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73화 (473/760)

473화

에리카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아니요, 그럴 생각은…….”

“너 굉장히 착각하고 있어.”

남홍범은 눈동자를 천천히, 그리고 넓게 움직여 방을 전체적으로 훑었다. 에리카도 자연스레 그의 시선을 따랐다.

그 느릿한 시선이 알려주는 건 하나뿐이었다.

방이 넓다.

남홍범은 이토록 넓은 개인 집무실을 소유하고 있다. 남들은 좁은 책상 하나 받고 아등바등 지내는데 말이다.

“정호환 이사가 아무 때나 봐주니까 이사란 게 우습게 보여? 네가 만나고 싶을 때마다 만날 수 있는 위치인 줄 알아?”

“…….”

“우리 회사 산하 레이블, 기획사 제외하고 본사에 소속된 아티스트만 백이다. 넌 그 백 명 중 하나야. 케이어스, 전무후무한 히트, 뭐 그런 말 따라다니니까 네가 뭐라도 된 거 같지? 막 회사가 너 아니면 안 돌아갈 거 같지?”

에리카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려고 한 건 아니었다.

다만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을 수 없었다. 머리 위에서 뭐가 누르는 것만 같았다.

“다 그랬어 다. 우리가 내놓는 아이돌은, 그룹은, 항상 전무후무한 히트를 쳤다고. 네가 특별해? 아니. 곧 있으면 너희 동생 그룹 나온다. 걔네는 너희보다 더 성공해. 또 3년 지나면 그 동생 그룹도 나와. 걔네는 너희랑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공할 거고.”

“…….”

“너는 그런 애들 백 명 중 하나지만, 나는 그런 애들을 관리하는 이사인 거야. 막 찾아와서 고개 뻣뻣이 세우고 ‘해주세요’ 하면, 내가 ‘네 케이어스님이 부탁하신 거니 해드려야죠’ 할 거 같냐?”

“그럴, 그런…….”

“부탁을 고르는 것도 예의다. 때를 맞추는 것, 볼 장소를 고르는 것도 예의고. 하물며 소유도 나랑 만날 때는 타이밍을 맞추고, 꼭 봐야 하면 비서한테 먼저 연락을 해. 넌 뭐냐?”

“급…….”

“급하면 아무 때나 찾아온단 거냐!”

에리카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남홍범의 말 중 사리에 맞지 않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에리카는 착각하고 있던 것이다.

KS 엔터의 이사라는 정호환이 너무나 살갑게 대해주니까. 회사 직원들 모두 케이어스를 떠받들 듯이 칭찬하니까. 그러니, 자신이 굉장히 높은 사람인 줄로 착각했다…….

그의 말에 틀림은 없다.

“게다가 찾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아니, 말하기도 싫다. 나가 봐.”

에리카는 낭패감을 참듯 숨을 헙 들이켜더니,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더욱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남홍범은 그녀가 나가는 것을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나가자마자 질끈 눈을 감고 숨을 후 뱉었다.

‘호환이는 애들한테 너무 물러.’

에리카가 도망간 일을 계기로 더 물러질 것 같다. 이 일로 크게 혼내지 않은 것만 보아도 그렇다.

이번 일로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면, 에리카의 행동이 어디까지 뻗어나갈까?

‘진짜 회사 알기를 뭐 같이 알 수도 있어.’

남홍범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권력욕이라고 믿는다.

금기라고 믿어왔던 것을 하나 깨면, 다음 금기를 깼을 때도 궁금해한다. 사실 이것도 별거 아니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며 조금씩 선에 발을 걸친다.

그런 사람을 한둘 보아온 게 아니었다.

연예인뿐 아니라 직원들도 그러하다.

‘연차가 쌓이고 나이를 먹어갈수록 대가리만 굵어져선…….’

남홍범은 잠시 자기가 했던 발언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에리카의 반응까지 회상했다.

몇 번 고개를 끄덕인 그는 작게 ‘좋아’라고 말했다.

‘이 정도면 알아먹었을 거야.’

그럼 이제…….

* * *

“급하게 모여줘서 고맙다.”

남홍범은 회의실에 케이어스를 담당하는 각 파트의 중책들을 불러 모았다.

두 명이 함께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학교 교실처럼 빽빽이 들어찬 공간이었다. 그 앞 강단엔 남홍범이 서 있었다.

그는 잠시 모인 면면들을 훑어보았다.

약 10명이 넘는데…….

“아트 디렉팅, 퍼포먼스 디렉팅, 뮤직 프로듀싱, 너희는 왜 왔어?”

“예? 어, 급한 일이라고 하셔서…….”

“케이어스 관련 담당은 전부 모이라고…….”

“나가. 너희는 없어도 돼.”

호명된 팀장급 인사들이 다행이란 얼굴로 호다닥 회의실을 나섰다.

그들이 나가자, 남홍범은 노트북을 조작하여 프레젠테이션을 띄웠다.

이 나이 먹고 직접 PPT를 만져볼 날이 오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평소엔 부하들이 죄다 만드니 말이다.

하지만 상황이 급하기도 하고, 별로 힘든 작업이 필요하지도 않으니 직접 했다.

프로젝터 스크린에 현재 상황을 설명하는 글이 떴다.

남홍범은 직원들이 그것을 다 읽을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자, 상황은 다 이해했지?”

가로 엔터테인먼트의 박성필이 이미지 타격을 입고 있다.

도망간 에리카를 찾으러 갔기 때문이다.

에리카는 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있다.

KS 엔터도 에리카가 더 큰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 찾아준 성필에게 빚을 진 것과 같다. 그럼 성필과 KS 엔터 모두 윈윈할 수 있는 방법은?

그때 홍보 1팀장이 손을 들었다.

“어, 말해.”

“에리카가 도망갔단 걸 밝히신단 뜻인가요?”

“해야 하면. 여기서 ‘해야 하면‘이란 건 그 사실을 밝힘으로써 우리 쪽이 피해를 입지 않거나, 피해보다 높은 보상이 존재함을 뜻해.”

메모하는 소리 외엔 침묵뿐이었다.

갑자기 불러 모아서 어떤 사태의 해결법을 제시하란 것 자체가 과한 요구긴 하다. 적어도 몇 시간을 주어야 그럴듯한 해답이 나올 것이다.

남홍범은 검지로 눈썹 끝을 긁적이며 물었다.

“생각 있는 사람 없어? 시간 뭐 얼마나 더 줄까?”

팀장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남홍범의 의도는 대략 알겠다. 그러나 제대로 된 해법은 팀으로 돌아가, 팀끼리 따로 회의를 거쳐야 나올 것이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는데.

“저.”

매니지먼트 1팀장이 손을 번쩍 들었다.

남홍범이 반색하며 그에게 말해보란 뜻으로 손짓했다.

1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케이어스를 담당하는 매니지먼트 1팀 팀장입니다.”

“알아.”

“저는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을 챙겨봅니다. 상황이 어떤지 알고 있습니다.”

“얘기가 빠르겠네. 좋은 생각 있나?”

“그냥 밝히죠.”

남홍범이 흥미롭단 듯 눈썹을 꿈틀댔다.

“해답부터 바로 제시하는 두괄식 어법, 마음에 드네. 그래, 밝힌다고? 이유는?”

“매니지먼트팀 소속으로, 홍보팀이랑 A&R, 다른 디렉팅 팀 앞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송구스럽기도 하지만…….”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케이어스의 이미지 브랜딩에 관해 한 말씀 올리고 싶습니다.”

케이어스의 이미지 브랜딩.

그건 프로듀싱의 영역이다.

과연, 남홍범은 왜 1팀장이 밑밥을 깔았는지 알 수 있었다. 1팀장은 남홍범이 제시한 사태의 해결법을 프로듀싱의 영역에서 해결할 생각이다.

케이어스의 이미지를 관리하는 프로듀싱 파트의 팀들에겐 불쾌할 수도 있는 일이다.

“에리카가 믹스테입을 제작한 데서 착안한 겁니다만. 정호환 이사님께 들어보니 곡의 퀄리티가 꽤 괜찮다고 합니다. 발표하면 팬 사이에선 호응을 얻을 수도 있을 거라고요.”

“그렇다더라. 그렇지만 회사 차원에서의 홍보는 없어.”

아이돌이 믹스테입을 내는 경우가 드물게 존재한다. 본인이 창작 능력이 있지만 회사 차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믹스테입을 표현 욕구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물론 이 믹스테입의 취지가 퇴색할 때도 있다. 아예 회사 차원에서 믹스테입을 도와주고 홍보하는 경우이다.

창작돌이라는 이미지를 강화하여 팬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뭐, 설마 에리카가 도망간 사태를 아예 밝혀서 믹스테입 홍보용으로 쓰자는 건 아니지?”

“아닙니다. 저희가 기사 한 줄 고픈 중소도 아니고요.”

“그럼?”

“케이어스에게, 아니. 대형 기획사 아이돌이 얻을 수 없는 이미지를, 이 기회에 얻을 수 있습니다.”

“대형 기획사 아이돌이…… 얻을 수 없는 이미지?”

“성장 서사입니다.”

아이돌 팬들이 미치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성장 서사이다.

작은 회사에서 배곯으면서 연습하던 이들이 빵! 대중의 주목을 받으며 확 뜬다던가.

몇 년 동안 실패만 이어가다 해체하려던 시점에 역주행을 기록한다던가.

팬들은, 아니 팬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그러한 인간 승리와 성장에 열광하는 법이다. 괜히 성장이란 키워드가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의 장르로 자리 잡은 게 아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팬들이 아이돌에 몰입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아의 의탁입니다. 아이돌의 성공을 본인의 성공으로 여기는 것. 현실에선 불가능한 자아실현의 욕구 충족을 아이돌에 의탁하여 달성하는 것. 굉장히 중독성 있으면서도 쾌감이 강력하죠.”

자신이 응원하는 이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정상에 발을 걸친다.

그러한 이야기에 진정으로 몰입하면, 다른 데선 쉽게 얻을 수 없는 쾌락을 느끼는 게 가능하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주인공이 성공하는 것도 카타르시스를 느끼는데, 현실에서 응원하던 이들이 성공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심지어 그들의 성공에 자신이 일조했다면?

그건 마치 성공한 혁명에 가담했던 시민의 기분과 같을 것이다. 자신이 근본적으로 역사를 바꾸었다는 자부심이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는다.

“그렇지만, 저희 같은 대기업의 그룹은 선천적으로 그러한 성장 서사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자기 증명 과정이랄 게, 대중에게 보여줄 수가 없잖습니까.”

“그렇지. 대형 기획사 아이돌에겐 뮤지션들이 필수적으로 거치는 증명 과정이 생략되니까.”

모든 뮤지션이 데뷔부터 뜰 수는 없다.

꾸준히 앨범을 발매하고, 팬을 모으며, 대중의 인정을 받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진정한 뮤지션이 된다.

진정한 뮤지션. 즉, 상업성의 증명이다.

사람들에게 ‘이 사람 곡은 들어볼 가치가 있어’라거나 ‘앨범 한 장 사볼까’란 생각이 들 수준까지 가는 것.

그게 바로 뮤지션의 자기 증명 과정이다.

“맞습니다. 대형 기획사 아이돌은 증명 과정이 없습니다. 따라서, 성장 서사를 쓸 수도 없습니다. 아이돌에게 무엇보다 효과적인 전략을요.”

대형 기획사 아이돌은 데뷔 자체가 본인 실력의 증명이다. 데뷔하는 순간 상품으로서의 품질 증명이 끝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이 연습생으로 지냈던 몇 년의 세월이.

그리고 그 세월 끝에 정호환과 같은 유명 프로듀서가 뽑아주었단 사실이.

그 프로듀서가 그들을 프로듀싱했단 사실이.

그들에게 검증받아야 하는 무엇이 아니라, 이미 검증이 끝난 완성품의 자격을 부여한다.

그곳엔 성장이 없다.

이미 성장을 마친 결과물만 있을 뿐.

대형 기획사의 무기는 바로 그 결과물이다.

완벽하고 무결한 완성품.

여타 아이돌과 감히 비교하기 힘든 퍼포먼스와 비주얼, 이미지.

“그런 아이돌은, 그러니까 케이어스는 데뷔에서부터 끝에 선 겁니다.”

다른 뮤지션들이 몇 년을 공들여 진행해야 할 증명 과정을 데뷔부터 끝냈다.

사람들은 케이어스가 아니라, KS 엔터를 믿는다. 그래서 데뷔했을 뿐인 신인, 케이어스의 곡을 듣고 앨범을 산다.

왜?

KS 엔터라는 인증 마크가 찍혀 있으니까.

비록 대중들은 볼 수 없었지만, 케이어스 멤버들이 저마다 눈부신 재능을 가졌으며 뼈를 깎는 노력을 거쳤으리라고 믿으니까.

“그런데 에리카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성장 서사를 담고 있습니다. 회사와의 불화, 방황, 그리고 마침내 돌아와서 인정받다. 이 자체로 굉장히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1팀장이 뒤로 돌아 다른 팀장들에게 말했다. 마치 호소하듯이.

“저희도 쓸 수 있습니다.”

성장 서사를.

“저희도 쓸 수 있게 된 겁니다.”

성장 서사의 상품화를.

1팀장은 몰랐지만, 이는 성필이 줄곧 추구해왔던 것이었다.

비주얼과 퍼포먼스의 집합체인 아이돌을 넘어서, 이야기마저 상품으로 바꾸어 대중들에게 선보이는 것.

“성장이란 달콤하고도 매력적인 이야기를 말입니다.”

소녀연맹이 그러했던 것처럼.

소녀연맹이 케이어스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써왔던 것을.

“저희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심지어 꾸며낸 게 아니라, 대중이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진실성이 가득하다.

왜냐고?

“박성필 이사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야기가 방송에 나간 순간부터, 에리카의 성장 서사는 의심받지 않을 겁니다.”

대기업이 돈 벌려고 소설 쓰네. 그런 평가를 받지 않을 것이다.

에리카의 이야기는 순도 100%의 사실이다.

성필이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에서 보여준 이야기와 엮는다면, 그건 거짓이 될 수 없다.

사실이기에 호소력이 있다.

“저는 이게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니 요청합니다. 밝히죠, 이사님. 물론, KS 엔터에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다듬고 다듬어서요. 이야기엔 힘이 있습니다. 진실된 이야기엔 더 큰 힘이 있습니다. 저흰 그 힘을 얻었습니다. 쓰지 않으면 손해입니다.”

* * *

KS 엔터 옥상 흡연 구역.

1팀장과 강동현 수석 프로듀서는 함께 담배를 태웠다. 아니, 강동현은 곁에 서 있을 뿐 담배를 피우는 건 1팀장뿐이었다.

“너, 넌 말을 어떻게 그렇게 잘하냐?”

강동현이 존경스럽단 듯 말했다. 그러자 1팀장은 무대에 선 배우처럼 팔을 쫙 펼쳤다.

“더 칭찬해봐.”

“진짜 부럽다…….”

강동현이 진심을 담아 말하자 1팀장은 부끄러워하면서 팔을 내렸다.

“야, 이런 거 아무것도 아니야. 매니저로 살다 보면 다 익히는 거야. 오만 사람 앞에서 구걸하고 부탁하고 하다 보면 혀에 자동으로 기름칠 되지.”

“나도 매니저 할걸.”

“네가?”

“못 하겠지……?”

“아니, 회사의 손해지 네가 매니저를 하면. 넌 그 자리에 있는 게 딱 어울려.”

1팀장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그러고도 흥분이 가시지 않아 또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이게 온전히 내 덕이냐? 다 네 생각이잖아.”

실제로 그러했다.

1팀장과 강동현은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강동현은 남홍범의 설명을 듣자마자 홀린 듯이 노트에 무언가를 적었었다. 바로, 1팀장이 혼신의 힘을 다해 남홍범에게 호소한 그 내용을 말이다.

“나, 나는 제대로 얘기도 못 했을 거니까…….”

“하긴, 네가 하려고 했으면 어버버거리다가 볼 장 다 봤겠지.”

“고마워.”

“나중에 이사님한테 제대로 말해.”

“응…….”

강동현은 못내 불안한지 다시 물었다.

“잘되겠지?”

“지금 홍보팀에서 보도자료 고심해서 쓰고 있을걸.”

“바로 발표해?”

“달아올랐을 때 빨리해야지. 홍보 효과를 최대한 볼 수 있을 때, 지금. 박성필 그 인간 한창 까이고 있는 지금.”

“도움이 되려나…….”

“미친놈.”

1팀장이 크게 웃었다.

“박성필 그 사람 돕겠다고, 그걸 앉은 자리에서 바로 다 생각한 거야?”

“에리카 찾아줬잖아. 불쌍하고. 그거, 커뮤니티에 글 보는데 내 오금이 다 저렸어…….”

“근데 그 성장 서사 뭐시기 그건 다 진심이야?”

“어느 정도는…….”

“어느 정도?”

“그냥, 보기 좋잖아. 가만 있어도 예쁜 애들인데, 뭐 해보겠다고 노력하는 모습은…….”

“알지. 그 소년기 특유의 뭔가 부서질 기세로 달려가는 그…… 그…… 부서질 듯한 아름다움! 청춘이 있지.”

“소녀연맹이 잘 보여주지, 그걸.”

“그러게.”

1팀장이 기분 좋게 연기를 들이마셨다. 그런 그를 보며, 강동현이 물었다.

“너 이사까지 올라가는 거야?”

“이 나이에 뭔 이사. 내 나이에 이사 되면 동네에서 잔치 열어주겠다.”

“아니, 지금 아니라도 나중엔…….”

“몰라. 해줄까? 해주면 좋겠다. 만약 새로 이사 선임한다고 하면 후보 지명은 되려나. 에휴, 그때까지 뭐 안 좋은 일 없어야 할 텐데.”

“뭐 나쁜 짓 하고 다녀?”

“아니!”

나쁜 짓이라고 해봤자, 진저 때문에 쇼핑몰 이직을 생각한 것 정도다.

“난, 올라갈 거야.”

강동현이 담담하게 다짐했다.

“언젠가 총괄 프로듀서가 될 거야.”

“어, 그래. 돼라.”

“같이 올라가면 좋겠지? 우리 막 대회의실에 같이 앉아 있고.”

“뭔 학교 올라가? 같이 가고 싶다고 가게?”

그래도 뭐…….

1팀장이 실실 웃었다.

“매니지먼트 이사 허의권, 괜찮다.”

* * *

남홍범은 집무실에 앉아 홀로 인터넷 여론을 살펴보았다. 그러고 있자니, 오랜만에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옛날엔 보도자료 잘 올라갔는지, 우리가 기사로 써달라는 내용 제대로 써줬는지, 직접 계속 체크하고 그랬었는데.’

그리운 젊은 시절의 추억이다.

‘……아니다, 별로 그립진 않네.’

그 시절엔 기자라고 갑질하는 인간들이 한둘이어야지. 손바닥 비비고 무릎 꿇고 하느라 피부가 성하지 않았었다.

남홍범은 인터넷 서핑을 멈추고 스트레칭하여 찌뿌둥한 어깨를 풀었다.

‘대강 우리가 바라는 그림이 나왔네.’

KS 엔터가 매니지먼트 능력이 부족하다고 의심받을 만한 서술은 최대한 쳐내고, 에리카의 아티스트적인 방황을 중심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그에 대한 덤이라고 할까, 아니면 본론이라고 할까, 성필이 김하슬을 바람맞힌 것을 변명하기도 했고.

남홍범은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이 뭐기에 그렇게 난리인지 1화를 보기까지 했는데, 꽤 재밌었다.

시청률 3%를 넘을 만하다.

이대로만 가면 올해의 시청률 탑 20에 무사히 이름을 올릴 것이다.

슬슬 퇴근할까 생각하던 순간, 내선 전화가 울렸다. 퇴근한 비서 대신 집무실 앞을 지키던 운전기사에게서 온 것이었다.

“뭐? 에리카가?”

[네,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홍범이 미간을 좁혔다.

자기는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또 아무렇게나 찾아온 건가?

일부러 사람 말을 무시하는 건지, 아니면 너무 기뻐서 자기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 건지…….

[이사님이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저어, 그게…….]

“뭐.”

[1시간째 서 있어서…….]

남홍범이 흠칫했다.

에리카가 한 시간 동안 기다리고 있어? 왔다는 말도 안 하고서?

남홍범이 거칠게 얼굴을 쓸었다.

‘얜 생각이 깊은 거야 없는 거야?’

아무 때나 만날 수 없다고 했더니, 집무실에서 나올 때까지 말없이 기다리다니.

이건 뭐 시위하는 것도 아니고.

“들어오라고 해.”

곧 짧은 노크와 함께 에리카가 나타났다.

남홍범은 그녀를 마주하지 않고 옷걸이에서 정장 재킷을 빼 입었다. 퇴근하려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행동이었다.

“또 왜 왔냐.”

“감사합니다, 이사님.”

에리카가 허리를 숙였다.

“됐어. 너 때문 아니야.”

“감사합니다. 또, 앞으로는 이런 일 절대 없게 하겠습니다. 시간 뺏어서 죄송합니다.”

그대로 에리카는 뒤를 보이지 않고,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과하게 예의를 차린다 싶을 정도의 태도로 물러났다.

“야.”

남홍범이 부르자 에리카의 뒷걸음질이 멈췄다.

에리카가 고개를 들었다. 불안한 얼굴이었다.

그녀를 향해 남홍범이 씨익 웃었다.

“뭐, 안 좋은 일 있었다고 마주치면 표정 싹 굳는 거 아니지?”

“네, 네?”

“마주쳤는데 화들짝 놀라면서 피하지 말라고. 그냥 혼난 건 순간이었다 치고 잊어.”

“……네.”

에리카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 * *

“경섭이 네가 아름이 숙소로 좀 데려다줘라.”

“형은 어떡하시게요?”

“난 빨리 합숙소 가봐야 할 거 같…….”

가로 엔터를 나오던 성필, 민경섭, 신아름.

세 사람 모두 걸음을 멈추었다.

“박 이사님.”

에리카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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