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61화 (461/760)

461화

성필의 표정이 심각해진 것을 보자 에리카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에엑!”

성필의 뒤에 서 있던 리카는 그의 핸드폰에 떠오른 이름을 보자마자 경악했다.

“정호환 이사님이야!”

“이사님……?”

정호환이 성필에게 연락했다.

바로 앞에 에리카가 있기 때문일까, 그가 성필에게 연락한 이유로 떠오르는 건 에리카 외에 없었다.

에리카는 KS 엔터의 지시에 반항하며 뮤비 촬영을 이어가고 있다. 회사 차원에선 에리카가 버스킹 투어를 다니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말이다.

“박 이사님이 에리쨩이랑 있단 걸 들킨 거예요!”

“어떻게……?”

성필은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리카, 에리카와 함께 다니고 있으니 사진이 찍힐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한여름에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있자니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일상생활에서 얼굴이 대대적으로 팔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박 이사님 몸이요!”

“내 몸?”

“이사님 체격으로 알아낸 거예요!”

성필의 현재 차림이 어떻느냐.

흰 티에 반바지를 입고 있다.

이 간편한 복장은 바디 프로필을 찍을 정도로 단련된 그의 근육질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다시피 했다.

그리고 그의 몸매는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난 적이 있었다.

KS 엔터 내부에 체격만으로 성필이란 것을 특정할 사람이 아예 없다곤 단정할 수 없다.

“에리쨩은 회사에서 연락 왔을 때 저희 회사 사람이랑 있다고 했잖아요! 저희 회사 사람, 엄청 근육질, 박 이사님뿐이에요!”

“한 이사님도 있잖아.”

“한 이사님은 박 이사님보다 키가 훨씬 크잖아요!”

“겨우 10cm 차이거든!”

아니다.

리카와 시답잖은 자존심 싸움이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성필은 창백한 에리카의 얼굴을 보곤, 최대한 진정한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정호환은 예상보다 평온한 어투였다. 그러나 성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긴장을 느꼈다.

이 감정은 뭐라고 할까…….

‘약혼한 여자친구의 아버지…… 장인어른이 될 수 있는 분과 대화하는 느낌…….’

그의 입에서 ‘우리 딸과는 헤어지게. 자네 같은 놈팽이에게 우리 딸은 맡길 수 없네’라는 말이 나오기라도 할까 봐 엄청나게 긴장한, 그런 남자의 기분이다.

성필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고작 한마디 나누었을 뿐인데도 목이 탔다.

[제가 너무 늦은 시간이 연락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 아니요. 아닙니다. 정 이사님 연락은 언제든 받아야죠, 예.”

성필은 과할 정도로 비굴한 말투였다.

정호환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이 시간엔 어떻게…….”

[이틀 뒤에 시간 괜찮으십니까? 잔이라도 함께 나눴으면 합니다.]

“예?”

전혀, 정말로 전혀 예상치도 못한 제안에 성필은 반문을 해버렸다. 무례한 짓이란 것을 바로 깨닫고 자연스레 이야기를 이으려 한 순간.

[수다…… 같은 업계인으로서 수다나 떨까 해서 말입니다. 저희가 사적으로 만난 일은 그다지 없다지만, 개인적으로는 박 이사님이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그건 성필도 마찬가지다.

물론 성필과 정호환이 대면한 적은 손에 꼽을 만큼 적다. 하지만 다른 형태로 만난 적은 수도 없이 많다.

바로, 소녀연맹과 케이어스로 말이다.

‘윤상열이 그랬었지.’

아이돌이 표현하는 건 아이돌의 자아가 아니라 프로듀서의 자아라고.

아이돌은 프로듀서가 만든 틀과 캐릭터에 인간을 맞춰 내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그렇기에, 아이돌에게선 프로듀서의 자아를 읽을 수 있다…….

그 말대로라면, 게임으로 비유하여 성필과 정호환은 아바타 대 아바타로 꽤 자주 만남을 가진 게 된다. 특히나, 서로가 서로의 아이돌에게 관심이 많으니.

[이번 기회에…….]

정호환은 기회란 단어를 곱씹는 듯했다. 상황에 맞지 않는 단어라 느끼는 것일까.

하지만 결국 그는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직접 뵙고 싶습니다. 부담 가지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다른 의도는 없으니까요. 역으로 말하면, 가벼운 자리이니 얼마든지 거절하셔도 괜찮지요.]

“아니요, 가겠습니다.”

옛날에 성필은 정호환을 쓰러뜨려야 할 거짓 우상으로 규정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 결심이 흔들리고 있다.

‘전생에 케이어스가 보여주었던 아티스트십은 정호환 이사님의 작품……. 하지만 온전히 정호환 이사님이 만들어낸 건 아닐지도 몰라.’

아직은 가정일 뿐이지만, 어느 순간 정호환은 케이어스 멤버 각자의 개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프로듀싱 전략을 수정하는 것 같다.

그게 사실이라면, 정호환은 거짓 우상이 아니다. 그는 다시금 성필이 닮고자 했고, 평생토록 흠모해왔던 전설적인 프로듀서가 된다.

[감사합니다, 박 이사님. 그럼 이틀 뒤에.]

그리고 정호환은 전화를 끊으려는 기미를 보였다. 그에 성필이 크게 당황했다.

‘에리카 씨 이야기를 안 하잖아?’

대체 뭐지?

성필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괜히 바로 앞에 있는 에리카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에리카는 걱정과 근심이 잔뜩 밴 표정으로 성필의 동태를 살피는 중이었다.

성필은 목구멍이 턱 막힌 채 이야기를 꺼내려 했다. 정호환이 에리카의 일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봐야 하는데…….

“그으, 어, 요, 요즘 케이어스 멤버분들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참으로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성필의 의도 따윈 전혀 달성할 수 없는 질문.

[앨범 활동을 마치고 쉬는 중입니다. 왜 그러시는지요?]

그러나 성필은 그의 답에서 어느 사실을 눈치챘다. 정호환은 에리카의 일탈에 대해 모르고 있다.

하긴, 주말이다.

이런 소식은 프로듀싱 총괄인 정호환이 아니라, 매니지먼트 총괄의 귀에 먼저 들어가겠지. 즉, 정호환에게 온 연락은 에리카 때문이 아니다.

이후 KS 엔터가 에리카에게 어떻게 대할지 알아낼 수 없었기에 불안하긴 했으나, 여기서 정호환에게 에리카의 일탈을 알려주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다.

“아닙니다. 제가 케이어스 팬이잖습니까. 그래서 궁금해서요.”

[하하, 컴백 텀이 길긴 하죠. 예, 만약…….]

‘만약’에서 정호환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전화 너머로 미약하게밖에 전해지지 않는 한숨과 함께 통화를 끊으려 했다.

[그럼 이틀 뒤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통화가 끝나자, 성필은 검게 변한 폰의 화면을 얼떨떨하게 바라보았다.

에리카가 불안하게 물어왔다.

“이사님이 뭐라고 하셨나요?”

“이틀 뒤에 술이라도 함께하자고 하셨어요.”

“……그리고요?”

“용무는 그게 끝인 거 같으셨어요. 에리카 씨의 소식은 못 들으셨나 봐요.”

에리카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봤자 순간의 도피에 불과하겠지만, 정호환에게 바로 끌려가지 않는 것만 해도 어떤가.

리카는 에리카를 걱정하듯 물었다.

“에리쨩, 오늘은 그만할까?”

“아니. 마저 하자. 언제 이런 기회를 또 얻을 수 있을지 몰라. 박 이사님, 괜찮을까요?”

“네.”

그렇게, 에리카의 뮤비 촬영은 하루 만에 끝났다. 성필이 비디오 편집자를 소개해줄 수 있다고 했으나, 에리카는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걸 찾는 것도 제 일이니까요. 박 이사님께 모든 걸 의지하면 회사와 다를 게 없잖아요.”

“그럼 협력 프로듀서인 아타시(내)가 같이 찾아줄게!”

“괜찮아.”

“에리쨩 사양 안 해도 괜찮아!”

“과정도 경험이야. 내 경험치 탐내지 마.”

“그런 의미?!”

성필은 에리카를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귀찮은 과정 정도야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도 좋으련만, 한사코 자신이 하려 한다.

뮤직비디오 편집자를 찾고, 검토하며, 선정하는 과정 자체가 경험. 에리카는 그 과정 모두를 자신의 손으로 하고 싶은 것이다.

실패할 수도 있고,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지만, 이 일이 끝나면 그 모든 경험이 에리카의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에리카 씨.”

촬영이 끝나고 헤어질 준비를 하던 중, 성필이 에리카를 불렀다.

“제 예상이지만, 정호환 이사님이 에리카 씨의 믹스테입을 거부하는 이유는 곡 때문이 아닐 수도 있어요.”

“곡 때문이 아니라뇨?”

“정호환 이사님 개인의 믿음이라거나 방향성이 문제일 수도 있단 거예요.”

그에 에리카는 뭐 그리 당연한 이야기를 하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예, 뭐…… 그렇죠. 처음 제안을 드렸던 때 이야기도 해드렸잖아요. 정호환 이사님은 제가 에리카란 이름을, 케이어스의 에리카란 이름을 사용하는 걸 바라지 않으세요.”

그에 대한 돌파구로, 에리카는 정호환마저 납득할 프로듀싱의 퀄리티를 달성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성필에게 도움을 구한 것 아니었던가.

정호환 개인의 믿음이 문제란 건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다.

하지만 성필은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고 말했다.

“에리카 씨에겐 들려주지 않을…….”

전생에서 정호환이 갑자기 케이어스의 개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꾼 이유가,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것만 알 수 있다면, 에리카가 믹스테입을 발매할 날이 앞당겨질 수 있다.

“그런 이유가 있을 거예요.”

“있다 하더라도, 저한테 이야기해주시지 않는다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

“제가 이틀 뒤에 정호환 이사님과 만나 여쭤볼게요. 저는 이사님과 같은 업계인이니까, 에리카 씨가 듣지 못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어요.”

에리카는 고민에 빠진 듯 시선을 살짝 내렸다. 몇 초의 시간이 지나고 그녀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래 주실 수 있으실까요?”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성필과 리카, 에리카는 각각의 방향으로 찢어졌다.

숙소로 돌아온 리카는 평소처럼 다녀왔단 인사도 없이 터덜터덜 방으로 향했다. 방 안에는 침대에 엎드려 핸드폰을 하는 조아라뿐이었다.

“왔냐?”

“웅.”

리카가 자연스럽게 조아라의 위에 올라가 엎드렸다. 조아라는 무겁단 말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아라쨩 뭐 봐?”

“아저씨 스타그래프.”

“박 이사님?”

그러고 보니, 성필이 최근 스타그래프 계정을 만들었다고 하긴 했었다.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 PD가 권유했다던가. 출연자 개인 계정도 홍보의 수단이 될 수 있으니, 웬만해선 만들어 달라고 했단 모양이다.

그래서 만들었는데…….

“나니코레(뭐야 이게)!”

“미쳤지?”

성필은 웬 풀에 다리만 담근 채, 한 손엔 칵테일 잔을 들고 있었다. 딱 봐도 컨셉샷이다.

“어, 이거 그편 아니야?”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에서 성필과 김하슬의 호텔 데이트 편이다.

개인 풀이 딸린 곳으로, 두 사람 다 수영복을 입고 칵테일을 즐기며 데이트했었다.

조아라는 성필의 계정에 올라온 사진을 보면서 실실 웃었다.

“아저씨 억지로 무표정 유지하는 거 보이냐? 막 자아도취 된 거 보여서 개웃김.”

“이이나(좋겠다). 아타시(나)도 이런 데 가보고 싶어. 아이돌이 가면 문제 되려나.”

“문제 될 게 뭐 있어. 걍 호텔인데.”

“그럼 아라쨩 아타시(나)랑 갈래? 호캉스야! 같이 수영복 입고 술도 마시면서 같은 침대에서…….”

“응 절대 안 가.”

“히도이(너무해)…….”

“오늘도 에리카 걔 만나고 온 거야?”

“웅.”

리카는 조아라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야. 몸에서 힘 빼지 마. 이제 슬슬 무거워.”

“아라쨩 폭신거려서 기분 좋네. 이제 아타시(나)랑 사귈 마음 좀 들었어? 점점 가드가 낮아지는 게 눈에 보여서 희망이 생긴달…….”

조아라는 상체를 벌떡 세워 리카를 떨어뜨리고, 그대로 그녀의 팔을 붙잡아 침대 아래로 내보냈다.

바닥으로 수직 낙하한 리카가 머리를 부여잡고 울부짖었다.

“너무해애애애애애!”

“이제 희망이 좀 꺾였냐?”

“희망이 꺾인 걸 넘어서 절망하겠어! 좀 더 소중하게 대해줘!”

그때 문이 열리며 신아름이 들어왔다. 밖에 나갔다 왔는지 변장 풀세트를 착용 중이었다.

신아름은 들어오자마자 마스크와 모자를 벗어 던지면서 손부채로 땀을 식혔다. 그녀의 얼굴 곳곳에서 땀이 번들거렸다.

“리카 너 또 왜 울어. 조아라한테 또 차였어?”

“아름아아…….”

리카가 무릎으로 바닥을 걸으며 신아름의 다리에 매달렸다.

“아라쨩이 나 막 밀어서 넘어뜨리고오…… 막 나쁜 짓도 해쪄…….”

“아이구, 그랬어요?”

“응, 아라쨩 혼내죠…….”

“조아라 너 또 그럴 거야?”

“응.”

“어쩔 수 없네. 리카, 그렇다는데?”

“바로 포기?!”

신아름은 바닥에 털썩 앉아선,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 매듭을 풀었다. 안에서 나온 건 편의점에서 산 듯한 양주와 안줏거리였다.

조아라는 미리 약속한 것처럼 한숨을 쉬면서 신아름의 앞에 와 앉았다. 리카는 어리둥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리카 너도 마실래?”

“에, 갑자기 술? 좋은 일 있어?”

“좋은 일이라기보다는, 좋은 일을 생기게 하기 위한 회의지.”

“에에, 나니 나니(어떤 거)?”

리카가 쪼르르 술판에 합석했다.

그러자 신아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작전명, 거머리 떨쳐내기.”

“거머리?”

“김하슬.”

“에?”

조아라는 제발 리카에게 공감해달란 듯 진저리치며 말했다.

“얘 말야, 김하슬을 직접 만나겠대.”

“에엑?! 마, 만나서 어떡하는데……?”

“그걸 지금부터 정해야지.”

신아름이 종이컵에 양주를 들이부었다. 리카는 그것을 떨떠름하게 받았다.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팀장님한테 상처 못 주게 설득해야지. 우리가 아이돌 활동으로 쌓아 올린 권위를 이용할 때가 왔어. 사회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그년을 어떻게 조져보자. 김하슬 그년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어.”

“도를 넘은 건 아름이 같은데?”

몇 초 후.

리카는 신아름에게 공격당해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쓰레기봉투처럼 널브러졌다.

“조아라, 김하슬 그년 도 넘었지? 우리가 제재를 가할 때가 됐지?”

조아라는 널브러진 리카를 흘끔 보더니,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동생 라인은 오랜만에 함께 술을 마셨다. 작전명이니 뭐니 했지만, 결국 신아름의 한풀이였다. 아니, 김하슬을 안주 삼은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 감상회였다.

* * *

KS 엔터 수석 프로듀서 강동현.

그는 경악에 찬 눈으로 정호환을 응시했다. 정호환은 느릿느릿한 움직임으로 작업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작업실에 자리하고 있던 그의 흔적이 하나둘씩 사라진다. 자그마한 골판지 상자 안에 담겨, 사라진다.

“정말, 가시려고요……?”

“그래야지요.”

강동현의 눈가가 괴롭게 일그러졌다.

그는 심지가 약한 인간이다. 자신을 믿지 못하고, 언제나 주변의 여론에 휩쓸리는 경향이 크다.

하지만 그게 그의 약점이 되진 않았다.

주변에 휩쓸린단 건, 대책 없이 휩쓸린단 뜻이 아니었다.

자신을 믿지 못하기에,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여겨지는 사람의 의견을 스펀지처럼 흡수한다.

그리고 강동현이 기꺼이 의견을 굽히고 마음껏 휩쓸리는 대상은, 정호환이 유일했다.

정호환이야말로 강동현이 인정한 누구보다 뛰어난 인간이니까.

“말도 안 됩니다!”

하지만 이번엔 정호환의 말에 담담히 ‘그렇군요’라고 할 수 없었다.

강동현은 거의 처음으로 정호환에게 반항했다. 그의 ‘나가겠다’는 선언은, 아무리 고민을 거듭해봐도 인정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된다니요?”

상자에 물건을 담던 정호환의 손길이 더욱 느릿해졌다.

강동현은 부족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발휘하여 손짓, 발짓 전부 섞어가며 말했다.

“30년간 이 회사에 헌신하셨습니다! 이사님은 KS 엔터 그 자체이신 분 아닙니까! 아니, KS 엔터 자체가 아니라…….”

한국의 대중음악.

케이팝 그 자체인 인간이다.

그의 일생이 곧 케이팝의 역사다.

“그런 분이, 이렇게…….”

괴로움으로 물들었던 강동현의 얼굴이 갑자기 확 펴졌다.

“네, 그, 그런 걸 겁니다! 그냥 겁을 주는 거예요! 이번엔 정호환 이사님이 너무 강하게 나가셨던 겁니다! 구, 구유한 이사님을 회의에 불러서…… 안 따르겠다고…… 면전에 대고 그러신 건…….”

“그렇죠, 구유한 이사의 체면을 거하게 구긴 거죠. 사실 그런 의도가 없었다곤 못 하겠습니다. 어차피 구유한 이사는 회장님의 말씀을 전하는 앵무새나 다름없었는데 말이죠.”

샌드백을 팬 거라고 말해도 좋으리라.

혹은 서열을 정리하려 했다거나.

그러나 회장은 정호환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역시, 경영인 입장에선 돈을 벌어다 주는 쪽이 더 소중한 모양입니다.”

“그 돈을 번 건 정호환 이사님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습니다! 예술에 기생하는 장사치 아닙니까!”

정호환은 코웃음을 터뜨렸다.

예술에 기생하는 장사치, 라고…….

“KS 엔터의 문화기술은 완성되었습니다. 이 회사는 설령 바보들에게만 경영을 맡겨도 향후 수십 년을 이어갈 공고한 시스템을 확립했어요. 트레이닝, 프로듀싱, 매니지먼트, 이 모든 시스템이 너무나도 완벽해요.”

“그걸 만드신 게 정호환 이사님이십니다!”

“그렇지요. 저는 저를 뛰어넘는 걸 만들어버렸어요. 이 시스템에 영웅은 필요 없습니다.”

“아니요, 필요합니다!”

강동현이 확신에 차서 말했다.

“회장님도 그걸 알고 계세요! 30년이나 함께 일하셨으니까요! 그러니까, 이건, 잠시, 사이가 틀어진 걸 거예요……. 겁을 주는…… 그런 걸 거니까, 이사님이 조금만, 아주 약간이라도 고개를 숙이는 제스처만 보이면…….”

“예, 그렇겠지요. 저는 회장님을 압니다. 공석에선 회장님이라고 부르지만, 사석에선 욕도 섞어가며 이름을 막 부르죠. 강 PD의 말이 맞아요. 제가 조금만 숙여도 해결될 일입니다.”

강동현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이런 상황에 처한 것 자체가, 저에겐 참을 수 없는 굴욕입니다.”

“…….”

“이 나라는…….”

정호환은 시선을 조금 위로 올렸다. 그의 시야에 방음 재질의 검은색 천장과 벽이 담겼다.

그 천장과 벽은 영화관의 스크린이 되어 정호환의 과거를 떠오르게 했다.

“대중음악의 기반이랄 게…… 존재하지 않았었지요. 당연합니다. 독재 정권 30년간 숨 막히게 문화를 검열해왔으니까요. 강 PD는 상상도 못 하겠지만, 록을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잡혀갔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

“잡혀가서, 같이 음악하던 동료들의 이름을 불러야만 나올 수 있던 시대가 있었지요. 록이란 대중음악의 전성기에, 한국은 그 세례를 받지 못했어요. 민주화 후에 남은 건 문화의 허허벌판뿐. 거기서…….”

정호환은 시선을 내려 박스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30년의 추억이 담긴 물건이 가득했다.

“여기까지, 케이팝의 글로벌화까지 이루었습니다. 고작 30년 만에요. 저는 참 열심히도 살았지요.”

정호환은 눈을 질끈 감곤 박스를 덮었다. 그리고 테이프로 입구를 강하게 봉했다.

“개인의 이름이 곧 역사이던 영웅시대는 끝났습니다. 문화의 황금시대가 도래했어요. 그러니까…….”

정호환은 박스를 들곤 터벅터벅 출구로 향했다. 그 앞에 서 있던 강동현은 자기도 모르게 길을 비켜섰다.

정호환이 문을 열자 어두운 작업실 안으로 강렬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늙은 영웅은 사라져야겠지요. 황금기를 즐기세요. 젊은 사람들의 시대입니다.”

강동현은 작업실을 나서는 정호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희미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은퇴하시는 겁니까? 다른 회사에 가시는 것도 아니고, 회사를 차리시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대로 끝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정호환은 아무런 미련 없이 작업실을 나섰다. 강동현은 어금니를 까득 물곤 방을 뛰쳐나왔다.

정호환은 아직 몇 걸음도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뒤를 향해 강동현이 외쳤다.

“사흘 후입니다! 프로듀싱 파트가 총괄 프로듀서를 추천하여 올리는 건 사흘 후예요! 내일도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다음 날도! 사흘 후에도……!”

정호환은 그 말을 듣고도 터덜터덜 힘없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까지, 제발…… 결심을 돌려주세요…….”

정호환은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고, 뒤에 선 강동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짐 옮기는 걸 도와주시는 거라면 얼마든지 오셔도 됩니다.”

그게 정호환의 마음을 대변했다.

그는 기어코 KS 엔터를 나갈 셈이었다.

강동현은 사라져가는 영웅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미리 인사하지요.”

정호환은 저 멀리 사라져간다.

“함께여서 즐거웠습니다, 강 PD.”

대중문화의 허허발판에서 케이팝의 글로벌화까지 이끈 문화계의 영웅.

정호환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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