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90화 (490/760)

490화

가로 엔터가 한 가지 소문으로 떠들썩해졌다.

“들었어요? 이번에 연습생 중에 소련이들 곡을 평가곡으로 선택한 애들 있대요.”

“진짜요? 와…….”

연습생들은 주마다, 달마다 평가를 받는다.

평가 주제는 회사가 선정해주기도 하고, 연습생이 직접 선택하기도 한다.

그리고 소녀연맹의 곡은 지금껏 단 한 번도 평가곡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 신인개발팀이 주제로 낸 적도, 연습생들이 주제로 선택한 적도 없단 뜻이다.

“걔들 강심장이네.”

어째서 소녀연맹의 곡을 평가곡으로 내지 않는가. 이미 직원들은 완성본을 눈에 익혔기 때문이다.

원래 커버란 게 원본의 열화판이 될 수밖에 없다지만, 소녀연맹의 곡은 열화의 열화판이 될 것이다.

“비교 대상이 다른 연습생이 아니라 소련이들일 텐데. 무슨 생각으로 골랐대?”

직원들은 연습생들을 평가한다.

절대평가와 상대평가를 겸한다.

당연히 상대평가의 대상은 다른 연습생들일 테지만, 소녀연맹의 곡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직원들이 소녀연맹을 안 떠올리려고 기를 쓰고 노력하더라도, 결국엔 소녀연맹의 잔상을 볼 수밖에 없으니까.

“그게, 수현이래.”

“아, 걔?”

백수현이 회사를 나가고 싶어 한단 소문은 공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진 않지만, 암암리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했었다.

연습생들 사이에서, 신인개발팀 사이에서, 마침내 회사 전체로 퍼지는 것이다.

연예계엔 바닥과 천장에도 귀가 있단 말은 작은 회사 내에서도 증명된다.

“나갈 거니까 고른 건가?”

다들 백수현이 ‘아라베스크’를 고른 이유를 이렇게 짐작했다. 하지만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근데 수현이네 팀에 사무엘이랑 유우토도 있대.”

“걔네는 왜?”

곧 나갈 애의 팀에, 유력한 연습생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궁금증은 계속해서 증폭되어, 직원들은 연습생 주간 평가만 기다리게 되었다.

* * *

연습 3일째.

이제 평가까지 3일.

아니, 이제 새벽이니 이틀이 남았다.

백수현, 유우토, 김사무엘은 퀭한 눈으로 거울 속의 자신들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아라베스크’를 추었던 터라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스읍.”

백수현이 짧고 거친 숨을 들이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춤을 바꿔야 해.”

“전에도 말했지만 괜히 원본에 손대지 마. 좋은 선택 아니야.”

“아니, 바꿔야 해.”

“왜?”

“왜냐고?”

백수현이 아라베스크의 안무 중 하나를 펼쳤다.

바닥에 무릎을 턱 꿇은 후 상체를 45도 각도가 되도록 뒤로 넘긴다. 그리고 가슴에 수평이 되게 보이도록 팔뚝을 척 내민다.

그리고 배부터 골반까지 웨이브를 한 번 준다.

“수혀니 잘해.”

유우토가 박수 치자 백수현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피 끓는 목소리로 외쳤다.

“아무도! 진짜 아무도! 남자가 골반 꿀렁이는 거 안 보고 싶어해! 이것도 봐봐!”

백수현이 골반을 좌우로 한 번씩 튕겼다.

“시바 잘되지도 않네. 이거 봐봐. 여기에 뭔 매력이 있어?”

“어떡하자고.”

김사무엘은 시계를 보았다.

벌써 새벽 2시 30분이다.

땀으로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긴 후, 피곤함이 잔뜩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애초에 여자 춤인데.”

남자와 여자는 신체 특성이 다르다. 그러니 남자의 춤과 여자의 춤도 다른 방식으로 행해진다.

여자의 춤은 역동성을 강조하기 위해 박자에 맞춰 골반을 좌우로 계속 움직인다.

굳이 골반 움직임이 강조된 춤이 아니어도, 박자 자체를 하체의 움직임으로 맞추는 편이다. 즉, 걸그룹의 춤은 모든 안무 동작에 골반 움직임이 포함되어 있다.

남자가 걸그룹 안무를 그대로 카피하면 어색한 게 그 이유이다.

“그거 감안하고 커버하는 거 아니었어?”

“우스꽝스러울 뿐이잖아! 남자가 해봤자!”

“학실히 희화화하는 거 같기는 해.”

백수현과 김사무엘이 유우토를 쳐다보았다. ‘희화화’만 똑바로 발음해서 놀란 것이다.

“우껴.”

“언젠 잘 춘다더니.”

백수현이 손뼉을 한 번 쳤다.

“골반이 쓰이는 동작을 다른 신체 부위로 대체하자.”

“생각해둔 건 있고?”

“있지. 난 너희들처럼 3일만 이 춤 연습한 거 아니니까.”

프로젝트 포유 시즌2까지 합쳐서,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연습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연히 아이디어도 더 많을 수밖에 없다. 흑역사라서 계속 떠올라, 어쩔 수 없이 계속 생각했던 것도 있고 말이다.

“여자의 특징이 골반이라면, 남자는 어깨지. 상체를 이용하자. 골반 좌우 움직임은 이렇게.”

백수현이 바운스를 주면서 왼쪽 오른쪽 차례로 팔을 뻗었다. 과하지 않고 깔끔한 동작이었다.

“아니면 이렇게.”

백수현은 다리를 짧게 벌렸다 다시 일자로 서더니 고개만 좌우로 까딱였다.

“이게 훨씬 낫지 않나?”

“수혀니 잘해.”

“…….”

“사무엘 넌? 아님 뭐 더 보여줘?”

백수현은 외에도 자신이 생각한 아이디어를 마음껏 뽐냈다.

대체 프로젝트 포유 시즌2 이후, 얼마나 아라베스크만 생각했으면 저렇게 우물처럼 동작을 뽑아낼까.

‘그냥 얘는 춤을 잘 만드는 건가?’

백수현은 점점 남자판 ‘아라베스크’를 만들고 있었다.

사흘 동안 잠잠하게 카피만 했던 건, 어쩌면 안무를 완전히 분해할 시간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른다.

재조립을 위한 설계도를 따낸 것이다.

“야, 대답 안 하냐? 좋냐고 안 좋냐고.”

“방금 생각해냈어?”

“어.”

“어떻게?”

“뭐, 어떻게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걍 머릿속에 떠오르는데.”

“그런 거치곤 짜임새가 있어서 물어본 거야.”

김사무엘은 무릎을 주먹으로 툭툭 두드리곤 자세를 바로 했다. 슬슬 시작할까 싶던 때, 백수현이 말했다.

“안무 카피는 질리도록 했으니까, 짜임새가 있지.”

“너 그렇게 카피 많이 하진 않잖아. A반에 어떤 애는 일주일에 열몇 개씩…….”

“정식으로 연습생 되기 전에도 했어. 그러니까 머릿속에 걍 춤이 많아. 난 내가 만든 동작이라고 생각하는데, 혹시 모르지. 걍 베낀 걸 수도 있고.”

“오디션 때 하려고? 근데 오디션은…….”

“카피해봤자지. 얼마나 잘 베꼈는지 보려는 게 아니니까. 누나 때문에 했어.”

백수현의 누나, 백설하.

“누나가 그랬거든. 아이돌은 해석하는 사람이라고. 안무랑 곡이 오면 그걸 자기 걸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해석이 들어간다더라. 그러니까 카피를 많이 하면, 아이돌이 돼서 분명히 도움이 된다고 그랬어.”

클래식 주자(奏者)가 악보를 해석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음악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악보에 모든 정보가 나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악보는 모든 걸 알려주지 않는다.

소리의 강도는 애매모호하다. 세게? 얼마나 세게? 여리게? 얼마나 여리게?

소리의 연결 또한 애매모호하다. 완전히? 완전한 연결이란 게 있나? 느슨하다면 얼마나 느슨히?

데크레센도(점점 작게)라면, 어느 수준으로 점점 작게인가? 어느 시점에서 작아지면 되지?

스모르찬도(꺼지듯이)는 데크레센도와 다른가? 꺼져간다는 건 결국 점점 작아지는 것 아닌가?

또한, 악보를 쓰던 시대에는 너무 당연한 기교인 터라 기록하지 않은 것도 있다. 작곡가가 빼먹은 부분도 있다. 작곡가조차 어떻게 연주할지 모르는 부분도 있다.

그러니 주자는 악보를 자신의 색으로 채워가야만 한다. 이게 해석이며, 아이돌이 받는 곡과 안무 또한 같은 이치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카피를 하더라도, 해석하면서 하라고 했어.”

“해석?”

“나한테 가장 잘 어울리게 말야. 원본을 재현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우린 못 하잖아. 그러니까 우리 식대로 해야지.”

소녀연맹을 따라가지 않고, 그녀들과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김사무엘은 거울로 눈을 돌렸다. 거울엔 방금 백수현이 펼친 동작들이 희미한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김사무엘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일단 난 원본으로 가는 게 더 낫단 입장이지만, 그래도 해보긴 할게.”

“유우토 넌 어쩔래?”

“어려워서 이해 모태써. 쉽게 말해져.”

“그냥 나 따라 해.”

“응.”

“지금뿐이야.”

김사무엘이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네 말대로 따르는 건 지금뿐. 만약 우리의 연습이 끝날 때 결과물이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원본으로 가는 거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으니까.

“낭비?”

백수현의 이마에 힘줄이 잡혔다.

“캐리해준다니까 오더도 못 알아듣냐?”

또 분위기가 안 좋아지려던 때, 모퉁이에 쌓아둔 세 명의 가방 쪽에서 착신음이 울렸다.

김사무엘은 날 듯이 그곳으로 뛰어가 전화를 받았다. 방금과 달리 따스함과 애교가 잔뜩 섞인 목소리로.

“응, 마리아. 아직 안 자고 뭐 해? 벌써 새벽이잖아. 기다리지 말라니까. 응, 오빠가 미안해.”

5분 후, 김사무엘은 백수현의 앞으로 돌아와 당당히 선언했다.

“내일 연습은 1시간 늦게 하자. 동생 보러 가야 해.”

“……그러든가.”

약 3시간 후, 아침 6시.

해는 한 시간도 더 전에 진작 떴다.

세 사람은 전신에 힘이 빠져나갔음에도 ‘아라베스크’의 엔딩 포즈를 취한 채 굳건히 서 있었다.

서로 팔짱을 낀 채 몸을 살짝 굽히고 전방을 응시한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와중, 연습의 끝을 알리듯 백수현의 턱에서 땀방울이 톡 떨어졌다.

세 사람이 동시에 무너져 바닥에 드러누웠다.

백수현이 거친 호흡과 함께 말했다.

“야, 사무엘.”

“뭐.”

백수현이 ‘호우!’ 환호성을 내지르면서 주먹을 천장으로 뻗었다.

“이걸로 한다!”

“……그러든가.”

“나 아피 안 보여……. 배고파, 밥 먹고 시퍼…….”

주간 평가까지 이틀.

* * *

성필은 주간 평가가 이뤄지는 연습실로 들어왔다.

신인개발팀을 비롯한 관련 직원들을 위한 간이 의자가 한쪽에 줄지어 있고, 그 중앙엔 연습생들을 찍기 위한 카메라가 놓여 있었다.

성필이 들어오자 앉아 있던 직원들이 기립하여 예의를 표했다.

“박 이사님, 이쪽.”

손혜빈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와 함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카메라와 가장 가까운, 즉 연습생들의 퍼포먼스를 중앙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자리였다.

“이번에도 평가지 필요 없어?”

“어.”

소녀연맹 멤버들이 연습생일 때야 주간 평가에도 성필이 평가지를 지참했지만, 남자 연습생 상대로는 월간 평가에만 지참한다.

주간 평가로는 오로지 직원들의 의견만 보길 바라서였다.

성필은 이사이니, 당연히 그의 평가는 큰 가치를 지닌다. 그게 주마다 쌓이면, 성필이 무의식적으로 편애하는 연습생의 점수가 너무 올라 버린다.

‘그게 나랑 다른 직원들의 눈을 가릴 수도 있으니까.’

아직은 기획 의도에 연습생의 평가를 구겨 넣기보다, 연습생들의 개성이 최대한 발휘되는 방향으로 트레이닝을 진행하고 싶다.

“우리 애들이 오늘 평가 보고 싶다고 하던데.”

“누나한테도 말했어?”

“아, 어쩐지. 네가 안 된다고 해서 나한테 온 거였구나. 근데 보고 싶긴 하겠다. 가로 엔터 최초로 소녀연맹 곡을 커버하는 연습생들이 나오잖아.”

심지어 그 연습생에 유우토와 백수현이 포함되어 있으니 호기심이 더 생기겠지.

백설하와 장하양을 제외하곤 모두 이번 평가에 참여하고 싶다 했지만, 성필이 연습생들의 부담감을 이유로 강경하게 거부했었다.

‘설하는 수현이에게 오해가 덧씌워지는 걸 경계해서 안 오겠단 거겠지.’

장하양은 왜 안 궁금해하는지 모르겠다.

성필이 소녀연맹이었어도, 장차 후배 그룹이 될지 모를 연습생의 소녀연맹 퍼포먼스 커버는 보고 싶을 텐데.

“안 되지. 특히 리카랑 설하가 오는 건.”

연습생들이 오해할 것이다.

오해라고 할까, 리카와 백설하가 동생들의 뒤를 봐주고 있단 생각이 더 강해질 수도 있다.

“하긴.”

손혜빈은 납득한 듯 다시 평가지를 보았다.

“인생이 걸린 애들이니, 민감하겠지.”

연습생으로 산단 건 일반적인 인생 루트에서 벗어난단 것을 뜻한다.

남과 다르다는 건 괴롭다. 누군가에게 고통을 호소하기도 힘들고, 실패했을 때 남을 탓할 수도 없다.

수험생들도 대학에 낙방하면 인생이 끝났다면서 울곤 하는데, 연습생들은 더할 것이다. 고3 수험생보다 민감하면 민감했지, 절대 덜하지 않다.

“안녕하세요.”

시간이 되자 연습생들이 줄지어 연습실로 들어왔다. 직원이 앉은 방향을 향해 인사성 좋게 허리를 꾸벅꾸벅 숙인다.

개중에는 조금이라도 더 눈에 띄기 위해 다른 이와 비교해 과한 제스처를 취하는 연습생도 있었다.

허리를 90도 이상 숙인다거나 하는 행동 말이다. 그런 연습생을 보면 웃음이 나오기도 하지만, 안타깝기도 하다.

필사적이구나 싶어서.

‘모두 필사적이지만, 이 안에서 살아남는 건 고작 몇 명뿐.’

모든 경기가 그러하지만, 연습생 생활 또한 반드시 패배자가 존재하는 구조이다.

이 업계에선 모두가 승리한다는 유토피아적인 결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필은 정신을 가다듬고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이 집중이야말로 그들의 필사적인 노력에 대한 예의이다.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모든 노력과 성공과 실패를 기억한다.

“안녕하십니까, 연습생 구서성입니다.”

팀을 이룬 연습생들은 자신을 소개하고 곧바로 퍼포먼스에 들어갔다.

연습생의 퍼포먼스란 아이돌과 아주 다르다. 관객석에서 단 하나의 환호성이나 박수가 들리지 않는단 점에서, 아이돌보다 처절하다.

반응 없이 관객석을 향해 흘려야 하는 피, 땀, 눈물. 일주일간의 노력은 고작 3분 만에 끝을 맺고, 연습생은 다시 불안의 일주일을 보낸다.

“연습생 구서성이었습니다.”

이 생활을 몇 년간 반복한다.

등수도, 점수도 알지 못하고 몇 년 동안.

직원들은 그 흔한 박수 한 번 치지 않고 무미건조하게 평가지에 점수와 감상을 기록했다.

그 정적을 채우는 건 같은 동료 연습생들의 박수와 ‘수고했어’란 말들이었다.

동료들의 격려가 그나마 이 험난한 생활을 견뎌낼 힘을 준다. 직원들의 무미건조한 반응 속에서 뻘쭘하지 않게 도와준다.

“안녕하십니까, 연습생 백수현입니다.”

“연습생 김사무엘입니다.”

“연스쌩 이시카와 유우토입미다.”

요주의 팀이 등장했다.

동료 연습생들은 다른 연습생의 차례가 시작되면 박수를 쳐준다. 물론 세 사람의 차례에도 박수가 들려왔다.

다른 연습생들의 차례보다 명백히 낮은 음량의 박수다.

‘이게 수현이와 유우토가 살아가는 세계인가.’

주변에서 쏟아지는 의심과 질시를 끊임없이 견뎌야만 한다.

안 그래도 고향과 먼 타지에서 살아가는 유우토는 외롭기 그지없을 것이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데, 동료들이 도와주긴커녕 상대조차 해주지 않으니.

백수현이 받는 고통도 유우토와 비슷할 것이다.

귀가 트여 있으니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비난과 소문을 들어야만 하겠지.

‘만약 누가 나한테 아이돌 할 거냐고 물으면.’

절대 안 한다.

성필은 아이돌로 살아갈 만한 멘탈과 능력이 없다. 연습생 생활조차 버티지 못할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견딜 만한 생활이 아니야.’

험난한 길이다.

그걸 버티게 해주는 건 가족 같은 동료들일 텐데, 백수현은 그런 동료조차 없다.

연습실에 들어서자마자 숨이 턱 막히겠지.

연습할 때도 눈치가 보이겠지.

아예 사람이란 게 싫어질 것이다.

‘그런데도 넌 도망가길 택하지 않았어.’

남기로 했다.

단순히 고통을 감내하는 게 아니다.

백수현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부정적인 시선과 맞서 싸우기로 했다.

‘이름조차 듣기 싫을 아라베스크를 굳이 평가곡으로 정한 것부터가 그래.’

성필은 이 순간 진심으로 백수현을 존경하게 됐다. 만약 성필이 백수현의 입장이었다면, 아라베스크는 절대 고르지 못했을 것이다.

잠자리에 들어 ‘아라베스크’란 단어만 떠올라도 이불이 찢어지도록 발차기나 했겠지.

성필은 저렇게나 용기 있는 결정은 못 한다.

‘바꾸기로 한 거구나.’

백수현은 버티고 인내하는 대신 주변을 바꾸려고 결심했다.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모든 의심을 불식시킨다.

감히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하도록.

그 첫 번째 단계가 바로 ‘아라베스크’를 소화하는 것이다.

‘네 앞길은 이후로도 험난하겠지만.’

“저희 팀이 선보일 곡은.”

‘바꾸기로 마음먹었다면.’

“소녀연맹 선배님들의.”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질 거야.’

“‘아라베스크’입니다.”

아라베스크.

투쟁과 저항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 * *

아라베스크를 연습하면서 절절히 깨달았다.

‘프로는 프로다.’

누나는, 백설하는 어떻게 이 퍼포먼스를 소화하고도 엔딩 포즈에서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을까.

연습하면 할수록 존경심만 샘솟았다.

그 존경심은 천천히 열등감으로 변해갔다.

‘닿을 수 없어.’

소녀연맹을 따라잡으려 손을 뻗는다. 하지만 그녀들과의 거리는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는다.

‘아라베스크’가 단순히 걸그룹의 곡이라서?

“아.”

직원 사이에서 탄식이 들려왔다.

백수현이 안무를 절었다.

달려 나갈 것처럼 다리를 뻗다가 정지한다. 그러고 비디오가 되감기듯 다리를 뒤로 감으면서 앞을 손바닥으로 밀어낸다.

팬터마임이다.

이어서 현란하게 스텝을 밟으면서 천천히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다. 그 순간, 발이 꼬였었다.

백수현은 휘청이다가 다시 원래 안무로 돌아왔다. 아주 작고 사소한 실수이지만, 이 자리에서만큼은 사소하지 않다.

백수현은 땀이 흘러내려 흐려진 눈으로 앞에 앉은 직원들을 보았다.

‘누구보다 소녀연맹에게 익숙한 사람들. 특히.’

박성필.

그는 소녀연맹을 직접 프로듀싱했다.

사소한 실수조차 바늘구멍 옆의 낙타처럼 크게 보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모든 동작이 한없이 허술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소녀연맹과 비교하면 열화판의 열화판에 불과한 퍼포먼스…….

‘그래서.’

백수현의 동작이 바뀌었다.

웅크리고 있던 새가 날개를 펴듯 춤의 범위가 확장된다.

‘바꿨다.’

보인다.

지켜보는 직원들의 표정이 달라지는 게.

* * *

“안무.”

A&R팀 이재호가 옆자리에 앉은 신준성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안무 바꿨네’란 뜻이었다.

신준성은 앞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어드바이스한 적은 없는데.’

가로 엔터로 오는 다른 댄스 강사들에게 조언받은 걸까?

아닐 것이다.

신준성은 트레이닝이 끝나면 트레이너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리하여 연습생들의 사소한 발언이나 변화도 모조리 체크한다.

평가 안무에 대해 조언해주었단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직접 바꾼 거야.’

주변에 앉은 직원들의 어깨가 한 번 들썩였다.

놀랐기 때문이다.

신준성조차 감탄하여 웃음이 나왔는데, 다른 이들은 반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겠지.

‘바꿨어. 남자에게 적합하게.’

원래는 소녀연맹 멤버들이 무릎을 꿇고 몸을 뒤로 젖히는 자세.

하지만 백수현은 그러지 않았다.

선 그 자세 그대로 과도하다 싶을 만큼 허리를 뒤로 꺾었다. 그대로 시선은 앞으로 고정했다. 그리고 동작이 끝나자 발을 앞으로 크게 굴러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다.

그대로 스텝을 밟는다.

‘남자의 근력이라서 할 수 있는 동작. 일반적으로 여자보다 큰 신장을 이용해 보일 수 있는 키네스피어의 확장.’

‘아라베스크’ 안무의 기본적인 리듬감을 표현하는 골반의 움직임을 아예 없애버렸다.

대신 팔과 목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가슴의 방향을 쉴 새 없이 바꾸어 역동성을 표현했다.

시비라도 거는 듯이 보는 이를 압도하려 한다.

‘잘 바꿨어.’

가산점이라도 주고 싶을 지경이다.

문제는…….

‘동작이 큰 만큼 보컬이 쉽게 흐트러지는 거. 그리고 체력 소모가 심한 거.’

‘아라베스크’는 원본도 체력 소모가 극심하다. 그런데 동작을 더 확장하니 체력이 훨씬 더 소모될 수밖에 없다.

‘걸그룹 안무라고 얕봤나?’

소녀연맹 멤버들은 일반적인 걸그룹보다 훨씬 더 근력 트레이닝에 시간을 쏟는다.

팔굽혀펴기 한 번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걸그룹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인 근력을 자랑한다.

그러니 자연스레 소녀연맹의 안무는 일반적인 걸그룹의 것과 궤를 달리한다.

‘아니면 자신감인가?’

안무를 더 적합하게 바꾼 건 인정하지만…….

‘한계가 훨씬 빨리 올 거야.’

* * *

숨이 턱 끝까지 올라왔다.

목소리가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그나마 버틸 수 있는 건 백수현의 가슴이 포기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40km를 돌파한 마라토너가 의식을 잃어버리고 다리만 움직이는 데 집중하는 것처럼, 백수현은 무의식적인 동작만 이어갔다.

‘지금 내 모습이 어떻지?’

시야가 흔들려서 거울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숨을 고를 시간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원래 5인 + 30명의 보조 댄서가 펼치는 퍼포먼스다.

그 임팩트를 3명으로 커버하려니 자연스레 템포를 짧게 짤 수밖에 없었다.

몸이 산소를 갈구하면서 뇌에 통증을 호소한다. 움직임을 멈추라고 계속해서 명령한다. 그럼에도 멈추어선 안 됐다.

‘이제 하이라이트야.’

이 하이라이트를 무사히 마치고, 최후의 독무(獨舞)에 들어서야 한다. 독무를 마치기 전까지 몸은 움직여야만 한다.

거울을 통해 김사무엘과 눈이 마주쳤다.

하이라이트의 시작, 김사무엘의 랩.

‘랩 파트까지 내가 끌어줘야 해.’

포메이션 변경.

유우토가 서 있었던 중앙으로 백수현이 들어선다. 회전과 함께 중앙을 차지한 백수현은 근육을 긴장시켜 상승 동작을 만들어냈다.

전신의 근육이 중력에 저항하며 신장을 늘리고 템포를 당겨 가속한다.

그와 함께 노래를…….

‘노래를.’

해야 하는…….

‘아.’

지금 어택(음을 내는 것)하면, 분명 쇳소리가 나온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백설하가 남기고 간 노래 노트로 공부해왔고, 그걸 체득하려 했기에, 백수현은 이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야 할까?

‘보일 수밖에 없어.’

감점을 받는다 치자.

백수현은 박자를 비집고 들어가, 놓친 노래의 꼬리를 붙잡아 목소리를 내려…….

“무릎을 들어 허리를 펴―.”

뒤에 서 있던 김사무엘이 백수현의 어깨를 짚고 그의 파트를 강탈했다.

백수현과 김사무엘의 목소리가 겹쳐져, 백수현의 쇳소리 담긴 낮은 목소리가 묻혔다.

김사무엘은 백수현의 어깨를 짚은 채로 강하게 당겼다. 백수현은 뒷걸음질치며 강제로 뒤로 물러나게 됐다.

명백한 실수, 로 보였어야 했다.

뒤에 서 있던 유우토가 즉시 백수현과 스텝을 맞추었다. 마치 짠 것처럼 보이도록.

백수현은 어안이벙벙한 기분을 밀어 넣고, 무의식적으로 남은 파트를 이행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화가 치밀었다.

‘이런 눈속임이 통할까 봐?’

게다가.

‘김사무엘 이 새끼…….’

원래 백수현의 파트가 끝나고 랩을 했어야 할 김사무엘은, 백수현의 마지막 파트를 같이 부르고 곧바로 랩으로 들어갔다.

호흡이 부족한 상태에서 랩 파트를 소화한다.

당연히 퍼포먼스의 질이 하락한다. 실패의 연쇄가 이어질 뿐이다.

당황과 분노에 이어 남은 건 절망이었다.

김사무엘이 이런 허술한 눈속임을 할 수밖에 없던 건.

‘나 때문이잖아.’

아, 나는 고작 이것뿐인 인간이었구나.

‘다른 놈들 말이 맞았어.’

겨우 이것밖에 안 되는…….

“우리의 연맹을 미더!”

유우토가 김사무엘의 랩에 더블링(랩에서 같은 가사를 따라 불러주는 것)을 했다.

일견 부정확했던 김사무엘의 랩에 음의 장막이 씌워졌다. 유우토는 랩을 하지 않았다. 노래를 했다.

싱잉 랩.

“다쳐도 일어서!”

급조한 하모니는 불협화음이 되어야 옳았으나, 유우토는 완벽한 화음을 만들었다.

그는 악기를 몇 년이나 다뤄왔다.

화성 공부는 질리도록 했다.

그렇기에 아무리 갑작스러워도, 화음 따위 얼마든지 맞출 수 있었다.

완벽한 화음을.

“우리느 가시를 헤치고 나아가!”

발음만 완벽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백수현은 이제 어처구니가 없었다.

김사무엘도 유우토도.

‘내 독무 때 호흡 벌어주겠답시고 파트를 가져가? 너네 파트를 망치면서까지?’

김사무엘의 랩 파트가 끝났다.

그의 랩을 도와준 유우토는 아까 김사무엘과 같은 문제에 도달했다.

호흡이 모자라다.

이젠 진짜 끝이다.

‘나나 김사무엘이 도와주지도 못해.’

원곡에선 백설하가 맡았을 파트다.

이 중에서 오직 유우토만이 비슷하게나마 따라부를 수 있다. 괜히 김사무엘과 백수현이 도와주겠답시고 끼어들면, 곡이 거하게 망가진다.

‘이제 진짜 끝.’

호흡이 모자란 유우토는…….

“손을 묶고 기어서라도.”

완벽한 고음으로 하이라이트를 노래했다.

원곡, 3옥타브 파.

남자 키로 2옥타브 후반.

유우토는 부족한 호흡임에도 표정 연기를 놓치지도 않고, 완벽한 음정으로 수 초에 이르는 고음을 끊이지 않고 쏘았다.

백수현과 김사무엘은 놀라서 그를 보았다.

‘실패의 연쇄가…….’

끊겼다.

유우토가 실패하리라 여겼던 직원들과 연습생들 또한 놀라서 아니, 경악하여 유우토의 노래를 귓가에 아로새겼다.

2옥타브 후반 진성 고음.

영원토록 이어질 것만 같은 노래의 향연.

그 순간조차 끝나고, 유우토는 백수현의 옆에 섰다.

세 명이 일자로 섰다.

마침내 도달했다.

도달해버렸다.

최후의 하이라이트에.

세 사람은 팔짱을 꼈다.

그리고 전진했다.

고작 세 명뿐인 연맹은 이 순간 다른 어떤 팀보다도 결연히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이 발을 디딜 때마다 세 명이라고 믿을 수 없는 소리가 연습실을 쿵 쿵 울렸다.

서로를 연결한 연맹의 사슬과 함께 전진.

그 끝에 사슬이 풀렸다.

풀려나며, 백수현은 두 사람이 자신의 등을 미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가서 보여주라고.

백수현이 앞으로 나온다.

‘고마워.’

백수현은 그리 감사를 전하곤 펼친다.

35명의 완벽한 군무(群舞)를 대체할.

‘이 순간에 닿을 수 있게 해줘서.’

오직 한 명뿐인 독무(獨舞)에.

백수현은 정면을 응시하고 속으로 외쳤다.

‘보아라.’

이게 나의 투쟁.

‘세상을 향한 나의 저항.’

그가 서 있는 곳은 무대.

손을 뻗는 곳은 천장 혹은 하늘.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성난 군중을 향해 한없이 아름다운 춤을 선보인다.

오직 문화를 남기겠단 일념 하나에, 발레리노는 피로 물든 무대를 지키면서 나약하기 그지없는 손을 치켜든다.

칼에 찔리고 불에 지져질 부드러운 피부로, 인류 정신의 끝에 서서 저항한다.

이게 바로.

‘오직 나만의.’

아라베스크.

* * *

독무가 끝났다.

백수현이 천천히 손을 내렸다.

뒤로 빠졌던 김사무엘과 유우토는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세 사람이 함께 허리를 숙였다.

연습생들이 박수를 쳐주었다.

그 소리는, 처음과 달리 조금 더 컸다.

A&R팀 이재호는 평가지에 작은 글자를 적어 넣었다.

A.

* * *

응접실.

“그래서.”

성필은 백수현과 마주 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백수현은 무릎 위에 손을 두곤 쑥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안 나가기로 했다고?”

“네. 그, 죄송합니다. 괜히 귀찮게 해드려서…….”

“후회 안 하겠어?”

결국 바뀐 건 아무것도 없다.

’아라베스크‘의 트라우마는 떨쳐냈으며, ’프로젝트 포유 시즌2‘ 때의 설욕을 했더라도.

근본적으로 바뀌는 건 없다.

여전히 연습생들은 백수현에게 질시 어린 시선을 보낼 것이다.

“모르겠어요.”

백수현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조금씩 어떻게든 해봐야죠.”

“어떻게?”

“그것도 잘…….”

성필은 인자하게 웃어주었다.

이걸로 면담은 충분하다.

그에게 나가보라고 하기 전.

“후회…….”

백수현이 그리 읊조렸다.

“할지도 모르죠. 나중엔.”

“그러면…….”

“하지만 그게 오늘은 아니잖아요.”

성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야 실패하고, 절망하고, 후회하고, 눈물을 흘릴 수는 있겠죠. 그래도, 그게 오늘은 아니에요.”

“……그래.”

성필은 그제야 인자하게 웃어주는 게 아니라, 인자함이 서린 웃음을 지었다.

“열심히 해.”

“감사합니다.”

백수현은 응접실을 나갔다.

나가니 유우토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우토가 걱정이 가득 배인 목소리로 물었다.

“수혀니 어떠케 돼써? 나가? 나 천애고아 되는 거야?”

“뭔.”

백수현은 어처구니없단 듯 웃더니, 안절부절못하는 유우토를 그냥 지나쳤다.

“어떠케 돼써! 빨리 말해져!”

“안 나가, 안 나간다고.”

둘은 떠들썩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복도 저 멀리로 사라졌다.

김사무엘은 그 광경을 복도 모퉁이에서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복도 안쪽으로 몸을 숨기더니, 방금 신인개발팀에서 받은 물건을 꺼내 바라보았다.

[연습생증

이름: 김사무엘(A반)]

“…….”

김사무엘은 신분증을 뒷주머니에 넣곤 연습실 쪽으로 향했다. 그가 향한 곳은 B반 연습실이 아니었다.

이제 그는 A반 소속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얼굴만 몇 번 본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김사무엘을 바라보았다.

‘새 경쟁자들이네.’

이곳에 모인 모두가 경쟁자.

동료는 없다.

김사무엘은 불특정 다수를 향해 자기소개를 한 후 적당히 구석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연습실의 풍경을 쭉 훑어보았다.

‘야, 김사무. 밥 먹으러 가자.’

‘수혀나, 나 식꿘 잃어버려써.’

‘어쩌라고.’

‘나 외구긴 노동자. 가난해…….’

김사무엘은 둘의 목소리를 떠올리더니, 짜증 난다는 듯 혀를 한 번 차곤 운동화 끈을 질끈 매었다.

‘나중에 여기 오겠지.’

이곳에 동료는 없다.

지금은.

* * *

성필이 응접실을 나오자 근처에서 손혜빈이 기다리고 있었다.

“누나?”

“안에 수현이 있어?”

“아니, 방금 면담 끝나고 나갔어.”

“어떻게 됐어?”

“안 나가겠대.”

“아, 다행이다.”

손혜빈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왜. 수현이 데뷔조로 찜해두고 있기라도 해? 편애야?”

“아니, 우리가 돈 들여 키워놨는데 다른 회사로 나가면 배 아프잖아.”

“데뷔시켜줄 것도 아니면서 너무하네. 뭐, 수현이 나간다고 했으면 나가지 말라고 협박이라도 하려고 했어?”

“못할 건 뭐야?”

성필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바뀌자, 손혜빈의 그의 어깨를 치면서 웃어댔다.

“농담이야. 근데, 아깝다기보다는 좀 무섭지.”

“수현이 나가는 거?”

“리카 봐.”

손혜빈이 리카를 예로 들자, 성필은 그녀가 말한 ‘무섭다’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리카는 KS 엔터의 연습생이었다. 어쩌면 케이어스가 되었을지도 모를 만한 인재였다.

그런 리카를 성필이 데려왔다.

“지금 KS 엔터 사람들 얼마나 배 아프겠어? 그리고 또, 얼마나 후회하겠어.”

리카를 케이어스에 포함시키지 않은 사실을 후회하는 건 아닐 것이다.

만약 리카를 회사에 묶어뒀다면, 소녀연맹이 케이어스와 막상막하로 올라올 일 자체가 없지 않았을까.

그리 후회할지도 몰랐다.

리카는 연습생이 회사의 무기이자 최중요 자원이란 것을 가장 잘 드러내는 사례였다. 무기이자 자원이기에, 외부로 유출해선 안 된다. 설령 필요 없더라도 말이다.

“글쎄.”

“뭐야. KS 엔터가 후회 안 한다고?”

“KS 엔터 전체는 모르겠고, 정호환 이사님은 후회 안 하실 거 같은데.”

“왜?”

“리카가 나옴으로써 전체적인 업계 발전이 가능했으니까?”

“그게 진짜면 정 이사님은 부처다.”

“또 뭐 3층에 볼일 있어?”

“어.”

성필은 그녀에게 ‘수고해’라 말한 후 계단을 내려가려 했다. 그러다가 문득 말할 게 떠올랐다.

“누나.”

“왜?”

“나 없는 동안 잘 부탁해.”

“갑자기?”

“또 연습생 나간다고 하면 협박하지 마. 알겠지?”

“참나. 너나 잘하세요.”

성필은 2층으로 내려갔다.

계단 근처에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는 백설하가 보였다. 그녀의 태도만 보고도 무슨 용무로 저러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 이사님…….”

“수현이 안 나간대.”

백설하는 깜짝 놀랐다. 그러고 잠시 돌처럼 굳어 있다가, 옅은 한숨을 내쉬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수현이 기다리고 있던 거야? 나간다고 했으면 설득하려고?”

“아, 아뇨. 같이 밥이나 먹으려구 했어요…….”

위로 파티라도 해주려고 했던 걸까.

방금 성필이 계단에서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백설하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는데, 이젠 아주 편안해 보인다.

“설하 아주 여유만만이네.”

“네, 네?”

“우파루파 춤은 다 연습했어?”

“연습, 연습을 따로 해야 해요……?”

“해야지. 일본 팬들한테 보여줘야 하니까.”

“네에…….”

“우파루파 잠옷 입고.”

“그거 결국 입기로 한 거예요?!”

“다들 바라고 있어.”

“이사님이 바라시는 거겠죠!”

“그래서, 안 입어?”

“……입긴 할 건데요.”

“자주성이 없네. 설하의 아티스트십 점수 1점 감점.”

“어쩌란 거예요 대체?!”

성필은 웃으면서 그녀의 옆에 섰다.

“수현이랑 밥 먹을 계획이었으면 시간 남겠네? 오랜만에 나랑 먹을래?”

“그, 괜찮으세요?”

“안 괜찮은 건 뭐야. 소녀연맹이랑 식사할 수 있으면 내가 영광이지. 원래 그냥 샌드위치로 때우려고 하기도 했고. 시간 있을 때 우리나라 음식 먹어둬야지.”

“아, 그렇겠네요.”

소녀연맹은 바로 내일 일본으로 떠난다.

“또 몇 개월 동안 일식만 먹겠네요.”

“그치. 그럼 오늘은 정통 한식?”

“양식 먹으러 가요.”

“……?”

소녀연맹, 출국 하루 전.

성필은 백설하와 함께 건물을 나서면서, 얼마 전 히무라가 해주었던 이야기를 곱씹었다.

‘근데, 믿기가 힘드네.’

우파루파가 그렇게나 인기가 있다니.

얼마나 인기가 많냐면.

‘세이코 씨의 유일한 대항마가 우파루파라니, 진짜야?’

믿기 힘들지만, 내일이 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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