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화
성필과 김하슬은 데이트를 마치고 합숙소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현관까지 가는 길, 갑자기 김하슬이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데이트 마치고 오는 데가 결국 합숙소잖아. 맥 빠져.]
[아, 그치. 결국 같은 데로 돌아오니까.]
둘은 현관 앞에 섰다.
누구도 먼저 문을 열지 않았다.
들어가기 싫은 게 아니었다.
둘 다 아직 마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단 걸 알았기에, 오늘의 데이트를 끝내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성필은 천천히 문고리로 손을 옮겼다.
[하슬아.]
[응, 오빠.]
[저번에…….]
문고리에 손을 얹은 성필은 마른 아랫입술을 빠르게 핥았다. 입이 바짝바짝 타는 듯 목소리가 걸치어지기도 했다.
[내가 져준 거라고 했잖아.]
김하슬이 문고리를 잡은 성필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 손을 꼭 쥐고 돌렸다.
[끝났어.]
[……응.]
둘은 함께 합숙소로 들어가 저마다의 방으로 향했다. 그로써 데이트가 끝났다.
오늘의 데이트는 뭐라고 할까, 분위기가 이전만 못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조심하는 느낌이 확 풍겼다.
성필은 샤워를 마치고 침대 위에 누웠다.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핸드폰을 보았다.
곧 10시다.
합숙소의 마지막이나 다름없는 시각.
룰에 따라, 매일 모든 출연자들은 단 한 명에게 따로 문자를 보낼 수 있다.
그 이외의 사적인 연락은 허용되지 않으니, 다른 출연자에게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다.
성필은 폰 화면에 누군가의 이름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러나 곧 지친 듯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스읍, 후우.]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문자를 쓰기 시작했다.
상대는 김하슬이었다.
그는 직감한 듯했다. 이제 김하슬과의 관계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고.
아마 오늘 문자도 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어쩌면 ‘오늘 데이트 재밌었다’ 같이 무미건조한, 관계의 끝을 암시하는 문자가 올 수도 있겠지.
그건 그거고, 성필은 김하슬에게 장문의 문자를 적어 보냈…….
[어?]
성필에게 문자가 왔다.
상대는.
[김하슬]
성필은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문자의 내용을 보았다.
[다음엔 어디 갈까?]
“우와아아아아아악!”
고깃집에 거대한 환호성이 휘몰아쳤다.
가로 엔터의 직원들이 한 번에 일어나 소리쳤다. 마치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골을 넣었을 때 같았다.
“들어갔다! 들어갔어!”
소맥을 몇 잔이나 위장으로 들이부은 A&R팀 이재호가 티셔츠를 까뒤집어 얼굴에 썼다.
그리고 골 세리머니를 하는 축구선수처럼 양팔을 위로 올리며 고깃집을 뛰어다녔다.
“사장님 여기 소 5인분 추가요!”
“너희들 소는 테이블당 5인분까지랬잖아! 추가하지 마!”
안쪽 좌식 방의 문이 열리고 민경섭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그러고도 흥분은 쉽사리 식지 않았다.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은 가로 엔터의 필수 시청 예능처럼 되어버렸다.
직원들이 주마다 그 프로그램 이야기를 나누는 건 드물지 않은 풍경이 되었다.
그러니 회식을 와서도 축구 경기 틀어놓듯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민경섭은 미닫이문을 반쯤 닫곤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자 홍규헌이 핀잔을 주었다.
“애들 즐기는데 왜 분위기 깨고 그래.”
“소를 또 시킨다고 하니까…….”
“한 테이블씩 더 시킬까?”
홍규헌이 그리 제안하자 한구인이 기겁하면서 말렸다.
“이미 다들 배가 꽤 찼을 겁니다. 더 시키면 남길 겁니다. 참담한 재원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담한 재원 손실이라……. 한 이사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
홍규헌은 한구인의 잔에 소주를 채워주었다. 그리고 그 옆의 손혜빈과 성필의 잔도 채웠다.
“박 이사, 손 이사, 둘만 재밌게 얘기하면서 잔 비우면 재밌어?”
“사장님은 이게 재밌어 보이세요? 누나가 저 놀리는 게요? 이거 사내 괴롭힘이에요!”
“사내(Man) 괴롭힘이라……. 틀린 말은 아니군.”
“야 박성필이.”
손혜빈이 성필의 어깨를 찰싹이며 말했다.
“누나와의 아름다운 추억이 넌 괴롭히는 거니? 누나 섭섭해.”
“내가 나중에 성공해서 자서전 내면, 누나가 활동하던 시기 만연해 있던 부조리를 전부 공개할 거야.”
“아니 부조리는 뭔 부조리? 그땐 다 그럴 이유가 있던 전통이 유지됐던 거야.”
“사장님, 누나가 나한테 뭐까지 시켰는 줄 알아요?”
“어, 궁금하네. 어디까지 갔어?”
“……아니, 어디까지 갔냐뇨. 권력형 성범죄 이런 건 아니고요.”
“야 성필이 너 말이 좀 심하다?!”
“아니 진짜, 프하,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네. 발 마사지를 시키더라니까요?”
“와.”
홍규헌이 손혜빈을 경멸하듯 보았다. 손혜빈은 당황하면서 손사래를 쳤다.
“아뇨 그건 그러니까…….”
“박 이사는 그걸 또 했어?”
“매니저는…… 해야 하는 줄…… 알았어요……. 아티스트를 만전의 상태로 두는 것도…… 매니저의 업무라고 생각해서…….”
“손 이사, 옛날에 박 이사 싫어했어? 진짜 그만두게 하려고 작정을 했네.”
“발 씻고 부탁했어요!”
“누나 누나.”
민경섭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손혜빈을 불렀다.
“누나 나중에 우리 회사 보이그룹 애들한테도 막 발 마사지 시키고 그런 거 아니야? 앗, 아니다. 누나가 마사지해주겠다면서…….”
잠시 후, 민경섭은 너무 취했는지 아니면 벽에 머리를 박았는지 바닥에 죽은 듯이 늘어졌다.
“뭐 어쨌거나.”
한구인은 죽은 듯 잠든 민경섭을 무시한 채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소녀연맹의 활동이 성공해서 다행입니다. 많이 걱정했습니다만, 기우였군요.”
“중간중간 삐끗할 때마다 엄청 긴장했어.”
“그러셨습니까? 어떨 때 말입니까?”
“뭐어, 백설하가 무대 의상이랍시고 망사 스타킹 가져왔을 때. 그게 제일 기억에 남네. 더 어이없던 건 박 이사가 백설하를 지지했단 거고.”
“저는 지금도 좋다고 생각하…….”
“팍 씨.”
홍규헌이 손을 들어 올리자 성필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망사? 쓸 수 있다 이거야. 근데 씨, 핫팬츠에 망사는 뭐 기념일에 남친 선물 주는 거냐?”
“자고로 청춘이란 숨기지 않고 드러낼 때 아름다운…….”
홍규헌이 게슴츠레 눈을 뜨자 성필이 ‘헤헤’ 웃으면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땐 설하가 의상 쪽도 생각했단 게 너무 기특해서요…….”
“백설하, 그래, 기특하지…….”
홍규헌이 입 안에 술을 털어 넣었다. 그녀의 눈동자로 파노라마처럼 근래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나갔다.
“첫 타자인데도 훌륭히 해줬어. 모든 게 순조롭진 않았지만, 그걸 발판 삼아 후속 타자는 더 잘할 수 있겠지. ‘우리들의 프로듀싱’이 작동하는 체계를 밝혔단 점에서, 백설하의 작업은 의미가 있어. 시스템을 보완할 수 있으니까. 뭐어, 소녀연맹 최대의 성공이란 의미도 있고.”
“설하 씨가 리더라 다행입니다. 솔직히, 박 이사님이 설하 씨를 막무가내로 지목했을 땐 ‘이 인간 뭐지?’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성필이 크게 웃었다.
그러자 한구인이 정색했다.
“웃어?”
“이야, 제가 한 이사님이랑 친해지긴 한 모양이네요. 곧 반말까지 갈 수 있을지두?”
“반말?”
“예, 죄송합니다 형.”
“아무튼, 설하 씨는 잘해주셨습니다. 저였으면 지목당한 자리에서 주저앉아 오열했을 겁니다. 정말 설하 씨야말로 외유내강의 표본이 아닐까 싶군요.”
“아, 그거 아세요?”
기절했던 민경섭이 일어나 대화에 참여했다.
“우리 직원들이 제일 어려워하는 멤버가 설하래요.”
“으엑, 왜?”
“설하가 겉으로 보면 되게 차가운 인상이잖아요. 아 맞다, 그거도 아세요? 검색창에 ‘냉미녀’라고 치면 설하 사진이 1페이지에 나오는 거?”
다들 폰으로 시험해보았다.
정말이었다.
성필이 고개를 갸웃했다.
“설하가 냉미녀…….”
‘헤헤, 저는 아무거나 다 좋아요.’
‘그, 그건 좀 힘들…… 네, 해볼게요오…….’
‘저 사기 잘 당하는 체질인가 봐요…….’
‘이 팔찌가 차고만 있어도 건강이 좋아진대요, 헤헤. 박 이사님 거도 하나 사드릴까요?’
“음.”
미녀인 건 알겠지만 냉(冷)미녀인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온(溫)미녀에 가깝지 않을까.
“헤헤, 안녕하세요오.”
그래, 이런 어벙한 목소리로 인사하는 인간이 어떻게 냉미녀일 수 있겠는가.
“어어, 백설하 왜?”
성필이 퍼뜩 정신을 차리자, 방문 앞에 쭈뼛쭈뼛 서 있는 백설하가 보였다.
성필은 ‘헤헤, 안녕하세요오’란 목소리가 자신의 상상이 만들어낸 환청인 줄 알았는데, 실제 백설하였다.
멤버들의 목소리를 상상할 때가 너무 많다 보니, 가끔 상상인지 실제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있잖아요오.”
백설하는 술을 많이 마셨는지 흰 피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목과 쇄골 부근이 특히 붉었다.
그녀의 뒤론 걱정스러운 표정의 리카와 조아라가 서 있었다.
“사장님! 제가 진짜 진짜 재밌는 개그 준비했습니다! 들어주세요!”
“그래, 해봐.”
홍규헌은 재롱부리는 조카를 보듯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아무리 재미없어도 웃어줄 생각이었다.
“자동차 문을 세게 닫으면 안 되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어, 음, 글쎄다.”
홍규헌이 임원들을 둘러보았다.
그들도 마땅한 답이 생각나지 않은 듯했다.
“왜 안 돼?”
“자동차 문은 네 개니까요.”
백설하가 정색했다.
“문이 네 개인데 세 개(세게) 닫으면 안 되죠.”
“이건 못 참겠다, 끌어내!”
백설하는 리카와 조아라에게 붙잡혀 ‘끼에에엑!’ 소리를 내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냉미녀 백설하가 사라지자, 다들 허탈하게 웃었다.
“직원들도 방금 거 봤으면 어렵단 얘기 못 했을 텐데.”
홍규헌은 시간을 확인하고 임원들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슬슬 끝낼까.”
그녀는 잔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직원들의 이목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그녀가 잔을 높이 들었다.
“다들 6개월 동안 수고 많았다! 소녀연맹의 성공 뒤엔 너희들이 있다! 그에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셋’ 하면 구호 외치고 마신다. 둘, 셋, 우리들의 연맹!”
“소녀연맹!”
직원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기꺼이 술을 입 안에 부어 넣었다. 이어서 박수도 이어졌다.
“차 문을 세게 닫으면 안 되는 이유는!”
환호와 박수 속에 이상한 말이 끼긴 했지만, 다들 성심성의껏 소녀연맹의 성공을 축하했다.
소녀연맹 ‘인트로: 러브’ 활동 종료 회식, 끝.
“차 문은 네 개니까!”
회식이 끝나고 다 함께 가게 밖으로 나왔다.
대중교통을 탈 사람은 먼저 가고, 대리기사를 기다리는 이들은 남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거나 담배를 태웠다.
소녀연맹 멤버들은 술을 안 마신 매니저와 함께 숙소로 갔다.
성필은 담배를 태우는 홍규헌의 옆에 붙어 대리기사가 오길 기다렸다.
“박 이사.”
“네?”
“내일이지?”
‘우리들의 프로듀싱’ 프로젝트가 내일 재개된다. 그 말은 내일, 프로젝트의 다음 타자가 정해진단 뜻이다.
성필은 술기운 탓에, 목소리에 서린 근심을 지우지 못한 채 답했다.
“네, 내일이죠.”
“걱정되나 보네.”
성필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또 지원자가 없으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 하고 있어?”
“……네.”
“걱정될 만하네. 없으면, 이번에도 지목하게?”
성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란 뜻이 아니었다.
‘모르겠다’란 뜻이었다.
“사장님은 그러신 적 있으세요? 막, 내가 좋아하는 데에 애인을 데려갔는데 애인은 지겨워 죽으려고 할 때요.”
“어, 뭐어, 음, 있지…….”
“많이 당황스럽고, 창피하고, 그렇죠 그땐.”
나에게 있어 즐거운 추억만이 가득한 장소로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갔다. 당연히 그 사람도 좋아하리라 생각하고서 말이다.
그런데 상대가 싫어하면, 그 기분은 참담한 수준이다.
“제가 딱 그랬어요.”
성필은 밤하늘을 향해 한숨을 날려보았다.
요즘 들어 한숨이 늘었다.
“설하 붙잡고 프로듀싱하면서도, 계속 저 혼자 안절부절못하고. 야구 룰도 모르는 어린애 데리고 야구장에 간 기분이었어요. 애는 계속 ‘집에 가자’고 하는데…… 비유가 좀 이상한가요?”
“아냐, 이해해.”
“그러니까 이번엔, 이번엔…….”
모르겠다.
“난 박 이사랑 생각이 달라.”
“네?”
“박 이사는 애들이 백설하가 성공한 걸 보고 부담감을 느낄 거라고 생각하지? 반대 아닐까. 백설하가 했으니, 자기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
“처음이야 선례가 없으니 불안하겠지. 그런데 이젠 선례가 생겼어. 선구자는 고독하고 불안하지만, 뒤를 따라가는 사람은 마음이 조금은 편하잖아. ‘저렇게 하면 되겠구나’란 생각이 들어서.”
“……그럴까요?”
“우리 애들, 죄다 최고의 아이돌이 되겠다고 자랑스레 말하잖아. 애들은 박 이사의 방법이 옳다고 믿어. 험난한 길 가는데 발에 진흙이 어찌 안 묻겠어. 또, 누가 진흙탕 밟으면서 가고 싶겠어. 그 너머에 자기가 바라는 게 있으니까, 힘들어도 가는 거지. 우리 애들, 편하게 살고 싶었으면 아이돌 안 했겠지. 연습생 때 진작 나가떨어졌을 거야.”
그럴까.
홍규헌의 말대로, 멤버들은 백설하의 성공에 부담이 아니라 자극을 받았을까.
내일이 오기까진 모를 일이다.
회의실에 가면 다들 짠 것처럼 입만 꾹 다물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성필의 걱정에 불과하다.
‘역으로, 다들 하고 싶다며 손을 들 수도 있잖아?’
뭐, 아무리 그래도 희망적으로만 생각할 순 없지만 말이다.
성필이 애처로운 미소만 흘리자, 홍규헌이 그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려주었다.
“박 이사가 애들한테 보여준 꿈을 더 믿어봐.”
“네, 감사합…….”
홍규헌 쪽을 바라본 성필은 흠칫 놀랐다.
그녀의 머리가 예상보다 더 아래에 있었다.
왜 그런가 보니, 그녀는 오늘 하이힐을 신지 않았다.
“와, 뭐야. 사장님 생각보다 훨씬 작으시네요? 고개를 내려야 얼굴이 보여요.”
“인신공격으로 징계할게.”
“하하.”
“웃어?”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말자.
애들을 믿자.
“야, 웃냐고.”
* * *
어제 그리 다짐했건만, 성필은 침대에서 일어나는 순간부터 속이 좋지 않았다.
술을 마셨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늘 ‘우리들의 프로듀싱’ 회의에 들어갈 생각 때문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다.
‘정말 정적만 흐르면 어떡하지?’
그렇게 걱정하던 게 당장 몇 시간 전.
회의실의 공기는 성필의 걱정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다. 지원자 있냐고 묻자마자 조아라가 손을 든 것이다.
“……아라야.”
성필이 부르자 조아라는 능청스레 대꾸했다.
“어.”
“‘어’?!”
“왜요.”
“장난 치는 거 아니지?”
“내가 그렇게 눈치 없게 보여요? 진심이에요.”
조아라가 자랑스레 가슴을 폈다.
“내가 ‘우리들의 프로듀싱’ 두 번째 타자예요. 내가 해요.”
“…….”
성필이 뒤로 돌아 눈가를 쓸었다.
“아저씨 울어요?”
“하하, 내가 눈물이 많은 사람이 아닌데. 아라가 지원해주니까 기뻐서 눈물이 다 나네.”
“아니, 당연히 지원자가 나와야 되는 거잖아요. 뭐 이런 걸로 울어요. 참나.”
성필은 코를 훌쩍이곤 다시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미소는 부드럽고도 따스했다. 이제까지의 걱정이 전부 녹아내려 오로지 홀가분한 행복만이 가득했다.
그걸 보며, 백설하는 내심 후회했다.
‘나도 그냥 지원할걸…….’
그랬으면 자신의 차례에도 성필이 저렇게 웃었을 텐데.
본인의 차례가 다 지나가고 나서야 할 수 있는 당돌한 생각이었다.
“오케이!”
성필은 손뼉을 짝 치고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우리들의 프로듀싱’ 다음 프로듀서가 정해졌다. 우리 아라, 나와!”
“애 부르듯 하지 말라고요.”
조아라는 툴툴대면서도 성필의 요청에 따라 앞자리로 나왔다.
“앨범 작업은 오늘부터 시작한다. 아라는 프로듀서로서 앨범 프로듀싱의 모든 작업을 감독한다. 물론, 설하가 그랬던 것처럼 나랑 가로 엔터의 모든 직원분들이 도와줄 거야.”
“아저씨, 근데 우리 곧 일본 가잖아요. 그럼 작업 스톱해요?”
“아니, 계속해야지. 화상 미팅으로 할 거야. 근데 아라 혼자 보내면 뭐가 뭔지 모를 상황이 돼서 다 꼬일 테니까, 내가 따라가야겠지.”
“뭐, 대강 알겠어요.”
“오케이, 그럼 두 번째 프로듀서님의 포부 한 번 들어볼까?”
성필이 판을 깔아주었다.
조아라는 부끄러운 듯 머리를 베베 꼬더니, 뺨을 발그레 붉힌 채 헛기침했다.
그녀는 뒤에 있던 화이트보드로 다가가 마카를 들었다.
“내 목표는 간단해요.”
그녀가 글자를 또박또박 한 글자씩 적어갔다.
“아하하, 아라 악필이네.”
“시끄러워요…….”
펜을 잡을 기회가 있어야 악필이 안 되지.
심지어 화이트보드에 글자를 적을 기회는 생애 손에 꼽을 정도였다.
성필은 조아라가 어떤 목표를 적을지 궁금했다. 아니, 궁금하단 말은 그의 심정을 표현하지 못한다.
‘두근두근해.’
설레서 미칠 지경이다.
아아, 행복하다.
설마 지원자가 나올 줄이야.
어제 걱정했던 게 전부 바보짓처럼 느껴져.
아라야, 고맙다.
평생 너한테 감사할게.
이 마음이라면 정장 입고 춤도 춰줄 수 있…….
“이거예요.”
“…….”
성필의 목덜미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 잠자고 있던 기억이 깨어났다.
멤버들이 소녀연맹으로 데뷔하기도 전의 기억.
‘아라가 제시한 컨셉은…….’
‘섹스 앤 드러그스 앤 로큰롤.’
‘너희들이 밴드 악기 하나씩 다 배우면 하는 걸로 하자.’
‘그럼 로큰롤 빼고 섹스 앤 드러그스.’
‘그만.’
‘드러그는 불법이라서 그래요? 그럼 섹…….’
‘너 이거 나한테 성희롱하는 거야! 그만해!’
그중에서도, 꼭 한 문장이 성필의 머리를 메아리처럼 울렸다.
‘너희들이 밴드 악기 하나씩 다 배우면 하는 걸로 하자.’
‘너희들이 밴드 악기 하나씩 다 배우면…….’
‘악기 하나씩 다 배우면…….’
‘하자.’
“어때요?”
조아라가 화이트보드를 자랑스레 짚으며 말했다. 그녀의 입꼬리에 관능적인 미소가 걸렸다.
성필은 입술을 벌벌 떨며 화이트보드에 적힌 글자를 하나하나 핥듯이 읽었다. 제발 자신이 잘못 읽었기를 바라면서.
[섹스 앤 드러그스 앤 로큰롤.]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악!”
박성필, 혼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