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91화 (491/760)

491화

시세리는 오늘 기분이 좋았다.

아빠는 안 된다고 했지만, 옆 마을까지 먼 길을 가서 촌장네 젖소의 젖을 짜왔다.

‘걸리면 붙잡혀서 무슨 벌을 받을지 모르지만.’

맛있는 빵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위험쯤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파이를 만들어야지.

아빠와 같이 먹고 남은 건 옆집의 에밀리한테도 조금 나눠줘야겠다.

‘아빠가 영국에 갔을 때 가져온 파이, 맛있었지. 그런 맛이 나야 할 텐데.’

에밀리는 양동이를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신의 마을로 돌아갔다.

여자아이가 들기에 우유가 담긴 양동이는 무거웠다. 가는 동안 계속 쉬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해가 지고 밤이 되었다. 그제야 시세리는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반겨준 건.

“…….”

여기저기 널브러진 마을 사람들의 시체였다.

나무집들엔 핏자국이 튀어 있고, 시체는 도망가다 죽은 것인지 대부분 등을 보이고 있었다.

시세리가 양동이를 놓았다.

몇 시간에 걸쳐 힘들게 가져온 우유가 땅바닥에 쏟아졌다.

“시세, 리…….”

바닥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래를 보았다.

에밀리였다.

“다행, 이다. 살아 있었…… 도망…….”

촥.

동물의 가죽을 날붙이로 벤 듯한 소리.

이어서 흐릿한 바람이 시세리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던 땀을 닦아준 바람은, 평소였다면 고맙기 그지없었겠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바람을 만들어낸 건 달빛을 받아 빛나는 시퍼런 검이었다.

“다행이군.”

검을 든 남자가 말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건 검뿐이었다. 그래서 마치 검이 떠다니는 듯했다.

그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마침내 달빛이 남자를 비추었다.

동양인, 송(宋)의 인간이다.

“살아 있는, 도망가지 않은 인간이 더 있어서.”

시세리는 떨리는 고개를 겨우 아래로 내렸다.

에밀리의 등에 짐승이 할퀸 듯한 검흔이 생겨 있었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상처였다.

“무사(武士)…….”

저 먼 거리에서 검을 휘둘러 풍압으로 사람을 베었다.

풍수기관을 지닌 무사다.

어째서 이런 곳까지…….

“‘콜트’란 사람을 아나.”

콜트.

시세리의 성(姓)이다.

시세리 콜트.

하지만 그가 찾는 건 시세리가 아닐 터다. 시세리의 아버지를 찾는 것이다.

“여기 인간들은 다 모른다더군.”

남자가 멈춰 섰다.

검을 들었으면서도, 시세리를 잡으려고 접근하지 않는다.

“그래서 죽였다.”

촥.

살과 뼈를 찢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금 옅은 바람이 불어왔다.

이번에는 피와 함께.

시세리의 다리가 피로 물들었다. 친구인 에밀리의 피로.

“너도 모르는가?”

달밤의 정적이 둘 사이를 메웠다.

시세리는 떨리는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허리를 굽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시세리가 양동이를 들었다.

“우유, 좋아해?”

“뭐?”

서걱.

남자는 갑자기 날아온 철 양동이를 두 동강 냈다. 갈라진 양동이 사이로 등을 돌려 도망가는 시세리가 보였다.

그는 천천히 걸어 시세리를 쫓았다.

“하아, 하악!”

시세리는 달리고 또 달렸다.

최대한 빨리 마을에서 벗어나야 한다.

도망가서 사람을 불러야, 군인을 불러야 해.

“꺄악!”

달리던 중 갑자기 머리 위에 드리우던 나뭇가지가 잘려 나갔다. 나뭇잎이 비처럼 쏟아져 시세리는 비명을 질렀다.

뒤를 돌아보니, 남자는 걸어옴에도 거리를 꽤나 좁혔다. 시세리는 황망하게 달려갔다.

‘도망가야 해.’

최대한 빨리…….

‘이쪽이 아니야.’

최대한 빨리, 도망가야 하는데.

‘이쪽이 아닌데!’

시세리는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나무로 지어진 오두막의 문은 박살 나 있었다. 그곳으로 달려가며, 시세리는 빌었다.

‘아빠는 도망갔을 거야. 반드시 도망갔을 거야. 아니고선 저 무사가 계속 아빠를 찾을 리 없어. 보기만 하자.’

시세리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부서진 문 안으로, 시체가 된 아버지가 보였다. 그 역시 에밀리처럼 등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시세리는 비틀비틀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끙끙대며 아버지의 몸을 돌렸다.

아버지는 죽었을 때의 놀란 표정 그대로였다.

“……어째서.”

시세리가 분노에 가득 차 어금니를 물었다.

‘아빠를 찾는다면서, 아빠를 죽인 거야?’

바보 같은 놈.

멍청한 놈.

시세리는 그 무사를 원망했다. 마을 사람을 죽인 것도, 찾는 사람조차 알아보지 못한 그의 바보 같음도.

‘죽인다.’

시세리는 무기를 찾으려 집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던 중, 아빠가 손에 쥔 망치가 눈에 띄었다.

시세리는 아빠의 손에서 망치를 가져왔다.

‘이걸로 놈의 대가리를 찍어서 죽인다.’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몸을 숨기려던 순간, 시세리는 이상함을 눈치챘다. 어째서 아버지가 망치를 들고 쓰러져 있었는가.

그녀의 눈이 아버지에서, 그의 앞에 놓인 반쯤 파헤쳐진 흙바닥으로, 그리고 살짝 드러난 나무판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뭔가를 찾으려던 거다.

‘설마.’

총이다.

아버지는 총으로 놈과 싸우려던 거다.

미국은 국민의 무장권을 보장한다.

아버지는 전쟁에도 나간 적이 있으니, 집에 머스킷 한 자루쯤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화약이나 총알까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있으니까 찾으려고 했겠지!’

시세리는 망치를 들고 흙바닥을 파헤쳤다.

나무판이 드러났다. 그것을 장도리에 끼우고 뜯어냈다.

안에는 나무 상자가 있었다.

그것을 연 시세리는 곧 혼란에 빠졌다.

‘이게 뭐야?’

총처럼 생겼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손에 딱 맞으니 총이겠지만, 이건 대체…….

“……!”

시세리는 황급히 옆으로 굴렀다. 그 즉시 시세리가 마주하던 벽면에 1자의 검흔이 박혔다.

뒤를 돌아보니 문에 남자가 서 있었다.

“감이 좋군. 송에서 태어났다면 황실에서 무사로 뽑아갔겠어.”

“뭔 개소리야.”

“맞다, 개소리다.”

남자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시세리의 어깨로부터 피가 흩날렸다. 그 순간, 생에 느껴보지 못한 고통이 뼈를 타고 전신을 내달렸다.

“끄학……!”

“앞으로 세 번의 기회가 있다.”

남자가 한 걸음 시세리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세 번째에 내가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으면 죽인다. 콜트란 사람을 아나?”

“……하.”

시세리는 어깨를 부여잡으며 천천히 몸을 뒤로 물렸다. 분명 공격당한 곳은 어깨이건만 다리가 후들거려 움직이지 않는다.

“알아.”

남자가 반색했다.

“어딨지? 누구지?”

“나다 이 씹새야!”

그건 ‘탕’이라는 소리로 표현하기엔 너무나 커다랬다. 귀를 찢는 굉음. 그와 비교할 수 있는 건 천둥·번개뿐이었다.

밤을 꿰뚫는 불꽃과 함께.

“끄아아아아아악!”

남자가 배를 부여잡으면서 쓰러졌다.

비명은 덤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얼굴을 땅에 처박고 침과 피를 줄줄 흘려댔다.

“끄어, 크흐억……!”

남자가 파리채에 얻어맞은 파리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그럼에도 손에서 검을 놓지 않았다.

시세리는 총을 든 손에서 느껴지는 충격에 넋을 놓았다. 또한 귓가에 굉음이 남아 그녀의 생각을 방해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세리는 총을 왼손으로 바꿔 쥐고 오른손엔 망치를 들었다. 그리고 떨리는 다리를 이끌곤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왜 죽였어. 왜 마을 사람들을 다 죽인 거야. 왜 이렇게까지. 넌 사람 목숨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고오오오!”

시세리가 눈물을 흩뿌리며 망치를 치켜들었다. 그 순간, 그녀 또한 남자처럼 앞으로 고꾸라졌다.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땅으로 짚으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어?”

배가 베였다.

복근이 망가져서 몸에 균형을 잡을 수 없다. 팔과 다리에 힘을 줄 때마다, 배에 상상조차 하기 싫은 고통이 찾아왔다.

“사람 목숨?”

남자가 숨을 헐떡이면서 몸을 일으켰다.

“오랑캐 새끼 주제에. 중화의 세례를 받지 못한 너희들은 짐승이다. 사람 목숨이라니, 과분한 단어를 쓰는구나. 비천한 색목인 계집년이!”

남자가 쓰러진 시세리를 걷어찼다.

시세리는 벽에 박혀 신음했다.

남자는 시세리가 망치를 놓친 것을 보곤 콧방귀를 뀌었다. 배에 구멍이 났지만, 풍수기관 덕분에 움직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돌아가서 기관을 수리받으면 쉽게 나을 것이다.

시세리는 벽에 기대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런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총구를 남자에게로 향했다.

“멍청한 년. 총은 한 발밖에 못 쏜단 것도 모르나? 그래, 네가 콜트랬지?”

남자의 얼굴에 비웃음이 서렸다.

시세리는 벌벌 떨면서 총구만 남자에게로 향할 뿐이었다. 총구 위로 남자의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아마, 자식이겠지. 콜트 그 오랑캐 놈이 새끼를 깐 거야. 아무리 짐승이라도 제 자식은 소중하겠지. 네년을 데려가겠다. 데려가서, 네 아비가 찾으러 오지 않을 방도가 없도록 괴롭게 만들어주마.”

남자가 또 한 걸음 다가왔다.

총구 끝에 걸린 남자의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그 순간, 시세리는 무언가를 눈치챘다.

총에 달린 요상한 원통.

그 원통의 구멍엔 빈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공간이 총구와 이어지는 몸통과 연결되어 있다.

원통에 있는 여섯 개의 공간.

이건, 혹시.

“오랑캐로 태어난 네 운명을 원망…….”

탕.

“아?”

탕, 탕.

“어, 으아.”

탕.

“아…….”

남자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자신의 몸에 난 다섯 개의 구멍이 보였다. 구멍에서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이 무슨…….”

남자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시세리는 일어났다.

남자의 앞으로 가 그의 등을 밟았다.

총구를 그의 머리에 가져갔다.

“내가 인간이 아니라고?”

시세리는 이를 까득 물곤 실린더를 회전시켰다. 그리고 눈물과, 피와, 비명을 내질렀다.

“이게 내 인간성이다아아아아아―!”

벼락, 불꽃과 함께 남자의 생 또한 끝났다.

시세리는 그의 등에서 발을 떼곤 권총을 떨어뜨렸다. 그렇게 한동안 멍하게 있다가, 중얼거렸다.

“죄다, 죽여버릴 거야.”

[제작

‘웨스턴 불렛’ 제작위원회]

“내 땅, 우리의 고향에서, 죄다.”

[원작, ‘웨스턴 불렛’

원작자, 오오치

총괄 프로듀서, 나카무라 신이치]

“몰아내서, 죽여서.”

[오프닝

노래: 소녀연맹

작사, 작곡: 미라이

편곡: 정지음

(웨벡스 사무소 음악사업부, 가로 엔터테인먼트)]

“모두의 원수를 갚는다.”

* * *

“끄흐윽…….”

1화 감상을 마친 리카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녀는 노트북에 나타난 시세리를 손으로 매만졌다.

“시세리가 움직여요. 시세리가 움직인다구요…….”

“움직이는군요.”

“한 이사님 감상이 그거뿐이에요?!”

“잘 움직이는군요.”

“냉혈한!”

리카의 강력 추천으로 ‘웨스턴 불렛’ 전권을 강제로 읽은 한구인. 이어진 리카의 초강력 추천으로 애니메이션까지 보게 됐다.

“저는 개인적으로 만화가 더 좋은 거 같습니다.”

“에엑?! 하지만 애니메이션은 움직이잖아요!”

“그렇군요.”

“움직인다구요! 시세리가 움직인다구요!”

“예, 뭐. 애니메이션이니까요.”

“이게 내 인간성이다아아아아!”

분노한 리카가 허리춤에서 리볼버를 꺼내 한구인의 가슴에 쏘아댔다.

1년 365일 정장 재킷과 와이셔츠를 입는 한구인에게는 조금의 피해도 없었다.

“손나(그런)! 망할 풍수기관!”

“정말 풍수기관이란 게 있으면 좋겠군요. 그럼 비비탄을 잡아서 리카 씨의 이마로 날려버렸을 텐데 말입니다.”

“가로 엔터의 1등 공신에게 무슨 말인가요! 당장 사과하세요!”

“그런데 항상 궁금했습니다만, 왜 19세기에 송나라가 있는 겁니까?”

“그건 ‘웨스턴 불렛’ 특별 설정집을 보면 나와요! 송나라 황실은 풍수기관을 발명, 독점함으로써 황실의 영향력을 절대적으로 만들…….”

그때 휴게실로 권아인 경리가 들어왔다. 그녀는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한구인과 리카를 보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한구인도 마주 인사해주고 다시 리카의 이야기에 집중하려고 했는데…….

“그래서 어떻게 된 겁니까?”

“이에(아니)…….”

리카는 권아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오타쿠 토크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빠져 있다고 신아름과 조아라에게 여러 말을 얻어먹던 리카. 그녀는 자연스레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일반적인 취미가 아니란 사실을 깨우쳤다.

그래서 일반인인 권아인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기 싫은 것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설정이 꽤 괜찮군요. 송나라를 배경으로 잡은 것도 이해가 갑니다. 송은 최초로 자본주의에 근접했다고 평가받는 나라니까요. 송의 석탄 생산량은 1850년대 영국과 동급…….”

“그 얘기는 이제 됐어요!”

“된 겁니까?”

리카는 한숨을 쉬면서 노트북을 닫았다.

“한 이사님의 실연을 달래주려고 일부러 애니메이션까지 같이 봐 드렸는데, 이게 뭔가요!”

한구인은 놀랍도록 관심이 없었다. 만화책까지 다 읽었으면서 말이다.

“제 실연을 걱정해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딱히 실연이 아닙니다.”

모두의 주목을 받던 한구인―서아영 커플은 최종적으로 성립되지 않았다.

한구인은 고민하다가 결국 서아영에게 최종 선택 문자를 보내지 않았었다. 반대로 서아영은 한구인에게 문자를 보냈었다.

한구인이 서아영에게 찾아가니, 돌아온 건 서아영의 고백이 아니었다.

‘쌍방으로 최종 선택이 됐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서아영은 그런 관계는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길 바랐었기에, 한구인이 최종 선택 문자를 보내지 않은 것을 이유로 관계의 끝을 선언했다.

사실, 한구인으로선 청천벽력이었다.

‘선택받으면 받아들이려고 했었는데…….’

한구인은 일과 연애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었다. 지금 연애를 시작하는 게 옳은가 고민과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서아영에게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서아영이 자신을 선택해준다면, 그래도 잘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했었는데…….

“실연이 아니긴요! 간 보다가 실패한 것도 실연이에요!”

“간 보…… 하아, 그렇군요.”

한구인은 재킷을 바로 입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백했으니까 사귄다는 건 안일한 생각이니까요. 그런 식으로 시작된 사랑이 좋은 결말을 맺을 리는 없죠. 게다가 저는 문자를 보내지 않은 시점에서 거절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입니다.”

“솔직히 안타까워요! 매일 일 일 거리다가 평생 연애 한 번 못 한다구요!”

“연애를 못 해보진 않았습니다.”

“6개월 이상 이어진 적 없잖아요!”

한구인이 마음의 눈물을 또르르 흘렸다.

“돈을 벌어다 준다고 회사 사람들을 상처 입힐 권리는 없습니다, 리카 씨…….”

“에, 고,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

“아뇨, 맞는 말입니다.”

“이중인격인가요!”

“지금 생각하니 잘됐단 기분도 드는군요. 어중간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바에야, 깔끔하게 끝나는 쪽이 좋겠죠.”

“……저, 한 이사님! 주제넘은 말일지도 모르겠지만요!”

리카는 그러고도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은근슬쩍 말했다.

“서아영 님은 지금이라도 한 이사님이 대시하면 받아줄 거예요!”

“예?”

“서아영 님은 그런 마음인 거예요! 한 이사님이 너무 잘나서 불안한 거요! 그래서 본인이 대시해봤자, 한 이사님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지 본인을 버릴 수 있단 생각에 안 사귄 거예요!”

“그런 겁니까?”

“그럼요! 연애엔 그런 요소도 중요해요!”

“상대가 너무 잘나면 오히려 불안하고 꺼려진다는 겁니까.”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잘난 쪽에서 먼저 다가가야 해요! 예를 들어 아이돌과 일반인의 관계라면, 아이돌이 먼저 다가가야 하는 거죠! 만약 한 이사님이 정말 ‘얘 아니어도 나는 여자 따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니까’라고 생각하시는 게 아니라면요!”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한구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따스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역시, 지금의 저는 연애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방송에선 그렇게 깨가 떨어졌으면서요?”

“지금의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더 나아가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게, 저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감동이에요! 하지만 한 이사님이 하는 건 재무적인 부분이라 저희의 성장과는 상관없지 않나요!”

“…….”

한구인은 우울해져서 휴게실을 나왔다. 리카가 ‘농담이었어요!’라고 해도 돌아보지 않았다.

삐친 건 아니었다.

‘해방이군.’

서아영을 최종 선택하지 않은 이유가 일 때문이라고 한 만큼, 그는 더 이상 일하지 않고 휴게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해방이다.

일하러 갈 시간이다.

“아인 씨.”

한구인은 자신보다 먼저 휴게실을 나서 앞서가던 권아인을 불렀다.

커피를 들고 가던 권아인이 뒤로 돌아보았다. 그 짧은 사이 한구인은 권아인을 따라잡아 옆에 섰다.

“아, 이사님.”

권아인의 미소는 어딘가 어색했다. 하지만 한구인은 그 미묘한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둘은 계단을 올라가면서 대화했다.

“먼저 가시다니, 정이 없으시군요.”

“아, 아, 리카랑 얘기하는 데 열중하시는 거 같아서…….”

“농담입니다.”

“하하…….”

권아인의 반응이 시원찮자 한구인은 뻘쭘해졌다.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으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상당히 올라갔다고 느꼈건만, 착각이었을까?

단순히 방송이라 사람들이 맞장구를 잘 맞춰준 걸까? 그렇다면 참으로 절망적이다.

아니면…….

“토익 810점 기념 파티는 어떠셨습니까?”

“예?”

“그땐 못 가서 죄송합니다. 상사로서 반드시 참석했어야 할 기념비적인 파티였는데 말입니다.”

“아니, 아녜요. 촬영 때문이셨잖아요.”

“오랜만에 재무팀 회식이라도 어떻습니까. 토익 810점 파티도 겸해서요.”

“그렇게까지는……!”

“세무사 시험 때문이지 않습니까.”

권아인이 입을 다물었다.

“제가 아인 씨께 추천드린 일이었습니다. 아인 씨가 제가 드린 말씀 때문에 노력하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상사로서 보기 좋습니다. 감사하는 마음도 있고요. 그러니 꼭 축하드리고 싶습니다.”

“…….”

권아인은 고개를 사선으로 내리고 바닥만 보았다. 계단을 한 걸음씩 오르는 자신의 발이 보였다.

‘이젠 포기했는데…….’

한구인을 향한 마음은 접기로 했다.

빛나솔을 종횡무진 누비는 한구인을 보니 마음이 접힐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그의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고 속에 불이 나다가도, 회차가 거듭될수록 아무렇지 않아졌다.

애초에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같은 건…….’

휴게실에서 리카가 그랬던가.

잘난 사람과 평범한 사람의 관계에선, 잘난 사람이 먼저 다가가야 한다고 말이다. 안 그러면 관계가 이어지지 않는다고…….

‘나랑 한 이사님 중 잘난 쪽은 어디일까.’

권아인은 한구인에 비해 나이가 적다.

‘그렇다고 내가 갑도 아닌 거 같아.’

한구인의 얼굴을 보고, 어떻게 감히 나이 같은 걸로 비벼보려 하겠는가.

심지어 학력이며 스펙이며 지위 같은 것도 권아인과 상대가 안 된다.

“아.”

그때 한구인이 뭔가 깨달은 듯 걸음이 살짝 늦춰졌다.

“사정이 여의찮으시다면, 꼭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는 권아인이 ‘불편해한다’고 느낀 것이다.

그에 권아인이 반사적으로 말했다.

“저, 사이버 대학 다녀요.”

“예?”

“학점 따서 회계사 시험도 볼 거예요. 세무사 먼저 통과하고요. 그, 이거 한 이사님이 시켜서 하는 거니까요.”

권아인은 용기가 없다.

그러니 용기를 얻을 계기가 필요했다.

“그러니까, 만약 제가 세무사 통과하면 소원 들어주실래요?”

“소원 말입니까? 예, 알겠습니다.”

“……제, 제가 뭘 바랄 줄 아시고요?”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한구인은 권아인이 제시할 게 연봉 상승 정도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녀가 자격증을 취득하면 연봉에 반영해주기로 했으니, 어차피 연봉은 올려줘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권아인이 부탁할 건…….

‘더 큰 연봉 상승이군.’

그 정도야 얼마든지.

이토록 향상심 높고 노력을 마다치 않는 직원이다. 돈으로 잡아둘 수 있으면 잡을 것이다.

지금까지 합을 잘 맞춰오기도 했고 말이다.

‘사장님이 바라시는 기업 풍토가 가족적인 집단이기도 하고.’

그러한 풍토는 시간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소한 노력부터 시작되니, 한구인은 홍규헌의 바람에 따라 노력해야 하리라.

“그러니까 부디 목표에 도달하십시오. 후일 경리가 아닌, 더 높은 직급으로 불리실 수 있도록요.”

“…….”

권아인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네!”

“그럼 오늘 파티는 없는 걸로 하시겠습니까?”

“없긴요. 재무팀 회식해야죠.”

“알겠습니다.”

둘은 아까와 달리 경쾌해진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애니 오프닝 좋던데요?”

“저도 동감입니다. 소녀연맹분들이 부르셨으니 당연합니다.”

“그쵸.”

그렇게 홍규헌의 바람인 가족 같은 회사 분위기는, 조금씩 조금씩 이뤄져 갔다.

* * *

경호원 임형빈.

그는 이번에 동료들과 함께 소녀연맹이란 아이돌 그룹의 경호를 맡게 됐다.

그들의 임무는 한국에서의 출국부터 일본에서의 입국까지 그룹 멤버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아이돌 팬들 진짜 미쳤으니까 조심해라.”

선배가 그리 조언해주었다.

임형빈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선배가 맡은 그룹은 대부분 보이그룹이고, 걸그룹의 팬들이 그만큼 극성맞지는 않을 테니까.

‘게다가 걸그룹 팬이면 남자잖아.’

여자들이 달려들면 경호원이 제지하기가 어렵다. 자칫하다가 중요 부위에 닿기라도 한다면 법적으로 고소당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상대가 남자라면 팔을 내밀어 미는 것도 가능하니, 걸그룹 경호는 난이도가 더 낮은 편일 것이다.

“일본은 잘 모르겠지만, 한국이랑 비슷하지 않을까 싶네. 조심해라.”

선배는 임형빈이 가는 당일도 걱정이 가득했다. 아마, 회사 내에 아이돌 경호를 서다 구설수에 오른 이들이 꽤 있어서이기 때문이다.

아이돌 경호는 다른 일과 꽤 다른 점이, 사방에 카메라가 들이밀어진다는 것이다.

급박한 상황에선 경호원의 대처가 과격해지거나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는데, 팬들은 그것을 영상으로 남겨 항의하곤 했다.

“걱정 마세요. 문제 안 생기게 잘하고 올게요.”

임형빈은 동료들과 함께 목적지로 향했다.

가로 엔터와 접촉하고 무사히 한국에서 떠나갔다. 그래도 기자들까지 대거 있다 보니, 한국에선 별일이 없었다.

가는 동안, 임형빈은 소녀연맹이란 그룹의 면면을 볼 기회가 있었다.

‘와, 살면서 본 사람들 중에 제일 예쁘네.’

그는 음악이라 해도 명확한 취향이 있기보다, 음원 사이트 TOP에 오른 것들을 들어보고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하는 편이다.

소녀연맹의 음악은 몇 번 들었지만 얼굴을 정확히 보는 건 처음이다.

‘특히 하양 씨는 무슨 배우 같아.’

경호 때문에 그녀의 옆에서 걸으니 왠지 모르게 불편해졌었다.

자기보다 머리가 두 배는 작은 사람이 옆에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왠지 자신이 대두처럼 느껴졌었다.

비행기 안에서 임형빈은 짧게 일본어를 외웠다.

“토오시테구다사이(비켜 주세요). 도이테구다사이(비켜 주세요). 뭐가 다른가?”

‘도이테구다사이’가 짧으니 그걸로 외우기로 했다.

경호원들은 몰려드는 팬들을 향해 한국에선 보통 ‘비켜주세요!’ ‘비켜요!’라고 외친다.

일본에서도 한국어로 그리 말할 수야 있고, 뉘앙스가 전달되겠지만, 아무래도 일본어로 하는 쪽이 낫겠지.

‘그런데, 소녀연맹이 많이 유명한가?’

임형빈은 아이돌 쪽은 잘 몰랐다.

그나마 케이어스나 글로브 같은 이름을 아는 정도였다.

소녀연맹도…….

‘리카, 이상한 한국어 쓰는 애. 설하, 더 언노운 싱어 우승자에다가 몸매가 대단함. 하양, 차 유리 부숴서 미래차 주가 내린 애. 그리고 엄청 예쁨.’

임형빈은 깜짝 놀랐다.

‘내가 멤버를 세 명이나 외우고 있었네?’

아이돌 그룹 멤버 이름 같은 건 어릴 때 조금 알곤 외운 적이 없었는데.

물론 경호를 맡으며 그녀들의 기본적인 정보는 파악했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임형빈은 이미 소녀연맹의 정보를 갖고 있던 것이다.

‘내가 이렇게 알 정도면 유명한 거겠지?’

애초에 국뽕연맹이란 이름도 알긴 했었고.

‘뭐, 그래도 일본 입국 땐 한국보다 낫겠지?’

국뽕연맹이란 이름을 얻을 정도로 일본에서 선전했다지만, 아무래도 한국보다 인기는 낮을 테니까.

곧 비행기가 하네다 국제 공항에 도착한단 음성이 들려왔다.

임형빈은 일본어 회화책을 덮곤 몸을 풀었다. 그가 동료들에게 물었다.

“많이 고생하진 않겠지?”

* * *

‘뭐여.’

임형빈이 입국하자마자 본 건 어마어마한 인파였다. 공항 측에서 따로 라인을 설정해두고 소녀연맹을 보러 온 사람들을 막을 정도였다.

공항 직원이 직접 소녀연맹을 에스코트하기까지 했다. 공항을 가득 메운 팬의 바다에, 임형빈은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뭣보다 임형빈을 당황시킨 건 팬의 성비였다.

분명 소녀연맹은 걸그룹일 텐데…….

‘여자가 더 많잖아?’

공항 안이 이 정도면, 밖에는 더 많을까?

눈을 어지럽히는 사람들보다 더 신경이 거슬리는 건 팬들의 목소리였다. 너무 커서 귀청이 찢어질 것 같았다.

여자 특유의 하이톤이 사방에서 휘몰아쳤다. 남자 팬들은 지지 않으려는지 무슨 유격 훈련 함성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그야말로 소리의 폭풍.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서 더 당황스러웠다.

“우파루파!”

“루파 우파루파 루파!”

“온니! 여기이 바주세여!”

“아라쨩 세쿠시!”

“우파루파! 우파루파! 우파루파!”

“우파우파!”

“리카쨩 콧치(이쪽) 콧치!”

“쇼죠렌메(소녀연맹)가 키타아아아아(왔다아아아아)!”

무슨 사이비 광신도 집단을 보는 것만 같았다. 다들 머리에 우파루파인지 뭔지 머리띠를 쓰고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임형빈은 넋을 놓고 있던 것도 잠시, 점점 안전선을 밀고 들어오는 팬을 보곤 팔을 활짝 펼쳤다.

소녀연맹이 공항을 나가 밴에 탑승할 때까지, 손가락 하나 닿게 해선 안 된다.

그가 폐 가득 숨을 집어넣고, 외쳤다.

“톳테구다사이(찍어 주세요!)―!”

그렇게, 일본 인민이들 사이에서 한동안 밈이 되었던 ‘사진 찍어주세요남(男)’이 탄생했다.

* * *

공항에서 나와 밴에 탄 백설하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대체 팬들이 언제 씌웠는지, 그녀의 머리엔 우파루파 머리띠가 세 개쯤 씌워져 있었다.

그에 비해 다른 멤버들은 멀쩡했다.

“왜 나만……?”

“설하가 귀여워서 그래.”

성필이 그리 말하자 백설하가 울상을 지었다.

‘이제 리카 마음을 알겠어…….’

성필이 귀엽다고 하면 ‘아타시(나)는 예뻐요!’라고 대꾸했던 리카.

백설하는 이제 그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게 됐다. ‘귀엽다’는 말은, 사실상 놀리는 거다.

“이왕 말 나온 김에 ‘우파루파’ 해주면 안 돼?”

봐라.

그냥 놀리는 거지 않은가.

“보고 싶은데.”

“…….”

백설하는 머리 위에 양손을 올리고 말했다.

“우, 우파루파아…….”

“쓰읍, 일본 팬분들한테도 그런 모습 보여드릴 거야?”

“우파루파아!”

소녀연맹, 일본 도착.

그리고 왠지 모르겠지만, 일본은 우파루파의 왕국이 되어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