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99화 (499/760)

499화

‘됐다.’

1팀장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말로는 보그 재팬에서 온 기획이 마음에 안 든다고 했지만, 그는 진심으로 진소유가 이 일을 받아주길 바랐다.

‘혹여라도 애들이 내 속셈을 눈치채면 안 되니까.’

소녀연맹과 케이어스의 라이벌리는 세간에도 유명하다. 상당히 많은 장소, 사건에서 엮였던 터라 미디어가 쓰기 좋은 소재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또한 각 그룹의 멤버들끼리도 우정인지 경쟁심인지 모를 것들을 인터뷰나 방송에서 표출하기도 했었다.

그 때문에, 진소유는 1팀장의 속셈을 들었다면 이번 일을 탐탁잖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직설적으로, 케이어스가 소녀연맹의 인지도에 얹혀가려는 거였으니까.’

인지도 하나로 따지자면, 소녀연맹과 케이어스 사이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둘 다 한국 차트 정상을 여러 차례 정복했던 팀이니 말이다.

물론 상업적으로 따지자면 케이어스가 훨씬 우세하다.

하지만 일본에서만큼은 그 관계가 역전되어 있다. 단순히 역전도 아니고, 소녀연맹이 훨씬 우위에 있다.

‘일본에서 케이어스는 케이팝 팬덤에 기대어 인기를 모은 거라면, 소녀연맹은 진짜 일본에서 자생적인 팬덤을 만들어냈어.’

케이어스는 해외 진출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KS 엔터에 존재했던 역대 아이돌 그룹 중 가장 해외 진출에 목말라 있다.

그러니 소녀연맹과 비교하여 처량한 일본 성적에 입맛이 쓸 수밖에 없다.

아니, 중소 기업한테도 밀리다니?

‘애들도 아닌 척하지만, 특히 에리카는 이 일을 크게 신경 쓸 거야.’

멤버들은 경쟁심이 생겼을 것이다.

그런데 대놓고 ‘일본에서 소녀연맹 인기에 묻어가 보자’는 뉘앙스를 풍기면, 진소유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물론 1팀장이 강요할 수 있겠지만, 자발성이란 건 업무 수행 능력에 큰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소녀연맹은 케이어스와의 라이벌성을 부각한 홍보 전략을 사용해왔지. 사실상 우리 애들 꼬리를 붙잡으면서 다닌 거야.’

그러니, 이번엔 케이어스가 그 관계를 역으로 이용할 것이다.

정호환의 개심과 함께 찾아온 케이어스의 변혁기. 1팀장은 그 시작을 케이어스의 화려한 일본 컴백으로 장식하길 바랐다.

그 계획의 첫 계단이 바로 이번 보그 재팬 지면 촬영이었다.

“뭐야.”

1팀장은 속마음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되물었다.

“진짜 하려고?”

“네.”

진소유가 시원하게 답했다.

1팀장은 다시금 쾌재를 불렀다.

‘하양이랑 연관된 거면 기꺼이 할 거란 얘기가 사실이었구나.’

에리카, 고맙다.

덕분에 진소유의 자존심과 욕망 두 가지를 전부 만족시킬 수 있게 됐다.

“그럼, 음, 그렇게 알고 진행한다?”

1팀장은 살짝 떨떠름하단 기색을 보이면서 카페를 떠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진저가 말했다.

“또 하양 씨를 괴롭히시는 검미까?”

“내가 하양이를 괴롭혀?”

“매일 문자 보내고 전화 걸지 않슴미까. 하양 씨가 안 좋아하는 거 같은데도 말임미다.”

“메이, 그건 괴롭히는 게 아니라 친해지려고 노력한다고 표현하는 거야. 오늘 자 한국어 학습지는 다 풀었니?”

“내가 알아서 합니다.”

“……?”

“내가 알아서 함미다.”

진소유는 어깨를 으쓱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커피 반이나 더 남았슴미다.”

“너 마셔. 난 에리카 보러 갈 거야.”

진소유는 매정하다 싶을 만큼 빠른 걸음으로 자리에서 멀어졌다. 뒤늦게 진저가 물었다.

“에리카 언니는 왜 보러 감미까?”

“작…….”

뒤로 돌아본 진소유가 당황했다.

진저가 정말 진소유가 남긴 커피를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왜 그러니?’란 눈빛을 받고, 진저는 근엄하게 말했다.

“음식을 남기는 건 좋지 않슴미다. 먹지도 않을 걸 계속 사고 주문하면, 초과된 분량의 음식이 계속 수입되고, 결국 식량 가격 상승을 불러와서 세계 기아에 기여하는 꼴이 됩…….”

“그래, 지구 많이 지켜.”

“그래서 에리카 언니는 왜 보러 감미까?”

“작전을 짤 거야.”

“에리카 언니도 하양 씨 잘 모름미다.”

“아니.”

진소유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박성필 이사님.”

* * *

“박 이사님은 우리 다섯이 다 모여서 이 이야기 하라고 하셨어.”

백설하는 소녀연맹 멤버들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이번 일은 개인 스케줄 치고 규모가 꽤 있잖아. 그리고 다들 나가고 싶었던 일이고. 그러니까…….”

“우리가 하양 언니 질투할까 봐요?”

신아름이 말하자 백설하는 침묵을 지켰다. 말하지 않아도, 신아름의 말이 맞단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백설하는 표정을 다듬고 다시 말했다.

“그보다는, 당사자한테만 말했다가 나중에 오해가 생길 수도 있으니…….”

“팀장님도 진짜 그런 거 왜 걱정하는지 모르겠네. 우리 언제 누가 좋은 일 받았다고 질투한 적 있었어요?”

“그, 그냥 박 이사님이 다 모아두고 말하라고 했을 뿐이야. 이사님 생각까지 내가 알 순 없지…….”

백설하는 잠에서 방금 깨어난 터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아, 아무튼 축하!”

그래서 아무튼 축하했다.

백설하가 박수를 치자 다른 멤버들도 박수를 쳤다. 장하양도 박수를 쳤다.

“하양아, 네가 축하받는 거야.”

“아, 저요? 갑자기 박수 치시길래 뭔가 했어요.”

그렇게 장하양의 ‘보그 재팬’ 출연이 결정됐다. 진소유와 함께 나온다는 점이 걸렸지만, 그런 이유로 일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멤버들은 저마다 할 일을 하러 찢어졌다.

백설하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자 옆에 리카가 붙어왔다.

“쌤! 같이 히라주쿠 가요! 가서 쇼핑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는 거예요!”

“으응?”

사람 많은 곳은 피곤해서 싫은데.

갑자기 정체가 밝혀졌다간 사방에서 ‘우파루파!’라고 외치면서 몰려올 테고 말이다.

하지만 리카가 이렇게까지 부탁해올 정도이니, 다른 멤버들은 다 거절했단 뜻이겠지.

‘리더인 나마저 거절하면 리카가 많이 실망하겠지.’

모처럼의 휴일인데, 리카가 숙소에서 쓸쓸히 혼봉고(혼자 하는 우봉고, 리카가 발명) 하는 것을 보고 싶진 않았다.

“음, 그래.”

“얏타(해냈다)! 목숨을 걸고 쌤한테 부탁하려고 한 게 정답이었네요! 빨리 씻고 나오세요!”

리카는 이 기쁜 소식을 알리기 위해 본인의 방으로 뛰어갔다.

백설하는 샤워하면서 멤버들의 일정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보았다.

‘아라는 집에서 드럼 치거나 춤출 거고. 아름이는…… 오늘은 박 이사님 보러 안 간댔으니까 숙소에 있겠지. 하양이는 따로 일이 있으려나?’

아마 없을 것이다.

백설하가 씻고 나오자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소리가 들렸다. 리카가 너무 들떠서 벌써 신발을 신나 했는데, 놀랍게도 장하양이 보였다.

“하양아?”

“아, 언니.”

“어디 가?”

“네. 친구들 보러요.”

“……친구?”

여기 일본인데?

“남자 만나러 가는 거지?!”

“아하하, 언니 머릿속엔 남자밖에 없나 봐요.”

“당장 말해!”

백설하가 묵직한 발걸음을 빠르게 놀려 장하양에게 쇄도해 들어갔다.

“언니, 바닥에 물 다 떨어졌…….”

“지금 그게 중요해?! 우리 아직 4개월 더 남았어! 그 전에 계약을 깨면 어떡하자는 거야!”

“왜 제 친구가 남자라고 생각하세요?”

“아니야?”

“있긴 한데요.”

“역시 있잖아!”

“괜찮다고 생각해요.”

“혜빈 언니가 다 그러다가 넘어가는 거랬어! 안전한 아우라에 속지 마! 남녀 사이에 순수한 우정은 없어! 다 너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해! 안 노릴 이유가 없잖아! 내가 남자여도 노린다!”

“아니, 정말 괜찮아요.”

“왜? 애인 있대? 약혼했대? 결혼했대? 그래도 네가 눈앞에 있으면 바로……!”

“성적지향성이 저를 향하고 있지 않아요.”

“……동성애자시라고?”

“네.”

손혜빈이 이럴 때 얘기는 안 해줬는데?

* * *

“하양이가 어떻게 이런 데를 알아?”

미아가 놀라면서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들어올 때보다 더 꼼꼼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게가 온통 분홍색인 디저트 뷔페였다.

장하양은 미아의 맞은편에 핸드백을 놓고 앉았다.

“작년에 온 적 있어서.”

“남자친구랑 왔어?”

미아의 옆에 하루키가 앉았다.

하루키는 ‘후쿠요 히다카’ 패션쇼 때 장하양에게 워킹과 포징을 가르쳐준 강사였다.

원래 모델인 미아와 우정을 이어가던 장하양은 어느새 미아의 친구인 하루키와도 친해지게 됐다.

가끔 스타그래프 DM으로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이지만, 일본에 올 때면 한 번씩 꼭 보았다.

“내가 살게 마음껏 먹어.”

장하양이 짐짓 거만한 투로 말하자 미아가 슬며시 웃었다.

“온니, 뷔페에서 그렇게 말하기야?”

온니(언니)는 미아가 장하양을 부르기 위해 만든 애칭이었다. 그냥 하양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입에 잘 감겨서 좋다는 모양이다.

하루키가 장난스럽게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애한테 얻어먹는 건 좀 그런데.”

“박 이사님이 친구들 불러놓고 자랑하려면 돈 써야 한다고 하셨거든. 오늘 자랑하려고 불렀어. 그러니까 하루키 군도 많이 먹어.”

하루키는 벌써 회전 컨베이어에서 크로플을 집어 먹고 있었다. 미아는 간단하게 마실 것을 먼저 고른 후 장하양에게 물었다.

“뭐 자랑하려고? 홍백가합전이라도 나가시나?”

“나 보그에 나와.”

미아와 하루키가 먹던 것도 멈추고 깜짝 놀라서 장하양을 보았다. 장하양이 배시시 웃었다.

“보그 코리아 말고, 보그 재팬.”

모든 모델의 목표이자 패션 업계의 성경.

모델이라면 누구든 보그에 나오길 바란다. 설령 돈 한푼 받지 못하더라도, 지면에 실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한다.

그런 곳에 장하양이 나온다.

“나 혼자는 아니지만.”

“어어어엄청 대단하잖아!”

하루키는 가게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쳤다. 옆에 앉은 미아가 얼굴을 찌푸렸다.

“하루키 군, 다 쳐다보잖아.”

“좀 쳐다보면 어때! 대단한 거잖아! 아, 하양이 벽을 넘은 거야! 23살 이전에 보그에 실렸잖아!”

만 나이로는 그렇다.

“뭐, 대단하네.”

미아가 음료수의 잔을 양손으로 잡았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떨어뜨리고 목소리도 작아졌다.

장하양은 살짝 당황했다.

“미아?”

“대단해…….”

미아가 고개를 들었다.

웃고 있었다.

“우리가 얻어먹을 때가 아닌데?”

“응?”

“맞아 맞아! 이건 우리가 돈을 써서 축하해줘야지! 하양, 선글라스 따위는 벗어던지고 놀러 가자! 맛있는 거란 맛있는 건 죄다 먹어버리자! 고작 디저트 카페에서 뭘 하자는 거야!”

그렇게 말한 하루키는 온갖 디저트 접시들을 테이블 위로 가져와 마구잡이로 먹어 치웠다.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더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미아도 하루키를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얼떨떨해 있는 장하양의 손목을 잡고 일으켰다.

장하양은 미아와 하루키에게 끌려 가게를 나왔다. 처음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랐지만, 함박웃음을 머금은 둘을 보니 순식간에 즐거워졌다.

‘아, 그래.’

이쪽 업계를 잘 모르는 멤버들의 태도는 저 둘과 비교해서 무미건조하기까지 했었다.

보그란 잡지가 대단하단 건 알았지만, 어느 정도인지 감은 못 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젠 알겠다.

‘나는 대단한 일을 따낸 거구나.’

장하양의 가슴속 깊이 뿌듯함이 채워졌다.

* * *

“우읍.”

하루키가 미아의 등을 강하게 두드렸다. 미아는 헛구역질만 하지 토는 안 했다. 둘은 장하양이 돌아간 뒤에도 밤이 새도록 술을 마셨다.

미아는 강을 가로지른 다리의 난간에 매달려 아래를 보았다. 검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하루키 군.”

그녀가 손을 내밀자 하루키는 한숨을 쉬면서 담배를 한 개비 쥐여주었다.

미아는 손을 벌벌 떨면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하루키가 불을 붙여주자, 머리카락의 음영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얼굴에 주황빛이 번져 드러났다.

미아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었다.

“흐끅.”

한 번 울고, 담배를 한 번 빨고.

미아는 그렇게 난간에 계속 매달려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손으로 난간을 짚은 채 쪼그려 앉았다. 하루키가 걱정하여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 미아가 막았다.

그리고 웃었다.

“온니, 보그…….”

울음과 웃음, 연기가 함께 나풀거렸다.

하루키는 그녀의 처량한 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패션 업계엔 이런 말이 있다.

23살까지 보그에 실리지 못한다면 영원히 실릴 수 없다. 즉, 23살까지 모델로서 뜨지 못한다면 이후로는 내리막길뿐이란 뜻이다.

미아는 올해로 23살이다.

“하루키.”

“응.”

“파리, 밀라노, 런던, 뉴욕, 다 가봤지?”

“…….”

“어땠어?”

하루키는 답하지 않았다.

미아는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었다. 훗날 자신이 직접 가서 느껴볼 거라면서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선배들이 유명한 패션위크를 누빈 경험 따위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당연히 직접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응? 어땠어?”

하루키는 역시 답하지 않았다.

그 답을 주는 순간 미아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술 때문에 흔들거리는 시야, 그리고 어느 순간 미아가 그녀의 근처에 맴도는 연기처럼 흔들리며 사라질까.

하루키는 말을 아꼈다.

미아는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내 평생 꿈이었는데…….”

장하양은 아이돌이면서 그 꿈을 이뤘다.

아주 간단하게 그리고 당연하단 듯 ‘보그에 나와’라고 말했더랬다.

매달 수십 수백 번의 오디션, 적자밖에 없는 외국행, 뼈를 깎는 워킹과 포징 연습, 모델로서의 모든 노력.

그런 것 없이 장하양은 미아의 꿈을 이뤄냈다.

인기 있는 아이돌이기에.

“춤이랑 노래만 해주면 안 되냐아……. 적어도 내 옆에선 이런 일이 없으면 안 되냐고오…….”

미아는 울음과 함께 담배 연기를 마셨다. 그리고 헛구역질했다. 그녀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다시 다리 난간에 기대었다.

“하루키 군.”

“…….”

“알렉산더 맥퀸 이야기 알아? 모델이랑 만난 거.”

안다.

전설적인 이야기니까.

일을 그만두기로 한 모델이 마지막으로 명품 브랜드 ‘알렉산더 맥퀸’의 오디션을 보러 갔다.

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한 남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시답잖은 이야기였다.

저는 모델 일이 적성이 아닌가 봐요. 이것만 보고 그만두려고요. 네? 제가요? 네 뭐, 고마워요.

그 남자가 내리자마자 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

당신 뽑히겠네요.

네?

당신이 대화한 그 사람이 알렉산더 맥퀸이에요!

“7년이나 모델로 일했는데, 나한텐 그런 기적 한번 일어나질 않네. 내 운명이 아닌가 봐.”

“미아…….”

“운이 없어, 운이.”

미아는 흔들거리는 다리로 떠나갔다. 하루키가 그녀를 붙잡았다.

“포기하려고? 아직 올해는 안 지났잖아. 오디션도 더 남았고. 그리고 보그 따위 안 나오면 어때? 너는 모델로 자리를 잡았…….”

“하루키 군.”

미아가 하루키의 손을 부드럽게 떨쳐냈다.

“내 7년의 꿈을, 아무렇지 않게 이뤄내곤 자랑하는 사람을 봤어. 바로 옆에서 봤어.”

“…….”

“모델도 아니야. 아이돌이야. 나, 머리가 이상해질 거 같아.”

그리고 미아는 밤거리를 비틀거리며 나아갔다.

하루키는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

* * *

성필은 장하양과 함께 보그 촬영 미팅이 있는 스튜디오로 향했다.

잡지 인터뷰야 질리도록 한 데다 성필이 굳이 따라가야 할 이유가 없긴 했지만, 장하양이 동행을 요청해서 함께 오게 됐다.

‘긴장돼서요. 박 이사님이 같이 와주셨으면 해요.’

이런 요청은 성필로서도 오랜만이었다.

소녀연맹의 인기가 궤도에 오르고 난 후엔 성필이 동행한 일이 매우 적었다. 매니저들이 멤버들과 동행하는 일이 많아지자, 성필은 프로듀서로서의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성필은 그게 시원섭섭했었다.

‘점점 애들이 자라는구나.’

마치 어른이 된 딸들을 밖으로 내보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와중 장하양에게 직접적으로 받은 제안은 생각보다 훨씬 기뻤다.

‘나도 아직 매니저 피가 남아 있나 보다.’

담당 아티스트가 자신과 함께 있길 바란다는 건 썩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성필은 싱글싱글 웃고 있자 조수석의 장하양이 말을 걸어왔다.

“이사님, 스케줄 끝나고 시간 있으세요?”

“나? 내 스케줄이야 고무줄이지. 프리랜서라고 봐도 될 정도야.”

“다행이네요.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하양이가 가고 싶다면 가야지. 어디야?”

“조후란 곳에서 불꽃놀이 축제를 한대요. 10,000발 넘게 불꽃을 쏜대요.”

“장관이겠네. 불꽃놀이라, 진짜 여름이란 느낌이네.”

왠지 모르겠지만 일본의 여름이라고 하면 불꽃놀이가 떠오른다.

일본의 미디어 산업이 만들어낸 일본의 문화적 어법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여름을 주제로 한 일본 드라마나 영화에서 수십 년간 심심찮게 등장한 소재이니 말이다.

“그런데 조후가 어디야?”

“여기요.”

장하양이 폰으로 지도를 보여주었다.

리카의 고향인 가와사키의 위쪽이었다.

리카는 항상 가와사키는 곧 도쿄나 다름없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조후도 도쿄와 마찬가지인 동네였다.

상당히 가까웠다.

“좋네. 다른 애…….”

“기모노도 빌려볼까요?”

장하양이 성필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어, 기모노?”

“네. 빌려주는 곳 있을까요. 검색해볼게요. 이사님도 유카타 입으실 거죠?”

장하양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띠었다.

정작 성필은 유카타 같은 걸 생각하지 못했다.

작년 일본에 왔을 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리카와 함께 축제에 가기 전, 그녀는 본가에 들려 일본 전통 옷을 입고 왔더랬다.

유카타인지 기모노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어렸을 때 입었던 옷이라 현재의 리카가 입기엔 굉장히 작았었다.

무슨 특이 컨셉 화보처럼 몸의 라인이 과도할 정도로 드러났었지 아마.

“무슨 생각 하세요?”

“어,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러고 보니, 슬슬 리카의 일본 활동 연장에 관한 건을 정리해야 한다.

리카가 일본에서 받아들이는 일들은 다른 멤버와 비교를 불허한다. 일본 한정 투어가 끝난 이후에도 남아서 스케줄을 소화해야 할 지경이다.

‘한국과 일본을 왔다 갔다 하면 리카의 체력 소모가 너무 심하겠지.’

아예 일을 몰아서 한 후, 조금 늦게 한국으로 돌아와 앨범 제작에 뛰어드는 편이 나을까.

‘리카 정도면 타이틀곡 퍼포먼스를 익히는 데는 시간이 크게 걸리지 않을 테니까.’

리카도 고향에 남아 돈을 왕창 벌어들이면 좋아할 것이다. 항상 집이니 차니, 그런 말을 자주 하는 아이니까.

덩달아 가로 엔터도 좋고 말이다.

‘가로 엔터 쪽의 반응도 괜찮다고 하니, 리카는 일본에 더 체류하는 게 낫겠지.’

성필이 리카의 일로 고민하고, 장하양이 불꽃축제에 관해 이야기하는 동안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장하양은 스튜디오 앞에 서자마자 심호흡했다.

안에 진소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필도 진소유가 장하양에게 쏟는 애정은 익히 알고 있었다. 에리카와 믹스테입 작업을 하면서 진소유에 대해 많이 듣기도 했고 말이다.

‘하양이는 소유 씨를 싫어하지.’

나중에 스태프들에게 듣길, 패션쇼 백스테이지에서 기 싸움도 벌였다고 했었다.

성필은 잘 이해가 안 가지만, 장하양이 진소유를 싫어한다면 마땅한 이유가 있겠지 싶었다. 왜인지 진소유는 장하양의 철벽에 계속 뛰어드는 모양이지만 말이다.

“들어갈까?”

“네.”

둘은 빌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게재되는 건 소유 씨랑 하양이의 합동 화보야. 개인 지면이 주어질지는 확실하진 않아. 편집장, 에디터, 그리고 이 기획 발의자인 ‘후쿠요 히다카’ 쪽에서 조율할 거야.”

“저희 쪽의 의견은 아무런 영향이 없나요?”

“그렇다고 봐야지. 광고 촬영해봐서 알겠지만, 클라이언트의 요구는 절대적이잖아. 아마 소유 씨가 ‘후쿠요 히다카’ 앰배서더시니까, 하양이보다 개인 지면을 더 받을 수도 있어. 너무 상심하진 말고.”

“안 해요. 나온 것만으로도 기쁜걸요.”

장하양이 성필을 보고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박 이사님이 바라신 일이잖아요.”

“그래서 기쁜 거야?”

“제 꿈은 박 이사님의 꿈이니까요. 이사님이 기뻐하시는 거면 저도 기뻐요.”

평소였다면 성필도 이 이야기를 듣고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서유선과의 첫 미팅에서 들었던 이야기 때문인지,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서유선은 자신이 불행했던 이유를 타인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말했었다.

그럼 장하양도 나중에는…….

“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진소유가 보였다.

장하양과 성필은 동시에 놀라서 굳었다. 그녀와 마주칠 줄은 알았지만 설마 엘리베이터 앞일 줄은 몰랐다.

“아, 음.”

성필은 재빨리 장하양과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그렇게 진소유가 들어갈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런데 진소유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어…… 소유 씨?”

엘리베이터를 쓰려고 기다리던 게 아니었나?

“반가워, 하양아. 기다렸어.”

장하양을 기다렸나 보다.

진소유의 인사에 장하양은 작게 ‘네’라고만 말했다. 진소유는 익숙한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필을 보았다.

“박성필 이사님, 반가워요.”

그리고 진소유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행위를 벌였다. 그녀는 장하양보다 성필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이다.

아니, 주먹을.

“예에, 토모다치(친구).”

“……???”

성필은 어리둥절하여 진소유의 주먹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녀가 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에리카가 하는 일이 재밌어 보여서 따라 하는 걸까?

“토모다치(친구).”

진소유가 강압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에 성필은 쭈뼛쭈뼛 주먹을 들어 그녀와 맞추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진소유의 얼굴에 기쁨이 번져나갔다.

미(美).

그 단어를 인간으로 표현하면 진소유일까?

성필은 마치 사랑에 빠진 듯한 기분이었다. 그의 주변으로 계절을 벗어난 봄바람과 벚꽃잎이 흩날리는 듯했다.

진소유는 마주친 주먹에서 성필에게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금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토모(친구).”

와타시(나), 유혹당하고 있는 걸까?

* * *

에리카가 진소유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래서, 박 이사님을?”

“장수를 잡으려면 말을 쏴라. 퀸을 유인하려면 킹을 노려라. 그리고, 하양이와 친해지기 위해선 박성필 이사님을 노려야 해.”

“나 말야, 처음 연습생 되고 한국인들한테 선입견 생기려고 했었거든. 너 때문에. 지금 그 선입견이 다시 살아날 거 같아. 문화 차이 때문에 내가 이해 못 하는 거야? 아니면 소유 네 말이 이치에 맞지 않는 거야?”

“네 지능이 낮은 거야.”

에리카가 이마를 짚었다.

“애초에 이해가 안 되거든. 하양 씨랑 친해지려는 건데 왜 박성필 이사님이야? 최소한 설하 언니란 답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니야?”

“너 모르는구나.”

“뭘 몰라?”

진소유는 잠시 고민하다가 ‘음’이란 소리만 내었다.

“됐고, 어떻게 친해졌는지 말해.”

“…….”

에리카는 아주 오랜만에 ‘사람을 골탕 먹이고 싶다’란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냥 계속 다가가서 말 걸고 스킨십하면 돼.”

“그건 너무 천박해. 너라서 쓸 수 있는 방법이야.”

“…….”

죽여버릴까?

잠들어 있던 극진공수도의 피가 끓어오른다.

* * *

스튜디오 대기 장소.

성필은 간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진소유가 바로 옆 의자에 앉았다. 성필의 의자 등받이에 팔을 괸 채, 그를 향해 상체를 과하게 기울이면서 말이다.

“그거 아세요? 한국에 누드모델 협회가 있단 거요. 의외로 몸이 예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래요. 사람이 지닌 몸의 형태란 건 다종다양한 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쓰인다고 해요. 제가 특히 감명받았던 건 인간을 닮은 의료실습기구를 만드는…….”

성필은 깨달았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사랑이란 감정이 죽었다고 생각했건만.

‘그냥 연예인 사이에만 있어서 눈이 말도 안 되게 높아진 거야!’

그리고, 진소유가 치근덕대자 마음에 봄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같다.

‘아니, 아니야, 소유 씨는 그런 마음이 아니셔. 작년에도 겪었잖아? 그냥 프라이베이트 존 개념이 많이 개방적이신 거야. 절대 그런 게 아니…….’

진소유가 고개를 살짝 숙이자 그녀의 머리칼이 아래로 떨어졌다. 성필의 허벅지로 진소유의 검은 머리칼이 은하수처럼 흘러내렸다.

진소유의 향수는 샤넬 넘버 5다.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냐면요…….”

성필은 복합적인 감정 때문에 바들바들 떨었다. 마치 늑대를 마주한 어린양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돌려 옆자리에 앉은 다른 사람, 장하양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 ‘나를 구해줘, 아니면 나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게 돼버려’란 마음을 듬뿍 담았다.

장하양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진소유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성필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양아.’

나, 유혹당하고 있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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