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1화
리더인 유미를 포함하여, 에스타스 멤버들은 세이코가 버팀목이라도 되듯 그녀의 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그렇게 세이코라는 든든한 선배를 곁에 두고서야, 유미는 눈가에 그렁그렁 매달린 눈물을 걷어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분해서…….”
유미의 첫마디는 ‘분하다’였다.
“그때 이사님이랑 이시카와 선배님께 들은 이야기가 너무 분해서어…….”
남이 가진 금덩이보다 자신의 손에 든 모양 예쁜 돌멩이가 더 소중하다.
인간이라면 모두 그러하다.
유미도 그러했다. 비록 남들이 보기엔 노력이라 볼 수도 없는 나날을 어영부영 보내왔으나, 그녀 나름으론 최선을 다해왔던 것이다.
그걸 성필과 리카가 단숨에 부정했으니, 화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저희를 타도하려고 하셨던 거예요?”
유미가 흠칫하며 세이코에게 더욱 가까이 붙었다. 세이코는 선배다운 아량으로 유미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 진정시켜주었다.
“타, 타도는 그냥 구호였어요…….”
성필은 에스타스 멤버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미소를 만들어냈다. 그녀들을 탓하거나 나무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우리 면전에 대고 뭐라 할 생각이 있던 것도 아니잖아.’
성필과 소녀연맹이 없는 자리에서 뒷담을 까는 정도야 별것도 아니다.
옛날의 소녀연맹도 회사에서 뭐만 하면 타도 케이어스를 외치지 않았는가.
그런 경쟁심이 에스타스가 자라날 양분이 될 수 있다면, 성필은 얼마든지 미움받아도 괜찮았다.
‘애초에 그걸 위해 했던 말이었으니까.’
히무라가 간곡히 요청했던 것이었다. 에스타스 멤버들이 자극받을 수 있도록 직설적으로 평가해달라고 말이다.
정말 그대로 하니 히무라가 성필에게 달려들려고 하긴 했지만, 성필은 제 역할을 아주 잘 해냈었다.
성필은 옆에 앉은 신아름의 기색을 흘끗 살폈다. 의외로 신아름은 성필이 타도 대상으로 선언되었음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에스타스를 동정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포유가 떠올라서일까.’
과거 우효민이 속해있던 프로젝트 그룹인 포유는 신아름과 소녀연맹에 적대적이었다.
훗날 신아름이 우효민과 따로 만나 이야기를 듣길, 우효민은 포유의 결속력을 유지하기 위해 신아름을 이용했다고 한다.
우효민이 사과함으로써 당시의 무례는 없는 일이 되긴 했다.
‘확실히 상황이 비슷하네.’
유미와 에스타스 멤버들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린 채 감히 성필과 신아름을 볼 생각조차 못 했다.
그녀들은 괴로웠을 것이다.
일본의 ‘아이도루’를 생각하고 웨벡스에 지원했을 텐데, 기다리는 건 퍼포먼스형 그룹이 되어야 할 운명과 끝없는 몰락이었으니.
‘게다가 평범하게 지내왔던 애들을 갑자기 힘든 트레이닝으로 몰아넣었으니, 도중에 의지가 꺾여도 이상하지 않아.’
유미는 팀을 유지할 접착제가 필요했으리라.
힘들고 지쳐서 포기하고 싶은 팀원들을 향해 ‘우리 조금만 더 해보자’란 격려보다, ‘이대로 무너질 거야? 복수는?’이라고 말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란 걸 깨달은 것이겠지.
“케이크.”
신아름이 에스타스 멤버들에게 케이크를 주었다. 유미는 쭈뼛쭈뼛 케이크를 받아 무릎 위에 두었다.
“제로 슈가 케이크야. 칼로리가 아예 없진 않은데, 일반 케이크보다 훨씬 적어. 씹으면 단맛 나서 힘도 날 거고. 먹어.”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타도(打倒)라니…….”
신아름이 헛웃음 쳤다.
에스타스 멤버들이 낮은 신음을 흘리며 버팀목인 세이코에게 더 가까이 붙었다.
“얼마든지 해봐.”
“에?”
“너희랑 우리 활동 기간이 겹치지? 마음껏 타도해 봐. 기다릴게.”
신아름은 ‘읏차’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부터 일어났다. 그리고 성필을 붙잡아 일으키며 연습실을 나섰다.
신아름의 모습은 비난이나 꾸중으로 들렸을까?
아닐 것이다.
“네, 넵!”
에스타스 멤버들이 떠나가는 둘을 향해 뒤늦은 답을 던졌다.
아마 그녀들은 신아름이 다르게 보였을 것이다. 아마, 까마득히 성공한 선배가 자신들을 인정해준 걸로 보이지 않았을까.
연습실을 나온 성필은 ‘오올’ 감탄하며 신아름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름이 선배티 나네? ‘마음껏 타도해 봐’. 미쳤다. 무슨 보스야?”
“놀리지 마요. 제 나름 머리 터져라 생각한 말이라고요.”
‘에스타스 비긴 어게인’ 마지막 화에서, 그녀들은 콘서트홀에서 컴백 무대와 동시에 성필과 리카에게 평가를 받는다.
몇 달 전에 받았던 수모를 청산하고, 몇 달간의 노력을 인정받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그전에 소녀연맹 멤버인 신아름이 그녀들을 위로하거나 격려해선 안 된다. 어디까지나 에스타스가 인정받는 건 컴백 때가 되어야 하니.
“너무 차갑지도 않고 친절하지도 않은 말이어야 하잖아요. 팀장님이 걔들한테 뭐라 하기 전에 내가 이러쿵저러쿵하면 안 되고요.”
“아름이 착하네.”
그냥 아무 말 안 하고 노려보기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신아름은 성필이 ‘착하다’고 하자 괜히 툴툴대며 답했다.
“불쌍해서요.”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선행의 시작이라잖아. 측은지심.”
“아, 그거 공자죠?”
“맹자인데?”
“어쩌라고요.”
“네가 물어봤잖아!”
“아 됐어요. 가요.”
‘에스타스 비긴 어게인’ 마지막 화 촬영 전, 멤버들을 격려한단 임무는 달성했다.
‘에스타스 비긴 어게인’은 일종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탈락은 없지만 승패는 존재한다.
멤버들이 받는 압박감이 굉장할 것이다.
그래서, 그 압박감을 조금이나마 없애주고자 성필이 선물과 함께 찾아와 격려하는 게 목적이었는데…….
‘말 한마디 못 섞었네.’
뭐, 괜찮겠지.
성필이 하는 혼신의 입 털기보다 신아름이 한 몇 마디가 나을지도 모른다.
“바로 갈까?”
“네. 시간 없어요. 일 빨리 끝내고 1박 2일 여행 본전 뽑아야죠.”
“나는요?!”
갑자기 터져 나온 외침에 둘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세이코가 어처구니없단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성필은 세이코를 물끄러미 보더니 ‘아’ 소리를 냈다.
“인사를 못 드렸네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게 아니잖아요!”
세이코가 목소리를 키우자 신아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세이코는 움찔 떨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그게 아니잖아요. 일 때문에 찾아온 거 아니었어요?”
“일요?”
“‘웨스턴 불렛’이요.”
* * *
이제 보니 세이코는 굉장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 성필과 신아름이 일본으로 입국한 목적이 세이코를 구워삶기 위함이라고 알던 것이다.
세이코가 손발을 다 써가며 설명을 마치자, 성필은 진지한 낯빛으로 말했다.
“경쟁자를 설득하여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일을 따내고 싶진 않습니다. 페어플레이로 확실하게 승자를 가려보죠.”
그러자 세이코는 길길이 날뛰며…….
“선배님, 목소리 너무 커요.”
신아름이 담백하게 지적하자 세이코는 꼬리 만 강아지가 되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곤 세이코는 자신이 얼마나 신의가 가득한 인간이며, 소녀연맹과 파쿠 이사를 굉장히 아끼고 있으며, 그러니 기꺼이 오프닝 건을 넘겨주겠다고 했다.
“흐흥, 어때요? 감동했나요?”
그에 성필이 다시 진지한 낯짝으로 말했다.
“페어플레이…….”
“왜 감동하지 않는 거예요?! 제가 이 일을! 파쿠 이사 때문에! 포기하겠다니……!”
“선배님.”
세이코는 순식간에 마케이누(패배한 개, 패배자)가 되어 신아름의 눈치를 살폈다.
“페어플…….”
“그딴 건 이제 됐어요!”
세이코는 본인이 준비한 모든 전법이 먹히지 않자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볼멘 목소리로 투덜댔다.
“경쟁자를 떨어뜨려서 승리를 쥐고 싶지 않다니, 파쿠 이사가 할 말이에요? ‘뉴아사’ 때는 대기실까지 찾아와서 그만두라고 했으면서…….”
“그건 세이코 씨를 걱정했기 때문이에요. 세이코 씨가 걱정돼서 어쩔 수 없었어요.”
세이코는 어벙한 얼굴로 넋을 놓았다. 하지만 곧 신아름에게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세 때문에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그, 그렇게 말해도 변명이 되진 않거든요!”
“된 거 같은데요? 아무튼 페어…….”
“페어플레이고 뭐고, 원래부터 저는 받아들일 생각 따윈 조금도 없었어요.”
“네? 저랑 소련이들을 아껴서 일을 포기하겠단 건 전부 거짓말이었어요?”
세이코는 성필의 질문을 무시했다.
“제가 ‘웨스턴 불렛’ 건에 자그마한 관심이라도 보였다간, 작년 ‘뉴아사’의 재현일 뿐이에요.”
웨벡스 내부에서 이권을 다투게 된다.
“하아, 그 오오치란 작가는 왜 날 그렇게 섭외하고 싶은 건지. 뭐, 짐작은 가지만요.”
“세이코 씨가 시세리랑 닮았기 때문에요?”
“뭐라는 거예요?!”
세이코가 자랑스레 본인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렸다. 마치 ‘봐라, 이게 나다!’라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제가, 이 후나비키 세이코가, 레이와(현 일본의 연호) 최고의 가수라서예요!”
“제가 들은 말이랑은 다르네요.”
“……물론 오오치 작가가 든 이유는 그거긴 했죠! 하지만 누가 그걸 믿겠어요? 제가 어딜 봐서 시세리랑 닮았단 거예요?”
“‘웨스턴 불렛’ 읽어보셨어요?”
“아니요. 저는 만화를 읽지 않아요. 만화는 머리 나쁜 사람이나 읽는 거예요.”
리카가 들었다면 ‘당장 그 말 취소해!’라며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다.
성필의 옆에서 신아름이 작게 ‘안 읽는 게 아니라 못 읽는 거겠지’라며 한국어로 중얼댔다. 성필이 꾸짖듯 소파 위에 올린 그녀의 손을 짚었다.
세이코는 글자를 제대로 읽지 못한다. 아마 정신적인 문제일 거라고 한다. 지금은 나아졌다지만, 그렇더라도 쓰고 읽는 것에 문제가 있다.
가사도 손으로 쓰지 않고 육성으로 녹음한다는 모양이고.
‘아직도 애들이 세이코 씨를 싫어하나?’
현재 신아름이 세이코를 바라보는 눈빛만 보아도 짐작이 간다.
신아름은 세이코를 싫어한다.
‘그럴 만하긴 하지만…….’
성필도 신아름이 만난 지 고작 몇 주밖에 되지 않은 인간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진다면, 그녀의 살신성인을 칭찬하기보다 호되게 꾸짖을 것이다.
성필이 깨어났을 때, 신아름은 좋아하기보다 화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저희는 지금부터…….”
성필은 신아름이 섣부른 발언을 하지 않도록 그녀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오오치 선생님을 뵈러 갈 거예요.”
“가서 설득할 건가요?”
“노래를 들려드릴 거예요.”
“거기 그 아이가요?”
“아이가 아니라…….”
신아름이 발끈하려 할 때, 성필이 그녀의 손을 꼭 쥐며 그보다 먼저 말했다.
“그 아이(아노 코)가 아니라 아름이에요. 제대로 이름을 불러주세요.”
세이코는 갑자기 바뀐 성필의 분위기에 당황한 것도 잠시, 순순히 ‘아름’이라고 불러주었다.
“아름 씨가 부르는 건가요?”
그 질문엔 의심이 배어 있는 듯했다.
세이코는 오오치 작가가 자신을 섭외하려는 이유가 가창력 때문일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오치를 설득할 방법은 가창력뿐일 것이다. 그런데 데려온 게 백설하가 아니라 신아름이니,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네.”
“음…….”
옛날의 세이코였다면 ‘네가?’라며 업신여겼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그녀는 성장했다.
사람의 기분을 파악할 수 있…….
“되겠어요?”
파악할 수 없는 듯했다.
“돼요.”
성필은 별다른 말 없이 그렇게만 말했다.
세이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쿠 이사, 이 일은 꼭 맡도록 해요. 애니메이션은 굉장한 홍보 수단이에요. 캐릭터 파생 상품이나 팔아먹으려고 제작하는 쓰레기 애니메이션이 아니라면, 주제곡의 홍보력은 일본에 한해서만큼은 절대적이에요.”
“그 정도인가요?”
“다들 ‘웨스턴 불렛’이 성공할 거라고 말해요. 엄청 재밌는 모양이에요. 애니메이션이 망하기도 어렵겠죠. 필연적으로 주제곡도 인기가 있을 거예요. 그걸 따내는 게 소녀연맹이 새롭게 도약할 기회가 될 거예요.”
성필은 살짝 얼떨떨했다.
세이코는 일본 가요계에서 15년 이상을 지낸 만큼, 이쪽 업계의 생리에 빠삭할 것이다.
그러니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거겠지. 그런데 그걸 알고 있으면서…….
“저희한테 양보해주셔도 괜찮아요?”
성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세이코가 소녀연맹에게 호의를 보이는 이유는 어쩌면…….
‘아직도 나를 사랑하셔서.’
만약 그런 거라면 죄책감이 생긴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핑크 비즈니스를 펼쳐버렸다.
아니, 이 경우엔 블루 비즈니스라고 불러야 할까. 그런 단어가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양보라뇨.”
세이코는 너스레를 떨었다.
“애니메이션 주제곡은 오타쿠 같아서 싫어요. 그뿐이에요. 그리고, 제가 여기서 더 어떻게 유명해지겠어요? ‘앉으면 다다미 반 장, 누우면 다다미 한 장, 천하를 얻어도 두 홉 반’이에요.”
“1엔을 비웃는 사람은 1엔에 운다던데요.”
세이코가 놀란 눈으로 성필을 보더니, 그녀다운 오만이 배어 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정도 되면 1엔뿐이겠어요? 세상의 99%는 비웃을 수 있어요.”
레이와 최고의 가수니까.
“그럼, 가서 노래하세요.”
세이코는 신아름을 보며 말했다.
“소녀연맹의 신아름이라 말하세요. 레이와 최고의 가수가 인정한 퍼포머라고요.”
“……저를 인정해요?”
“서유선 같았어요.”
다키스트의 리더.
‘뉴아사’에서 보여주었던 신아름의 하이라이트 퍼포먼스는 분명히 서유선에게 닿았었다.
* * *
한적한 분위기에 단독 주택이 즐비한 부촌을 올라가자, 왠지 초라하게 보이는 3층 주택이 나타났다.
주변의 다른 집들과 달리 마당도 보이지 않고, 부지 전체를 집이 가득 채우는 구조였다. 그 때문에 집 자체가 답답해 보였다.
성필과 신아름은 대문이자 현관으로 이어지는 짧은 계단을 올라 문 앞에 섰다.
초인종을 누르자 어시스턴트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맞아주었다.
“들어오세요.”
그는 둘을 안쪽으로 안내하는 도중에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신아름이 신경 쓰이는 듯했다.
“선생님, 오셨습니다.”
오오치는 거실의 응접 공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차창 앞에 마련된 공간엔, 고풍스러운 테이블을 중앙에 두고 소파 두 개가 마주 보고 있었다.
그가 소파에서 일어나 성필에게 다가오며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와타나베 오오치입니다.”
“박성필 이사입니다.”
오오치는 성필과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맞잡은 손이 까끌거렸는데, 펜을 오랫동안 쥐어 굳은살이 박인 듯했다.
그는 성필의 뒤에 선 신아름을 흘끗했다.
신아름은 등의 기타 케이스를 고쳐 메더니 오오치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바로 시작할까요?”
“죄송하지만, 아름이한테 방을 하나 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준비할 시간이 필요해서요.”
“준비요?”
오오치는 잠시 의문을 표했지만, 연주를 위해 뭔가 준비할 게 있겠다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신아름을 멍하니 바라보는 어시스턴트를 불러 빈방을 안내하라고 지시했다.
“앉으시죠.”
오오치는 자신의 맞은편 소파에 성필을 앉혔다.
테이블 위엔 이미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손님 입장에서 뭐라고 할 건 아니지만, 보통 차는 뭘 마실 거냐고 물어보는데…….
‘불청객이란 건가.’
하긴, 오오치는 세이코가 오프닝을 맡아주길 바라니 성필과 신아름이 불청객으로 느껴질 만도 하다.
성필은 일단 주변을 둘러보았다.
타인의 집에 와서 이야기를 이끌기 위해선, 방을 살피는 것으로 대화 주제를 모아야 한다.
벽에 걸린 ‘웨스턴 불렛’의 일러스트가 보였다. 역시 만화 이야기로 시작해야 할까.
“‘웨스턴 불렛’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습니다.”
“그런가요. 다행입니다.”
오오치는 시큰둥했다.
작품을 칭찬하는 게 안 먹히는 타입인가.
‘아니면 한국에서도 유명한 게 당연하단 건가.’
일본의 만화계는 축구로 따진다면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음악으로 따진다면 미국의 팝 시장이다. 일본에서 최고라면 세계에서도 최고다.
어느 나라에서 유명하다, 그런 말은 칭찬으로 쓰기엔 너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일본에서 유명한 것 자체가 세계적인 인지도와 연결되니까.
‘아름이가 준비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조금이라도 선생님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야 해.’
상대의 기분을 맞춰주는 건 영업의 필수적인 기술이다.
심지어 이쪽에 부정적인 인물과 억지로 미팅을 잡은 경우라면, 아부를 해서라도 기분을 플러스로 맞춰야 한다.
작품 칭찬이 안 먹히니, 성필은 오오치를 칭찬하기로 했다.
‘난 선생님의 개인사를 모르니…….’
기본적인 사항은 숙지했으나, 그건 인터넷에 알려져 있는 수준이다.
그럼 오오치 자체보다 그의 직업을 띄워주는 쪽으로 나가는 게 좋을 듯했다.
‘누구든 자기 직업에 자부심이 있으니까.’
성필은 차로 혀를 적신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만화가는 굉장히 힘든 직업이죠? 어떤 작가의 에세이에서 읽은 건데, 집필은 상당한 육체노동이라고 표현하더라고요. 만화도 그렇겠죠?”
“그런 편입니다.”
“게다가 일본에서 주간 연재는 신의 영역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대단하십니다. 고작 일주일로 스토리며 글이며, 전부 완성해서 만화로 만드니까요.”
“만화와 연이 없으신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잘 알고 계시네요.”
“선생님 만화 덕분에 관심이 생겨서요.”
오오치는 머리칼을 크게 쓸어 넘기면서 한숨을 쉬었다. 기분이 안 좋다기보다, 무슨 말을 할지 고르느라 한숨을 쉰 기색이었다.
사람과 대화하는 데 피로를 느끼는 스타일인 듯했다.
“저희 업계 선배님, 선배 만화가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글을 쓰지 못하는 사람은 화가가 된다.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사람은 소설가가 된다. 둘 다 할 수 있는 사람은 만화가가 된다. 만화는 궁극의 종합예술이다,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너무 만화만 띄우는 말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성필은 미소를 지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정말 그러네요.”
“그 말은 뭐랄까, 명함이죠.”
“명함요?”
“만화가란 게 번듯한 명함이나 이름이 나오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럴듯하게 만화란 단어를 정의해서 마음속에 품는 거죠. 그게 곧 자존심이고,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아, 한국에도 그런 말씀을 하신 소설가가 계세요. 어렸을 땐, 다른 사람들이 용훼(容喙)하지 못하도록 소설을 정의하고픈 마음이 들었다고요. 소설가란 걸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었다고요.”
“그렇죠, 자신을 설명하고 싶은 거죠. 만화를 사랑해서…….”
갑자기 오오치는 눈가를 손바닥으로 비볐다. 피로감이 잔뜩 묻어왔다.
“‘웨스턴 불렛’을 좋아한다고 하셨죠?”
“네, 많이 좋아합니다. 소녀연맹 중에 리카라고 선생님의 굉장한 팬이…….”
“저는 제 만화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미소로 가득하던 성필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오오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다시 사랑하고 싶습니다.”
“……사랑하고 싶다뇨?”
“말 그대로입니다. 제 만화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다는데, 솔직히 감흥도 없고……. 이러면 안 되는데 말입니다.”
성필은 그가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지 눈치챘다.
“그래서 세이코 씨를?”
“네. 가후(歌侯) 세이코의 노래와 함께 거의 반평생을 살았습니다. 세이코의 노래를 사랑합니다.”
“세이코 씨가 시세리와 닮았단 건…….”
“사실 그 이유가 가장 크죠. 시세리와 닮은 사람, 제가 사랑하는 가수가 제 작품의 OST를 담당해준다면…….”
세이코의 노래에서 다정함을 느끼고, 위로받고, 감동했던 것처럼.
“다시 ‘웨스턴 불렛’을, 시세리를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저에겐 절박한 문제죠.”
오오치는 짐짓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소녀연맹이 유명한 건 압니다. 실력이 뛰어난 것도요. 저도 ‘뉴아사’를 봤습니다.”
세이코의 팬이라고 하니, 그녀의 복귀전이나 다름없던 ‘뉴아사’를 안 봤을 리 없다.
“그런데, 케이팝 아이돌의 퍼포먼스란 건 시각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까. ‘보는 음악’이라고 하죠? 밴드로 친다면, 악기 대신 춤을 택한 밴드 아닙니까. 그런데 애니메이션 오프닝엔 춤이고 퍼포먼스고 등장할 여지도 없고. 그러니 노래를 최우선으로 두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저희 애들의 노래에선…….”
다정함을 느낄 수도, 위로받을 수도, 감동받을 수도 없단 건가?
오오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연맹은, 제가 다시 시세리를 사랑하게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미리 사과드립니다.”
히무라가 오오치의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했던 말이 있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고.
인생에 한 번뿐일지도 모르는 행복이자 행운.
‘마지막 기회란 건 이런 뜻이었나.’
다시금 시세리를 사랑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리고 안타깝게도 소녀연맹으론 시세리에 대한 사랑을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오오치는 그리 판단했다.
“그럼…….”
성필은 굳었던 표정을 풀고 싱긋 웃었다.
“일단 봐주시긴 하는 거네요?”
오오치는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성필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해서 우울했다.
거절의 말을 전하는 건 익숙하지 않다.
혼신을 다해서 ‘죄송하다’란 말까지 했건만.
오오치는 한숨을 쉬곤, 혹여나 그가 기대감을 가질까 걱정하며 다시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세이코가 아니면 안 됩니다. 그런 예감이 강하게 들어요. 외엔 어떤 노래를 듣더라도…….”
“다 입었어요.”
신아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오치는 거북하게 숙였던 고개를 들어 그쪽을 보았다. 곧 그는 눈을 한계까지 뜨며 충혈될 것처럼 부라렸다.
“시, 세리…….”
그곳에 서 있는 건 시세리였다.
신아름은 가발을 쓰고, 동양과 서양의 혼혈처럼 보이도록 메이크업하고, 완벽하게 구현한 시세리의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오오치의 눈길을 끈 건, 그녀가 등에 메고 있는 기타였다.
오오치는 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벽에 걸린 ‘웨스턴 불렛’의 일러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5권 표지.
모닥불 옆에 앉아 기타를 치는 시세리다.
“노래하겠습니다.”
시세리가 노래한다.
“들어주세요.”
‘웨스턴 불렛’ 1기 오프닝.
휴머니티(Humanity, 인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