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3화
성필은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가게에 도착했다. 예약해뒀던 자리에 앉아 하이볼을 홀짝이며 정호환이 오길 기다렸다.
약속 시각이 됐다.
정호환은 나타나지 않았다.
성필은 시간을 잘못 보았나 생각하여 계속 손목시계를 확인했으나, 잘못 보았을 리 없다.
정호환이 늦는 것이다.
“…….”
또 하이볼을 홀짝였다.
정호환에게 작업물을 보여준다던 에리카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예상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극적으로 에리카 씨가 정호환 이사님을 설득하고, 둘이 그간의 회포를 푸느라 연락이 없다…….’
그런 판타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필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정호환이 에리카에게 밝히지 않을 이유, 혹은 신념. 그것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파악한 후, 정호환이 에리카의 믹스테입 발표를 허락할 전략을 짜야만 한다.
‘그게 내가 속죄할 수 있는…….’
속죄(贖罪).
그 단어를 떠올린 성필은 적잖이 놀랐다.
그는 자신이 회귀하여 케이어스가 어긋난 것을 죄로 인식하고 있던 것이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에리카에게 신경 쓰진 않겠지.
소녀연맹만 케어하기에도 바쁜데, 매일 조금씩 시간을 빼서 에리카를 돕다니.
‘만약 리카가 없었으면 모양새가 굉장히 이상했겠지.’
‘케이어스 너무너무 좋아 사랑해 영원히 함께야’란 생각이라고 오해받아도 할 말이 없다.
그런 만큼, 에리카의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는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성필의 앞자리에 정호환이 앉았다. 늦은 게 미안한지 급한 티가 나는 움직임이었다.
“아니요. 고작 10분인데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죄의 의미로 계산은 제가 하겠습니다.”
“뭘 그렇게까지…….”
정호환은 어차피 자신이 살 생각이었다며, 그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안주와 술을 주문했다.
둘은 금방 나온 술로 가볍게 잔을 나누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었다.
성필은 대화를 이끌기보다 들어주는 쪽이었다. 보통 수다를 떨자며 술자리에 불러내는 사람은 고민이 있는 법이니까.
사실상 그 고민을 들어주려 이 자리에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적당히 기회를 봐서 에리카 씨 이야기도 꺼내야 하는데.’
술이 몇 잔 돌고, 정호환도 하고픈 이야기를 끝내면 자연스레 화제를 바꿔보자.
그리 생각하고 있자니, 정호환이 갑자기 씁쓸한 웃음을 보였다.
“제가 곧 KS 엔터를 나갑니다.”
성필이 마시던 술이 그의 입술 밖으로 주르륵 흘러나왔다.
너무 황당하여 입의 힘이 풀린 것이다.
정호환이 깜짝 놀라며 티슈를 뽑아주려 했으나, 성필이 그보다 빨리 물티슈로 바지에 흘린 술을 닦아냈다.
“괘, 괜찮습니다. 그런데 나가시다니요? KS 엔터를요?”
“예,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대체 어떡하면 어쩌다 보니 KS 엔터를 나갈 수 있는 건데! 성필은 시야가 핑핑 도는 기분이었다.
“어째서, 갑자기, 으에? 왜요?”
정호환은 답 없이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근심 걱정 없는 듯한 미소를 띠었다.
“저도 늙었으니까요.”
늙었다니, 절대 아니다.
성필이 아는 한 정호환은 케이어스가 해체하고 나서도 프로듀서로 활동한다.
케이어스로 입지전적인 커리어를 이룩했으니, 당연히 그의 명성은 한국을 넘어 세계에 알려졌었다.
늙었다고?
정호환은 그럴 수 없다.
“세상이 저를 바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케이어스는요?”
성필이 공격적으로 물었다.
“케이어스는 내버려 두고 가시는 겁니까?”
“회사가 알아서 잘하겠지요.”
“메인 프로듀서시잖아요. 정호환 이사님이 자리를 비우시면 혼란이 올 겁니다.”
“그러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짧게 보면 혼란이 오겠지만, KS 엔터의 A&R팀은 그렇게 무능력하지 않습니다.”
그럴 것이다.
한국 최고의 인재들만 모아둔 곳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정호환 이사님의 비전이 회사에 투영되지 않는 게 문제지.’
말하자면, KS 엔터의 A&R팀은 좋은 도구다.
그 도구는 정호환이 다뤘기에 제 역할을 해냈던 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쓰는 사람이 바뀌어도 도구의 가치는 바뀌지 않으나, 옛날만큼 날이 잘 들지는 않을 것이다.
“이대로…….”
성필은 잔을 쥔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이대로 물러나시는 겁니까? 정말로?”
믿을 수가 없어서.
믿고 싶지 않아서.
성필은 계속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정호환이 KS 엔터를 나간다고?
‘이미 케이어스 문제만으로도 머릿속이 터질 거 같은데, 정호환 이사님까지?’
대체 어디서부터 엉킨 걸까.
성필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어쩌면, 성필이 과거로 돌아온 것 자체가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이럴 거였으면…….’
차라리 석세스 엔터에 남아서 김태훈에게 배신당하고 말지…….
찬란한 케이어스의 미래를 망치면서까지, 성필은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지 않았다.
성필의 꿈은 케이어스로부터 생겨났으니까. 그가 바라고 목표로 했던 게 바로 전생의 케이어스였으니까.
“그래야지요.”
성필의 애절한 물음에도 정호환은 물러나겠단 말만 했다. 그게 성필을 더욱 절망하게 했다.
“이제 제가 있을 자리는 없습니다.”
“말도 안…….”
그 순간, 성필은 어느 사실을 깨달았다.
‘정 이사님이 떠나가시는 이유가 뭐지?’
갑자기 ‘나도 늙었군’이라며 스스로 은퇴를 선언하진 않을 것이다. 외적인 이유가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반드시 그럴 것이다.
그리고 성필이 느끼기에, 정호환은 이상했다.
‘내가 떠나지 말라고, 계속 잡는 걸 은근히 바라시는 눈치잖아.’
스스로 확신이 있고 이미 결정을 내렸다면, 성필의 이런 말을 계속 듣고 싶을 리 없다.
자기 확신이 있는 인간은 주변에서 뭐라 하는 것에 신경 쓰지 않으니까.
아, 그렇구나.
‘정호환 이사님은 은퇴 같은 거 안 하셔.’
만약 그런 미래가 정말로 펼쳐진다면, 몇 개월 전에 미래를 보았을 것이다.
그럼 성필은 정호환의 바짓가랑이에라도 매달려 어떻게든 미래를 바꾸려 애썼을 것이다.
즉, 정호환이 KS 엔터를 나간다는 끔찍한 미래는 펼쳐지지 않는다.
성필은 침을 꼴깍 삼켰다.
‘만약 미래가 그런 식으로 확정되어 있다면.’
어디까지 정호환을 몰아쳐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까?
“……은퇴하신다고요.”
성필은 어조를 바꾸었다.
“그렇습니다.”
“그럴 거면, 왜 계속 에리카 씨의 믹스테입 발표를 반대하시는 겁니까?”
정호환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성필이 이 말을 꺼낼 줄 예상조차 못한 듯했다.
“어차피 회사를 떠나실 텐데요. 이왕 떠나시는 거 시원하게 허락해주시면 안 됩니까?”
성필의 화제 전환은 맥락조차 없었다.
그냥 하고픈 말을 뱉은 것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정호환은 성실하게도 그에 답해주었다.
“제가 떠날 몸이라지만, 의무마저 방기할 순 없지 않습니까.”
“의무……. 예전에 저한테 들려주신 말씀 기억하십니까. 아이돌은 아티스트가 될 수 없단 거 말입니다.”
“기억합니다.”
“소녀연맹을 보고서도, 아직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박 이사님의 전략엔 감탄했습니다. 설마 아이돌의 성장 서사조차 상품으로 바꾸어 대중에게 선보일 수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이야기를 판다……, 말은 쉽지만 쉽게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지요.”
정호환의 생각은 3년 전과 비교하여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에리카를 도와주신다지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에리카에겐 계속 안 된다고 했지만, 도와주시는 분 앞에서 이유를 설명하니 미안한 마음이 더 강하군요.”
“저는 정호환 이사님이 숨기시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숨기다니요?”
“에리카 씨의 믹스테입을 허락해주시지 않는 이유요. 그런데, 처음부터 그런 건 없었네요.”
너무나 명확한 이유가 존재했다.
정호환은 이유를 숨기지 않았다.
그가 항상 가져온 생각이 정답이었다.
“아이돌은 철저하게 기획된 엔터테인먼트 상품이기에, 기획되지 않은 개성이 드러나선 안 된다. 그게 이유죠?”
“……저를 탓하시는 겁니까?”
“아니요. 프로듀서로서 방향성이 다른 건데, 제가 어떻게 이사님을 탓하겠습니까.”
그런 것치곤 성필의 말투는 과하게 날이 서 있었다. 정호환을 탓하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다만 저는 정 이사님의 안목을 의심할 수밖에 없네요.”
정호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오늘은 무슨 마가 씌었나.
만나는 인간마다 자신을 도발하지 못해 안달이다. 구유한부터 시작해서 에리카, 성필까지.
새파랗게 어린 것들이 대체 무슨 깡으로…….
“에리카 씨가 아이디어를 정리한 프로듀싱 노트, 보신 적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곡은 들어보셨죠?”
“곡만 들었습니다.”
“곡이 안 좋던가요?”
“좋았습니다.”
“그런데 믹스테입 발표는 허락해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제 방향성과 어긋나니까요.”
“그 어린애가 손아귀에서 살짝 벗어나는 게 두려워서요?”
“박 이사님…….”
정호환은 오랜 세월 갈고 닦아온 가면을 썼다. 아니었다면 당장 불쾌한 티를 내비쳤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아뇨, 계속할 겁니다.”
“뭘 얻고 싶은 겁니까? 저는 곧 떠날 사람인데, 저를 탓해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정 이사님이 떠나길 바라지 않아서 계속 말씀드리는 겁니다!”
성필이 외치자 술집의 이목이 단번에 쏠렸다.
그는 심호흡한 후 주변을 향해 ‘죄송합니다’라고 연신 사과를 전했다. 그리고 다시금 정호환을 보았다.
정호환은 어안이벙벙한 얼굴이었다.
“정호환 이사님이 이 업계를 떠나지 않길 바라니까, 말씀드리는 겁니다…….”
“…….”
“순수하게 마음을 열고 에리카 씨의 곡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정호환 이사님의 가치관과 방향성을 잠시라도 내려놓고서요. 에리카 씨를 아이돌이 아니라, 잠시만이라도 인간으로 봐주세요. 이런 단어는 쓰고 싶지 않지만,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어린아이가 크레파스로 꼬물꼬물 그린 가족사진. 어른이 보기엔 당연히 엉망진창이다.
그럼에도 어른들은 아이의 그림을 대강 보지 않고, 최대한 집중하여 장점을 찾아낸다.
에리카는 정호환이 한창 1세대 아이돌을 프로듀싱 할 때 태어나지도 않았었다. 정호환과 비교하면 까마득히 어리다.
“에리카 씨가 말하길, 정호환 이사님은 단 한 번도 곡에 관련해선 피드백을 하지 않으셨다더군요.”
“…….”
“제대로 들으신 적이 없으신 거 아닙니까? 거절할 이유만 생각하신 거 아닙니까?”
확실히, 그랬을지도 모른다.
에리카가 믹스테입을 만들기 시작했을 무렵, 정호환은 구유한, 회장과의 대립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었으니까.
무언가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수십 년간 쌓아온 신념을 갑옷처럼 두르고, 자신이 옳다는 것만을 수없이 되새겼었다.
“왜 그렇게 매정하십니까?”
“이제 그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에리카 씨는 정호환 이사님의 허락이 조금도 필요하지 않아요.”
“알겠으니까 그만하…….”
“에리카 씨가 당장 믹스테입을 낸들 KS 엔터가 고소라도 할 겁니까 뭐 할 겁니까?”
“그만하라…….”
“그런데도 에리카 씨가 계속해서 정호환 이사님을 찾아간 건, 순수하게 이사님을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애에게 이사님은…….”
“그만!”
정호환이 큰소리로 외쳤다.
또 술집의 이목이 쏠렸다.
점원이 불안한 눈초리로 성필과 정호환의 테이블을 응시했다.
정호환은 아까 전의 성필처럼 심호흡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으로 사과를 전했다. 그리고 앉아 말을 이었다.
“매정하다고요? 더 매정한 말을 한 번 해보지요. 에리카가 창작을 바랐다면 아이돌이 돼선 안 됐습니다. 연습생으로 몇 년을 지낼 게 아니라, 인디씬에서 몇 년을 지냈어야죠. 자기 증명의 방법이 틀렸습니다.”
“…….”
“보아하니 박 이사님은 말로는 저를 존경하면서도, 실제론 그러지 않으시는 모양이십니다. 저의 모든 과거와 업적엔 찬사를 바치면서도, 현재 이 자리에 앉은 제가 틀릴 거라 생각하십니다. 아니요, 아닙니다.”
정호환이 고집에 가득 찬 눈빛을 띠었다.
“확률적으로 그럴 수 없지요. 과거에도 모두 성공을 이끌어 냈다면, 지금 이 자리의 저도 성공으로 이어지는 길 위에 있는 겁니다. 제가 떠나길 바라지 않으신다고요? 아닌 거 같습니다. 오히려 제가 떠나는 쪽이 박 이사님에겐 더욱 기쁜 일이 될 것 같군요.”
정호환은 거칠게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작게 ‘이놈이고 저놈이고……’란 말을 반복하며 구시렁댔다.
“이제 확신합니다.”
정호환은 계산서를 들곤 성필에게서 등을 돌렸다.
“정말, 저는 퇴물이 다 됐군요. 다들 저에게 소리를 높이니 말입니다. 그래요, 압니다!”
나가려는가 싶었는데, 정호환은 다시 성필을 돌아보며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같은 늙은이 따위 어찌 됐든 좋다 이거지요! 역할을 다했으니 얼마든지 꺼지라고! 됐습니다 됐어요! 다 지긋지긋합니다 이제!”
그러고 나서, 정호환은 이번에야말로 사라졌다.
계산대에 계산서와 현금다발을 뿌리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성필이 따라잡을 새도 없었다.
“……잠깐!”
성필은 헐레벌떡 가게를 나와 정호환을 찾았다. 하지만 그는 벌써 밤의 인파에 휩쓸려 자취를 감춘 뒤였다.
“끝?”
정말로, 이게 끝?
성필은 아연실색하여 거리를 둘러보다가 다시 가게로 돌아왔다. 자리로 가니, 사장으로 보이는 이가 자리에 서서 성필을 응시하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 난장판을 부렸으니 대우가 안 좋을 만도 하다. 성필은 급히 짐을 싸서 가게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찜찜한 기분으로 합숙소에 돌아가야 하는 건가. 그럴듯한 정보도 얻지 못했는데.
‘아니, 얻어봤자 의미가 없는 거지.’
성필이 예상했던 그대로였으니까.
에리카의 믹스테입을 허락하지 않는 건 정호환의 믿음 탓이었다.
아이돌이 정해진 통제 범위를 나가길 바라지 않기 때문에, 정호환은 고작 믹스테입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성필이 어떻게 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전생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거야. 전생에서 에리카 씨가 믹스테입을 내지 않은 건 계속 정호환 이사님이 반대하셨기 때문…….’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에리카의 곡이 수준급의 퀄리티를 달성하자마자 정식 발매가 된 것일 터다.
아마 에리카는 정호환에게 거절당하고 계속 곡을 다듬는 과정을 거쳤겠지.
‘아마도 이게 옳은 방향일 거야.’
왜냐하면 미래가 보이지 않으니까.
성필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떻게든 일이 잘 풀린 듯했다.
‘괜히 걱정했네.’
케이어스가 전생의 방향에서 틀어졌다고?
아니다.
전생의 방향대로 나아가고 있다.
이 모든 갈등이 그 미래로 이어지는 과정인 것이다. 오늘 정호환과의 말다툼으로 믿음이 생겼다.
‘그래도 일단 에리카 씨에게 연락은 드려야지.’
성필은 에리카에게 통화를 걸었다. 그녀가 성필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몇 번 신호음이 가자 연락이 됐다.
폰 너머로 강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에리카 씨?”
[네, 이사님. 어떻게 됐나요?]
역시 에리카는 성필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하다.
“그게…….”
성필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정호환이 믹스테입 건을 거절한 이유는, 역시나 그의 프로듀싱 전략 때문이었다고.
[제가 들었던 이유랑 똑같네요.]
“아, 그런가요?”
[네. 정확한 워딩은 달랐지만요. 비슷했어요.]
“…….”
[…….]
“이제 어떡하실 건가요?”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이 돌아왔다.
[글쎄요. 생각해봐야죠.]
* * *
다음 날 점심.
성필은 어제 정호환과 만난 이후부터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내가 심하긴 했어.’
노인에 대한 존경도 없이 마구 목소리를 높이다니. 심지어 그 상대가 정호환 이사였다.
성필의 영웅이자 동경의 대상 말이다.
‘사과드려야 하는데…….’
타이밍을 못 잡겠다.
연락했다가 씹힐 수도 있고 말이다.
정호환은 은퇴를 준비 중이라고 하니, 지금 바쁠 가능성도 있다. 역시 퇴근 후에 연락해봐야 할까…….
‘그나저나, 정호환 이사님이 은퇴 안 하시는 건 맞겠지?’
불안하다.
하지만, 성필은 일단 자신의 능력을 믿기로 했다. 후회할 미래는 보는 능력은 그를 배신한 적이 없다.
‘볼 수 있는 미래의 기한은 6개월. 그 기간이 엇나간 적은 세 번뿐이야.’
전생에서 10년 후, 성필이 석세스 엔터로부터 배신당하는 미래를 봤을 때.
장하양이 배우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실패에 도달한 미래를 봤을 때.
그리고 ‘아라베스크’ 당시 조아라가 자신감을 잃어버리는 미래를 봤을 때.
그 세 가지를 제외하고, 성필이 보았던 미래는 전부 6개월이란 제한을 지니고 있었다.
‘즉, 6개월 이내로 내가 후회할 만한 일을 벌어지지 않는단 건데…….’
계산해보자면, 6개월간 정호환이 KS 엔터를 나가는 일은 없단 뜻이다.
성필이 갑자기 정호환이나 케이어스를 증오하지 않고서야, 후회하지 않을 리 만무하다.
“하아…….”
성필은 1층 휴게 공간에 서서 유리벽 밖을 바라보았다.
다른 팀원들은 모두 점심을 먹으러 갔지만, 성필은 몸이 안 좋단 이유로 회사에 남아 있었다.
괜히 한숨이나 푹푹 쉬면서 커피나 마시던 중, 전화가 걸려 왔다.
진저였다.
웬 횡재지?
“진저 씨 안녕하세요.”
[안녕하심미까 박 이사님.]
“네, 무슨 일이세요?”
[에리카 언니 어디 있는지 아심미까?]
“에리카 씨요? 에리카 씨가 왜요?”
[저도 모름미다.]
“네?”
[민주 언니가 물어보라고 했슴미다. 모르심미까?]
“네, 잘…….”
[알겠슴미다. 용무는 그게 다임미다.]
“아, 그래요.”
[하지만 박 이사님이 수다를 떨고 싶으시다면 조금 어울려줄 생각은 있슴미다.]
“죄송합니다, 바빠서요.”
[알겠슴미다…….]
성필은 약 10분간 진저와 수다를 떤 후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우울 모드로 들어서 유리벽 밖만 바라보았다.
한여름이다. 분명 활기가 넘치는 계절인데, 성필의 마음은 검게 물들기만 했다.
그때 갑자기 그의 등으로 온기가 전해졌다. 성필이 깜짝 놀라 뒤로 고개를 돌리니.
“아름아?”
신아름이 뒤에서 껴안고 있었다.
성필이 당황하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성필을 바라보았다.
‘얘, 얘가 왜 이러지?’
신아름은 이렇게 애정 표현이 과한 아이가 아니다. 그녀는 성필과의 관계에 꽤 조심하는 편이니까.
멤버들도 성필과 신아름의 관계를 이해한다. 그렇지만 대놓고 친밀함을 과시할 수는 없다. 편애의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렇게 대놓고 달라붙는 일이 거의 없는 편인데…….
“팀장님 많이 힘들어요……?”
“어? 아…….”
성필은 신아름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단숨에 이해했다.
신아름은 성필의 침울한 모습이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직 나랑 하슬이가 화해한 부분까지는 안 나왔으니까. 하긴, 내가 오늘 과하게 우중충하긴 했지…….’
신아름이 점심시간임에도 회사에 남아 있던 건 성필과 둘만 있을 타이밍을 노린 것이다.
정확히는 성필을 위로할 타이밍을 노린 거겠지.
성필은 자신의 배를 끌어안은 신아름의 팔 위에 손을 얹었다.
“안 힘들어.”
“거짓말 안 해도 돼요.”
“진짜야. 있잖아, 나 오늘 하슬이랑 데이트한다? 방송엔 안 나왔는데 화해 다 해흐헠…….”
신아름이 배를 안는 것을 넘어서 꽉 조였다. 성필은 폐 안의 공기가 다 빠져나가는 소리를 냈다.
“팀장님.”
“으, 으응…….”
“하고 싶은 거 있으면 그냥 해요. 괜히 다른 사람들 눈치 보지 마세요. 팀장님은 팀장님일 때가 제일 멋져요.”
“아, 아게흐니까 노, 놔줘어…….”
신아름이 팔의 힘을 풀었다.
성필은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들 눈치 보지 말란 거예요. 알겠어요?”
“응…….”
그러고도 신아름은 한동안 포옹을 풀지 않았다. 성필은 또 신아름이 팔에 힘을 줄까 봐 두려웠다.
“저기, 아름아.”
“왜요. 부끄러워요?”
“나 방송 괜히 나갔나?”
“역시 힘들죠? 불편하죠? 지금이라도 하차할래요?”
“아니, 내가 아니라 너 때문에.”
“……내가 뭐요.”
“나보나 네가 더 힘들어하잖아.”
하아.
신아름이 한숨을 내쉬었다.
“힘들죠 당연히……. 팀장님이 이상한 애들한테 욕먹는데 어떻게 안 힘들어요…….”
“다음부터는 방송 같은 데 절대 안 나가야겠다.”
“팀장님이 이렇게 괴로워하는데, 난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오늘도 계속 넋 나간 사람처럼 한숨만 쉬고오…….”
“그거 때문 아니야.”
“그럼 뭐 때문인데요.”
에리카 때문에…….
“미안, 사실 그거 때문 맞아. 그래도 아름이가 이렇게 위로도 해주고, 영 못 할 짓은 아니네.”
“앞으로도 자주 이렇게 안아줄까요?”
“아냐, 괜차느허헠……. 너, 너무 죠아아…….”
등 뒤로, 오랜만에 듣는 신아름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전해졌다.
방송이 끝나면 신아름에게 조금 더 시간을 쏟아야겠다. 얼마나 소원했으면 애가 이렇게 먼저 다가오겠는가.
성필이 그리 결심하는 동안,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들이 둘 있었다.
2층 난간에 기대어 이야기하고 있던 신인개발팀의 신준성과 연습생 김사무엘이었다.
“형, 프로듀서랑 아이돌이 원래…….”
“이제 나도 몰라 새꺄. 원래 저런가 보지.”
* * *
7시 정각.
성필은 업무를 마치고 걸음을 재촉했다. 오늘은 김하슬과의 데이트가 있는 날이다.
최대한 빨리 숙소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꽃단장을 마쳐야 한다. 오늘이야말로 김하슬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상화할 절호의 기회다.
‘아름이를 위해서라도 최고의 데이트로 만들어야 해.’
더는 멤버들에게 ‘아름이가 이상해요!’란 말을 듣지 않아야 한다. 특히, 리카가 신아름의 욕구 해소 수단으로 쓰이는 일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성필이 합숙소로 들어오자 그의 사정을 아는 남자 출연자들이 응원해주었다.
“성필아 힘내라!”
“욕받이 탈출하자!”
“아 다들 뭐래. 내가 무슨 욕받이야.”
성필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전투 태세에 나서는 기사처럼 마음을 다잡았다.
샤워하고 방으로 들어가선 간단한 화장과 헤어스타일링까지 해치웠다.
마하라 디자이너에게서 선물받은 고가의 명품 정장과 시계도 잊지 않고 착용했다. 전신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살피니…….
‘이건 진짜 먹힌다.’
이 정도면 20대라 해도 사람들이 믿어줄 것 같다. 물론 성필 혼자만의 감상이었다.
이제 성필은 활기보다 중후함을 매력 포인트로 삼아야 할 나이다.
약 10분에 이르는 자아도취를 끝내고, 그는 최후의 준비를 하듯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케이. 시간엔 맞췄고.’
조금 기다렸다가 합숙소를 나서면 된다.
애초에 데이트 시작 장소가 합숙소다.
‘뭔가, 결혼한 부부 같네.’
부부는 연인과 달리 데이트의 시작이 집일 테니까.
성필은 침대에 앉아 초조하게 데이트 시작을 기다렸다. 그때 성필의 폰이 진동을 토해냈다.
연락올 만한 사람들은 그가 방송 중인 것을 안다. 그러니 웬만해선 전화하지 않을 텐데…….
‘리카네?’
리카는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에서 약방의 감초 역할을 맡고 있다.
심심하면 성필에게 전화가 오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소녀연맹이 홍보 효과를 톡톡히 보기도 했다. 출연자들과 소녀연맹의 즉석 화상통화 팬미팅까지 이뤄지기도 했으니.
‘내가 데이트 한단 얘기 듣고 응원이라도 해주려나.’
성필은 싱글벙글 전화를 받았다.
“어, 리카…….”
[에리쨩이 사라졌어요!]
“……뭐?”
[오늘 아침부터 안 보인대요! 연락도 안 받는대요! 사, 사라진 거예요!]
“…….”
성필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걸 어떻게…….”
[KS 엔터에서 연락이 왔어요! 에리쨩이 어디 있는지 아냐구요!]
성필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점심에 진저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김민주가 에리카를 찾는다고 말이다.
‘그래, 평소였으면 에리카 씨는 민주 씨의 연습실로 갔을 텐데…….’
오늘은 가지 않은 거겠지.
그리고 저녁이 되도록 숙소에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게 현재까지 이어진 것이다.
연락도 받지 않는다.
말 그대로, 사라졌다.
잠적한 것이다.
[찾으러 가야 해요!]
“…….”
[이사님!]
찾으러 가야 한다고?
어떻게?
“아니, 그, 리카,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게…….”
[이사님 전화면 에리쨩이 받을 수도 있어요! KS 엔터 쪽 전화는 전부 안 받는대요! 계속 전화 걸면서 찾으러 다녀야 해요!]
리카의 제안은 현실성이 없었다. 아마 에리카가 사라졌단 말에 패닉이 온 거겠지.
KS 엔터는 사라진 에리카를 찾느라 전력을 다하고 있을 터다. 그리고 그들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애초에 성필은 에리카를 찾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테고 말이다.
굳이 성필이 가야 할 이유는…….
‘걱정 돼.’
찾으러 가야 할 이유는 있다.
에리카가 사라졌다고? 말도 안 되는 사태다.
성필은 조금이나마 에리카를 찾는 데 도움이 되고 싶었다.
리카의 말마따나, KS 엔터의 모든 연락을 무시하는 에리카가 성필의 연락만 받을 확률이 조금이라도 존재한다면 말이다.
“오빠.”
그때 문 쪽에서 김하슬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리니, 드레스까지 입은 채 한껏 꾸민 김하슬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교태가 담긴 눈웃음과 함께 말했다.
“기다리다가, 빨리 보고 싶어서 왔어.”
“…….”
에리카를 찾으러 가고 싶다.
하지만 성필에겐 일이 있다.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의 촬영 말이다. 김하슬과의 데이트도 엄연한 업무나 마찬가지다.
여기서 ‘미안, 케이어스 에리카 씨가 사라졌대. 찾으러 가야 해’라면서 뛰쳐나가면, 시청자는 물론 제작진도 성필을 미친놈 취급할 것이다.
이미 제작진이 성필과 김하슬의 데이트를 촬영하러 합숙소 안에서부터 기다리고 있다.
“그…….”
그래.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에리카가 사라졌다고? 설령 그렇더라도, 성필 하나 더 낀다고 상황이 확 달라질 리는 없다.
에리카가 KS 엔터의 연락을 전부 씹는다면, 성필의 연락이라고 흔쾌히 받아줄 리가 없다.
김하슬과 데이트하러 가는 동안 에리카에게 문자 몇 통, 통화 몇 번 거는 정도로 충분하다. 그게 당연하고도 이성적인 행위다.
아마 리카는 KS 엔터 쪽으로부터 협조 요청을 받았을 것이다. 최근 쭉 함께 다닌 친구이니, 도움을 바란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성필도 그 도움의 범위에 포함된다. 자연스레 리카는 성필에게 연락한 것이다.
당황하여 사리 판단이 되지 않는 상태로.
“일단 내 쪽에서 연락해볼게. 그리고 나도 지금 촬영이 있어서, 이 일이 끝나고 되는대로…….”
그 순간, 성필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 * *
성필은 전신거울 앞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그리고 얼굴에 새겨진 주름을 손으로 몇 번 쓸더니, 거울 안의 자신을 향해 말했다.
“5년…….”
성필이 짙은 회한 속에 말했다.
“5년이 지나서야, 겨우 알게 됐네.”
거울 속의 그가 우울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때, 에리카를 찾으러 가야 했어. 나의…….”
●“오빠?”
성필이 한동안 굳어 있자 김하슬이 그를 걱정스레 불렀다. 그러나 그는 대답도 없이 코트걸이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걸이의 가장 위에는 여섯 개의 모자가 걸려 있었다.
성필이 육색 모자 발상법을 시연할 때 사용했던 것이었다. 방송 촬영 중에 개그를 치기 위해 이곳으로 가져왔었다.
“오빠 왜 그래.”
성필의 상태는 척 보기에도 정상이 아니었다.
넋이 나갔단 표현은 소설 같은 곳에서 흔하게도 보이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을 보기란 어렵다.
김하슬은 인생을 살면서 거의 처음 넋이 나간 사람을 보았다. 그러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넋이 나간 성필.
그는 여섯 개의 모자 중 하나를 집었다.
레드(감정).
그것을 머리에 쓴 순간, 성필이 결연히 말했다.
“하슬아,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