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8화
성필과 조아라, 서유선의 비공식 미팅은 웨벡스에서 이루어졌다.
처음엔 미팅을 서유선이 편한 장소, 즉 미사토의 집이나 그 근처에서 하자고 했었지만 서유선이 거절했다.
그다음으론 성필이 그를 직접 데리러 가겠다고 했으나, 그것 또한 서유선이 거절했다.
‘혼자 다니는 연습을 해야 하니까요. 혼자 외출한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제가 웨벡스로 갈게요.’
업무 미팅을 위해 집을 나온다.
보통 사람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서유선에겐 위대한 도약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흐억, 허억, 흐읍, 후우.”
서유선은 성필과 조아라의 맞은편에 앉아 거친 호흡만 반복하고 있었다. 도저히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면서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양새는, 그가 얼마나 큰 고난을 돌파하여 회사로 왔는지 보여주었다.
조아라는 미사토의 집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대선배의 모습을 보곤 난색을 표했다.
“아저씨, 유선 선배님 괜찮은 거예요?”
이건 뭐, 데뷔 무대에 서기 직전의 백설하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
“괘, 괜찮아요.”
서유선은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도 어떻게 조아라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겨우 웃으면서 클라이언트들을 안심시키려 했다.
참고로, 클라이언트인 조아라와 성필은 전혀 안심하지 못했다.
“어쩌다 그렇게 됐어요?”
궁금증을 참지 못한 조아라가 물었다. 옆에서 성필이 경악하여 그녀의 어깨를 흔들어도, 그녀는 불도저처럼 멈추지 않았다.
“아이돌이었잖아요.”
“아라야 그만…….”
“괜찮아요.”
서유선은 아까와 다른 의미로 괜찮다고 했다. 어느새 그의 호흡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궁금할 수 있죠.”
서유선은 조아라를 이해하는 듯했다. 그녀의 궁금증과, 그녀가 그 궁금증을 드러낸 계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조아라 또한 아이돌이다. 그래서 선배인 서유선이 망가진 모습을 보고 동정보다 두려움이 앞섰으리라.
연예인들이 정신적인 문제 하나둘 가진 건 으레 듣는 이야기이지만, 서유선은 심각했다.
조아라는 미래의 자신도 어쩌면 서유선처럼 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어 두려운 것이다.
“어느 순간…….”
서유선은 답이 정해져 있단 듯 쉽게도 입을 열었으면서,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니 말 문이 막혀버렸다.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냥, 복합적이었어요. 아이돌이라서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요. 성과에 대한 부담, 불안. 내 앞길에 대한 고민. 지금 내 모습에 대한 고민. 아시겠지만, 그게 생각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잖아요. 게임처럼 정해진 임무가 있어서, 그걸 깬다고 해결되지도 않고요. 그래서…….”
서유선은 자신의 양손을 맞잡았다. 타인의 온기를 갈구하지만 마땅한 대상이 없어 자신의 손이라도 맞잡는 사람처럼,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처량했다.
“선택이 필요해요, 그럴 때는.”
“선택이요?”
아주 짧은 시간의 대화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조아라는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했다.
“이 고통의 원인이 어디서 왔는가 선택해야 하는 거예요. 가장 쉬운 건 남을 탓하는 거죠. 명백한 악당을 만들어요. 예를 들어.”
비상식적인 스케줄과 성과를 요구하는 회사.
과도하게 아이돌을 이상화하여 소비하는 팬.
욕과 비난, 헐뜯는 걸 일삼는 악플러들.
마음이 맞지 않고 엇나가는 동료들.
이 모든 것을 유지시키는 거대한 시스템.
“그럼 괴로울 때마다 욕을 하면 마음이 좀 풀리잖아요. 그런데, 아시겠지만, 분노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요. 망가뜨릴 수는 있겠지만요.”
그런 일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나아지는 일 따위는 없으니.
“저는 저를 탓하기로 했어요. 제가 못나서 그런 거라고, 제가 바뀌면 다 해결될 거라고, 그렇게 믿기로 한 거예요.”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서유선이 겸연쩍게 웃었다.
“그건 너무…….”
조아라가 안타까워서 말했다.
“너무 자기파괴적이잖아요.”
평소였다면 성필이 ‘아라 그렇게 어려운 말도 알아?’라며 놀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놀릴 분위기가 아니었다.
조아라의 말이 상당히 잘 들어맞기도 했다.
그에 서유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지금의 저는 알죠. 저를 탓해선 안 됐어요. 그런데 그때 제가 뭘 알았겠어요. 인생의 절반도 살지 못한 20대 어린애였는데.”
그러고선 서유선이 변명했다.
“아라 씨가 어린애란 뜻은 아니에요.”
“지금은 원인이 뭔지 알아요? 선배님 탓이 아니라, 어떤 게 원인이었는지 명확해요?”
“……이젠 알죠.”
“뭔데요?”
“저 때문이었어요.”
조아라가 물음표를 띄웠다.
“아까랑 똑같잖아요.”
“다른 의미에서 저 때문이었어요. 저는 다른 사람의 꿈을 제 꿈으로 삼았기 때문에 괴로웠던 거였어요. 그게 진짜 제가 원하는 거라고 착각해서, 꿈을 이뤘을 때도 행복하지 않았던 거예요. 꿈을 이루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도착하니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반동이 확 오죠.”
그 말을 듣고 성필은 심장이 철렁했다. 이런 말을 멤버들에게서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성필의 꿈이 곧 자신의 꿈이라고 말한 멤버가 있다. 장하양과 신아름이다.
거기에 맥락과 정도는 다르겠지만, 지금 성필의 옆에 앉은 조아라 또한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성필의 꿈을 같이 꾸게 해줘서 고맙다고.
“아이돌로 성공하는 게 꿈이 아니었는데, 아이돌로 살아서 불행했던 거였다고요?”
“네.”
“그럼 다 선배님 탓이 되잖아요. 그런 이유로 만족하세요? 회사의 압력이라거나, 악플이라거나…….”
“원래…….”
서유선은 이제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는 듯 자세를 바로 했다.
“불행이라는 건, 모두가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사이에서 생기는 거더라고요. 회사도, 팬도, 악플러도, 동료들도, 행복해지려고 했을 뿐이잖아요. 그런데도 괴로운 사람이 나오는 건, 아마 그 사람 때문이겠죠.”
이야기가 거기까지 진행되자, 조아라는 서유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서유선은 포기한 것이다.
그는 이제 와서 분노를 터뜨려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단 사실을 깨닫고, 가만히 체념해버렸다.
수십 년에 걸쳐 쌓인 분노를 지금 터뜨린다면 그 불꽃이 자기 자신을 삼켜 태워버릴 게 틀림없다.
서유선은 살기 위해 체념했다.
“그러니까 후배님은.”
마지막으로 서유선이 덧붙였다.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는 법을 배우셨으면 해요. 힘든 와중에도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요. 저는 그게 꿈이라고 생각해요.”
“제 꿈은.”
조아라도 서유선처럼 이야기를 마무리하려는 듯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최고의 아이돌이에요.”
그녀가 본인의 프로젝트 기획안을 서유선에게 내밀었다.
“최고가 되고 싶어서 선배님을 불렀어요.”
조아라가 최고의 아이돌이라고 말한 순간, 서유선은 그녀가 아니라 성필을 보았다. 그녀의 프로듀서를.
‘나도 한때는 최고가 될 거라고 말하고 다녔었지.’
하지만 그건 전부 정호환과 윤상열에게 넘겨받은 꿈이었다. 심어진 야망이었다.
윤상열이 그랬던가. 아이돌 그룹이란 건 프로듀서의 자의식이 표현된 거라고.
아이돌이 되는 이들은 자의식과 명확한 인생관을 가지기엔 너무나 어린아이들이다.
태생부터가 만들어진 오토마타(자동인형).
설계된 이상의 행동과 사고를 할 수 없다.
“네.”
서유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는 한 도울게요.”
그는 후배가 자신처럼 상처받지 않길 바랐다.
최고라는 목표로 자신을 상처입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 * *
“어서 와요.”
서유선이 돌아오자마자 미사토가 현관에서 그를 반겨주었다. ‘어서 와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엔 수줍은 미소가 배어 있었다.
“아, 이것도 꽤 좋네. 유선이가 일하러 가는 것도 썩 나쁘지만은 않은데?”
서유선이 미사토를 꼭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다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만 같았다.
미사토는 그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었다.
둘은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 식사했다. 평소엔 미사토가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보고하듯 대화를 이끌지만, 오늘은 다른 이야깃거리가 있었다.
“어땠어?”
오늘 서유선은 성필, 조아라와 미팅을 가졌다.
미사토는 계속 그 일을 묻고 싶었다. 서유선의 기색이 평소와 달라 더욱 궁금했다.
“달라.”
“응?”
“내가 생각한 거랑.”
업무 분위기를 말하는 걸까?
“아라 씨.”
“아라 씨가 왜?”
“자신만의 목표가 있어.”
미사토가 어리둥절하여 되물었다.
“당연한 거 아니야?”
당연한 게 아니다.
아티스트가 레이블과의 기 싸움 끝에 프로듀싱의 전권을 얻어낸다. 혹은 앨범 프로듀서를 직접 고르거나 디렉터팀을 스스로 선임한다.
이런 이야기는 미국 같은 나라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아이돌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이돌이 주도적으로 뭔가를 기획한다는 건 서유선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말 아라 씨가 표현하고 싶은 게 있었어.”
서유선은 ‘우리들의 프로듀싱’이 일종의 보여주기식 프로젝트라고 생각해왔다. 그렇지 않고서야 백설하가 담당했던 ‘인트로: 러브’ 앨범의 완성도를 설명할 수 없으니까.
그 어린 나이(25세)에, 아이돌로 자라왔고 살아온 그녀가 그만한 성과를 냈으리라곤 믿지 않았었다.
그러니 조아라가 프로젝트의 기수를 맡는단 것도 일종의 보여주기 행위로 생각했었다.
‘아니야.’
오늘 미팅에서 드러났다.
성필은 프로듀서로서 참여했다지만, 그보다는 업무를 조율할 실무자에 가까웠다.
창의적인 발상은 전부 조아라에게서 나왔다. 비록 구체적이지 않아 추상적인 주장에 머물렀었지만, 프로젝트의 방향은 조아라가 정하고 있었다.
‘제 꿈은 최고의 아이돌이에요.’
문득 조아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서유선은 소름이 돋았다.
‘진짜 최고가 되려는 거야?’
서유선이 최고라는 목표를 당당히 말하고 다녔던 건, 물론 정호환과 윤상열 때문이었다. 동시에 그들 덕분이었다.
KS 엔터의 프로듀싱팀을 믿었기 때문이다.
사실 서유선이 말하는 최고란 자신의 노력으로 달성된다기보다, KS 엔터가 최상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했다.
서유선이 할 건 그들의 기획을 그대로 실천하는 게 전부였다. 그것만은 자신 있었다. 누군가 시키는 것을 그대로 하는 건.
그런데 조아라는 전혀 다르다.
‘스스로 최고가 되려고 하잖아.’
자신이 설정한 목표와 컨셉으로 최고에 이르려고 한다.
이건…….
“달라.”
다키스트와 전혀 다르다.
서유선은 식사 내내 그런 의미 모를 말들을 중얼거렸다.
미사토는 그가 오랜만의 사회생활에 지쳤다고 여겨, 그날은 특별히 듬뿍 위로해주었다.
* * *
보그걸(Vogue girl).
패션 잡지 보그가 십 대를 노리고 만든 잡지로, 한국에선 안타깝게도 판매 부수가 나오지 않아 폐간한 지 오래다.
하지만 일본에선 아직도 살아 있었다.
소녀연맹 멤버들은 보그걸 재팬 인터뷰와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로 모였다.
“이야, 반갑습니다!”
소녀연맹 지면을 맡은 에디터는 스튜디오로 들어오자마자 성대하게 환영해주었다.
노래를 잘 듣고 있다거나, 뮤직비디오가 멋지다거나 여러 칭찬을 하곤 간략하게 우파루파 춤도 춰 보였다.
성필은 그와 대화하면서 새삼 우파루파의 힘을 느꼈다.
‘보그걸은 십 대를 타깃으로 한 잡지니까, 소녀연맹을 어떻게든 섭외하고 싶었겠지.’
현재 소녀연맹은 일본에서, 특히 젊은 층에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룹 자체도 ‘뉴아사’ 덕분에 인지도가 높지만, 무엇보다 우파루파의 히트가 큰 역할을 했다.
얼굴을 안 비추는 메이저 방송이 없으니, 웬만해선 소녀연맹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이다.
‘이분 웃음이 사라지질 않으시네.’
소녀연맹의 지면을 실으면 팬들이 잡지를 엄청나게 살 테니, 기쁠 만도 하다.
물론 기쁜 건 에디터와 보그걸의 직원들만이 아니다. 성필도 기쁘다. 에디터 쪽에게 약속받은 게 있기 때문이다.
“저, 그 일은…….”
성필이 운을 떼자 에디터가 알고 있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해 보이겠습니다. 지금도 여러 브랜드에 기획안을 보내고 있고, 편집장님의 반응도 좋으십니다.”
“아, 다행입니다.”
성필은 최근 일본의 패션 쪽 사람들과 계속 접촉하고 다녔었다. 그의 목적은 소녀연맹이 ‘보그 재팬’에 출연하는 것이었다.
전 세계 패션 업계 사람들에게 성경으로 통하는 게 바로 보그이다.
이유이도 이탈리아판, 프랑스판, 미국판, 영국판 보그를 매달 구매할 정도이니 말이다.
보그는 웬만한 국가마다 발행하는 잡지이지만, 그중에서도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 영국의 보그는 가장 급이 높다.
만약 그중 하나를 빼고 다른 나라를 넣어야 한다면 그건…….
‘일본.’
‘보그 재팬’은 유일하게 서양 패션계에서 경력으로 쳐주는 동양 패션 잡지이다.
만약 소녀연맹이 그 지면에 실릴 수 있다면, 해외 진출에 도움이 될 것이다.
가로 엔터가 돈 하나 쓰지 않고 서양권에 소녀연맹을 홍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표지가 아니어도 돼.’
애초에 보그 표지를 장식할 정도가 되려면 아이돌 그룹 중에서도 정상급이어야만 한다.
‘소녀연맹 전원이 아니어도 돼.’
보그걸과 달리 멤버 전원의 인터뷰, 촬영 사진이 게재될 정도로 만만한 잡지가 아니다.
‘단 한 명이라도.’
정말 단 한 명이라도 보그 지면에 오를 수만 있다면, 성필은 더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신아름의 꿈이 명품 브랜드 앰배서더라던가?
그녀가 들으면 싫어하겠지만, 그녀의 외모는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을 자극할 만하다. 독특하고도 아름답다.
‘보그에 오르면 앰배서더 제안이 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일본 브랜드 앰배서더는…… 우파루파의 극도로 귀여운 이미지 때문에 무리겠지만…….
아무튼 보그에 오르는 건 신아름의 꿈에 다가가는 길이자, 소녀연맹의 해외 진출에 박차를 가하는 추진체가 될 것이다.
“제가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성필과 에디터가 악수를 나누었다.
이 에디터는 성필이 만나본 인물 중 가장 보그 재팬과 가까운 사람이다.
성필은 부디 그가 잘해주길 바랐다.
* * *
[“내가 목표로 하는 장르는 하양”
하양(Hayang)
24세의 그녀는 소녀연맹의 메인 래퍼로 특유의 악센트와 파워풀한 래핑이 강점. 또한 그녀만의 중후한 보컬은 팬들 사이에서도 정평. 무엇보다,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예쁘다!
― 가장 신경 쓰는 메이크업 포인트는?
아이래시를 할 때 가장 집중하고 신경을 쓰는 편입니다. 속눈썹이 짙고 많아요. 제대로 정돈하지 않으면 가끔 눈을 찔러서 아픈(웃음). 리카가 가끔 낙타라고 놀려서 마음이 아파요.
― 본인이 생각하는 본인의 매력!
얼굴.
― 이렇게 간단히?!
얼굴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얼굴이 아니었다면 소녀연맹이 되지도 못했을 것. 항상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덕분에 과분한 동료들과 삶을 얻었습니다.
― 다른 매력은 없을까요?
노력. 정말 노력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습니다.
― 목표가 있어요?
아이돌로 따지자면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것. 정점. 인생의 목표로 따지자면 버킷리스트는 네 개. 첫 번째는 최고의 아이돌, 두 번째는 결혼, 세 번째는 해외여행. 네 번째는 제 나이가 나이인지라 웃기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아이가 갖고 싶습니다.
― 이건…… 90년대 전형적인 아이돌 답변에서 다른 의미로 벗어났네요. 보통은 좋은 아내나 좋은 어머니라고 대답하는……(웃음).
웃을 줄 알았어요.
― 우습단 건 아닙니다(진땀)! 멋진 목표예요!
― 일본에서 하고 싶은 게 있나요?
정말 많지만 지금은 하지 않습니다. 좋은 경험은 아껴두고 싶어요. 그게 처음이라면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최고의 순간, 최고의 기분으로 모든 걸 쏟아내듯이 즐길 겁니다.
― 굉장히 금욕적이다. 역시 노력 천재. 최고의 순간이란, 역시 최고의 아이돌이 됐을 때?
네. 디즈니 랜드는 아쉽지만 4년 후로 미룹니다.
― 혹시 가장 아끼는 멤버가 있나요? 답하기 곤란하시면 안 해도 괜찮습니다.
설하 언니를 아낍니다.
― 이유는?
귀여워서.
― 끄덕.
너무해(히도이)! 편애얏!
리카, 저리 가.
―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하고픈 말은?
하고픈 말은 앨범에 모두 담아뒀습니다. ‘인트로: 러브’를 들어주세요.
― 자연스러운 영업력, 과연 프로 아이돌이다.
사람들에겐 누구나 자신감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하찮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성장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괴로운 순간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 ……그럴 때는?
팔굽혀 펴기를 해 보세요.
―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아무리 힘들어도, 기운이 없어도, 자기가 무능력하게 느껴지더라도, 팔굽혀 펴기 한 번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다음 날은 두 번, 세 번, 그렇게 조금씩 늘려가 보라. 세상일이 다 그렇습니다. 사소한 것부터 조금씩 해나가면 결국은 뭐든 이룰 수 있습니다. 팔굽혀 펴기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사소한 것 하나, 뭐든 성취해가면서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해보세요.
― 저는 팔굽혀 펴기 정자세로 못 합니다.
그건 좀 심한(웃음)…….
― (웃음).
무릎을 대고 하면 됩니다. 지금 봐 드릴게요.
― 네?]
“그 에디터 거짓말한 거 아녜요?”
신아름의 불평에 장하양은 읽고 있던 보그걸 잡지를 살짝 내렸다. 잡지의 귀퉁이 위로 옷을 개고 있는 신아름이 눈에 들어왔다.
“보그 지면에 실어주긴 개뿔, 몇 주째 연락도 없구만. 하긴, 그만한 영향력이 있으면 왜 보그 쩌리 잡지에서 일하고 있겠어? 진작 보그로 올라갔겠지.”
“아름아.”
장하양이 조용히 부르자 신아름이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딱히 비하한 게 아니라요…… 아니, 미안해요. 암튼 괘씸하잖아요. 팀장님 하루하루 실망하는 게 얼굴에 보여서 더 그래요.”
하긴, 성필은 요 몇 주간 꿈에 살았더랬다. 소녀연맹이 보그에 나오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장하양도 성필의 설레발을 곁에서 지켜보았기에 마음이 아팠다.
“그 인간 다시 만나기만 해봐라. 갑질 제대로 할 거예요.”
“애초에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잖아.”
“네?”
“우파루파.”
장하양이 별거 아니란 듯 말했다.
“지금 일본에서 우리 이미지가 우파루파잖아. 어떤 패션 기업에서 우릴 쓰려고 하겠어.”
“……그건 그렇지만요.”
신아름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빨래를 마저 개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본 스케줄 중 모처럼 쉬는 날이건만, 생각보다 즐거운 기분은 아니었다.
“쌤 괴롭히러 갈래요?”
갑자기 신아름이 그리 말했다.
“왜?”
“쌤이 우파루파를 서브 타이틀로 인정해줘서 이렇게 된 거잖아요. 소녀연맹의 쿨한 이미지 다 어디 갔어요.”
“음…….”
“언니가 쌤 안으면 내가 쌤 머리 막 헝클어뜨리고 쓰다듬을게요.”
“그래.”
마침 장하양도 심심했던 터라 가기로 했다.
신아름과 장하양은 다른 반 친구를 골리러 가는 초등학생처럼 함박웃음을 지으며 백설하와 리카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나가.”
침대에 누워 읊조리는 백설하와 마주하고, 조용히 문을 닫고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백설공주는 자는 중이에요!”
어느새 리카가 둘의 뒤에 서 있었다. 그녀는 외출이라도 하려는지 모자와 선글라스를 쓴 채 위풍당당 허리 위에 손을 올려두고 있었다.
“왕자님의 키스를 기다리면서요! 그리고 아타시(내)가 왕자님이 될 거예요!”
“너 쌤 깨우려고? 죽으려고 작정했어?!”
신아름이 말렸지만 리카는 막무가내였다.
“그치만 드럼이랑 춤한테 아라쨩을 뺏겼는걸! 아름이랑 하양 언니도 안 놀아주잖아! 쌤이라도 깨워서 갈 거야!”
“너 죽어! 죽고 말 거야!”
“그렇게 걱정되면 아타시(나)랑 같이 히라주쿠 갈래?”
“죽어라. 젊고 강한 채로.”
리카는 ‘아름이 히도이(너무해)!’라 외치면서 신아름의 어깨를 토닥였지만, 신아름은 요지부동이었다.
어쩔 수 없이 리카는 사문(死門)을 넘었다.
백설하가 침대 위에서 비몽사몽 상체를 일으킨 채로 전화를 받고 있었다.
“네, 네에, 이사님.”
아까까지만 해도 잠겨 있던 목도 어느새 풀었는지, 목소리 톤도 올라가 있었다.
“저 안 자고 있었, 크흠.”
아직 목이 덜 풀렸나 보다. 백설하가 헛기침으로 잠긴 목을 최대한 풀었다.
[설하 너 담배 피니?]
“아, 아녜요! 에어컨 틀고 자서 건조해요 방이!”
[하하, 그렇지? 아이돌이 담배 피울 리 없지?]
성필은 멤버들에게 연애를 권장하는 주제에, 담배에만큼은 굉장히 단호하다. 무슨 트라우마라도 있는 것일까?
굉장히 편협한 아이돌관이 아닐 수 없다.
[별건 아니고…….]
백설하는 성필의 이야기는 듣는 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통화를 마치곤 얼굴을 손바닥으로 마구마구 비볐다.
간신히 잠을 깬 그녀가 침대 아래로 발을 내리자.
“얘들아?”
장하양, 신아름, 리카가 백설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앞으론 쌤 깨울 때 박 이사님한테 연락할 거예요!”
“으, 응? 왜, 나 깨웠었어?”
“아타시(저)는 안 했지만 아름이랑 하양 언니가 깨웠다구요! 정말 필사적으로(아님) 깨웠는데 안 일어났으면서, 박 이사님 전화에는 바로 일어나시다니! 배신감이 들어요! 멤버보다 프로듀서가 중요한 건가요!”
“아니, 박 이사님 전화는 받아야지……. 나 리더고…….”
백설하는 비틀비틀 침대에서 빠져나와 멤버들을 소집했다. 조아라는 10분만 기다려달라고 해서, 나머지 멤버들만 식탁에 둘러앉았다.
“조아라 또 그 옷 입고 춤 연습하나?”
“나도 보고 싶어! 같이 목욕도 하면서 옷으로 부끄러워하다니, 언어도단이야!”
그때 조아라의 방문이 쾅 열렸다.
그리고 조아라는 리카에게 전속력으로 달려와 정수리를 손날로 톡 때렸다.
“언어도단!”
그러고 나서 아무 일 없단 듯 자리에 앉았다.
“뭔 일인데요? 휴일인데?”
“으응, 그게…….”
“왜 내가 맞은 건 아무도 신경 안 쓰나요! 방금 명백하게 폭력을 당했다구요!”
“박 이사님이 꼭 다 모아두고 말씀하라고 하셨거든.”
“나 그냥 일본에서 솔로로 컴백할게요. 지금까지 수고하셨습니다.”
잠시 후, 리카는 백설하의 무릎 위에 앉아 그녀에게 안겼다. 백설하는 마치 무릎 위에 강아지라도 올려놓은 것처럼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보그 재팬’ 촬영 결정됐대.”
멤버들이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포기하고만 있던 사안이기 때문이다.
“와, 아저씨 뭔데? 에디터한테 뭘 어디까지 해줬으면 그걸 받아 들여줘? 미쳤다, 우리도 이제 셀럽이에요?”
“하양이만.”
“네?”
“하양이만, 촬영하기로 했어.”
멤버들의 시선이 장하양에게로 모였다.
일순 당황하던 장하양은, 갑자기 당연한 일이라는 듯 오만에 잠긴 눈빛을 띠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네요.”
“아까는 우파루파 때문에 불가능하다면서요.”
“아하하, 내 재능은 우파루파도 뚫나 봐.”
“저 근데…….”
백설하가 말을 이었다.
“단독 촬영이 아니야.”
“그럼요?”
“한 명이 더 있는데, 그 사람이…….”
* * *
KS 엔터 1층의 카페는 저녁이 지나면 민간인에게 개방되지 않는다. 이후로는 오직 직원들을 위한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곳의 한 자리를 진저와 진소유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소유의 표정은 심히 언짢았다.
진저 때문이었다.
“소유 언니, ‘후쿠요 히다카’ 총매출이 얼마임미까?”
“……3,000억 원.”
“그렇슴미까? ‘셀린느’는 1조가 넘슴미다.”
“어쩌라고.”
“그냥 그렇단 검미다.”
진저는 명품 브랜드인 ‘셀린느’의 앰배서더가 됐다. 그리고 어디서 들었는지, 브랜드의 매출 정보를 가지고 자꾸만 진소유와 비교하는 것이다.
본인은 장난이겠지만, 계속 들으니 짜증이 안 날 수 없었다.
“이거 티 보이심미까?”
진저가 본인의 티를 손가락을 집어 보였다. 중앙에 떡하니 새겨진 ‘CELINE’이란 금박 문자가 빛났다.
“고급스럽슴미다. 총매출 1조가 넘는 기업이 만든 거라서 그런 거 같슴미다.”
“메이, 너 나한테 자격지심 있니?”
“없슴미다.”
“아님 어린애라서 그런가?”
“저 어린애 맞슴미다. 한국 법으로도 청소년임미다. 21살 어린애임미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만으로 청소년이야.”
“소유 언니가 청소년이라니…….”
“뭐.”
“아님미다.”
진저.
연습생 때만 해도 훨씬 귀여웠는데.
아니, 최근까지만 해도 귀여웠는데.
어쩌다 이렇게 변해버렸는지 모르겠다.
‘아니지.’
진소유는 자기 자랑하는 진저를 내버려 두고 손으로 턱을 괴었다.
‘원래 이런 애지.’
본인이 뭐 하나 자랑할 거 없다고 생각했던 아이니까, 점점 아이돌로서 위치를 잡으니 무엇이든 자랑하고픈 것이겠지.
진저 또래의 애들은 주량이 몇 병이다, 게임 티어가 몇이다, 이런 걸로도 자랑스러워하니 그녀 정도면 양반일 것이다.
그녀가 이룬 성과는 진짜니까.
“어, 여기 있었네.”
그때 1팀장이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1팀장님 대체 퇴근 언제 하심미까. 관리자급이면 더 여유로워야 하는 거 아님미까?”
“여기 좋은 회사 아니야.”
“정호환 이사님께 말씀드리면 됨미까?”
“하하, 진저는 아직 한국말이 서툴구나. 부정어 사용법 더 공부해.”
“‘여기 좋은 회사 아니야’가 어떻게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슴미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1팀장은 진저가 바라는 음료를 하나 받아서 자리로 돌아왔다. 진저의 입을 막아두곤, 그는 진소유를 바라보았다.
“일본에서 일 하나 들어왔어. 무려 ‘보그 재팬’이야. ‘후쿠요 히다카’에서 제안한 기획인데…….”
“그 총매출 3,000억 원짜리 기업 말임미까?”
“얘 왜 이러냐?”
“저도 몰라요.”
“암튼, 할 거야?”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는 앰배서더잖아요.”
“좀 기획이 탐탁잖아서, 딱히 안 해도 괜찮을 거 같아.”
진소유는 매니지먼트 전문가로서 1팀장을 믿는다. 그가 탐탁지 않다면, 안 하는 게 맞겠지.
자꾸 진저가 놀려서 기분 나쁜 것도 있고.
괜히 장하양이 패션쇼에 나온다기에 ‘후쿠요 히다카’ 앰배서더가 됐나 싶다. 애초에 장하양은 앰배서더가 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아니, 될 수 없는 건가.
“그래도 소유 네가 명색이 앰배서더인데, 소녀연맹 하양이랑 무슨 굴비처럼 엮어서…….”
“받아들일게요.”
“뭐? 갑자기?”
“그게 앰배서더로서 제가 한 약속이고 제가 지켜야 할 의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