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86화 (486/760)

486화

소녀연맹 멤버들은 오랜만에 성필로부터 단체 소집을 지시받았다.

“‘우리들의 프로듀싱’ 얘기인가?”

“그런 거였으면 아저씨가 나 혼자 불렀지.”

신아름은 나란히 계단을 올라가는 조아라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러고서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팀장님 되게 자주 부르더라. 밤에 연락도 자주 하고. 그렇게 할 말이 많아?”

“너도 프로듀서 돼 봐. 내가 진짜 프로듀서도 아니고, 뭐 생각 떠오르면 바로 직원분들 불러서 얘기할 순 없잖아.”

“쌤은 안 그랬잖아.”

“쌤은 처음이니까 안 익숙했던 거지. 나야 쌤 하는 거 옆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봤으니까, 아저씨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감 잡은 거고.”

“이용? 넌 말을 해도 꼭…….”

“쌤이 너무 소극적이었던 거야.”

앞에서 먼저 걷고 있던 백설하는 조아라의 말이 맞다고 여기면서도 의기소침해졌다.

‘내가 그렇게 미숙했나?’

미숙했을 것이다.

처음이니 말이다.

무슨 안건이나 아이디어가 생각나도 ‘괜찮을까? 아닐까?’ 그리 고민하며 속에 꾹꾹 감추다가, 성필과 만날 기회가 있으면 조심조심 털어놨더랬다.

‘더 적극적으로 할걸…….’

조아라가 성필과 적극적으로 협의하는 것을 보니 후회가 짙어진다. 하나부터 열까지 성필과 공유했더라면 마음고생이 덜 했을 수도 있을 텐데.

자신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직원들도 고생했을 걸 생각하면 속까지 쓰리다.

“언니.”

그때 옆에서 걷던 장하양이 백설하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언니 덕에 아라가 더 잘할 수 있는 거예요. 그치 아라야?”

“맞죠. 옆에서 쌤이 쌩고생하는 거 생으로 계속 봤으니까, ‘나 때는 저렇게 안 해야지’란 생각도 할 수 있었죠.”

백설하는 뭔가 실험쥐가 된 거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도 사랑스러운 동생이 자신 덕에 덜 힘들 수 있다면, 자신의 고생도 영 의미가 없던 건 아닐 것이다.

“진짜 빛나솔 끝나면 아저씨 24시간 옆에 잡아두는 것도 가능할 듯.”

“아라쨩! 박 이사님도 사생활이 있어!”

“아저씨 퇴근 싫어하던데 사생활 없으면 좋은 거 아냐?”

“……소난다(그렇구나)! 그럼 아타시(나)도 프로듀서 되면 박 이사님 24시간 감금이야!”

“감금?”

“구속이야!”

“똑같은 뜻이거든.”

“외국인한테 언어적 적확성을 요구하는 건 과도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적확이랑 정확 구분하는 것부터 한국인보다 훨씬 한국어 잘하는구만.”

잡담을 떠는 동안 멤버들은 회의실에 도착했다. 회의실에선 성필이 빔프로젝터를 점검하고 있었다.

멤버들은 종이 울리자 착석하는 학생들처럼 자연스럽게 자리를 찾아 앉았다.

“다들 일찍 왔네. 아직 준비 덜 끝났는데.”

“쌤, 10분 일찍 올 필요 없댔잖아요. 적당히 쉬다가 오면 될걸.”

“일찍 오면 좋잖아.”

“뭐가요?”

“음…….”

백설하는 회의실 여기저기를 쳐다보면서 고민하는 척하다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선생님 첫사랑 얘기해주세요!”

“아, 설하가 부탁하면 어쩔 수 없지. 내 첫사랑은 참으로 바람 같이 찾…….”

“선생님 진도 나가요.”

장하양 학생 때문에 성필의 첫사랑 이야기는 시작하자마자 끝을 맺었다.

성필도 그다지 떠올리고 싶진 않았기에, 프로젝터 정비에 다시 집중했다.

그는 세팅을 끝낸 빔프로젝터 리모컨을 들고 스크린에 PPT를 띄웠다.

일본 콘서트 관련 PPT였다.

조아라가 감탄했다.

“와, 아저씨 뭔데. 무슨 발표 해요? 지금까진 우리 불러도 걍 입만 털었잖아요.”

장하양이 조아라의 허벅지를 찰싹 쳤다.

“지금까진 우리 불러도 말로만 했잖아요.”

“우리 가로 엔터에 계속된 흑자를 가져다주시는 아티스트분들을 위한 브리핑이잖아. 대충할 수는 없지.”

“이사가 직접 해주는 브리핑이라니, 귀하네요!”

“아티스트 리카 씨, 준비되셨나요?”

“쥰비칸료(준비완료)!”

성필은 바로 얼마 후에 이루어질 소녀연맹 일본 활동을 짧게 브리핑했다.

작년보다 많은 방송 스케줄에 소녀연맹 멤버들은 자신들의 위상을 체감하게 됐다.

성필이 방송들의 평균 시청률이나 역대 출연자들을 보여주어서 체감이 훨씬 쉬웠다.

“저희 한국에선 방송 출연 자주 커트하잖아요. 그런데 일본엔 방송 스케줄이 엄청 타이트하네요.”

“하양이가 잘 지적해줬어. 일본은 한국과 달리 텔레비전 미디어의 영향력이 인터넷을 넘어서거든. 뉴미디어 홍보보다 방송 한번 나가는 게 훨씬 효율이 좋아. 물론 연령층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래서 일본 활동은 텔레비전 방송 중심이야.”

성필은 PPT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알려주긴 조금 이르지만, 팬미팅이야. 제2차 인터내셔널 연맹 대회.”

“그 이름 계속 쓰는 거예요……?”

“이왕 썼으니까 계속 쓰는 거지 뭐. 저번 팬미팅 기억나? 100명 정도 불러서 미니 콘서트 했었잖아. 이번엔 규모 키워서 진행해.”

“어디서요?”

성필이 리모컨 버튼을 누르자 하나의 사진이 나타났다. 그것을 본 몇몇 멤버들의 표정이 굳었다.

“여기 어딘지 아는 사람?”

“자, 잠실…….”

사진에 나타난 장소는 무려 잠실체육관이었다.

10,000명 규모의 콘서트가 가능한 장소.

“패, 팬미팅을 잠실에서 한다고요?”

조아라가 아연실색하자 성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필의 얼굴엔 행복이 가득했다. 그는 스크린에 떠오른 잠실체육관을 홀린 듯이 바라보며 설명을 이었다.

“콘서트형 팬미팅이야. 콘서트는 너희 팬이 아닌 사람도 올 수 있지만, 팬미팅에 응모하는 건 전부 다 너희 팬일 거야.”

아이돌 콘서트도 팬이 아닌 사람이 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겠지만, 콘서트형 팬미팅은 관객석이 아예 인민이들로 도배될 것이다.

“일단 인민이들한테 먼저 티켓팅을 오픈하고, 객석이 다 안 차면 일반인에게 예매를 오픈하는 형식이야. 제2차 인터내셔널 연맹 대회를 기념해서 팬클럽 3차 모집도 진행할 거고. 새 굿즈도 많이 나올 거야. 올해 너희들 통장에 꽂히는 돈 기대해도 되겠지?”

“잠실을 채울 수 있을까요?”

백설하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러자 성필이 역으로 질문했다.

“설하야. ‘인트로: 러브’ 초동 판매량은?”

“23만 장…….”

“다키스트는 10만 장 이하로 팔고도 잠실 팬미팅 매진시켰었어. 오히려 지금까진 우리 회사가 소녀연맹의 팬덤을 짐작 못 해서 소극적으로 나간 기미가 있어. 더 적극적으로 공연 사업을 확장할 때야.”

“저거 망하는 회사 사장들이 단골로 하는 말인데.”

장하양이 조아라의 정수리를 손날로 톡 쳤다.

조아라는 머리를 문지르면서 손을 들었다.

“아저씨, 우리 일본 한정 콘서트 준비하고 있잖아요. 그건 뭐, ‘인트로: 러브’ 앨범 수록곡만 추가됐으니 그렇다 쳐요. 근데 제2차 인터내셔널 연맹 대…… 걍 연맹 대회라고 부를게요. 연맹 대회 연습까지 할 수 있어요?”

조아라가 턱 끝을 까닥하며 스크린에 떠오른 팬미팅 날짜를 가리켰다.

“올해 말이잖아요.”

“팬미팅은 그렇게 빡빡하진 않아. 물론 퍼포머로서 일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를 보여줘야 하겠지만, 팬미팅은 오로지 팬을 위한 행사. 즉, 팬들이 기뻐할 만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 거지.”

“쌤이 동물 잠옷 입고 깡충깡충 뛰면서 노래 부르고 춤추는 그런 거요?”

“어?!”

“어.”

“‘어’요?!”

“개인적으로는 우파루파 잠옷을 입히면 좋겠다 싶네.”

백설하는 충격받은 얼굴로 ‘우파루파……’라며 중얼거렸다.

“아무튼, 팬과의 교감이 주가 되는 세트리스트가 나올 거야. 콘서트처럼 강렬하진 않지만, 그게 쉽단 뜻은 결코 아니야. 팬미팅 건은 더 진행되면 또 보고해줄게.”

아직 백설하가 우파루파 동물 잠옷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성필은 PPT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마지막으로 일본 한정 콘서트 관련해서 얘기해줄게. 총 세 곳에서 진행할 거야.”

“정답!”

리카가 손을 번쩍 들었다.

“부도칸(무도관)!”

“정답!”

“손나 바카나 우소(그런 바보 같은 거짓말)?!”

“거짓말이 아니다!”

성필이 리모컨을 누르자 일본 부도칸의 사진이 떠올랐다. 9,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일본에서도 상징적인 콘서트홀의 위풍당당한 자태가 드러났다.

소녀연맹이 웨벡스 소속 아티스트들의 힘을 빌려, 쇼케이스 형태로 겨우 설 수 있던 곳.

“와, 우리가…….”

신아름의 입에서 참을 수 없는 감탄이 흘러나왔다.

한국에서 1만 명 규모인 잠실을 채우는 거야, 한국 국적의 그룹이니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본, 타국에서도 그만한 규모의 공연장을 채운단 건 전혀 다르게 와닿는다.

“거기에다가.”

부도칸의 사진이 사라지고, 다음 공연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아래에서 위로 찍은 구도의 사진이었다. 구도 탓도 있겠지만, 한눈에 보아도 매우 거대한 돔 구조의 건물이다.

크기는 절대 부도칸에 뒤지지 않았다.

“리카, 저긴 어디야?”

“시라나이(몰라)!”

“고베 ‘월드 기념 홀’이야. 수용 인원은 약 8,000명.”

“미친……!”

조아라가 자기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녀는 어찌나 흥분했는지 테이블을 퉁 두드리곤 좌우의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우리 콘서트로 18,000명이나 부른단 거 아냐!”

조아라가 호들갑 떨지 않아도, 멤버들은 이미 충분히 놀라고 있었다.

“우리 진짜 일본에서 메이저인 거잖아!”

“도쿄 부도칸이랑 고베면…… 동서(東西) 양쪽에서 한 번씩 하는 거네요! 이전 일본 콘서트 투어보다 훨씬 더 큰 곳에서요!”

“소녀연맹 진짜 많이 컸다!”

“아직 멀었어.”

“에?”

성필이 리모컨의 버튼을 다시 한번 딸깍, 눌렀다. 고베 월드 기념 홀 위로 다른 건물의 사진이 덧씌워졌다.

현대적인 느낌의 직사각형 건물이다.

건물 외곽엔 ‘요코하마 아레나’라고 적혀 있었다.

“요코하마 아레나.”

수용 인원.

“17,000명.”

그리 말하자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다들 성필이 말한 단위가 제대로 된 것인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건지 의심하는 듯 다른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멤버들의 얼굴은 다 똑같았다.

“17,000명이요……?”

백설하가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

일만칠천.

그 숫자를 입에 담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대로 입을 다물며 기절하고팠지만, 백설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질문을 이었다.

“이, 일만칠천?”

“응. 일만칠천. 요코하마 아레나.”

“박 이사님 우소츠키(거짓말쟁이)!”

리카 또한 백설하처럼 떨면서 말했다.

“요, 요코하마는 도쿄 바로 아래잖아요! 제 고향인 가와사키 아래예요! 굳이 요코하마에서 할 필요가 있나요! 부도칸에서 세 번 하면 되는 건데!”

말도 안 되게 비경제적인 결정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같은 구성의 콘서트를 연다면 부도칸과 요코하마 아레나로 나누는 대신 부도칸에서 서너 번 여는 것이 훨씬 낫다.

콘서트 세트를 재설치하는 데엔 엄청난 비용과 시간, 인력이 드니 말이다.

가로 엔터와 웨벡스가 이런 비경제적인 결정을 강행할 리 없다. 그러니까 이건 거짓말이다.

“빨리 사실을 밝히세요!”

“코레가 겐지츠(이게 현실). 타다 소레 다케(단지 그것뿐).”

“손나(그런)…….”

성필이 리모컨을 다시 누르자 세 가지 사진이 병렬로 떠올랐다.

도쿄 부도칸.

요코하마 아레나.

고베 월드 기념 홀.

“히무라 실장님이 말하셨어. 이 세 가지 콘서트홀은 어떤 아티스트가 메이저, 즉 주류의 단계로 입성했다는 증명이나 다름없다고. 이곳 중 단 하나에만 콘서트를 개최할 수 있어도, 그 사람은 업계에서 절대 무시받지 않아. 당당한 메이저 아티스트의 대열로 들어서는 거야.”

그런 상징성을 가지는 콘서트홀 세 곳에서 동시에 콘서트를 개최한다. 이는 일본의 음악계를 향한 선언이나 다름없다.

“소녀연맹의 위상이 이 정도다.”

일본에선 기사가 쏟아질 것이다.

소녀연맹은 이 세 곳의 콘서트홀을 동시에 정복했노라고 말이다.

동시에 일본 팬들을 향한 구애이기도 했다.

“우린 다르다.”

케이팝의 위상과 인기를 등에 업고 수금하듯이 일본에 잠깐 들를 생각은 없다.

이만큼 일본 시장에 진심이다.

일본의 음악계에 존경을 표하고 진지한 태도로 임하고 있다.

“그런 선언이야.”

“저, 저기.”

장하양이 황급히 손을 들었다.

“당연, 당연히 회사분들이 다 계산하고 하시는 일일 테지만. 채, 채울 수 있나요?”

총 30,000석을, 소녀연맹이 채우는 게 가능한가? 한국에서 채우라고 해도 불가능할 것 같은데?

“요코하마 아레나는…… 저희가 섰던 HTP 뮤직 어워드 공연장보다 더 크잖아요…….”

뮤직 어워드 때 공연을 펼쳤던 고척 스카이돔.

그곳에서 16,000명의 관객을 마주했을 때조차 소녀연맹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16,000명은 소녀연맹 외에도 수많은 아티스트들을 보기 위해서 모인 것이었다.

그런데, 소녀연맹이 그보다 더 큰 콘서트홀을 채우는 게 가능한가? 일본이란 나라 하나에서?

“가능해.”

성필이 즉답하자 장하양은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몸이 축 늘어졌다.

그녀의 머리는 계산을 끝낸 것이다.

콘서트로 3만 명을 부르면, 대체 얼마나 되는 돈이 자신의 손에 쥐어질지.

“일본의 콘서트 산업은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 그 말은, 콘서트 인구가 한국보다 훨씬 많단 뜻이야. 한국에서 모을 수 없는 관객 수라도, 일본에서는 모을 수 있어.”

세계 음악 산업 규모 2위.

미국의 팝스타들조차 컴백하면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홍보하러 비행기를 타고 가는 나라.

대도시란 이름이 붙은 곳마다 소극장과 콘서트장이 수백 단위로 존재하는 나라.

모든 대도시의 문화적 인프라가 한국의 서울 수준으로 확립된 나라.

“너희의 인기라면 가능해. 그렇게 판단했어.”

멤버들은 침묵을 지켰다.

성필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이 상황이 믿지 못할 만큼 황홀했기 때문이다.

이만한 성공을 거머쥘 아이돌이 한국 역사상 앞으로 얼마나 있었으며, 앞으로도 얼마나 있을까.

3만이란 숫자에 압도된 멤버들을 둘러보던 성필은 다시금 전율을 느꼈다. 그 전율을 진정시킨 후, 성필이 백설하를 불렀다.

“설하야.”

“네, 네?”

“전에 우리 약속한 거 기억나?”

“야, 약속을 한두 개 한 게 아니라서…….”

“일본 돔 투어.”

“아.”

일본 돔 투어로 100만 관객 달성.

케이팝 역사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그룹만이 달성했던 대위업.

성필이 백설하를 향해 확신에 찬 미소를 보였다.

“가능할 거 같지? 앞으로 이삼 년 이내에.”

“…….”

백설하는 3만이란 숫자에 기가 죽어 있던 것도 잠시, 당연하게 100만이란 집객 수를 요구하는 성필을 보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100만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요, 저…….”

“100만 못 모으면 설하는 지금 조건이랑 똑같이 3년 재계약해야 하는데?”

“그거 정말로 하는 거였어요?!”

“당연하지, 약속이니까.”

“그, 그럼 약속 지키면 제가 박 이사님한테 뭘 시킬 줄 알고요!”

“뭘 시킬 건데?”

“모, 모르겠지만 아무튼 심한 거 시킬 거예요!”

백설하는 궁시렁댔다.

모처럼 폼 잡으려고 했는데 성필이 다 망쳤으니.

하지만 성필은 백설하에게 다시 폼 잡을 기회를 주었다.

“100만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뭐?”

“……100만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요.”

백설하가 진지한 투로 말했다.

“돔에는 설 수 있을 거 같아요.”

돔.

콘서트홀의 최종판.

최소 수용 인원 3만 이상.

“돔 투어도, 어쩌면.”

일본에서도 모든 아티스트들의 꿈이라고 하는 돔 투어.

소녀연맹은 돔 투어가 가능한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머나먼 꿈이지만, 백설하는 왠지 그 꿈이 멀게만 느껴지진 않았다.

* * *

회의실에서 나오는 소녀연맹 멤버들은 꿈에 젖은 기분이었다.

백설하가 얼떨떨한 투로 말했다.

“우리 되게 유명해진 거 맞지?”

“네, 언니.”

“하양아 나 한 번만 꼬집어주으이아아아악!”

“어떠세요?”

“아파아!”

백설하가 붉게 부은 뺨을 쓸면서 말했다. 장하양은 미안하단 듯 백설하의 등을 쓸어주었다.

백설하는 이게 병 주고 약 주는 건가 싶어서 토라진 눈으로 장하양을 흘겼다.

그러자 멤버들이 다 백설하에게 달라붙어 그녀를 달래주었다.

“쌤 꿈 아니에요! 하양 언니가 확실하게 알려줬으니 이득이에요!”

“언니한테 왜 그래요. 쌤이 시켜서 한 건데.”

“제가 어깨 주물러줄 테니까 기분 풀어요.”

짝.

“누가 내 엉덩이 때렸어?!”

사방에서 쏟아지는 손길에 백설하는 노발대발하면서 멤버들에게서 떨어졌다. 백설하가 씩씩대면서 쳐다보다 멤버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웃었다.

신아름이 웃음 덕분에 생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현실인가 보네. 아, 개웃겨.”

“아름이 너지?!”

신아름이 백설하에게 헤드락당하는 것을 보면서 멤버들은 다시 한번 웃었다.

“나, 나 아니, 숨, 리카가, 숨 막……!”

“에에, 아름이는 친구를 팔아넘기는 아이인 거야? 아타시(나) 좀 실망일지두.”

“리카 너야?!”

리카는 기쁘게 백설하에게 헤드락당했다.

그렇게 멤버들이 꿈에 젖어 기쁨을 나누던 중, 조아라가 걸음을 멈추었다. 헤드락하는 백설하와 당하는 리카를 제외하곤, 다들 멈춘 그녀를 돌아보았다.

“조아라 왜?”

“나 아저씨한테 볼일 있어.”

“또?”

“어. 먼저 가.”

그리 말하고 나서, 조아라는 왔던 길을 되짚어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로 가는 그녀의 표정엔 아까의 기쁨이 온데간데없었다.

조아라가 회의실 문을 열자 성필과 한구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력이 부족하대요.”

“드디어 가로 엔터도 신자유주의가 탄생시킨 기업친화적인 정책을 쓸 때가 왔군요.”

“네? 뭔데요?”

“비정규직 파견 사원 말입니다.”

“아…….”

“아저씨.”

두 이사는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얼굴을 내민 조아라를 보았다.

“어, 아라야. 들어와.”

“방해한 거 아니에요?”

“아니야. 방해는 한 이사님이 하셨지.”

“예, 가겠습니다.”

“에이, 왜 그러세요.”

성필이 잡아 말리자 한구인은 언제 가려고 했냐는 듯 멈춰 섰다. 조아라는 그들의 앞으로 와서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저씨, 한의사, 아저, 음…….”

“왜 그래?”

“왜 그러십니까?”

“아니…… 음, 아무나 시간 되는 사람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요.”

성필과 한구인은 서로를 보더니, 익숙한 듯 서로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가위 바위…….”

“나랑 가는 게 뭐 벌칙이에요?!”

“보.”

승자는 성필이었다.

“이게 바로 매니저 경력으로 얻은 힘입니다.”

“쿠소(젠장)!”

“빡치니까 아저씨가 와요.”

“손나(그런)!”

성필은 승자임에도 조아라와 함께 가게 되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매니저들이랑 가면 안 되는 거야?”

“아니, 그, 좀 무서운 사람 보러 가서요.”

“무서운 사람?”

조아라가 무서워할 만한 사람이 있나?

“민시화 쌤이요. 쌤쌤.”

성필은 잠시 민시화가 누구인지 떠올리는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었다.

민시화, 민시화, 민시화…….

“아.”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성필의 귓가를 생생하게 울렸다.

‘테크닉에만 집중하면 춤이 서커스랑 다른 게 뭐니?’

“기억났다. 민시화 선생님.”

조아라가 ‘아라베스크’ 원본 안무를 밀어붙이던 때, 조아라를 향해 통렬한 일침을 날렸던 댄서다.

백민정의 스승으로, 조아라는 민시화를 쌤쌤이라 부르곤 했었다.

“가서, 음, 춤 가르쳐달라고 하려고요.”

조아라는 평소와 다르게 주눅 든 기색이었다. 민시화를 만나러 간다는 게 긴장되는 것일까.

“민정 쌤이 말씀은 해뒀고 자리를 마련해주긴 했는데, 아예 설득은 못 했대요. 그래서 내가 직접 가서 말씀드려보게요.”

“아라야 너 무서워?”

성필은 조아라의 심정을 단숨에 캐치해냈다. 단순히 주눅 든 게 아니었다.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무섭, 음, 조금요.”

자존심 강한 조아라가 선선히 인정했다. 하긴, 예전에 그런 말을 얻어먹었었는데 무섭지 않을 수가 없겠지.

성필도 민시화를 처음 봤을 땐 기세에 눌려 입을 떼기 쉽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조아라가 이렇게까지 겁먹는 건, 성필로선 선뜻 이해하기 힘들었다.

“같이 가서…… 만약에 내가 대화해서 안 되면, 좀 같이 설득해줘요.”

* * *

조아라에게 나가서 기다리라고 한 후, 성필은 한구인과 함께 회의실을 마저 정리했다.

“박 이사님.”

“네.”

“아라 씨의 마음은 굉장히 대견하고 응원하고 싶습니다만, 아이돌에게 댄스 스포츠가 도움이 됩니까? 방송 안무와는 완전히 결이 다른 춤 장르가 아닙니까.”

“아라가 배우고 싶어 하잖아요.”

“솔직히,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그리 말한 한구인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물론 아라 씨가 하는 일은 응원하고 싶습니다. 일본에 가기 전에 미리 허락을 맡고 일을 매듭짓고 싶다는 마음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댄스 스포츠는…….”

한구인이 작게 말했다.

“콘서트 준비나 ‘우리들의 프로듀싱’도 있으신데, 아이돌과 관련 없는 일로 너무 무리하시는 건 아닐지 걱정입니다.”

“관련은 없지만 필요한 일이에요.”

“필요 말입니까?”

“네.”

성필은 빔프로젝터를 끄면서, 파랗게 물든 스크린을 잠시 쳐다보았다.

“팬들은 아이돌에게 항상 더 나은 모습을 기대하죠. 성적만이 아니라 퍼포먼스적으로 더 나은 모습을요. 그런데 그게 쉽지 않잖아요.”

성공하면 할수록 아이돌은 일이 많아진다.

방송, 소통, 콘서트, 행사, 공연, 신곡 연습.

오로지 아이돌로서의 상업적 성과에 치중한다. 그건 아이돌의 의지가 아니라 회사의 의지다.

아이돌의 인기란 거품과 같아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떴을 때 최대한 돈을 벌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돌 개인이 성장할 시간이 없어요. 아이돌의 성장이란, 단순히 다른 곡과 안무를 카피하거나 신곡을 연습하는 게 아니에요.”

자신의 개성과 특성, 특기를 단련할 시간이 있어야 성장이 가능하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한 사이클 안에서 아이돌이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 자신의 관심사조차 찾을 시간이 없는데.

그런 사이클 안에 갇힌 아이돌에게 ‘왜 실력이 제자리야? 왜 더 나아지지 않아?’라고 하는 건 폭력이나 다름없다.

마치 12년 내내 학교 안에 박아두고 공부만 시킨 학생에게, ‘왜 너는 대외활동이 없니?’, ‘우리 학과와 관련된 활동이 없잖니?’, ‘대체 뭘 한 거니?’라고 윽박지르는 꼴 아닐까.

“우리 애들의 향상심은, 제가 업계에서 본 아이돌들 중에서도 독보적이에요. 설하가 음악을 공부하고, 리카가 작곡을 공부하고, 그런 배움의 끈을 놓지 않는단 거 자체가 특이 케이스예요.”

불규칙한 생활 패턴에, 자는 시간도 부족하며, 여가 생활을 마음대로 즐기는 것조차 여의찮다.

그런 상황에서 향상심을 가지고 끝없이 공부하는 게 이상한 것이다.

보통은 쉬는 시간이 주어지면, 방송계란 감옥에 갇혀 있던 것을 보상받으려 쉰다. 그리고 그게 당연하다.

“보통은 지금 수준에서 만족하기 마련이에요. 굳이 다른 걸 배우지 않아도, 안무든 노래든 어느 정도는 소화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 애들은 너무 대단하게…….”

자꾸만 무엇을 배우려 한다.

독보적인 향상심이다.

“그러니까 아라의 마음을 응원해야죠. 한 이사님도 아시겠지만, 인간의 성장이란 익숙한 분야만 판다고 이뤄지는 게 아니잖아요.”

“한 우물만 판단 건, 그 우물만큼의 시야만 가지게 된단 거니까요.”

“그렇죠. 그러니까, 댄스 스포츠든 뭐든 아이돌과 관련 없는 게 아니에요.”

조아라가, 멤버들이 얻는 모든 배움은 아이돌과 관련이 있다. 아이돌은 현재 그녀들에게 인생 그 자체이니까.

‘우리들의 프로듀싱’에 반영되는 건 그러한 그녀들의 삶이며, 동시에 그녀들은 삶을 반영하려 해야만 한다.

그녀들이 지나온, 지나는, 지나갈 길 중 쓸모없는 건 하나도 없다.

성필은 프로젝터가 완전히 꺼지는 것까지 확인하곤 걸음을 옮겼다.

“갔다 올게요.”

“잘 다녀오십시오.”

회의실을 나가 1층 홀로 내려가니 조아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끝없는 향상심을 지닌 댄서.

성필의 눈에 한없이 밝게 빛나는 아이돌.

그런 조아라를 향해 성필이 다정하게 말했다.

“갈까?”

“네.”

민시화를 설득하러.

“아저씨.”

“왜.”

“무서우면 손잡아도 돼요?”

“농담이 늘었네.”

“리얼.”

* * *

무서우면 손을 잡겠다던 조아라.

그녀는 성필의 손을 잡으려 하긴커녕 부서질 것처럼 오른 주먹을 쥐고 있었다. 어금니를 어찌나 꽉 물었는지 턱 주위로 힘줄이 돋아날 지경이다.

성필은 조아라에게서 앞으로, 민시화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민시화는 ‘길다’란 생각이 절로 드는 미려하고 곧게 뻗은 검지로 조아라를 가리켰다.

“알아들었니? 너, 나한테 하나라도 배울 실력이 안 돼.”

조아라가 왼 주먹도 쥐었다.

이젠 이마에도 힘줄이 돋아났다.

민시화는 그런 조아라를 내려다보더니 간결하고 깔끔하게 말했다.

“나가봐.”

“아, 예. 나갈게요. 나간다고요.”

조아라는 근처를 두리번거렸다. 뭔가 찰 게 있으면 차려는 듯했다. 그러다가 그녀의 눈길이 성필의 다리에 꽂혔다.

성필은 은근슬쩍 옆으로 물러났다.

조아라는 숨을 크게 내쉬더니 뒤로 홱 돌아 민시화의 연습실을 떠나려 했다.

“잠깐.”

민시화가 부르자 조아라는 기다렸단 듯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뭐요 왜……!”

“너 말고. 거기 잘생긴 오빠.”

성필이 어벙하게 되물었다.

“네? 저요?”

“그래. 거기 오빠.”

“거 민시화 선생! 님!”

조아라가 민시화의 바로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와 눈을 부라렸다.

“이성한테 잘생겼니 예쁘니 하는 거 성희롱이거든요? 알아요? 신고할까요? 나 진짜 신고해요? 신고한다고……!”

성필은 조아라의 보복성 고소를 간신히 말린 후 그녀를 연습실 밖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성필은 쭈뼛쭈뼛 민시화의 앞으로 왔다.

“저 애 진지하게 춤에 관심 있는 거지?”

“네, 그런 편이죠. 밥 먹고 춤만 춰요.”

“말려.”

“네?”

“나한테 배우는 거는 물론이고, 본격적으로 무용에 관심 가지게 하지 마.”

성필은 잠시 멍하니 있더니, 분노로 인해 자그맣게 격앙된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라고요?”

“안무(按舞)가 아니라 무용(舞踊)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향상심을 보인다면.”

민시화는 아까와 달리 다정한 투로 말했다. 다정하다고 해봐야 눈 내리는 설원에서 눈이 그친 정도였으나, 이전과 비교하면 한없이 따스했다.

“절망할 거야.”

“……절망(絶望)?”

일상에서 흔히 쓰이지 않는 단어다.

그래서 성필은 그 단어가 가진 뜻을 곱씹어야 했다.

절망. 바람이 끊김. 희망이 없어 좌절함.

조아라가 무용에 관심을 가지면, 절망한다.

성필이 답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민시화를 응시했다. 그에 민시화가 아주 간결히 답했다.

“몸.”

모든 무용수에게 내려진 태생적인 재능.

“그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탈락한 거야.”

“…….”

“알았으면…….”

“하아.”

성필은 열기가 가득 담긴 숨을 내리깔았다.

“아까부터 듣자 하니까 진짜…….”

* * *

조아라는 연습실 밖 복도를 어슬렁거리면서 열을 삭였다. 그러다가 아까 민시화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거기 잘생긴 오빠.’

……잘생긴 오빠?

조아라는 자기도 모르게 망상을 시작했다.

‘오빠, 내가 저 애를 가르쳐줄 수도 있는데. 오빠가 뭐 하나만 해주면 말야.’

‘왜, 왜 이러세요…….’

설마, 그럴 리는 절대 없겠지만…….

조아라는 민시화의 연습실 문에 귀를 가져다 붙였다. 안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길 바라면서.

하지만 귀를 붙일 필요도 없었다.

“이봐요 아까부터 말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우리 아라, 선생님한테 그런 말 들을 애 아니에요!”

분노에 찬 성필의 고함이 문을 뚫고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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