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4화
성필이 현재 보고 있는 것.
그건 틀림없이 미래였다.
하지만 이제까지 보았던 미래와는 달랐다.
‘내 의식이 남아 있어.’
성필은 미래의 자신이 되어 상황을 체험하고 있지 않았다. 과거의 의식을 유지한 채로 미래의 자신과 마주하고 있다.
마치 미래의 자신과 대화하는 것 같다.
미래의 그가 거울을 보고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나의…….”
미래의 그가, 성필이 말했다.
“실수였어.”
방 안은 어두웠다.
어디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 방 안의 광원이라곤, 덜 닫힌 커튼의 틈새로 비쳐오는 빛뿐이었다. 그 빛을 받아 성필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은 더욱 뚜렷해졌다.
“내가 볼 수 있는 미래의 기한은 6개월. 고작 6개월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던 거야. 애초에 후회라는 건…… 상황과 시간, 나이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까…….”
젊은이는 머릿속에 늙은 자신을 그릴 수 없다. 자신의 행동이 까마득히 먼 미래의 후회로 이어질 거라곤 예상조차 할 수 없다.
연인을 고르는 것.
직장을 택하는 것.
관계를 이어가는 것.
업무를 맡는 것.
모든 일에서, 후회란 건 단기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아니, 단기적으론 만족하더라도 장기적으론 후회하여 과거의 자신을 탓할 수도 있다.
“난 5년간 도망가기만 했어. 내가 미래를 망쳐버렸단 생각을 어떻게든 뿌리치며, 옳은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믿으려 노력했지. 그리고 결국엔 여기에 도달해버린 거야.”
궁극적으로 후회할 수밖에 없는 지점.
마침내 모든 일이 끝나고, 객관적으로 자신의 행적을 더듬어볼 수 있는 순간.
“케이어스는 전생과 같은 빛을 되찾지 못했다. 인정해야 했어. 내가 미래를 망쳐버렸다고. 그러니까, 더 적극적으로 케이어스를 도왔어야 했지. 그런데 그러지 않았어.”
성필은 체면이 있었으니까.
소녀연맹의 프로듀서가, 가로 엔터의 핵심 임원이 케이어스에 과도한 관심을 기울여선 안 됐다.
회사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소녀연맹 멤버들이 실망할까 봐…….
“도망가기만 했지. 후회할 미래가 보이지 않으니, 최종적으론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고 믿었어. 믿기만 했어. 최후의 최후까지, 난 믿는 것밖에 하지 않았어. 내가 해야 할 건 명확했는데…….”
성필이 마른세수를 했다.
그의 행동 곳곳에선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회한이 몰아쳤다.
“그날, 에리카 씨가 사라졌던 날 아름이가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나. 내가 죽는 날까지 기억날 거야.”
‘하고 싶은 거 있으면 그냥 해요. 괜히 다른 사람들 눈치 보지 마세요. 팀장님은 팀장님일 때가 제일 멋져요.’
“그랬어야 했는데…….”
얼굴을 손바닥으로 거칠게 쓸며 마른세수만 하던 성필은, 갑자기 흐느끼듯이 웃었다.
“아까부터 ‘뭐 뭐 했어야 하는데’, ‘이랬어야 했는데 저랬어야 했는데’ 같은 말밖에 하지 않는군. 아마 영원히 이러겠지…….”
성필이 얼굴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 잠깐 사이에 몇 년은 더 늙은 듯했다.
“내가 알던 케이어스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없애버린 거다. 그리고 난 영원토록 케이어스를 처음 봤을 때와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없을 거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가슴을 가득 채우는 벅참, 그 설렘을 영원히 잃어버렸어. 다시는 이런 감상을 품을 수 없겠지.”
아, 나는 또 사랑에 빠져버렸어.
“후회한다.”
성필이 또박또박 말했다.
“후회해. 내 인생 모든 행적에 ‘했어야 하는데’가 붙어 다닐 거니까.”
거울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성필은 또 되뇌었다.
“지난 5년간 내 모든 선택을 후회한다. 그러니까, 제발.”
6개월이란 제한을 뛰어넘어서.
석세스 엔터에서 배신당하던 미래를 봤을 때처럼. 장하양이 꿈의 끝에서 절망한 미래를 봤을 때처럼. 조아라가 아티스트로서 자신감을 잃어버렸던 미래를 봤을 때처럼.
“이 후회가 과거에 전해지길 바라. 설령 다시는 미래를 못 보게 된다고 하더라도 좋으니까…….”
그날로 이 후회가 전해질 수만 있다면.
* * *
성필은 붉은 모자를 벗어 던지곤 김하슬과 마주 보았다. 그녀는 잘못 들었단 듯 눈을 크게 뜨고 성필을 응시했다.
“미안하다고?”
“일이 생겼어.”
“진심이야 오빠?”
“어. 급한 일이야. 바로 가봐야 해. 미안.”
성필은 미안하다고 했으나 말투에 거침이 없었다. 미안한 사람이 보일 법한 망설임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당연히 김하슬이 성필을 이해해줄 거라고 여기는 듯한…… 아니.
성필은 이해 자체를 구하지 않는다. 설령 김하슬이 화내고 욕하더라도, 혹은 무릎을 꿇고 애원하더라도 성필은 떠나갈 것이다.
그 정도의 기세가 전해졌다.
“…….”
김하슬은 문틀에 기대었다. 그리고 아까보다 식은 눈빛을 띠었다. 그녀는 성필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그를 위아래로 훑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붉게 타오르는 화염과 같은 의지 외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 바람 맞추려고? 이렇게 꾸몄는데?”
“미안.”
“약속했잖아.”
“미안.”
“그렇게 중요한 일이야? 굳이 나랑 한 약속 운운할 것도 없이, 밑에서 기다리시는 제작진분들은? 우리 찍으려고 계속 기다리시는데?”
“그래도 가야 해.”
이게 방송에 나가면 성필은 진짜 미친놈 취급당하며 욕을 산처럼 얻어먹을 게 확실했다.
그러나 욕 따위 얼마든지 먹어도 괜찮다.
성필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그래도 가야 한다고……. 오빠, 워커홀릭이네. 일이 그렇게 소중해? 나랑 한 약속을 깨고, 방송까지 망쳐가면서 가야 할 정도로?”
“…….”
“아니, 워커홀릭이 아니라 그냥 일에 미친 사람이네.”
“미안해. 나도 나 쓰레기인 거 알…….”
“지금까진 오빠가 계속 나한테 져줬었지.”
문틀에 기대고 있던 김하슬이 문 앞에서 슬쩍 비켜섰다.
“이번엔 내가 져줄게.”
“어?”
“뭐해? 가봐.”
“……고마워.”
성필은 고맙단 말을 끝으로 김하슬을 지나쳐 내려갔다. 잠시 후, 1층의 소란스러움이 계단을 타고 김하슬에게까지 전해져왔다.
김하슬은 당황한 제작진의 목소리를 들으며 헛웃음을 뱉었다.
“아주 기다렸단 듯이 가네…….”
데이트도 없어졌겠다, 김하슬은 본인의 방으로 돌아왔다. 얼마 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제작진이 그녀의 방으로 왔다.
“하, 하슬 씨 성필 씨가 가, 가버렸, 갔는, 오늘 촬영이…….”
“괜찮아요. 데이트할 수 있는 날이 오늘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괜찮아요?”
김하슬은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일이 먼저인 사람도 있는 거죠 뭐.”
* * *
에리카가 사라졌단 소식은 순식간에 KS 엔터를 집어삼켰다.
“비상! 비상!”
1팀장은 연신 ‘비상!’이라 외치면서 사무실을 뛰어다녔다. 사실 그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에리카의 본가로 매니저를 보내놨고.
에리카가 자주 들렀던 가게나 장소에도 매니저를 보내놨고.
경찰에게 협조도 구하여 에리카의 동태를 파악하려 하고 있다. 일반인이었다면 경찰도 대응하지 않았겠지만, 대상이 연예인이다 보니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다.
“비사아아아앙!”
1팀장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정신이 아닌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호환 또한 에리카의 잠적 소식을 듣곤 넋이 나갔다. 그리고 에리카를 걱정하는 것을 넘어 죄책감마저 느꼈다.
‘나 때문이야.’
에리카가 사라진 이유로 짐작되는 건 하나뿐이다.
‘그 어린아이한테 너무 모질게 대했어…….’
정호환은 에리카의 불손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래서 본인의 권위를 이용해 에리카의 요구를 찍어눌렀다.
그래, 본인의 권위를 이용해서.
정호환에게 윽박질러진 에리카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사회생활의 경험이라고 해봤자 연습생과 아이돌 활동이 전부인, 그야말로 어린아이나 다름없는 그녀인데…….
‘연습생과 아이돌에겐 회사가 전부.’
매니지먼트 이사인 남홍범이 옛날부터 자주 한 말이었다.
아이돌은 사회 경험이 극단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그들의 특수한 지위 탓에, 회사가 전적으로 서포트하니 말이다.
사소한 외출에서부터 생필품 구매까지, 모든 일에 회사의 도움을 받으니 개인적으로 무언가를 해볼 틈이 없다.
‘회사가 전부인데…….’
그 회사 자체인 정호환이 에리카를 윽박질렀다.
심지어 에리카는 정호환을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까지 했었다.
마치 세상에게 거부당한 기분이었겠지.
“에리카…….”
정호환은 후회에 몸서리쳤다.
너무나 어른답지 못한 행동이었다.
최소한 좋게 돌려 말할 순 있었는…….
쾅!
집무실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
정호환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잔뜩 화난 얼굴의 김민주가 보였다. 그 뒤엔 안절부절못하는 비서와 함께, 어째선지 남홍범 이사도 있었다.
“이사님.”
“민주……?”
김민주는 손에 들고 있던 노트를 정호환의 테이블로 던졌다. 참으로 불손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이사님 때문이에요!”
“뭐……?”
“에리카가 사라진 건 이사님 때문이라고요! 대체 믹스테입 그깟 게 뭐라고 계속 안 된다고 하셨던 건데요!”
정호환은 새파랗게 어린 김민주에게 일갈을 얻어먹자 거의 혼이 빠져나갔다.
그는 해명을 요구하듯 김민주의 어깨 너머로 남홍범을 바라보았다. 남홍범은 들어보기나 하란 듯 턱을 까딱이기만 했다.
“에리카 걔요, 매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세요?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곡만 만졌어요! 근데 이사님은 제대로 들어주지도 않고! 무시하기만 하고! 왜 그랬어요 왜애!”
데뷔한 지 3년도 되지 않은 아이돌이 집무실까지 쳐들어와 소리치는 상황.
정호환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화가 나기도 하고, 김민주의 말에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아무튼 복잡한 심정이었다.
“에리카 걔가, 걔가…….”
김민주의 말문이 막혔다.
자세히 보니 그녀는 떨고 있었다.
당연하다.
정호환에게 대드는 것이다.
소리치는 것이다.
누가 두렵지 않을까.
그럼에도 김민주는 용기를 내어 이 자리에 섰다. 에리카를, 케이어스의 리더를, 사랑하는 친구를 변호하기 위해.
“걔가 돌아오면 믹스테입 허락해주세요! 아, 안 그러면!”
“…….”
“저, 저도 제가 어떡할지 몰라요! 연습도 게을리하고 막 그럴지도 모른다구요!”
김민주는 정호환에게서 등을 돌리더니, 들어왔을 때보다 더 빨리 방을 나섰다.
거의 도망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렇대.”
남홍범이 말했다.
“과즙미 뿜뿜 케이어스의 비타민 민주가 그렇다는데, 어쩌려고?”
“……홍범아.”
“뭐.”
“에리카는…….”
“못 찾았어.”
남홍범이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런 일도 오랜만이네.”
“전에도 이런 적이…….”
“아이돌 애들이 술 먹고 뻗거나, 연락을 깜빡하거나, 핸드폰을 잃어버린 적은 몇 번 있었지. 그런데 대놓고 도망간 적은 처음인 거 같은데.”
“도망…….”
“진짜 너 때문에 에리카가 도망간 거냐? 그 믹스테입인지 뭐 때문에?”
정호환은 답하지 않았다.
남홍범이 어깨를 으쓱했다.
“곧 나갈 거라면서, 뭐 하러 사서 원한 만들고 그래.”
남홍범이 집무실을 나갔다.
다시 정호환은 혼자가 됐다.
그는 김민주가 던진 노트를 집어 들었다. 표지엔 ‘믹스테입’이라고 적혀 있었다.
에리카가 곡을 들려주러 올 때마다 함께 가져왔던 물건이다. 정호환은 한 번도 보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것을 펼쳤다.
[DAY1: 장르 설정]
이 노트는 에리카가 믹스테입을 만들기 위해 나아간 기록의 모음이었다.
믹스테입의 컨셉부터 수록할 곡의 장르들. 뮤직비디오의 대략적인 줄거리 등등, 수많은 아이디어로 가득했다.
그중엔 가끔 붉은 펜으로 표시된 것도 있었다.
[버전3, 2분 07초 부분, 정호환 이사님의 표정이 살짝 안 좋아짐]
그 붉은 기록들은 전부 정호환의 반응과 관련되어 있었다.
정호환은 노트를 계속 넘겨보았다. 그러다 보니, 이 노트는 프로듀싱 기획뿐 아닌 에리카의 일기장도 겸하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됐다.
[세이코와 미라이는 내 나이였을 때 앨범을 다섯 장도 넘게 냈어. 난 뒤처져 있어.]
[회사의 홍보가 없다면 내 곡을 몇 명이나 들어줄까? SNS도 못 쓰니까 홍보 방법이 없어. 몇백 명 정도는 들어줄까?]
[또 거절당했어. 속상해 ㅜㅜ]
[박 이사님이 좋다고 해주셨어. 그런데 박 이사님은 좋다는 말밖에 안 하셔. 리스너로서 도움이 안 되잖아…….]
[힘들어. 아무런 생각이 안 나.]
[힘들어도 즐거워.]
[꼭 발표하고 싶…….]
노트 위에 물기가 방울방울 스며들었다.
정호환은 울었다.
다키스트의 리더인 서유선이 떠올랐다.
‘하기 싫어요!’
에리카와는 상황이 정반대였으나, 서유선도 이러했던 적이 있었다.
‘딩동댕 묵찌빠’란 곡을 콘서트 세트리스트에 포함하려 할 때였다. 그는 정호환에게 거의 애원하다시피 ‘못 하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정호환은 단호했었다.
‘팬들이 바라지 않느냐.’
그에 서유선이 말했었다.
‘팬이 좋아하면 해야 한다고요? 그럼 그냥 저 발가벗고 춤추라고 하시지 그러세요?’
서유선은 절박했을 것이다.
아이돌로 살아가기로 했으나, 그에게도 넘고 싶지 않은 선이 있었다.
‘저도 하기 싫은 게 있다고요. 하고 싶지 않아요…….’
사실, 이런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아이돌도 사람이다.
하고픈 것과 하기 싫은 게 존재한다.
그때마다 정호환은 직업의식과 프로듀싱 전략을 들먹이며 그들에게 강요해왔다.
이건 해라.
저건 하지 마라.
하나하나로 따지면 사소한 일이다. 하지만 그게 쌓이면 걷잡을 수 없는 균열이 되어 인간을 망친다.
무너짐의 전조는 계속 있어 왔지만, 정호환은 무시했었다.
‘이럴 거면 난 대체 뭘 위해서…….’
정호환은 다키스트와 에리카를 겹쳐보았다.
다키스트 멤버 중 셋은 정신적인 이상을 호소하며 연예계 활동을 그만두었다.
그것을 보고, 정호환은 과도하게 아이돌을 몰아치는 전략을 접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보니 자신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이걸 해라’란 말이, ‘하지 말라’로 바뀐 것뿐이지 않은가.
어찌 됐든 정호환은 숨 막히게도 아이돌을 조여왔다.
‘에리카, 미안하다, 미안해.’
전하지 못한 진심, 뒤늦은 후회가 그의 가슴을 메웠다.
* * *
성필은 벌써 몇 시간째 운전만 하고 있었다.
리카는 조수석에서 곯아떨어진 지 오래였다.
에리카를 찾으러 다닌다며 여기저기 쏘아 다니기 시작했을 땐 팔팔했었다. 그러나 새벽이 다가오자 리카의 체력도 한계를 다한 듯했다.
‘곧 해 뜨겠네.’
진저와 김민주에게 에리카가 돌아오면 연락을 달라고 했건만, 연락이 없다.
아직도 에리카는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우응…….”
리카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녀는 창밖을 흘끔 보았다. 아직 밤이긴 했으나, 저 멀리서 새파란 빛이 비쳐오고 있었다.
“박 이사님, 여기 어딘가요…….”
“경상도.”
“에엑?!”
리카는 팔로 자신의 어깨를 감싸며 두려움에 떨었다.
“외박인가요! 돌아가기엔 늦었다면서 같은 숙소에 묵을 셈인가요! 너무 올드한 방식이에요!”
“곧 해 뜨는데 묵긴 뭘 묵어.”
“그게 목적이 아니라면 경상도까진 왜 온 건가요! 아니, 그보다 안 피곤하세요?”
“괜찮아.”
졸음 껌을 공기처럼 씹고 있으니까.
리카는 지겹게도 이어지는 산을 바라보았다.
“경상도면, 어디까지 가나요.”
“부산 쪽.”
“에리쨩한테 연락이 온 건가요! 부산이면…… 마사카(설마) 배 타고 일본으로 갈 속셈?!”
“아니.”
“에, 그럼요?”
성필은 자신이 이제부터 할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알기에, 일부러 한껏 진지한 말투를 꾸며냈다.
“감(感).”
사실, 감이 아니다.
에리카가 있을 곳으로 짐작 가는 곳이 있었다.
전생의 기억 덕분이었다.
‘에리카 씨가 고민이 있을 때마다 가시는 곳…….’
케이어스의 모든 인터뷰와 팬카페 편지글, 사소한 방송까지 전부 챙겨본 성필은 알 수 있었다.
‘바다.’
부산의 바닷가.
* * *
에리카는 새파랗게 밝아져 오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듣기로는 이곳에서 일본이 보인다던데, 본 적은 없다.
연습생 시절부터 힘들 때마다 찾았으나 단 한 번도 일본이 보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에리카의 눈빛은 바다 너머에 있을 자신의 고향, 일본을 하염없이 쫓았다.
여름이지만 바닷바람은 차가웠다. 그녀는 추위에 떨면서, 아주 긴 시간 동안 수평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
에리카는 새파랗게 물든 하늘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대체 이곳에 몇 시간을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십수 시간일 것이다.
‘회사에선 난리가 났겠지.’
회사엔 참으로 민폐를 끼쳤다.
회사만이 아니라 정호환에게도, 믹스테입을 도와준 성필에게도.
‘애초에 하면 안 됐던 거야.’
아이돌에겐 아이돌의 본분이 있다.
그것을 어기려 했으니, 정호환에게 꾸중을 듣더라도 별수 없다.
에리카는 정해진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했다. 아이돌에게 그어진 선을 넘으려 했다. 아니, 케이어스란 틀을 탈피하려고 했다.
화(和)를 깨뜨리려 했다.
그래선 안 됐다.
‘개인의 욕망이 집단의 이익을 넘어서선 안 되는 거야…….’
한순간이나마 꿈에서 살았다.
아이돌이 되어,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 착각하고, 세상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했다.
어제의 일은 그 벌이다.
이 절망은 하늘이 내린 벌이니, 달게 받겠다.
“이미 옛적에 배웠었잖아.”
에리카가 아주 어릴 적에 배웠던 사실이다. 자신의 본분을 넘어서는 안 된단 것 말이다.
일본의 전통 예술은 가문으로 이어진다.
매우 폐쇄적으로, 가문의 외부인에게 기술이 전승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한다.
이를 이에모토(家元)라 한다.
기술의 전승을 혈통으로 완성하는 제도.
에리카는 그러한 가문의 후계였으나, 자격이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자격을 포기했으니까.
“내가 아무리 하고 싶어도…….”
에리카는 아버지가 포기했던 가업을 잇고 싶었다.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며, 노래하고 싶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에리카는 사쿠라바가(家)에서 외부인이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재능이 있더라도, 엄격한 관습은 에리카가 다시금 혈통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했었다.
“할 수 없는 게 있는 거야…….”
에리카는 다시금 그러한 금기를 벗어나려 했다.
민폐였다.
그러니까, 이제 깔끔하게 포기하자.
오늘 돌아가서 모두에게 사과를 전하고, 정호환에게도 사죄하며,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자.
사쿠라바 에리카가 아니라 케이어스의 에리카로 살자.
‘작곡을 배운 건, 팬들이 작곡하는 캐릭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인간 에리카가 아니라 아이돌 에리카로 살아가자. 그게 자신의 본분이며, 회사와 맺은 계약이다.
그리 생각한 순간, 그녀의 눈가에 모든 고뇌와 괴로움이 액체가 되어 맺혔다.
에리카는 눈가에 달린 방울을 느꼈다.
‘이게 떨어지면.’
모두 잊는 거다.
눈물을 땅에 묻고 새로운 내가 되는 거다.
아버지가 그러했듯 ‘사쿠라바’란 이름을 버리고, 자신은 케이어스의 에리카가 된다.
에리카는 눈을 감으려 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떨어뜨림과 동시에, 자신의 모든 번뇌를 벗어버릴 생각으로.
시야가 천천히 닫힌다.
그리고.
“저기 에리쨩 머리처럼 보이는 게 있어요!”
“또 타이어 아니야?”
“이제 아타시(저)의 시간이라구요! 해가 떴어요! 더는 아까 같은 실수는 저지르지 않아요!”
“하아, 피곤해. 여기 없는 거 아니야?”
“박 이사님이 오자고 했잖아요?!”
에리카의 귀에, 이곳에 있으리라곤 믿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에리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과 눈이 맞았다.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 리카와 성필이 서 있었다.
“진짜 에리쨩이잖아?!”
리카가 성필을 미친놈 보듯이 보았다.
실제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재주로 에리카가 있는 장소를 특정했단 말인가?
그러한 감상은 에리카 또한 마찬가지였다.
“박 이사님……?”
성필도 막상 에리카를 찾자 당황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보다 행동이 빨랐다.
성필은 에리카를 향해 달려가 그녀의 앞에 섰다. 짧은 거리를 달렸음에도 숨이 찼다.
“여긴 어떻게…….”
“에리카 씨, 포기하실 거예요?”
“네?”
“믹스테입요.”
“…….”
성필이 에리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포기하지 마세요. 에리카 씨가 만든 곡을 듣고 싶어요.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왔어요.”
두 사람의 사이에 규칙적인 파도 소리가 끼어들었다.
연인이 나누는 대화처럼 끊이지 않는 파도 소리.
그 사이를 메운 침묵을 끊고, 에리카가 말했다.
“저, 이사님.”
“네, 에리카 씨.”
“저, 조금, 살짝, 소름, 끼치는데요. 정말, 어떻게 오신, 거예요?”
“……일본에서.”
성필이 어색하게 웃었다.
“소유 씨한테 들었어요. 에리카 씨가 힘들 때마다 찾는 곳이 있다고, 요…….”
“…….”
“…….”
“…….”
“…….”
“……그래서, 직접 오셨다구요? 저를 찾으러요?”
“네.”
“…….”
“…….”
성필이 에리카의 눈을 피했다. 그러자 이번엔 리카와 눈이 마주쳤다.
성필은 괜히 시비조로 말했다.
“뭐.”
“이에(아니), 에리쨩 말이 맞다 싶어서요…….”
박성필, 인정!
* * *
KS 엔터 전략 기획 회의.
정호환은 새벽부터 대회의실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턱을 괴고 창밖이 밝아지는 것을 바라본 지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사람이 들어왔다.
“일찍 왔네.”
남홍범 이사였다.
그는 자연스레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펜을 똑딱이며 시간을 때우던 그가 무심히 말했다.
“그냥 잘못했다고 해.”
“…….”
“오늘 회장님 안 오시잖아. 거기, A&R 애들한테 말해서 선정이 살짝 늦어진 거라 잡아떼라 해. 그렇게 시간 벌고.”
“…….”
“따로 회장님 뵙고 고개 숙여.”
“…….”
“아니, 진짜 나가려고?”
“…….”
“야 너 너무 책임감 없는 거 아니냐? 아니, 막말로 이 회사…….”
정호환은 남홍범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남홍범은 계속 무시당하자 꽤 화가 난 듯했으나, 정호환에게 대놓고 뭐라 하진 못했다.
곧이어 다른 임원들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남홍범은 정호환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을 전했다.
“야, 내가 말한 대로 해라? 어?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일주일만 더 따로 생각해 봐.”
“…….”
“에이 씨발……. 야, 그럼 내가 적당히 커버 한다?”
어느새 대회의실 가득 사람들이 들어찼다.
첫 번째 안건은 예고했던 대로 새로운 총괄 프로듀서에 관한 것이었다.
개회사가 있고, 수석 프로듀서인 강동현이 대회의실로 불려왔다. 그는 들어온 순간부터 불쌍할 정도로 벌벌 떨었다.
“그럼.”
회장이 부재한 상황에서 회의를 이끌어가는 건 구유한이었다. 최고 운영 책임자인 그는 회장이 부재할 때 대리 역을 수행할 자격이 충분했다.
“강동현 수석 프로듀서, 보고하도록 하세요.”
“……네.”
강동현은 침을 꼴깍 삼키며 품에서 쪽지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엔 하나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이다. KS 엔터 프로듀싱 파트 전원의 투표로 추천받은, KS 엔터 차기 총괄 프로듀서의 이름이 말이다.
‘저 친구 계 탔군.’
‘젊은 나이에 KS 엔터 임원까지 오르다니.’
‘정호환 이사가 정말 이대로 물러나는 건가?’
‘아무런 반응이 없는데…….’
여기저기서 불안과 기대의 시선이 얽혔다.
그중에서 평정을 유지하는 건 구유한뿐이었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강동현의 사소한 행동 하나까지 눈에 담았다.
강동현은 그 눈빛을 견뎌내는 게 어려운지, 시선을 한 군데 머무르지 못했다.
“강동현 PD, 긴장되는 건 알지만 빨리 발표하도록 하세요.”
“…….”
쪽지를 든 강동현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다가.
“……!”
강동현이 쪽지를 그대로 바닥에 버렸다.
떨어뜨린 게 아니다.
버린 것이다.
“프로듀싱 파트 전원, 만장일치로 차기 총괄 프로듀서를 택했습니다. 박성필입니다.”
구유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하자는 겁니까?”
“외, 외부인을 추천하면 안 된단 말은 없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그래서 저희는…….”
박성필을 추천한다.
절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외부인을, KS 엔터의 총괄 프로듀서로 추천한다.
회의실이 술렁였다.
사실상 프로듀싱 파트 전원이 회장의 지시에 불응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거기까지 이르자 더는 정호환도 멍하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정호환은 강동현에게 지지 않을 만큼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 뭐라고 하는 건…….”
“이게 저희 A&R팀의 결정입니다!”
강동현은 평소의 그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단호하게 외쳤다.
“저희는 다른 사람을 뽑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계속 정호환을 총괄 프로듀서로 두어 달라. 그게 KS 엔터 프로듀싱 파트의 의견이었다.
KS 엔터의 프로듀싱 팀은 한국 최고의 인재들이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정호환의 업적을 보면서 자랐다.
애초에 연예 기획사까지 들어올 정도면 정호환을 모를 수 없다.
그들은 정호환이 프로듀싱한 아이돌에 열광했으며, 그 아이돌의 음악을 들으며 자랐고, 마침내 KS 엔터까지 오게 됐다.
그런데, 정호환이 회사의 정치질에 희생되어 물러나려 한다.
그래선 안 된다.
“이게 저희의…….”
그렇게 둘 순 없다.
“결코 바꾸지 않을, 최종적인 결정입니다.”
영웅이 부당하게 떠나도록 좌시할 순 없다.
그런 의지를 담아, 강동현은 곧은 눈으로 구유한을 응시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정호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
그렇구나.
내가 걸어온 길은 헛된 게 아니었구나.
나는 이토록 신뢰받고 있구나.
다들 나를 인정하고 있다.
KS 엔터의 심장이자 핵심인 A&R팀은, 정호환을 지지한다.
“그렇다고 하는군요, 구유한 이사님…….”
정호환은 가슴이 벅차서 말했다.
아까까지 절망적인 상황 앞에 서 있던 사람이라곤 생각지도 못할 만큼 눈빛이 형형했다.
판이 바뀌었다.
프로듀싱 파트의 독립성은 지켜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실수를 주워 담을 수 있을 거다.’
에리카에게 저지른 어른답지 못한 행동도 반드시…….
“알겠습니다.”
구유한이 간결히 답했다.
“박성필이라면, 가로 엔터의 박성필 이사를 말하는 거겠죠? 회장님께 그리 보고하고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강동현 수석 프로듀서, 수고했어요. 나가보도록 하세요. 그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강동현은 두 눈을 끔뻑이다가.
“응?”
멍청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정호환도.
“……어?”
그에 지지 않을 만큼 멍청한 소리로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