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6화
“……박 이사님, 옛날부터 생각했는데 그거 좀 악질이에요.”
리카가 질색하며 말했다.
“오해할 여지가 있게 일부러 몇 마디 안 하는 거요! 이젠 새롭지도 않은 서술 트릭이에요! 그래 놓고서 ‘에리카 씨의 곡을요’라거나 ‘작곡하는 에리카 씨의 모습을요’라고 하실 거죠? 이젠 안 넘어가요!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구요!”
“그으, 그런 거야?”
“그런 거야! 에리쨩도 박 이사님이랑 자주 있으면 익숙해져!”
“무대에 선 에리카 씨를 처음 보고 생각했어요. ‘아, 나는 또 사랑에 빠져버린 거야?’.”
“서술 트릭이 아니었다?!”
“생생히 기억나요. 그날 제 마음의 메아리가. ‘그래, 너는 또 사랑에 빠져버린 거야’.”
“한술 더 뜬다?!”
“팬이 되어보신 적이 있으세요?”
성필은 본인의 발언을 수정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에 정의의 사도인 리카가 나섰다.
“에리쨩, 걸러서 들어.”
“나도 알아. 이런 말 듣고 착각할 리가 없잖아.”
“……혹시나 해서 한 말이야!”
에리카는 무릎 위에 턱을 괴곤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시원스레 말했다.
“없어요. 누군가를 열렬하게 좋아한 기억은요.”
“무언가의 팬이 된단 건 사랑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저는 그래요.”
“저를 사랑하시나요?”
에리카가 장난스레 물었다.
“네.”
“아, 네에…….”
놀리려고 한 말인데, 역으로 에리카가 당했다.
사랑이란 단어를 저토록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니. 성필에겐 사랑의 무게가 가벼운 걸까?
적어도 에리카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무겁지 않을 듯했다.
“아타시(저)는요!”
“리카도 사랑해.”
“얏타(해냈다)!”
“신장도 하나 떼줄 수 있어.”
“그 정도까진 안 바라는데요?!”
“적당한 대가만 지불하면.”
“그럼 그냥 사는 거랑 다를 바 없잖아요! 사랑이 안 느껴져요!”
어쨌거나, 팬이 된다는 건 사랑과 비슷한 감정이다. 성필은 그렇게 느낀다.
“물론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연애 감정과는 달라요. 그런 식으로 아이돌을 사랑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저의 사랑은 달라요. 그렇지만 그건 사랑 외의 다른 걸론 표현할 수 없어요.”
성필은 아이돌을 사랑한다.
그 완벽한 모습을.
미적으로 완성된 모습을.
팬들에게 다정다감한 모습을.
노래를 잘하는 게.
춤을 잘 추는 게.
아이돌로서의 모든 모습을 사랑한다.
“그래도 그건 아이돌 에리카 씨가 팬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이에요. 애초에 그런 모습밖에 볼 수 없기도 하고요. 하지만 에리카 씨가 창작에 몰두한단 걸 안 순간, 저는 더 이상 옛날의 저로 돌아갈 수 없어요.”
“죄송해요, 무슨 뜻인지 잘…….”
“에리카 씨가 믹스테입을, 작곡을 포기하는 건 못 본다는 뜻이에요.”
“포기하는 게 아니에요. 잠시 접어두는 거예요.”
“잠시 접어두는 동안 괴로우실 거잖아요. 하고 싶은 걸 못 한다는 게 얼마나 숨 막히고 답답한지 알아요.”
“왜 아타시(저)를 보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제가 뭐 케이어스 덕질하지 말라고 때리기라도 했나요!”
“저는 케이어스의 팬이에요.”
전생에서부터.
케이어스를 사랑하게 됐어.
케이어스가 성공하길 바라.
케이어스가 행복하길 원해.
그러니…….
“이기적인 팬으로서 에리카 씨가 행복하길 바라요. 저는 에리카 씨가 행복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 케이어스를 사랑하니까, 비굴하게 매달릴 거예요. 제발 행복해달라고요.”
“……바라기만요?”
“계속 믹스테입에 관해 물어볼 거예요. 작곡은 하고 있냐고, 구상은 어디까지 했냐고, 작업은 어느 수준까지 완성되었냐고. 계속해서 귀찮게 할 거예요.”
“더 이상 팬이 아닌데요……?”
“맞아요! 사생이에요!”
“제가 혐오스러워지면 차단하세요.”
“박 이사님도 과한 짓이란 건 아시나 보네요!”
“그전까진, 제 관심이 달갑다면, 창작을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에리카 씨가 만든 곡에 관해 이야기하고, 푸념도 하시고, 그렇게 해주세요.”
“감정 쓰레기통으로 써달란 거예요?”
“에리카 씨가 계속 의욕을 지니실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쓰레기통이 될게요.”
“와…….”
리카는 정말, 진심으로, 진짜, 어이가 없어서 성필을 바라보았다.
소녀연맹 앞에서 이렇게까지 케이어스 사랑을 어필하다니. 솔직히 리카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제까지 소녀연맹 앞에서 ‘케이어스’란 단어조차 꺼내길 두려워했던 성필이 맞나? 아예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리카.”
실제로 그와 비슷했다.
성필이 보았던 미래가 가져다준 충격은, 그라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을지도 몰랐다.
“나는 이제 케이어스에 대한 팬심을 숨기지 않아. 소녀연맹의 메인 프로듀서로서 섬세하지 못하다고 욕해도 좋아. 비난해도 좋아. 그렇지만, 난 더 이상 이 감정을 숨기고 싶지 않아.”
미래의 성필은 그것도 후회했었다.
주변의 시선과 프로듀서로서의 체면 때문에 케이어스를 신경 쓰지 않았다고 말이다.
미래가 뒤틀렸단 것을 깨달은 순간, 체면 따윈 벗어던지고 더 적극적으로 뛰어들었어야 했다고.
그게 전생에 성필이 사랑했던, 7년간 성필에게 더없는 행복을 가져다주었던, 케이어스에 대한 예의이자 의무였다고.
“하지만 그게 소녀연맹을…….”
“알아요!”
“알아?”
“비유하자면, 박 이사님은 선생님이에요! 케이어스는 담임 반의 아이들이고 소녀연맹은 진짜 피가 이어진 자식이에요! 그러니까 아타시(저)는 질투 같은 거 안 해요! 아무리 학생들에게 사랑을 줘도, 그건 피로 이어진 사랑을 이길 수 없으니까요!”
“리카 너 천재냐?”
“에헤헤, 대단하죠!”
“앞으로 애들한테 그렇게 설명해야겠다.”
“저작권 있어요!”
에리카는 두 사람의 대화를 멍하니 보았다.
둘의 관계는 KS 엔터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직 가로 엔터가 소규모 회사라서 그런 것일까, 프로듀서와 아이돌의 관계가 인간적이기까지 했다.
‘이런 곳에 있으니, 리카가 마음껏 창작을 할 수 있던 거구나.’
성필을 만난 건 리카에게도 행운일 것이다.
에리카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망상을 했다. 만약 케이어스 데뷔조에서 떨어졌던 게 자신이었다면…….
‘떨어진 게 리카가 아니라 나였으면…….’
지금, 리카와 자신의 역할은 바뀌어 있었을까.
시답잖은 망상이다.
옛날에 듣기로, 성필이 연습생으로 영입하려 했던 건 KS 엔터에서 떨어져나온 사람이 아니라 리카란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자신이 리카에게 져서 데뷔조를 나온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쓰레기통이…… 되신다고 하셨죠.”
에리카의 물음에, 성필은 리카와의 수다를 멈추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쓰레기통이 될 거냐?’란 물음에 진지한 태도를 취해봤자 하나도 멋지지 않지만.
“전에 에리카 씨가 저한테 도와달라고 하면서 그러셨잖아요. 들어줄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힘을 낼 수 있겠다고요. 설령 믹스테입이, 에리카 씨의 곡이 영원히 KS 엔터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쿠라바 에리카의 팬 한 명은 계속 존재할 거예요. 사쿠라바 에리카의 신곡을 기다릴 거예요.”
갑자기 에리카가 큰 웃음을 터뜨렸다.
목소리가 내리쬐는 태양 볕처럼 날카로워서, 그녀의 웃음은 저 멀리 수평선까지 퍼져나갈 듯했다.
에리카는 아예 박수까지 치면서 웃었다.
“사쿠라바 에리카의 신곡을 기다려요?”
“네. 계속 기다릴게요.”
“그럼 더 이상 케이어스 에리카의 팬이 아니잖아요. 개인 팬이 돼버려요.”
“맞아요. 저는 에리카 씨 팬이에요.”
에리카가 굽혔던 다리를 폈다.
샌들 밖으로 나온 그녀의 엄지발가락이 모래사장 위에 의미 없는 곡선을 그렸다.
“저만의 팬이요?”
“저는 에리카 씨가 만든 곡에 빠져버린 거니까요. 그건 케이어스론 보여주실 수 없는 모습이니까, 에리카 씨만의 팬이 되어야겠죠.”
“민주의 팬도 아니고.”
“……? 네?”
“소유 언니 팬도 아니고.”
에리카가 목덜미를 손으로 쓸었다. 아니, 덮으려는 것 같았다. 잔털을 숨기려는 듯 목덜미를 매만지며, 에리카는 성필에게로 곁눈질했다.
“진저……, 메이의 팬도 아니고. 오직 저만의 팬이신 거죠?”
“아.”
“왜 그러세요?”
“느낌 딱 왔어요. 제가 ‘네’라고 말하면 이걸로 진저 씨한테 뭐라고 하실 거죠?”
“네.”
“‘네’요?!”
“들켰으니까 어쩔 수 없네요. 됐고, 그럼 팬클럽 가입을 인정해드릴게요.”
에리카가 바닥에서 엉덩이를 뗐다. 그리고 성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사쿠라바 에리카 1호 팬. 영광으로 아세요.”
성필은 감동하여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럼…….”
“포기하진 않을게요. 하지만 사쿠라바 에리카의 팬으로 기다리는 건 힘들 거예요. 언제 앨범이 나올지 모르거든요.”
“기다릴게요 얼마든지!”
“참고로 제 팬덤 이름은 ‘체리블로썸’이에요.”
“역시 프로듀서로서의 혜안이 남다르시네요. 팬덤명까지 정하시고.”
“팬들은 ‘썸이들’이라고 부를 거예요. 자, 빨리 일어나요 썸이 1호.”
에리카가 성필을 일으켰다.
“아타시(나)도 일으켜줘요!”
성필은 반대쪽 손으로 리카를 붙잡아 일으켰다.
리카는 일어나자마자 성필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박 이사님, 하나만 알아두세요!”
“뭘?”
“이 정도의 믿음은 폭력이란 걸요!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으니까 에리쨩이 얼마나 부담을 느끼겠어요! 실은 작곡을 하고 싶지 않지만 박 이사님 때문에 억지로 하는 걸 수도 있어요!”
“그런 거예요?”
“아뇨, 이젠 억지로 필요하지도 않은 걸 얻으려고 하진 않아요. 과거의 저랑 작별할래요. 아, 하나만 빼고요.”
“뭔데요?”
“박 이사님을 울릴 거예요.”
성필과 리카, 두 사람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떴다. 누구도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다.
성필을 울리겠다니.
“그냥 때리면 우실 텐데, 지금 울려!”
“리카, 세상에 프로듀서를 때리라고 하는 아이돌이 어딨어.”
“아니면 욕해! 그럼 당장 울면서 모래사장을 뒹구실 거야!”
“에이, 에리카 씨는 욕 같은 거 안…….”
“그래?”
에리카가 씨익 웃었다.
그것을 보며 성필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코 근처로 알싸한 담배 냄새가 흘러 들어오는 듯했다.
이 감각은…… 아니.
이 예지는…….
“서울 시티 보이―!”
에리카가 바다를 향해 소리쳤다.
“사랑했다 시발놈아아아아아―!”
웃으면서 소리쳤다.
“그리고 계속 사랑할 거야아아아아―!”
그건 에리카 나름의 맹세였다.
서울 시티 보이.
자신이 만들어낸 자식이나 다름없는 존재.
에리카는 그것을 버리려고 했었다. 최소한 5년은 묻어두려고 했었다. 사랑하지만, 상황이 받쳐주지 않는단 이유로.
그러나 이젠 그러지 않는다.
사랑은 포기하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면 비굴해져서라도 지켜야만 한다. 바닥을 기고 진흙을 마시더라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사랑한다아아―!”
아이돌이 해선 안 되는 행동.
욕설.
에리카는 금기를 깬 쾌감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생애 다시 없을 미소와 함께 뒤로 돌아보았다.
그리고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이제 서울로 가요!”
그것을 바라보는 성필의 표정은…….
“박 이사님, 이래도 에리쨩의 팬으로 계실 거예요? 쟤 더 이상 아이돌이길 포기했는데요? 괴상한 컨셉의 아키바계 아이돌이 되기로 했나 봐요.”
“……약속했으니까, 지켜야지.”
“우세요?”
“안 울어…….”
“그냥 아타시(저)나 덕질하세요!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오지 않는 트루 아이돌이에요! 저는 퍼스널리티가 곧 캐릭터니까요!”
“아이돌은 그런 말 안 해……!”
성필이 알던 전생의 케이어스는 없다.
이미 오래전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오늘따라 뼈에 사무치도록 다가온다.
이것도 회귀한 성필이 감당해야 할 업보였다.
“와, 정말 우시네요?”
“왜 기쁜 것처럼 말하는 거예요……! 아이돌이면 팬의 환상을 지켜줘야 하는 거 아녜요……?!”
“그래도, 사랑하시죠?”
“사랑하지만요오……!”
리카가 감탄했다.
“이래도 탈덕 안 해? 독하다 독해!”
에리카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파도가 발목을 덮었다. 그리고 다시 빠져나갔다.
리카의 말이 맞다. 시원해서 기분 좋다.
‘작곡을 계속하겠단 건 나만의 고집이겠지.’
자꾸 정호환에게 믹스테입을 내달라고 조르는 것도.
회사에 숨기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곡에 매달리는 것도.
어느 길이건 에리카를 괴롭게 할 것이다.
그럼에도 에리카는 다시 해보겠다고 결심했다.
성필이 있으니까.
‘사쿠라바 에리카를 믿고 기다려주는 팬이 한 명이라도 존재하잖아.’
그 팬에 대한 예의로, 에리카는 세상에 사쿠라바란 이름을 알릴 것이다. 사람들이 칭송하여 목이 쉴 정도로 찬란한 명예를 얻어낼 생각이다.
그 빛으로 나아가는 길은 어둡고 힘들 테지만, 혼자가 아니란 사실은 위로를 준다.
‘한 명이라도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계속 힘낼 수 있다고?’
과거의 자신이 성필에게 도움을 청하며 그런 말을 했었어? 참으로 혜안이 가득한 말이었다.
그땐 아무런 생각이 없었겠지만, 지금은 과거의 자신이 했던 말이 뼈에 사무치도록 깊이 다가온다.
다시 해보자.
필요하지도 않은 건 죄다 버리고, 이번에야말로 하고 싶은 것에만 솔직해지자.
하나만 빼고.
“박 이사님을 울릴 거야.”
“또요?!”
욕하거나 담배를 피워서가 아니라, 퍼포먼스로 울릴 것이다. 진저가 했던 말처럼, 계속해서 보고 싶기까지 한 그의 우는 얼굴을 손에 넣을 것이다.
“그럼 바로 갈까요?”
서울로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