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4화
소녀연맹의 앨범 활동기가 끝났지만, 가로 엔터의 홍보팀은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짬을 가장 많이 먹은 홍보팀 직원인 강지혜는 슬슬 보도자료 쓰는 게 손에 익어…….
‘진짜 거짓말 하나도 안 치고 손목 부러질 거 같아. 나 사실 홍보팀이 아니라 작가가 아닐까? 그래서 아이돌이 주인공인 소설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손에 익었지만, 여전히 일은 힘들다.
소녀연맹의 일본 컴백이 확정된 현재, 홍보팀은 다른 어떤 팀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보통 아이돌 그룹의 해외 활동은 팬을 통해 알음알음 알려지지만, 소녀연맹은 과거 국뽕연맹이란 별명을 얻었던 만큼 해외 활동 관심도가 높다.
그에 홍보팀이 발 빠르게 일본에서의 소식을 전해줘야 하니, 미리 일본에서의 일정도 검토해둬야 한다.
‘콘서트 준비도 지옥이야…….’
콘서트 기자 초청 쇼케이스며 이래저래 신경 쓸 게 많다.
보통 홍보팀 직원들은 단출하게 국내 콘서트부터 경험을 쌓는다던데, 우리 소련이들은 얼마나 기특한지 첫 콘서트부터 해외 투어였다.
‘힘들어.’
힘들지만, 자신이 맡은 아이돌이 성공가도를 달리는 걸 보는 건 굉장히 뿌듯하다.
홍보를 맡은 만큼 앨범 크레디트에는 강지혜의 이름도 실리는데, 그녀의 집에 소중한 보물로 간직하는 중이다.
이번 ‘인트로: 러브’ 앨범의 성공적인 활동을 회상하며 정신적 진통제를 투여하던 중, 강지혜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강지혜는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강 기자님.”
[이번에 일본 컴백하는 거 왜 나한테 먼저 일정 전달 안 해줬어?]
자기소개도 없이 대뜸 불만부터 말하는 것.
이젠 익숙하다.
[내가 기사 잘 써주는 거 알고도 나를 후 순위로 미루나?]
“후 순위로 미룬 게 아니라요, 기자님이 주로 담당하시는 분야가…….”
[어디서 말대꾸야! 지금 당신 잘못한 거 얘기하고 있잖아!]
강지혜는 평정을 잃지 않도록 심호흡했다.
그녀는 숨을 깊이 내뿜곤, 책상 앞에 붙은 기자 목록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맡은 기자의 수는 수십을 헤아릴 정도다.
그렇다고 한 명이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다.
기자들끼리는 죄다 아는 사이이니, 강지혜가 자그마한 실수라도 했다간 회사 이미지를 실추시킬 수 있다.
[죄송하다고 안 해?]
답하려던 강지혜는 일순 숨이 턱 막혔다. 잠시 핸드폰을 귀 멀리 떨어뜨려 놓고 고개를 숙였다.
‘3초만.’
딱 3초만 참아보자.
하나, 둘.
[다음에도 이러면 어쩔 거야 어? 어쩔 거냐고. 가로 엔터는 기자 이렇게 대놓고 차별하나? 어쩔 거냐고 묻잖아.]
셋.
강지혜는 다시 고개를 들곤 미소를 띠었다.
“죄…….”
누군가 강지혜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부드럽게 가져갔다. 그녀는 놀라서 뒤를 보았다.
성필이었다.
그는 강지혜 대신 전화를 받곤 말했다.
“어쩌실 건데요? 다음에도 또 이러면, 기자님은 어쩌실 건데요?”
“아, 이사님, 어, 그…….”
“저요? 박성필 이사입니다. 아니, 묻잖아요. 다음에도 이러면 뭐 어쩌실 생각이시기에 그러시냐고요.”
강지혜는 정신이 멍해졌다.
성필이 그녀를 대신하여 기자와 말싸움하고 있다. 아니, 기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여 모르겠지만 성필이 압박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고작 10초 정도나 지났을까, 성필이 통화를 끝내고 강지혜에게 폰을 돌려주었다.
“이, 이사님? 기, 기자한테 그러면 안 되…….”
“저 인간 유명해요. 나 매니저일 때도 저랬어. 자기 안 좋은 일 있으면 이상한 거 꼬투리 잡아서 화 풀려고 홍보팀 직원들한테 전화해. 그런 인간이니까 신경 쓰지 마요. 기자들도 다 알아.”
“아…….”
성필은 떠나가려다가 강지혜의 책상 앞에 붙은 기자 명단 표를 보았다. 그는 품에서 볼펜을 꺼내더니 방금 통화한 기자의 이름을 찌익 그어 없앴다.
“안 그래도 박봉인데 일하기 힘들죠? 주말도 퇴근도 없다시피 하고.”
“아, 아뇨, 제 친구들 다 비슷한걸요…….”
“이상한 사람한테 감정 소모하지 마요. 일할 때는 가면 쓰고 한다고 생각해. 여기 앉아 있는 거 지혜 씨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고요.”
“……네.”
“이게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는데, 엔터계에 유독 여자 임원들 많은 거 알아요? 대부분 홍보팀부터 시작했어요. 혹시 알아요? 여기서 기자들 불평 들어주고, 보도자료 쓰고, 애들 따라다니면서 지내다가 나중에 큰 회사 이직해서 홍보 쪽 임원 하게 될지.”
“이, 이직 안 해요!”
성필은 농담이었다면서 웃으며 떠나갔다.
농담 같지 않아 보인다.
‘하긴, 이 업계 워낙 퇴사건 이직이건 잦다니까.’
일이 힘들다 보니 열에 아홉은 떠나간다는 모양이다. 그러고서 한다는 일이 또 엔터계 쪽 일이다. 다른 기획사는 나을까 하는 헛된 망상을 품고 말이다.
강지혜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기자 목록의 중앙, 성필이 볼펜으로 그은 이름이 보였다. 강지혜는 멍하니 그것을 보다가, 아예 네임펜으로 그어버렸다.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점심시간, 익숙한 백반집에서 경리 권아인과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권아인은 어느 정도 밥을 먹다가 수줍게 웃으면서 말했다.
“언니, 저 드디어 토익 700점 넘었어요.”
“으잉? 진짜?”
“네, 이번에 810점!”
“와, 대단하다. 난 700점 겨우 넘겼는데…….”
“헤헤, 그래서 지금부터 세무사 시험 칠 수 있어요.”
“너 그거 진심이었구나.”
“한 이사님이 약속해주셨어요.”
권아인이 비장한 투로 말했다.
“제 연봉에 반드시 반영해주시겠다고요. 저도 언제까지나 경리로 남을 수는 없어요. 10년 후의 저는 한 이사님과 어깨를 나란히 할 거예요.”
“세무니 회계니 다 외주 쓰면 되는 거 아니야?”
“내 앞길 막지 마요!”
“경리 일에 세무까지 필요해?”
“상고에서 따는 자격증 이름 자체가 세무회계거든요?!”
강지혜는 삐친 동생을 위로하기 위해 오늘 ‘권아인 토익 800점’ 기념 파티를 열…….
“810점.”
810점 기념 파티를 열자고 했다.
“언니랑 저랑요?”
“다른 사람들도 부르지 뭐. 상헌 오빠는 오려나. 요즘 나한테 30대는 기력이 없니 뭐니, 자꾸 이상한 말만 해. 나도 곧 겪을 거라고. 진짜 그게 저주지.”
“꼭 군대 다녀온 대학 선배들 같네요. 20대 초반이랑 몸이 다르다고 막 뭐라 하잖아요.”
“너 대학 안 나왔지 않아?”
“사이버 대학 다니거든요?! 군대 얘기는 스타그래프 유머페이지에서 본 거긴 한데…….”
“늙고 병든 상헌 오빠(성필과 동갑)는 일단 물어보기만 하고. 재호는 오라고 하면 올 거고.”
“근데 언니, 오늘은 야근 없어요?”
“오늘은 소련이들 스케줄 없어. 모니터링 안 해도 돼.”
“글쿠나. 또요?”
권아인의 눈동자엔 기대가 한가득 메워져 있었다. 그녀는 경리라 다른 팀원들과 말 섞일 기회 자체가 그다지 없었다.
띠동갑인 한구인이 그녀의 유일한 팀 동료이자 상사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다른 팀원들과 두루두루 친한 강지혜를 부러워하곤 했다.
“뭐야, 바라는 사람이라도 있는 눈치인데? 맞춰볼까?”
“에, 에이, 제가 무슨…….”
“김사무엘.”
“연습생인데다가 미성년자잖아요?!”
“이시카와 유우토.”
“아까랑 똑같잖아요!”
“준성이.”
“그분이랑은 진짜 제대로 대화도 못 해 봤어요. 연습생들 밥 먹인 영수증 받을 때 빼고…….”
“암튼, 올 만한 사람들한텐 다 이야기해볼게.”
“역시 홍보팀! 아, 그리고 저…….”
“왜?”
“이사님한테도 말씀드려볼까요?”
성필에게도? 왠지 성필은 초대하면 꼭 올 거 같긴 하지만…….
문득 오늘 아침 성필이 했던 행동이 떠올랐다. 다시 생각해도 기분이 좋았다.
“그럼 이사님한테도 말씀드려보자.”
“아, 네!”
권아인이 기쁜 듯 손뼉을 마주쳤다.
둘은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하나씩 들곤 회사로 돌아갔다. 마침 1층 홀에 성필의 모습이 보였다.
조아라의 옆에서 비굴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아라야, 아라베스크 때 생각해서라도 안무 난이도의 무차별적인 상승은 지양해야…….”
“안 한다고 했잖아요. 아저씬 뭐 사람 말을 왜 이렇게 못 믿어요? 내가 무조건 어렵게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될 거 같아서 그래.”
“됐고 오늘 회의 때 보라니까요? 아저씨 공적 업무 들어가기 전에 이러는 거 향응 및 접대예요.”
“프로듀서끼리 잘해보자고 할 땐 언제고 향응 및 접대래?! 그리고 내가 무슨 너한테 접대를 해! 내가 뭐 먹을 거라도 하나 줬냐?!”
조아라는 성필과 잠시 투닥거리더니 2층으로 뽈뽈 올라갔다. 홀로 남은 성필은 조아라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권아인이 강지혜에게 소곤댔다.
“역시 아티스트는 성공하면 갑이 되는 게 맞나보…….”
강지혜가 성필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구둣발 소리를 듣곤 성필이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사님 오늘 아인이 토익 810점 기념 파티 여는데 오실래요?”
“뭐 하시는 거예요 지금?!”
권아인이 대경실색하여 강지혜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그리고 성필과 눈을 마주치곤 잔뜩 움츠러들어, 나무에 매달리듯 강지혜에게 찰싹 붙었다.
“토익 810점 파티요?”
“아인이가 토익 810점 맞았대요.”
“와, 대단하네요.”
“축하해주러 오실래요?”
“돈 내달란 거죠? 안 속아요.”
“알겠어요. 아인아, 이사님이 싫으시대.”
권아인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붕붕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러자 장난스러운 기색이던 성필은 미안하단 듯 목소리를 바꾸었다.
“죄송해요. 오늘 일이 있어서요. 대신 카드 드릴까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권아인이 극구 사양하자, 성필은 왠지 씁쓸한 얼굴로 자리를 떴다.
“아인이 너 실례였어. 이사님 상처받으셨겠다.”
“언니야말로 뭐예요!”
“네가 이사님 초대하자면서.”
“하, 한 이사님 말한 거예요……. 같은 재무팀이니까…….”
강지혜는 눈을 몇 번 끔뻑이더니.
“그래? 그럼 잘 말씀드려봐.”
“제, 제가요?”
강지혜가 권아인의 어깨를 덥석 쥐었다.
“같은 팀이잖아. 네가 말씀드리는 게 훨씬 좋아. 한 이사님도 그걸 훨씬 기뻐하실 거고.”
“그, 그럴까요?”
“당연하지. 나라도 부하가 술자리에 초대해주면 기쁘겠다.”
권아인은 강지혜의 말에 용기를 얻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곧바로 사무실로 가서 한구인의 앞에 섰다.
“하, 한 이사님. 저, 오늘 제 토익 810점 기념 파티 여는데, 오, 오실래요?”
“죄송합니다.”
한구인이 단칼에 거절했다.
너무나도 행복한 표정으로.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 촬영 때문에 안 되겠습니다. 다음이라도 괜찮다면…….”
그날 저녁, 권아인 토익 810점 기념 파티.
“아인이 왜 저래? 아주 병나발을 부는데?”
“냅둬.”
이재호는 병나발을 불며 테이블을 종횡무진하는 권아인을 이상하게 보았지만, 강지혜는 익숙하단 듯 맥주만 홀짝였다.
가로 엔터의 하루는 그렇게 저물어간다.
* * *
성필은 시간을 확인했다. 점심 시각이 끝나고 한 시간 조금 덜 지났다.
그때 손혜빈이 의자를 끌고 성필의 곁으로 왔다.
“야, 아인이 토익 파티한다는데? 너 와?”
“아니. 일 있어.”
“빛나솔?”
“어, 뭐, 그치.”
“에리카 보러 가는구나? 부하 직원 축하 파티도 버리고 잘하는 짓이다.”
“선약인데 어떡해…….”
손혜빈이 웃으면서 성필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나도 안 가.”
“누나야말로 악질이지. 일 없는데 안 가잖아.”
“나 가면 애들 불편해. 예의상 말한 거겠지. 그래도 기쁘긴 하네. 근데 시계를 왜 그렇게 봐?”
“곧 아라랑 회의하잖아.”
“너만 하냐? 팀원들 다 같이 해. 왜 혼자 유난이야.”
“아니…….”
오늘의 회의는 조금 특별하다.
조아라가 먼저 제의했기 때문이다.
백설하와 ‘우리들의 프로듀싱’을 진행했을 땐 주로 성필이 회의 스케줄을 잡고, 백설하는 강의를 들으러 가는 학생처럼 따라왔었다.
‘솔직히 기뻐.’
조아라가 이토록 능동적일 줄 생각지도 못했다.
성필이 시계를 자주 보는 건 걱정돼서가 아니라 기대돼서다.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2 장면 촬영도 하기로 했고.’
백설하와 함께 했던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1 촬영은, 성필이 중요한 회의일 거라고 예상되는 것만 촬영했었다.
회의 주제 자체를 성필이 선택했기 때문에, 어떤 것이 중요한 건지 미리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조아라가 진행할 회의는 중요한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역사적인 순간이니 일단 콘텐츠 담당인 양상헌에게 촬영하라고 지시했다.
그때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성필이 주인이 돌아온 소리를 들은 강아지처럼 홱 고개를 돌렸다.
“아라……!”
기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던 성필은 그대로 석상이 됐다.
“다들.”
조아라가 고혹적인 자세로 문틀을 짚었다.
“회의하러 나와요.”
조아라가 아니다.
조아라가 맞긴 한데 그녀가 아니다.
그녀는 오피스 룩을 입고 있었다.
빛이 날 정도로 하얀 와이셔츠와 검은색 H 스커트, 광이 나는 검은 하이힐. 목에는 어디서 났는지 가로 엔터 사원증을 걸고 있었다.
왼쪽 겨드랑이엔 맥북까지 끼고 있다.
화룡점정은, 도저히 용도를 알 수 없는 얇은 막대기였다. 교사의 지시봉 같기도 하고, 혹은 지휘자의 지휘봉, 아니면 말을 다루기 위한 마편(馬鞭) 같이 보이기도 했다.
“…….”
“빨리요. 시간 없어요.”
성필은 조아라의 어깨 너머로 양상헌과 촬영팀을 바라보았다. 양상헌도 당황했는지 표정이 굳어 있었다.
성필은 다시금 조아라를 보더니, 어째선지 입술을 꾹 물었다. 키클롭스를 마주한 오디세우스가 두려움을 참으려 하는 행동 같았다.
“어, 그래. 회의…….”
성필은 일어나는 프로듀싱 파트의 직원들을 따라 무거운 엉덩이를 뗐다.
“가야지…….”
* * *
조아라는 대견하게도 직접 PPT까지 준비해왔다. 그 퀄리티란 게 눈 뜨고 못 봐줄 정도란 것만 제외하곤, 정말이지 대견했다.
스크린에 엉성하게 테두리를 잘라낸 마이클 잭슨의 사진이 떠올랐다.
“마이클 잭슨은 정말 대단한 댄스 가수인데…….”
그 이하, 마이클 잭슨 찬양.
최초로 한 음악에 맞춰진 전용 안무라는 개념을 선보인 사람.
MTV 시대의 개막과 함께 뮤직비디오란 매체를 가장 대중적이며 상업적인 방식으로 성공시킨 인물.
강렬한 퍼포먼스와 스타성.
기타 등등.
‘아라가 발표의 재능은 없네.’
이 자리에서 마이클 잭슨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텐데, 굉장히 설명에 공을 들인다.
약 10분이 지나 마이클 잭슨의 업적 찬양이 끝났다.
“마이클 잭슨은 스트리트 댄스의 팬이었어요. 댄서들한테 개인 레슨을 받을 정도로요. 게다가 백업 댄서들도 스트리트 댄서들로 뽑았어요. 잭슨은 본인의 스타일에 스트리트 스타일을 섞어 독보적인 경지에 올랐죠. 그때까진 대중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스트리트 댄스란 걸 전 세계적으로 선전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설명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마돈나.”
이하, 마돈나 업적 찬양.
“마돈나도 훌륭한 댄스 가수였지만 마이클 잭슨과는 결이 살짝 달라요. 잭슨이 스트리트 댄스에 집중했다면, 마돈나는 제도권 무용을 안무에 도입했거든요. 현대 무용이요. 본인이 현대 무용 전공자였으니까 당연했겠죠. 무용의 여러 스타일을 가져와 마이클 잭슨에 뒤지지 않는 퍼포먼스의 강렬함을 뽐냈어요. 특히 게이 커뮤니티에서 유행했던 보깅을 대중에게 선보인 건 진짜, 진짜 혁신이었어요.”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의 사진이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하나로 합쳐졌다.
웬 외국인 남자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지으면서 합쳐진 사진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머리 위로 말풍선이 떠올랐다.
[그래서 어쩔?]
“춤이란 건 일단 신기해야 해요.”
흥미진진한 모험처럼, 보면서 빨려들어 가야 한다.
“그런데 케이팝 댄스에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어요.”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 업적 찬양에 지쳐있던 직원들이 순간적으로 촉각을 곤두세웠다.
케이팝 댄스의 치명적인 한계?
이는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못한 주제였다.
“외국 음원 어플 같은 거 써보면 케이팝을 어떤 장르로 분류하는지 아시는 분?”
A&R팀 이재호가 손을 들었다.
“‘Korea EDM’이라고 표기합니다.”
“정답.”
스크린에 떠오른 호기심 넘치는 남자아이의 말풍선이 바뀌었다.
[케이팝은 EDM?]
“케이팝 자체가 일렉트로닉 장르의 끝판왕 같은 거예요. 오직 이 방향으로 진화했어요. 개중엔 좀 특이한 스타일도 있긴 한데, 대부분 그냥 EDM이에요.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
이는 케이팝이 성공한 이유이기도 하다.
발라드나 감성적인 곡은 언어의 장벽이나 민족적, 국가적 한계에 부딪히기 쉽다.
하지만 신나는 음악은 아니다. 가사가 어떻든 들으면 흥이 오른다.
댄스 뮤직은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국경 없이 소모되는 장르 중 하나다.
그렇기에 케이팝은 일렉트로닉 사운드에 치중하여 글로벌성을 확보하고자 했고, 이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장르가 거기서 거기니까, 장르에 맞춘 춤도 거기서 거기가 될 수밖에 없죠.”
음악이 비슷하니 춤도 비슷해진다.
이는 꽤 적절한 지적이었다.
“물론 케이팝엔 스트릿 댄스나 무용의 여러 장르가 결합되기도 하지만요, 그건 일부뿐이에요.”
스트리트 댄스, 현대 무용, 그 외에도 수많은 춤들이 있고 그 밑에는 수많은 하부 장르가 존재한다.
케이팝이 받아들인 건 극히 일부.
거기까지 이야기가 진행되자 직원들은 조아라가 하려는 말을 이해하게 됐다.
“마이클 잭슨이 스트리트 댄스, 팝핀과 펑크 부갈루를 대중들에게 선보였듯이. 마돈나가 현대 무용 스타일을 대중들에게 보여주었듯이. 저는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자 합니다.”
PPT 화면이 바뀌었다.
음악 시상식에서 ‘아라베스크’를 펼치는 소녀연맹의 사진이었다. 서로 팔짱을 끼고 십수 명의 백댄서들과 함께 전진하는 모습이다.
“춤이라고 하기도 뭐한, 그저 팔짱을 끼고 전진할 뿐인 동작. 저는 그해에 이 동작이, 모든 케이팝 안무 중에서 가장 새로웠다고 생각합니다. 이 춤을 처음 봤을 때의 감정은 뭐랄까…… 엄청났어요.”
‘아라베스크’의 원본을 보고 거의 반하다시피 했을 만큼, 그녀는 이 안무를 사랑했다.
“그 기분을 다시 느끼고자 합니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걸 보여주고자 합니다. 혁신을 이루고자 합니다. 다양성, 그로 인한 신선함. 그게…….”
조아라가 발을 쿵 굴렀다.
“제가 이번 프로젝트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겁니다.”
좌중에 적막감이 감돌았다.
백설하가 제시했던 ‘여름’이나 ‘사랑’ 같은 컨셉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훨씬 더 진일보한 목표 설정이다.
조아라는 진정으로 문화적인 발전을 이루고 싶어 하는 것이다.
“케이팝 안무 만드는 사람들 다 거기서 거기예요. 한 명이 성공했다고 하면 그 사람한테 우르르 몰리고……, 아 물론 그분들이 실력이 나쁘단 게 아니에요. 다 훌륭하시지만, 저는 새로운 사람들에게 키를 맡기고 싶습니다.”
마이클 잭슨이, 마돈나가 팝 씬에 변혁을 가져왔듯이.
다키스트가, EMC가, WTP가 그러했듯이, 조아라는 케이팝에 새로운 문화적 바람을 불어넣고자 했다.
“최대한 다양한 안무가, 다양한 장르, 다양한 스타일을 결합한 코레오그래피를 바랍니다. 직원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최고의 퍼포먼스 디렉팅을, 이번 앨범에서 이룹시다.”
조아라가 발표를 마치고 고개를 숙였다.
쉬지 않고 말해서인지 숨이 턱 끝까지 차 있었다. 그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그녀는 흥분해 있었다.
이윽고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조아라가 고개를 드니, 성필이 눈물을 흘리면서 홀로 박수 치고 있었다. 다른 직원들은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성필을 보곤 반사적으로 박수를 쳤다.
곧 회의실엔 박수만이 가득했다.
그것을 촬영하던 촬영팀들도 감탄했다.
“이거 대본 없는 거죠?”
“……예.”
양상헌도 넋이 나가 답했다.
촬영팀 카메라맨이 말했다.
“대단하네요. 진짜 아티스트 느낌.”
당연할지도 모른다.
전생, 성필이 아는 조아라는 원래 안무가였으니까.
* * *
A&R팀 회의.
상석에 앉은 손혜빈은 똑딱똑딱 펜만 만지더니, 명확함 없이 어정쩡한 투로 말했다.
“아라가 말한 건 다들 이해했지?”
A&R팀원들이 고개를 주억였다.
“이 중에서 무용에 관련된 전문적 지식을 가진 건 나뿐이야. 그마저도 아이돌 업계에서 써먹을 만한 지식은 아니고. 솔직히, 우린 아라가 원하는 걸 들어줄 만한 능력이 없어.”
팀원들이 우울하게 시선을 늘어뜨렸다.
그들이 턱을 땅끝까지 박기 전, 손혜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전문적인 퍼포먼스 디렉터가 없는 이상, 들어줄 수 없지.”
“설마…….”
이재호가 우려를 표하자 손혜빈이 한숨을 쉬었다.
“들여와야겠다, 퍼포먼스 디렉터.”
“저, 그런데 손 이사님. 아라 씨가 제시한 조건을 수행할 수 있을 만한 디렉터가…….”
“흔할 리 없지. 그만한 디렉터를 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 그럼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선 안무가 수 명을, 어쩌면 십수 명을 한군데 모아두고 일을 진행해야 하는데…….”
돈이 무지막지하게 깨지겠지.
결과물이 잘 나올지 안 나올지 확신도 없고.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쳐. 아라 말대로 온갖 분야의 안무가를 데려와.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
“글쎄요. 하나의 안무를 십수 명이 같이 만드는 게 가능할까요? 그것도 전부 분야가 다르면…….”
“불가능해.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안무가가 없다면. 그렇다고 아라가 그 역할을 맡을 수도 없어. 나도 못 해.”
“이 안을 사장님께 제출하면 바로 까이겠네요…….”
안무가 십수 명을 모아 안무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약 한 달을 진행한다 치면, 그들 개인에게 수백만 원씩 쥐여줘야 할 것이다.
한 달 진행하는 데도 수천만 원이 깨진다. 각자가 유명하다면 억 단위로 나갈 수도 있다.
그런데 결과물이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른다.
나오더라도 퀄리티를 장담할 수 없다.
뽑기를 하는데 뭐가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심지어 돈을 넣어도 뽑기가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른다.
이런 프로젝트 기획안을 홍규헌에게 가져갔다간 면전에서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꿈이야. 아니, 시간이 아주 오래 주어져서 시행착오를 끝없이 되풀이하고 개선한다면 모르겠지.”
“KS 엔터 같은 곳에서나 할 수 있는 방법이네요.”
“그렇지.”
모든 건 퍼포먼스의 사령탑이 없기 때문이다.
조아라가 제시한 조건을 만족할 만한 디렉터가 대한민국에 존재하긴 할까?
“이건 목표를 하향 조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아라 씨의 의도는 정말 좋은데…….”
손혜빈이 혀를 쯧 찼다.
짜증 나서였다.
조아라에게 짜증 난 게 아니었다.
“그래, 아라의 의도는 정말 좋은데.”
회사가 받쳐주질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