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8화
김하슬은 반포 한강공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지개 분수를 보기 위해 모인 인파와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그녀는 제작진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성필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김하슬이 그를 알아보곤 벤치에서 일어났다.
“오빠, 왔네. 고마워.”
“가는 길이니까…….”
성필은 김하슬을 찍으려 기다리는 제작진으로 눈을 돌렸다. 스태프들이 눈을 피했다.
김하슬이 보낸 문자엔 방송과 관계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적혀있었는데…….
“내가 오빠랑 얘기한다니까 제작진분들이 안 가시잖아.”
성필은 다시 제작진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들은 성필의 시선을 받자마자 또 고개를 돌렸다.
이건 방송이 끝난 후의 이야기, 즉 사생활이다.
그걸 제작진이 찍을 권리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든 찍고 싶었다.
성필과 김하슬의 이야기가 이대로 허무하게 마무리되는 건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분명 둘의 오프 더 레코드엔 유종의 미를 거둘 만한 대화가 오고 갈 것이다. 그걸 찍어야…….
“달려.”
김하슬이 성필의 손을 꼭 붙잡았다.
“어?”
“달리라고!”
김하슬은 씩 웃더니 성필을 이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제작진은 김하슬이 어째서 평소 즐겨 신던 하이힐이 아니라 운동화 차림인지 알게 됐다.
성필을 끌고 달리는 그녀는 무지막지하게 빨랐다.
“쪼, 쫓아!”
카메라맨이 고정해둔 카메라를 급하게 분리하곤 성필과 김하슬을 뒤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될 리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리가 벌어져, 두 사람은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카메라맨은 뜀박질을 멈추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뒤늦게 쫓아온 다른 스태프가 급박한 투로 물었다.
“어디 갔어?”
“모, 몰라요.”
“아니 뒤풀이할 거면 카메라 앞에서 해주지!”
스태프는 아까워 죽을 것 같았다.
* * *
공원을 벗어난 길거리.
성필과 김하슬은 숨을 헐떡였다.
김하슬은 이마에 맺힌 땀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더위 때문에 멍한 눈길로 길거리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화단 경계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주변엔 마땅히 앉을 만한 벤치가 없었다.
성필은 그런 김하슬을 보면서 거친 숨을 헐떡이다가, 몸도 지친 터라 그녀를 따라 앉았다.
“오빠 아까 봤어?”
김하슬이 웃음과 헐떡임이 반반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스탭분들 진짜 필사적으로 쫓아오더라. 특히 PD님은 걍 눈이 완전히 충혈돼선, 하아. 방송에 그 정도로는 미쳐야 PD 되나 봐.”
성필은 마주 웃어줄 기력조차 없어서 ‘흐어’란 부정확한 답을 흘렸다.
“하아, 하아.”
두 남녀의 헐떡임만이 몇 분간 이어졌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둘을 흘끔 보곤 가던 길을 마저 갔다.
형형색색의 네온사인과 자동차의 불빛.
밤을 누비는 남녀노소의 사람들.
바쁘게 지나가는 빛과 사람들을 바라보며 둘은 계속해서 숨을 골랐다. 그때 김하슬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오빠, 보여?”
“뭐가? 뭐 있어?”
“아무도 우리한테 관심 없어.”
김하슬은 처음으로 놀이공원에 발을 디딘 어린아이처럼 잔뜩 들떠선 팔을 펼쳤다.
“이렇게 넓고 사람도 많은데, 아무도 우리한테 관심 없잖아.”
김하슬의 말마따나, 둘을 지나쳐간 사람이 백 단위일 텐데 누구도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이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않는다. 생판 타인에게 신경을 쏟을 만큼, 사람들은 한가하지 않다.
“인터넷에선 내가 무슨 대역죄인인 거 같은데, 현실에선 아무 일도 없구나.”
김하슬이 후련하게 말했다. 그에 성필은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대신 건너편 편의점 간판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마실 거라도 사다 줄까? 목 안 말라?”
“괜찮아. 곧 끝날 거야.”
“……할 말 있다고 했지?”
“응. 이대로 끝내긴 그렇잖아. 매듭은 지어야지. 나름 유사커플이었는데.”
유사커플이란 말에 성필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하긴, 배우끼리도 한 작품 동안 호흡을 맞추면 서로 수고했다면서 회포를 푸는 법이다.
셰익스피어가 세상은 무대이고 남녀는 배우라 했던가.
그렇다면 성필과 김하슬도 막이 내린 무대 뒤에서, 적어도 서로에게 ‘수고했다’곤 말해야겠지.
“내가 전에 했던 말 기억 나? 이런 프로그램 나와서 진지하게 연애하겠다는 사람은 나사가 빠진 거라고 했던 거.”
“기억나지.”
“난 나사가 빠졌었나 봐.”
김하슬이 성필을 보곤 어정쩡한 미소를 띠었다.
“나름 내가 미디어 쪽 일하는 사람인데 방송에 과몰입이나 하고. 아, 그치, 나사가 빠져도 단단히 빠졌지.”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성필의 심장을 깊숙이 찌르고 들어왔다.
이미 방송 도중 소름이 돋을 만한 애정 표현을 수도 없이 주고받았건만, 김하슬이 툭툭 내던지는 질박한 표현이 훨씬 더 가슴에 와닿는다.
진심이기 때문이다.
김하슬이 처음으로 드러내는 진심.
“진짜? 내가? 방송에서? 이 사람한테? 나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되더라. 분명 난 문을 잠갔는데, 어느새 열려 있던 거야. 그러다가…… 그날 딱 알았어.”
성필이 김하슬을 바람맞히고 에리카를 찾으러 갔던 날. 홀로 거실에서 기다리며 사색하던 김하슬은 불현듯 무언가를 깨달았다.
“내가 왜 오빠한테 화도 안 내고 그냥 보내줬는지, 깨달았어.”
“……왜?”
“난 그때 오빠를 포기한 거야. 난 오빠한테 빠졌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는 다리를 젓고 있었어. 수면 위로 나가려고. 왜 그런지 몰랐었는데, 그때 알았어. 오빠는 말야.”
김하슬이 검지로 성필의 어깨를 콕콕 찔렀다.
“자기만의 방에 갇혀 있어.”
“갇혀?”
“나는 오빠의 방문을 두드려. 똑똑, 거기 있죠? 그럼 오빠한텐 내 목소리가 들리는 거지. 아주 작게, 마치 물속에 잠겨서 물 밖의 소리를 듣는 것처럼 먹먹하게. 그렇게 작게 들리지만, 오빠는 섬세한 사람이라 내가 부르면 귀신같이 알아듣고 방을 나와. 그러고 말하는 거야, ‘불렀어? 어디 갈까?’라고.”
김하슬은 성필의 어깨를 검지로 꾸욱 눌렀다.
“그럼 난 문 안쪽을 곁눈질해.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서. 오빠는 바로 문을 닫아. 그러면 내가 ‘나도 들어가면 안 돼?’라고 물어봐. 오빠의 대답은 항상 똑같아.”
저기? 아무것도 없어. 그냥 나 혼자 행복하고 나 혼자 즐거운 곳, 내가 살아가는 곳일 뿐이야.
그냥 나의 방.
“오빠만의 방. 난 영원히 거기에 들어갈 수 없겠지. 감이 온 거야.”
성필은 넋이 나갔다.
김하슬이 하는 말은, 전생에서 조아라가 울면서 했던 말과 매우 많이 닮아 있었기에.
“오빠는 좋은 사람이야.”
김하슬은 성필의 어깨에서 손가락을 떼어내고 엄지를 추켜세웠다.
“그러니까 좋은 사람 만날 거야. 오빠의 방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 그게 내가 아니었던 거고.”
김하슬이 엉덩이를 떼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필은 여전히 앉아 있었다.
“오빠는 내 사람이 아니었고, 나는 오빠의 사람이 아니었지. 그런 이야기야. 혹시 오빠가 계속 나한테 미안할까 싶어서 하는 말이야. 서로 맞지 않아 떨어진 톱니바퀴일 뿐인데, 오빠는 나를 상처입혀서 억지로 떨어뜨린 거라고 생각할까 싶어서. 이 얘기를 하고 싶었어.”
“…….”
“상황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데도 오빤 미안한 것밖에 못 하는 사람이잖아.”
“…….”
“시간 뺏어서 미안해. 이제 돌아가.”
오빠만의 방으로.
잘 가.
그리 말하고, 김하슬은 성필에게서 등을 돌렸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김하슬은 다시 성필을 보았다.
“그날 새벽까지 기다린 건, 정말 오빠를 기다린 거야.”
그게 김하슬의 마지막 인내였다.
성필이 자신만의 방문을 열지는 않을까 기다렸던 것이다. 그게 마지막이었기에, 이제는 기다리지 않는다.
김하슬은 다시금 등을 돌려, 이번에야말로 성필을 떠나갔다.
성필은 김하슬이 떠나간 자리에 계속 앉아 그녀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만의 방.’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성필만의 공간.
어떤 사람에게든 그러한 영역이 존재한다.
인간의 인격을 이루는 가장 깊고 어두운 장소, 한 인간이 반드시 그일 수밖에 없는 이유.
자기 자신을 자신답게 만들어주는 이유.
인간이 명확하게 인식하는 자기 자신, 자아이다.
그러나 그 신성불가침의 영역은 단 하나의 무기로 부서질 수 있다.
바로 사랑이다.
사랑에 빠진 인간은 자기애와 자아마저 포기하고, 상대에게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자리마저 양보한다. 아니, 상대에게 제발 이리로 들어와달라고 간청한다.
자아는 가장 단단하면서 가장 부드러운 벽이다.
“가야지…….”
성필은 일어섰다.
“에리카 씨한테.”
김하슬은 성필이 자기만의 방에 갇혀 있다고 표현했었다.
여느 사람처럼 사랑이란 무기로 뚫릴 수 없는 방.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사랑으로마저 무너뜨릴 수 없는 방에, 성필은 갇혀 있다.
성필을 둘러싼 벽은 너무나 단단하다.
확실히, 갇혀 있다고 표현하는 건 그럴듯했다.
성필은 그 방에서 풀려나더라도 언젠가 다시 돌아갈 것이니까.
* * *
“두둥, 약속에 한 시간 늦은 남자 등장!”
성필이 연습실로 발을 들이자마자 리카가 야유를 퍼부었다. 에리카는 한눈에 보아도 삐친 듯 팔짱을 끼곤 성필을 빤히 바라보았다.
성필은 머쓱하게 웃으면서 그녀들에게로 다가갔다.
“멘고(미안의 일본어 발음을 반대로 뒤집은 것) 멘고.”
“저는 잘못했을 때 장난스럽게 넘기려는 사람이 싫어요.”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
“고멘나사이?”
“죄송합니다…….”
성필이 혼신을 다해 사과해도 에리카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사람 죽일 듯 무표정을 고수하는 그녀는, 갑자기 터져 나온 웃음 때문에 컨셉이 깨졌다.
“10분은 이걸로 놀리려고 했는데, 안 되네요. 빨리 앉으세요.”
“선물 사 왔어요. 제로 슈가 케이크예요. 제로 칼로리 음료도 있어요.”
“어떻게 이렇게 맛없는 것만 사 오시나요! 오늘 같은 날은 칼로리랑 슈가가 필요하다구요!”
“그럼 리카는 먹지 마.”
“먹을 거예요!”
“그런데 민주 씨는…….”
김민주는 테이블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춤을 추고 있었다. 음악도 켜놓지 않고 말이다.
그런데도 마치 선율이 들려오는 듯 리듬감이 가득하니, 참으로 신묘한 재주였다.
이게 말로만 듣던 절대무용인가?
“민주는 기다리다 지쳐서 연습하겠다고 했어요. 신경 쓰지 말고 저희끼리 시작해요.”
“야 이 나쁜 년아!”
김민주가 소리를 빽 지르면서 테이블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가 먼저 시작하자고 할 때는 죽어도 이사님 기다리겠다더니, 나 춤추는 건 1분도 못 기다려주냐!”
“농담이야. 빨리 앉아.”
“이래서 교토 출신은…….”
김민주가 그리 말하자 에리카와 리카는 경악하여 입을 떡 벌렸다. 만화였다면 둘의 배경으로 번개가 내리쳤을 것이다.
“민주 그거 지역 차별이야! 혐오 발언이야! 한국에서 ‘이래서 무슨무슨도(道) 출신은’이라고 말하는 거랑 똑같다구! 바로 사회적으로 매장이야!”
리카가 노발대발했다.
에리카도 경멸을 감추지 못했다.
“민주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나쁜 애구나?”
“뭐, 뭐? 그냥 장난으로…… 일본 예능 같은 데서도 하길…….”
“인터넷에도 셧다운제가 생겨야 해! 민주가 산증인이야!”
“악질이다 정말.”
“미, 미안해. 그렇게 심한 건 줄 몰랐어…….”
김민주가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하는 것으로 두 일본인의 갈굼은 끝이 났다. 김민주로서는 좋은 경험을 한 것이다.
혹여라도 일본 예능에 출연해 에리카가 교토 출신이란 사실을 개그 소재로 썼다면, 다음 날 ‘한국의 일본 혐오가 도를 넘어’ 같은 기사가 도배될 것이니까.
네 사람은 성필이 가져온 케이크와 음료를 테이블 위에 추가로 세팅했다.
리카는 무덤덤하게 케이크 포장을 뜯는 성필을 힐끔 살피다가, 아무 일도 아니란 듯 가볍게 툭 질문을 던졌다.
“최종회는 어떻게 됐나요! 커플 성립됐나요!”
김민주와 에리카의 시선도 성필에게 집중됐다.
성필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웃었다.
“차였어.”
“에엑! 찬 게 아니라 차인 건가요!”
“아, 말하면 안 됐는데. 이거 방송 전까지 다른 데 절대 알리면 안 된다? 나 벌금 내야 해.”
“맡겨두세요!”
리카가 헤실헤실 웃으면서 경례 포즈를 취했다. 성필이 차였단 말을 듣고 나선 묘하게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한구인 서아영 커플은 어떻게 됐어요?”
“민주 씨 빛나솔 본방으로 보세요?”
“보죠. 에리카가 계속 틀어놓거든요.”
“글쎄요. 저는 몰라요. 내일 회사에서 물어봐야겠죠.”
“저한테 귀띔 좀.”
“안 돼요. 본방사수하세요.”
“치.”
세팅이 끝나자 리카는 케이크 위에 초를 꽂았다. 초는 하나뿐이었다.
“그럼…….”
리카가 잔을 들자 다 함께 잔을 들었다.
“서울 시티 보이를 위하여!”
짠!
잔이 부딪침과 동시에 에리카는 초를 불어 껐다. 부디 믹스테입이 좋은 반응을 얻길 바라는 일종의 기원제였다.
연기는 하늘하늘 올라가 천장 근처에서 사라졌다.
이윽고 파티가 시작됐다. 네 사람은 그간의 고생을 잊고 먹고 마시며 떠들고 웃었다.
논 알코올 술이라지만 분위기를 띄우기엔 충분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에리카는 기타를, 리카는 트럼펫을 꺼내었다.
“그럼 기념비적인 ‘서울 시티 보이’ 완성곡 공연을 시작합니다!”
에리카와 리카가 연주를 시작했다.
김민주는 선글라스를 쓰고 마일스 데이비스의 흉내를 내는 리카를 보곤 빵 터져 배를 잡았다.
성필은 은근한 미소를 머금고 공연을 감상했다.
노래하며 연주하는 에리카의 얼굴은 행복으로 가득했다. 무대 위에서의 프로페셔널한 모습도 좋지만, 자연스러운 모습 또한 보기 좋다.
오히려 이러한 인간적인 모습이 더 나은 것 같기도 하다.
‘당연한가.’
이제 성필은 케이어스 에리카의 팬이 아니라 사쿠라바 에리카의 팬이었으니까.
자랑스러운 썸이 1호다.
성필은 눈을 감고 ‘서울 시티 보이’를 감상했다. 이 곡이 완성되기까지 겪었던 고난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미래의 나. 5년 후의 나.’
성필은 미래를 향해 말을 걸었다.
미래의 자신이 과거를 향해 말을 걸었던 것처럼.
‘나는 올바른 미래에 도착했어?’
당연하게도 답은 없었다.
이 순간 후회할 미래를 본다면 그 또한 웃긴 일일 것이다. 닿을 리 없는 미래를 향해, 성필은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적어도 지금의 난 후회 한 점 없어. 미래엔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이사님.”
성필은 눈을 떴다.
연주를 마친 에리카와 리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떠셨어요?”
성필은 대답 대신 박수를 쳤다. 그에 에리카는 수천 명의 박수갈채를 받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기품 있게 허리를 굽혔다.
“고생하셨습니다, 프로듀서님.”
사쿠라바 에리카가 감사를 전했다.
프로듀서.
그 단어가 성필의 심장을 깊이 어루만졌다. 전생에서 그토록 얻고자 염원했던 호칭이다.
“다시 불러주실래요?”
“뭘요? 프로듀서님?”
“하아아…….”
“박 이사님 기분 나빠!”
“너희들은 이사님이라고만 부르잖아. 내가 어디 가서 또 PD라고 불리겠어?”
“그게 좋으면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아냐, 됐어.”
“에리쨩한테만 듣겠단 뜻?!”
“리카, 그만해.”
에리카가 팔을 뻗어 리카의 앞을 막았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제스처 같았다.
“박 이사님을 프로듀서라고 부르는 건 이 세상에서 나뿐이야. 알겠니?”
“누구 맘대로!”
“나, 믹스테입을 발표하여 창작력을 마음껏 뽐낸 일본인 케이팝 아이돌 사쿠라바 에리카의 마음대로. 그렇죠, 이사님?”
“이왕이면 다다익선이죠. 리카, 나한테 프로듀서님이라고 불러줄래?”
“프로듀사(프로듀서)!”
“바람둥이…….”
리카가 ‘프로듀사!’라고 깜찍하게 외칠 때마다 성필의 표정이 급속도로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에리카는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부로 이 관계도 끝이구나.’
성필과 마음 편히 만날 수 있는 건 오늘이 마지막.
그리 생각하니, 믹스테입을 마쳤단 후련함보다 아쉬움이 더 크게 다가왔다.
리카와 성필의 콩트를 보던 에리카는.
“토모(친구).”
자기도 모르게 그리 말했다.
성필과 리카가 동시에 에리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에리카는 당황하더니 입을 막았다.
“아, 무의식적으로…….”
“토모, 저요?”
에리카는 부정하려다가, 더는 숨길 필요가 없겠다 싶어서 변명을 관두기로 했다.
성필과 계속 관계를 이어나갔던 건 그에게 호기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옥상에서 맺었던 약속과, 성필이란 사람을 향한 호기심이 합쳐져 그에게 자꾸 접근했었다. 거기에 이어 성필을 울린 기록이라는 쓸데없는 트로피를 바라여 집착이 심해졌었지.
‘그런데 이제 그게 무슨 상관이야.’
더는 필요 없는 승리와 명예를 추구하진 않겠다.
‘토모다치’라는 억지 칭호로 이어지는 부자연스러운 관계도 더는 필요 없다. 자신을 둘러싼 족쇄는 부산 앞바다에 대부분 버리고 왔다.
이제 하나 남은 족쇄를 끊어낼 때였다.
“이제 저희도 만날 일이 없겠네요. 아쉬워요.”
“방송국에서 마주치겠죠.”
“이대로 소원해지면 아쉬우니까, 토모(친구)로서 자주 만나요.”
자주 만날 수 있을 리 없다. 성필은 예의 바르게 ‘네’라고 답하겠지만 말이다.
에리카가 굳이 ‘토모’란 단어를 쓴 건, 그 단어가 주는 어색함을 더욱 부각하기 위해서였다. 그 단어의 값어치는 고작 약속 한번 잡기 힘든 수준이다.
에리카는 그것을 확인하고자 했다.
성필과 토모란 이름으로 연결된 관계. 그게 에리카가 버려야 할 마지막 족쇄였다.
‘이걸로 끝이네.’
성필은 에리카의 믹스테입 작업을 도움으로써 케이어스에 진 마음의 빚을 모두 갚았다.
에리카가 그것을 인정해주었다.
더는 그를 마음대로 불러낼 방법도, 성필이 에리카의 말을 듣고 달려올 의리도 없다.
토모다치는 끝나고, 협력 프로듀서와 아티스트도 끝나고, 사쿠라바 에리카와 썸이 1호의 관계가 새로 시작될 것이다.
팬과 가수라는 멀고도 가까운 관계가.
‘일과 관련되지 않고서야 이사님과 관계를 이어갈 방법은 존재하지 않아.’
성필의 이야기를 자주 하는 진저조차 성필과 사적으로 만난 적이 없다. 딱 그 정도의 거리감으로 돌아가는 거…….
“그래요. 괜찮을 때 불러주세요. 에리카 씨가 오셔도 되고요. 빛나솔 끝나서 시간 많으니까요. 굳이 작업 관련된 거 아니라도 언제든지요.”
“……네?”
“왜 놀라지. 에리카 씨가 먼저 만나자고 하셨…… 앗! 예의상 하는 말이셨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눈치가 없어서.”
“아니에, 아니에요. 저는 분명 대충 ‘느에’라고 대답하시거나.”
“저 그런 적이 없는데 왜……?”
“사적으로 만나는 건 안 된다고 하실 줄 알아서요.”
이젠 케이어스에게 진 빚이고 뭐고 존재하지 않잖은가.
그에 성필이 쾌활하게 답했다.
“토모라면서요. 아, 또 나만 진심이었죠!”
에리카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그걸 이사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저를 친구라고 생각하신 적 한 번도 없으시면서.”
“그렇게 따지면 에리카 씨도 그렇잖아요.”
“마침내 가면을 벗어던진 두 사람! 과연 대화의 행방은!”
리카의 중계 속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
그중 에리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아니, 주먹을.
“이사가 아이돌이랑 친구 먹어도 돼요?”
“안 되죠. 애초에 이사 아이돌이 문제가 아니라,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니까요.”
그러면서도 성필은 에리카와 주먹을 맞추었다.
“근데, 언제까지나 선을 긋고 그 안에만 있으면 재미없잖아요.”
“재미로 저를 만나신단 뜻?”
“음악이 세월을 초월해서 우정을 가져다줄 거예요. 그리고 또 리카 봐요. 한 번 친구 먹으니까 쉴새 없이 저를 웃겨주잖아요.”
“‘친구 먹다’란 표현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보셨죠?”
“음…….”
에리카가 의심하듯 성필을 흘겼다.
“제가 아는 이사님은 훨씬 더 선이 확실하신 분인데. 혹시 변장한 다른 분 아니에요?”
“제가 그랬어요?”
“믹스테입 시작할 때 둘만 있는 공간은 죽어도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무슨 일 날 것도 아니고, 그냥 아무 데나 했으면 좋았을걸. 근데 오늘은 되게…….”
에리카는 적절한 한국어 표현을 고르다가, 결국은 찾지 못해서 가장 비슷한 단어를 꺼냈다.
“자유분방하세요.”
“저답지 않아요?”
“네.”
“저다운 게 대체 뭔데요!”
“왜 갑자기 역정 내세요. 누가 싫댔어요?”
에리카가 성필과 마주한 주먹을 꾸욱 밀어붙였다. 도장을 찍는 것처럼 확실하게.
“보기 좋으니까, 앞으로도 선 마음껏 넘어주세요.”
“에리쨩의 그 발언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프로듀서님.”
“협력 프로듀서는 아타시(나)라니까?!”
“민주 씨, 이거 에리카 씨가 저 유혹하는 거 맞죠?”
“백퍼요. 여우 같은 년.”
“벌써 선 하나 넘으시네. 더 해봐요, 서울 시티 보이.”
“에리쨩, 보이가 아니라 미스터가 더 알맞지 않을까?”
그렇게 밤은 웃음과 함께 저물어갔다.
너무 오래 있으면 민폐이니, 성필은 적당한 시간에 맞춰 리카와 함께 건물을 나섰다.
“으아, 에어컨에서 벗어난 지 겨우 30초밖에 안 됐는데 등이 땀으로 축축해요!”
“리카는 신진대사가 활발하네.”
“변태 같은 발언이에요!”
성필은 리카를 조수석에 태우고 숙소까지 차를 몰았다. 가는 동안 리카는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끝나지 않는 리카의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성필은 지루한 신호 대기 시간을 보냈다.
그때 성필의 폰이 울렸다.
성필, 에리카, 리카가 포함된 단톡방이었다.
단톡방 이름은 ‘믹스테입 파티’였다.
[에리카 씨: 박 이사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에리카 씨: 리카, 정말 고마워. 사랑해.]
[에리카 씨: 두 분 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성필은 간결하게 답장을 치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에리카 씨’님이 나갔습니다.]
에리카가 단톡방을 나갔다.
흔한 업무용 톡방의 최후였다.
성필은 거치대에 폰을 두고 핸들을 잡았다.
‘정말 끝이구나.’
짧은 일탈이 막을 내렸다.
일탈 끝에 성필은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다.
이제 성필은 본업으로 완전히 돌아가야 한다.
그가 행복하고 그가 살아가는 그만의 방으로, 다시.
“…….”
성필은 다시 폰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박성필’님이 ‘에리카 씨’님을 초대했습니다.]
[에리카 씨: ???]
자신만의 방으로 들어가려던 성필은.
[박성필: 토모 톡방으로 계속 써요.]
조금만 더 나와 있기로 했다.
[실버타운 메이트(이거 바꾸면 15분 대화 금지예요!): 배임행위얏!]
[박성필: 사생활인데?]
[실버타운 메이트(이거 바꾸면 15분 대화 금지예요!): 바람이얏!]
[에리카: 지금 두 분 같이 계세요?]
[박성필: 리카가 옆에서 계속 때리면서 소리쳐요 ㅜㅜ]
[에리카: ‘저의, 프로듀서님’ 괴롭히지 마 리카.]
[리카: 잘 논다.]
[리카: 에엑?!??!!!!!?]
[리카: 바꾸면 대화 금지라고 했잖아요!]
[박성필: 이제 15분간 소리 안 지르는 거지?]
[리카: 손나!]
[에리카: ??? 뭘 바꿔?]
[리카♥♥♥: 특별히 이번만 봐 드릴게요!]
믹스테입, 끝.
* * *
휴일.
조아라는 뒤늦게 잠에서 깨어나 현관 복도를 터덜터덜 걸었다. 샤워실 문고리를 붙잡고 당겼지만 열리지 않았다.
노크하니 ‘아라쨩 엣찌(음란)!’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여. 노크만 했는데 나란 거 어케 알아.”
조아라는 소름 끼쳐 하면서 문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잠기운에 이제까지 눈치채지 못했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는 백설하였다.
“쌤 어디 가요? 회사?”
“으응, 아니.”
“설마 남자 만나러?”
백설하는 운동화 끈을 질끈 매곤 일어나, 조아라를 향해 자랑스레 미소 지었다.
“응!”
조아라는 백설하를 뚱하니 쳐다보더니 등을 돌렸다.
“잘 만나고 와요.”
“어?! 아니, 지, 진짜야!”
“네, 잘 만나고 오라고요.”
“왜 안 믿어?!”
“누가 안 믿는대요? 잘 갔다 와요.”
백설하는 예상과 다른 전개에 많이 당황했다.
‘내, 내가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이나? 아니, 애들 사이에서 내 이미지가 저런가?’
남자를 만나러 간다고 해도 다들 거짓말이라면서 코웃음 칠 이미지? 백설하는 자신감이 사라졌다.
‘내가 별로 매력적이지 않나……?’
백설하는 만약 다른 멤버가 ‘남자 만나러 간다’라고 했으면 어깨를 붙잡고 마구잡이로 흔들어댈 텐데.
조아라의 반응은 왜…….
“에, 쌤 어디 가시나요!”
샤워가운을 두른 리카가 샤워실에서 나왔다.
“아, 어…… 남자 만나러 가!”
“에에, 그런가요. 잘 다녀오세요!”
“……?!”
리카는 관심 없단 듯 방으로 들어갔다.
곧 동생 라인의 방에서 ‘뒤지기 싫으면 떨어져라’라는 조아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백설하는 멍하니 서 있다가, 실연당한 사람처럼 처연하게 숙소를 나섰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인적이 드문 개인 카페였다. 소녀연맹 멤버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으로, 사장에겐 미안하지만 사람이 없어서 편했다.
게다가 두 자리 정도 룸식으로 주변이 막혀 있어, 시선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커피를 받아 안쪽으로 들어가니 약속한 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 누나.”
동생인 백수현이었다.
“많이 기다렸어?”
“아냐. 기다리긴. 나도 방금 온 건데.”
백설하는 오랜만에 만나는 동생을 보곤 헤실헤실 웃으면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앉고 나니, 아침에 마주했던 멤버들의 반응이 떠올라 우울해졌다.
‘애들이 당황하면 약속 상대가 수현이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 수현아. 혹시 나 거짓말하면 티가 많이 나?”
“누나가 거짓말한 적이 있던가. 몰라.”
“응……. 아, 아니면 나 혹시 남자한테 별로 인기 없을 거 같아?”
“누나가 인기 없으면 다른 여자들은 어쩌란 건데.”
“그흐, 그흐래애?”
“나한테 이런 말 듣고 좋아하는 거 보니까 얼마나 인기 없는지 알겠네.”
백설하가 절망하여 눈썹을 늘어뜨렸다.
“이, 인기 없는 게 아니라아…… 회사, 회사에서 막으니까아…….”
“변명할 거면 나한테 왜 물어봤대.”
“…….”
오늘따라 백수현이 시니컬하다.
‘아냐, 누나한테 이런 질문 받으면 당황스럽겠지.’
아무튼, 오늘 어떤 일이 있었건 오늘 백설하는 기분이 좋았다. 동생과 만나는데 기분이 안 좋을 리 없다.
안 그래도 회사에선 아는 척하기도 쉽지 않으니 말이다.
‘헤헤, 만약 수현이가 데뷔하면 남매 아이돌로 유명해지겠지?’
백수현, 귀여운 동생.
어릴 때부터 백설하가 부모님의 관심을 모조리 독차지했던 터라, 상대적으로 백수현은 관심이 고픈 아이로 자라났다.
백설하는 그런 과거를 떠올리면 백수현에게 미안해졌다. 그래서 더 잘해주고픈 마음이 들었다.
용돈도 다른 동생들보다 많이 챙겨준다.
그럴 때면 둘째가.
‘어이 어이 누나! 사람 차별하는 거냐구!’
그렇게 괴상한 일본어 번역체를 쓰면서 앙탈을 부리지만, 감히 백수현에겐 뭐라고 하지 못한다.
어쨌거나 백설하는 백수현이 아이돌이 되는 행복한 미래를 그리며 망상을 이어갔다.
나중에 음악 방송 특별 스테이지 같은 것도 같이하게 될지 모를…….
“누나, 나 가로 엔터 나갈 거야.”
백설하가 마시던 커피를 백수현의 얼굴에 뿜었다.
백수현은 얼굴에 커피를 뒤집어쓴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의 앞머리로 커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백설하는 당황하면서 티슈를 뽑아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미, 미안 수현아. 괜찮, 안 괜찮지? 그, 다, 닦아줄게.”
“내가 할게.”
백설하는 한눈에 보아도 안절부절못했다. 백수현은 한숨을 쉬며 티슈로 얼굴과 티셔츠 앞을 닦았다.
“나 가로 엔터 나갈 거…….”
백설하가 다시 커피를 뿜었다.
“…….”
“으어, 왜, 왜애?!”
“…….”
“왜, 왜 나가는데! 누가 괴롭, 괴롭히는 거야? 누나가 혼내줄게! 빨리 가자!”
백수현은 아까보다 더 깊은 한숨을 뿜었다. 이젠 커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떤 애가 괴롭히는데! 이름 말해! 빨리……!”
“내가 누나 동생이라서야.”
“어?”
백수현이 당황한 백설하와 눈을 맞추었다. 그의 결의로 백설하의 눈을 고정시키는 것처럼 강렬한 눈빛이었다.
“누나 동생이라서 나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