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9화
백설하는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백수현이 가로 엔터를 나간다고 한다. 거기까지는 어찌어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가는 이유가 백설하 자신의 동생이기 때문이라니?
“그러니까 누나 나…….”
“무, 무슨 말이야. 내 동생이라서 나간다니? 그냥, 그, 연습생이 하기 싫어진 거야?”
“아이돌은 되고 싶어.”
백수현은 나직하게, 또한 선명하게 말했다.
아이돌이 되고 싶다. 그 의지는 과거든 지금이든 바뀌지 않았다.
“도망가는 건 아니야.”
“그럼 뭐야?”
백수현은 잠시 고개를 숙이면서 생각을 곱씹었다. 누나와 얼굴을 마주하는 게 괴롭다. 최대한 이 시간을 줄이고 싶었다.
백수현은 곱씹고 곱씹은 머리로부터 가장 마음에 와닿을 비유를 생각해냈다.
“회사에 인턴이 들어온다고 쳐.”
“으, 응?”
“그 인턴이 회장 아들이야.”
“…….”
“인턴이 정규직이 되면, 주위에서 뭐라고 하겠어?”
백설하는 순식간에 백수현의 심정을 이해했다. 또한 그가 감내해야 했을 고민도 절절히 다가왔다.
“내가 노력해서 데뷔조에 포함되더라도, 난 영원히 인정받지 못해. 누나 빽으로 들어왔단 소리나 듣겠지. 지금도 짜증 나는데, 데뷔해서까지 그런 스트레스를 달고 살 순 없어.”
“…….”
“나는, 난, 이사님들이 연습생을 권유했던 거 거절했었어. 누나 빽이라고 할까 봐 제대로 된 오디션으로 들어왔어. 근데도 이런 꼴이야.”
백수현은 부서져라 주먹을 쥐었다.
“나는 누나를 동경해서 아이돌이 되기로 결심했었어.”
어릴 적부터 그러했었다.
백설하, 너무나 빛나는 나의 자랑스러운 누나.
그런 누나를 따라잡기 위해, 누나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부모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이 누나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자신도 누나에게 자랑스러운 동생이 되기 위해.
백수현은 빛을 갈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런데, 이대로면 나는 누나를 미워할 거 같아.”
더는 빛을 동경할 수만은 없게 되어버린다.
빛이 너무 밝아 짜증 날 지경이다.
백설하의 찬란함은 백수현의 등에 그림자를 만든다. 사람들이 수군대는 어둡고 깊은 그림자를.
“매정하게 들리겠지만, 정말, 진짜, 난 누나를 미워하게 될 거 같아…….”
백설하의 동생.
그 후광이 너무나 강하여, 백수현이 이뤄낸 성과에는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주변에선 백수현이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도 ‘누나 빽’이란 한마디로 일축해버린다.
공정한 평가가 없는 세계야말로 지옥이다.
“그러니까, 그만둘게.”
백설하는 말이 없었다.
“내가 정말 재능이 있다면 다른 회사로 가서도 데뷔할 수 있을 거야. 굳이 가로 엔터가 아니라도 성공할 수 있을 거야. 그렇잖아.”
백설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입을 열었다. 숨이 간헐적인 게, 울먹임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설하는 깔끔한 목소리를 내었다.
누나로서 나약한 모습은 보여주지 않고 싶다. 그를 동정하기보다, 묵직하게 서서 그의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한다.
“다른 기획사는 찾아봤어? 아니면 캐스팅 제의 온 거야?”
“캐스팅 제의는 없어.”
대부분의 기획사는 연습생의 신상 또한 공개하지 않는다. 연습생은 기획사에게 매우 중요한 자원이니, 절대 외부에 유출돼선 안 된다.
백수현 또한 가로 엔터의 지시 때문에 밖에서 모자를 쓰고 다닌다. 외모를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전략이었다.
캐스팅 제의가 있을 리 없다.
“다시 오디션 보러 다녀야지. 이번엔 더 쉬울 거야. 배운 게 있으니까.”
“……그래. 얼마 필요해?”
백수현이 놀라선 백설하를 보았다.
그러자 백설하가 온기 서린 미소를 띠었다.
“위약금 내야 하잖아. 그거 때문에 나랑 만난 거지?”
“…….”
“미안해하지 마. 나도 연습생 해봤어. 네가 그만하겠단 이야기 할 때부터 그 용건이란 건 짐작했고. 위약금은 분명 투자금의 두 배였지?”
정해진 연습생 기간을 채우지 못했을 시, 회사는 연습생에게 위약금을 요구한다.
연습생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이자, 함부로 외부에서 빼내 가지 못하도록 만드는 장치이다.
“아직은 몰라. 그, 나 돈 벌면 꼭 갚을 테니까…….”
“응. 그럼 정해지면 나한테 알려줘. 아마 천만 단위일 거야. 몇 달 있었으니까.”
“…….”
“용건은 그걸로 끝이야?”
“나한테 화 안 내?”
“너의 길이야.”
백설하가 백수현의 손을 맞잡았다.
“네가 선택해야 후회가 없어. 괴롭다면 버티는 것도 방법이지만, 벗어나는 게 가장 좋아. 특히 네 경우엔…….”
손을 잡은 백설하의 힘이 더 강해졌다.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
그 말을 듣고, 백수현은 기운이 나거나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수렁으로 박히는 듯했다.
백설하의 위로와 격려에 안도감이 들었단 게 특히 더 기분 나빴다. 스스로가 역겨울 지경이다.
‘난 누나의 도움은 필요 없어, 없어야 해.’
홀로 서고 싶다.
백설하의 동생 백수현으로 불리고 싶지 않다.
도움을 받는 건 이번뿐이다.
이후로는 누나와 관계되고 싶지 않다.
백수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부정적인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워, 자칫하면 누나한테 화풀이를 할 것만 같았다.
“응, 고마워.”
그래서 그냥 그리 말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굳이 ‘누나’는 붙이지 않았다.
* * *
집으로 돌아오자 문틈 철봉을 열심히 붙잡고 있는 둘째 동생이 반겨주었다.
둘째는 바들바들 떨면서 턱걸이를 두세 번 더 하더니, 폴짝 땅에 발을 디뎠다.
“어이 어이, 이제 오는 거냐구!”
“씨바 너 말투 좀 고쳐. 씹덕도 아니고.”
“씹덕 맞는데? 시세리쨩 다이스키(너무 좋아)!”
원랜 아이튜브에서 소녀연맹 리카의 영상을 찾아보며 괴상한 한본어만 쓰던 둘째 동생. 지금은 암흑 진화를 마치고 오타쿠로 거듭났다.
학교에선 모범생에 운동을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라는 것 같다.
“근데 너 무슨 커피팩이라도 발랐음? 커피 냄새 오지는데.”
“팍 씨 새끼가!”
백수현이 팔을 들자 둘째 동생이 호다닥 뒤로 물러났다.
“‘너’라고 부르지 말라고. 어디 누나한테도 너라고 불러봐라 어?”
“아 누나는 용돈 주고 형은 안 주잖아!”
“아?”
“안 주잖아, 요!”
둘째는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착실하게 ‘형’이란 호칭을 붙여주었다.
백수현은 혀를 차면서도 동생의 말에 상처를 받곤 곧바로 샤워하러 갔다.
버스 타고 오면서도 커피 냄새는 신경 쓰였었다. 게다가 혹여나 침 냄새도 나지 않을까 걱정되어 계속 안절부절못했었다.
씻고 나온 백수현은 화장대 앞에 앉았다. 누나가 집을 나가기 전 쓰던 물건이었다.
“하아, 씨.”
절로 한숨이 나오지만, 해야만 했다.
토너 패드로 얼굴을 닦고 스킨을 바르고 퍼스트 에센스를 바르고 앰플, 로션, 크림, 아이크림까지 바르자 몇 분이 훌쩍 지났다.
그러고 머리에 헤어 세럼과 에센스를 차례로 바른 후 착실하게 말려주었다.
다 끝내자 십수 분이 훌쩍 지났다.
“형 꼬추 떼. 왜 붙이고 있음?”
자괴감을 느끼던 중 거울을 보자, 둘째 동생이 문틈에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백수현은 화낼 기력도 없어서 고개만 숙였다. 얼굴에 뭐만 바르고 있으면 저 지랄이다.
“몰라 나도.”
백수현이 힘없이 대꾸하자 오히려 둘째 동생은 잠잠해졌다.
“밥 먹으러 와.”
“어.”
식탁엔 주말답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 있었다. 셋째 동생은 놀러 나가고 없었다.
백수현은 자리에 앉아 ‘잘 먹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식사를 시작했다.
“수현아.”
어머니가 은근한 투로 물어왔다.
“이번 주간 평가는 잘 준비하고 있니? A반 올라갈 거 같아?”
백수현은 숨이 턱 막혀왔다.
공부를 포기했더니 공부하란 잔소리는 사라졌다. 대신 어머니는 이런 걸 물어오곤 했다.
백수현은 반항하는 사춘기 중학생처럼 차갑게 대꾸했다.
“몰라.”
“당신, 수현이한테 자꾸 그런 거 묻지 말랬지.”
아버지가 어머니를 차분한 투로 말렸다. 그러자 어머니는 민망해하면서도 몇 마디를 덧붙였다.
“하긴, 때 되면 어련히 올라가겠지. 누나가 소녀연맹인데.”
백수현이 젓가락을 식탁에 쾅 두었다.
“그딴 거 없다고 좀! 누나가 있는 게 뭐 어때서!”
백수현의 고함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박혔다.
어머니는 크게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엄마는 그냥 네 누나가…….”
“누나랑 나랑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대체 몇 번을 말하냐고!”
“야 백수현!”
아버지는 맹수가 으르렁거리듯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현역 시절 헌병 생활을 하면서 단련된 목청은 순식간에 거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소리를 지르긴 왜 소리를 질러!”
백수현은 머리가 핑 돌았다.
흐릿한 시야 안에 가족들을 담고 겨우겨우 바른 자세를 유지하며 앉아 있었다.
흐릿해진 아버지가 당황하는 게 보인다.
“수, 수현이 너 울…….”
백수현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방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문을 잠근 후 침대로 뛰어들었다.
가족마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회사 사람들한테는 어떻게, 아이돌로 데뷔하고선 대중들에게 어떻게 이걸 설명할까.
‘제가 아이돌이 된 건 누나 덕분이 아니에요.’
제가 노력했어요.
저는 노력하고 있어요.
누나가 아니라 저를 봐주세요.
제발…….
백수현은 침대에 얼굴을 묻고 해소할 데 없는 울분을 끝없이 뱉어댔다.
* * *
학교를 마치고 온 가로 엔터.
백수현은 힘없이 3층까지 올라가 연습실 앞에 섰다. 절로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문고리를 잡자마자 손에선 땀이 배어 나온다. 잡고, 열었다.
연습실 안에 있던 연습생들의 시선이 곧바로 칼날처럼 박혀왔다.
고작 1초쯤 될 법한 정적, 그 이후 여느 때처럼 연습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주고받았다.
1초, 1초의 시선.
그 안엔 모든 부정적 감정이 섞여 있었다. 낙하산 인턴을 바라보는 동료 인턴들의 시선이다.
백수현은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검은 찌꺼기를 억지로 억누르며 문을 닫았다.
어차피 이제 다 끝이니, 싸우고 화내봤자 자신만 손해이다.
“수혀니 와써?”
구석에서 혼자 몸을 풀고 있던 유우토가 백수현에게 다가왔다.
동병상련이라고 해야 할까, 둘은 수많은 연습생 중 친구가 서로뿐이었다. 그나마 B반의 리더인 김사무엘과 말을 많이 섞은 편일까.
“어.”
“스트레칭 하쟈.”
유우토는 어눌하게나마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됐다. 처음에 번역기에다 대고 말을 했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둘은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게 구석으로 가서 서로의 스트레칭을 도와주었다.
그때 연습실 문이 열리고 짜증스러운 얼굴의 김사무엘이 들어왔다. 다들 그를 보자 잡담을 멈추었다. 마치 내무반에 간부가 들어온 듯했다.
“어, 쉬어.”
심지어 김사무엘의 말투도 군인 같았다.
B반의 리더인 그는 압도적인 인망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그러한 인망을 얻었는가, 그엔 많은 우여곡절과 암투와 전투와…….
“수현아.”
김사무엘은 백수현의 앞으로 와 그의 귓가에 조용히 말했다.
“너 상담 신청한 거. 지금 가봐.”
“어.”
백수현은 유우토와의 스트레칭을 끝내고 연습실을 나서려 했다. 그러다가 멈칫하고, 다시 김사무엘에게 돌아와 말했다.
“지금까지 고마웠다.”
김사무엘은 그를 빤히 바라보더니 빨리 가란 듯 턱을 까딱였다.
“오늘 바로 가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긴 하네.”
백수현이 연습실을 나섰다.
그러자 유우토가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수혀니 어디 가?”
* * *
신인개발팀 신준성은 복잡한 마음으로 백수현을 바라보았다.
응접실은 유독 방음이 잘 된다. 그래서일까, 어두운 공기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이런 날이 오는구나.’
김사무엘이 백수현의 이상을 캐치한 지 몇 달이 지났다. 기우인가 싶었으나, 결국 이런 날이 왔다.
“그래서, 나간다고?”
“네.”
“다른 회사에서 캐스팅 제안이라도 왔어?”
“아니요.”
“진로를 다른 데로 잡은 거야?”
“아니요.”
“계속 아이돌로?”
“네.”
“알겠지만, 기한을 못 채우면 위약금 있어.”
“……낼게요.”
신준성은 끈질기게 ‘왜 나가?’라거나 ‘나가는 마당이니 이유를 들려주면 안 될까?’라고 물었다.
하지만 백수현은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신준성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이 안은 위로 올릴게. 길면 일주일 안에 결정될 거야. 나가기 전에 이사님들이나 사장님이랑 마지막으로 면담 한 번 있을 거고.”
“네.”
“……마음 안 바꿀 거야?”
“네.”
신준성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응원할게. 너 재능 있어. 나가서도 잘할 거야.”
“……감사합니다.”
둘은 함께 응접실을 나섰다.
백수현은 연습실로 향하고, 신준성은 신인개발팀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는 본인의 자리에 앉아 이마를 짚었다.
‘수현이는 A반 진급이 거의 확정된 애인데.’
A&R팀에서 내려온 기획안을 보아도, 백수현은 차기 그룹에 적합한 인재였다.
강점은 남성미 넘치는 비주얼과 댄스 퍼포먼스.
체형 자체가 커서 간단한 동작만으로도 무대를 압도할 수 있다. A반으로 올라가 댄스에 특화시킨다면 상당히 앞날이 기대되는 인재다.
‘이유는 사무엘이가 짐작했던 대로…….’
백설하의 동생이란 타이틀, 그로 인한 주변의 질시다.
신준성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유였다.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하단 점에서 참으로 골치 아픈 이유이기도 했다.
‘수현이 결정이 맞는 거겠지.’
본인이 받는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할 테니.
신준성은 백수현 생각을 관두고 일에 집중했다. 몇 시간 동안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자료를 정리하고 있자니, 퇴근 시간이 다가왔다.
팀원들의 분위기도 조금씩 풀리던 중, 김사무엘이 사무실을 찾았다.
“이번 주간 평가 곡 리스트요.”
“고맙다.”
이번 주간 평가는 연습생들이 직접 곡과 퍼포먼스를 선택한다.
절반 이상이 이미 결정을 내렸다.
‘7인 안무로 짠 애들도 있네.’
이번 연습생들의 선곡은 꽤 신선했다.
리스트를 훑던 중, 신준성은 김사무엘의 칸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넌 아직 안 정했어?”
김사무엘은 답하려 입을 열었다가, 끝내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신준성이 이상하단 듯 쳐다보자 김사무엘은 손을 내밀었다.
신준성이 리스트를 다시 그에게 돌려주었다.
“깜빡했어요. 지금 쓸게요.”
김사무엘이 리스트에 이름을 적어 넣었다.
자신만이 아니라 두 명의 이름을 더.
[김사무엘, 백수현, 이시카와 유우토
선곡: 아라베스크 - 소녀연맹
종류: 종합 퍼포먼스]
* * *
저녁을 먹고 난 휴식 시간.
백수현은 연습실 구석에 앉아 핸드폰을 보았다. 아이튜브에서 시간을 죽일 만한 영상을 찾던 그는, 문득 주간 평가가 떠올랐다.
‘나갈 건데 해야 하나?’
신준성의 말로는, 백수현의 퇴사는 길면 일주일까지 걸릴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럼 주간 평가 기간과 겹친다.
‘안 해도 될 거 같긴 한데.’
고민하던 백수현은 그냥 찾아보기나 하려고 했다. 정말 만약의 경우 퇴사가 미뤄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엔터계는 좁댔지. 안 연결된 사람이 없다고. 괜히 불성실한 이미지 만들면 안 되니까, 나갈 땐 나가더라도 준비는 해야지.’
솔로로 해야 할 테니 독무(獨舞)가 그럭저럭 돋보이는 곡으로 해야겠다.
백수현은 시에이스 ‘에딕티드’를 선택했다.
결정을 마친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김사무엘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오면 바로 부탁하는 것도 민망하니, 백수현은 직접 신인개발팀을 찾았다.
다행히 퇴근하지 않은 근무자가 한 명 있었다. 그는 백수현의 말을 듣고 주간 평가 리스트를 보더니.
“네 이름 이미 있는데?”
“네?”
정말 그러했다.
[김사무엘, 백수현, 이시카와 유우토
선곡: 아라베스크 - 소녀연맹
종류: 종합 퍼포먼스]
백수현의 표정이 굳었다.
아라베스크.
그에겐 좋은 추억이 없는 곡이다.
그의 흑역사인 프로젝트 포유2 촬영 당시, 백수현과 그의 팀은 아라베스크를 선보임으로 괴멸적인 팀워크를 자랑했었다.
어벙한 백수현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어라?베스크’라고 자막을 붙인 짤이 유행하기도 했으니.
‘이 시발놈이……!’
백수현은 직원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연습실로 뛰어왔다.
김사무엘이 돌아와 있었다. 그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유우토의 스트레칭을 도와주고 있었다.
백수현은 그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가 멱살을 잡았다.
“이 개새끼야 뭐 하잔 건데!”
갑자기 일어난 소란에 수십 명의 이목이 단숨에 꽂혀 들었다. 다들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사건의 당사자인 김사무엘은 평정을 유지했다. 멱살이 잡히고도, 심지어 자신보다 키가 10cm는 백수현에게 잡히고도 자세가 무너지지 않았다.
“뭐가?”
“아라베스크!”
백수현이 아라베스크라고 말하자 몇몇이 웃음을 내뱉었다. 그러나 백수현이 쳐다보자 금세 표정을 되돌렸다.
“나가기 전에 한풀이하란 거잖아.”
“뭐?”
“어라? 베스크.”
백수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다른 놈들이랑 달리 사람대우해 준다고 여겼는데, 나갈 때가 되니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김사무엘은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추었다.
“여기 애들 다 너 무시하는데.”
김사무엘이 늘어선 연습생들을 눈으로 쭉 훑었다.
“너 이대로 나가면 계속 무시하지.”
“뭐?”
“방송 좆같이 하더니 결국 못 버티고 나갔네. 방송 보고 딱 알았다. 그냥 그런 놈이지. 영원히 그딴 얘기 떠돌 거야.”
“…….”
“나 같으면 잠도 안 올 거 같은데, 넌 아닌가 보네.”
“…….”
“어라? 베스크.”
“시발 개……!”
“싸우지 먀! 싸우지 먀!”
유우토가 백수현에게 달려들어 그의 팔을 꽉 쥐었다. 백수현은 ‘놔라!’라며 유우토를 뿌리치려 하다가 깜짝 놀랐다.
‘유우토 얘 힘이 뭔……?’
매일 흉근 타령이나 하면서 운동하더니, 그 때문인가?
“쌰우면 안 댸!”
사람 팔을 부러뜨리려는 듯 꽉 쥐고 있으면서 하는 거라곤 울상인 얼굴로 ‘쌰우면 안 댸!’라고 외치는 거라니, 인지부조화가 와서 혼란스러웠다.
기어코 유우토는 김사무엘의 멱살을 잡은 백수현의 손까지 떨쳐냈다. 그러자 김사무엘은 붙잡혔던 부분을 손으로 털면서 한 걸음 물러났다.
“쌰우면 안 댸! 쌰우지 먀!”
“아, 알겠으니까 놔라. 좋은 말 할 때 놔라.”
유우토가 놓았다.
백수현이 다시 김사무엘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수현이 있어?”
문이 열리고 성필이 나타났다.
연습생들이 순식간에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을 본 성필이 허허 웃었다.
“편하게 있어. 수현이가…… 있네. 잠시 시간 좀 내줄래?”
“…….”
“바쁜가?”
“아니, 아니요.”
백수현은 쭈뼛쭈뼛 연습실을 나섰다.
“가자.”
성필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3층에서 2층으로 내려갔다. 도착한 곳은 응접실이었다.
응접실로 들어오자, 백수현은 올 게 왔단 생각이 들었다. 신준성은 백수현의 퇴사가 길면 일주일이 걸린다고 했었지만, 빠르면 얼마나 걸릴지는 안 말했었다.
‘오늘 바로?’
그러면 좋겠지만, 왠지 모르게 시원섭섭하다.
백수현은 성필과 마주 보았다. 그와 눈을 맞추는 게 쉽지 않았다.
중소기업의 그룹인 소녀연맹을 세대의 첨단까지 올려놓은 신화적인 프로듀서다. 곧 회사를 나갈 거라 하더라도, 그의 아우라마저 없어지는 건 아니다.
“너 나가도 똑같아.”
갑자기 성필이 말했다.
“나가도 설하의 후광에선 못 벗어나.”
백수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른 기획사에선 훨씬 적극적으로 너를 이용하려고 할 거야. 내 예상이지만, 넌 어느 기획사든 80% 확률로 데뷔할 수 있어. 왜일까.”
백수현이 어금니를 까득 물었다.
대답하고 싶지도 않았다.
“네가 설하의 동생이라서야.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야. 다른 기획사는 반드시 너를 데뷔조로 포함시켜서 마케팅에 써먹어. 숨길 수 없어. 오히려 전국이 다 알게 될 거야.”
소녀연맹 백설하의 동생 백수현, 데뷔하다!
“네가 계약할 때 혈연을 숨긴단 조건을 내걸어도, 회사는 결국 지키지 않을 거야. 애초에 그런 약속을 안 하겠지. 신생 그룹이란 건 화제가 고프거든. 기사 한 줄이라도 더 나와야 하거든. 단 1초라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으면, 뭐든 해. 어떤 소재라도 써먹을 거야. 그런 생활, 참을 수 있겠어?”
기사만 뜨면 ‘백설하의 동생’이 따라붙는다.
예능에 나가서도 ‘제 누나가 소녀연맹 설하인데요’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백수현이라고 하면 ‘백설하 동생’이라고 기억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백수현이 절망하여 되물었다.
“어떡하란 건데요…….”
“난 약속 하나 해줄 수 있어. 네가 데뷔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설하의 동생이란 이야기는 기사에 단 한 줄도 싣지 않을게. 널 데뷔시켜준단 이야기가 아니야. 어디까지나 네가 데뷔했을 때의 이야기.”
성필이 양손으로 깍지를 끼고 백수현을 응시했다.
“물론, 그런 약속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알겠지?”
“……제가, 누나 동생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맞아. 네가 설하의 동생이든 사돈이든 팔촌이든, 우리 회사는 오로지 기획 의도와 연습생의 실력으로만 데뷔조를 선정할 거야. 알량한 동정심으로 주는 가산점 따위는 없어.”
기획사의 연습생이 되는 이들은 전체의 10%.
그중에서 데뷔하는 이들도 10%.
그리고 또 그중에서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는 이들은 1%보다 낮다.
유우토가 회상하길, 아이돌로서 텔레비전에 얼굴 한 번 비추는 게 도쿄대에 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던가.
“네가 가로 엔터를 나가려던 건 주변의 시선 때문이었겠지. 그런데 이제 판이 바뀌었어. 나가봤자 수현이 너는 설하의 동생이란 굴레에서 못 벗어나. 애초부터 생각을 잘못한 거야.”
나가서 매우 높은 확률로 데뷔할 건가?
대가는 영원토록 백설하의 후광에 가려지는 것이다.
아니면 남아서 매우 낮은 확률에 도전할 건가?
대가는 데뷔한다는 전제하에 백설하의 후광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렇지만, 연습생으로 지내는 동안 주변의 질시와 의심을 감내해야만 한다.
“어른의 역할은 아이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거라고 생각해. 난 둘 다 나름대로 일리 있는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다만, 넌 최초의 선택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어. 나가면 다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었지.”
이제 선택지를 가리고 있던 미몽의 안개는 전부 걷어졌다.
올바른 두 가지의 선택지가 드러났다.
“동료들이 주는 눈치 때문에 괴로워서 나가려는 너한텐, 답이 하나밖에 없을 수도 있지만.”
성필이 가볍게 물었다.
“선택해.”
어떡할 건지.
* * *
유우토는 바닥에 앉아 축 늘어져 있었다.
백수현의 이야기를 듣곤 줄곧 이런 상태였다.
“나 친구 없셔……. 에이엔니(영원히) 혼쟈……. 동병상련 사라져써…….”
‘얜 왜 사자성어랑 고사성어만 똑바로 말하지?’
김사무엘은 유우토의 언어 구사가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일본인이라서 한자어만 똑바로 발음할 수 있는 걸까.
김사무엘은 낙담한 유우토를 일으키려 손을 내밀었다.
“힘내.”
“위료해쥬는 거야……?”
“나 A반 올라가면 진짜 혼자니까 힘내라고.”
“외로어……. Rock spirit 그리어…….”
‘그냥 영어로 대화하는 게 낫나?’
영어 발음만 멀쩡한 걸 보니 또 열받는다.
‘내 영어 등급이 8등급만 아니어도 시도해봤을 텐데.’
그때 연습실로 백수현이 들어왔다. 그를 보자마자 유우토가 벌떡 일어났다.
“싸우지……!”
“안 싸워.”
백수현이 김사무엘 앞에 섰다.
“이번 주까지만.”
“해보려고?”
“어. 네 말대로…….”
백수현은 연습실을 쭉 둘러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 연습생들을.
“오해는 풀어야지. 유종의 미도 거두고.”
백수현이 손을 내밀었다.
김사무엘이 그 손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악수하자고. 한 팀이잖아.”
“게이냐?”
“넌 씨 어떤 애인지 딱 감 온다. 애들 축구할 때도 농구대 근처에서 우중충하게 보기만 하지?”
백수현은 유우토에게로 눈을 돌렸다.
“너도 잘 부탁해.”
“냐느 왜?”
“너도 같은 팀이야. 소녀연맹 아라베스크.”
“에……?”
오레(나), 도시테(어째서)?
“그, 구고 어려운 츄미쟈나! 나 모태!”
“안 어려워.”
“어라? 베스크는……!”
“그건!”
백수현이 부끄러움을 참으며 일갈했다.
“팀원들이 못한 거야. 근데 너희들이랑은 할 수 있어.”
“에, 에에…….”
유우토는 울상을 지었다.
누나, 도와줘…….
‘유우쨩은 할 수 있어! 아타시(나)의 동생인걸!’
어째선지 상상 속의 리카는 일본어가 아니라 한본어로 말했다. 상상 속의 리카에게마저 버림받은 유우토는 우울함을 삼켰다.
주간 평가까지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