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8화
“원작자분이 반대하시는 거면, 소녀연맹이 못 맡는 게 확정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강행이 가능합니다.]
성필은 강행이란 단어에서 좋지 않은 뉘앙스를 느꼈다.
원작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소녀연맹을 오프닝 가수로 섭외할 경우 리스크가 발생하리란 뜻이겠지.
[웨벡스는 ‘웨스턴 불렛’ 제작위원회 중 가장 많은 자본을 투자했습니다. 게다가 유일하게 뮤직 비즈니스를 담당하고 있으니, 주제곡 가수 정도는 얼마든지 저희가 정할 수 있죠.]
“그렇지만, 원작자분을 무시해서 좋을 건 없죠?”
[그런 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히무라의 설명은 이러했다.
‘웨스턴 불렛’은 히트 작품이다.
이번에 제작되는 1기 이후 후속 시리즈가 제작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리고 현재의 제작위원회가 얻어낸 판권은 어디까지나 1기 분량만이다.
이후 2기가 제작된다면, 원작자는 자신의 의견을 무시한 웨벡스에 반감을 품고 판권을 넘기지 않을 수도 있다.
“애니메이션이 성공할 거라고 확신하시네요.”
[저는 잘 모르지만, 다들 그렇게 예상하는 듯합니다.]
성필이라도 그럴 것이다.
리카에게 빌려 읽은 ‘웨스턴 불렛’은 성필의 하루를 삭제시킬 만큼 재밌었다.
[물론 투자 자체가 웨벡스의 본업은 아닙니다. 애니메이션 하나 정도 안 맡으면 뭐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이걸 어떻게 설명드려야 할지…….]
히무라는 한참 뜸을 들이더니, 당시의 상황을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했다.
[원작자분이 위원회 회의 도중 찾아오셔서 허리를 굽히셨습니다.]
“……그렇게나 소녀연맹이 싫으시대요?”
[그보다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 작품이 애니메이션화되는 건 무엇보다 기쁜 일입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감사 외에 드릴 게 없습니다.
이 일은 제 꿈이었습니다.
어쩌면 제 삶에 단 한 번 있을 행운입니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제 인생에 다시 없을 행운과 행복에, 제 작품의 애니메이션에, 제가 바라는 가수를 섭외해주세요.
[애절하더군요.]
그럴 것이다.
혼을 깎아 만든 작품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다. 자식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새로운 탄생에, 작가는 본인이 바라는 최고의 가수를 쓰고 싶은 것이다.
[자본의 논리는 제쳐두고, 원작자의 마음을 무시한 채 일을 강행하는 게 옳은가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의적인 차원에서요.]
“확실히…….”
성필도 원작자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뮤직비디오 감독인 조정훈이 성필의 프로듀싱 의도를 무시하고 ‘맡겨주셨잖아요?’라면서 본인만의 작가주의를 고수한다면, 성필은 피눈물을 흘릴 것이다.
어쩌면 평생에 다시 없을 행운이자 행복…….
무거운 단어다.
[일본에선 아이돌이란 단어가 한국보다 가볍습니다. 뮤지션보다는 엔터테이너에 가깝죠. 케이팝 아이돌이라지만, 그쪽 분야에 문외한인 작가분은 아이돌이란 말만 듣고도 경기를 일으키셨을 겁니다.]
“그럼 최소한 저희 애들의 작품을 보여드리고 설득할 수는 없을까요?”
[그게, 위원회 사람들도 작가분의 생각에 동의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원작자의 애절한 고백이 통했던 것일까?
아니면…….
[작가분이 지목한 가수가 세이코 씨입니다.]
“……세이코?”
[네.]
“후나비키 세이코?”
[맞습니다.]
성필은 그제야 상황 파악을 끝냈다.
어째서 위원회 사람들이 원작자에게 동조했는지 알겠다.
세이코는 일본에서 가후라 불릴 정도의 실력자인데다, 웨벡스 사무소 소속이니 소녀연맹과 별다른 차이도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어차피 같은 회사 소속 아티스트니 웨벡스도 불쾌하지 않으리라 판단했으리라. 아이돌보다야 진짜배기 가수가 나으리란 계산도 들어 있을 것이고.
“그럼 뭐…… 아쉽지만 포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네요.”
성필은 히무라가 왜 연락했는지 이해했다.
그는 아마 ‘소녀연맹은 이 일을 맡지 못하게 됐습니다’란 말을 길게 돌려 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렇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허나 성필의 예상이 빗나간 듯, 히무라는 포기란 단어를 꺼내지 않았다.
[첫째, 세이코 씨가 이 일을 맡고 싶지 않아합니다.]
“으엉?”
[둘째, 세이코 씨가 이 일을 맡는 순간 제작비가 껑충 뜁니다. 적어도 현재 모인 자본만으로 세이코 씨에게 일을 맡길 순 없습니다.]
“그, 그렇게 몸값이 비싼가요? 세이코 씨가?”
[현재 일본 상황을 잘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아니, 어느 정도는 안다.
가로 엔터 A&R팀은 매일 세계 각국의 차트를 확인하며 트렌드를 익히니 말이다.
그중엔 당연히 오리콘 차트도 있다.
세이코의 곡이 장기집권한단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런데, 성필이 짐작하는 이상으로 세이코가 성공한 건가?
[세이코는 제2의…… 제3의……? 아무튼 또 전성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대외비로 자세하게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만, 세이코의 몸값은 일본에서도 천장을 찍었습니다.]
그런 세이코에게 곡을 불러달라고 하는 거니, 보통 돈이 많이 드는 게 아닐 터다.
[셋째,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위원회에 속한 놈들이, 실례. 속한 분들이 ‘우리가 남이가’ 작전을 쓰고 있습니다.]
히무라는 ‘우리가 남이가?’만 한국어로 말했다.
“이해가 확 되네요.”
[어차피 웨벡스 소속인데 꼭 정가를 다 지불해야 하냐는 겁니다. 우리의 성공이 곧 웨벡스의 성공이니, 노래 한번 불러주는 게 뭐 그리 어렵냐고. 웃기지 말라 하십쇼. 그깟 컴퓨터 만드는 일이 노래 부르는 것보다 더 고귀해? 우린 뭐 딴따라란 거야?]
히무라는 속에 쌓인 한이 많은 듯했다. 그는 한동안 푸념을 내뱉곤 깊이 심호흡했다.
[결론은, 세이코 씨를 부르는 게 쉽지 않단 겁니다.]
“어…… 그럼 저희 애들이 맡나요?”
[그런데 그 부르기 어려운 세이코 씨를 부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웨벡스 내에서요. 가수사업부입니다. ‘웨스턴 불렛’이 성공할 걸로 보이니, 어떻게든 밀어 넣겠단 겁니다.]
“진짜 복잡하게 꼬였네요.”
이해관계가 회사 외부와 내부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제작위원회, 원작자, 소녀연맹, 세이코, 히무라, 가수사업부, 기타 등등.
마치 실패한 사랑의 작대기 같다.
히무라는 저쪽도 신경 쓰고 이쪽도 신경 쓰느라 신경이 많이 쇠해 있을 것이다.
[그리도 또 문제는 세이코 씨가 이 일을 맡기 싫어한단 거고요.]
“……?”
뭐 어쩌란 거지?
성필은 진심으로 히무라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된단 건가 안 된단 건가.
하란 건가 말란 건가.
갈피가 안 잡혔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건 삼각관계입니다.]
소녀연맹은 원작자의 허락을 바라.
원작자는 세이코를 바라.
세이코는 애니메이션 주제곡은 부르기 싫어.
[키가 어디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이 모든 일을 해결할 명분은…….]
“원작자님이네요.”
[네. 그분만 마음을 바꾸면 알렉산더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자른 것처럼 간단히 해결됩니다.]
“그렇네요.”
[그렇습니다.]
“어떻게 설득하는데요?”
[그 조언을 얻고자 합니다.]
“…….”
진짜 어쩌란 거지?
하지만 성필은 어떠한 상황에서건 평정을 잃지 않는 유능한 프로듀서다.
히무라가 조언을 구해왔으니 그에 걸맞은 해답을 찾아낼 생각이다.
만약 히무라가 ‘아쉽지만 이 건은 포기해야겠어요’란 답을 바라는 게 아니라면, 성필도 애니메이션 주제곡 일을 잃고 싶지 않았다.
‘우리 애들은 더 성공해야 해.’
홍보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한다.
그 효과가 좋으면 어떤 가시밭길을 헤쳐서라도 나아갈 생각이다.
“일단 원작자분이 왜 세이코 씨를 선호하는지부터 알아야겠어요. 그게 저희가 이 난국을 타개할 빈틈의 실이 될 겁니다.”
[세이코 씨가 ‘웨스턴 불렛’ 주인공인 시세리를 닮았다고 하더군요.]
“빈틈의 실이고 뭐고 하나도 안 보이잖아요!”
[그렇긴 합니다…….]
아니, 외모로 찍었다는데 성필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세이코의 실력을 보고 반했단 이유라면 미니 ‘뉴아사’를 펼쳐볼 각이라도 보이지, 이건 답이 없다.
“그런데 실장님, 시간이 촉박하지 않아요? 제가 애니는 잘 모르지만 노래가 빨리 나와야 오프닝을 그릴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데모곡이 있잖습니까.]
“아, 그렇네요.”
소녀연맹 멤버들도 그 데모곡을 받아 앨범 활동 기간 중 짬짬이 연습해두었다.
[오프닝 장면은 진작 완성해뒀습니다. 레코딩만 하면 됩니다.]
성필은 일단 상황을 인지했으며, 좋은 수가 생각나면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히무라의 긴급 보고를 받고 난 성필은 다시 회의실로 돌아갔다. 들어가자마자 이재호와 손혜빈이 무슨 일이냐고 묻기에 설명해주었다.
“그래?”
손혜빈과 이재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애니메이션 오프닝 같은 거 맡아도 그만 안 돼도 그만이란 생각이겠지.
어쨌거나 아이돌 활동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이벤트 같은 것이었으니까.
성필은 성과 확인 회의를 마친 후 민경섭에게 가서 사정을 설명했다. 매니지먼트팀이 웨벡스와의 협력을 담당하니, 알려두어야만 했다.
“어…….”
성필의 예상대로 민경섭은 난색을 표했다. 그는 몇 초 고민하더니 허탈하게 웃었다.
“우리가 할 게 있긴 해요?”
“없는 거 같아.”
“음, 제가 일본으로 가서 필사의 설득 펼쳐볼까요?”
“일본어 할 줄 알아?”
“기모찌이이(기분 좋아)!”
성필의 마음속에서, 민경섭은 매니지먼트 이사 자리에서 탈락했다. 농담이고, 그의 말마따나 가로 엔터가 손써볼 도리가 없었다.
“형, 사실 저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하나 있거든요. 근데 조금 비인도적인 방법이에요.”
“말해봐. 우리 애들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 가릴 생각 없어.”
“세이코 씨는 이 일을 거부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세이코 씨가 속한 부서에선 일을 맡아줬으면 하는 거고요.”
“그치.”
“이 둘 사이의 관계에서 긴장이 발생하네요. 세이코 씨가 맡을 가능성이 있으니, 저희 애들에게로 일이 바로 넘어오지 않는 거고요. 그럼 아예 세이코 씨가 받는다는 가능성을 없애는 게 관건이겠네요.”
성필의 예상과 달리, 민경섭은 정말 번쩍이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인과관계를 모두 정리한 민경섭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진중히 말했다.
“형이 세이코 씨한테 가서 무릎 꿇고 ‘안 맡아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하면서 손등에 입 맞추면 어떨까요?”
“으하핳!”
잠시 후.
“에, 경섭 오빠 피곤한가요?”
매니저 대기실로 온 리카가 민경섭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민경섭은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죽은 듯 쓰러져 있었다.
“요즘 일이 많아서 힘든가 봐.”
“박 이사님 악덕 상사예요!”
“맞아.”
“인정?!”
“여긴 왜 왔어?”
“동대문 시장 갈 거예요! 태워주세요!”
아이돌의 일상생활을 보조하는 것도 매니저들의 주요한 업무이다. 홀로 돌아다니다간 가끔 정체를 들켜 곤욕을 겪기도 하니 말이다.
예를 들어 정말 바빠서 몰려드는 팬들을 무시하고 걸음을 재촉했는데, 후일 싸가지가 없단 소문이 퍼질 수도 있다.
그럴 땐 매니저가 즉각 개입하여야 한다.
그렇기에, 리카의 사소한 외출에도 매니저가 동행하는 것이다.
“이상 씨, 지금 돼요?”
“저는 30분 후에 아라 씨 일 있어서요.”
“수희 씨는?”
“네, 제가 갈게요.”
리카는 ‘에에, 오랜만에 박 이사님 차 타고 싶었는데’라며 툴툴댔다.
바로 갈 것 같았던 그녀는 잠시 수다라도 떨겠다면서 한 자리를 떡하니 차지했다.
“그런데 박 이사님이 여기 웬일이신가요?”
“내가 여기 있는 게 이상해?”
“프로듀서 박 이사님은 매니저 대기실 안 오고 싶다면서요! 매일 경섭 오빠한테 ‘윽, 매니저 냄새……’라고 하시면서!”
대기실의 매니저들이 미어캣처럼 성필에게로 고개를 홱 돌렸다. 순식간에 수 명의 시선을 받자 성필은 화들짝 놀랐다.
“내가 언제 그랬어!”
“넵, 가짜뉴스였습니다!”
“리카, 넌 최고의 아이돌이야.”
“에, 갑자기 그런…… 헤헤, 당연한 거 아닌가요!”
“가짜뉴스야.”
“손나(그런)!”
리카는 ‘히도이(너무해)!’라 외치면서 성필의 어깨를 마구마구 토닥였다.
“그래서 여긴 왜 계시나요!”
“일 때문에 있지 왜 있겠어.”
그냥저냥 넘기려던 성필은, 괜히 나중에 리카가 실망하지 않도록 미리 애니메이션 주제곡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쩌면 못 맡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끼에에에엑!”
리카가 머리칼을 쥐어뜯으면서 사방팔방 비명을 내질렀다.
“손나 바카나(그런 바보 같은)! 아타시(내)가 얼마나 기대했는데! 인생에서 기대한 일 TOP10 안에도 들었는데! 친구들한테도 자랑했는데에에엨!”
성필은 리카의 발광을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얼마나 기대했으면 저토록 광기에 젖어 몸을 부들부들 떨어댈까?
전생에서 케이어스의 첫 단독 콘서트 티켓팅을 실패한 성필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 그렇게 속상해?”
“속상? 속상?!”
리카가 대기실을 뛰쳐나갔다.
그러자 민경섭이 테이블에 박았던 머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형, 리카 잡으러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러다가 뭔 일 저지르겠는데요?”
“무슨 리카가 범죄자라도 되는 것처럼 말해. 저지르긴 뭘…….”
리카가 리볼버 권총을 가지고 대기실로 돌아왔다. 매니저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책상 아래로 몸을 숙였고 민경섭은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죽은 척했다.
“당연히 속상하죠! 시세리가 너무 너무 너무 좋아서 권총도 샀는데! 시네에에(죽어어어)!”
비비탄이 딱딱 소리를 내며 성필에게로 발사됐다. 비비탄은 성필이 입은 얇은 재킷조차 뚫지 못하고, 재킷에 닿자마자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나(그런)!”
“위험하니까 사람한테 쏘지 마.”
“이게 내 인간성이다아아아앗!”
리카가 ‘웨스턴 불렛’의 명대사를 외치며 비비탄을 몇 발 더 발사했다. 당연히 성필에겐 통하지 않았다.
“망할 풍수기관!”
그 순간 성필이 리카의 권총을 홱 낚아챘다.
“에.”
그리고 총구를 리카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순식간에 리카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 고멘나사이 고멘나사이 고멘나사이 고멘나사이 고멘나사이……!”
성필은 픽 웃으면서 멋들어지게 리볼버를 돌려 리카에게 내밀었다.
“봐, 이거 겨눠지면 꽤 무서워. 앞으로 이러면 안 된다?”
“하이(네)…….”
“오프닝 건은 내가 노력해볼게.”
리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김수희 매니저와 대기실을 떠났다. 민경섭은 죽은 척을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히 희망 주는 거 아니에요?”
“그럴지도.”
단지, 성필은 절망한 리카의 기운을 조금이라도 차리게 해주고 싶었다. 언뜻 장난스럽게만 보였지만, 리카는 실망한 티가 역력했으니까.
“노력한단 건 거짓말 아니야.”
“어쩌게요?”
“생각해야지.”
진지하게.
* * *
숙소, 동생 라인의 방.
리카는 우울한 눈으로 바느질하는 조아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아라는 옛날 리카의 부탁대로 ‘웨스턴 불렛’의 주인공인 시세리의 복장을 만들고 있었다.
“여긴 됐고.”
조아라는 면도칼을 꺼냈다. 그리고 청바지에 대고 긁기 시작했다. 인위적으로 스크래치 디자인을 만드는 것이다.
조아라는 스마트 패드에 띄운 시세리의 복장을 유심히 관찰하며, 청바지 스크래치를 최대한 그럴듯하게 재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도중, 조아라는 한숨을 쉬며 침대에 앉은 리카를 올려다보았다.
“또 뭐. 왜 그래? 뭐 마음에 안 드냐?”
“이에(아니)…….”
리카는 두 눈을 질끈 감더니, 울먹이면서 조아라에게 안겼다.
“아라쨩 고멘(미안)!”
“미안하면 내 배에 얼굴 부비는 거나 그만둬라.”
사정을 들은 조아라는 흥미 없단 표정이었다.
“그래, 아쉽네.”
“아쉽네? 그게 끝?! 아라쨩은 기대되지도 않던 거야? 또 나만 진심이었지!”
“어, 너만 진심이었어.”
리카는 조아라가 만든 시세리의 코스프레 복장을 황망히 바라보았다.
“이제 이것도 쓸모없어……. 아라쨩이 했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된 거야…….”
“그거랑 이거랑 상관 있냐?”
조아라는 자신이 만든 코스프레 옷에 꽤나 만족했다. 리카에게만 입히긴 아깝단 생각마저 들었다.
자신이 입으면 꽤 폼이 날 텐데.
‘다음 앨범 타이틀곡은 서부극 스타일로 해볼까? 어, 의외로 괜찮겠는데?’
조아라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도중 신아름이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들어오자마자 경악했다.
“너희 뭐 하는 거야!”
신아름이 문 쪽에서 둘을 바라본 각도가 매우 절묘했다.
조아라의 등이 보이고 그 너머 리카가 있었는데, 리카가 조아라의 사타구니에 얼굴을 묻은 것처럼 보였다.
“X발 이럴 줄 알았어! 쌔애애애애앰!”
“오해야! 아라쨩 배에 안겨 있던 거야!”
오해가 풀리는 데엔 약 3분이 걸렸다.
풀리고도 신아름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그래서? 우리 그 만화 노래 못 부르게 됐다고?”
“응, 아름이도 아쉽지?”
“별로.”
“……아름이 ‘웨스턴 불렛’ 안 읽었어?”
“안 읽었어.”
“아타시(내)가 추천했잖아!”
“네가 추천하면 다 읽어야 해?”
“강력추천했잖아!”
“다음부턴 초강력추천 해.”
“지금 할게!”
“다, 음, 부, 터.”
“히도이(너무해)……. 나만 진심이야…….”
신아름은 거울 앞에 앉아 마스크팩을 얼굴을 붙였다. 그녀는 거울로 비치는 시세리의 코스프레 옷을 보았다.
“그거 결국 완성했네.”
“지리지? 내 실력이 이 정도다.”
“그거 입으려고? 네가?”
“리카가 입지.”
조아라는 왠지 변명하듯 말했다. 만화 캐릭터 코스프레가 부끄럽단 인식이 반영된 것이었다.
신아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면 뭐.”
“아타시(내)가 뭐!”
“너라면 그럴 수 있을 거 같다 싶어서.”
“아름이 뉘앙스가 불순해! 코스프레는 부끄러운 게 아니야!”
“부끄럽거든? 만화는 만화로 즐겨. 현실 사람한테 어울리지도 않는 거 꾸역꾸역 입고 뭐 하는 짓이래.”
“당장 그 말 취소해! 안 그러면 인간성을 아름이한테 박아줄 거야!”
리카가 허리춤에서 리볼버를 꺼냈다.
신아름이 거울 속의 그녀를 바라보며 픽 웃었다.
“얏떼미로(해봐라).”
“쿠라(받아)……!”
그때 테이블에 올려둔 신아름의 폰이 울렸다. 폰에 뜬 이름을 본 신아름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신아름은 씩씩대는 리카를 내버려둔 채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팀장님!”
“아름이 말투 바로 바뀌었어…….”
“진짜 소름이다.”
“……네?”
“이번엔 얼굴이 바뀌었어!”
“소름 두 배.”
“제가, 누구요? 시…… 시세리? 코스프레 하라고요?”
리카와 조아라는 놀란 얼굴로 신아름을 보았다. 단순히 보는 걸 넘어, 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그녀의 전화 근처로 귀를 가져다 댔다.
[어, 할 수 있어?]
신아름은 숨이 턱 막힌 듯 ‘허’ 소리를 냈다가, 이내 입술을 꾹 물었다. 그리고 살짝 말을 더듬었다.
“티, 팀장님 그런 거 좋아해요? 한 번, 한 번 정도는 뭐……. 그으, 어, 언제요?”
“미친년.”
[일본에서.]
“……일본?”
[응, 일본에서.]
“앗, 마사카 코레와(설마, 이건)!”
리카가 얼굴 가득 흥분을 매단 채 외쳤다.
“아름이의 코미케(코믹 마켓, 일본의 서브 컬쳐 행사) 코스프레 데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