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5화
‘그러고 보니, 휴가다운 휴가를 즐겨본 게 언제였지.’
성필은 파라솔이 만든 그늘 아래에 나른히 앉아 있었다.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파도를 보고 있자니, 어젯밤부터 한계까지 당겨져 있던 정신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그를 압박하는 건 다년간의 회사 생활로 다져진 강박감이 전부였다. 그것마저도 바다가 주는 편안함 때문에 흐물흐물 녹아 없어지기 전이었지만 말이다.
‘회사는 괜찮겠지?’
에리카의 일 때문에 급하게 하루 연차를 쓰겠으며, 자세한 이야기는 올라가서 하겠다고 말해두긴 했다. 허락도 받았고 말이다.
그럼에도 회사가 걱정된다.
물론 자신이 하루 정도 없어도 회사가 잘 돌아갈 거란 사실은 안다.
‘일 중독 회사원들의 특징 중 하나가, 자기가 없으면 세상이 망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라던데. 나도 그렇게 변해가는 건가.’
뭐, 이왕 쉬기로 했으니 업무 생각은 하지 말자.
게다가 그런 생각을 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기도 했다. 이렇게 멋진 광경을 앞에 두고 어떻게 다른 생각을 할까.
파란 바다에 걸쳐 떠오른 해를 보고 있자니,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감상이 떠올랐다.
‘더 빨리 도착해서 일출까지 봤으면 좋을 텐데.’
아침의 해변가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서핑보드를 들고 근처를 배회하는 남자만 몇 보일 뿐이었다.
이 바닷가는 수영을 위한 곳이라기보다, 서핑을 위한 장소였다. 혹은 바다를 보기만 할 거라면 이보다 더 나은 곳은 없을 듯했다.
성필은 옆으로 슬쩍 눈을 돌렸다.
에리카는 퀭한 눈으로 삼각김밥을 먹고 있었다. 그녀는 어지간히 배가 고팠는지 식사에만 집중했다.
‘아니면 나랑 대화하는 걸 최대한 미루고 싶으시거나.’
성필은 괜히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대신 얕은 물가를 뛰어다니는 리카를 보았다.
“으앗 츠메타이(차가워)!”
리카는 얕게 쓸려오는 파도를 따라 바다 가까이 갔다가 물러갔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발목이 물에 잠길 때마다 해맑게 웃으면서 ‘차가워!’란 말을 반복했다.
‘리카는 야유회로 산이 아니라 바다를 가고 싶어 했었지.’
마침 여름이기도 하니, 또 가로 엔터 단체로 야유회를 갈지도 모른다.
그땐 바다를 가는 것도 좋겠지. 아니, 리카가 저리 좋아하는 것을 보니, 꼭 바다로 가야겠다.
“박 이사님도 와보세요! 차가워서 기분 좋아요!”
“난 구두 신어서 안 돼.”
“슬리퍼 사면 되죠! 저기 5,000원짜리 팔아요!”
그런 걸 신고 걸어 다녔다간 30분 만에 발이 망가질 것이다. 어디 한 군데 까져선 종일 고통을 호소하겠지.
“피에 새겨진 운명이란 거, 믿으세요?”
문득 에리카가 말했다.
성필은 그녀의 말이라면 뭐든 맞장구칠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방금 그 말은 대체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유전 말씀하시는 거예요? 유전적 특징 같은 거요?”
“그거랑 비슷하겠네요.”
“개인적으로는 환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형제끼리 닮는다는 건, 결국 같은 집에 자라서일 가능성이 높죠.”
“그런가요.”
에리카가 무릎을 팔로 감싸 안았다.
“제 집안은 뭐라고 해야 할까요, 예술가 집안이에요. 그냥 집안이라고 하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예술 가문이에요.”
“그래서 샤미센도 칠 수 있으셨던 거예요?”
“음, 아마도요.”
“그럼 에리카 씨는 재능을 잘 살리고 계시는 거네요.”
“그냥 가문 사람들이 전부 예능(藝能)에 종사해서 예술가 가문인 게 아니에요. 가문으로 업(業)이 전해져와서 그런 가문인 거예요.”
“장인의 기술이 자손대대로 전해지는 것처럼요?”
“네.”
이는 성필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전생에서, 에리카의 집안이 어떤지는 딱히 밝혀진 바가 없었다. 그나마 아버지가 사업을 한다는 게 팬들에게 공개된 사실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집안이 지긋지긋하셨던 거 같아요. 그래서 젊으셨을 때 집을 나가셨어요. 그러다 사업을 하시고, 성공하셔서, 다시 집을 찾으셨어요.”
“금의환향인가요?”
“아니요. 배신자가 감히 염치도 없이 본가에 더러운 발을 들이민 거죠.”
폭력적이기까지 한 설명에 성필은 당황을 금할 수 없었다. 그에 에리카는 성필을 바라보며 나긋하게 미소 지었다.
“대략 이런 분위기였대요. 저도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어요.”
“기억하다니…….”
“어릴 때 아버지가 제 손을 잡고 본가로 가셨거든요. 아마, 할아버님이 제 얼굴을 보면 화를 풀 거라고 생각하셨던 거 같아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아버지는 다시 가족과의 연을 잇기 위해, 마당에서 무릎 꿇고 머리를 땅에 박으셔야 했어요.”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성필은 그리 생각했으나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핏줄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없다고 하지 않은가.
에리카의 아버지가 사업가로 살아가는 수십 년 동안,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알 수는 없지만, 가족이 그리웠을 거란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대로 몇 시간을…….”
“…….”
“제가 울면서 아버지한테 일어나라고 해도, 아버지는 일어나지 않으셨어요. 계속 용서를 빌기만 하실 뿐이었죠. 그렇게 해서라도 돌아가고 싶을 만큼, 아버지는 가족을 그리워하셨던 거예요.”
그래서 뭐…….
에리카는 대수롭지 않단 듯 웃어 보였다.
“결국엔 해피엔딩이었어요. 다 같이 끌어안고 ‘불효자식아 왜 이제야 왔냐’라거나, ‘아버지 죄송합니다’ 같은 말이 오가고…… 눈물바다였어요. 문제는 그 이후에 일어났죠. 제가 가업에 관심이 있던 거였어요.”
“할 수 없었나요?”
“네. 아버지가 다시 가문의 일원이 된 것과는 별개로, 기술의 전승은 허락되지 않았어요.”
이에모토(家元).
단순히 제자가 스승과 함께 오랜 세월 생활하며 장인이 되는 것을 넘어, 사제관계를 혈통으로 연결하여 완성시키는 일본의 제도.
아비투스(생활양식, 부르디외가 제창한 개념으로 문화 자본의 일종)를 넘어서는, 혈통으로서의 일체감을 목표로 한다.
그 역사는 천년 단위로 이어지는 것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전통은 한 번 가문을 나갔던 이에게 허락될 만큼 호락호락한 게 아니다.
“잘난 척으로 들리시겠지만, 저는 악가무(樂歌舞) 모두에 소질이 있었어요. 노래와, 춤과, 악기를 좋아하는 걸 넘어 사랑하는 것. 그게 제가 가진 진짜 재능이었죠.”
“그런데…….”
“네, 할 수 없어요. 다른 가족들의 공연을 아무리 선망하고, 저리되고 싶다고 소망해봐야 영원토록 이뤄질 수 없어요. 설령 제가 완벽히,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예능 전부를 익히더라도요.”
에리카는 여러 번 가업에 관심을 드러냈을 것이다. 그때마다 매몰찬 대우를 받았겠지.
그로써 에리카는 절망했을 게 분명하다.
아무리 염원해도 얻을 수 없는 게 있단 사실을, 아주 어릴 적부터 깨달았겠지.
“더 괴로운 건 아버지가 저한테 미안해하시는 거였어요. 미안하다…… 아니, 죄송하다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였어요. 그래서 저는 가문의 기예에만 관심이 있는 아이여선 안 됐어요. 세상 모든 곳에 비상한 호기심을 지니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도전하고, 또 그 모든 것에서 재능이 있는. 그렇게 다재다능한 아이여야만 했어요.”
“아버지를 위해서요?”
“네, 아버지를 위해서요. ‘꼭 이게 아니어도 저는 하고 싶은 게 많아요. 다른 것도 잘해요. 이건 그냥 수많은 취미 중 하나예요’. 이런 식이었죠. 실은 별로 흥미도 없는데, 참 많은 걸 했었죠. 가라테라거나…….”
“……?”
“그 세월이 쌓여서, 저는 굳이 필요 없는 것마저 전부 원하는 탐욕스러운 인간이 됐어요. 필요 없는 건 놔줘도 될 텐데, 굳이 손에 쥐고 있고자 했죠.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에리카는 뒤로 묶고 있던 머리를 풀어 헤쳤다. 그리고 머리 끈을 입에 물곤 다시 머리를 올려 묶었다.
그 순간, 성필은 지금껏 전혀 신경 쓰지 않던 무언가를 눈치챘다.
‘목 뒤에 잔털이 있으시네?’
성필이 아무리 아이돌을 좋아한다 하더라도 아이돌의 목 뒤까지 관찰하진 않는다. 그런데 에리카를 보니 문득 그 부위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맞네. 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잖아. 우리 애들은 어떻게 하지? 경섭이가 알아서 목 뒤쪽을 다듬게 하거나 왁싱시켰나? 아니면 그냥 내버려 두나?’
지금까지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던 건데…….
성필은 바닷가에서 뛰어노는 리카를 불러와 당장 뒷목을 확인하고픈 충동을 느꼈다.
“정말인가 보네요.”
“네?”
머리를 다 묶어 올린 에리카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머리칼이 파도처럼 흩날렸다.
“남자들은 여자가 머리 묶는 장면에 판타지가 있단 거요. 아주 정신을 못 차리시네요.”
“아, 아니, 그거 때문이 아니라…….”
“빨리 해명하세요!”
뛰어놀 만큼 뛰어놀았는지, 어느새 리카는 성필의 앞까지 와 있었다. 건수를 하나 잡았다는 듯 위풍당당한 포즈를 취한 채였다.
“자꾸 이렇게 사적인 호감을 표현하면 프로 의식이 결여되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내가 언제 사적인 호감을 표했는데…….”
“시선은 언어예요!”
하긴, 방금 성필의 눈길은 오해의 소지가 크긴 했다. 에리카가 신변의 위협을 느끼거나 불쾌해할 수도 있으니, 이 오해는 푸는 게 좋았다.
“이건 정말 이상한 의미로 말하는 게 아니거든요? 정말 오해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더 수상해요! 그냥 순순히 인정하시고 없던 일로 하세요!”
“에리카 씨 목덜미에 잔털 봤어.”
“와, 진짜 생각도 못 했다. 이건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요! 기, 분, 나, 빠!”
“히도이(너무해)…….”
에리카는 잔털이란 말을 듣자마자 허겁지겁 자신의 목덜미를 쓸었다. 그리고 잔털을 한 올 한 올 느끼려는 듯 검지로 섬세하게 만져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여, 여기 털 있으면 이상한 건가요?”
“아뇨 당연히 있…….”
“에리쨩은 프로 의식이 없네!”
리카가 아까보다 더 위풍당당해졌다. 그녀는 자랑스레 머리칼을 걷어 보이며 자신의 목덜미를 노출했다.
“아타시(나)는 깔끔하게 관리하고 있어! 매끈한 목은 내 수많은 매력 포인트 중 하나니까!”
“신경 써본 적도 없어…….”
에리카는 충격받은 듯 자꾸만 목덜미를 만졌다.
“헤헤, 거울로도 못 보는 곳이니까!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가꿔야 인간으로서의 격이 높아진다고 한 이사님이 말씀하셨어! 에리쨩은 더 정진하도록!”
“한 이사님이 말씀하신 보이지 않는 곳은 마음이잖아. 한 이사님 어록 멋대로 왜곡하지 마.”
“박 이사님은 태클 걸지 말고 아타시(저)의 승리를 소리 높여 칭송하도록 하세요!”
“그, 리카. 여기 털은 어떻게 관리해?”
“샵에서 해주는데?”
“가로 엔터의 비주얼 디렉팅 능력은 KS 엔터를 앞서 있구나…….”
“마아(뭐어), 나도 처음엔 경섭 오빠가 갑자기 목덜미 털 얘기하길래 놀라긴 했어! 이렇게 귀여운 소녀한테 잔털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잖아! 경섭 오빠 너무 섬세함이 없지 않아? 나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홍당무처럼 변했었다니까!”
“누군지 모르겠어.”
트루 매니지먼트 팀장, 민경섭.
그의 시야는 소녀연맹 메인 프로듀서인 성필을 아득히 앞질러 있다.
“으음…….”
에리카는 모처럼 올렸던 머리칼을 풀어서 목덜미를 가렸다. 그것을 보자 성필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뭘 그런 걸로 창피해하고 그러세요. 당연히 털이 나는 덴데.”
“박 이사님 자꾸 털이라고 말씀하시지 마세요! 아이돌한텐 인신공격이 될 수도 있어요!”
“앗, 죄송해요.”
“아뇨, 괜찮아요…….”
“그리고 아까부터 좀 엣찌(음란)하게 들…….”
몇 초 후, 리카는 거리를 굴러다니는 쓰레기봉투처럼 해변에 널브러졌다.
참고로 에리카가 공격한 것이다.
“그래서, 에리쨩은 왜 아이돌이 되려고 한 거야?”
쓰러졌던 리카가 반동을 주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근심 걱정 없이 놀기만 했다고 생각했는데, 멀리서도 에리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모양이다.
“아이돌도 아버지를 걱정시키지 않기 위한 전략 중 하나였던 거야?”
“지금에서야 느끼지만, 그때의 난 조금 지쳐있던 거 같아. 패배를 느껴보고 싶었어.”
“에에, 쥬니뵤(중2병).”
“그렇게 말해도 어쩔 수 없네. 실제로 중학생이었고. 패배를 느껴서…… ‘와타쿠시(나)’를 ‘영원한 승리’라는 ‘주박(呪縛)’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어.”
“진짜 중2병?!”
“하지만 결국 벗어날 수 없던 거야. 난 영원히 내가 아닌 무언가를 따라 흘러갔던 거지. 연습생일 때도, 케이어스가 되고 나서도…….”
그런데, 에리카는 마침내 찾아냈다.
“인생에서 두 번째로, 내가 사랑할만한 걸 찾아냈어. 이미 중독되어버린 승리와 관련이 없으…….”
“에리쨩, 그거 중2병 연기가 아니라 진짜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거야?”
“……관련이 없으며. 말라비틀어진 식물 같던 내게 유일한 자극이 되어 주었던…….”
그 순간, 에리카는 성필의 기묘한 시선을 읽어냈다. 그리고 그가 왜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는지 단숨에 눈치챘다.
“바, 박 이사님이 생각하는 그거 아니에요. 사랑을 말하는 거예요.”
“제가 뭘 생각해요.”
“하셨잖아요.”
“아닌데요?”
“에, 또 둘만 아는 비밀 이야기야? 치사해! 나도 알려줘!”
“아무튼.”
“무시?!”
“사랑도 아니고. 그건, 창작이었어. ‘음악을 위한 동행’에서 설하 언니랑 만들었던 곡 있지.”
‘월드 온 파이어’라는 이름을 가진 곡이었다.
“처음엔 그냥 ‘일한다’는 감각으로 했었는데, 언니쯤 되는 가수가 불러주시니까 그건 정말…….”
“에헤헤, 쌤 대단하지?”
“응. 아마 그게 처음.”
에리카가 작곡에 진심으로 빠져들게 된 계기가 바로 그때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욕망이 거세져 갔지. 사랑했어, 정말 사랑했어…….”
창조의 과정은 에리카를 숨 쉬게 했다.
두꺼운 마스크를 쓰고 있다가 마침내 벗은 기분.
에리카는 자기도 모르게 작곡에 심취했다. 그리고 더는 그 감정을 숨길 수 없게 되었던 게 최근이었다.
믹스테입을 만들려 했다.
거절당했다.
그래도 계속했다.
또 거절당했다.
그리고 마침내…….
“어제, 정호환 이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확신했지. 나는 케이어스로 있는 동안, 내 이름을 내걸고 곡을 낼 일은 없겠구나. 절대 그럴 수 없겠구나.”
“아녜요 에리카 씨. 계속하다 보면 정호환 이사님도 에리카 씨를 인정해주실 거예요.”
“그럴까요?”
“네.”
“어쩌면요.”
에리카가 순순히 인정했다.
“제가 도망치기까지 했던 이유는 트라우마 때문이에요. 사실, 단 한 번 할아버님한테 ‘가업을 잇고 싶다’고 말씀드렸던 적이 있거든요. 그때 할아버님과 정호환 이사님이 겹쳤었어요. 참, 저도 어른스럽지 못했네요. 멤버들 볼 면목도 없구.”
“뭐 어때요.”
“네?”
“케이어스 스케줄 없지 않아요? 바다 보러 갔다고 하죠 뭐.”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에리카가 실실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포기하려구요.”
“믹스테입요?”
“네. 정호환 이사님 말씀이 백번 옳아요.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려면 케이어스 활동이 끝난 후에 해야겠죠.”
“그럼, 작곡은 케이어스로 활동하는 동안은…….”
“하지 말아야겠죠. 전 남자친구의 사진을 계속 들여다보는 거랑 같아요. 저는 저를 계속 괴롭게 할 만큼 멍청하지 않거든요. 고통을 즐기지도 않고요.”
성필은 직감적으로 이 순간이 분기점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미래의 성필이 최후의 최후에서야 자신이 틀렸단 걸 눈치챈 이유는, 아마 표면적으로나마 케이어스가 창조성과 개성을 발휘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엔 꼭.
이번은 아니더라도 다음 앨범에서는…….
그런 식으로 희망을 벗지 못했겠지.
‘에리카 씨는 오늘 바다를 보고 아무 일 없단 듯 KS 엔터로 돌아오셨을 거야. 그리고 정호환 이사님과 화해하곤 케이어스로 열심히 활동하셨겠지.’
믹스테입을 도와줬던 성필에겐 미안해서라도 ‘계속해 볼게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안 좋게 흘렀을 테니 성필의 도움은 받지 않았을 것이고.
성필도 가로 엔터와 주변의 시선 때문에 에리카를 돕길 관뒀을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여기서 내가 해야 할 건…….’
어떻게든 에리카의 창작욕을 북돋워 주는 것이다. 그녀가 ‘작곡하고 싶다!’란 마음을 활활 불태우도록 해야만 한다.
“리밑에.”
갑자기 리카가 말했다.
성필과 에리카가 무슨 소리냔 듯 바라보자, 리카가 특유의 열받는 미소를 띠었다.
“리카 밑 에리카.”
“응?”
“살아남은 아타시(나)의 승리네?”
“무슨 소리야? 너랑 네 인터넷 친구들만 아는 인터넷 용어 쓰지 말고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게 말해줄래?”
“역시 에리쨩은 친해지면 말이 험해지는 타입이구나. 우리 앞으론 거리를 좀 벌리자…….”
시무룩해졌던 리카는 금세 기운을 차렸다.
“에리쨩은 영원히 자체 제작형 아이돌이 될 수 없단 소리야! 하지만 나는 자체 제작 아이돌이란 타이틀을 달고 팬들의 사랑을 받아! 영원히 에리쨩이 극복하지 못할 차이야! 그러니까…….”
리카가 비웃었다.
명백히 에리카를 비웃었다.
“승부는 났네?”
“그래. 리카가 최고야.”
“에엑?! 여기선 승부욕을 불태우는 전개잖아!”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
에리카가 무릎을 꼭 감싸 안았다.
“정호환 이사님을 뵙곤 보란 듯이 도망갔어. 회사에서도 난리가 났을 거야. 다들 뭐라고 생각하겠어? 여기서 믹스테입을 더 하겠다고 해봤자 미움받을 뿐이잖아. 어린애나 다름없어.”
그러곤, 에리카는 성필의 눈치를 보았다.
“도와주신 박 이사님한텐 죄송하지만, 그만둬야 해요…….”
“죄송하면 계속하세요.”
“……그만둘 거니까 죄송한 거잖아요. 계속하면 죄송한 게 없어져 버려요.”
“에리카 씨.”
성필이 부르자 에리카는 살짝 기가 죽어 답했다.
“네…….”
“사랑하니까 거리를 둔다거나, 사랑하니까 헤어진다는 건 바보 같은 소리예요.”
“나왔다!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 박성필 어록!”
“사랑하면 발치에 매달려서라도 놔주면 안 돼요. 수치는 잠시지만, 사랑은 며칠이나마 더 이어질 수 있잖아요.”
“최악의 남자네요! 그치만 그런 박 이사님 보고 싶을지두?”
“사랑하면 놓지 말라고요……. 괴로울 뿐인데도요? 더는 관계를 이어갈 용기도 없고, 이어갈 상황도 아닌데요?”
“에리카 씨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긴 하네요.”
“뭐예요…….”
좀 더 용기를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역시 그게 맞는 거겠지.
그야 도와준 성필로선 아쉽겠지만, 에리카에게 계속 이래라저래라할 순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성필은 단지 조금 더 인생을 살아본 어른으로서 조언할 뿐, 에리카에게 강요하진 않는다.
강요할 수도, 강제할 수도 없다.
성필이 에리카를 도와줄 방법은 사실상 없으니까. 그래 놓고서도 무작정 ‘해라!’라고 한다면, 그냥 무책임한…….
“에리카 씨는 놔주더라도, 전 안 놓을 거예요.”
“……뭘요?”
“비굴하게 매달려서라도 절대 안 놔요. 떠나가게 두지 않아요. 바닥을 기고 진흙을 마시더라도, 절대…….”
에리카와 리카, 두 사람 다 성필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아까 한 비유를 다시 써먹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성필의 비유는…….
“사랑하니까요.”
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성필이 에리카에게 말했다.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