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4화
“말도 안 돼요! 드럼으로 작곡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세이코는 본인이 가지고 있던 상식이 박살 나는 것을 참을 수 없는지 격렬하게 항의해왔다.
그에 성필은 차분하게 작곡법에 관해 설명하려다가, 문득 얼마 전 리카와 나누던 대화를 떠올렸다.
‘요즘 만화나 소설에선 이런 게 유행인 거 아시나요!’
그러면서 리카가 보여준 만화가 있었다.
주인공이 너무나 간단한 사실을 알려주니 주변 인물들이 화들짝 놀라면서 ‘어떻게 그런 것을!’이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일종의 풍자만화였다.
“…….”
성필은 나른한 태도로 등을 소파에 깊숙이 묻었다. 그리고 ‘흐음’ 짧게 한숨을 내쉬면서, 게으른 천재를 연기하듯이 느릿느릿 말했다.
“아아, 모르는 건가요?”
“큿!”
성필이 언뜻 무시하는 말투를 쓰자 세이코는 쉽게도 기분이 상했다.
아무렴. 가후이자 미성년자 시절부터 작곡을 했으며, 쓰는 곡마다 대박이 나는 레이와 시대 최고의 가수(자칭)인 세이코 아닌가.
아무리 상대가 성필이더라도, 음악적 지식에 관해 밀린단 건 참을 수 없는 사태였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선배님 왤케 흥분했어요.”
“드럼으로 작곡할 방법은 없어요! 타악기엔 멜로디도 코드도 없으니까요! 설마, 박자부터 쓴다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겠죠? 그렇다면 실망…….”
“이건 ‘리듬 작곡법’이라고 하는 거다.”
“진짜 그런 게 있다고?!”
가후 세이코조차 모르고 있던 비밀스러운 작곡법의 등장!
어떻게 성필이 그런 비밀을 알고 있는가.
그건…….
* * *
“넌 씨 엔터계에서 일한다는 애가 이런 것도 몰라?”
전생의 윤상열은 쉽게도 성필을 깔보았다.
깔보는 게 성필의 실수로부터 비롯된 건 아니었다. 그저 윤상열은 성필을 싫어하는 것뿐이었고, 그러니 온갖 이유를 붙여서 그를 깎아내리려 한 것이다.
마치 ‘이것도 모르는 주제에 어떻게 나랑 같은 눈높이에 있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가 성필을 무시하는 주요한 이유는 바로 음악적 지식이었다.
“참 진짜 답답하다 답답해. 그러고서 프로듀싱은 하고 싶어?”
‘이 개새끼 또 이 지랄이네.’
이럴 때마다 성필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켰다. 화는 났지만, 윤상열에게 공개적으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성필은 학벌에 열등감이 있다.
대학을 못 간 것을 항상 후회했고, 심지어는 고등학교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도 후회했다.
그는 수능 점수가 높은 사람만 봐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건 말야…….”
그런 성필은 윤상열이 ‘이것도 모르냐?’고 무시하는 것을 묵묵히 들었다. 왜냐하면, 정말 자신이 무식한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성필은 무지가 들키면 화를 내기보다 배우려고 한다. 중학교, 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집중하지 않았던 과거를 후회하면서 말이다.
후회할 미래를 보는 기한이 몇 년 정도 됐다면, 고등학생 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했을 텐데. 물론 공부할 형편이 아니긴 했었지만.
어쨌거나 성필은 조금이라도 지식을 얻기 위해 묵묵히 윤상열의 무시를 감내했었다. 옛말에 배우기 위해서라면 개한테도 머리를 숙인다고 했으니까.
“리디안 모드는 아이오니안 모드에서 네 번째 음인 파를 반음 올려 파샵으로 만든 거거든? 반음 관계가 아이오니안이랑 비교해서 어떻게 바뀌었어?”
“어, 음, 어어…….”
“넌 머릿속에 건반도 바로 안 떠오르냐?”
“어…… 반음이, 파가 파샵이 됐으니까, 파샵 솔 사이랑 시랑 도.”
“참 빨리도 말한다.”
윤상열이 성필을 무시하는 근거로 썼던 음악적 지식들이 실은 꽤 전문적이란 것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흐른 뒤였다.
음표의 이름조차 모르는 인간이 세상의 대부분이란 걸 알게 된 건, 다행히 그보다는 빨랐더랬다.
* * *
“가장 보편적인 작곡 방식은 역시 멜로디부터 짜는 거지. 멜로디부터 만들면 장점이 뭘까?”
“정답.”
어느새 착실한 학생처럼 변한 세이코가 당당하게 손을 들었다. 성필은 조아라에게 답을 요구한 거라서 세이코를 쳐다보지 않았다.
“멜로디부터 만들며는…….”
조아라는 성필의 질문에 골똘히 고민에 접어들었다. 그런 조아라를 바라보는 세이코는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조아라가 먼저 정답을 맞출까 봐 불안한 것이다. 십수 초가 지나도 조아라가 입을 열지 않자 세이코가 다시 손을 들었다.
마치 테니스공을 든 주인을 바라보는 강아지 같았다. 그쯤 되니 성필도 세이코를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네, 세이코 씨.”
“악상을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어요. 아무것도 없으니 도화지에 스케치하는 것처럼 자유롭게요.”
“네, 정답입니다.”
세이코가 보란 듯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뻐기듯 조아라를 보았다.
“뭐요.”
조아라가 그리 말하니 세이코가 금세 주먹을 펴고 얌전해졌다.
“세이코 씨 말대로, 멜로디부터 만들면 자유롭지. 나도 지금 당장 할 수 있고. 빰빰빰 빰빰빰 빰빰빰.”
“스타워즈 표절이잖아요.”
“와, 세이코 씨 이거 아시네요? 역시 저랑 동년배라서 그런가.”
“그럼요. 저는 파쿠 이사와 다른 땅에서 살았을 뿐, 같은 시대를 살았다구요.”
“그럼 멜로디 작곡의 단점은?”
“단점이랄까, 나중에 가사를 붙이면 음절이 맞지 않아서 수정할 일이 꽤 많죠.”
“그쵸. 가사를 먼저 생각하지 않으니, 단어나 어미의 음절 수에 따라 멜로디를 바꿔야 할 일이 생겨요. 아니면 가사를 바꾸거나요.”
성필은 이 자리에 세이코가 있어 다행이라고 여겼다. 만약 성필 혼자 설명했다면 꽤 지루한 강의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조아라도 재밌게 듣고 있을…….
“선배님 그만 끼어들어요.”
조아라는 세이코가 끼어드는 게 탐탁지 않은 모양이다.
성필은 축 처진 세이코를 내버려 두고 다음 강의를 시작했다.
“다음은 가사부터 쓰는 거야. 이것도 멜로디처럼 자유로운 편이지. 음악적 지식이 없어도 누구나 쉽게 할 수 있고.”
“아저씨도 할 수 있어요?”
“그럼. ‘조아라가 좋아라. 사람 이름이 어떻게 조아라. 그래도 아라 좋아’. 어때?”
“펀치라인 죽이네. 근데 내 이름이 뭐 어떤데요.”
“아냐, 좋다고.”
“우리 부모님한테 사과해요.”
“죄송합니다.”
“일본어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소외감 느껴져요.”
“그럼 가사를 먼저 썼을 때 장점은?”
이번에는 조아라도 즉시 답할 수 있었다.
“가사에는 의미가 있으니까, 가사의 감성에 따라 곡을 쓸 수 있어요.”
“맞아. 가사는 쓰는 순간 곡의 컨셉이 결정되는 거나 마찬가지지. 그리고 또 장점이 있는데, 리듬이 생긴단 거야.”
“리듬요?”
“아까 내가 만든 가사로 해볼게. 끝에 오는 ‘아’ 발음에 발을 구를 거야.”
조아‘라’가 좋아‘라’. 사람 이름이 어떻게 조아‘라’. 그래도 아‘라’ 좋‘아’.
성필이 발로 박자를 타자 운율감이 생겼다. 운율감이라고 해봤자 유치원생 동요보다 못했지만, 예시로서 기능하기엔 충분했다.
“어때?”
“진짜네요.”
“일본어로 해주세요…….”
“다음은 코드야.”
성필이 다시 일본어를 쓰기 시작하자 세이코가 확 집중하기 시작했다.
“코드는 뭔지 알지?”
“화음이요. 근데 정확하겐 몰라요.”
“화음 맞아. 세 개 이상의 음으로 이뤄지는 화음을 코드라고 해. 아마 이 방법은 전문적으로 음악을 배운 사람들이 제일 많이 쓸 거야. 코드에 관해 배우지 않으면 애초에 못 쓰니까.”
“저는 쓸 수 있어요.”
“대단해요 세이코 씨. 이왕 대단하신 김에 문제, 코드 작곡의 단점은?”
“단점이 있어요?”
그 답을 듣고 성필은 혀를 내둘렀다. 전생에 윤상열이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코드 작곡으로 고생 안 하는 인간은 천재겠지.’
코드부터 고르는 작곡법에 곧바로 ‘단점이 있냐’고 묻는 세이코는 정말 천재임이 틀림없다.
이 방법으로 작곡하면서 막힌 적이 없고, 실패한 곡도 없단 뜻일 테니까.
“코드 진행을 본인이 창작했다면 문제가 없지만, 보통 코드 진행이란 건 먹히는 게 정해져 있잖아요.”
“아, ‘왕도진행’ 같은 걸 말하는 거네요.”
세이코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웨스턴 불렛의 오프닝인 ‘휴머니티’도 왕도진행 코드로 만들어졌다.
일본 음악에서 굉장히 많이 쓰이는 코드 진행이며, 그래서인지 리카는 오프닝을 처음 듣자마자 코드를 맞추었었다.
“한국에서도 ‘머니 코드’란 이름으로 자주 쓰이는 코드 진행이 있어요. 그렇게 듣기 좋은, 널리 알려진 코드를 따오게 되면 멜로디도 비슷해질 우려가 있어요.”
“그렇긴 하죠. 코드에 어울리는 음이 정해져 있으니까요.”
“네?”
성필이 말한 ‘멜로디가 비슷해질 우려가 있다’는 건, 같은 코드의 곡을 무심코 표절할 위험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세이코는 성필이 말한 것과 다른 이유를 댔다. 성필이 궁금하단 듯 쳐다보자, 세이코는 눈을 빛내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코드란 건 화음이잖아요. 예를 들어 C 메이저 세븐 코드는 도, 미, 솔, 시의 화음이에요. 이 코드에 어울리는 건 당연히 C(도)의 배음(倍音)이죠.”
배음, 원음과 정수배(整數倍)의 진동수를 지닌 음을 뜻한다.
“C코드라면, 멜로디는 C의 배음으로 짜는 게 코드와 어울리니 더 듣기 좋아요. 단순히 듣기 좋음만 추구하면, 멜로디의 음이 코드 안에 갇히는 거죠.”
“왜 C코드는 C의 배음이 더 듣기 좋은 건데요?”
조아라가 그리 묻자 세이코는 ‘그걸 몰라?’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성필은 세이코의 얼굴에 윤상열을 겹쳐 보았다.
대강 조아라가 어떤 기분일지 예상이 갔다.
“‘도’ 안에는 ‘도’의 배음들이 전부 들어 있으니까요. 자연스레 그 배음을 함께 울리면 화음이 되는 거예요. 배음에서 벗어난 음, 예를 들면 ‘도’와 ‘레’와 ‘솔플랫’을 같이 치면 불협화음이 되는 거죠.”
“음 하나에 배음들이 전부 있다고요?”
“안 들리나요?”
세이코가 이죽거렸다.
“아, 그래도 이해해요. 보통 사람들은 못 듣는다고 하니까요. 아라 씨는 ‘도’를 치면 ‘도’만 들리는 모양이네요? 저는 서너 번째 배음까지는 들리는데, 안타깝네요.”
세이코는 의기양양하고 자신만만하며 상대를 깔보는 미소를 띠었다.
성필은 손을 치켜들려는 조아라의 팔을 붙잡아 말려 세웠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선배에게 손을 들면 어떡하는가. ‘뉴아사’ 때처럼 경연으로 싸우는 사이도 아니고 말이다.
“아무튼 코드부터 쓰는 건 뭔가 뭔가예요. 감옥에 갇힌 채 곡을 쓰는 거 같아서, 저는 선호하지 않아요.”
세이코는 차분히 그리 말했다.
“아까는 단점이 있냐고 하셨잖아요.”
“생각해보니까 있네요.”
새삼 성필은 세이코란 사람을 다시 보게 됐다.
평소엔 너무 애 같아서 어린애가 어른 가죽을 뒤집어쓴 것만 같았는데.
‘아티스트가 맞구나.’
그냥 아티스트가 아니다.
작사, 작곡을 홀로 해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불세출의 대가수다.
이제 보니 ‘나 꽤 하지?’라는 듯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고 은근히 칭찬을 바라며 흘끔흘끔 쳐다보는 모습조차도 꽤 아우라가 있다.
“아저씨, 마지막은요?”
조아라가 보채듯이 물어왔다.
성필은 세이코의 아우라에서 벗어나 피날레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세이코도 관심 있는 주제가 나오자 새침한 척을 관두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리듬부터 짜는 거야. 당연히 리듬 악기인 드럼이 주가 돼. 아니면 베이스 기타로 리프를 만들어도 되고. 물론 이건 드문 방법이야.”
“그렇죠! 제가 무식한 게 아니에요! 파쿠 이사 말대로 드문 방법이니까요!”
“선배님.”
“그만 끼어들까요?”
“네.”
“네…….”
“보통의 작곡은 멜로디와 코드가 나오고 리듬을 짜기 시작하니까. 하지만 이 방법을 쓰는 사람도 분명히 존재해. 오히려 나는 아라한테 이 방법이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해.”
“나한테요?”
성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라는 댄서잖아.”
“아.”
“누구보다 리듬에 익숙하고 정통해. 애초에 리듬이란 건 인간의 호흡을 기반으로 만들어져 있으니까, 춤을 추는 사람일수록 리듬에 민감하지.”
특히 조아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리듬을 꿰차고 있다.
손혜빈이 말하길, 조아라는 같은 한 박자라도 수십 개로 쪼개서 듣는다고 하던가. 그 때문에 춤에서 박자를 끝까지 써서, 다른 멤버들보다 훨씬 파워풀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곤 한다.
‘설하는 연습생 때 아라랑 춤을 맞춰보고 아라가 빠르다고 했으니까.’
분명 다들 함께 박자를 맞춰 춤을 췄는데 조아라만 미묘하게 빠르다고 했었다. 실제로는 조아라가 너무 정확했던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따라가기 바쁜데, 조아라만 여유롭게 박자를 가지고 논다고 해야 할까.
“이건 멤버들 중 아라만 할 수 있는 방법일 거야. 춤을 떠올리면서 리듬을 짜 봐. ‘롱 포’ 때처럼.”
“나만 할 수 있는 방법…….”
그리 되뇌던 조아라는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잘될까요?”
“모르지.”
“무책임하잖아요.”
“리카도 설하도, 작곡에 들어가면서부터 ‘잘될까?’ 걱정하진 않아. 일단 해보는 거야. 무섭다고 시작도 안 하면 아무것도 안 만들어지잖아. 일단 리카나 설하한테 도와달라고 해봐.”
리카는 작곡 프로그램을 다룰 수 있고, 백설하는 피아노와 기타를 다룬다.
조아라가 리듬을 먼저 짜면 그 위에 멜로디와 코드를 덧씌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곡이 조아라의 마음에 든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건 연습일 뿐이다.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가서 지음이랑 그런 방식으로 작업해보는 것도 좋을 거야.”
“뭐…… 해보긴 할게요.”
조아라는 그토록 원하는 작곡법을 손에 넣었다. 심지어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작곡법이었다.
하지만 막상 방법이 떠오르고 나니 두려워졌다. 해봐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어쩌지 하고, 그녀는 두렵고 불안했다.
그걸 알았기에 성필은 조아라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가만히 있자니, 조아라가 성필이 뭔가 말해주길 기다리는 듯 올려다보았다.
“…….”
“……에휴.”
성필은 엄지를 치켜올렸다.
“난 아라가 잘할 거라고 믿어. 아무렴, ‘롱 포’에서 편곡의 천재인 지음이한테 충격을 준 천재 편곡가잖아. 무엇보다, 작곡의 경험은 퍼포먼스를 연습하는 데도 도움이 될 거야.”
“그게 끝?”
“우리 아라 항상 믿고 있어. 응원해. 천매 만재 아이돌 평생 아이돌로 살아줘.”
조아라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세이코가 물었다. 어눌한 한국어를 섞으면서.
“‘우리 아라’가 무슨 뜻인가요?”
“아, 제가 그렇게 말했어요?”
“네. 아라 씨의 성인가요?”
“내 성은 ‘조’거든요.”
“‘우리’는…… 음…….”
일본어 어감으로 적당한 게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성필은 확하고 비슷한 뉘앙스의 단어를 떠올렸다.
“나의(오레노) 아라 같은 뜻일까요.”
‘오레타치노(우리의)’는 또 세이코가 ‘우리 사이에 애 둔 기억 없어요’라면서 태클을 걸 테니.
그나마 ‘우리’라는 친근한 단어의 어감을 표현하려면 일본어로는 ‘나의’밖에 없다.
그리 설명하자 세이코가 멍하니 있다가 새된 소리로 말했다.
“에, 에?”
“근데 완전히 일본어랑 맞는 느낌의 단어가 없…….”
세이코가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울상을 짓더니 벌떡 일어나 아티스트 라운지를 뛰쳐나갔다.
“거짓말쟁이! 5년 동안 연애 안 한다고 했으면서어어어!”
성필과 조아라는 잠시 침묵 속에 있었다. 그러더니 조아라가 성필의 어깨를 주먹으로 톡 쳤다.
“우리 아라라고 부르지 말랬잖아요. 애처럼 대하지 말라고요.”
“아니, 입버릇이라서. 미안. 앞으로 절대 안 그럴게.”
“진짜 아저씨는 약속을 너무 물로 알아요.”
“미안.”
“그래서 저거, 아니, 선배님 어쩔 거예요?”
“오해 없도록 지금 미사토 씨한테 문자 보낼 거야.”
안 그러면 1시간 이내에 성필과 조아라가 연애한다는 소문이 웨벡스 전체에 퍼질지도 모를…….
성필의 폰에 착신음이 들렸다.
방금 미사토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답장이 굉장히 빠르…….
[장하양: 세이코 선배님이]
[장하양: 저 보고 도망가시길래 붙잡았는데]
[장하양: 이상한 소리를 하세요]
[장하양: 지금 어디 계세요?]
[장하양: 선배님 데려갈게요]
[장하양: 어디 계세요?]
다행히 소문이 퍼지기 전에 장하양이 붙잡은 모양이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아티스트 라운지 바깥으로 세이코의 비명이 들려오는 듯했다.
* * *
미사토의 집.
세이코는 잠자는 서유선에게서 억지로 빌린(훔친) 탐탐(드럼의 종류)을 소파 위에 놓고 통통 두드리길 반복했다.
빠르게도, 느리게도, 적당한 박자를 타고 계속하다 보니 의외로 재밌어서 계속하게 됐다.
정말 드럼으로도 작곡이 되겠는데?
“네가 모이자고 했으면서 놀기만 할 거야?”
미사토가 소리치자 세이코가 탐탐을 품에 안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치만 난 아티스트라서 요리 같은 거 못하는걸.”
“박 이사님한테는 잘만 해드렸으면서.”
세이코가 누운 소파 뒤로 샐러드 보울을 든 히무라가 불평하며 지나갔다. 그에 세이코가 태평하게 답했다.
“내가 시켜 먹자고 했잖아. 괜히 둘이 오버하는 거야. 올림픽은 자고로 KFC랑 도미노 피자 아니겠어?”
“남을 집에 초대하는데 배달 음식을 드릴 순 없잖아.”
“그건 미사토의 고집일 뿐이야. 애초에 너무 많이 만들잖아.”
“하아.”
미사토는 마지막 메인 요리를 텔레비전 앞 식탁에 놓곤 드러누운 세이코를 바라보았다.
세이코의 몰골은…….
“에휴, 오늘만 봐준다.”
너무 아름다웠다.
세이코는 저녁이 다가올 무렵부터 꽃단장을 해놓곤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요리를 도와주지 않는 것도 괜히 냄새가 배거나 옷이 더러워지기 싫어서일 것이다.
65인치 텔레비전 앞, 식탁엔 미사토와 히무라가 만든 간단한 요리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 정도면 체면치레는 될 것이다.
땀을 닦은 미사토는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유선이가 일어날 때인데.’
서유선의 생활 패턴은 거의 주 단위로 바뀐다.
어느 때는 아침에 일어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저녁에야 겨우 눈을 뜨기도 한다.
이번 주의 서유선은 저녁에 일어난다.
‘슬슬 깨워서 씻겨야겠다. 곧 박 이사님 오실…….’
현관의 초인종이 울렸다.
탐탐 드럼을 끌어안고 있던 세이코가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갔다.
“파쿠 이사 어서 오……!”
열린 문틈으로 장하양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히에에에에에에엑!”
세이코가 반사적으로 문을 쾅 닫았다.
아니, 닫으려 했다. 어느새 문틈으로 손을 집어넣은 장하양이 우악스레 힘을 주어 버텼다.
“하, 하양아 위험해!”
문 뒤에서 다급한 성필의 외침이 들렸다.
“괜찮아요.”
이윽고 거의 닫혔던 문이 삐걱삐걱 절반쯤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장하양의 웃는 얼굴이 비쳤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끼아아아아악!”
세이코가 기겁하면서 뒤로 넘어졌다. 엉덩방아를 찧은 그녀는 손으로 바닥을 짚어가면서 뒤로 물러났다.
“미, 미사토오!”
세이코는 엄마를 찾듯 주변을 두리번거려 기어코 미사토를 찾아 다리에 매달렸다. 그리고 무슨 귀신을 가리키듯 검지를 장하양에게로 뻗었다.
“왜, 왜애!”
“……아.”
미사토가 손뼉을 짝 두드렸다.
“말 안 했었네.”
“잊어먹을 게 따로 있지!”
세이코는 충격 때문에 젖은 눈가를 닦고 몸을 일으켰다. 그래, 한 명 정도는…….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리카를 위시하여 소녀연맹 멤버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리카가 바닥에 머리를 박을 기세로 허리를 숙였다.
“제이팝의 현재이자 미래이신 대선배님께 인사 거하게 박습니다!”
“꿈이지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