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77화 (477/760)

477화

제1회 연맹 회의가 끝났다.

조아라는 결과물이 적힌 수첩을 들었다.

[컨셉

리카: ‘달려라 메로스’가 좋아!

신아름: 약간 자기 자랑 스타일?

장하양: 뮤지컬 분위기

백설하: 노래하고 싶어]

[곡 스타일

리카: 하이라이트는 드롭 파트로 빵빵하게!

백설하: 하이라이트엔 실라블로 호흡 소모를 최소화하고 퍼포먼스에 집중

장하양: 드롭으로만 채우면 아쉬우니까 ‘절정’ 기교의 보컬이 들어갔으면 좋겠다.

신아름: 생각 없음]

[안무 의뢰할 안무팀

리카: 모름

백설하: 모름

장하양: 모름

신아름: 모름]

[의상

리카: 카와이(귀여움)!

백설하: 치마에 도전해보자

장하양: 뮤지컬 분위기

신아름: 명품 도배]

이외에도 많은 사항이 있었다.

수첩을 한 장씩 넘겨보던 조아라는 삐친 아이처럼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X발, 아저씨가 왜 우리랑 앨범 회의 마치고 나면 주름 하나씩 늘어났는지 알겠다.’

뭐 하나 의견이 일치하는 게 없다.

조아라는 수첩을 덮고 심호흡했다. 다른 멤버들은 기대감 넘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먼저.”

조아라가 선언했다.

“걍 내가 알아서 할게요.”

“참나, 그럴 거면 뭔 회의하겠다고 나댔대?”

연대 책임? 공동 책임? 부담감의 분산?

애초에 그런 건 불가능하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괜히 책임을 나누겠답시고 다른 멤버들의 의견을 조금씩 받으면, 결과물이 좋게 나올 리 만무했다.

‘물론 설하 언니는 가로 엔터 직원들 의견 받아 가면서 했지.’

그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그들의 의견엔 근거와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멤버들이 내는 의견은 그야말로 주장에 불과하다. ‘이랬으면 좋겠다’의 선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반드시 이래야 한다’ 수준의 확신이 없다.

‘생각해보면 당연해.’

책임을 나누기로 했다지만, 결국 이번 앨범의 메인 프로듀서는 조아라 자신이니까.

애초에 조아라가 느끼는 수준의 책임감을 다른 멤버들도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다들 서로의 눈치를 보는 것도 있고.’

우리들의 프로듀싱.

성필은 멤버들이 받을 부담을 어느 정도 예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몇몇 멤버를 묶는 방식으로 진행하지 않았었다.

‘왜 그랬는지 알겠어.’

그런 식으로 머리가 여러 개면, 프로듀싱이 진지한 국면으로 접어들었을 때 싸움이 난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성필이 총괄 프로듀서로 있고 멤버 한 명이 메인 프로듀서면,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더라도 둘 사이에서만 결론을 내면 된다.

어쨌든 성필이 키를 쥐고 있으니, 극렬한 불화까진 안 간다. 하지만 멤버들끼리 공식적으로 책임과 권한을 나누면, 종국엔 불화까지 갈 것이다.

‘아라베스크 때도, 아저씨가 적절히 중재해주지 않았으면 나랑 쌤 사이에서 싸움이 났을 거야.’

최악의 가정이긴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았을 듯하다. 차악의 가정이라고 한다면,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느라 의견을 제대로 못 내는 경우가 있을까.

‘역시…….’

혼자서 모든 짐을 지는 게 맞다.

“아라야 괜찮겠어?”

백설하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에 조아라는 걱정하지 말란 듯 상쾌하게 웃어 보였다. 리카가 말하길, 여자 남자 가리지 않고 매혹할 수 있는 미소라 했다.

이왕 하는 김에 단발까지 손으로 찰랑 쓸었다.

“당연하죠. 내가 누구?”

“조아라 마이너 갤러리 갤주.”

조아라가 신아름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신아름은 비명을 지르면서 탁자를 탭했다.

그렇게 제1회 연맹 회의는 싱겁게 막을 내렸다.

신아름은 공격당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떠나갔고, 리카는 그런 신아름에게 매달려 함께 사라졌다.

식탁엔 언니 라인과 조아라만 남았다.

“언니들 왜요.”

“으응, 아니.”

백설하가 식탁 위에 올라온 조아라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다 들어줄게.”

“고마워요.”

“아라가 원하면 언제든지 유머 준비하고 있어.”

“하양 언니한텐 상담 안 해요.”

“아하하.”

조아라는 나른한 눈으로 수첩을 다시 보았다.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장하양이 각종 사안에 대해 낸 의견들이었다. 대부분 ‘뮤지컬 분위기’라고 적혀 있었다.

“하양 언니 뮤지컬 엄청 좋아하네요. 전에 연기 했어서 그래요?”

“머릿속에 그리는 그림이 있어.”

조아라가 무슨 뜻이냔 듯 눈빛을 보내자, 장하양이 쑥쓰러움을 담아 말했다.

“사실, 나 프로듀서 돼서 하고 싶은 게 있거든. 그거야.”

“네? 근데 왜 손 안 들었어요?”

“아라가 먼저 들었잖아.”

“아니, 하고 싶으면 말하지…….”

프로듀서가 되고 싶은 멤버가 있으리라곤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분명 조아라 자신 혼자뿐일 거라고 여겼었는데.

“아니야. 나중엔 차례 돌아올 거잖아. 그때 하면 되지.”

이후로 세 사람은 ‘우리들의 프로듀싱’ 관련해서 대화를 조금 나누었다.

크게 의미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저 언니들이 동생이 힘들 걸 걱정해서 위로하는 것일 뿐이었다.

조아라는 언니들과의 대화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갔다. 방 안에선 신아름과 리카가 바닥에 앉아 택배로 온 물건을 살피고 있었다.

리카는 조아라가 들어오자마자 신아름이 들고 있던 가방을 가리켰다.

“아라쨩 이 가방 얼마인지 맞혀봐! 못 맞힐걸?”

조아라는 그 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신아름이 얼마 전에 주문한 백팩이었다.

‘맞혀보라고 할 정도면 내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가격은 아니겠네.’

조아라는 일반적인 백팩의 가격을 한참 뛰어넘어 말했다.

“50만 원?”

“땡! 300만 원입니다!”

“신아름 너 미쳤냐?! 뭔 가방이 300만 원이야!”

“왜, 예쁘구만.”

“어디 건데?”

“루이비통.”

조아라는 가방을 살폈다. 루이비통의 특징적인 마크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신아름이 가방 아래쪽, 아주 작은 글씨를 가리켰다. 가죽으로 섬세하게 ‘루이비통’ 라벨링이 되어 있었다.

“와 씨, 뭐야 이거. 걍 책가방이 300만? 이런 거 지하상가 가면 몇만 원에 팔겠다.”

“아 왜 발로 만지는데!”

“이런 걸 인터넷으로 팔아? 백화점이 아니라?”

“공식 스토어에 팔거든?”

신아름은 칭찬 대신 힐난이 쏟아지자 공격적으로 변했다. 그녀는 가방을 소중하게 끌어안곤 토라진 듯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예쁜데…….”

리카는 허둥대며 신아름을 달랬다.

조아라는 자신의 의견을 바꿀 생각이 없어서 그냥 침대로 향했다.

신아름이 저러는 것이야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어바이비와 맺은 맹약을 잊었는지, 신아름의 옷장 안엔 어바이비 옷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었다.

그 대신 흔히 사람들이 명품이라 부르는 옷들이 하나둘씩 자리했다.

‘그래도, 신아름 쟤는 명품을 패션이라고 생각하진 않으니까.’

몇몇 사람들은 그저 비싼 옷을 입는 게 패션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아름은 명품의 이름에 끌리기보다, 본인이 심사숙고하여 디자인을 결정한 후 구매한다. 원래 가지고 있는 옷들과의 조합을 고려하는 것이다.

‘본인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는 거라고 했었지.’

확실히, 아이돌로서 그런 모습도 필요할지 모른다. 옷에도 아우라가 깃드는 법이니, 그 힘을 빌려 본인의 이미지를 높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자신을 높인다, 라…….’

그럼 조아라 자신은 어떤 방식으로 높이 올라갈 수 있을까.

‘춤?’

물론 조아라는 춤을 사랑한다.

매일 춤을 연습한다.

하지만 요즘은 그것도 여의찮다.

해외 유명 댄서의 춤을 카피하거나 즉흥적으로 춤을 춰보아도, 체력은 소진될지언정 욕구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게 무슨 느낌일까.

‘그래, 천장에 막힌 기분.’

사다리를 타고 더 올라갈 수 있을 거 같은데, 천장에 막혀서 더는 올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건 실력적인 문제일까?

스포츠 선수들이 벽을 느끼듯이, 조아라도 그런 것일까? 그럼 선수들처럼 꾸준히 노력하면 어느 순간 벽을 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아라는 이게 그런 문제와 다르단 것을 알았다. 근본적으로 자신은 어딘가에 막혀 있다.

‘아마 그건…….’

조아라는 고개를 살짝 돌려 신아름을 보았다.

신아름의 패션은 어바이비의 중저가형 옷들을 조합하는 데서, 명품으로 코디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어바이비에 갇혀 있던 시야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브랜드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브랜드?

“아!”

조아라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라쨩 왜 그래?”

“나, 춤 배워야겠어.”

“지금도 배우고 있잖아?”

“더 배울 거야. 더 다양한 거. 내가 못 해본 거.”

조아라는 수평선 너머 나타난 새로운 섬을 바라보듯 설렘을 가득 담아 말했다.

“민시화 쌤한테 배울 거야.”

민시화.

조아라의 춤 스승인 백민정의 스승.

쌤인 백민정의 쌤이니, 조아라에겐 쌤쌤이 된다.

* * *

가로 엔터 A&R팀은 소녀연맹의 ‘인트로: 러브’ 앨범 활동 성적을 정리했다.

한국에서의 성적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애플 크러쉬’는 모든 음원 사이트에서 실시간 1위를 달성했으며, 월간 차트에까지 이름을 올렸다.

앨범 초동 판매량은 20만 장을 넘었다.

소녀연맹의 커리어 하이를 경신한 것이다.

“케이어스의 초동 60만 장에는 못 미치지만요.”

이재호가 그리 말하자 손혜빈이 눈치를 주었다. 그는 잘 훈련받은 맹견이 주인의 눈빛 한 번에 앉은 자세를 취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누나, 왜 그래.”

성필이 분위기를 풀어주자, 손혜빈은 이재호에게 턱을 까딱했다. 그제야 이재호도 과하게 잡힌 바른 자세를 풀었다.

“케이어스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거야. 아, 비정상이란 말은 좀 그렇네. 케이어스가 대단한 거지.”

발매 이틀 만에 선주문량까지 합쳐 40만 장 돌파. 이후 초동 판매량 60만 장까지 달성했다.

이로써 케이어스는 또 다른 신화를 썼다.

앨범 시대가 저물고 난 후 시작된 아이돌 2세대. 그 이후 모든 걸그룹의 기록을 케이어스가 뛰어넘었다.

“앨범 판매량은 유의미한 인기의 지표로 보기 어렵지만, 팬덤의 크기를 가늠하는 지표론 볼 수 있어.”

성필은 테이블 위에 올라온 서류 자료를 정리하면서 말했다.

“명실상부, 케이팝 걸그룹 중에서 케이어스 팬덤 크기가 가장 커.”

“3세대 톱들도 대단하다 대단하다 계속 그랬었는데, 시대가 지날수록 판이 아예 달라지네.”

“세계화가 성공한 증거지. 우리한테도 좋은 거고.”

정확한 케이어스의 국가별 앨범 판매 비율이 어떻게 되는진 알 도리가 없지만, 케이팝의 글로벌화 외에 케이어스의 성장을 설명할 방법이 없긴 하다.

국내에서의 커다란 인기를 보면 내수시장을 거의 다 먹은 거 같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습니다. 스타 플레이어가 생기면 그 판에도 낙수효과가…….”

“낙수효과요? 우리 소련이들이 케이어스가 흘리는 물이나 받아먹는단 뜻이에요?”

이재호가 혼난 강아지처럼 축 늘어졌다. 솔직히 그는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혼란스러웠다.

가로 엔터는 중소 기획사다.

생존이 최우선의 과제이지만, 소녀연맹의 성공은 생존 이상을 바라보게 해주었다.

‘그런데 뭘까.’

이 애매한 분위기는.

진심으로 이 두 명의 이사는 케이어스와 KS 엔터를 라이벌로 생각하는 것일까?

“그래도.”

성필은 목소리에 활달함을 불어넣었다.

“우리가 달성한 성과도 만만치 않아. 재호 씨.”

“넵.”

“자료 정리 수고했어요.”

소녀연맹이 ‘인트로: 러브’로 달성한 성과.

그 중심은 해외에 있었다.

“먼저 가장 중요한, 빌보드 200 차트 진입!”

세 사람이 동시에 박수를 쳤다.

빌보드 200 차트는 앨범 판매량으로 집계하는 차트이다. 수없이 많은 빌보드 차트 중에서도 메인으로 불리는 장소다.

빌보드 차트엔 수많은 종류가 있는데, 그중에서 메인으로 분류되는 건 오직 미국에서의 성적만 집계하는 차트이다.

가끔 인터넷 기사로 빌보드 ‘월드’ 음원 차트니, ‘월드’ 앨범 차트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했단 아이돌이 나타난다.

하지만 그건 미국에서의 성적을 뺀 차트다.

그런 차트에 올랐다고 ‘미국을 홀린’ 같은 수식어를 넣는 건 과대홍보에 불과하다.

하지만.

“빌보드 200에 올랐단 건 진짜, 진짜 대단한 거예요.”

빌보드 200 차트의 100위권 후반.

아마 미국에선 몇만 장 정도가 팔렸을 것이다.

몇만 장이라고 하면 어쩌면 일만 장, 혹은 이만 장, 어쩌면 삼만 장일 수도 있다.

별거 아닐 수도 있다.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미국에서 그만한 판매량이 나왔단 게 중요하다.

“미국에서 우리 애들 앨범을 소비해주는 팬이 몇만 명이나 있어요. 그럼 우리 애들 음악을 듣는 사람은 수십만 명이란 소리예요.”

어쩌면 수백만 명이 들었을 수도 있다.

케이팝을 소비하는 국가 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게 바로 미국이다. 그러나 그 소비는 대부분 대형 기획사가 차지한다.

중소 기획사는 감히 미국 파이로 진입하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자본력의 한계로 홍보를 진행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러니 중소 기획사인 가로 엔터가 미국에 성과를 냈단 건…….

“아메리카, 가장 큰 시장에 소녀연맹의 자생적인 팬덤이 자라났습니다.”

손혜빈과 이재호가 환호성을 질렀다.

성필은 그런 둘의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설마 했는데 정말 있군요.”

“재호 씨, 설마라뇨. 저희 월드 투어에서도 1만 명이나 보러 왔잖아요. 앨범 몇만 장 팔릴 건 당연히 예상했어야죠.”

“하하, 그렇네요. 손 이사님의 말씀이 참으로 계율과 같이 적확하고 오류가 없습니다.”

“그거 과한 아첨이에요.”

“죄송합니다…….”

“뭐, 외에도.”

성필은 성과 확인을 이어갔다.

“애플튠즈 수십 개국 1위……. 이건 뭐, 다른 아이돌들도 흔히 쓰는 성과니까 넘어가고요.”

아이돌 관련 기사를 보면 심심찮게 ‘몇십 개국 애플튠즈 1위’란 표현이 나온다.

그런데 1위 한 국가들을 살펴보면 미국은 당연히 없고, 일본도 없고, 유럽권도 드물고, 아무튼 문화적 주류 국가가 대부분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성과는 대단한 게 맞다.

케이팝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이니까. 다만, 이젠 너무 익숙해져서 대단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빌보드 월드 송 세일즈 차트 순위권…… 도 뭐, 넘어가고.”

“성필이 너 은근 별로 안 좋아한다?”

“응?”

“아니, 그야 요즘 들어 흔한 것들이긴 한데. 그래도 우리 애들이 달성한 거잖아. 좀 더 좋아하는 게 맞지 않아?”

“아…….”

성필은 머쓱한 웃음을 띠었다.

그야 성필도 기쁘다. 기쁘지만, 그의 비교 대상이 워낙 높았기에 쉽사리 기쁨을 표현할 수 없었다.

‘아무렴, 전생의 케이어스인데…….’

전생의 케이어스는 본격적인 글로벌화에 들어선 후, 잡다한 홍보를 전부 때려치웠었다.

기사에 떡하니 ‘빌보드 200 차트 몇 위’ 혹은 ‘빌보드 싱글 차트 몇 위’ 같은 것만 띄워둔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니까.

“뭐, 기쁘지. 그중에서도 이 세 개가 가장 기쁜 거야.”

“세 개?”

“빌보드 200 차트 진입. 음방 세 개에서 명예의 전당 입성. 그리고…….”

성필이 맞춰보란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이재호가 성실한 학생처럼 손을 번쩍 들었다.

“‘애플 크러쉬’ 뮤직비디오 조회 수 1억 돌파!”

“정답!”

그와 동시에 세 사람은 서로 손을 붙잡고 강강술래를 돌았다.

그의 말대로, ‘애플 크러쉬’는 공개 6주 차 시점에 조회 수 1억을 돌파했다.

1억을 넘자마자 조정훈 감독이 울면서 성필에게 전화를 걸었더랬다. 자신이 감독한 뮤비 중 최초로 조회 수 1억이 넘어간 작품이라고 말이다.

성필도 함께 꺽꺽 울었던 건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이었다.

“이러다 진짜 그래미도 가고 빌보드도 가고 AMA(아메리카 뮤직 어워드)도 가는 거 아니야? 우리 애들 미국 슈퍼볼 하프타임이랑 타임스퀘어 신년 공연에 불려가는 거 아니냐고!”

“가로 엔터도 대기업 되는 겁니다!”

“이건 대기업 확정이지!”

셋은 한동안 빙글빙글 돌다가 숨을 헉헉대면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이미 전체 회의 때 확인한 사항이었지만, A&R팀 회의에서 따로 확인하니 감회가 남다르다.

성필은 체력이 빠져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진짜, 우리 애들이 발가락 핥아달라고 해도 핥아줄 거 같아…….”

이재호와 손혜빈이 쳐다보자 성필이 정색했다.

“말이 그렇단 거예요.”

“박 이사님이 말씀하시길, 소녀연맹 멤버들의 발가락을 핥겠다(사실임)고 하셨다.”

“성필이 그런 취향이니?”

성필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잠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후, 확신을 담아 말했다.

“아니.”

“부정하니까 더 수상해.”

“그런데, 대기업이라.”

엔터사(社) 중 대기업이라고 불릴 만한 곳은 네 군데뿐이다.

전통적인 3강인 3대 기획사와 WTP로 급성장을 이룬 기획사. WTP의 기획사는 곧 상장을 거쳐 엔터 공룡으로 거듭날 것이다.

손혜빈이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5대 기획사 되는 거야?”

성필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면 정말 좋겠지만, 현실성은 적다.

히트 그룹을 지속적으로 뽑아냈던 몇몇 중견 기획사들도 대기업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가로 엔터는 중견의 틈에만 끼어도 대성공이라 불릴 것이다. 가로 엔터가 대기업이 되기 위해선 적어도 10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그저 소녀연맹 하나만 성공시켰다고 끝이 아니다. 하지만…….

“진짜 누나 말대로 우리 애들이 빌보드 서고, 슈퍼볼 하프타임 쇼 서고, 타임스퀘어 신년 행사 서면, 또 모르겠다. 근데 그건 내가 신경 쓸 일이고.”

“박 이사님 멋지십니다.”

“재호 씨 아부가 입에 뱄네요. 누나가 얼마나 갈구면 그래요.”

“진심입니다.”

“미친…….”

아무튼.

“내년이야, 누나.”

손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

가로 엔터의 차기 그룹, 보이그룹이 출범한다.

그 그룹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소녀연맹의 성공이 운이 아님을, 가로 엔터가 원 히트 원더가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

‘90% 이상의 법인이 10년을 버티지 못하고 스러진다.’

지속 가능한 동력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로 엔터는 살아남는 10%로 나아가야 한다.

10%로 나아가서, 생존 이상을 바라본다.

“우린 업계에 문화적 선도력을 입증한다.”

가로 엔터의 목적은 전 직원이 알고 있다.

최고의 아이돌을 만드는 것이다.

가로 엔터는 최고를 만드는 기업이 된다.

그러기 위해선 KS 엔터와 다른 대형 기획사가 그러하듯, 가로 엔터만의 문화기술을 완성해야 한다.

“일단 소녀연맹은 첨단의 대열에 꼈어. 우리가 한 세대를 이끌어가고 있어. 그걸 유지하려면 지금에 만족해선 안 돼.”

빌보드 200의 말미에 이름을 올렸다.

기뻐하되 자만해선 안 된다.

이 상승세를 이어가야 한다.

“대형 기획사들이 차지한 미국의 파이에, 우리도 끼어들어야 해. 하지만 그전에…….”

성필은 자료의 가장 아래 장을 꺼내 펼쳤다.

“미국에 이은 케이팝 소비국 2위.”

일본.

“여기에 집중해야겠지.”

당장 몇 주 후 소녀연맹은 일본 컴백 활동에 들어선다. 작년의 일본 활동처럼 전전긍긍할 일은 없을 것이다.

사실, 이미 일본에서의 성공은 확정되어 있다.

웨벡스의 전폭적인 지원은 물론, 예상치 못한 성공이 소녀연맹에게 다가왔다.

바로.

“우파(右派 아님)…….”

“형.”

성필이 한껏 폼잡으려던 때, 민경섭이 꽤 급박한 티를 내며 회의실로 들어왔다.

“어, 왜?”

“일본 쪽 일이요. 히무라 실장님 연락이에요. 바빠요?”

“성과 확인 중이었어. 그쪽은 급해?”

“아마도요.”

성필은 손혜빈과 이재호에게 양해를 구하곤 회의실을 나섰다.

민경섭이 성필을 안내한 곳은 매니지먼트팀이 사용하는 사무실이자 대기실이었다. 일본과의 협업은 매니지먼트팀이 담당하고 있다.

민경섭은 성필을 한 노트북 앞에 앉혔다. 화면으로 히무라의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박 이사님.]

“네, 실장님. 어쩐 일이세요?”

[다름이 아니라, 전에 논의드렸던 일 때문에 급히 연락했습니다. 일이 살짝 꼬여서 말입니다.]

전의 논의했던 일?

[애니메이션 오프닝 쪽 일입니다.]

“아, 그거요. 꼬였다니요?”

[그게…….]

이야기를 다 들은 성필은 살짝 당황해선 질문했다.

“원작자분이 우리 애들을…… 어, 음…….”

성필은 적당한 단어를 고르느라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나 순화할 만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오프닝 가수로 선호하지 않는…… 싫어한다고요?”

[싫다, 정도까진 않은 듯하지만, 소녀연맹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품진 않으신 것 같습니다.]

“……왜요?”

[저희가 이야기를 나눠보길 복합적인 이유가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는…….]

* * *

일본 최대의 음악 페스티벌이라고 하면 세 개가 있다. 흔히 일본 3대 음악 축제라고 불린다.

록 인 재팬 페스티벌.

후지 록 페스티벌.

그리고 현재, 슈퍼소닉(과거엔 서머소닉, 슈퍼소닉은 올해의 축제 명)이란 이름으로 개최된 음악 페스티벌이다.

“저기, 세이코쨩.”

미사토를 대신하여 세이코의 매니저가 된, 웨벡스에서도 상당히 인망과 지위, 능력이 높은 인물.

그 매니저는 무대에 서기 직전인 세이코를 향해 비굴한 미소를 띠었다.

세이코는 무대 복장을 입은 채 가만히 서 있고, 온갖 스태프들이 달려들어 그녀의 메이크업이며 헤어, 마이크 장비 등을 점검했다.

매니저가 공손히 양손을 모으고 말했다.

“그 건 생각해봤어? 정말 유명한 작품이야. 애니메이션이 방영되면 단행본만 수백만 권 팔릴지도 모르고. 인기도 엄청날걸? 오리콘 차트 1위는 떼놓은 당상…….”

“매니저.”

세이코가 그만하란 듯 가볍게 손을 들었다.

스태프들은 점검을 마치고 그녀에게서 조심스레 물러났다. 마치 옛 무사들의 시대, 다이묘를 대하는 신하 같은 모양새였다.

세이코는 그녀 특유의 차가운 표정으로 매니저를 바라보았다.

“애니메이션 주제곡 같은 거 안 맡는다니까. 오타쿠 같아.”

“그으, 그 부분을 어떻게 좀……!”

“나갈게.”

“아 세이코쨩……!”

세이코는 거침없이 무대를 향해 나갔다.

철제 계단을 타고 암막 커튼을 걷고 나가니 그곳에 펼쳐진 건.

와아아아아───!

귀를 뚫는 함성과 10만 명도 넘을 듯한 인간의 바다. 세이코는 기분 좋게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세이코가 무대 중앙에 서서 10만 명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다들, 나 많이 기다렸지!”

세이코의 목소리는 그보다 수천 배는 큰 목소리가 되어 메아리로 돌아왔다.

오직 환성, 기쁨의 환성뿐이었다.

단 한 명의 인간이 받기엔 과분할 정도의 뜨거운 찬사. 보통 사람이 그것을 받았다간 다리를 떨며 기절해버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세이코는 그러지 않는다.

그녀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찬사와 관심이었으니.

“그럼 지루하게 안 재고 바로 노래할게!”

가후(歌侯)가 돌아왔다.

[후나비키 세이코

최신 앨범 ‘페이디드 러브’

초동 판매량 900,000장 이상.

오리콘 차트 2주 연속 1위 중.

오리콘 차트 월간 1위 확정.

국제음반산업협회 집계, 올해 발매된 전 세계 앨범 중 현재 판매량 7위 달성.

국제음반산업협회 예상, 올해의 판매량 TOP3 진입 거의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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