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70화 (470/760)

470화

오랜만에 케이어스의 숙소엔 평화가 깃들었다.

에리카와 정호환의 화해로 그녀는 믹스테입 발표를 허락받았다. 거기에 정호환은 계속 총괄 프로듀서 직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폭풍 같이 휘몰아치던 사건은 모두가 행복한 엔딩으로 끝을 맺었다.

“소녀연맹을 질투? 참나.”

멤버들이 다 함께 모인 식탁.

김민주는 고구마말랭이를 씹으며 말했다.

“정호환 이사님 되게 이상한 데서 섬세해.”

“그렇게 생각하고 계실 줄 몰랐슴미다. 이상하게 박 이사님한테 집착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슴미다.”

“알아보면 어쩌게. 걍 이사님 상황이 딱 이거야. 혼자 사랑하고 혼자 슬퍼하고 혼자 헤어지고. 뭐야 이게?”

김민주는 정호환의 고백을 받아들이기 힘든 듯했다. 그의 고백은 다르게 말하면, 케이어스가 소녀연맹보다 못하단 뜻도 되니 말이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

정호환이 말하는 영감이나 문화적 심미안 따위 하나도 모르겠다. 그저 은은한 패배감이 김민주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뭐 어때서.”

진소유는 샐러드를 아삭아삭 씹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사님 마음 편하시면 된 거지.”

“아니, 진짜 최악이 뭔 줄 알아? 담당 아이돌 앞에서 질투니 열등감이니…… 그럼 우리 꼴이 뭐가 돼? 언젠 우리가 최고라더니.”

“우린 최고야.”

진소유가 딱 잘라 말했다.

“정호환 이사님이 말씀하셨잖아. 부족은 우리가 아니라 정호환 이사님께 있는 거라고. 이사님 말씀 오독하지 마.”

“……진소유 너 오늘따라 왜 그래?”

“하양 언니 답장이 없으심미다.”

“아, 그래…….”

힘내라 진소유.

김민주는 불평을 멈추고 식사에만 집중했다.

정호환의 고백은 멤버들에게 저마다 다른 강도의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크게 걱정되거나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만약 케이어스가 소녀연맹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거나, 명백한 패배를 거듭하였으면 몰라도.

케이어스는 어떤 외적 조건으로 보아도 소녀연맹보다 우월했다. 그러니 다들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게다가 정호환이 반성하고 있다니, 정확한 그의 심정을 알 순 없어도 안심이 됐다.

그렇게 식사는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마무리됐다.

“진저.”

오랜만에 진소유보다 샤워를 일찍 하게 되어 기분 좋은 진저. 그녀는 샤워를 끝내고 돌아가던 중 에리카에게 불렸다.

“네, 언니.”

“오랜만에 같이 잘래?”

“웬일임미까.”

“생각보다 기뻐하질 않네. 옛날엔 곧잘 같이 자자고 졸랐잖아.”

“이제 저도 성인임미다. 언제까지고 언니 품에 있진 않슴미다.”

연습생 시절, 그리고 막 케이어스가 됐을 시점, 진저는 곧잘 외로움을 탔었다.

가끔 에리카에게 함께 자자고 하기도 했고, 아주 가끔은 진소유에게마저 동침을 청했었다.

당연히 요즘은 그러지 않는다.

특히 진소유에게는.

“그럼 안 올 거야?”

“으음…….”

2시간 후.

진저는 에리카의 침실로 왔다.

에리카의 방은 무드등 하나만 켜져 있었다.

진저가 들어오자 에리카는 이불을 들어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진저는 장난기 넘치는 미소와 함께 침대 위로 다이빙했다.

“성인이라며? 너무 들뜬 거 아냐?”

“하나도 안 들떴슴미다.”

진저는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최근 들어 에리카를 걱정하고 있었다. 에리카의 기분이나 낌새가 좋아 보이진 않았으니까.

그 예감은 최악의 형태로 들어맞았었다. 바로, 에리카가 연락 하나 없이 잠적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게 잘 풀렸다.

기분이 안 좋을 수 없다.

“불 끌게.”

에리카는 머리맡의 무드등을 껐다.

둘은 마주 보고 누웠다. 곧 암순응에 따라 서로의 얼굴 윤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에리카가 어린 동생을 돌보듯 진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었다.

“진저, 고향이 그립진 않아?”

둘만 있을 때의 대화는 자주 이런 식으로 흐르곤 했다. 두 사람 다 외국인이라 동병상련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딱히 땅이 그립진 않슴미다. 그리운 건 사람임미다. 엄마가 보고 싶슴미다.”

“연락은 자주 해?”

진저가 쓸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음 같아선 매일이라도 어머니에게 전화하고 싶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진저는 엄마가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모르니까.

‘근처에 아빠가 있으면 엄마한테 어떤 짓을 할지 몰라.’

진저의 아빠는 그녀가 아이돌이 된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만약 진저가 연습생이 되려 하지 않았다면 아빠는 큰돈을 만졌을 테니까. 딸을 판 대가로 말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절박한 애원으로 어쩔 수 없이 딸을 한국에 보냈다. 그리고 여태껏 땡전 한 푼 벌지 못한다.

아빠가 어머니를 좋게 볼 이유가 없다.

그래서 진저는 마음대로 어머니에게 연락할 수 없었다. 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안전하길 바랐으니까.

“가끔 엄마한테 전화가 옴미다. 언젠가 꼭 돈을 많이 벌어서 호강시켜드릴 검미다.”

“효녀네.”

“아직 효도한 적은 없슴미다. 예비 효녀임미다. 언니는 고향이 안 그립슴미까?”

“왜 안 그립겠어.”

그래도 살다 보니 적응이 된다.

십수 년의 추억이 서려 있는 일본과 비교할 순 없으나, 에리카는 천천히 한국에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가족이 보고 싶을 때가 자주 있지만, 이것도 자신이 선택한 길이니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친구도 많이 사귀었으니, 한국에서의 생활이 마냥 괴롭지만은 않았다.

“언니.”

“응?”

“케이어스 활동이 끝나도 가끔씩 만나주실 검미까?”

“가끔은 만날 수 있겠지. 자주는 아니고. 많아도 1년에 두세 번.”

“이상하게 정확해서 마음이 아픔미다…….”

“거리가 있으니까. 아, 마침 한국은 중국이랑 일본 중간이네. 일 년에 두 번 한국에서 정해두고 만날까? 외엔 만나고 싶은 사람이 찾아오고.”

“좋슴미다. 훈련소 동기들이랑 100일 휴가 때 만나자고 하는 느낌인 거 같긴 하지만, 약속하겠슴미다.”

“그런 비유는 누구한테 들었어?”

“1팀장님임미다.”

그렇군.

한국 남자들이 당연하단 듯 군대 이야기하는 것을 보자면 신기하단 생각이 든다.

일본에서 만난 남자 중 군대와 연이 있는 이들은 없었다. 그런데 한국은 만나는 남자마다 군대를 다녀왔다고 하니 말이다.

“언니, 저 졸림미다.”

“지금 자면 안 돼. 자면 죽는 거야.”

에리카가 뺨을 어루만져주자 진저는 배시시 웃었다.

에리카는 진저의 머리를 규칙적으로 쓰다듬었다. 그에 따라 진저의 눈도 서서히 감겨갔다.

그때 에리카가 문득 말했다.

“진저.”

“네…….”

“나 박 이사님 울렸다?”

진저가 눈을 번쩍 떴다.

“드디어 성공한 검미까? 무슨 노래 불렀슴미까? 아니면 춤임미까?”

에리카는 진저의 귓가 가까이 입술을 가져갔다. 그리고 간드러지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밀.”

“뭠미까…….”

진저가 맥이 빠진단 표정을 보이자 에리카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박 이사님한테 사랑한단 말도 들었다?”

“거짓말 잔치 벌이려면 민주 언니한테나 하는 게 좋슴미다. 저는 똑똑해서 안 속슴미다.”

진저는 잠을 청하려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곧 눈꺼풀이 게슴츠레 올라왔다.

“진짜임미까?”

그에 에리카는 또 미소만 짓더니.

“비밀.”

그리 말했다.

* * *

김민주의 연습실은 이제 에리카의 작업 공간으로 인정받은 지 오래였다. 그리고 성필도 에리카와의 믹스테입 교제를 정호환에게 정식으로 허락받은 참이었다.

연습실로 들어오는 그의 걸음이 옛날보다 힘찬 건 기분 탓이 아닐 터였다.

그리고, 에리카도 이전보다 훨씬 활기찼다.

“확실히 제가 너무 인정받는 데만 급급했어요. 지금 다시 보니 엉성한 부분이 많아요. 아, 물론 박 이사님과 함께했던 뮤직비디오를 부정하는 건 아니에요. 뮤직비디오는 그 자체로 괜찮다고 생각해요. 다만 걸리는 부분이 조금 있다고 할까요. 먼저 의상이에요. 뮤비 때 입었던 옷도 예쁘지만 분위기엔 살짝 어울리지 않는 느낌도 있어요. 만약 제가 한국으로 여행을 왔다면 저런 옷을 입었을까요? 아닐 거 같아요. 그리고 곡도 계속 만지다 보니 깨달은 건데, 자꾸 부족한 부분이 눈에 띄어요. 특히 리카가 지적한 부분들이요. 아무래도 리카의 전공은 일렉트로닉 베이스잖아요? 그래서 리카가 거는 태클은 그쪽 방면의 시야에서 보려고 했는데, 의외로 작곡 전반에서 중요한 영감을 담고 있어요. 솔직히 리카한테 도움을 받는다더라도 작곡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남겨두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이젠 적극적으로 도움을 받아볼 생각이에요. 뭘, 리카는 협력 프로듀서인걸요. 크레디트에 이름까지 새기는데 도움을 안 받는 쪽이 바보죠. 아, 그런데 리얼 사운드로 바꾼 건 정말 좋은 선택인 거 같아요. 비록 제 믹스테입이긴 해도, 어쩌면 케이어스 팬미팅이나 콘서트 막간에 선보일 수 있지 않을까요? 라이브 연주로요! 정말 아이돌이라서 다행이에요. 다른 뮤지션분들은 리스너를 확보하는 것부터 걱정하지만, 아이돌은 고정 청취층이 보장되니까요. 이 부분은 제가 아이돌이란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요. 조금 야비한 거 같기도 하지만, 아이돌이란 타이틀까지 더해서 사쿠라바 에리카니까요. 아, 그리고 믹스테입 수록곡들 있죠? 다른 뮤지션분들에게 도움을 청해볼까 해요. 아이돌 말구요, 뮤지션분들. 제가 눈여겨서 봐둔 분들이 계세요. 헤헤, 좀 떨리기도 해요. 저만의 걱정일 수도 있는데, 사실 제가 하는 일이 일반적인 아이돌이 할 만한 건 아니잖아요? 진정성이 의심받을 수 있다고 할까. 제멋대로 선을 넘는 기분? 뮤지션분들이 제 요청을 받으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솔직히 걱정이에요. 어린애들 장난으로 보시는 건 아닐까 해서요. 그래서 저, 회사에서 섭외에 도움을 주겠다고 했는데 그냥 제가 직접 연락드리게요. 필요하면 찾아가기도 하고요. 진심은 통한다는 말, 저는 믿어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을요. 제가 이 작업에 진지하단 걸 어필하면, 그분들도 도와주시겠죠. 그러면 좋겠네요. 아아, 어쨌거나 정말 기대돼요. 회사로부터 인정받으니 드디어 숨이 트여요. 이젠 박 이사님과 만나는 것도 숨길 필요가 없구, 헤헤.”

“와, 에리쨩 정확하게 10분 동안 쉬지도 않고 말했어. 빨간 머리 앤 같아!”

리카는 감탄했지만, 성필은 얼이 빠져선 에리카에게 대답다운 대답을 들려주는 것조차 잊었다.

단순히 에리카의 말수가 너무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어떠한 에너지가 있었다. 그걸 받아내는 게, 성필로선 힘겨웠다.

‘이게 청춘의 빛인가?’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냈을 때 더욱 화사하게 빛나는, 그런 힘이다.

“그래서, 어떠신가요?”

에리카가 재차 물었다.

그에 성필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에. 일단 하나하나 검토해봐요. 처음이란 마음가짐으로요.”

사실 에리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성필은 자신의 답이 너무 무성의했던 건 아닌가 걱정했다.

하지만 에리카는 여느 때처럼 눈웃음을 짓더니, 자연스레 주먹을 내밀었다.

“네, 처음이란 마음가짐으로요.”

성필도 자연스럽게, 마치 반드시 그래야 한단 것처럼 그녀와 주먹을 맞추었다.

에리카가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저의, 프로듀서님.”

“협력 프로듀서는 아타시(나)야!”

* * *

성필, 리카와의 믹스테입 회의를 마친 에리카는 재빨리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은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 방영일이기 때문이다.

거실로 가니 김민주와 진저는 벌써 텔레비전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에리카 왔냐?”

“응. 아직 시작 안 했지?”

“광고 중.”

에리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김민주와 진저는 소소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저는 한구인―서아영 커플을 밈미다.”

“잘 어울리긴 하는데, 좀 그렇지 않아?”

서아영은 현재 가장 한구인과 커플이 될 가능성이 높은 여자 출연자다.

직업은 경영 컨설턴트로 한구인 못지않은 스펙을 자랑한다.

외모는 전형적인 미인상이라기보다 개성이 도드라지는 스타일이어서, 처음엔 남자 출연자들에게서 호불호가 갈렸다.

“무슨 소림미까. 모든 요소를 고려하면 서아영 원탑 체제임미다. 밸런스 파괴임미다.”

서아영의 진가는 프로그램이 진행되면서 점점 밝혀졌다.

특히 한구인과 함께 했던 첫 데이트가 대단했다. 기업 경영 관련 세미나라니…… 시청자들 모두가 벙쪘던 엄청난 이벤트였다.

이후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둘 다 미국에서 MBA 과정을 밟아서 그런지 대화가 잘 통했다. 카페에서 네 시간이나 전공 이야기를 할 만큼…….

다음 데이트는 더 굉장했다. 서아영이 가로 엔터를 컨설턴팅한 것이다.

그 때문에 홍규헌의 얼굴도 미디어에 공개되었는데, 그녀의 외모 덕에 팬을 자처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리고 다른 남자 출연자들 죄다 괘씸함미다. 한구인이 서아영한테 관심 가지니까, 이제까지 찬밥처럼 대한 주제에 서아영한테 대시하지 않슴미까.”

“그거 이런 심리인가? 제일 인기 있는 남자가 원하는 여자는 뭔가 매력이 있다, 같은?”

“아 그건 잘 모르겠고 암튼 다른 남자 출연자들 괘씸함미다. 한 우물만 파는 박 이사님을 본받아야 함미다.”

“우물을 판다는 말은 좀 그렇다.”

옷을 다 갈아입은 에리카는 둘 사이에 앉았다.

“뭐가 말임미까?”

“응?”

“우물 파는 게 뭐?”

“어?”

김민주와 진저가 진지하게 묻자 에리카는 당황했다. 그녀는 쭈뼛거리다가, 갑자기 아무 일 없단 듯 방금의 대화에 끼었다.

“서아영 한구인이 진리지.”

“우물이 뭐 어쨌는데.”

“아, 시작하네.”

“에리카 언니 그거 무슨 유머인 검미까? 이미 실패하긴 했지만 궁금함미다. 설명해주시면 안 됨미까?”

“다들 조용해.”

설명해야 하는 개그가 가장 비참하다.

그렇게 에리카의 유머는 영원히 세상으로부터 추방되고, 방송이 시작됐다.

시작은 성필과 김하슬의 이야기부터였다. 가장 주목받는 러브 라인이다.

방송 시작부터 저 둘의 이야기를 내놓은 것을 보니, 시청률을 붙잡겠단 제작진의 강렬한 의지가 느껴진다.

“오늘 박 이사님이 함락당할 거 같슴미다. 김하슬은 밀당의 고수임미다.”

“박 이사님이 함락당하시는 거야?”

“여자를 성에 비유하는 건 케케묵은 고정관념임미다. 여자도 공격수가 될 수 있슴미다. 그리고 게임의 승패를 결정하는 건 언제나 공격수임미다.”

“그 명언 이런 데서 써봤자 하나도 안 멋져.”

진저의 말마따나, 오늘이야말로 성필과 김하슬의 관계가 정상화될 것이다.

일시적으로 냉각된 둘의 관계는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의 시청률을 견인하는 주요한 요소였다.

그게 오늘 해소될 기미를 보였으니, 어쩌면 3% 시청률의 벽을 넘을지도 모르겠다.

관전 포인트는 성필의 오글거리는 작업 멘트…….

[하슬아, 미안.]

“응?”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방의 모서리에 설치된 카메라는 심각한 분위기의 두 사람을 위에서부터 비추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성필은 붉은 모자를 썼다가 벗곤, 이렇게 선언했다.

[일이 생겼어.]

[진심이야 오빠?]

[어. 급한 일이야. 바로 가봐야 해. 미안.]

[나 바람맞히려고? 이렇게 꾸몄는데?]

[미안.]

[약속했잖아.]

[미안.]

[그렇게 중요한 일이야?]

점점 더 심각해지는 분위기.

[그래도 가야 한다고……. 오빠, 워커홀릭이네. 일이 그렇게 소중해? 나랑 한 약속을 깨고, 방송까지 망쳐가면서 가야 할 정도로?]

[…….]

[아니, 워커홀릭이 아니라 그냥 일에 미친 사람이네.]

[미안해. 나도 나 쓰레기인 거 알…….]

[지금까진 오빠가 계속 나한테 져줬었지. 이번엔 내가 져줄게.]

[어?]

[뭐 해? 가봐.]

[……고마워.]

성필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방을 나갔다.

김하슬이 서글픈 웃음을 뱉었다.

[아주 기다렸단 듯이 가네…….]

김민주와 진저가 에리카를 보았다.

에리카는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흡혈귀처럼 희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전부 빠져나갔다.

진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언니, 저거, 박 이사님이 가시는 저거…….”

아마, 맞을 것이다.

성필은 저 날 에리카를 찾으러 떠난 게 분명하다. 김하슬을 바람맞히면서까지 에리카를 찾으러 간 것이다.

에리카는 뱃속에 납덩이가 들어온 것 같았다. 도저히 진정되지 않았다. 앞으로 방송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불 보듯 뻔했기에.

[일이 먼저인 사람도 있는 거죠 뭐.]

김하슬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합숙소의 거실에서 밤이 새도록 기다렸다.

성필과의 데이트를 위해 입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서.

그녀가 기다리길 포기한 건 시침이 오전 2시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 이러면 박 이사님은 뭐가 되는 검미까…….”

진저가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

에리카의 마음이 딱 그녀와 같았다.

이러면 성필이 뭐가 되는…….

그때 김민주의 핸드폰이 요란한 벨소리를 토해냈다. 김민주는 깜짝 놀라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어 받았다.

“어, 신아름? 왜?”

잠시 후, 김민주가 쭈뼛쭈뼛 에리카에게 폰을 넘겼다. 에리카는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전화를 받았다.

“어어…… 아름 씨? 저한테 용…….”

[(검열)]

폰을 든 에리카의 손이 벌벌 떨려왔다.

귀에서 피가 나는 것 같다. 신아름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도 않건만 이명이 귀에 남을 지경이다.

자신이 일본인이라서 다행이다. 저 욕을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면, 정말 고막이 찢어져 피가 났을 테니까.

‘얘기도 나눠본 적 없는 사람한테 욕을 먹는단 게 당황스럽긴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그래, 소녀연맹의 입장에서 보면 에리카 자신은 역적과 같은…….

[(검열)]

에리카의 눈썹이 우울하게 떨어졌다.

[(검열)]

눈가엔 언뜻 눈물이 맺힌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근데 쫌 너무 심하잖아아…….’

주유가 어째서 제갈량의 편지를 읽고 죽었는지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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