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4화
인민이들은 성필이 욕먹는 게 걱정이었다.
프로듀서의 악명은 아이돌의 평판에도 영향을 끼칠 게 자명했으니까.
소녀연맹에게 무슨 일만 생겨도 ‘그 부모에 그 자식임 ㅋㅋ’ 같은 말이 떠돌 것이다.
안티들에게 떡밥을 줬다고 생각하니 소름 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성필 빛나솔 나가서 소녀연맹 홍보하겠답시고 이름 팔아먹는 거부터 별로였음]
[아니 이왕 나갔으면 적당히 처신 잘하지 왜 계속 병크 터뜨림?]
[근데 일 때문에 사라진 거면 소련이들한테 뭐 사건 터졌단 거 아냐? 아예 안 갔으면 그건 또 실망인데…….]
인민이들은 성필을 욕했다.
그들은 소녀연맹을 사랑하는 것이지, 그 프로듀서인 성필을 사랑하는 게 아니니까.
소녀연맹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사람이면, 그게 누구이든 까는 게 당연하다.
이는 신아름이 성필이 과하게 걱정한 이유 중 하나였다.
평소 애정하는 팬들이 애정하는 성필을 욕하니, 도저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던 것이다.
[걍 다음 회에 잘 해결했음 좋겠다…….]
인민이들은 성필이 이상한 짓을 하지 않고, 적당히 사태를 수습하기만 바랐다.
더는 소녀연맹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길…….
그런 생각은 KS 엔터의 발표 자료로 확 뒤집혔다.
[SNS에서 케이어스 에리카가 해명했는데?]
발단은 에리카의 개인 SNS에 올라온 글이었다.
그 글엔 성필이 갑자기 김하슬을 바람맞힌 이유가 적혀 있었다.
에리카의 믹스테입 계획. 그에 성필이 협력 프로듀서로 참가. 하지만 KS 엔터에서 믹스테입 계획을 불허. 에리카의 방황. 그리고 협력 프로듀서인 성필의 도움까지…….
[도망?]
[숙소에서 갑자기 나가?]
먼저 사태를 안 건 케이어스 멤버들이라고 한다. 갑자기 에리카가 밤에 나갔는데 연락이 없으니, 회사에 에리카가 사라졌다고 보고한 것이다.
당연히 KS 엔터도 혼비백산하여 에리카에게 연락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
KS 엔터는 에리카를 알 만한 사람 모두에게 연락을 돌렸고, 그중 믹스테입 협력 프로듀서인 성필이 있었다.
성필은 에리카의 믹스테입 일로 책임감을 느꼈는지 그녀를 찾으러 갔다고 한다. 바로 그날이 김하슬을 바람맞힌 날이다.
[사람이 사라졌는데 찾으러 가야지…….]
사실, 에리카는 성필에게 사과하러 가려고 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리카와 함께 도와줬는데, 믹스테입은 발표할 수 없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리카와 성필은 에리카를 만나 믹스테입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KS 엔터로 잘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게 대략적인 요약이었다.
사람들은 당연히 더 자세한 이야기를 요구했다. 그렇게 조금 있자니, 기다렸단 듯 여러 신문사가 KS 엔터에게 받은 보도자료를 게시했다.
주로 에리카의 믹스테입에 관한 이야기였고, 말미엔 에리카가 성필에 대해 고마우면서도 죄송스러운 마음이란 말을 덧붙였다.
거기까지 접한 인민이들은…….
[……왜 박성필 이사가 케이어스 믹스테입에 협력 프로듀서로 참가함?]
그와 같은 시각, 이 소식을 접한 케이어스 팬덤 유스에서도 난리가 났다.
인민이들과 다른 점은, 그 난리란 게 에리카의 이야기에 집중되었단 것이다.
[우리 에리카 생각하는 거 너무 예쁘다 ㅜㅜ]
에리카가 SNS에 올린 글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그녀의 이야기를 미담 수준으로 격상시키는 중이었다.
에리카의 아티스트십이 어떻니.
수많은 악기를 다루는 데다 작곡 실력도 좋니.
믹스테입 발표가 허락받아서 다행이라느니.
우리 재간둥이 천년만년 사랑해라느니…….
그렇게 한동안 에리카를 앓다가, 다음 관심은 성필에게로 옮겨갔다.
[우리 에리카가 박성필 프로듀서 욕먹는 거 때문에 많이 심란하구나…….]
그러면 뭐…….
* * *
무기력한 기운이 지배하는 방송국 편집실 밤.
온갖 프로그램의 PD들은 감옥 같은 편집실에 갇혀 멍하니 화면만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팀원들과 야식과 커피를 축내고 다시 감옥에 갇힌다.
오늘도 그런 일상이 반복되어야 했을 것이다.
“PD님 시청자 게시판 터졌어요!”
“왜 또. 디씨 같은 데서 또 뭐 테러해? 그 새끼들은 왜 또 지랄…….”
“아, 아이돌 팬덤에서요!”
“뭐? 걔네가 왜?”
PD는 자초지종을 전부 전해 들었다.
그러니까…….
“성필 씨가 그날 하슬 씨 놔두고 간 게…….”
“케이어스 에리카 때문이래요. 에리카가 무슨 작업 때문에 잠시 사라졌었대요. 그거 찾으려고…….”
“사람을 찾으려고?”
“네. 그, 회사 차원에서 해명하는 거 같아요. 막 기사도 쭉 도배되고…….”
“성필 씨네 회사?”
“아뇨, KS 엔터요.”
“……???”
이해가 잘 안 된다.
일단 PD는 시청자 게시판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예능의 시청자 게시판이란, 시청자들이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떼거리로 몰려와 감정을 배설하는 공간이다.
PD들 사이에선 절대 보면 안 되는 공간으로 통한다.
심지어 실명제인데도 꼴이 말이 아니다.
분명 실명제인데…….
[사람 한 명 각 잡고 죽이니까 기분 좋으십니까?]
[사람 없어졌대서 찾으러 간 게 잘못입니까? 그럼 그 상황에서 하하호호 데이트 했어야 합니까?]
[PD도 욕먹어야겠지? PD도 욕먹어야겠지? PD도 욕먹어야겠지? PD도 욕먹어야겠지?]
[여하튼 개비씨 새끼들 옛날부터 하나도 안 변하네 ㅋㅋㅋ 사람 자살해도 시청률 높이면 승진하냐?]
[앞으로 PD님 담당하시는 프로그램 게시판마다 관련 글 올립니다. PD님도 당해보세요.]
[일 때문에 갔다는데 이해해주진 못할망정 사람 쓰레기로 만드냐? 제작진은 일 때문에 약속 파토 낸 적도 없냐?]
[PPL 너무 역겨운데 좀 적당히 받으세요. 박물관 데이트하다 갑자기 샌드위치 먹으러 나가는 게 말이 됨?]
[걍 성필이 업무 때문에 약속 깼다고 간결하게 표현하면 되지, 굳이 김하슬 청승 떠는 걸 10분 동안 보여줘야 함? 그냥 성필이 죽으란 거지?]
[식물 갤러리에서 왔습니다. 다육이 추천해주세요.]
새로고침을 한번 누를 때마다 글이 몇 개씩, 수십 개씩 올라온다. 심지어 죄다 원색적인 비난이었다.
“…….”
PD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스마트폰 액정을 눌렀다. 시청자 게시판도 이따위인데, 다른 커뮤니티는 어떨까?
아이돌 팬덤이 극성인 건 방송가 사람들이 다 안다.
실명제인 시청자 게시판도 점령할 정도라면, 익명제인 다른 커뮤니티는 어떤 꼴일지 안 봐도 뻔하다.
떨리는 손가락이 게시글을 하나둘 살펴보던 중, 갑자기 화면이 멈췄다.
그리고.
[페이지를 표시할 수 없습니다.]
게시판이 터졌다.
“PD님!”
PD가 쓰러지려는 것을 부하 직원이 겨우 부축했다. PD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시바 또 뭐 남았냐?”
성필이 정신적 고통을 호소했다면서 인터뷰까지 하면 그림 아주 완벽해지겠네…….
PD는 부축을 떨쳐내며 가볍게 말했다.
이런 걸로 충격받을 멘탈이라면 PD가 되지도 못했다. 그게 미디어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인간의 마음가짐이다.
“별거 아니야. 성필 씨만 딴마음 안 품고 뭐 이상한 거 안 올리면 돼. 어차피 다음 회에…….”
“근데 저, 이거 보고 저도 깨달았는데요. 박성필 출연자도 앙심 같은 게 있지 않을까요. 욕을 그렇게 먹었는데…….”
“…….”
원래 연애 예능 출연자들은 잘하건 못하건 욕을 먹는다.
어떤 출연자에게든 과몰입하는 시청자가 생기니, 상황이 안 좋아지면 누구든 욕을 먹는 법이다.
출연을 결정해놓고 왜 내가 욕먹느냐며 화내는 출연자가 이상하긴 한데, 이건 상황이 너무…….
* * *
“경섭이 네가 아름이 숙소로 좀 데려다줘라.”
“형은 어떡하시게요?”
“난 빨리 합숙소 가봐야 할 거 같…….”
가로 엔터를 나오던 성필, 민경섭, 신아름.
세 사람 모두 걸음을 멈추었다.
한여름의 낮은 길다. 심하면 8시가 지나도 햇빛이 사라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현재가 그랬다. 분명 밤일 텐데, 햇빛이 남아 밤의 푸름과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그런 오묘한 분위기 속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박 이사님.”
에리카였다.
그녀가 이쪽으로 다가오자 신아름은 민경섭의 뒤에 몸을 반쯤 숨겼다. 전에 에리카에게 욕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그런 신아름을 보고, 에리카는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신아름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카 씨? 여긴 어떻게, 아니, 왜……?”
“기다렸어요. 오늘 일 때문에 작업실 못 오신다고 하셨잖아요. 바쁘신데 괜히 연락드리면 부담가지실까 봐, 기다렸어요.”
‘여기서, 계속’.
에리카의 말엔 그 말이 생략된 듯했다. 그녀에게선 오래 기다린 사람이 가질 법한 처량함이 느껴졌다.
마치 철 지난 일본 로맨스 영화의 여주인공처럼, 하염없이 상대를 기다린 것마냥.
“경섭아.”
“네.”
민경섭은 신아름을 데리고 주차장 쪽으로 빠졌다. 신아름은 민경섭을 데리고 가면서도 계속 에리카와 성필을 힐끔거렸다.
“보셨어요?”
신아름과 민경섭이 사라지자마자, 에리카가 물었다.
무엇을 보았냐는 건지,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성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때문에 나쁜 말 들으시는 거 보고, 제 책임이라고 느꼈어요. 그래서 제 나름 어떻게 해봤는데…….”
에리카가 양손을 꼭 모으고 성필을 응시했다. 칭찬을 기대한단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어떨까요?”
도움이 됐나요?
그리 물으며, 에리카는 성필의 답을 기다렸다.
이 정도면 성필을 향한 충분한 보은이 됐을 것이다. 아니, 그걸 넘어 성필이 감동할지도 모른다.
에리카는 자신의 평판까지 희생해가면서 이 일을 벌인 것이니까. 회사에게 받아들여질 리 없는 부탁을 했고, 그게 기적적으로 통과됐다.
‘박 이사님은 알아주실 거야.’
여기에 도달하기까지 에리카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겪었을지. 그리고 또 얼마나 노력했을지.
부탁하는 것도 용기다.
에리카는 성필을 위해 용기를 냈다.
그러니 분명, 성필은 고맙다고 해주겠지.
‘우시면 어떡하지? 날 위해 이렇게까지 해줘서 고맙다고. 그럼 좀 곤란한데. 너무 자주 우는 걸 보면 희소성이…….’
“에리카 씨.”
성필이 그녀를 불렀다.
에리카는 당황했다.
성필의 표정은 그녀의 기대와 달랐다. 괴로운 얼굴이었다.
“왜 그러셨어요?”
아, 그런 거구나.
회사에 말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왜 굳이 그랬냐고.
걱정해주는 거…….
“이러면 하슬이가 욕먹잖아요.”
“……네?”
“제가 잘못한 거였어요. 이유가 있어도, 사람과 약속을 해놓고 어긴 건 잘못이에요. 심지어 남들 다 이해할 이유는 아니었어요. 저는 욕 먹어도 어쩔 수 없다지만, 하슬이는 아니잖아요.”
에리카는 머리가 멍했다.
1+1이 2가 아니란 소리를 들은 기분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게 전혀 당연하지 않았을 때의 기분.
성필은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그런 입장에 처하면 당연히 화를 내요. 나였어도 화내요. 애인 사이라도, 부부 사이라도 화내요. 하물며 아직 사귀지도 않은 사람한테, 잔뜩 기대했는데도 바람맞으면 화가 나죠. 그런데 하슬이는 딱히 화내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가라면서 보내줬고, 그 뒤로도…….”
성필은 말을 삼켰다.
“이러면 하슬이가 나쁜 사람 되잖아요.”
“……그렇지만.”
에리카는 멍한 정신을 겨우 붙잡아 논리적인 언어를 만들어냈다.
“박 이사님은 그분 때문에…….”
“제가 욕먹었으니 다른 사람도 욕먹게 만들어도 된다고요? 네, 만약 소녀연맹 애들이라도 엮였다면 저는 그랬겠죠. 근데, 내 일이었어요. 해결해도 제가 해야 했고요. 그리고 저는 남이 저를 찔렀다고 상대도 찔러야 한다고는…… 생각 안 해요.”
“…….”
“에리카 씨는…… 아이돌이에요. 엄청 유명한. 라이브에서 아무렇지 않게 입은 옷이 순식간에 절판되거나. 에리카 씨가 방문했던 장소에 손님이 수백 수천 명 오게 할 수 있는. 그런 아이돌이요. 본인의 힘을 좀 더 아셔야 해요. 지금 하슬이 SNS 테러당하고 난리도 아니에요.”
에리카는 거의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
“아, 저, 아, 저는…….”
그리고 겨우 더듬지 않고 말했다.
“박 이사님을 도우려고, 돕고 싶어서…….”
갑자기 에리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상황에 맞춰 변명하려던 것을 멈추고, 그녀는 자신이 진정으로 궁금했을지도 모를 것을 물었다.
제정신이 아니어서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에리카는 물었다.
“그분을 사랑하시나요?”
“사랑하려고 노력했어요.”
“…….”
에리카는 가냘프게도 떨었다.
그녀는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았다. 당장 1초 후의 미래조차 예상하지 못하기에, 그녀는 두려움에 떠는 수밖에 없었다.
에리카는 오직 선의로 이 일을 했을 것이다.
대체 KS 엔터가 에리카의 부탁을 왜 들어줬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쨌거나 상황이 이렇게 됐다.
그 모든 일은 에리카의 선의로부터, 성필을 향한 호의로부터 시작됐다.
성필은 깊은 한숨을 쉬며 에리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가 어깨를 떨면서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이돌…….’
성필은 아이돌을 선망하고 동경한다.
케이어스는 그 정점이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 그냥 어린아이다.
본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어린아이.
본인이 좋은 마음으로 행한 일이, 상대에겐 전혀 좋은 일이 아니란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다.
이런 아이와, 어른인 성필이 어떻게 사리(事理)를 논할까.
“그래도 에리카 씨의 마음은 알겠어요. 저를 도와주시려고 한 거죠. 그 마음은 감사해요. 정말 감사하고 있어요. 회사를 설득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을 텐데. 저를 얼마나 생각하셨는지 알겠어요. 고마워요.”
에리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슬픔을 그득 매달고 있었다.
성필이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보지 못한 표정이었다. 아이돌로서의 표정이 아니라, 사쿠라바 에리카로서의 표정이었다.
에리카의 목소리에 물기가 담겼다.
“민폐였나요?”
천천히 걸어간 성필이 마침내 에리카의 앞에 섰다.
에리카는 몸의 중심을 뒤로 물린 채였다. 도망가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만약 성필이 ‘네’라고 답하는 순간, 수치를 참지 못하고 도망갈 사람처럼 보였다.
“민폐긴요.”
그래, 아이와 어른이 어떻게 사리를 논하겠는가.
어른은 아이의 잘못을 품어주는 게 일이다. 잘잘못을 따지는 건 사랑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
그게 성필이 신아름과 지내면서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비록 흥분해서라지만, 잘잘못이라면 아까 따졌으니 이젠…….
“고마웠어요.”
달래야지.
“제가 에리카 씨를 찾으러 갔을 때, 에리카 씨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었어요.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누군가 자신을 찾아와준 거요.”
“기분 나쁘단 소리잖아요…….”
“아, 그랬었지. 기분 나쁘다고 하셨었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에리카가 고개를 저었다.
성필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질 때마다, 뒤로 물러났던 그녀의 몸도 점점 원래의 위치로 돌아왔다.
“저는 도덕률로 결과론보다 선의지(善意志)를 믿는 편이에요. 고맙단 말 진짜예요. 솔직히 감동했어요.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긴 했지만, 제가 에리카 씨한테 화낼 일은 없어요.”
에리카는 성필의 기색을 불안하게 살폈다. 그리고 쭈뼛쭈뼛 주먹을 들어 올렸다.
“토모(친구)?”
마치 그 답만 받으면, 자신의 행동이 용서받는단 투였다. 그래서 성필은 흔쾌히 그녀와 주먹을 맞추었다.
“네, 토모(친구).”
그 순간, 성필이 에리카를 향해 품은 아이돌리즘은 완전히 끝을 고했다.
프랑스의 옥상, 은은한 담배향 속에서도 느꼈던 감정이라 새로울 것도 없었다.
“어디, 데려다 드릴까요?”
성필의 목소리는 이전과 살짝 달라져 있었다.
아이돌을 향한 기대감이 완전히 사라졌으니까. 그의 목소리엔, 에리카를 향해 ‘이래야 한다’라고 말하는 압박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에리카도 성필처럼 프랑스에서의 옥상을 떠올렸다. 그녀가 성필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떠올랐다.
성필은 에리카 자신에게 어떤 기대도 없다.
사람들의 기대를 본능적으로 충족시키며 살아왔고, 그로써 게임의 공략집을 손에 넣은 그녀로선 생소한 반응이었다.
생소한 반응이지만, 성필에게선 익숙한 반응이다.
그때도 이렇게 생각했었다.
성필은 자신을 인간 대 인간으로서, 인간 자체로 존중한다고 말이다.
“부탁드려도 될까요?”
“어디로요?”
“숙소요.”
“으아, 그럼 숙소 근처까지만 갈게요.”
“왜요?”
“제가 케이어스 숙소를 알면 안 되죠.”
“아, 하긴.”
“‘하긴’은 뭐예요?”
“그래도 괜찮을 거 같기도 하고요.”
“괜찮긴 뭐가요.”
에리카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 프로듀서님이잖아요.”
그에 성필은 어색한 웃음을 띠며 답했다.
“협력 프로듀서예요.”
둘 다 얼굴에 웃음을 걸었다.
상반된 의미와 깊이와 감정으로.
프랑스에서 시작된 동상이몽은 부산의 바닷가를 거쳐, 가로 엔터에서 완성됐다. 끝까지 같은 꿈이 되지 못한 채로.
케이어스의 에리카는 없다.
사쿠라바 에리카만 남았다.
* * *
가로 엔터 대회의실에 정적이 몰아쳤다.
모두의 시선은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번쩍 손을 든 조아라에게로.
“……아라야.”
성필이 부르자 조아라는 능청스레 대꾸했다.
“어.”
“‘어’?!”
“왜요.”
“장난 치는 거 아니지?”
“내가 그렇게 눈치 없게 보여요? 진심이에요.”
조아라가 자랑스레 가슴을 폈다.
“내가 ‘우리들의 프로듀싱’ 두 번째 타자예요. 내가 해요.”
첫 자발적 프로듀서,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