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화
“아라쨩 세쿠시(섹시)!”
부끄러운 척하는 리카를 제외하고, 멤버들은 쓰러진 성필과 위풍당당한 조아라를 번갈아 바라보며 난색을 표했다.
섹스 앤 드러그스 앤 로큰롤.
과거 소녀연맹이 데뷔하기 전, 성필이 록의 역사를 설명하며 해주었던 이야기다.
그때 조아라가 묘하게 이 단어에 꽂혔었는데, 아직도 꽂혀 있는 모양이다.
“앗, 잘못 적었네.”
조아라가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화이트 보드에 적힌 글자를 지웠다. 그러자 시간이 거꾸로 감기듯 성필이 벌떡 일어났다.
“이, 이걸로 안 해?”
“실수로 적었어요.”
“어른을 놀려?!”
“평생 단 한 번 놀릴 수 있는 기회였잖아요. 안 놀리는 쪽이 손해지. 뭐, 많이 놀랐어요?”
많이 놀랐냐고?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조아라가 ‘록 스피릿으로 소녀연맹의 저항 정신을 표현한다’라고 했으면, 성필은 눈물마저 찔끔 흘렸을 것이다.
“네가 진짜 하겠다고 했으면, 섹…… 이랑 드러그스 지우고 로큰롤만 하자고 했을 거야.”
“아저씨 의외로 진지하게 생각했네. 놀린 보람이 있네요. 아니, 근데 뭐 소녀도 아니고 그거 말하길 꺼려요? 여기 있는 사람 다 성인…….”
“아, 나 개그 떠올랐어.”
장하양이 맥락도 없이 끼어들었다.
“사중주는 쿼텟, 오중주는 퀸텟이잖아. 그럼 육중주는 뭘까아요?”
“……뭔데요?”
“섹스텟, 아하하!”
“어, 하양 언니가 말하니까 알겠네. 부끄럽다. 아저씨 미안해요.”
“아냐. 우리 서로 자중하…….”
“아, 또 개그 떠올랐어요. 영어로 구두시험이 뭐게요?”
“…….”
“오랄 테스트, 아하하!”
“아까부터 그게 뭔 개그예요 걍 사실을 말하는 거구만!”
“아하하…….”
장하양은 풀이 죽었다.
대체 뭘까. 장하양은 어린애인 걸까?
어린애들이 방귀나 오줌이라고만 말해도 자지러지는 것처럼, 장하양도 그런 의미에서 개그라고 한 것일까?
자기가 개그를 치고 스스로 웃는단 점에서 악질이었다.
“그럼 진짜로 뭐 하려고? 어떤 컨셉이야?”
성필이 묻자 조아라가 쯧쯧 혀를 차며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까 내가 한 말 못 들었어요? 컨셉이 아니라 목표라고 했거든요.”
“어, 그래. 목표가 뭔데.”
“관심 없단 티 내니까 좀 그런데.”
“우와, 목표가 뭐야?”
“기분 더럽네.”
조아라는 다시금 화이트보드에 목표를 적어나갔다. 다행히 이번에는 정상적이었다.
[올해의 베스트 퍼포먼스 상]
조아라가 화이트보드를 손바닥으로 쾅 두드렸다.
“이 상을 받는 게 목적이에요.”
당찬 포부였다. 그리고 백설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목표 설정이기도 했다.
백설하는 막연히 컨셉으로서 여름과 사랑을 말했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달성하겠다, 그런 목표는 잡지 않았었다.
하지만 조아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함으로써, 프로듀싱 중 무엇에 중점을 둘지 공표했다.
‘아라답다고 해야겠지.’
백설하는 보컬에 방점을 두었었다.
그리고 조아라는 두말할 나위 없이 춤, 퍼포먼스에 집중한다.
“저기이…….”
백설하가 쭈뼛쭈뼛 손을 들었다.
“그으, 그냥 물어보는 건데. 베스트 퍼포먼스 상이면, 특별히 노리는 대중음악 시상식이 있어?”
“아뇨. 걍 시상식이란 시상식은 전부 휩쓸고 다닐 생각이에요. 뭐, 쌤이랑 달리 배포가 크죠?”
조아라가 도발적으로 눈썹을 치켜들었다.
“헤헤, 응. 아라 대단해.”
“저거 백퍼 자기 기록 못 넘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다. 다 끝났으니 후련해 죽겠죠 아주?”
“응.”
조아라가 원망하듯 흘기자 백설하는 당황하면서 주제를 바꾸었다.
“아, 아니. 물어보고 싶은 건, 어…… 베스트 퍼포먼스 상을 노리는 거면 역시 난이도가…….”
조아라는 아까 성필에게 했던 것처럼 혀를 차며 검지를 좌우로 저었다.
“어렵다고 다 좋은 게 아니죠. 그 정도는 알아요.”
백설하는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물론 그녀 자신은 멤버들에게 높은 보컬 기교를 요구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어진 파트를 소화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백설하가 걱정한 건, 조아라가 대책 없이 어려운 퍼포먼스를 짜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이전에 서학준이 만든 ‘아라베스크’ 원본 안무처럼 말이다.
“다행이…….”
“다키스트 ‘더 킹’ 정도?”
“꺄아아아악!”
백설하, 실신 직전!
백설하만이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난색을 표했다. 일본 경연 프로그램인 ‘뉴아사’에서 ‘더 킹’을 할 수 있던 건, 어디까지나 편곡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만약 멤버들에게 ‘더 킹’ 원본을 처음부터 끝까지 소화하라고 했다면, 좋은 결과가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 하이라이트 정도만 온전한 원본이었기 망정이지, 전부 다 원본이었으면 한 명이 중간에 실신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 농담이에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어렵다고 보기 좋은 건 아니잖아요. 뭐…….”
조아라가 배웠던 스트리트 댄스에선 어려운 테크닉이 곧 성과로 연결되긴 하지만, 아이돌은 어반 댄스, 방송 안무가 주력이다.
스트리트 댄스는 이름 그대로 길거리에서 추는 춤이다. 방송 안무와 같은 극장춤 계열과는 근본부터가 다르다.
스트리트 댄스는 관객이 댄서를 상하좌우전후 모든 방향에서 볼 것을 상정하지만, 극장춤은 오직 정면만이 고려 대상이다.
“어쨌든 다들 걱정 마요. 이 프로듀서 조아라만 믿으라고요.”
조아라가 멤버들을 향해 윙크했다.
신아름은 소름 끼친단 듯 소스라치게 놀랐고, 리카는 손키스로 화답해주었다.
만족한 조아라는 성필에게로 시선을 돌려 또 윙크했다. 성필이 공중에서 무언가를 붙잡아 땅바닥으로 내팽개쳤다.
“너무하네 진짜.”
꽤 긴 시간이 걸릴 거라 예상했던 다음 프로듀서 선정 회의는, 그렇게 너무나 싱겁게 끝났다.
성필은 회의실에서 나오며 시간을 체크했다.
‘이러면 남은 시간이 꽤 많아지는데.’
시간이 남는데, 뭘 하면 좋을까.
“아저씨.”
그때 조아라가 뒤에서 그를 불렀다.
성필은 못 들은 척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러자 조아라가 전속력으로 달려와 그의 오금을 무릎으로 팍 쳤다.
“악!”
“왜 사람 무시해요.”
성필은 넘어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버텨 섰다. 뒤로 돌아보니 조아라가 실실 웃고 있었다.
“시간 있죠? 커피 사줘요.”
“내가 왜?”
“‘내가 왜’라고요?”
조아라는 팔짱을 끼고 짐짓 오만한 체했다.
“왜냐뇨. 아저씨가 총괄 프로듀서니까요. 그리고 나는 이번 앨범 메인 프로듀서고. PD끼리 같이 커피 마시면서 일 얘기하는 게 이상해요?”
아, 그렇네.
버릇처럼 또 거절할 뻔했다.
“아니면 뭐, 이번에도 내가 사야 올래요?”
왠지 몇 개월 동안 조아라와는 질리도록 커피와 밥을 함께 먹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 * *
성필은 배달 온 커피와 디저트를 받고 가로 엔터 입구 앞 테라스로 돌아왔다.
원형 플라스틱 의자 위론 큰 파라솔이 쳐져 있어 그늘을 만들었다.
조아라는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영상을 찾는 중이었다. 한 손으로 열심히 부채를 부치면서 말이다.
“아, 더워. 아저씨 왜 카페 안 가고 여기서 보자고 해요? 쪄 죽겠네.”
“카페 가면 눈치 보이니까 그러지. 너 모자랑 선글라스도 안 챙겨왔잖아. 또, 챙겨왔어도 안 갔을걸. 이 날씨에 모자, 선글라스, 마스크 쓰면 죽어. 그리고 네가 냉방병 걸릴 거 같으니까 밖에 나오자면서.”
“그깟 마스크 쓴다고 죽긴 뭘 죽어요. 없으면 걍 신아름 거 쓰면 되는데.”
“아름이 옷 훔쳐 입지 마. 어바이비에서 다 협찬해주는 데 왜 굳이 아름이 걸 훔쳐?”
“인정하긴 싫지만, 걔가 패션에 좀 일가견이 있어요. 옷 잘 골라. 나랑 체형도 얼추 맞고.”
성필은 점점 조아라의 말이 짧아지는 것을 느꼈다. 옛날에도 자주 말끝에 ‘요’를 빼먹곤 했었는데, 그게 요즘 들어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간다.
‘나랑 맞먹고 싶은가.’
다른 멤버가 저랬다면 왜 그러냐고 물어봤겠지만, 조아라가 이러니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
전생의 조아라는 성필에게 반말을 썼으니까.
오히려 제자리를 찾았다고 해야 할까, 더 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한 소리 해야 하나…….
“으아, 저기 봐요. 아스팔트가 이글거려.”
조아라가 가리킨 곳을 보니 아지랑이가 끓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더워졌다.
성필은 열기 때문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응접실로 갈까’라고 말하려던 때, 갑자기 조아라 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조아라가 성필을 향해 부채를 부쳐주었다.
바람을 타고 향기가 전해졌다.
“부채에 향수 뿌렸어?”
“무슨 향이게요.”
“몰라.”
“에이, 알 텐데?”
“진짜 몰라.”
“우리 콜라보 했던 그 회사요. 시그니처 프래그넌스.”
“아, 그거구나.”
장하양이 홍보 라이브 방송 도중 ‘시그니처 냄새’라고 말해서 얕은 파문이 일었던 적이 있다.
그때 발매했던 조아라의 시그니처 냄, 프래그넌스였다. 장하양의 표현대로라면 약간 싸― 하고 화아― 한 향이다.
“시원해요?”
“별로. 됐으니까 너한테나 부쳐.”
“시원하죠?”
이제 보니, 조아라가 든 부채는 소녀연맹 콘서트 한정 굿즈였다. 부채에 조아라의 상반신이 인쇄되어 있다.
“그거 어디서 났어?”
“창고에 몇 개 있던 거 기억나서 가져왔어요.”
“야, 덥다. 그냥 들어가자.”
“됐어요. 여기 좋은데요 뭐.”
조아라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나른하게 눈꺼풀을 내렸다. 덥긴 한 모양이다.
“내 착각일 수도 있는데요. 아저씨 근육이 점점 빠지는 거 같아요.”
“착각 아냐. 운동할 시간 없으니까.”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 때문에?”
“어. 거울 볼 때마다 아까워. 점점 선명도가 사라져서.”
“그냥 더 빼요.”
“왜?”
“난 슬림한 쪽이 더 보기 좋아요. 어깨, 등 넓은데 근육은 슬림한.”
“그러려면 그런 몸을 타고 태어나는 수밖에 없어.”
가지지 못한 자 성필은 어깨가 넓어지려면 필연적으로 다른 근육도 키워야 한다. 원통하게도, 한구인과 같은 천부의 재능을 얻지 못했다.
“이제 잡담 그만하고 일 얘기로 들어가자.”
“네. 아까 하던 얘기 계속하면요.”
조아라는 아이튜브에서 케이어스의 ‘넥타르’를 검색했다.
케이어스의 최신 컴백곡이며 백설하의 ‘애플 크러쉬’와 경쟁했던 ‘넥타르’는 두 버전이 있다.
하나는 일반 버전, 다른 하나는 퍼포먼스 버전이다. 퍼포먼스 버전이 일반 버전보다 1분 정도 더 길다.
뮤직비디오도 따로 있는데, 케이어스 멤버들의 댄스 퍼포먼스와 십수 명의 백댄서가 추가됐다.
공식 일반 뮤직비디오보다 퍼포먼스 비디오를 선호하는 이들도 있으며, 조회 수도 큰 차이는 안 난다.
“작년에 케이어스 ‘타임’ 기억하세요?”
“기억하지.”
케이팝 역사에 길이 남을 약 1분의 댄스 퍼포먼스. 1분간 이어지는 음악에, 케이어스 멤버들은 오로지 춤만 춘다.
그 아름다움에 백설하는 눈물마저 흘렸었다.
“솔직히, 저는 ‘타임’ 따라 하고 싶었거든요. 아니, 표절하겠단 뜻이 아니라 그런 느낌으로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넥타르’ 보기 전까지는요.”
“‘넥타르’가 더 나아?”
“더 낫다 아니다, 그렇게 표현할 건 아닌데 뭔가…….”
조아라는 입술을 검지로 톡톡 두드리면서 표현을 골랐다.
“진화…… 했다고 하면 이해하려나. 더 뒤에 나온 거니까 당연한가? 암튼, 더 세련됐어요.”
일반적으로 작품을 평가하는 두 가지 기준이 있는데, 바로 대중성과 예술성이다.
누군가 비유하길 대중성은 ‘보여줘야 할 것’이고, 예술성은 ‘보여주고 싶은 것’이라고 했다.
대중성의 목적은 타인을 매혹하는 것이고, 예술성의 목적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절묘하게 조화됐을 때, 대중음악의 걸작이 탄생한다.
대중성이 과도하면 천박하고, 예술성이 과도하면 이해받지 못한다. 이렇듯 작품엔 절묘한 줄타기가 필요하다.
“혜빈 언니가 ‘넥타르’ 보고 레퍼런스 얘기한 적 있는데, 아저씨도 알아요?”
“그,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들은 기억 있어.”
“무용수 도리스 험프리의 ‘물의 연구’에서 영감받은 거 같대요.”
조아라는 놀라서 손혜빈에게 그런 걸 어떻게 아냐고 물었었다. 그에 손혜빈은 ‘나 무용학 학사 학위 있거든?!’이라며 살짝 삐친 투로 대꾸했더랬다.
손혜빈은 춤에 관심이 많아, 연예인으로 활동하며 대학까지 다녀 마침내 학위를 얻어낸 집념의 인간이다.
러시아로 유학까지 가려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봤는데, 확실히 영감을 얻은 장면이 부분 부분 보여요.”
‘물의 연구’는 워낙 옛날 작품인 데다 음악조차 없다. 게다가 ‘넥타르’에 비하면 느리기 그지없다.
하지만 명백히 ‘넥타르’는 ‘물의 연구’에서 영감을 받은 게 확실했다.
“‘넥타르’, 신이 마시는 음료. 거기에 착안해서 물의 움직임을 표현하려고 했나 봐요. ‘넥타르’ 안무가는 다른 무용에서 레퍼런스를 따왔고요. 그거 듣고 생각했어요. 진짜, 안무를 만드는 덴 여러 방법이 있구나. 나랑 혜빈 언니가 모르는 다른 무용 레퍼런스들도 많겠구나, 하고요.”
“…….”
“아저씨 멍때려요?”
“어? 아니…….”
“사람 진지한 얘기하는데 뭐야.”
조아라가 토라져선 눈가를 찌푸렸다.
확실히, 성필은 잠시 넋이 나가 있었다. 진지하게 춤 이야기를 하는 조아라를 보니, 넋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물의 연구’는 절대무용(絕對舞踊)이란 장르래요. 음악을 제거하고 움직임만으로 뭔가를 표현하는 거요. 난 걍 춤이 스트릿 댄스, 뭐 어반 댄스, 컨템포러리, 모던, 이런 것만 있는 줄 알았는데…….”
조아라는 흥분이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눈빛이 여름의 햇볕에 지지 않을 만큼 찬란히 반짝였다.
“되게 많아요. 배울 것도, 알아야 할 것도요. 생각해봐요. 내가 춤에 대해 더 많이 알면 ‘넥타르’에서 뭐가 더 보일까요? 진짜 말도 안 돼. 엄청 멋지지 않아요?”
“…….”
“아니 아저씨 멍 좀 그만 때리라고!”
“악!”
성필은 조아라에게 어깨를 얻어맞곤 울상을 지었다.
“멍때린 거 아니야…… 잠시 생각에 빠져서…….”
“그거나 그거나.”
이번에도 성필은 넋을 놓고 있었다.
‘뭔가, 설하랑 작업할 때랑은 많이 다르네.’
조아라는 명확한 목표나 이상이 있는 듯했다.
백설하가 안개를 더듬어가며 자기도 모르는 것을 찾으려 했다면, 조아라는 거침없이 안개를 뚫고 나아가려 한다.
“근데 절대무용이란 이름 멋지네. 무슨 판타지에 나올 거 같아.”
“아저씨도 그렇게 느꼈어요? 막 무대 올라가서 ‘절대무용을 선보이겠습니다’라고 하면 되게 폼나겠던데.”
“근데 음악이 없는 춤이란 게 가능해? 보는 맛이 있나?”
“봤는데, 썩 재밌진 않더라고요.”
“하긴.”
“만약 그걸로 관객에게 재미를 주면, 그게 진짜 절대무용이겠죠.”
음악을 배제한 채 오로지 움직임만으로 보이는 이를 황홀감에 휩싸이게 한다.
앱솔루트 댄스란 이름이 붙어도 이상하지 않다. 정말 절대적인 경지에 오른 춤일 테니까.
“암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좀 예술적인 걸 시도하고 싶단 거예요. 그냥 보면 즐거운데, 알고 보면 놀라는.”
“그건 모든 예술가의 꿈이네. 대중적이면서 예술적인 거.”
“아직은 막연해요. 퍼포먼스에 넣을 장치도 고민해보고, 어떤 안무가한테 발주 넣을까도 생각해야 하고. 곡도 정하고…… 할 거 많네요.”
조아라가 해맑게 웃었다.
“기대된다.”
기대된다.
그 한마디가 성필의 심장을 찔렀다.
이게 아이돌 뮤직비디오였다면, 조아라의 웃음에서 날아온 화살이 성필의 심장을 관통하여 하얀 깃털을 흩날리게 했을 것이다.
“그럼 총괄 프로듀서님 생각도 들어볼까요?”
“어? 어.”
“오늘따라 왜 이러지. 여름 감기라도 걸렸어요?”
성필은 드라마의 클리셰처럼, 조아라가 이마로 손바닥을 가져올까 싶어서 흠칫 뒤로 몸을 물렸다.
그런데 조아라는 성필을 이상하단 듯 바라보기만 했다. 성필은 혼자 뻘쭘해져서 자세를 바로 했다.
“크흠, 있지. 생각. 나 혼자 바라는 거긴 하지만.”
“아저씨가 바라는 거면 그게 프로듀싱 방향이잖아요. 말해봐요.”
“내가 남자 아이돌도 덕질하는 이유. 그건 여돌한테서 얻을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야.”
“갑자기 양성애적 성향 고백하는 거예요?”
“아니.”
“칼 같네.”
“댄스 퍼포먼스적인 면에서, 남돌이 더 보는 맛이 있어.”
“뭐, 체력이랑 근력이 더 나으니까. 보일 수 있는 퍼포먼스의 한계점이 일반적으로 넓긴 하죠.”
“맞아.”
그건 남자, 여자 아이돌의 콘서트에서도 드러나는 차이다.
남자 아이돌은 콘서트가 후반부에 이르러서도 댄스 퍼포먼스의 완성도가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여자 아이돌은 콘서트가 후반부에 이르면 안무가 점점 소극적으로 변하거나 동선 이동이 짧아지곤 한다.
체력의 차이 때문이다.
게다가 여자 아이돌은 몸매 때문에 굶는 일이 많으니, 2시간 이상의 콘서트 강행군을 소화하기 어렵다.
여자, 남자 아이돌을 동시에 덕질하는 이들 중 여자 아이돌 콘서트는 살짝 실망스럽단 이야기가 돌기도 한다.
“남자 아이돌 중엔 진짜 2시간 넘게 안 쉬고 돌아가면서 계속 퍼포먼스하는 그룹도 있잖아.”
“진짜요. WTP 선배님들 콘서트 DVD 보고 미쳤단 소리 계속 나옴. 근데 그건 우리도…….”
“그렇지.”
소녀연맹의 첫 번째 투어 콘서트, ‘도미노 이론’은 여자 아이돌 중에서도 굉장한 체력을 요하는 구성이었다.
특히 오프닝의 세 곡을 연달아 풀 퍼포먼스로 보여주는 건 팬들 사이에서도 엄청난 화제였었다.
“너희의 강점은 체력이야.”
문득 장하양이 떠올라서, 성필은 표현을 더했다.
“체력이랑 근력.”
“뭐, 연습생 때부터 근력 운동 시켰으니까요. 팬들이 우리가 다니는 짐 폐쇄하라던데요? 조명받을 때 근육 도드라진다고.”
“……농담으로 하는 말이지?”
“당연히 농담이죠. 애초에 그만큼 생길 정도로 하지도 않고요.”
“암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성필은 조아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포인티한 안무? 중요해. 매력적인 서사 진행? 물론 중요해. 하지만 이번엔 나도 도전해보고 싶어. 보자마자 감탄할 수준의 퍼포먼스.”
조아라는 농담이라고 했으나, 성필은 다키스트의 ‘더 킹’과 같이 눈이 휘둥그레지는 퍼포먼스를 바란다.
성필의 눈빛을 바라보던 조아라가 픽 웃었다.
“오케이, 접수. 올해의 베스트 퍼포먼스 상 받으려면 그 정도는 되야죠.”
조아라는 노트북에 떠오른 케이어스의 ‘넥타르’를 바라보았다. 언덕 너머 포진한 적진을 보듯 투쟁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베스트 퍼포먼스 상 받으려면, ‘넥타르’를 넘어야 해요. 아니, 올해 컴백하는 모든 아이돌을 넘어야 해요.”
조아라가 손바닥을 들었다.
성필이 그녀와 손바닥을 짝 맞추었다.
하이 파이브와 함께 그녀가 미소 지었다.
“도와줘요, 프로듀서.”
“당연히 도와야지. 한 번 가보자.”
“오케이 첫 회의 끝!”
조아라가 재빨리 노트북을 덮었다.
덥긴 한 모양이다. 그녀의 얼굴과 목으로 땀이 줄줄 흐른다. 안 그래도 땀이 많은 체질이니, 땡볕을 버티기 힘들 것이다.
성필은 그녀의 커피를 대신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아저씨, 근데 더 할 말 있지 않아요?”
“응? 뭐가?”
“고맙다고 해야죠.”
“뭐?”
성필은 영문을 몰라 두 눈만 끔뻑였다.
“아저씨 요즘 우중충했던 거 ‘우리들의 프로듀싱’ 때문이죠?”
“아…….”
“지원자 한 명도 안 나올까 봐.”
조아라가 성필의 앞에 섰다.
아주 가까이.
“근데 지원자 나왔잖아요. 안 고마워요?”
“그, 고맙지.”
“고마운 게 끝?”
조아라가 배시시 웃었다.
“내가 손들었을 때 아주 좋아 죽으려고 하던데? 고맙다, 그게 끝? 아끼지 말고 더 써봐요.”
아주 좋아 죽으려고 한다, 라…….
그 말대로였다.
성필은 조아라가 손을 들었을 때, 그야말로 구원받은 기분이었다.
아, 하고 싶은 멤버가 있구나.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행복.’
그 단어를 떠올리자 성필은 자기도 모르게 흠칫 떨었다. 바로 앞에 조아라가 있어서, 전생의 그녀가 겹쳐서였다.
웃는 조아라의 위로 전생의 조아라가 겹친다.
지금의 그녀와는 달리 악에 받친 조아라가…….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를 쿵쿵 울린다.
‘오빠는, 오빠는 말야. 나로 행복해질 거 같지가 않아. 무슨 말인지 알아? 내가 무슨 지랄 발광을 해도…… 오빠는 나 때문에 행복해지지 않아.’
‘오빠 행복은 회사에 있지? 아이돌에 있지? 그럼 대체 내가 왜 있어? 나랑 왜 사귀어?’
‘나랑 결혼을 하건 내가 애를 낳건 애를 키우건 애가 학교를 들어가건 뭘 하건, 오빠는 그걸로 얻는 행복보다 그놈의 아이돌이 좋지?’
‘내가 진짜 비참한 게 그거야. 나랑 다르게 오빠는…… 나로 행복해질 수가 없어. 내가 뭔 짓을 해도…….’
‘내가 연예인이면 다를까 싶어서, 별로 흥미도 없는 연기까지 계속했는데, 아니더라. 오빠는 그냥 아이돌이 좋은 거더라. 미치겠어. 어린애들 좋다고 따라다니는 거 보면 미치겠다고…….’
‘오빠는 날 영원히 사랑할 수 있어……?’
‘고민하네. 난 바로 할 수 있다고 할 텐데, 오빠는…….’
입술을 뻐끔거리던 성필은, 자기가 생각해도 우스운 목소리로 말했다. 바람 빠지는 것처럼 우스운 목소리로.
“어, 응, 행복해…….”
“와 씨, 행복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노트북을 품에 안은 조아라는 성필을 쌩 지나쳤다.
“앞으로 자주 볼 테니까 자주 행복해요.”
성필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조아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들어가고 나서도 그쪽만 보았다.
햇볕이 뜨거웠다.
성필은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보였다. 내려오는 눈을 받으려는 것처럼 햇볕을 손으로 받아냈다.
뜨겁다.
아스팔트까지 녹이려는 듯 일렁이는 아지랑이 위에서, 성필은 눈살을 찌푸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병원을 안 갔네.’
오랜만에 가야겠다.
* * *
소녀연맹 숙소.
앨범 활동은 마친 저녁 시간, 멤버 모두 생기가 있었다. 여름 행사 순회와 일본 활동에 들어가기 전 며칠의 휴가를 얻었기 때문이다.
각자 자유 시간을 보내야 하겠지만, 오래전의 약속에 따라 멤버들은 식탁에 모였다.
모두 모이자, 조아라가 엄숙히 선언했다.
“제1회 연맹 회의를 개최합니다.”
제1회 연맹 회의.
주제는.
“이번 ‘우리들의 프로듀싱’ 방향성에 관해서입니다. 네, 본격적으로 회의에 들어가기 전…….”
“아 그만 폼 잡고 시작이나 해.”
“야 신아름. 이거 상호 존중하잔 의미에서 존대 쓰기로 했잖아. 이런 거 없으면 걍 아무 말 대잔치 된다고.”
“아름아, 그냥 해주자. 아라 신났잖아.”
조아라가 장하양을 흘겼다. 장하양은 그런 조아라가 귀엽단 듯 쿡쿡 웃었다.
“에휴, 암튼 구호 외치고 갈게요.”
멤버들이 식탁 위에 손을 겹치고 말했다.
“성공과 실패는 우리 모두의 책임. 우리는 하나. 우리들의 연맹, 소녀연맹!”
멤버들은 ‘우리들의 프로듀싱’을 진행하면서 여러 가지를 배웠다.
그중 하나가 프로듀서의 자리는 홀로 감당하기 어렵단 것이다. 백설하의 예로 보듯이, 그 압박감은 감히 설명하기 어려울 수준이다.
그에 따라 멤버들은 지혜를 짜냈다.
“자, 그럼 회의 시작.”
이제부터, ‘우리들의 프로듀싱’은 연대책임이다.
그 와중, 백설하만이 우울하게 눈꼬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나 할 때도 이래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