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79화 (479/760)

479화

“진짜예요? 불특정 다수 앞에서 저한테 저 괴상한 복장을 입힌다고요?”

“당장 그 말 취소해!”

괴상한 복장이란 말에 리카가 다시 날뛰었다.

[불특정 다수는 아니고, 원작자분한테 보여드릴 거야.]

성필은 어째서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갔는지 설명했다.

히무라의 이야기를 들은 성필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세이코가 뽑힌 이유가 시세리와 닮아서라면, 소녀연맹에게도 파고들 여지가 있다.’

소녀연맹 멤버들도 시세리와 비슷해지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원작자를 감탄시켜 일을 따내면 그만이다.

하지만 세이코가 시세리와 닮아서 일을 맡기고 싶단 원작자의 설명은 거짓말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성필은 히무라에게 연락하여 그게 진실인지 조사해달라고 요청했고, 답신이 왔다.

‘사실이다.’

어째서 만화 주인공과 비슷한 가수를 쓰고 싶은가, 솔직히 만화가가 아닌 성필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그렇기에 성필은 다른 방식으로 생각했다.

원작자는 마케팅, 프로모션적인 관점으로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노라고.

‘만화 홍보에 노래뿐이 아니라, 가수의 이미지까지 쓸 수 있는 거야.’

만화 주인공과 싱크로율이 엄청난 오프닝 가수.

분명히 화제가 된다.

가수의 팬까지 만화로 유입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화제성을 노리는 거라면, 소녀연맹도 뒤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은 건 소녀연맹과 시세리의 동일성, 즉 비슷하게 생겼느냐. 그로써 화제를 끌 수 있느냐.’

성필은 ‘웨스턴 불렛’을 집어들고 시세리의 외모를 자세하게 살폈다. 그리고 그나마 신아름이 가장 시세리와 닮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제가 시세리랑 제일 닮아요?”

신아름도 ‘웨스턴 불렛’ 1권을 읽은 적이 있다. 고작 몇 페이지였지만 말이다.

시세리의 외모가 자신과 비슷하단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애초에 만화 캐릭터란 건 데포르메가 심하여 현실 인물과 닮은꼴을 찾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시세리는 송나라, 그러니까 동양인과 서양인의 혼혈이야. 그 때문인지 시세리는 서양 쪽 등장인물들에 비해 눈이 날카롭게 표현되는데…… 방금 인종차별적인 발언 아니었지?]

“팀장님이 말하기 전엔 생각도 못 했어요.”

[그래, 아무튼 그렇게 표현되거든. 그래서…….]

“야 신아름, 아저씨가 너 보고 눈 작다는데?”

[아라야 그건 진짜 인종차별적 발언이야.]

“맨날 나보고만 뭐라고 해…….”

“진짜 내 눈이 작아서 날 고른 거예요?”

[아니! 날카롭게 표현됐다고 했잖아. 뭣보다, 원작자분은 시세리를 그릴 때 쌍꺼풀을 안 그려.“

캐릭터들의 눈 위에 그려지는 얇은 선. 그건 쌍꺼풀을 표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쌍꺼풀을 그리는 쪽이 미적 효과가 좋다. 그러나 시세리에겐 쌍꺼풀이 표현되지 않는다.

[아름이가 무쌍이잖아. 세세한 건 차치하고서라도, 아름이가 제일 시세리 이미지랑 어울려.]

“음,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시세리와 닮았단 말을 들어도 아무런 감흥은 없었다. 어차피 성필이 시키니 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럼 그냥 시세리 옷 입고 작가분한테 가면 돼요?”

[시세리 옷 입고 오프닝 연주, 노래까지 하자. 어쿠스틱 기타로 할 수 있지?]

“뭐…….”

신아름은 브레멘 음악대에서 퍼스트 기타를 맡고 있다. 주력은 일렉 기타이지만, 어쿠스틱 기타도 할 수 있다.

그냥 백설하가 연주하는 걸 몇 번 보기만 해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할 수 있어요.”

[진짜 시세리를 보여드리자.]

“근데 그렇게까지 해야 해요?”

[안 아까워? 연습 열심히 했잖아.]

소녀연맹 멤버들은 ‘애플 크러쉬’ 활동 중에도 ‘웨스턴 불렛’의 오프닝을 연습했다. 웨벡스 쪽에서 내건 조건이 ‘밴드 연주가 가능할 것’이었으니 말이다.

“딱히…… 그냥 노는 느낌이었고요.”

“또 아타시(나)만 진심이었지!”

“난 꽤 본격적으로 했는데?”

[그렇다는데?]

“알겠어요. 사실 나도 아까워요. 언제까지 연습하면 돼요?”

[최대한 빠르게.]

“내일도 돼요.”

[역시, 믿고 있어. 그럼 부탁해도 될까?]

“뭐든요. 저한텐 부탁 같은 말 안 써도 돼요.”

[고마워.]

통화가 끝났다.

끝나자마자 신아름은 핸드폰을 침대로 힘차게 던졌다. 아까 성필과 통화할 때의 온화한 모습은 전부 거짓말 같았다.

“세이코 그년이 또!”

신아름이 이를 갈았다.

어떻게 세이코는 번번이 소녀연맹의 앞길을 막기만 할까? 그녀가 없었으면 소녀연맹은 당연하단 듯 ‘웨스턴 불렛’의 오프닝을 맡았을 것이다.

“괜히 사람 귀찮게 하고 있어. 하여튼 인생에 도움 안 되는 년…….”

“제안이 있습니다!”

리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신아름과 조아라가 말해보란 듯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자 리카는 불만을 가득 담아 미간을 좁히더니.

“불공평해!”

* * *

“언니, 이거 읽어도 돼요?”

“응?”

화장대에 앉아 마스크팩을 바르던 백설하가 뒤를 돌아보았다.

장하양이 백설하의 책장에서 잡지를 하나 꺼내 들고 있었다. 이번 달의 ‘메트로폴리탄’이었다.

“응, 읽어.”

“감사합니다.”

“말 안 하고 읽어도 돼.”

장하양은 싱긋 웃곤 침대로 가서 잡지를 펴들었다.

‘메트로폴리탄’은 유명한 여성 잡지다.

보이그룹은 물론 걸그룹의 화보가 자주 등장하며 표지를 장식하는 경우도 많다. 예전에 케이어스가 표지 모델이 된 적도 있었다.

‘패션, 뷰티, 라이프 스타일, 트렌드, 커리어.’

잡지는 매달 많은 주제를 다루지만, 역시 가장 인기 있는 부분은…….

‘사랑.’

20대와 30대 여성을 주류 타깃으로 잡은 잡지답게 매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백설하도 이 때문에 메트로폴리탄을 매달 구매하고 있었다. 손혜빈은 그 이야기를 듣고 ‘잡지랑 인터넷 같은 걸로 남자를 배우지 말라’며 걱정을 표했으나, 어쨌거나 백설하는 메트로폴리탄 애독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장하양은 ‘후쿠요 히다카’ 패션쇼에 섰던 경험으로, 보그 코리아 정도만 구독하고 있다.

‘어디 보자.’

이번 호에선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을까.

[그와 나의 거리를 재는 법, 섹드립.

섹드립을 주고받는 이성 관계가 연인 관계로 발전할 확률이 높다는 통계 결과가 있다.]

“……?”

당연히 그런 말을 주고받을 정도이니 연인이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노골적인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 은유와 비유로 은은한 매력을 어필해보자!]

“…….”

장하양은 한숨을 쉬었다.

‘우리들의 프로듀싱’ 회의에서 회심의 개그를 쳤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정말 재밌어서 말했는데 반응이 영 좋지 않았었다.

장하양은 괜히 수치심이 몰려와서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남자에게 직접 물어봤다! 그이를 설레게 하는 말 베스트 10!]

오, 이 주제는 좀 관심이 가는…….

“긴급 소집이에요!”

리카가 언니 라인의 방으로 들이쳐왔다.

“패션쇼를 열 거예요!”

장하양은 잡지 너머로 리카를 흘끗 보더니, 다시 잡지로 눈길을 주었다.

백설하만이 어색하게 미소 지으면서 리카에게 반응해주었다.

“패션쇼라니?”

“소녀연맹의 최강자를 가리는 거예요!”

“콘텐츠 만드는 거야? 상헌 오빠가 부탁했어?”

“아뇨! 자자, 쌤도 언니도 일어나세요!”

백설하는 마스크팩의 권장 사용 시간 15분을 채우지 못했지만, 사랑스러운 동생이 잡아끌자 어쩔 수 없단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카는 이어서 침대에 누운 장하양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언니도 빨리요!”

“리카, 미안한데 지금은 별로 안 하고 싶어.”

“보상도 준비돼 있어요! 일본 여행이에요!”

“우리 곧 일본 가잖아.”

“그냥 일본 여행이 아니에요! ‘웨스턴 불렛’의 작가님을 볼 수 있다구요!”

“아하하, 뭐야 그게. 뵐 수 있어?”

“하이(네)!”

장하양은 리카의 볼을 사랑스럽단 듯 쓰다듬었다. 그러자 리카가 헤실헤실 웃었다.

리카는 ‘웨스턴 불렛’을 좋아한다. 그녀가 권유하여 장하양도 그 만화를 보았었다. 장하양의 취향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괜찮아. 난 리카가 우승하는 게 제일 기뻐.”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아타시(저)의 승리를 지켜봐 주세요! 박 이사님과 1박 2일 일본 여행을 따내는 저의 모습…….”

장하양이 벌떡 일어났다.

“보여줄게, 나의 인간성.”

장하양이 서부의 총잡이처럼 손을 허리춤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모델처럼 자세를 일자로 정렬하고 우아하게 한 걸음 내디뎠다.

“나의 아이돌리즘.”

* * *

리카는 신아름이 시세리 역으로 지명된 게 불만이었다. 성필이 그녀를 지목했다지만, 그건 직관적인 인상(人相)으로 결정한 것에 불과하다.

스타일링과 메이크업까지 하면 누가 가장 시세리에 걸맞을지는 모르는 것 아닌가?

그렇기에 신아름이 지정된 건 불공평하다.

공평하기 위해선, 시세리 코스프레 대회를 개최해야만 한다.

그 첫 번째 타자는 조아라가 됐다.

“에에, 아라쨩한텐 옷이 안 맞네.”

조아라가 만든 시세리의 옷은 안타깝게도 그녀에게 맞지 않았다.

당연했다.

원래 리카가 입으려고 만든 옷이었으니 말이다.

만화에서 시세리의 복장인 딱 달라붙는 크롭티는 조아라에게 맞지 않고 헐렁헐렁 내려왔다.

조아라는 시선을 내려, 에어컨 바람에 나풀거리는 크롭티를 바라보았다.

‘X발.’

그때 신아름이 손가락을 튕기곤 서랍에서 핀을 가져왔다. 그리고 크롭티의 등 부분을 꽉 당겨 핀으로 고정했다.

그제야 사이즈가 맞았다.

‘X발.’

다음은 청바지였다.

바지 길이가 안 맞는 건 둘째치고.

“지, 지퍼가 안 잠겨……!”

조아라는 청바지의 지퍼 손잡이를 붙잡고 혼신의 힘을 다해 위로 올리려 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 힘을 주는데도 쉽지 않았다. 백설하가 걱정스럽게 조아라를 만류했다.

“아라야 그러다가 터지…….”

“뭐가 터져요?!”

“흐익!”

결국 조아라는 바지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단추까지 닿으려 했다.

“아라쨩 야메로(그만해)! 더 이상 했다간 바지가 망가져버렷!”

“안 망가져!”

“더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엇!”

“내가 만들었거든?! 내가 제일 잘 알아!”

조아라는 기어코 단추까지 채웠다.

그것을 본 신아름이 헛웃음을 뱉었다.

“바지 터지겠다 진짜.”

“지랄 마라. 이거 원래 스키니진이다.”

안타깝게도 신아름의 진단이 정확했다.

조아라가 시세리의 바지를 입으니 스키니진을 넘어서 아예 피부 그 자체가 되어버릴 지경이었다.

리카가 감탄했다.

“항상 눈으로만 봐서 몰랐는데 아라쨩 정말 아타시(나)보다 하체가…….”

“거기서 한마디만 더 해봐.”

“히잉.”

“조아라 너 그거 빨리 벗어. 피 안 통해서 발 빨개졌잖아.”

“사진이나 찍어.”

조아라는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한쪽 어깨에 망토를 걸쳤다. 그리고 오른손에 리카가 산 장난감인 리볼버 권총을 쥐었다.

그녀가 포즈를 취하려고 안간힘을 다해 다리를 움직였다.

“빨리 사진!”

찰칵 찰칵.

장하양이 몇 장을 찍자마자 조아라가 드러누워 비명을 질렀다.

“빨리 바지 벗겨!”

“아라쨩 엣찌(음란)!”

“빨리! 뒤지겠다고!”

벗겼다.

조아라의 피부에 청바지가 압박한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조아라가 다리를 붙잡으며 고통을 호소했다.

“피, 피가 안 통해! 저려! 누가 좀 주물러 줘!”

조아라, 리타이어.

조아라는 구석으로 물러나 리카에게 마사지를 받았다.

다음은 장하양이었다.

그녀는 손쉽게 상의와 하의를 입었다. 리카와 체형이 비슷했으니 조아라처럼 고생하지 않았다.

“하양 언니 멋져요!”

“아하하.”

복장을 점검한 장하양의 눈빛이 변했다.

사람 몇 죽여본 듯 그녀의 눈동자에 조용한 불길이 일렁였다. 그녀는 홀스터에 꽂힌 리볼버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다들 침을 꼴깍 삼켰다.

장하양이 침묵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이 흘렀다. 곧 있으면 그녀가 권총을 뽑고 OK목장의 결투가 시작될 것만 같았다.

“찍어.”

“네, 넵.”

신아름은 자기도 모르게 긴장해서 조심조심 셔터를 눌렀다.

찰칵, 찰칵.

플래시가 번쩍일 때마다 장하양이 물 흐르듯 포즈를 바꾸었다. 하나같이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시세리란 캐릭터를 이해하지 않곤 나올 수 없는 표정과 포즈들이었다. 마치 며칠 동안 거울만 보고 포즈 연습만 한 사람 같았다.

“언니 다크호스(dark horse)예요! 예상치 못한 강적이네요!”

“아하하, 화이트호스(White horse) 아니야?”

“…….”

“하양…… 이니까…….”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장하양이 시무룩해져선 옷을 벗었다.

다음은 백설하였다. 그녀도 조아라와 비슷한 곤란을 겪었다. 하의가 아니라 상체에서.

“이, 이거 나한텐 안 맞는 거 같은데…….”

침묵.

“얘들아?”

멤버 전원 미술관에라도 온 듯 백설하를 감상했다. 백설하가 당황해서 쭈뼛쭈뼛 멤버들을 살피던 순간, 조아라가 조각상을 평하듯 조용히 읊조렸다.

“신아름 저기 보여?”

“어.”

“삐져나왔어.”

“어.”

“어라……?”

장하양이 혼란스럽단 듯 머리를 부여잡았다.

“분명 유이 언니가 옷은 슬렌더일수록 잘 어울린댔는데? 어째서? 마하라 디자이너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왜……?”

“아, 안 어울리나, 헤헤.”

백설하는 창피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주섬주섬 망토를 벗으려던 순간, 신아름이 옆에 선 리카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리카가 기계처럼 퍼뜩 반응했다.

“쌤 엄청 멋져요!”

“으, 응?”

“맞네, 쌤이 지금까지 중에 제일 잘 어울린다.”

“아, 그래……?”

“언니 최고예요.”

“에, 에헤헤.”

멤버 전원 한마음 한뜻이 되어 백설하를 추켜세웠다. 백설하는 아까와는 다른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포즈 취해볼까요?”

취했다.

“와, 미쳤다. 진짜 좋다. 더 과감하게.”

더 과감하게 했다.

그렇게 신아름의 핸드폰엔 백설하의 사진만 100장 넘게 담겼다. 다들 모여 그것을 감상했다.

리카가 감탄했다.

“이거 일본에서 화보집으로 내면 10만 권 이상 팔려! 대히트 확정이야!”

“그으, 그 정도야?”

“아타시(제)가 보증해요! 프로듀서로서의 감이 발동했어요! 침체된 일본, 이에(아니)! 전 세계의 출판 시장을 되살릴 단 하나의 빛이 보였어요!”

다음 차례는 리카였다.

조아라가 시세리 옷 자체를 리카에 맞춰 만들었다 보니, 핏은 그녀에게 가장 잘 맞았다.

그런데 뭐라고 할까…….

“어때! 아타시(나)의 카리스마를 봐!”

“그냥 리카인데?”

“손나(그런)! 자, 잘 보라구!”

리카는 여러 포즈를 취했다.

총구에 입바람을 불거나, 침대를 한 발로 밟고 서거나, 뒷태를 보이기도 했다.

“그냥 리카인데?”

“손나 바카나(그런 바보 같은)?!”

리카의 개성이 워낙 강하다 보니 캐릭터가 묻힌다. 그건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리카가 유독 더했다.

외모에서부터 개성 덩어리다.

‘애플 크러쉬’ 활동으로 헤어스타일도 히메컷으로 바꾸었다 보니, 시세리의 옷을 입어도 그냥 코스프레 한 아이돌로 보일 뿐이었다.

리카는 잔뜩 실망해선 옷을 벗었다.

그것을 보며 장하양은 내심 승리를 확신했다.

‘가장 강한 적은 리카였지만, 결국은 이렇게 됐네.’

리카는 연기를 배웠었다. 그렇다 보니 시세리의 분위기를 잘 연출하리라 예상했었지만, 외모란 재능에 막혀버렸다.

‘리카, 미안해.’

이 세상에는 감히 나눌 수 없는 게 셋 존재한다.

첫 번째, 사랑.

두 번째, 승리.

세 번째, 권력.

‘승리는 오직 나만의 것.’

이 순간을 위해, 장하양은 ‘후쿠요 히다카’ 패션쇼에 서서 아우라를 깨우쳤을지도 모른다(아님).

장하양은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준 모든 것에 감사를 전했…….

“와.”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장하양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단 것을 눈치챘다. 황급히 이 사태의 원인을 눈에 담는 순간.

“……!”

시세리가 서 있었다.

신아름은 사선으로 숙였던 고개를 살짝 들었다. 모자의 챙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눈빛이 드러났다.

날카롭게 쏘아보는 눈에선 사냥꾼이 가질 법한 냉혹함과 철두철미함이 서려 있었다.

신아름은 대단한 포즈도 취하지 않았다. 팔을 느슨하게 내리고, 깔끔하게 뺀 골반에 손을 걸친 채였다.

권총 근처에 위치한 손은 언제라도 적을 향해 납탄을 박을 준비를 마친 듯했다.

“…….”

장하양은 천천히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절감했다. 재능은 이길 수 없단 사실을.

“와, 걍 네가 해라.”

다른 멤버들은 물론 조아라마저도 감탄했다.

“눈이 딱 시세리네.”

“나 눈 안 작다고!”

“눈 얘긴 하나도 안 했거든. 근데 아저씨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 걍 있을 땐 몰랐는데 옷 입으니까 네가 딱이야.”

“눈 안 작다고오……!”

소녀연맹 시세리 코스프레쇼의 우승자는 신아름이 됐다.

신아름이 물기 담긴 목소리로 성필에게 전화를 걸어 ‘저 진짜 눈 작아요?’라며 칭얼대긴 했으나, 어쨌건 그녀가 일본으로 가게 됐다.

작은 이벤트 속 남은 건 멤버들의 코스프레 사진뿐이었다.

“이렇게 가만히 놔두기엔 아까워!”

“어쩌게?”

“SNS에 올리자!”

확실히, 이왕 분위기를 냈는데 멤버들끼리 묻어두기도 뭣하다.

“쌤 것만 빼고!”

“……왜 나만?”

“저희 계정이 정지당해버려요!”

다음 날, 멤버들은 민경섭에게 사진을 가져갔으나 단칼에 거절당했다. 소녀연맹의 이미지를 해칠 수 있단 이유에서였다.

“이건 저희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위예요! 회의에 정식 안건으로 올릴 것을 요청합니다!”

“그래, 뭐, 그럴게.”

추후 매니지먼트팀에서 적절한 판단 후 사진 게시를 결정하기로 한 것으로, 작은 이벤트는 막을 내렸다.

* * *

“세이코, 정말 안 할 거야?”

웨벡스 내부의 휴게 시설 중 하나인 아티스트 라운지. 오직 뮤지션들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현재는 세이코 홀로 전세 내듯 쓰고 있었다.

대선배인 세이코가 들어오자마자 다들 눈치를 보며 나갔기 때문이다.

그녀는 기다란 소파에 사선으로 걸터앉아 음료를 쪽쪽 빨았다.

“오오치 선생님께서 직접 오시기까지 했잖아.”

오오치는 ‘웨스턴 불렛’의 작가이다.

그는 오프닝 가수 섭외가 난항을 겪고 있단 소식을 듣자마자 세이코를 직접 볼 수 있겠냐고 물어왔다.

가수사업부는 반색하면서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펼쳐진 건, 오오치의 진심 어린 애원이었다.

“제발 부탁한다고까지 하셨어. 대단한 작가님이야. 그렇게까지 단칼에 잘라 거절할 건 없잖아?”

“저어기, 매니저.”

세이코는 음료를 테이블 위에 쿵 올려두었다. 매니저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몇 번이나 싫다고 거절했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려온 매니저가 잘못일까, 아니면 단칼에 거절한 내 잘못일까?”

“그, 그건…….”

“내가 싫어하는 걸 무례하지 않게 자르라고 매니저가 있는 거 아니야?”

매니저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궁색한 변명이나마 덧붙였다.

“다, 담당 가수를 더 좋은 길로 안내하는 것도 매니저의 일이야.”

“좋아.”

“응?”

“더 좋은 길? 어떤 의미에서 더 좋은 길인데?”

갑자기 세이코의 태도가 확 바뀌었다.

매니저는 갑자기 찾아온 기회에 머뭇거리다가, 겨우 생각난 한마디를 뱉었다.

“더 유명해질 거야.”

“유며엉?”

세이코가 어이없단 듯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여기서 어떻게 더 유명해지는데?”

순식간에 매니저의 입이 다물어졌다.

세이코는 이제 됐단 듯 턱을 까딱했다.

매니저는 이 이상 세이코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아티스트 라운지를 나섰다.

홀로 남은 세이코는 닫히는 문을 바라보더니 혀를 찼다.

‘그 일을 받아들이면 내가 뭐가 돼?’

소녀연맹의 일을 빼앗은 게 되지 않은가.

안 그래도 히무라가 굉장히 곤란해하고 있다. 하필 세이코에게 키가 넘어와 더욱 곤란해하고 있다.

‘작년에 벌어졌던 뉴아사의 되풀이잖아.’

정해진 파이를 가지고 한 회사에서 싸우는 모양새다. 세이코는 다신 그런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성필에게 폐가 된다.

오오치라는 만화가에겐 미안하지만, 세이코는 계속 강경히 거절해야만 했다.

물론 그가 눈물을 글썽이며 부탁할 땐 마음이 살짝, 아주 살짝 흔들리긴 했지만 말이다.

‘마음 굳게 먹어야 해.’

소녀연맹이 결국 오프닝 건을 따낼 때까지, 세이코는 버티고 또 버틸 것이다.

그리고 훗날 이 일이 가로 엔터에 알려지면…….

‘세이코 씨, 그렇게나 저희를 배려하셨다니. 가로 엔터 프로듀싱 총괄 이사 박성필, 감동했습니다. 결혼하죠. 그럼 따로 귀화시험을 볼 필요도 없겠죠?’

세이코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세이코가 기다렸단 듯이 폰을 확인했다.

[도착]

세이코는 웨벡스 1층 홀의 안내 데스크 직원에게 미리 이 일을 부탁해두었다.

‘도착, 드디어.’

성필이 웨벡스로 왔다.

그가 ‘웨스턴 불렛’ 애니메이션 건으로 일본을 방문하리란 건 들었다.

‘아마 나한테 오겠지?’

이 일의 키를 쥔 건 세이코 자신이니까.

세이코는 손을 풀면서 어깨를 뚜둑뚜둑 꺾었다.

‘어디, 오랜만에 파쿠 이사를 감동시켜(지금까지 감동시킨 적 없음) 볼까?’

세이코는 여유롭게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그 모양새가 고대 아시리아의 여왕처럼 오만하고도 위품이 흘렀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익숙하지 않은 폼 잡기 때문에 슬슬 몸이 저려왔다.

‘……30분 지났는데?’

계단으로 올라오기라도 하는 것일까? 아니, 아무리 계단이더라도 30분이나 걸리진 않는다.

세이코는 안절부절못하다가 히무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 이사님은 에스타스를 만나러 갔습니다.]

“에스타스? ‘웨스턴 불렛’ 일로 온 거 아니야?”

[우선순위가 있지 않을…….]

“둘만 얘기할 땐 존댓말 때려치워! 괜히 얘기하는 시간만 길어지잖아! 본론이나 말해!”

[말했는데에…….]

세이코는 거칠게 전화를 끊고 에스타스가 사용하는 연습실로 향했다.

화난 듯 성큼성큼 걷는 그녀를 향해, 복도에서 마주치는 누구도 인사할 생각을 못 했다.

‘감히 나를 놔두고 에스타스를 먼저 찾아가? 오랜만에 일본에 왔으면서?! 무슨 속셈이야!’

상식적으로 에스타스를 먼저 찾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 도중에 성필은 에스타스를 만났고 그 발랑 까진 애들이 달라붙은 것이다.

감히 가후 세이코의 손님을 중간에 붙들어?!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이런 식으로 뒷통수(아님)를!

“너희들……!”

연습실 문을 쾅 열어젖힌 세이코는 당황했다.

“으에에에에에엥!”

하염없이 우는 에스타스의 리더 유미, 그 근처에서 유미를 달래는 에스타스의 멤버들.

그 앞에 서서 쩔쩔매고 있는 성필, 그리고 신아름.

세이코의 뇌세포는 이 상황을 빠르게 분석할 수 없었다. ‘음? 음?’이란 이상한 목소리만 내던 세이코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다가 말했다.

“나중에 올게요!”

“으아아아아아아앙!”

유미, 하염없이 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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