이번 화보에서 더 빛나는 건 반드시 저여야만 해요. 그러니 디자이너님도 진지하게 임해주세요.”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되돌려받자 아토무는 적잖이 당황했다. 모두에게 사근사근해야만 하는 아이돌의 태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토무는 그런 장하양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투지 없이 ‘네’란 말만 반복하는 것보다야 훨씬 좋았다.
‘저번 패션쇼 사전 미팅에 보길, 소유는 태생부터가 카메라 앞에 서기 위한 인간이었지. 하양은 그보다 못했고.’
하지만 경쟁심 하나만큼은 우위에 있는 듯하다. 언더독이 지니는 위를 향한 투쟁 의식일까.
“좋습니다, 일단 바디(Body)부터 볼까요.”
“저.”
그때 성필이 끼어들었다.
“모델분들 하시는 것처럼 속옷 차림으로는 있을 수 없어요. 마하라 디자이너님과 미팅할 때는 속옷만 입긴 했지만 그건…….”
마하라와 주변의 팀원들도 같은 여자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발언은 아토무의 프로 의식을 얕보거나 무시하는 게 될 수도 있지만, 이 사항은 사전부터 장하양과 말을 맞추어두었다.
장하양은 어떤 일이 있어도 다른 남자 앞에서 속옷 차림을 드러낼 생각이 없다고 했었다.
“아, 그래요. 아이돌이란 거죠.”
아토무는 고민하더니 밖으로 나섰다.
성필과 장하양은 당황했다. 그가 화가 나선 미팅을 파토 내고 나갔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손에 옷가지를 들고 들어왔다.
“이거면 괜찮아요?”
스판 레깅스와 스포츠 브라였다.
성필과 장하양에게도 익숙한 옷이었다.
장하양은 운동할 때 자주 입었고, 성필은 운동할 때 홍규헌이 입는 것을 자주 보았다.
성필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하양이 옷을 받고 방을 나섰다.
둘만 남자 성필은 어색함을 깨려 말을 꺼냈다.
“마하라 디자이너님을 이겨야 한다고 하셨죠? 수석 디자이너 자리 때문인가요?”
“예. 오만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저는 제가 수석에 더 어울린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거든요. 마하라보다야 훨씬 더요.”
성필은 작년 패션쇼 때 진소유가 입었던 옷을 떠올려보았다.
그 옷은 아토무가 만든 것으로, 완전히 진소유에게 녹아 들어갔었다. 마치 진소유가 태어날 때부터 입은 옷처럼.
솔직히 성필은 패션쇼를 볼 때도 옷보다 사람에 눈이 갔었다. 천성이 사람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이었다.
“명확한 승패란 게 날 수 있나요?”
“이미지죠. 어느 쪽이 더 ‘후쿠요 히다카’에 걸맞은지. 물론, 판매량도 중요하고요.”
“사람으로 따지면 하양이랑 소유 중 누가 더 ‘후쿠요 히다카’에 어울리나요?”
“앰배서더요.”
아토무는 그 단어 하나로 질문을 일축했다.
성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진소유는 ‘후쿠요 히다카’가 앰배서더로 임명한 만큼, 브랜드 이미지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일 것이다.
“이사님.”
그 순간 장하양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쪽을 보니, 환복을 마친 그녀가 보였다.
왠지 모르게 자신 없는 모양새로 쭈뼛쭈뼛 들어오고 있었다. 왜 그런가 싶었는데.
‘몸매 보정이 안 들어간 옷이네?’
보통 레깅스와 스포츠 브라는 보정 기능이 있다.
스포츠 브라는 이름답게 운동 시의 편의성을 위해서 최대한 가슴을 고정한다. 즉, 가슴을 안으로 확 조인단 뜻이다.
그런데 장하양이 입은 건 가슴의 모양새와 라인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레깅스도 마찬가지였다.
헬스장에 여자들이 흔하게 입는 옷처럼 보정 효과는 없었다. 그 사람이 지닌 라인을 그대로 드러나게 피부로 부드럽게 달라붙을 뿐이었다.
그런 옷을 입은 장하양이 서 있었다.
“아하하, 이거…….”
성필의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아이돌의 옷은 노출도가 있더라도 소재 자체가 두꺼운 편이다. 그래서 피부에 달라붙는단 느낌은 들지 않는다.
장하양이 입어왔던 옷도 그런 것이었고, 성필은 그런 차림에 익숙했다.
그러니 현재의 장하양과 같은 차림에 면역이 없었다. 가릴 만큼 가렸지만, 드러낸 것보다 더.
더…….
“디, 디자이너님.”
성필은 눈 둘 데가 없어 아토무를 보기로 했다. 그런데 아토무의 눈은 진지하기만 했다. 성필이 장하양을 보고 눈을 돌렸던 게 부끄러울 만큼, 아토무는 한없이 진지했다.
그는 팔을 팔걸이에 댄 채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리고 장하양에게 눈을 고정한 채로 거의 노려보듯 했다.
그런 아토무를 보니 성필도 뭐라고 입을 열 수 없었다.
장하양도 부끄러움에 몸을 꼬는 것을 그만두고 천천히 정자세를 잡았다. 물론 그렇다고 성필은 장하양을 쳐다보지는 않았다. 성필은 맞은편의 아토무만 봤다.
뒤에 장하양이 서 있다고만 생각해도 아까의 모습이 떠올라서…….
“여기에 서면 더 잘 보일까요?”
장하양은 똑바로 앉은 성필의 눈이 닿는 곳까지 걸어왔다. 어쩔 수 없이 성필은 아토무와 장하양을 동시에 눈에 담아야 했다.
‘눈을 감을 순 없어.’
그럼 찔리는 게 있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아니, 물론, 성필은 찔리는 게 없다.
그렇지만 그의 눈동자는 지진 난 듯이 장하양과 아토무 사이로 왔다 갔다 흔들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토무는 요지부동으로 장하양만 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즉, 장하양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의 눈은 오로지 바디, 즉 몸만을 향했다.
디자이너의 눈으로 몸을 보고 해석하며 재창조한다. 그의 머릿속엔 패션에 관한 온갖 상상이 펼쳐지고 있을 것이다.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되니 장하양도 지친 모양이다. 갑자기 바디 프로필에서나 할 법한 자세를 잡곤 성필을 보았다.
“저 운동 열심히 했죠?”
“어? 어, 그러게. 너처럼 몸 잘 만든 아이돌 처음 보는 거 같아. 그렇게 먹고도 어떻게 근육이 생기네.”
“4년 넘게 했으니까요. 식단도 계속 관리하고. 많이 먹은 날은 무조건 오래 달려요. 아니면 춤 연습하거나요.”
“노력 많이 했구나. 장하네.”
“이 정도면 칭찬받을 만하죠?”
“아직도 내 칭찬이 필요해?”
“아직 많이 부족하니까요.”
“하아.”
갑자기 아토무가 마른세수를 했다.
“아, 죄송합니다.”
성필은 잡담이 그의 사색을 방해한 줄 알고 바로 사과했다. 하지만 그가 바로 손을 저었다.
“그게 아니라요, 제대로 보이지가 않네요.”
“보이지 않다뇨?”
“어울리는 옷이요. 보통은 보이는데.”
아토무는 그 잠깐 사이에 확 피로해진 표정이었다. 그는 다시금 장하양을 바라보았다.
“모델 몸에 익숙해서 그런가, 봐도 적응이 잘 안 됩니다. 몸이 전체적으로 탄탄하고, 바스트는 그럭저럭 괜찮은데, 힙은 너무 나와 있고.”
디자이너의 적나라한 평가에 장하양이 입술을 물었다.
마하라에게 이런 말을 들었을 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역시 남자에게 들으니 일이란 걸 알아도 수치심이 든다.
“전체적으로 모델과 거리가 머네요.”
그게 아토무의 최종 평가였다. 장하양의 몸은 모델과 거리가 멀다.
그에 장하양은 고개를 슬며시 떨어뜨렸다. 그녀의 머릿속엔 진소유가 떠올랐다.
진소유는 그야말로 아이돌의 전형이었다. 우상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키가 남자 평균보다 크고 몸의 라인은 늘씬하게 아래로 떨어진다.
아마 하루에 1,000칼로리를 겨우 먹지 않을까 싶다.
확실히, 모델로서는 진소유가 훨씬 적격이다.
아토무는 장하양의 실망을 눈치채지 못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스포츠 브랜드 모델이면 몰라도…….”
“‘후쿠요 히다카’는 애슬레저 라인은 없나요?”
성필이 말했다.
“뭐라고요?”
“애슬레저요.”
운동복을 일상복으로 코디하는 패션스타일을 일컫는다.
“그건 갑자기 왜…….”
“하양이한테 제일 어울릴 거 같아서요. 그냥 막 떠오른 거긴 한데.”
“제…….”
아토무는 부하들에게 곧잘 지르곤 하는 말버릇을 그대로 꺼낼 뻔했다.
‘제발 너는 생각이란 걸 하지 마’가 아토무의 말버릇이었다. 부하가 되지도 않는 안건이나 디자인을 꺼내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애슬레저는 만들긴 하지만요.”
이미 애슬레저 패션은 대형 의류 기업들의 격전지가 되어 있다.
스포츠 브랜드 굴지의 1위 기업인 나이키부터, 각종 명품 브랜드들 또한 운동복 라인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그건 ‘후쿠요 히다카’의 방향성과는 멀다. 물론 그들도 애슬레저 룩을 타깃하여 만든 옷이 있긴 하지만, 딱히 홍보에 열을 쏟지는 않았다.
“그다지…….”
아토무는 이 이야기를 그다지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한때 애슬레저 룩의 가능성을 파악하고 컬렉션 쇼에서도 그러한 옷들을 밀었었다.
하지만 기존 브랜드들의 아성을 넘지 못하고 처참히 무너지기만 했었다.
“그다지…….”
사실상 그가 마하라 타츠야에게 밀린 건 당시의 시도 탓이 컸다.
“그다지…….”
“……디자이너님?”
아토무는 고장 난 테이프처럼 ‘그다지’란 말만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다시 턱을 괴곤 장하양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래.”
“네?”
사나이, 한 번 쓰러졌다고 포기할쏘냐?
짚을 베고 누워 쓸개를 씹어서라도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야말로 대장부의 기개가 아니겠는가?
게다가, 지금 아토무의 앞에는 애슬레저 룩 한정 최고의 모델이 준비되어 있다.
“온다.”
“괜찮으세요?”
“빅 웨이브가 온다!”
아토무는 날 듯이 방을 나가더니 점퍼와 모자를 가져왔다. 그것을 허겁지겁 장하양에게 입히더니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선 다시 나가, 어디서 구했는지 휴대용 조명기를 몇 대 가져왔다.
그는 섬세하게 조명들을 움직이면서 장하양을 피사체로 썼다. 그렇게 수십 분이 지났다. 더는 미팅이라고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
아토무는 무언가 깨달은 듯 그리 말했다. 그러고선 갑자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난리가 났다.
“보였다…….”
마하라 타츠야와 진소유를 이길 단 하나의 방법, 빈틈의 실.
아토무가 눈물을 글썽였다.
“창고에서 울분을 삼키는 내 자식들(컬렉션 재고)……, 너희를 위한 최고의 모델이 준비됐어…….”
가자, 세상 밖으로.
그림자조차 지지 않는 화려한 런웨이의 빛 속으로.
“이사님.”
“어, 나도 알아. 타이밍 봐서 빨리 도망가자.”
* * *
결전은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아토무와는 이틀 후 다시 미팅을 하기로 한 후, 성필과 장하양은 스튜디오를 빠져나왔다.
아니, 빠져나오려 했다.
엘리베이터로 1층에 도착하자마자 성필은 또 걸음을 멈추었다. 장하양도 익숙한지 그의 옆에 가만히 섰다.
“하양아.”
“네.”
“정말 그 차림으로 갈 거야?”
장하양은 아까 아토무가 입힌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다른 점이라고 하면 점퍼를 허리에 묶어 힙 아래를 가렸고, 스포츠 브라 위에는 프리사이즈 언밸런스 셔츠를 입었단 것 정도였다.
“잘 어울리지 않나요?”
“잘 어울리긴 한데…….”
“아.”
장하양이 뭔가 깨달았단 듯 손뼉을 짝 쳤다.
“그 심정이신 거죠? 여자친구가 치마 입는 거 싫어하는 남친 마음. 사적인 자리에선 아이돌리시하면 안 되나요?”
장하양이 눈웃음을 짓자 성필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장하양이 옷을 입는 거야 그녀의 개성이다.
“이사님이 마음에 들어 하시는 거 같아서요.”
“내가? 뭘 근거로?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부정하시니까 더 티 나요.”
“그건 근거가 아닌데?”
“아까 제가 처음 옷 입고 나타났을 때요. 저희 ‘아니’로 데뷔하기 전 정장 입었을 때 눈 같았어요. 보통은…….”
장하양이 성필을 놀리듯이 웃었다.
“사적인 자리에선 그런 눈으로 저 안 보시거든요. 그래서 딱 알았죠. ‘아, 지금 내 모습이 정말 내 인생룩이구나’, 그렇게요. 어때요?”
“하양아, 너 지금 너무 잘 어울려서 문제야.”
“네?”
“그 상태로 불꽃놀이 축제 가면, 네가 모자랑 선글라스 쓰고 있어도 사방에서 볼 거야.”
아토무가 괜히 눈물을 흘린 게 아니다.
지금의 장하양은 그야말로 인생룩이다. 이 이상의 일상복 차림이 없을 수준이다. 이대로 공항으로 달려간다면 ‘공항 패션 원탑’이란 기사가 도배될 게 틀림없다.
이런 차림으로 축제에 가면…….
“그럼 맞잖아요.”
“뭐가?”
“다른 사람한텐 보여주기 싫은 거죠?”
성필이 픽 웃었다.
“너 진짜 많이 크긴 했다. 숨도 안 쉬고 무호흡으로 나를 놀리네.”
“아하하.”
“이러다가 나중에 어디까지 기어오를지 모르겠어.”
“……기어올랐나요?”
“농담. 그게 좋으면, 그래. 가자. 사람 모이면 네가 고생이지 내가 고생이야?”
성필이 움직이자 장하양이 기쁘게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때 엘리베이터에서 또 다른 이가 내려왔다.
“안 늦었네.”
그녀는 성필과 장하양이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다. 당연히 둘은 뒤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하양아.”
진소유였다.
그녀는 장하양에게는 눈인사만 하고, 진짜 볼 일은 성필에게 있단 듯 그의 앞에 섰다.
“박성필 이사님, 시간 있으세요?”
장하양이 성필의 등을 검지로 쿡쿡 찔렀다.
성필은 태엽이 감긴 인형처럼 답했다.
“지금 하양이랑 어디 좀 가야 해서요.”
“스케줄이요?”
“스케줄은 아니…….”
장하양이 성필의 등을 검지로 쿡쿡쿡쿡쿡 찔렀다.
“아니, 아, 아니, 아……?”
“스케줄은 아닌가 보네요. 노는 거죠? 혹시 폐가 안 된다면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장하양이 성필의 등을 검지로 쿡쿡쿡쿡쿡쿡쿡쿡쿡쿡 찔렀다.
성필은 태엽이 감긴 인형처럼…….
“가도 괜찮을까요? 네?”
진소유가 애교부리듯 목소리를 높였다.
태엽이 망가졌다.
“아…… 그럼…… 뭐어…… 아아아악!”
성필이 등에 퍼지는 강렬한 고통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장하양이 아무것도 모른단 듯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진소유가 배시시 웃었다.
“왜 그래.”
진소유가 장하양의 앞에 섰다.
“내가 가면 안 돼?”
“네.”
“그래.”
“어?”
진소유가 선선히 알겠다고 하자 오히려 장하양이 당황했다. 진소유는 장하양 대신 성필을 바라보았다.
“박성필 이사님 시간 언제 나세요?”
“억?”
성필은 흘끔 장하양 쪽을 보았다. 장하양이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보고 성필은 정신을 차렸다.
‘나는 이후 4년 동안 아이돌에 집중하기로 했어. 소유 씨의 유혹, 유혹 아니겠지 아마, 이번에도 내가 착각하는 거겠지만, 유혹에 당하면 안 돼.’
“창작 관련해서 상담할 게 있어요.”
그 순간, 성필의 머릿속엔 5년 후의 성필이 떠올랐다. 처량하게 ‘더 적극적이어야 했어’라고 자책하던 미래의 모습이.
“…….”
성필은 눈을 질끈 감고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러면, 그런 거면, 조금이라면, 간단한 상담이라면, 나중에라도…….”
그에 장하양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지고, 반대로 진소유의 눈엔 놀라움과 기쁨이 동시에 나타났다.
‘진짜 되잖아?’
에리카가 맞았다.
성필의 마음을 여는 법은 실제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