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83화 (483/760)

483화

오오치를 설득한 다음 날.

신아름은 잠시 거리로 나가 군것질거리를 샀다. 그녀는 봉투 안에 가득 든 일본 음식들을 보곤 만족했다.

‘팀장님이랑 같이 먹기엔 충분하겠네.’

어제 성필과의 일본 여행을 즐길 대로 즐겼다. 아쉽지만 오늘은 돌아가야 했다.

그전에, 추억을 더 남기기 위해서 일본 음식을 맛보기로 했다.

성필도 신아름과 함께 나가겠다 했지만, 신아름은 자신이 주는 선물이니 성필은 쉬라고 했었다.

신아름은 성필과의 식사 시간이 기대됐다.

‘한국에 있을 땐 식사는커녕 제대로 이야기 나눌 시간도 적었으니까.’

앨범 활동기는 바쁘다.

일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기만 해도 하루가 끝나버린다. 앨범 활동기가 끝나고도 소녀연맹은 방송이며 행사며, 온갖 곳을 돌아다녀야 한다.

성필과 만날 시간은 한정적이다.

‘일본에 와서 다행이다.’

마지막 날이라 아쉽지만, 그렇기에 더 열심히 추억을 남겨야지.

신아름은 종종걸음으로 웨벡스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 수상한 사람이 서 있었다. 신아름은 곧바로 걸음을 멈추었다.

‘뭐야?’

검은색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였다.

반팔 티와 청바지, 운동화라는 극히 평범한 차림.

‘아니, 평범하지 않아.’

그가 신은 운동화는 유명 스포츠 브랜드의 한정판이다. 청바지의 마감도 심상치 않으며, 티셔츠의 가슴팍에는 작게 명품 브랜드 로고가 각인되어 있었다.

심지어 모자조차 비싼 티가 흘렀다.

그런 그는 웨벡스 입구 근처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유리창 안으로 안내 데스크를 확인하다가 한숨을 쉬고, 들어가려는 것 같다가도 황급히 뒤로 돌아 물러나고.

저대로 조금만 더 있으면 경비가 달려올 것 같았다.

‘이상한 사람이면 어떡하지.’

신아름은 잠시 망설이다가, 걸음을 재촉하며 그를 지나치려 했다.

그는 신아름의 발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라면서 몇 걸음 물러났다. 둘이 스쳐 지나가던 순간, 아주 잠시 둘의 눈이 맞았다.

신아름이 걸음을 멈추었다.

“서유선?”

그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서유선 선배님, 맞죠?”

그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고개를 숙였다.

“서유선 선배님 맞잖아요, 그쵸?”

확실하다.

다키스트의 리더, 서유선이다.

* * *

‘일이 많이 늦어졌네.’

이젠 본부장으로 승진한 미사토는 일을 마치고 급히 웨벡스로 달려갔다.

웨벡스의 지하 주차장까지 가는 시간도 아까워 근처 길가에 차를 세우곤 입구로 달려갔다.

‘유선이한테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라 하긴 했는데, 잘 기다리고 있을까?’

더운 여름날이다.

아무리 낯가림이 심한 서유선이라도, 이런 땡볕 아래에서 계속 서 있진 않을 것이다. 회사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하다.

‘뉴아사 때 같이 방송국에도 갔었잖아. 회사 정도야 난이도가 낮은 편이지.’

그건 그렇고.

‘내가 보고 싶어서 못 참겠다니…….’

미사토의 얼굴에 참을 수 없는 뿌듯함이 드러났다.

아, 세상 사람들에게 ‘내 남자친구가 서유선이에요!’라고 자랑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고 얼굴만 보고 있어도 안 질리…….

“그, 그만하세요오…….”

“아니 내가 뭐 잘못했어요? 서유선이냐고 물었을 뿐이잖아요. 왜 갑자기 울어요?”

서유선은 입구로 올라가는 계단에 있었다. 공벌레처럼 몸을 말고 웅크려 벌벌 떨면서. 그 옆에선 신아름이 촉새처럼 서유선을 쏘아대고 있었다.

신아름이 서유선을 괴롭히고 있다.

미사토는 충격받아 핸드백을 떨어뜨렸다.

그 소리에 서유선과 신아름이 미사토 쪽을 보았다. 그러자 서유선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사토오……!”

미사토는 폭행당하는 아들을 구하러 가는 심정으로 달려갔다.

“당장 유선이한테서 떨어져엇―!”

* * *

성필은 넋이 나가서 다키스트의 리더인 서유선을 감상했다. 서유선은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악!”

신아름이 성필의 옆구리를 찌르고서야 그는 정신을 차렸다.

“아, 어음, 그러니까, 어…….”

성필의 맞은편에는 미사토가 있었다.

마치 학부모 면담 같은 모양새다.

“아름이가 유선 씨를 괴롭혔다고요?”

“팀장님 뭘 들은 거예요?!”

“아뇨, 괴롭혔다기보다…….”

미사토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유선이가 괴롭힘당한……? 억지로 괴롭혀진……? 으음…….”

“그, 미사토, 내가 할게.”

“응?”

서유선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성필과 신아름을 보더니 사과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그래서요…….”

신아름은 까마득한 대선배의 사과를 받곤 어찌해야 할지 몰라 성필을 보았다.

성필은 솜사탕처럼 하늘하늘 퍼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갠챤슴미다하…….”

‘진짜 팀장님을 어떡하면 좋지?’

신아름은 마음속으로 참을 인(忍)을 세 번 그렸다. 그래도 성필이 케이어스를 보고 넋을 잃었을 때보다야 백배 낫다.

‘에휴, 어쩔 수 없지.’

신아름은 성필에게서 서유선으로 눈을 돌렸다.

아이돌의 정점이 보였다.

“제, 제가 사람을 대하는 게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죄송합니다. 그게, 어어…….”

서유선은 더운지 티셔츠 목깃을 잡고 펄럭였다. 성필과 대면한 잠시의 대화만으로도 식은땀이 턱을 따라 뚝뚝 흘러내렸다.

‘이게 아이돌의 정점……?’

신아름은 서유선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이돌이란 그 어떤 직업보다 시선에 익숙해야만 할 텐데, 서유선은 그와 완전히 정반대였다.

무슨 초절정 미인의 시선을 끈 것도 아니고, 성필이 쳐다보는 것 정도로…….

“악!”

신아름이 또 성필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제 보니 성필은 그냥 쳐다보는 게 아니라 눈동자에 불꽃을 채우고 있었다. 저런 시선을 받으니, 서유선이 당연히 쩔쩔맬 만하다.

옆구리를 찔린 성필은 다시금 평정을 되찾았다.

“괜찮습니다. 별일도 아니었는데요 뭐.”

“아니 팀장님, 선배님이 저한테 말 걸리자마자 어떻게 했는 줄 아세요? ‘흐이익!’이라면서 뒷걸음질쳤다니까요? 저 살면서 ‘흐이익!’이란 소리는 리카랑 설하 쌤 빼고 처음 들어봤어요.”

“아름이도 괜찮대요.”

“죄송합니다…….”

서유선이 재차 사과를 전했다.

그를 바라보는 성필의 눈빛에 동정이 배었다.

다키스트는 커다란 성공에도 불구하고 멤버 세 명이 계약 연장을 거부했었다.

그 세 명은 정신적인 문제를 이유로 들어 연예계에서 잠정 은퇴했고 말이다.

‘대인기피증인가.’

성필은 몰락한 아이돌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선배님.”

신아름이 서유선을 불렀다. 그는 성필보다 신아름이 대하기 훨씬 편한지, 성필과 마주 볼 때처럼 시선도 내리지 않았다.

“여기 팀장님 얼굴 기억 안 나세요?”

“아, 나죠. ‘뉴아사’ 때 방송국에서 잠시 스쳐 지나갔었잖아요.”

“아뇨, 그거 말고요. 선배님 다키스트로 활동할 때 팀장님이 팬미팅 갔었거든요.”

“네……?”

“아름아 그걸 왜 말해!”

성필이 부끄러워하면서 신아름을 말리자, 서유선이 ‘아’ 소리를 냈다.

“기억나요. 그때 유일한 남자 팬분. 와, 결국 엔터 업계에서 일하시게 됐네요. 축하드려요.”

“아, 하하, 그때도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어요.”

“……?”

“아직도 생생해요. 앨범을 수십 장 사서 겨우 당첨됐었거든요. 그래도 아깝진 않아요.”

과거를 이야기하는 성필의 얼굴엔 행복이 서려 있었다.

서유선은 안 좋은 기억을 품고 연예계에서 은퇴했지만, 과거의 팬을 만나는 게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특히 그냥 팬이 아니라 장막(다키스트의 팬덤)이라면, 더 애틋한 마음이 든다.

“제일 기억나는 게 유선 씨가 ‘딩동댕 묵찌빠’ 추셨던 거요.”

순식간에 서유선의 얼굴이 썩어들어갔다. 그가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죄송한데, 화장실…….”

서유선이 응접실을 나섰다. 그가 돌아온 건 5분이 지난 뒤였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미사토의 옆에 붙어 귓속말했다.

“미사토, 우리 언제 가?”

“응?”

미사토는 일순 당황했지만, 서유선이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능숙하게 대응했다.

“이사님, 죄송하지만 이만 가봐야 할 거 같아요.”

“그렇네요. 공사다망하신 본부장님을 너무 오래 잡고 있었네. 아름이 일은…….”

“아니에요. 저희 유선이가.”

미사토는 ‘저희 유선이’라고 말할 때 도저히 기쁨을 참을 수 없어서 입꼬리가 올라갔다.

“먼저 아름 씨에게 무례를 저지른 거잖아요. 처음 만나는 사람 보고 ‘흐이익’은 너무하긴 했죠.”

“미사토…….”

“미안 미안. 그럼 가보겠습니다. 아름 씨, 나중에 봬요.”

“잠깐만요.”

신아름이 서유선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 아까의 툴툴대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정중한 투로 부탁했다.

한국어로.

“미숙한 후배가 배움을 청합니다.”

“……네?’

서유선이 당혹을 표하자, 역으로 신아름의 얼굴엔 미소가 어렸다.

“춤이든 노래든, 아니, 퍼포먼스 하나라도 가르쳐주실 수 없으실까요? 10분이라도 좋아요.”

다키스트.

2세대의 정점.

성필이 이상향으로서 바라보는 그룹.

그 리더를 직접 만났다.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다.

직접 다키스트의 퍼포먼스를 볼 수 있는 기회 말이다.

‘다키스트는 내가 연습생일 시절에 해체했어. 직접 보고 싶어도 볼 방법이 없었어.’

이미 스러져간 고대 제국의 유적을 바라보는 역사학자처럼, 신아름의 머릿속엔 과거의 지혜를 향한 열망이 가득했다.

물론 그 열망은 온전히 찬란한 과거를 향한 동경으로 가득한 건 아니었다.

‘다키스트의 퍼포먼스를 본다.’

그리고.

‘내 걸로 만든다.’

성필의 이상향에 닿기 위해서.

* * *

성필이 일본에서 돌아온 다음 날, 조아라는 앨범 메인 프로듀서 자격으로 소녀연맹의 프로듀서 성필을 소환했다.

조아라는 성필보다 먼저 회의실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방금까지 춤이라도 추었는지 크롭티에 헐렁한 트레이닝복 바지 차림이었다.

“아저씨 하이. 오랜만이네.”

“너 점점 말이 짧아져.”

“오랜만이옵니다.”

성필은 한숨을 내쉬면서 그녀의 앞에 테이크아웃 커피를 내려놓았다.

조아라는 방금 성필이 ‘말이 짧다’고 했던 걸 잊었는지 ‘땡큐’라고 짧게 감사를 표했다.

성필은 커피를 시원하게 빨아들이는 조아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아라는 한 모금에 커피를 절반이나 마시곤 이제야 살겠단 듯 컬컬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요.”

“네가 조금씩 반말하는 걸 봐줘야 하나 그냥 둬야 하나 고민 중.”

“그냥 둬요. 우리가 보통 사이도 아니고.”

“무슨 사이인데?”

“바닥부터 정상까지 같이 가는 사이. 그 정도면 노인이랑 어린애도 친구 먹어요.”

“우리 아직 정상 아니잖아.”

“그럼 딱 정해요. 우리가 번 돈으로 신사옥 이전하면 반말할 수 있는 걸로. 오케이?”

“뭔 오케이.”

“리카한텐 신사옥 짓게 해주면 ‘성필이’라고 부르게 해준다면서요. 아, 딱 감 왔다. 사람 차별이네.”

성필은 장난으로 테이블에 이마를 쾅쾅 박았다.

“너희들은 어? 나랑 한 약속을 뭐 다 공유해? 약속 아닌 약속들도 진짜 잘 기억하네! 이러면 나 너희들한테 집 몇채씩 사줘야 해!”

“말 돌리지 마요. 그리고 이제부터 존댓말 잘할게요. 나도 차별하는 사람한테 친근하게 대해주기 싫어요.”

“알았어. 신사옥 가면 반말하든가.”

신사옥으로 가면 반말만 시켜주겠는가? 원하는 건 웬만해선 다 들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애초에 그 정도로 돈을 벌어다 줬으니 뭘 요구하든 들어줘야겠지.

엔터 업계에선 성공한 사람이 갑이다.

“알겠어요, 성필이.”

“뭐?!”

“성필이이아하핳!”

조아라가 사람 열받게 만드는 투로 실실 웃어 재꼈다. 어찌나 즐겁게 웃는지 눈가에 눈물마저 맺혔다.

그녀는 검지로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근데, 신아름 걔한테 뭐 일 있었어요? 어제 돌아와서 계속 저기압이던데.”

“아름이가?”

“네. 방어전 실패한 타이슨처럼 베개에 화풀이하던데요.”

성필은 어색하게 웃었다.

‘분해하는 거겠지?’

정말 놀랍게도, 서유선은 신아름에게 기꺼이 퍼포먼스를 하나 가르쳐주었다.

서유선의 퍼포먼스는 놀랍기 그지없었다. 도저히 몇 년간 무대를 떠난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었다. 아마 쉬는 동안에도 춤과 노래를 놓지 않았던 듯했다.

그리고 그런 서유선의 퍼포먼스를 커버한 신아름은…….

‘완벽하지 못했지.’

물론 그것만으로도 서유선은 대단하다고 했다. 오히려 감탄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배우냐고 말이다.

그게 신아름에겐 충격이었다.

‘빨리 체득’한 게 아니라, ‘빨리 배운’ 것으로 보였단 사실이.

신아름은 다키스트의 리더 서유선의 퍼포먼스를 직접 보고서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내내 성필이 말을 걸어도 입만 꾹 닫고 있었다.

“그냥 좀 그런 일이 있었어.”

“아저씨가?”

“왜 내가 잘못했을 거란 투인데.”

“신아름이 기분 상할 일이야 아저씨 일밖에 없으니까요.”

의외로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뭐, 숙소에 신아름 내버려 두고 김하슬이랑 몇 시간 통화했어요?”

“됐어, 나 그만 얘기할래. 난 네 먹잇감이 아니야.”

“아저씨 일부러 말투 귀엽게 하는 거예요? 진짜 귀여워서 좀 위험한데.”

성필은 깊게 심호흡 한 번을 한 후 품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더는 연하의 놀림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음악사 강의해줘요.”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요구다.

“음악사라니. 해줄 만한 건 다 해줬잖아. 아, 혹시 내가 록의 역사 이야기할 때 로큰롤 쪽은 많이 잘라먹어서 그래? 그럼 빌 헤일리랑 척 베리부터 이야기해야…….”

“섹스 앤 드러그스 앤 로큰롤은 됐고요. 케이팝 아이돌 춤의 역사? 아저씨 그런 것도 알아요?”

“대강은. 그건 왜?”

“내가 아주 큰 계획이 있어요.”

조아라는 짐짓 무게를 잡으면서 성필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혁명적인 퍼포먼스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그러려면 과거를 알아야 하잖아요. 과거에 어떤 그룹들이 혁명을 일으켰는지 알아야죠. 과거는 미래를 위한 나침반이라고 하니까요.”

“아주 올바른 마음가짐이네. 이 말을 한 게 다른 멤버였으면 울었을 텐데.”

“사람 차별 좀 그만해요.”

“근데 내가 그쪽 전문도 아니고, 정말 전문적인 이야기까지 해줄 수는 없어.”

“어느 정도까지 되는데요?”

“평론가 칼럼 수준.”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해요. 내가 학자들이 쓴 논문들 찾아봤는데 별것도 없더라고요.”

“커머셜 댄스를 논문 수준으로 파고드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

스트리트 댄스마저도 제도권 무용에선 학문적인 논의나 분석이 활발하지 않은데, 커머셜 댄스인 케이팝이 본격적으로 연구될 리가 없다.

조아라가 기대할 만한 자료는 없었을 것이다.

“진짜 간단하게 할게. 1세대엔 단순하고, 중독성 있고, 사람들이 기억하기 쉬운 포인트 안무에 치중했어.”

“동물 손 장갑 끼고 귀엽게 흔들고 그런 거요? 펄쩍펄쩍 움직이고?”

“응, 너도 예능에서 옛날 아이돌 나오면 자료화면으로 몇 번 봤을 거야. 현재 아이돌을 떠올리면 안 돼. 동작들이 전반적으로 헐겁게 연결되고, 가사를 제스처로 설명하는 것 같은 일차원적인 안무가 대부분이었어.”

“‘사랑해요’라고 하면 하트 그리는 그런 거요.”

“응. 방송 카메라도 춤 자체보다는 얼굴을 많이 잡았으니.”

다음, 2세대.

현대 케이팝 아이돌의 특징이 확립된다.

“아라 네가 바라는 혁신이 나와. 칼군무. 이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어. 멤버 전원이 같은 춤을 같은 타이밍에, 정말 칼로 자른 듯이 맞춰 추는 거야.”

“……그럼 여기서 케이팝 춤의 역사 끝나는 거 아니에요?”

“뒤로 가면 더 나아지지. 이 시기의 문제점은 너무 기계적이란 거야. 뭐랄까, 춤이라면 개성이나 그루브 같은 게 보여야 하잖아. 그런데 그게 없지. 그나마 YSL 엔터 그룹들은 자유로움과 멋을 추구해서 그런 무대를 꾸몄긴 한데, 대부분은 기계적인 칼군무였어. 여기서 또 혁신이 일어나.”

“다키스트예요?”

조아라가 답을 맞추자 성필이 놀란 기색을 보였다.

“뭐, 대단하다고 했잖아요. 걍 때려 맞췄어요.”

“맞아. KS 엔터의 다키스트랑 EMC가 등장했어.”

리카, 백설하, 조아라, 장하양이 월말 평가 때 EMC의 곡을 커버하기도 했었다. ‘뉴아사’ 때는 다키스트의 ‘더 킹’을 커버했었고 말이다.

여러모로 소녀연맹은 KS 엔터와 연이 있다.

“안무적으로 혁신적인 시도가 많이 이뤄졌지. 스트리트 댄스는 물론 현대 무용에서도 구성과 테크닉을 가져와 안무에 반영했어. 훨씬 짜임새 있고 새로운 퍼포먼스를 보이는 게 가능했지.”

“진짜 혁신이네요.”

“그리고 이전의 칼군무는 노래 한 소절에 두 동작 정도 배분됐다면, 다키스트와 ECM 이후로는 한 소절에 여섯 일곱 동작도 들어가. 이때부터 케이팝 퍼포먼스가 급속도로 어려워지고 화려해졌어. 호흡과 속도가 훨씬 빨라진 거지.”

“그리고, 3세대?”

“응. 군무의 예술적 가치를 추구하기 시작해. 군무 자체도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나아가.”

한 호흡 들이쉬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세세하게 나뉘고 빠른 템포로 진행되는 안무. 그것을 모든 멤버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수행해낸다.

2세대의 성공으로 많은 아이들이 아이돌을 꿈꾸게 되어, 자연스레 연습생의 질도 올라갔다. 당연히 연습생 중 천재라 불릴 만한 이들도 많아졌다.

어쩌면 3세대의 변화는 뛰어난 연습생이 많이 유입됐기에 벌어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현재는 세계를 누비는 WTP도 3세대의 시작과 함께했었다.

“이때쯤 되면 거대 엔터들이 생겨나서, 프로듀싱에 투입할 수 있는 자본의 단위 수가 달라져. 안무에도 힘을 더 쓰지. 춤 자체가 작품이라 불릴 수준까지 올라와, 하나의 작품으로서 완성도를 지녀.”

그리고 칼군무의 압박감에서 해방되어, 멤버들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개성적인 제스처와 개별적인 스타일도 드러낸다.

“여기까지.”

성필이 이야기를 정리했다.

“이 수십 년의 세월을 거쳐, 케이팝 퍼포먼스는 세계의 뮤직 비즈니스 내에서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든 장르로 변했어. 스테이지 퍼포먼스적으로 가장 발전한 음악이야.”

“요컨대…… 케이팝은 춤이 가장 중요하단 거네요?”

“아닌데? 팬과의 소통이랑 뮤직비디오랑 비주얼이랑 노래랑 음악도 중요한데?”

“지금부터 소녀연맹 내에선 춤이 제일 중요해요.”

독재 ON.

“도움은 됐어?”

“됐어요. 아주 조금 길이 보인 거 같아요.”

“다행이네. 그런데, 어떤 길?”

“요약하면…….”

조아라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갔다.

“케이팝 퍼포먼스의 발전은 첫째, 다른 분야의 테크닉과 구성을 받아들인다.”

“그렇지.”

“둘째,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응?”

“그럼 쉽잖아요.”

조아라가 웃는 것과 반대로 성필의 표정은 천천히 굳어갔다.

“다 섞고 더 어렵게 만들면, 그게 혁신이란 거 아니에요?”

X 됐다.

‘아라베스크의 재현이다!’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2, 1차 위기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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