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7화
민시화가 있는 댄스 스튜디오는 5층 빌딩의 중간인 3층에 있었다.
건물 외벽에 ‘듀오 댄스 스튜디오’란 글자 간판이 깔끔히 박혀 있어,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여기 맞지?”
“네.”
조아라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부터 분위기가 바뀌었다.
계단 벽면엔 민시화가 춤을 추는 여러 사진이 작은 액자에 담겨 빽빽이 걸려 있었다.
아마 대회 사진인 듯했다.
그중에는 현재보다 확연히 젊은 시절의 사진도 있었다.
“서학준 선생님이다.”
성필은 아는 얼굴을 발견하곤 걸음을 멈추었다.
한 액자에는 트로피를 함께 든 민시화와 서학준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두 사람 다 환한 미소로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 댄스 스포츠 본 적 있어요?”
“직접 본 적은 없어. 옛날 예능에서 본 적은 있고. 너는?”
“난 쌤쌤 영상 아이튜브에서 찾아봤어요.”
조아라는 벽에 걸린 사진들을 유심히 보아서 걸음이 느렸다. 거의 십수 초에 한 계단씩 오르는 수준이었다.
아마 민시화를 직접 대면하는 시간을 늦추고 싶은 듯했다. 성필은 괜히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너 개인 레슨 받는다고 했던가?”
“네.”
“댄스 스포츠는 배우려면 파트너 있어야 하잖아. 그럼 학원에서 파트너를 지정해주나? 아니면 민시화 선생님이 직접 파트너로?”
“여자끼린 안 하겠죠 보통.”
댄스 스포츠는 리더와 팔로워가 함께 펼치는 듀오 댄스다.
춤을 이끄는 리더는 보통 남자이고, 리더에 따르는 팔로워는 보통 여자이다.
춤 자체가 그런 틀을 지니고 발전해왔다.
“딱히 댄스 스포츠만 배우겠단 거 아니에요. 춤에 관련된 거면 뭘 배워도 상관없어요. 민시화 쌤 전공이 아예 무용이더라고요.”
“그래?”
“그리고 파트너 없으면 아저씨가 해줄 거잖아요.”
“안 해줘.”
“메인 프로듀서로서 부탁해도?”
성필은 3초 고민하곤 단호하게 답했다.
“안 돼.”
“치사하게.”
대화를 나누는 중 둘은 스튜디오의 입구에 도착했다. 조아라가 멈춰 서 있기에, 성필이 대신 문을 열었다.
스튜디오 안쪽의 벽면은 3면이 거울이었다. 인테리어는 우드 스타일로 되어 있어 따스한 분위기였다.
커다란 연습실 한편에는 바(Bar)를 연상시키는 카운터 테이블이 있었다. 안쪽 주방에는 커피를 내리는 전문적인 도구들이 보였다.
당장 연습실 여기저기 테이블과 의자만 놓으면, 스튜디오 컨셉 카페로 쓸 수 있을 법했다.
“아저씨, 저기.”
“응.”
카운터 테이블의 의자 하나를 차지한 여인이 보였다. 그녀는 성필과 조아라에게서 등을 돌린 채 커피를 음미하고 있었다.
한 모금, 그리고 그녀가 높은 원형 목제 의자에서 발을 내렸다. 바닥을 딛고 선 그녀를 보고 성필이 처음 마주한 감상은.
‘크다.’
아니, 단순히 ‘크다’로 표현할 순 없다.
길다. 길고 호리호리하다.
예전에 봤을 땐 일상복 차림이라 잘 알 수 없었는데, 오늘의 민시화는 트레이닝복을 입어서인지 체형이 유독 부각되었다.
민시화가 성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으.”
조아라가 성필의 옷자락을 쥐고 몸을 살짝 뒤로 뺐다. 시선만 받았을 뿐인데 움츠러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 이르러서야, 성필은 왜 조아라가 민시화를 보길 무서워했는지 깨달았다.
민시화에게선 사람을 압도하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어떻게 바로 선 것만으로 저러한 기세를 뿜을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갈 지경이다.
‘뭐지?’
성필마저도 당황했다.
일상에서 이러한 느낌을 받을 줄은 몰랐다.
‘마치…….’
무대 위에서 열연을 펼치는 극장 배우를 지근거리에서 바라보는 것만 같다.
압도당한다.
* * *
민시화는 문 앞에 서 있는 성필과 조아라를 보았다. 아직 입 안에 커피의 쓴맛을 간직한 채로 그들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반반하게 생긴 남자보다 그 옆에 선 작은 여자아이에게로 눈길이 간다.
평균 신장보다는 큰 편이지만 고작 1cm나 2cm 정도. 얼굴을 제외하곤 그다지 눈에 띌 만한 타입은 아니다.
하지만 민시화는 조아라의 앞에 서곤 감탄을 억눌러야만 했다.
‘얘 봐라?’
민시화는 그녀 특유의 무표정을 유지했다. 절로 미소가 나올 뻔한 것을 막아야 해서 힘들었다.
조아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나이대에 걸맞지 않았다. 아니, 그녀의 직업에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 어릴 적부터 엘리트 발레 아카데미에서 트레이닝을 이어온 발레리나를 보는 듯하다.
그러한 댄서가 보일 법한 기세가, 조아라에게서 보인다.
‘꽤 춤을 춘 애네.’
몸틀(Schema Corporel)이란 것이 있다.
인간이 공간과 맺는 몸의 의식을 뜻한다.
공간을 이동하는 법, 움직이는 법, 동작을 만드는 법. 인간의 이러한 행위가 습관적으로 쌓이고 쌓여 만들어낸, 몸이 지닌 의식.
댄서의 몸틀은 일반인보다 훨씬 눈에 띈다.
당연하다. 몸을 쓰는 직업이니까. 자신의 움직임과 몸을 전시하는 게 삶인 이들이니까.
‘한눈에 딱 보이네.’
조아라에겐 댄서의 아우라가 있다.
일상적이지 않은 공간을 가로지르는 법.
일상의 범위를 넘어서 동작을 펼치는 법.
비일상적 조형성을 몸으로 표현하는 법.
그러한 비일상의 감각이 댄서의 몸 안에 축적되고, 각인되고, 마침내 세계를 향해 드러난다.
학자의 말에 품위와 지혜가 절로 배어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조아라?”
민시화가 묻자 조아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시화가 손을 내밀었다. 조아라가 쭈뼛대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민시화는 조아라의 키네스피어(Kinesphere, 무용학자 라반의 움직임 분석론에 등장하는 개념, 댄서의 고유 영역, 개인의 움직임 공간을 뜻하며 댄서들은 과신전을 통하여 키네스피어를 최대한 확장하려 한다)를 확인했다.
조아라는 가만히 선 채, 척추가 곧게 정렬된 상태로 손을 내밀었다. 중심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스트리트 댄스에 근본을 두었으나, 오랜 아이돌 생활로 몸이 극장 춤 계열에 맞추어진 듯하다.
민시화는 다시 속으로 웃음을 띠었다.
‘전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나아졌네.’
나아졌단 뜻은, 조아라가 아이돌 댄서로서 더 나아갔단 것이었다.
악수를 끝낸 후 민시화는 다시 조아라를 응시했다.
그녀의 주위로 뻗어나간 몸틀을.
세계를 향해 조아라가 뻗치는 아우라를.
그것을 보고 나서 민시화가 물었다.
“아이돌로서 더 나은 퍼포먼스를 바라는 거니? 그래서 나한테 춤을 배우려는 거고?”
“네.”
이전과 마찬가지로, 민시화는 속으로 탄식했다.
‘그렇구나.’
민시화의 제자인 백민정의 애제자, 조아라라고 했던가.
‘얘는 첫걸음부터 잘못 뗐네.’
백민정의 애제자라고 하니 따뜻하게 대해줘야겠지.
헛된 희망을 마주하고 달려 나가다가, 제풀에 쓰러져 좌절하지 못하도록 미리 내치자.
“넌 나한테 배울 실력이 안 돼.”
* * *
“실력이 안 된다뇨!”
민시화는 연극배우 보듯 성필을 보았다.
사실 연극배우와 그다지 다르지도 않았다. 성필은 배우처럼 몸을 최대한도로 써가면서 분노를 표출했으니까.
온갖 제스처를 동원하여 본인의 감정을 드러냈다.
“적어도 추는 걸 보고서 이야기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냥 싫으면 싫다고 하시지 자격이 안 된단 건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 아라, 밥 먹고 춤만 추는 애예요!”
“우리 아라?”
“……아라 걔 밥 먹고 춤만 추는 애예요! 춤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애라고요! 아이돌 중에서도 비교 대상이 없, 거의 없을 정도로 잘 춰요! 선생님이 아라 춤추는 거 한 번이라도 보시긴 하셨습니까?”
“아니.”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애가 얼마나 상처받았겠어요? 선생님을 동경해서 춤을 배우고자 하는 애인데! 아니, 그건 차치하고서라도 우리 아라.”
성필이 분노의 절정에 달하여 피 끓는 심정으로 외쳤다.
“선생님한테 그런 말, 아니, 세상 누구에게라도 그런 말 들을 애 아닙니다! 그리고, 몸이 문제라고요? 아라 몸이 어때서요! 저렇게 아름다운데!”
“그래?”
“예!”
“그래.”
“……예!”
성필은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민시화는 무슨 말을 들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마치 강아지가 재롱떠는 것을 보는 눈이다.
성필은 혹시 자신이 댄서들에게 유독 나약하게 보이는 스타일인지 고민해야만 했다.
“나를 동경한다고?”
성필이 숨을 고르는 사이, 마침내 민시화가 그럴듯한 말을 꺼냈다.
“그래서 나한테 춤을 배우고 싶다, 라고……. 솔직히 걔가 나한테 뭘 배우려는 건지 감도 안 잡히지만, 원한다면 기회를 줄게.”
성필은 다시 열이 뻗쳐서 ‘기회는 됐으니 사과해주세요!’라 말하려 했지만, 그게 조아라가 바라는 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조아라는 화가 나서 나가버렸지만, 아직도 민시화에게 춤을 배우고 싶을지도 모른다.
“기회요?”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의견을 바꾸다니.
성필은 그녀가 자신을 놀리거나, 혹은 조아라를 놀리려 하는지 의심해야만 했다.
“그 아이 다시 데려와 줄래?”
하지만 의심한다고 별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다. 이 일의 당사자는 조아라이니, 그녀가 직접 상황을 마주하고 결정해야만 한다.
성필은 분을 삭이며 문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문을 여니 바로 앞에 조아라가 있었다.
그녀는 아직 화가 다 식지 않았는지 얼굴이 붉었다.
“아라야, 잠시 들어올래?”
“느, 네.”
조아라는 성필의 뒤를 머뭇머뭇 쫓았다. 민시화의 앞까지 온 그녀는 성필의 등 뒤에 서서 반만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도 나한테 춤을 배우고 싶니?”
“…….”
조아라는 답하지 않았지만, 대답은 ‘네’일 것이다. 단지 자존심 때문에 말이 나오지 않을 뿐이었다. 아니면 부끄러워서 그렇거나.
“민정이한테 대략적인 얘기는 들었어. 네가 나한테 바라는 거 말야. 네가 나한테 배우고 싶은 건 테크닉이라기보다는 전체적인 감각이지? 좋아, 이 오빠의 열정을 봐서 기회를 줄게. 어떡할래?”
성필은 자신의 뒤에 숨은 조아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아라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네’라고 답했다.
“마사 그레이엄 테크닉.”
민시화가 말했다.
“현대무용가인 마사 그레이엄이 확립한 테크닉 방법론이야. 이사도라 덩컨 이후 등장한 현대 무용가들은 수백 년간 발전한 발레의 테크닉을 포기하지 않았어. 포기할 이유가 없지. 가장 발전한 댄스 테크닉이니. 그 테크닉을 일정 부분 계승하면서 새로운 움직임을 개발했어.”
턴아웃, 턴인, 상승, 하강, 에너지 흐름, 자세 정렬, 스텝, 점프, 과신전, 굴신 등.
발레의 경직성에서 탈출하여 더 다양한 방법론을 개발하려 노력해왔다. 그 정수(精髓)의 집합이 마사 그레이엄 테크닉이다.
“보통은 현대 무용에 입문하면 배워. 발레의 테크닉과 비슷하지만 발레만큼 강력하게 중력에 저항하진 않고, 발레엔 존재하지 않는 플로어 사용법도 들어가 있지. 보통 무대에 서는 사람들은 더 효과적인 신체 전시를 위해 발레를 배우곤 해. 배우나 댄서, 가수들. 그런데 빨리 지치지.”
발레는 어릴 적부터 배우지 않으면 숙달하기 매우 어렵다.
가장 기본적인 자세만 잡아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땀을 뻘뻘 흘리며 쓰러질 것이다. 다음 날 근육통에 시달리는 건 당연하고.
발레리나들은 가녀리게만 보인다. 하지만 그 여린 피부 안은 강철로 짜인 얇은 근육으로 가득하다.
년 단위의 노력으로 직조된 부드러운 강철 원단이다.
그러니, 발레의 테크닉을 습득하기란 매우 어렵다.
“마사 그레이엄 테크닉은 그보다는 쉬울 거야. 기본 중의 기본. 무대 위에서 몸을 어떻게 보여줘야 하는지, 그 가장 기본 동작들을 담았지. 그 테크닉을 익혀서 나에게 보여줘. 내 기준에 맞으면, 가르쳐줄게.”
“그게 나한테 필요해요?”
“필요하지. 아이돌의 춤은 극장 춤의 갈래니까.”
평면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보이는 것을 전제로 한다.
“네가 내 기준에 맞든 안 맞든, 마사 그레이엄 테크닉을 숙달하는 건 아이돌 퍼포먼스에 도움이 될 거야.”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그래.”
“극장 춤이 뭐예요?”
민시화가 검지를 폈다. 교사가 무언가를 설명하며 ‘첫째’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한국 전통 무용은 어떤 상황을 가정하지?”
“상황요?”
“한국 전통 무용의 관객들은 보통 어디서 그 춤을 봤을까? 현대가 아니라 과거에서 말야.”
“……시장?”
“맞아. 시장, 저잣거리. 아주 가까운 거리, 사방에서 사람들이 볼 걸 가정하고 발전한 춤이야.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러니 극장 평면 무대에서 보면 오히려 심심하지. 그러니 이건 극장 춤이 아니야. 그럼 극장 춤인 건 뭘까?”
“발레.”
“맞아. 오직 평면의 관객을 가정하지. 정면에서 보았을 때 어떻게 가장 아름다우면서 존재감이 강한지 고민하면서 발전한 춤. 아이돌도 같지? 정면 카메라에 보일 걸 가정하고 춤을 추니까. 이해했어?”
조아라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관객의 방향에 따라 춤이 다른 방식으로 발전했단 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렇구나, 보는 방향에 따라서도 춤이 달라지는구나…….”
조아라는 폰을 꺼내어 ‘마사 그레이엄 테크닉’이란 단어를 기록했다. 그녀는 왜 민시화가 그것을 시험 주제로 주었는지 이해하게 됐다.
뭔지는 모르지만, 빨리 배우고픈 마음이 들었다.
그런 조아라를 보는 민시화는, 굳이 하지 않은 이야기를 속으로 되새겼다.
‘이 테크닉은 이상적 체형에 가까울수록 훨씬 유리해져. 이상적 형태와 조형미를 만들어내야 하니까. 발레에 기원을 두었으니 당연하지.’
역으로 말하면, 이상적 체형이 아니라면 끊임없는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결국에는 자신의 한계에 절망할 수도 있다.
‘춤에서 타고난 신체적 조건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지.’
100만큼 테크닉을 숙련한 일반인보다, 타고난 체형의 무용수가 10만큼 테크닉을 숙련한 게 훨씬 보기 아름답다.
민시화가 조아라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넌 이 테크닉을 배우는 와중에 깨닫게 될 거야.’
다른 무용수들과 비교하여, 자신의 몸이 얼마나 무용에 적합하지 않은지 말이다.
농구를 하면 키가 커진다거나, 수영을 하면 어깨가 넓어진다는 속설이 흔히 퍼져 있다. 선수들이 죄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인과가 역전된 설명이다.
키가 크니 농구선수로 살아남은 거고, 어깨가 넓으니 수영선수로 살아남는 것이다.
무용도 마찬가지다.
‘태어날 때부터 재능이 따라주지 않는 이들은 시작부터 절망할 수밖에 없어.’
특히, 조아라처럼 춤에 진심인 아이는 더욱더 좌절의 깊이가 클 것이다.
‘네 근원인 스트리트 댄스와 아이돌 퍼포먼스로 돌아가렴.’
민시화는 조아라와 같은 아이들을, 동료들을 많이 보았다. 꿈을 품었지만 끝내는 스러져간 안타까운 영혼들을.
그러니 이건 민시화가 조아라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따스한 배려였다.
메모를 마친 조아라는 기쁨으로 흥분하여 말했다.
“그럼 언제 와서 배워요?”
“뭘?”
“네?”
“뭘 와서 배워?”
“아니, 그 테크닉 여기 와서 배우는 거 아니에요? 나중에 시험 보고…….”
“너 혼자 배워야지.”
조아라가 당황한 듯 눈만 깜빡였다.
“어디서 배워요?”
“네가 알아서 배워.”
“……?”
“복장은 저거.”
민시화는 구석의 옷걸이를 가리켰다.
검은색의 레오타드 무용복이 보였다.
원피스 수영복과 비슷하지만, 옷의 허릿단이 골반 위까지 올라간 형태였다. 하이레그라고 부르는 것이다.
“연습할 때도 헐렁한 옷 입고 하지 마. 몸의 움직임을 제대로 관찰해야 하니까. 나한테 시험받을 때도 저 옷 입을 거야. 인터넷에서 사면 싸게 구할 수 있어. 그런데 넌…….”
민시화는 조아라의 상체에서 하체로 천천히 눈을 내렸다.
“맞는 사이즈 찾기가 힘들 수도 있겠다.”
* * *
차를 타고 가로 엔터로 돌아가는 길.
성필은 몇 분째 조수석의 조아라를 힐끔거리기만 했다. 말을 하려다가도 그만두고, 입을 열었다가도 닫았다.
그러다 도저히 참지 못해서 말했다.
“그렇게 심한 말까지 들었는데, 굳이 민시화 선생님한테 배워야겠어?”
“정호환 이사님이 아저씨한테 프로듀싱 가르쳐주는 대신 1분간 욕먹으라고 해요. 그럼 아저씨는 배울 거예요?”
욕만 먹을까? 발을 핥아서라도 배운다.
성필은 조아라가 하려는 말을 찰떡처럼 알아들었다. 그래도 그녀가 받았던 취급이 자꾸만 머리에 떠올라 꿍한 티를 냈다.
그에 조아라는 성필을 위로하듯 가볍게 말했다.
“옛말에 배울 수 있으면 개한테도 허리를 숙인다고 했어요. 뭐, 쌤쌤이 나한테 실력 없니 뭐니 했을 땐 걍 다 때려치우자 싶었는데. 다시 기회라도 주니 좋은 거죠.”
성필은 여전히 꿍했다. 그러자 조아라가 성필을 놀렸다.
“뭐예요. 내가 욕먹은 게 그렇게 싫어요?”
“싫지 그럼.”
“하기사, 나도 아저씨 욕먹으면 욕한 인간 뒤통수라도 한 대 때리고 싶을 거니까.”
“정말 괜찮아? 보니까 민시화 선생님 성깔 장난 아니시던데.”
솔직히, 조아라가 시험을 통과하고 민시화에게 춤을 배우게 되더라도 좋은 취급을 받으라곤 생각하기 힘들었다.
성필은 아까의 일을 떠올리자 헛웃음이 나왔다.
‘아라가 절망한다고? 그래서 거절해?’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
그리 생각한 성필은 다시 조아라에게로 눈을 돌렸다. 민시화는 조아라의 몸을 지적했었다.
‘태어날 때부터 탈락했다, 고…….’
굳이 민시화가 조아라에게 심한 말을 할 이유는 없다.
그녀는 댄스 스튜디오를 운영 중이고, 조아라처럼 유명한 아이돌이 수강생이 된다면 홍보 효과가 굉장할 것이다.
백민정이 속한 ‘유 노 댄스 아카데미’가 조아라를 배출하고 나서 단박에 성장한 것처럼.
‘그런데 선생님은 아라를 쫓아내다시피 하려고 하셨어.’
그저 성질이 더러워서?
오늘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아무리 그렇더라도 기본적인 손익 계산은 가능할 것이다.
조아라를 홍보에 쓰지 않더라도, 개인 레슨은 10회에 백만 원 이상을 호가한다. 수강생을 받는 건 좋으면 좋았지, 절대 안 좋은 건 아닐 텐데…….
‘그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탈락한 거야.’
민시화의 목소리가 다시금 성필의 머릿속을 울렸다.
그건 마치 신으로부터 주어진 선고 같았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만지며 ‘너는 질이 좋지 않아 비싼 그릇은 되지 못하겠구나’라고 말하는 듯했다.
‘아라의 몸.’
무용수로서 적합하지 않은 몸.
확실히, 과거에 조아라는 진저를 보면서 질투심을 품었던 적이 있었다.
진저의 재능에 대한 질투.
그건 안무습득력과 이해력을 향한 것이기도 했지만, 타고난 진저의 몸을 향하는 것이기도 했다.
인간보다 숲의 요정에 가까운 체형.
중성적이기까지 한, 굴곡이 적어 한없이 곧게 뻗어나가는 가녀린 신체.
아마 진저가 발레리나가 되었다면 인간 여성역은 맡지 않았을 것이다. 실피드와 같은 요정역이야말로 그녀에게 어울리는 것이겠지.
“아저씨.”
성필이 생각에 잠겨있던 중 조아라가 그를 불렀다. 성필은 황급히 진저의 이미지를 지워버리곤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 몸이 그렇게 별론가.”
성필은 심장이 철렁했다.
조아라가 나가고 민시화와 둘이서만 했던 대화. 그때 민시화는 조아라가 본격적으로 무용에 관심을 지니면 절망할 거라고 했었다.
그걸 조아라가 들은 걸까?
그러지 않길 바랐다.
“쌤쌤이 말하는데 계속 내 몸 훑는 거예요.”
“어?”
“체형 재는 느낌. 왜, 학원 강사들이 수강생 들어오면 견적 보듯이 하는 거요. 딱 봐도 쌤쌤이 나 안 좋게 보는 거 같아서요.”
성필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조아라는 대화를 듣진 않은 듯했다.
“그래서, 별론가 해서요.”
“별로긴.”
“별로가 아니면요?”
“응?”
“왜.”
조아라가 악동처럼 웃었다.
“성욕이 생겨요?”
성필은 순간 숨이 턱 막혔다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 말은 전에 들은 기억이 있었다.
가로 엔터에 막 손혜빈이 들어왔을 적, 조아라가 갑자기 성필을 불러세우곤 ‘성욕이 생겨요?’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
한구인이 빌려준 무슨 책을 읽곤 뭔가 확인하려 했다던데, 이유가 뭐든 성필은 아주 기겁했었다.
그땐 조아라에게 곧바로 소리쳤었지만.
“크흨.”
성필은 웃음이 나와 입을 가려야 했다.
“이번에도 학문적인 목적이야?”
“와, 아저씨 기억하네?”
“너무 충격적이어서 잊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어때요?”
“어떻긴.”
성필이 근엄하게 말했다.
“아무 생각도 안 들어.”
“거짓말.”
조아라가 즉시 부정했다. 성필이 당황해서 쳐다보자, 그녀는 이미 차창으로 고개를 돌린 채였다.
“뭐가 거짓말이야.”
“됐어요.”
성필은 찜찜한 기분으로 운전을 이어갔다.
‘얘 나랑 민시화 선생님 얘기 들은 거 아니야?’
민시화의 이야기를 들은 것도 문제이지만, 성필의 이야기를 들은 것도 문제다.
그럼 좀 많이 부끄러운데.
아니면…….
‘내가 아라를 보는 눈빛이 이상한가?’
그리 생각하니 식은땀이 난다.
성필은 혼자 어색해졌다.
이 어색함이 그녀와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게 하지 않으려면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한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적당히 화제를 돌려야 할까.
“근데.”
다행히도 조아라가 먼저 말을 꺼내주었다.
“마사 그레이엄 테크닉이란 거 어디서 배워야 하는지 알아요? 현대 무용 가르치는 학원도 있나? 예고나 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거 아닌가.”
조아라는 폰을 꺼내어 유튜브에 ‘마사 그레이엄’을 검색하려 했다. 그러자 성필이 자신감 넘치는 어투로 답했다.
“걱정 마.”
“오, 역시 짬밥 있는 매니저. 어디 학원 알아요?”
“학원은 모르고, 관련해서 아는 사람은 알아.”
“누구요?”
* * *
“마사 그레이엄.”
그 이름을 부르는 손혜빈의 목소리엔 그리움이 묻어나왔다.
“대학 나오고 나서도 들을 줄 몰랐네.”
손혜빈은 연습실의 중앙에 서서 스트레칭했다. 그 앞에 선 조아라는 새로운 것을 배운단 흥분감과 동시에 긴장을 가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드디어 내 학사 학위를 쓸 때가 왔어.”
손혜빈.
한 세대를 빛낸 스타가 직접 조아라를 가르친다.
“먼저, 마사 그레이엄이 누군지부터 설명할게. 쉽게 말하면 현대 무용의 시작이자 그 자체인 사람인데…….”
성필은 손혜빈과 조아라의 수업이 원활하게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다, 조용히 연습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이걸로 아라의 수업은 해결됐고.’
남은 건 조아라가 손혜빈에게 테크닉을 습득하여 민시화의 시험을 통과하길 비는 것뿐이다.
손혜빈은 졸지에 초과근무를 하게 되었지만,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묵혀두고 있던 배움을 베풀 수 있어 좋다고까지 말했었다.
유학을 관두고 가로 엔터에 남은 것부터 조아라를 가르쳐주는 것까지, 손혜빈에겐 감사할 것밖에 없다.
아직 퍼포먼스 디렉팅 팀 구성은 오리무중이지만, 차차 어둠을 더듬어가다 보면 길이 보일 것이다.
‘오늘 일은 다 마쳤고.’
이제 남은 건…….
“박 이사님.”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성필은 화들짝 놀랐다. 고개를 돌리니 장하양이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죄, 죄송해요. 놀라셨어요?”
“아니, 아냐, 괜찮아.”
인기척도 없이 바로 뒤까지 다가와서 너무 놀랐다.
지금도 거리가 가깝건만, 장하양은 한 걸음 더 성필에게로 다가왔다. 마치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있단 것처럼.
“오늘 빛나솔 최종화 촬영이죠? 지금 퇴근하시고 바로 가시는 거예요?”
“응. 지금 가려고.”
장하양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미소 지으면서 ‘파이팅’을 외쳤다.
성필은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저 그녀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하며 ‘파이팅’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저희 이번 명절에 내려가는 거요.”
‘저희 이번 명절에 내려가는 거’란 말을 듣고, 성필은 순간 뇌가 정지하는 것 같았다.
‘저희’ 이번 ‘명절’에 내려가는 것?
“아, 추석?”
“네.”
장하양이 안심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이전 명절에, 성필은 장하양과 함께 부모님의 산소를 찾아갔었다. 그때 장하양은 앞으로 명절마다 성필과 함께하겠다고 했었다.
성필은 장하양이 순간적인 동정심으로 한 말일까 걱정되기도 하여, 그녀가 부담감을 가지지 않도록 이제껏 그 일을 입에 올린 적은 없었다.
“올해도 오는 거야?”
“당연하죠. 가족이잖아요, 여보.”
“다시 한번 그 호칭을 입에 올리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고 했을 텐데?”
“시간은 어떻게 할까요?”
“그걸 벌써 정해?”
“미리 알아두고 싶어서요.”
일본 컴백을 마치고 돌아오면 얼추 시일이 맞긴 하다. 지금 나눌 이야기는 아니지만, 성필의 스케줄을 따른다면…….
“아침에 가야겠지.”
“네, 기억하고 있을게요.”
그제야 장하양은 성필로부터 한 걸음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금 두 주먹을 불끈 들어 보였다.
“파이팅!”
뭐가 파이팅이라는 걸까.
잘 모르겠지만, 성필은 그녀의 응원을 기꺼이 받았다.
“어, 파이팅.”
성필은 회사를 나와 최종화를 촬영하기 위해 차에 올랐다. 오늘은 합숙소에 가지 않는다.
미리 제작진과 합의한 장소로 가서 최종 선택을 끝내고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이는 매우 빨리 끝날 것이다.
‘이미 합의가 되어 있으니까.’
* * *
에리카 사태가 있고 난 후, 성필은 김하슬과 따로 만남을 가졌다. 김하슬에겐 모든 것을 설명해야만 했다.
카페에서 만난 그녀는 며칠 사이에 초췌해져 있었다.
성필은 그녀와 마주하곤 안부부터 물었다.
“그, 괜찮아?”
“그럭저럭 살만해.”
“…….”
“…….”
“SNS 계정 닫은 거 봤어. 그으…….”
방송에 출연하기 전부터 팔로워가 천 단위였고, 방송 출연 이후로는 만 단위로 올라간 계정이다.
하지만 김하슬은 유스들에게 지속적인 테러를 당하고 나선 아예 SNS를 닫아버렸다.
SNS 계정은 팔로워 수가 늘어나면 유용한 수익 창출 수단으로 쓸 수 있다. 팔로워 만 단위 계정을 닫는단 건 아깝지만, 정신 건강 차원에선 올바른 선택이다.
“상황이 이렇게 돼서…….”
“됐어.”
김하슬이 성필의 말을 끊었다. 사과는 듣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단호하게.
“오빠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그 일, 이젠 꺼내지 않기로 했고. 내가 져주기로 했어. 그걸로 끝이야.”
“……응.”
김하슬의 말투는 방송에 나오는 것보다 훨씬 딱딱했다. 그녀의 기분이 반영된 거라기보다는, 이게 김하슬의 원래 말투에 가까울 것이다.
성필은 심호흡을 하곤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하슬아, 이번에 내가 약속 깬 걸로 알았겠지만. 나는 일이 더 소중한 사람이야. 너보다 에리카 씨를 우선했어. 그건 정말 할 말이 더 없어.”
단도직입적으로, 성필은 김하슬의 자존심을 철저하게 구겨버렸다. 김하슬의 면전에 대고 ‘너보다 일이 더 소중해’라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김하슬은 얼마나 비참한 기분이었겠는가.
“미안해. 나는 사랑을 하기엔 너무 어리고, 불성실하고, 자격이 없는 사람…….”
“됐다고 말했는데.”
김하슬이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성필의 결연한 사과가 아무것도 아니란 태도였다.
“계속 사과만 하네. 본론으로 넘어가자.”
“…….”
“미안해서 말 꺼내기 힘든 거지? 알겠어. 그럼 내가 대신 말할게. 서로가 서로한테 자존심 좀 세워주자. 그리고 마지막 선택에선 아무도 고르지 말자. 오빠도 그게 편하지?”
“……괜찮아?”
“괜찮아. 나도 진지하게 여기 나온 거 아니니까.”
김하슬은 처음으로 미소 비슷한 것을 띠었다.
“애초에, 진지하게 연애하려고 방송에 나오는 인간이 있을 리 없잖아. 그런 인간이 있으면 어디 머리에 나사 하나 빠진 거겠지. 굉장한 관종이거나. 그냥 여기 나온 사람 다 제각기 목적이 있는 거야. 나도 그렇고, 오빠도 그렇겠지. 그냥…….”
김하슬은 손목시계를 확인하곤 핸드백을 집었다.
“우리 둘 다 방송 끝날 때까지 적당히 즐기기만 하자. 어차피 우리 둘 다 처음부터 진지하진 않았잖아.”
* * *
성필은 최종 선택이 이루어지는 장소에 도착했다. 합숙소와 적당한 거리의 근린공원이었다.
성필을 맡은 제작진 몇 명이 주홍색의 조명을 받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성필은 그들과 대화를 나눈 후 촬영에 들어섰다. 고민하는 제스처를 취하곤…….
“저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을게요.”
제작진은 이미 예상한 듯 알겠다고 했다. 남은 일은 누군가 성필에게 최종 선택 문자를 보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조만간 다시 제작진과 만나 방송에 쓸 심경 인터뷰를 진행하는 것.’
그럼으로써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의 촬영은 끝을 맺게 된다.
성필은 공원 벤치에 앉아 최종 선택이 끝나는 시간인 8시까지 기다렸다. 카메라는 진득하게 성필을 찍었다.
제작진 사이에서도 일이 어떻게 흘러갈까 기대하는 등의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은 김하슬이 어떻게 할지도 알고 있었으니까.
‘남은 시간은 3분.’
성필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마 방송으로 이 장면이 나간다면 자막으로 ‘하슬에 대한 미안함으로 끝끝내 문자를 보내지 못하는 성필……’ 같은 게 나가지 않을까.
그리고 ‘하슬이한테는 제가 너무 부족한 사람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라 말하는 성필의 인터뷰 화면이 겹쳐지겠지.
성필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시계를 보았다. 남은 시간은 1분이다.
‘끝이네.’
길고 길었던 방송도 이제 전부…….
“수고하셨습니다.”
8시 정각.
성필은 제작진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제작진도 성필을 향해 마주 인사했다.
장장 몇 달 동안 함께한 출연자와 제작진을 향하니 쌍방의 예의였다.
성필과 제작진은 왠지 모르지만 박수를 치면서 촬영의 끝을 자축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보다 드라마 촬영이 끝난 후의 분위기 같았다.
성필은 제작진에게 다가가 한 명씩 악수하고 미소와 감사의 말을 전했다. 제작진 스태프들도 성필에게 고생이 많았다거나 쫑파티에서 만나자와 같은 말을 하면서 친근감을 드러냈다.
그때.
띠링.
8시 01분.
조용한 공원.
간결하고 명확한 착신음이 울렸다.
갑자기 제작진이 느슨한 분위기를 없애고 성필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성필은 손에 쥐고 있던 폰을 보았다.
[김하슬]
김하슬로부터 문자가 왔다.
최종 선택 시간이 끝난 직후에.
* * *
8시 50분.
약속한 시간으로부터 20분이 지났지만, 성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성필에게 온 건 ‘죄송합니다 촬영이 생각보다 길어져서 늦을 것 같습니다. 먼저 시작하고 계세요’란 문자뿐이었다.
에리카는 시계를 하염없이 보다가 턱을 괴었다. 그러고 나서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앞엔 여러 종류의 다과와 음료가 놓인 테이블이 있었다.
테이블 근처엔 에리카의 강요로 고깔모자를 쓴 리카와 김민주가 둘러앉아 있었다.
김민주가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야, 그냥 우리끼리 먼저 먹고 있으…….”
“안 돼. 박 이사님까지 모여야 시작할 거야.”
김민주의 불만을 잠재운 에리카는 다시 시계를 보고,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한숨을 푹 내뱉었다.
‘늦으시네.’
에리카 믹스테입 작업 종료 파티.
이렇게나 중요한 날에 늦다니.
그래도 뭐…….
‘나는 마음이 넓으니까.’
에리카도 예능 촬영이 고무줄처럼 늘어질 수 있단 건 알고 있다. 촬영 때문에 늦어지는 거라면 어쩔 수 없겠지.
‘그래도 늦은 건 늦은 거니까.’
성필이 오면 잔뜩 삐친 체를 해야겠다. 그럼 성필은 잔뜩 안절부절못하면서 자신을 달래주려 하겠지.
살짝 골려주곤 봐줘야겠다.
에리카는 성필을 떠올리며 희미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