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82화 (482/760)

482화

6개의 책상이 둘씩 서로를 마주 보며 있었다. 그 가장 위의 상석엔 일곱 번째 자리, 그곳에서 만화가 오오치가 물 흐르듯 펜을 움직였다.

다른 여섯 책상에선 어시스턴트들이 ‘웨스턴 불렛’의 원고를 완성 중이었다.

“선생님.”

고참 어시스턴트가 오오치를 불렀다.

오오치는 낮게 ‘음’이란 소리만 냈다.

“또 습작 그리세요?”

“어.”

“그냥 ‘웨스턴 불렛’ 다음 화 그리는 게 낫지 않아요? 선생님 속도면 세이브 원고 몇 화씩 둘 수도 있잖아요. 세이브 두고 휴가 길게 다녀오는 건 어떠세요.”

“네가 놀고 싶어서?”

“아, 들켰네.”

어시스턴트들이 실실 웃었다.

오오치는 웃지 않고 습작을 그렸다.

“대단하셔. 열정이 사라지질 않으시네.”

그제야 오오치가 픽 웃었다.

자조(自嘲)였다.

‘열정이 안 사라져?’

반대다.

오오치는 이미 ‘웨스턴 불렛’에서 정이 떨어졌다. 차세대 만화계를 이끌 대작이란 평을 듣지만, 도저히 정이 붙지 않는다.

어쩌면 너무 쉽게 연재가 결정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른 만화가가 흔히 겪을 법한 퇴짜, 수정 지옥 따윈 없었으니. 그는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자마자 연재가 결정됐다.

천재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천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면 그릴수록 부족한 거밖에 안 보여.’

그 부족함은 ‘웨스턴 불렛’에서 채울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끝도 없이 습작을 그렸다.

작가로서 순서가 바뀌었다.

습작을 쌓아 정식 작품을 내는 게 아니라, 작품을 내고서 습작을 쌓는다.

그는 스스로가 불쌍했다.

자신의 작품을 사랑하지 못하게 된 작가였으니.

‘다시 사랑하고 싶어.’

출판사 편집부는 ‘웨스턴 불렛’의 완결이나 연재 중지를 절대 허용해주지 않을 것이다.

황금알 낳는 거위는 말라 죽을 때까지 쥐어짜 내는 게 그들의 방식이다.

그 유명한 드래곤볼도 작가 마음대로 연재를 끝낼 수 없어서, 몇 번이나 에피소드를 추가하지 않았던가.

‘이 지옥을 벗어나려면 방법은 단 하나.’

‘웨스턴 불렛’을 다시 사랑할 계기를 얻는 것이다. 오오치는 이번 애니메이션화를 그 계기로 삼으려 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인 세이코, 반평생을 함께 해온 그 가수가 애니메이션 주제곡을 불러준다면 다시 사랑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거절당했지만 말이다.

“선생님.”

고참 어시스턴트가 또 그를 불렀다.

“음.”

“오늘 아이돌 오는 거죠? 여기에?”

“그렇다네. 회사 사람이랑 같이.”

“보러 가도 돼요?”

“우르르 몰려서 동물원 동물 보듯이 하게? 실례야. 절대 그러지 마.”

“아, 저 소녀연맹 팬임다.”

다른 어시스턴트가 머리 위에 손을 얹더니 ‘우파루파’라고 작게 노래했다. 그러더니 몇몇이 ‘루파 우파루파 루파’라고 호응했다.

요즘 길거리든 어디든 워낙 많이 듣다 보니, 굳이 소녀연맹을 알지 못해도 멜로디가 입에 익었다.

“오면 차나 다과 대접해야 하는 거 아님까? 제가 하겠슴다.”

“그러던가.”

“선생니이임! 제가 먼저 보고 싶다고 했는데에에!”

“그럼 넌 다과로, 쟤는 차로.”

그러자 어시스턴트들이 성화를 냈다. 왜 자기는 안 되냐면서 말이다.

오오치가 한숨을 푹 내쉬자 어스시턴트들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됐어. 내가 다 준비한다.”

오오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거실 소파에 앉은 그의 눈엔 테이블 위에 올라온 박스가 보였다.

편집부에서 전해준 팬레터다.

오오치는 습관대로 박스를 열어 팬레터를 읽어보았다.

‘비슷비슷하네.’

연재가 시작된 이후 팬레터는 질리도록 받아왔다.

오오치를 무슨 신처럼 묘사한 어린 학생의 편지.

담담하게 쓰인 어느 직장인의 편지.

혹은 자기가 뭐라도 된 것처럼 한껏 거만한 투로 이것저것 지적하는, 아마 히키코모리 백수일 테지만, 그런 인간의 편지도 있었다.

사소한 차이는 있지만 하나같이…….

‘내가 만화로 뭘 말하려고 하는지 하나도 몰라. 누구도 제대로 읽는 녀석이 없어.’

이럴 때면 그냥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고 싶다.

자신의 표현력이 고작 이 정도란 사실이 분해서? 아니. 독자라는 인간들의 수준 떨어지는 상상력 때문이다.

문득 편집자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런데 팬레터는 왜 읽냐? 그렇게 싫어하면서 굳이 읽어야 해? 넌 독자들이 떠드는 게 싫다지만, 절대 아니야. 넌 사랑받는 게 좋은 거야. 사랑을 확인하지 못하면 외로운 토끼처럼 픽 죽어버릴 걸 아니까, 계속 팬레터를 읽는 거지.’

지랄하고 있네.

오오치는 평생을 사랑하는 자로 살았다.

사랑받는 건 관심 없다.

연애도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만 해왔다.

설령 상대가 나를 크게 좋아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사랑하기만 하면 만족했다.

‘만화를 그리는 것도 똑같아.’

사랑했기 때문에 그렸다.

그러나 이젠 사랑하지 않는다.

팬레터를 읽는 건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런 천박한 이유 때문이 아니다.

‘혹여라도 내 사랑을 되살릴 수 있는 금과옥조가 있을까 살피는 것뿐이야.’

오오치는 문학의 힘을 믿는다.

고작 한 문장이 정치가의 일장연설보다 나을 때가 있단 걸 안다.

아무렇지 않은 문장 하나가, 자신의 뼛속 깊이 배어든 독소를 없애주리라 기대해왔다.

‘그런데 하나도 없어.’

오오치는 읽고 있던 팬레터를 곱게 접어 박스 안에 넣었다. 넣을 때는 접을 때와 달리 손길이 거칠었다.

‘내 사랑을 되살릴 수 있는 건 세이코뿐이야.’

오직 가후(歌侯)만이 오오치를 매혹할 수 있다.

그때가 오면 오오치는 부테스가 될 것이다.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기꺼이 바다로 몸을 던진, 오디세우스의 유일한 선원.

오오치는 오디세우스의 다른 선원들처럼 밀랍으로 귀를 막진 않을 것이다. 기꺼이 귀를 열고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다.

단, 그 세이렌의 이름은 반드시 세이코여야만 한다.

‘오직 세이코만이…….’

시세리가 되어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 * *

시세리가 노래한다.

하지만 시세리는 세이코가 아니다.

신아름이라는 이름의 아이돌이었다.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아이돌이 노래하는 걸 보고 있다.

아니, 시세리가 노래하는 걸 보고 있다.

시세리는 목제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인간성’을 연주하고 노래한다.

어시스턴트들은 오오치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거실까지 나와 시세리의 노래를 들었다.

신아름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F 마이너 세븐 코드를 짚더니, 마치 방아쇠를 당기듯 거칠게 기타 현을 퉁겼다.

그리고 노래했다.

[무엇 때문에 황야를 향하여

우리들은 소리 높여 외치는가

달리는 회전초와 선인장은

무엇을 바라 질주하는가

나뭇가지와 꽃 장식도 없는

황폐한 황야를 향해 우린…….]

이건 시세리의 노래였다.

데모곡에 포함된 밴드 세션 중 그 무엇도 없었다. 존재하는 건 어쿠스틱 기타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노래하는 게 시세리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쓴 모자, 그녀가 입은 탱크톱, 그녀가 입은 스크래치 청바지, 어깨에 두른 망토, 허리에 찬 홀스터와 권총, 무엇보다 그 얼굴과 눈빛.

시세리다.

‘왜.’

오오치는 세이코의 노래를 사랑한다.

세이코라는 스타를 사랑해왔다.

시세리가 세이코를 닮은 건, 오오치가 무의식적으로 그가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그렸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럴 텐데.

‘어째서 저 얼굴이…….’

신아름의 얼굴이 시세리로 보이는 건가.

오오치는 거의 호흡을 멈추었다. 얼굴은 창백했으며 다리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떨려왔다.

처마에 맺힌 빗방울처럼, 흥건한 땀이 오오치의 등을 따라 흘러내렸다.

시세리가 사선으로 내렸던 시선을 살짝 들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오오치는 환희에 빠져들었다.

‘아름답다.’

진짜 시세리가 현실에 나타났다.

그림을 이어 붙여 움직이는 애니메이션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이나 실제적이고, 아니, 실제니까 당연하겠지만, 너무나 아름답다.

꿈이 현실이 된 것만 같이 비현실적인 황홀경과 무아경이 그를 덮쳤다.

[이게 나의 휴머니티

세상에게 버려진

우리의 휴머니티]

이리도 아름다운 게 시세리라면, 대체 자신은 지금까지 무엇을 그렸던 건가.

5권, 만화로 묘사했던 시세리의 노래 장면은 너무나도 안일했다. 그딴 식으로 그려선 안 됐다.

아버지의 복수와 미국의 독립만이 목적인 복수귀, 살인귀. 그런 시세리의 유일한 취미란 노래 부르기와 기타 연주다.

적의 피를 뒤집어쓰고 죄악감에 시달리면서, 유일한 위안인 음악에 매달리는 시세리.

그걸 고작 두 페이지로 표현해선 안 됐다. 아예 한 편 전부 시세리의 노래로 채워야만 했다.

왜냐면…….

‘이게 진짜 시세리야.’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곤 배길 수 없다. 한 편 전부를 이 장면으로 채워서 아니, 특집호까지 이 장면으로 채워서 독자들에게 보여줘야만 한다.

마침내 오오치는 황홀경의 끝에 서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시세리는 마치 그와 단절된 세계에 있단 듯 연주와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주변의 사람들도 오오치에게서 느껴지는 비장함 때문에 감히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

“노, 노래하네…….”

오오치가 말했다.

“시세리가…….”

그가 항상 마음속으로만 그리던 장면.

펜으로,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던 이상(理想)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시세리의 연주가 끝났다.

시세리는 아무 말 없이 오오치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의 몰입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걸까, 아니면 30대의 남자가 흐느끼는 걸 보고 당황한 걸까.

“선생님, 괜찮으세요?”

성필이 물었다.

오오치는 입을 뻐끔대더니, 기쁨에 겨워 목 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아, 저는 또 사랑에 빠져버렸어요.”

* * *

성필과 신아름이 돌아가고 난 후에도, 오오치는 멍하여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짙은 여운에 잠겨 소파에 앉아 있자니 수석 어시스턴트가 다가왔다.

“선생님, 이제 진정 좀 하셨어요?”

“…….”

진정이라. 이 여운이 가시기 위해선 몇 주는 지나야 할 것이다.

여운은 자연스레 무력감을 낳는다. 머릿속이 황홀함으로 가득 차 다른 일을 할 기운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오오치의 경우엔 좀 달랐다.

그의 손이 벌벌 떨렸다.

펜을 잡고 싶다.

무언가를 그리고 싶다.

이야기를 쓰고 싶다.

습작이 아니라, ‘웨스턴 불렛’을 그리고 싶다.

시세리를 그리고 싶다.

“애니메이션이면, 그거지?”

“네?”

“그림이 움직이는 거.”

“어…… 그렇죠.”

“애니메이션화가 됐으면, 실사화 영화도 나올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이야, 서부극이면 좀 어렵지 않을까요.”

“실사화로 연금술사 이야기도 나오고, 사무라이 이야기도 나오고, 거인 사냥꾼 이야기도 나왔잖아. 서부극이라고 못 나올까.”

“뭐, 듣고 보니 그렇네요.”

“만약 실사화가 되면…….”

오오치는 가시지 않은 흥분을 담아 말했다.

“아름 씨를 시세리 역으로 쓸 수 있을까?”

어시스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만화 실사 영화에 아이돌을 주연으로 쓰는 건 영화가 망하는 지름길이었으니까.

어시스턴트는 ‘웨스턴 불렛’이 실사화되면 제대로 만들어주길 바랐다.

최소한 송나라의 무사들을 제외하곤, 미국 쪽 인물들은 일본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뭐어.”

어시스턴트는 조금 뜸을 들인 후, 애매하게 말했다.

“아름 씨가 어울리긴 하겠네요.”

연기를 잘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오오치는 어시스턴트의 말을 듣더니, 아직도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으며 겨우겨우 일어났다.

“그려야겠다.”

“또 습작 하시게요?”

“아니. ‘웨스턴 불렛’을 그린다.”

오오치는 부테스가 되었다.

밀랍으로 귀를 막은 다른 선원들과 달리,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기꺼이 바닷속으로 몸을 던진다.

세이렌, 시세리, 신아름에게로 향하기 위해서.

* * *

신아름은 오오치의 집을 나오며 후련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옆에서 성필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신아름은 그와 손바닥을 짝 맞추었다.

“잘했어. 이렇게 쉽게 될 줄 몰랐어. 역시 아름이야. 진짜 시세리가 만화에서 튀어나온 줄 알았어.”

“음.”

의외로 신아름은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

그에 성필이 더 신아름을 띄워주었다.

“당연하단 거야? 대단하네.”

“그게 아니에요.”

신아름은 가방 속에서 ‘웨스턴 불렛’ 5권을 꺼냈다. 그녀는 이 일 때문에 읽고 싶지도 않은 ‘웨스턴 불렛’을 정독했다는 모양이다.

아무리 코스프레라도 연기의 일종이다. 코스프레하는 캐릭터에 몰입해야 더 나은 결과가 있을 게 당연하다.

신아름은 만화책을 다 읽고, 시세리가 연주하는 부분만 더 자세히 재독했다.

“읽으면서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시세리의 포즈라던가 그런 거요.”

“뭐가?”

“만화적이지 않아요. 만화 구도 안에 만화적이지 않은 포즈를 취하고 있어요.”

“무슨 뜻이야?”

“그러니까, 실제 사람을 보고 그린 거 같다고요. 실제 사람의 사진이나 행동을요. 그것도 포즈만 베낀 게 아니라, 사람 자체를 베낀 거 같았어요.”

시세리의 동작이나 움직임은 모두 하나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손가락을 두는 습관이나 가만히 서 있을 때의 모습, 심지어 눈동자를 움직이는 것마저 만화적인 허용이 들어가 있지 않다.

전부 일관성이 존재한다.

구도에 맞춰 캐릭터를 끼워 넣는 형식이 아니다.

이 때문에 오오치의 작화(作畵)가 부자연스럽다고 평하는 이들도 있었다.

“시세리는 진짜 사람한테서 가져온 캐릭터예요.”

“누구?”

성필은 대략 짐작이 갔으나, 신아름에게 듣고 싶어 굳이 되물었다.

“세이코 선배요. 오늘 세이코 선배랑 대면하고 알았어요.”

신아름은 지각(知覺)을 곧바로 신체의 운동(運動)으로 변환할 수 있다.

그녀만이 가진 천재성이다.

그 말은 곧, 머릿속에 들어온 정보가 운동으로 이어질 만큼 강렬히 남는단 것을 뜻한다.

머릿속에 시세리의 모든 동작이 들어 있는 신아름이기에, 세이코와 대면하고서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었다.

“시세리는 세이코 선배한테서 따왔어요. 특히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는 부분은 진짜 빼박이에요.”

“아름아, 빼박이란 말은 별로 안 쓰는 게 좋을 거 같아.”

“네? 이거 나쁜 말이에요?”

“아니, 그, 일상적으로 쓰이긴 하지만…….”

“빼박? 빼박, 빼박. 빼도 박도 못…….”

신아름이 경악하면서 성필을 보았다.

“팀장님 진짜 변태예요? 그걸 뭐 그런 식으로 생각해요?”

“아니, 어원이 그거 아닌가? 나중에 누가 꼬투리 잡을 수도 있…….”

“아 몰라요. 그건 됐고요.”

신아름은 ‘웨스턴 불렛’ 5권을 가방 안으로 거칠게 들이밀었다.

“오오치 선생님이 허락해주신 건, 저한테서 세이코 선배를 봐서예요.”

“그런 걸까? 혹시 아름이가 너무 예쁘고 노래를 잘해서일 가능성은 없을까?”

“팀장님이나 그러겠죠. 솔직히, 우는 선생님 보고 울화가 다 났어요.”

신아름은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갔다.

“내가 아니라 세이코 선배를 흉내 내서 일을 얻은 거잖아요. 이게 뭐예요.”

신아름의 뒷모습이 처량했다.

성필은 재빨리 그녀를 따라잡으며 말했다.

“그럼 더 대단하잖아.”

“뭐가요.”

“소녀연맹 중 너만 할 수 있는 일이란 거니까.”

“팀장님은 진짜 긍정적이네요.”

“넌 이렇게 생각하는 거지? ‘나라서 일을 따낸 게 아니라, 누군가의 흉내를 내서 따낸 거다. 그러니까 의미가 없다’라고. 그런데, 오오치 선생님이 너보고 세이코 씨라고 하진 않았잖아. 뭐라고 했었지?”

“……시세리.”

“이젠 네가 시세리야. 네가 가장 시세리다웠어. 물론 예쁘고 노래도 잘 부르고.”

신아름이 소박한 웃음을 보였다.

성필은 그녀가 기분이 풀린 듯하여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그녀의 기분을 더 좋게 만들어주려 했다.

“비행기 태워줄까?”

“팀장님, 나 몇 살?”

성필이 자주 리카에게 하는 말버릇이었다. 신아름이 흉내 내는 것을 보니 색다르다.

“22살.”

“근데 무슨 비행기예요.”

“알겠어. 어차피 비행기는 한국 갈 때 타니까.”

어차피 농담이었으니.

둘은 말없이 거리를 따라 내려갔다.

그때 갑자기 신아름이 걸음을 멈췄다.

“태워줘요.”

“응? 아, 근데 될까 모르겠다. 너 학생일 때야 가벼워서 됐는데 이젠…….”

“바로 얼마 전에도 해줬잖아요. 그렇게 불평할 거면 헬스장 왜 다녀요. 걍 끊지.”

“나 지금 그만두면 권강철 트레이너님이 집까지 찾아올걸.”

“왜요?”

“같이 아마추어 피트니스 대회를 제패하기로 했거든. 그럼, 미래의 피트니스 대회 우승자의 힘을 쬐끔만 보여줄까?”

성필은 신아름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 허리를 앞으로 말았다. 그의 복근과 어깨에 힘을 빡 들어갔다.

“점프해.”

신아름이 살짝 발을 튕긴 순간, 그녀는 성필의 힘을 따라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마치 발레리노가 발레리나를 들어 올리는 것 같았다.

“우와, 높다!”

“아름아.”

“네?”

신아름은 만면에 행복을 담은 채 성필을 내려다보았다.

“수고했어.”

신아름은 짐짓 퉁명스럽게 웃더니 슈퍼맨 포즈를 취했다.

“이대로 100m 달리기!”

“그러다 넘어져.”

“그럼 10m!”

“오케이!”

* * *

본부장으로 승진한 미사토의 뒤를 이어 가수 관리 1부 부장이 된 카즈마.

그는 끙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사실이냐고 묻듯 맞은편에 앉은 히무라를 바라보았다.

히무라가 쾌청한 하늘처럼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오치 선생님은 소녀연맹이 꼭, 반드시, 부디, 일을 맡아주길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에 카즈마가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그는 무력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어딘가로 연락하여 그 사실을 전하였다.

히무라는 분함이 뚝뚝 묻어나오는 카즈마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눈여겨보았다.

‘젊은데다 야망이 있는 사람이야.’

술자리에서 공공연히 이야기하길 웨벡스 최연소 이사 선임이 목표라고 하던가.

이미 황금알 낳는 거위인 세이코란 패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 낳는 알의 수로는 부족한 모양이다.

히무라가 떡하니 소녀연맹의 뒤에 버티고 있건만, 염치 불고하고 세이코를 ‘웨스턴 불렛’ 오프닝에 밀어 넣으려고 한 것을 보니 말이다.

‘그래도 오오치 선생님이 마음을 정했으니 더는 수 쓸 방법이 없겠지.’

카즈마에겐 히무라가 맡은 아이돌 관리 2실이 눈엣가시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태껏 변변찮은 일도 얻지 못했던 부서였지만, 이젠 소녀연맹의 매니지먼트를 시작으로 에스타스까지 날개를 펴게 될 테니.

같은 뮤직 비즈니스를 다루는 부서로서, 둘은 심심찮게 같은 파이를 놔두고 경쟁하게 될 것이다.

‘아니, 경쟁이란 말은 성립하지 않나.’

쟁쟁한 가수들이 즐비한 가수 관리 1부와 어떻게 경쟁이 되겠는가. 카즈마 입장에서 히무라는 곳간을 갉아 먹는 쥐처럼 짜증 날 뿐이겠지.

‘지금은.’

지금은 그들에게 상대도 안 되지만, 웨벡스의 아이돌 산업은 점점 더 거대해질 것이다.

“히무라 실장님,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카즈마의 목소리에선 여전히 분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에 히무라가 산뜻하게 답했다.

“예, 말씀하시지요.”

“어떻게 선생님을 설득하신 겁니까?”

“가수를 뽑는 일에 설득의 방법이랄 게 따로 있을까요?”

히무라가 당당하게 선언했다.

“노래입니다.”

카즈마가 히무라를 웬 미친 사람 보듯이 보았다.

감히 세이코를 상대로 두고 노래로 이겼다니.

“고작 22살의 아이돌이요?”

그 반문에 히무라도 자신의 실수를 눈치챘다.

“노래가 아니군요.”

“그럼?”

“퍼포먼스입니다.”

“말씀해주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놀리지나 마십쇼.”

“정말인 걸 어떡합니까?”

“알겠습니다, 네, 알겠어요.”

카즈마가 자리를 뜨자 히무라는 남몰래 웃었다.

‘정말 그렇다는데 뭐 어떻게 더 설명하겠어?’

소녀연맹, ‘웨스턴 불렛’ 오프닝 가수 확정.

* * *

다음 날.

예상치도 못했던 사자대면(四子對面)이 벌어졌다.

성필은 옆에 앉은 신아름에게서 바로 앞의 미사토 본부장에게로, 그리고 그녀의 옆에 앉은…….

“어, 음, 그러니까.”

성필은 마치 학교의 학부모 면담 자리에 불려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름이가 유선 씨를 괴롭혔다고요……?”

사건의 당사자, 다키스트의 리더 서유선이 깊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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