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화
정호환은 KS 엔터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너무 오래 이 자리에 있었단 생각은 계속해서 해 왔다. 늙어버린 육신은 필연적으로 정신의 노화도 초래한다. 그건 알고 있다.
하지만 정호환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KS 엔터의 총괄 프로듀서이자 살아 있는 전설이며, 여전히 감각을 잃지 않은 현역 프로듀서.
‘나는 아직 청춘이다.’
그리 생각했건만, 회장은 간단하게도 정호환을 해임할 의사를 드러냈다.
사실상 정호환이 퇴물임을 선언한 것이다.
‘물론 강 PD의 말이 맞을 거야. 나를 겁주기 위한 제스처일 수도 있지.’
정호환이 고개를 숙이면 그만일 것이다. 그로써 다시금 서열이 확립되고, 정호환은 계속 총괄 프로듀서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KS 엔터는 더 이상 프로듀싱 파트의 독립성을 인정해주지 않을 텐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이런 곳에 엉덩이 붙이고 있겠는가.
‘그래, 나는…….’
퇴물이다.
KS 엔터에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쫓아낼 수 있는 존재이다.
그리 취급받는 것 자체가 참을 수 없는 굴욕이니, 더한 치욕을 맛보기 전에 회사를 떠나겠다.
“븨이에스 기획은 어떻게…….”
프로듀싱 파트 전체 투표로 새로운 총괄 프로듀서가 추천되기까지 이틀 남았다.
정호환은 나갈 마음을 굳혔으나, 그에게 주어진 업무를 도외시할 생각은 없었다. 하던 대로 출근하여 보고를 받는다.
수석 프로듀서 강동현은 집무실에 찾아온 때부터 기력이 없었다.
의무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기획을 가지고 왔다. 어떻게든 정호환과 말을 섞고 그의 마음을 돌릴 셈이었다.
“전에 결정된 대로 진행하지요.”
“1년 안에 앨범 세 개…… 그렇게 말씀이시죠.”
“븨이에스는 해체까지 1년. 사랑해준 팬들에게 마지막 선물은 줘야지요. 븨이에스 애들도 아쉬울 테니.”
“알겠습니다.”
“……아니네.”
강동현의 질문에 술술 답하던 정호환은 갑자기 고개를 저었다.
“A&R에서 알아서 정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예?”
“내가 나가고 나면 사정이 많이 달라질 거니까요. 그에 맞춰서 하는 편이 낫지요.”
정호환이 사람 좋은 미소를 띠었다.
그는 다음 총괄 프로듀서로 강동현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상 그가 추천받을 게 명확했다.
수석 프로듀서란 총괄 프로듀서의 손발이나 마찬가지다. 총괄의 자리가 빈다면, 수석이 빈자리를 차지하는 게 맞았다.
“…….”
강동현은 정호환이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한 것인지, 당장이라도 울 듯했다.
보고가 끝나자 강동현은 서글프게 정호환을 바라보곤 집무실을 나섰다.
아마 강동현은 할 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족한 말재주 탓에 하지 못했겠지.
정호환은 그가 걱정됐다. 인망이 있으니 주변에서 잘 도와주겠지만, 워낙 부드러운 사람이라 험난한 길을 잘 헤쳐 나갈지 모르겠다.
‘어쩌면 회장님은 강 PD가 총괄의 자리에 오르길 내심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위에 선 자가 부하의 자질로 고려해야 할 건 단 두 가지다.
능력과 충성심.
강동현은 능력이 8이라면 충성심은 10인 인간이다. 그에 비해 정호환은 능력이 10이고 충성심이 5라 할 수 있겠지.
‘회장님께선 나보다 강 PD를 더 바라겠군.’
아무리 능력이 좋더라도 주인을 향해 꼬리를 흔들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일까.
주주들도 정호환이란 거대한 벽보다야, 컨트롤하기 쉬운 강동현을 선호할 것이다.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것도…….’
정호환은 깔끔하고 넓은 집무실을 전체적으로 시야 안에 담았다. 작업실보다 그의 흔적이 옅게 배어 있으니, 후임자도 어렵잖게 적응할 것이다.
‘이제 이틀인가.’
점심.
정호환은 오랜만에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늦게 온 탓인지 자리가 나지 않았다.
그가 식판을 들고 서성이자 파도가 몰아치듯 사람들이 술렁인다. 당장 일어날 것처럼 다리를 움찔움찔 움직이는 이도 있다.
그러던 중, 정호환은 남은 한 자리를 발견하곤 재빨리 그곳으로 향했다.
더 배회하다간 체할 정도로 밥을 빨리 해치우고 비켜서는 이들도 생겨나겠다.
“안녕하십니까, 정 이사님.”
비어 있는 단 한 자리.
맞은 편에는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물이 있었다.
“구 이사.”
구유한이었다.
정호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의 앞에 앉았다. 두 사람의 옆으로는 젊은이들이 앉아 있었는데, 한눈에 보아도 목 막혀 죽겠단 표정이다.
정호환이 기억하기로 저 둘은 각각 매니지먼트팀과 A&R팀 소속이었다.
그들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자, 둘은 허겁지겁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구 이사님이 이런 곳에 오실 줄 몰랐습니다.”
심지어 혼자서 말이다.
그에게 딸랑이고 싶어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는 이들이 발에 챌 만큼 있을 텐데.
“의외로 자주 옵니다. 근처에 여기만큼 밥이 잘 나오는 곳이 없거든요.”
정호환은 식판을 채운 메뉴를 보았다.
오늘은 한식이었다. 양도 푸짐하고 퀄리티도 높았다. 밖에서 이만한 음식을 먹으려면 1인분에 20,000원은 써야 할 것이다.
“남홍범 이사 덕분이지요.”
정호환은 국을 한 숟갈 떠먹었다.
“옛날부터 말버릇이었습니다. 식구들을 잘 먹여야 한다고요. 신사옥으로 옮기면서, 회장님께 귀가 닳도록 말하곤 했습니다.”
“처음 알았네요.”
“그 친구는 연습생들이 배곯는 걸 안타까워했어요. 먼 타지에서 온 애들도 많잖습니까. 적어도 따숩고 맛있는 걸 먹이자, 그래야 애들 부모님들한테 체면은 서지 않겠느냐……. 말버릇처럼 달고 살았지요.”
“덕분에 호강하는군요.”
정호환은 구유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식당에 자주 오는 것 치고, 그는 지나치게 마른 편이었다. 먹는 모습을 보아하니 밥을 남기는 타입은 아닌 것 같은데, 일을 너무 열심히 하기 때문일까.
그때 구유한이 별거 아니란 듯 말했다.
“제 기준으로 보자면 과소비지만 말입니다. 이 식당은 돈을 너무 많이 잡아먹습니다.”
“참…… 이 감동적인 이야기에 들려주신 감상이 고작 그거입니까?”
“정 이사님.”
구유한이 티슈로 입가를 닦았다.
“그냥 회장님께 한 번 숙여주십시오.”
테이블 위의 공기가 싸늘하게 굳었다.
두 이사의 옆에서 식사하던 이들은 식판 위를 반도 비우지 않았건만 급히 일어나 자리를 떴다.
정호환은 구유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구유한도 지지 않고 정호환을 응시했다.
“제가 부탁드립니다.”
“숙이면요?”
“계속 총괄 프로듀서로 계시는 거죠.”
“그리고 계속, 저는 원치도 않은 프로듀싱을 해야 하는 겁니까?”
“원치도 않다니요. 솔직히 이해가 안 갑니다. 케이어스의 이번 성적이 그렇게나 마음에 안 드십니까? 대성공 아닙니까.”
“케이팝 뮤직비디오에서 한국인의 조회 수 비율은 고작 10%입니다. 그런데, 이번 케이어스 앨범 판매의 절반 이상이 한국에서 나왔습니다. 이게 정상입니까?”
“상업적으로 대성공입니다. 그리고 이게 왜 비정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애초에 지금까지의 케이팝이 비정상이었던 겁니다.”
정호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인간 지금…….’
감히 자신의 앞에서 음악을, 문화를, 케이팝을 논하는 건가?
“케이팝은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글로벌화를 위한 초국가성과, 한국의 음악이라는 지역성, 그리고 아시아적 인종성 사이에서요. 이들 사이의 균형을 맞춘단 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명확한 기준을 세울 수도 없어요. 그러니 유일한 판단 기준은 상업성이어야 합니다. 돈을 버는 게 정답이란 겁니다. 정호환 이사님은 정답에 도달하셨습니다.”
정호환은 형언할 수 없는 짜증을 느꼈다.
구유한은 감히 30년간 케이팝을 이끌어온 정호환에게 자신만의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다.
상업성만이 정답이라는 논리를 말이다.
짜증이 치밀어오른다. 이런 인간에게 케이팝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단 것 자체가 참을 수 없이 역겨운 기분이 들게 했다.
‘이제 난 이런 인간에게까지 얕보이는 건가.’
30년간 쌓아온 위상이란 게 고작 이 정도였나. 너무 늙어버린 걸까.
정호환은 그냥 무시하려다가, 이대로 입만 다물고 있긴 자존심이 상하여 굳이 몇 마디 더했다.
“저는 모바일 게임을 좋아했습니다. 전에 계시던 곳이 게임 회사라 하셨지요?”
“맞습니다.”
“그중에서도 자동사냥 기능이 있는 게임을 좋아했습니다. 저는 게임에 집중할 시간이 없으니까요. 적당히 켜두고 돌아와서 보면 캐릭터가 성장해 있어요. 돈을 쓰면 더 빨리 성장하지요. 아, 게임 참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다 보니 질린다.
다른 게임을 찾으려 해도, 다 비슷비슷한 게임만 나온다.
“껍데기만 바꾼 똑같은 게임들만 나오더군요. 근본적으로 거의 다 같아요. 지겹고 진부해서 그만뒀습니다. 그런데 이런 게임들이, 한국 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커다란 수익이 거두었다더군요. 저는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 안 합니다.”
“그러십니까.”
“구유한 이사가, 회장님이 저에게 지시하는 게 이런 일입니다. 고정 소비자들이 확립되니, 그들을 어떻게든 가장 빨리, 많이 털어먹을 기술만 개발하는 거 아닙니까. 그건 음악을 만드는 인간의 마음가짐이어선 안 됩…….”
“무슨 상관입니까?”
구유한이 말을 끊고 들어왔다.
“저는 정 이사님이 이해가 안 갑니다. 자본주의에서 돈 이외에 어떤 절대적인 가치판단 기준이 있단 겁니까? 잘 팔리면 곧 가치가 높으며 성공한 상품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란 건, 기업에 가져다 댈 만한 기준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문화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문화도 상품입니다.”
아…….
‘안 되겠다.’
더 말을 섞다간 주먹이 나갈 것 같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저는…….”
정호환이 테이블 위에 올려둔 주먹을 꽉 쥐었다.
“구 이사가 대학에서 경제학 문제나 풀며 수식 계산 따위를 하고 있을 때, 이 대한민국 땅에 음악으로 돌풍을 일으켰던 인간입니다. 그 돌풍을 30년간 이어왔습니다. 이사님께 그딴 말을 들을 위치가 아니란 말입니다.”
구유한은 말없이 정호환을 보기만 했다.
그의 눈빛에서, 정호환은 구역질 날만큼 역겨운 감상을 읽어냈다.
‘자랑할 게 과거밖에 없는 모양이죠?’
정호환은 테이블을 쾅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의 관심이 모였으나, 정호환은 신경 쓰지 않고 식판을 들어 자리를 떴다.
‘앞으로도 이딴 취급이나 받으면서 회사에 남아 있으라고?’
그딴 삶은 살고 싶지도, 살아서도 안 된다.
정호환의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 * *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 합숙소.
성필은 침대에 누워 하릴없이 아이튜브를 보고 있었다. 그의 핸드폰 화면엔 케이어스의 뮤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데뷔곡인 ‘카오스’부터 ‘가이아’, ‘타임’, 성필이 실망했던 최신곡까지.
‘오늘 정호환 이사님과 만나는 거지…….’
케이어스는 어찌 보면 현시점에서 전생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성필의 회귀로 바뀐 게 분명했다.
상업적으론 성공했지만, 전생과 같은 성공을 구가하기엔 방향성이 뒤틀려 있다.
‘정호환 이사님이 결국은 전생의 방향으로 나아가시게 될까?’
모른다.
다만, 전생에선 어떤 계기로 케이어스의 개성을 존중하기 시작했을 것이란 사실이다.
그 계기는 무엇일까.
아니, 사실 계기는 없고 정호환이 오랫동안 품고 있던 영감을 발현한 것에 불과할까? 그렇다기엔 옛날에 나누었던 대화가 마음에 걸린다.
‘그 계기를 알아낼 수만 있다면…….’
오늘 정호환과의 만남이 미래를 바꿀 분수령이 될 수도 있다.
정호환이 에리카의 믹스테입 발매를 거부하는 이유를 밝혀낸다면, 그게 케이어스의 방향성이 전생과 달라진 이유를 설명하는 열쇠가 될 가능성이 있다.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다.
그때 폰에 비친 케이어스의 뮤비 위로 통화 표시가 떠올랐다. 에리카였다.
성필은 통화를 무음으로 바꾼 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나섰다.
‘합숙소 곳곳엔 카메라가 있으니까.’
성필이 다른 그룹의 멤버와 사적으로 통화하는 모습이 방송으로 보여 봤자 좋을 게 없다.
이미 에리카의 믹스테입 뮤비 촬영 투어 탓에, 성필과 에리카가 함께 있는 사진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건 리카를 따라갔던 거라고 변명할 수라도 있지, 사적으로 에리카와 통화하는 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합숙소 1층 거실에선 출연자들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소파에 나른하게 앉아 있던 김하슬과 성필의 눈이 맞았다.
“오빠 어디 가?”
“어, 응.”
“와아, 왜 그렇게 차려 입었어? 다른 여자 만나러 가는 거 아니야?”
“업무적으로 만날 분 있어서 그래.”
“그래?”
김하슬이 친근한 미소를 보였다.
요즘 성필과 김하슬의 관계는 다시 좋아졌다. 내일은 요즘 소원했던 관계를 다시 복구하려 데이트까지 하기로 했다.
“내일도 나랑 만나는데 일 있다면서 가버리는 거 아니지?”
“안 그러지.”
“기대하고 있을게.”
김하슬이 손키스를 날렸다.
성필은 키스가 날아와 뺨에 박히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합숙소 밖으로 나오니 이미 전화는 끊겨 있었다. 다시 거니, 에리카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눈 깜빡할 사이에 전화를 받았다.
“에리카 씨?”
[지금 통화 괜찮으세요?]
“네.”
에리카의 목소리는 미약한 흥분을 담고 있었다.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오늘 정호환 이사님 뵙는 거죠?]
“네, 앞으로 두 시간 정도 후요.”
[저, 오늘 정호환 이사님께 작업물 보여드리려고요.]
“예? 왜요?”
[만약 박 이사님이 정호환 이사님한테 제 믹스테입을 허가해주지 않으시는 이유를 들으면, 그에 맞춰 해결책을 낼 수 있겠죠?]
“아마도요.”
[그럼 지금이 마지막이에요. 오직 작품으로만 정 이사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요.]
성필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에리카는 참 이상한 곳에서 승부욕이 있었다. 작품만으로 정호환의 인정을 얻겠다니. 지금까지 계속해서 실패해왔던 일 아닌가.
‘아니, 실패해왔기에 더 승부욕이 생기시는 거겠지.’
에리카의 ‘서울 시티 보이’는 리카의 도움에 힘입어 리얼 사운드로 완성되었다.
비단 리카의 트럼펫뿐 아니라, 곡에 들어가는 모든 사운드가 실제 악기로 녹음되었다.
악기 세션 녹음은 소녀연맹과도 인연이 있는 밴드인 ‘데비’가 맡아주었다.
소녀연맹의 콘서트에 세션으로 참가한 덕인지 요즘 일거리가 많아졌다는데, 성필의 부탁에 기꺼이 레코딩에 참여해주었었다.
“지금 바로 가시는 거예요?”
[실은, 정 이사님 계시는 집무실 층이에요 지금. 조금만 걸으면 이사님 뵐 수 있어요. 연락드린 건…… 용기를 조금 주셨으면 해서요.]
“용기요?”
[저라도 네 번이나 거절당하면 기가 꺾여요. 그러니까 이번엔 할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해주세요.]
“그러다가 안 되면요? 제 탓 하시게요?”
[부정적인 소리는 마시구요!]
솔직히 말하자면, 에리카의 ‘서울 시티 보이’는 믹스테입으로만 발표하기엔 아까울 정도로 좋다.
최소한 케이어스 앨범의 수록곡으로는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곡의 소재나 느낌은 케이어스와 백만 광년 정도 떨어져 있긴 하지만…….
‘내가 정호환 이사님이라면 물구나무서서 발로 박수 친 다음 에리카 씨가 부끄러워서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칭찬할 텐데.’
정호환의 반응은 성필로서도 예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에리카가 용기를 달라고 했으니…….
“자신감을 가지세요. 에리카 씨가 좋다고 판단하셨잖아요. 아티스트로서 에리카 씨의 감을 믿으세요. 적어도, 제 폰 안엔 ‘서울 시티 보이’가 계속 들어 있을 거예요. 출근할 때도 퇴근할 때도 들었거든요.”
[아직 미완성인데…….]
“미완성이라도 좋은 건 좋은 거니까요. 제가 케이어스의 팬…… 이기도 하고요. 만약 발표하면 유스들도 좋아 죽을 거예요.”
[그럴까요?]
“그럴 거예요, 분명.”
에리카는 깊이 심호흡하더니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제 가볼게요.]
“파이팅.”
[넵.]
통화가 끝났다.
앞으로 몇 분 후, 에리카는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결과를 손에 쥘 것이다.
정호환이 거절할까,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에리카의 정성과 실력에 감동하여 받아들일까.
알 수는 없지만…….
‘에리카 씨는 꺾이지 않으실 거야.’
몇 번의 실패에도 끝끝내 일어나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 할 것이다.
자기 증명 욕구.
에리카는 아티스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갖추고 있다.
* * *
에리카는 정호환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정호환은 생각에 빠진 듯 의자에 깊이 몸을 묻고 있었다. 하지만 에리카가 보이자 습관처럼 상체를 일으켰다.
“에리카, 무슨…….”
정호환은 에리카가 집무실까지 찾아온 이유를 물으려다가, 그녀의 손에 들린 헤드폰 케이스와 프로듀싱 기획 노트를 보곤 입을 다물었다.
긴장 때문인지 에리카의 목이 위아래로 떨렸다.
‘지금이 마지막.’
오직 프로듀싱의 퀄리티만으로 정호환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마지막 날.
2시간 후 성필이 정호환과 만나면, 정호환이 에리카의 믹스테입을 받아들여 주지 않는 이유를 알아낼지도 모른다.
그 이유를 듣고서 믹스테입을 수정하면, 정호환이 받아들일 확률이 훨씬 높아지겠지.
‘그런데, 그게 내가 보는 최고의 미래는 아니야.’
정호환.
케이어스의 프로듀서.
케이팝의 역사 그 자체인 사람.
에리카는 그런 정호환에게 오직 자신의 실력만으로 인정받기를 바랐다. 자신의 창조성이 가치 있는 것이란 확증을 원했다.
“이사님, 저 오늘…….”
* * *
정호환은 에리카에게서 헤드폰과 노트를 받았다.
넘겨받은 에리카의 헤드폰은 사람의 손길이 많이 묻어, 신상품일 때의 반짝임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정호환은 헤드폰을 썼다. 사이즈가 맞지 않았다. 헤드폰은 정호환의 귀를 절반 겨우 덮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꼴을 본 에리카는 안절부절못했다. 정호환에게 넘겨주기 전에 사이즈를 조절하는 것을 깜빡했다.
“넌 머리가 정말 작구나.”
정호환은 픽 웃으면서 헤드폰의 사이즈를 조절했다. 연결부를 붙잡고 아래로 몇 칸 내리니 사이즈가 맞았다.
“재생하렴.”
“……네.”
헤드폰으로 에리카의 곡이 흘러나왔다.
제목은 ‘서울 시티 보이’라고 한다.
곡의 화자는 한국으로 여행 온 일본인 여자다.
이 곡은 여행지에서의 우연한 만남이 사랑으로 발전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에리카의 자전적인 이야기는 아니겠지.’
에리카는 KS 엔터의 연습생이 되기 전까지 한국에 온 적도 없다. 아마 이 가사는 다른 곡이나 드라마, 영화에서 영감을 받았으리라.
이 곡은 과잉되어 있다.
상업적인 작품에 비해 가사건 음악이건 감성이건 절제가 부족하다.
그야말로 에리카 또래의 감각과 생각이 극대화되어, 오직 자신을 표현하겠단 의지만으로 가득 찬 곡이다.
세련됨을 찾아볼 수 없는 날것 그 자체.
그렇기에, 이 곡엔 나름의 맛이 있다.
‘잘 배웠구나.’
곡이 끝나자, 정호환은 헤드폰을 벗어서 에리카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가볍게 말했다.
“에리카,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다. 믹스테입은 낼 수 없어.”
예상대로 에리카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리고 또 예상대로, 에리카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집무실을 나가겠지.
“케이어스의 에리카…….”
예상과 엇나갔다.
에리카는 씁쓸하게 등을 돌리는 대신, 정호환에게 말을 걸었다.
“제가 케이어스라서요? 그 이름을 마음대로 써선 안 되기에…… 그런 건가요?”
에리카의 음성에선 옅은 분노마저 느껴졌다.
정호환으로선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여태껏 에리카가 정호환에게 반감을 품은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정호환은 곧 납득했다.
‘자기가 만든 작품에 대고 좋은 소리를 해주지 않으니, 이렇게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물론 정호환은 이틀 후 KS 엔터를 나간다.
그렇다고 모든 짐을 내팽개칠 수는 없다.
나갈 땐 나가더라도, 마지막까지 의무를 행한다.
“믹스테입은 안 된다.”
정호환이 단호하게 선언했다. 벌써 입 밖으로 몇 번이나 냈는지도 모를 거절이다.
“……이사님.”
“그래, 에리카.”
“이사님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알아요. 이사님이 만드신 케이어스란 완벽한 이미지를, 제가 깨길 바라지 않으시는 거잖아요.”
“…….”
그 말대로다.
케이어스는 개개인이 모여 완성된 집단이 아니다. 케이어스란 이름이 먼저 있었고, 그 이름 아래에 개개인을 모은 것이다.
국가가 먼저냐 국민이 먼저냐.
그 케케묵은 사회학적 질문에, 정호환은 너무나 당연히 ‘국가가 먼저’라고 말할 수 있었다. 적어도 아이돌에 비유하자면 그러하다.
국민의 합이 국가가 아니다.
멤버의 합이 그룹이 아니다.
그룹은 그 자체로 멤버의 합을 뛰어넘은 존재다.
멤버들은 개인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 그룹에 속한 게 아니라, 그룹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존재한다.
“사소한 균열조차…….”
에리카는 절박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케이어스의 이미지를 깰 수 있는 사소한 균열조차 허용하고 싶지 않으신 거죠……?”
“그래.”
“저희를 사람으로 보지 않으시는 거죠……?”
“이미 알고 있지 않으냐.”
아이돌인 당사자에게 할 만한 말은 아니지만, 정호환은 이번에야말로 에리카에게 확실히 주지시켜야만 했다.
이게 정호환의 마지막 임무일 수도 있다. 그가 나간 후, 에리카가 날뛰지 않도록 만드는 것 말이다.
“아이돌은 인간이 아니다.”
“…….”
“실재하지만, 실존하는 인간이어선 안 된다. 본인이 인간임을 드러내는 순간 사방에서 욕하고 물어뜯는다. 팬들이 바라는 건 완벽히 꾸며진 캐릭터이지, 욕망에 충실한 인간이 아니야.”
“…….”
“내 말이 심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구나. 그럼, 이렇게 생각하렴. 여긴 네 직장이야. 아이돌이 직업이고. 네가 아이돌이란 직업으로서 받는 기대가 있다. 그 기대를 충족시키는 게 네 일이다. 회사원과 마찬가지야. 본분을 어기면 처벌이 따른다.”
“본분이요……?”
에리카가 반문했다.
“이사님.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믹스테입을 낼 수 있어요. 그건 제가 맺은 계약의 아주 사소한 부분조차 어기지 않는 행위예요.”
“다만 우리 사이의 신뢰가 예전과 같진 않을 거 같구나.”
“……계약을 어기지 않음에도 제가 이사님의 허가를 요구하는 건, 이사님을 존경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제는.”
에리카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잘 모르겠어요.”
“……모르겠다니?”
정호환의 목소리엔 본인조차 당황할 정도로 가시가 깃들어 있었다.
모르겠다고?
‘내가 틀리기라도 했단 말이냐?’
오늘 점심, 구유한과 했던 대화가 머릿속에 재생됐다. 예술에 기생하는 장사치에 이어, 이토록 어린아이조차 반기를 드는 건가?
감히 자신에게……?
억누르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불쾌한 감각이 심장을 가득 메웠다.
‘에리카 네 말대로 나는 최고의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이다.’
케이팝의 아버지라 불려도 좋으리라.
케이팝의 역사이자,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음악적 대표.
그런 위치에 오른 인간이다.
살아 있는 역사란 말이다.
그런 자신에게 존경을 표하며 고개를 조아리진 못할망정, 전부 다 하는 짓이라곤…….
‘내게 대드는 게 전부냐?’
신하들이 늙은 왕에게 숨겨뒀던 이빨을 들이대는 것처럼…….
에리카는 정호환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믹스테입을 내려는 이유는, 이걸로 제 능력을 인정받고자 하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한테 ‘나 이렇게 잘해요’라면서 광고하고 싶은 게 아니라구요. 그게 목적이었으면 회사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잖아요……. 저도, 저는 알아요.”
에리카가 아무리 용을 써봤자 KS 엔터의 프로듀싱을 뛰어넘을 수 없단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만약 에리카가 바라는 게 명성이었다면 믹스테입을 내려고 할 리 없다.
아이돌에게 믹스테입은 팬서비스 이상의 의미는 없다. 인정을 바랐다면 정호환에게 솔로 데뷔를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제가 믹스테입을 내려는 건, 사람들한테 저를 알리려는 게 아니에요. 저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에리카의 믹스테입은 그 어떠한 검열 없이 그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나이대의, 이 순간의 에리카만이 만들 수 있는 삶의 기록이다.
그렇기에 가치가 있다.
“네, 이사님의 마음에 차지 않을 수 있죠. 아니, 마음에 차지 않는 게 당연해요. 이사님께 이 곡을 들려드리는 것만으로도 저는 창피해요. 왜 아니겠어요? 우리나라 최고의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이신데…….”
그래도, 그럼에도, 에리카는 창피를 감수하고서라도 정호환의 허락을 받길 바란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의…… 허락을…… 얻고 싶어요…….”
에리카는 창작자로서 정호환을 존경한다.
그녀는 한국 3대 기획사의 오디션 모두에 합격했었다. 그런데도 굳이 KS 엔터로 온 건 정호환 때문이었다.
최초의 케이팝 아이돌을 프로듀싱한 사람.
1세대 아이돌이 저문 암흑기에, 남들이 다 안 된다고 했으나 기어코 아이돌을 프로듀싱하여 2세대의 문을 연 사람.
아이돌의 역사 그 자체인 사람.
그런 그를 존경했기에 KS 엔터로 왔다.
“제발, 허락해주세요. 이 믹스테입을 내는 걸 허락해주세요. 지금의 저만이, 지금 이 순간에만 남길 수 있는 흔적을…….”
‘에리카’란 이름을 쓸 수 있게 허락해주세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게 그녀가 전할 수 있는 최선의 진심이다.
이 애원마저 통하지 않는다면, 정말 방법이 없다. 그녀는 간절함을 담아 고개를 깊이, 더욱 깊이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그 진심에 대한 답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흔적을 남기는 게 목적이라면 만드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냐. 굳이 발표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
에리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하여 정호환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얼굴엔 세월이 만들어낸 아집이 가득했다.
오직 성공의 길만을 걸어온, 선각자이자 선도자가 흔히 가질 법한 오만이 짙게 묻어 있었다.
“발표하지 말고, 만드는 것만으로, 충분……?”
“그래.”
에리카의 표정이 비틀렸다.
정호환은 창작자다. 그런데, 같은 창작자의 입에서 어떻게 저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
작품은 존재하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사람들이 알아주어야 의미가 생긴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인데, 정호환은 그 사실을 무시했다.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왜?
에리카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으니까.
“왜…….”
에리카가 입술을 뻐끔댔다.
기가 막힌다는 표현은 이럴 때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만 같았다.
그녀의 입술은 오랜 시간 방황을 이어가다가, 마침내 그럴듯한 발음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왜 저한테 작곡을 가르치셨어요?”
“팬들이 작곡하는 캐릭터를 좋아하니까.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에리카는 어느 이야기가 떠올랐다.
인도에 궁술 스승이 있었다.
그 스승은 제자를 가르쳤다.
제자는 스승의 지도 아래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
그리고 스승은 제자에게 수업료를 요구했다.
제자는 무엇이든 주겠다고 했다.
스승이 요구한 수업료는 이것이었다.
‘오른손 엄지.’
에리카의 상황이 그와 같았다.
작곡을 배웠다.
그런데 그것을 보여줄 방법이 없다.
에리카는 엄지가 잘린 제자나 마찬가지였다.
“한 번이라도…….”
떨리는 목소리로, 에리카는 한 음씩 씹어 뱉듯이 또렷하게 말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아요. 정 이사님, 흉내라도 좋으니까…….”
제발.
“이사님의 생각이 틀렸다고, 그렇게 반대로 생각해주시면 안 될까요? 단 한 번만이라도 반대의 입장에서…….”
“물론 난 틀릴 수 있다. 하지만 그걸 정의하는 건 타인이 아니야. 나 자신이다. 나만이 내가 오류가 있음을 선언할 수 있어. 그전까지 나는 무오(無誤)하다. 왜 그러겠느냐.”
에리카의 시야가 넓어졌다.
정호환의 뒤에 위치한 벽. 그곳에 나열된 선반을 가득 메우는 상패와 트로피의 행렬.
90년대부터 받아온 온갖 국가 표창이며 문화훈장, 시상식의 트로피가 가득했다.
“내가 정호환이기 때문이야…….”
정호환이 책상 위에 올려둔 손은 어째선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현대적인 문화 어법이 존재하지 않는, 현대를 대표하는 문화적 특징이 하나도 없는, 문화적으로 빈약하기 그지없는 이 조막만 한 나라에, 나는 최초로 ‘한국다운 것’을 만들어낸 인간이다…….”
그에게선 분노를 넘어 울분마저 느껴졌다.
“내가 곧 케이팝이고…….”
마치 에리카에게서 자신의 적대자를 보듯이, 그는 치를 떨었다.
“내가 한국의 문화이며…….”
이윽고 그가 침을 튀기며 울부짖었다.
“대한민국 그 자체란 말이다―!”
아.
‘그렇구나.’
에리카는 깨달았다.
‘케이어스로 있는 이상, 나는 영원히.’
사쿠라바 에리카가 될 수 없구나.
성필과 정호환이 만나는 몇 시간 후를 기다릴 필요도 없다.
이미 이 순간, 에리카의 심지는 꺾였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에게, 그녀의 아티스트십이 꺾여나갔다.
* * *
합숙소 앞.
성필은 폰만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에리카 씨, 연락이 없으시네.’
달이 밝아서 괜히 사진을 찍었다.
폰을 주머니에 넣고 차에 탔다.
정호환을 만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