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0화
심장 소리가 드럼 같다.
에리카의 귓가를 쿵 쿵 쿵 울린다. 그 때문에 자신이 올바른 소리를 내고 있는지, 기타는 제대로 연주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자꾸만 엇나가는 지도 어플
폰만 붙잡고 두리번거리던 내게
넌 어디서 왔냐고 물었어.”
성필이 든 폰의 렌즈가 에리카를 정면에서 응시한다. 하지만 이제 렌즈는 성필의 것 하나가 아니었다.
사방에서 렌즈가 내밀어진다.
수십 쌍의 눈이 에리카를 둘러싸고 있다.
“한국엔 볼 게 많대
안내해주겠단 너에게
난 차갑게 말해
상암동이 어디냐고
아이돌이 보고 싶어.”
케이어스로서 무대에 섰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다.
케이어스의 곡이 아닌.
케이어스의 안무가 아닌.
케이어스의 에리카가 아닌.
사쿠라바 에리카의 이야기.
“짧게 웃은 넌 한발 물러나
내가 모르는 어딘갈 가리켜
‘저쪽이긴 한데 배 안 고파?’”
케이어스로는 할 수 없는 이야기.
사쿠라바 에리카이기에 생각할 수 있는 가사.
그녀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연주.
지금의 자신이 아니면, 지금의 나이가 아니면, 사쿠라바 에리카가 아니라면 표현할 수 없는 것.
만약 케이어스였다면, 개인의 정체성이 심하게 배인 이러한 가사는 쓸 수 없었겠지.
한국으로 여행 온 20대 일본 여자, 그러한 정체성은 KS 엔터로부터 진작 검열당했겠지.
하지만 믹스테입이면 가능해.
“네 억양은 한국어 교본에서
배운 거랑 조금 달라!”
사람들의 평가가 어떨지 모르겠다.
이 곡은 대중들에게 최초로 공개되는 것이다.
솔직히 두려운 마음이 크다.
하지만.
“서울 시티 보이―!”
에리카는 확신했다.
지금 자신의 표정은 태어나서 가장 화사하며 생기있다.
“감사합니다!”
1절이 끝나자마자 에리카는 연주를 중단했다. 그녀는 기타를 케이스에 넣을 생각도 못 하고, 기타를 짊어진 채 바로 자리를 뜨려 했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관객들에게 연신 허리를 굽혔다.
그때 리카가 에리카의 손을 확 낚아챘다.
“에리쨩 이건 스케줄이 아니야!”
“어, 어?”
“가자! 역이 마비될 거야!”
리카는 에리카의 기타 케이스를 대신 멘 후, 에리카와 함께 도망쳤다.
아니, 도망치려 했다.
둘을 둘러싼 군중의 벽이 너무나 단단했다. 두 사람이 다가가도 벽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날 뿐 뚫릴 생각을 못 했다.
그에 성필이 앞으로 나섰다.
“스케줄이 아닙니다 비켜주세요! 스케줄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비켜주세요!”
성필이 억지로 길을 열자 두 사람이 뒤를 따랐다. 그리고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줄행랑쳤다.
에리카는 버스킹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저 리카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리카는 잔뜩 신이 나 달리면서 외쳤다.
“에리쨩 봤지! 사람들이 잔뜩 모일 거라고 했잖아! 트잇터 같은 데 실황중계 글 엄청 올라올 거야! 홍보와 뮤비 촬영 일석이조야!”
에리카는 리카에게 끌려가느라 숨을 헐떡이며 답했다.
“이거 괜찮아? 결국 케이어스랑 소녀연맹의 명성을 빌린 홍보…….”
“사람들한테 사진 찍어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 들어달라고 간청한 적 없어! 케이어스라고 알리지도 않았어! 그냥 사람들이 모여든 거야! 얼굴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멋대로 홍보했다고 하면, 그게 더 말이 안 돼!”
“그치만…….”
“어땠어!”
역을 빠져나가는 계단이 둘 앞에 펼쳐졌다.
높이 뻗어 올라간 계단 위로 한여름의 빛이 들어왔다. 둘은 잠시 숨을 몰아쉬며 그 빛을 올려다보았다.
리카가 에리카의 손을 꼭 붙잡았다.
“뮤비 촬영 재밌지!”
“……하.”
에리카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재밌었냐고?
당연히 재밌었다.
자신의 머릿속에만 맴돌던 아이디어가 현실이 되어 펼쳐지는 순간. 말로 표현하기 힘든 쾌감이 에리카를 감쌌었다.
에리카는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심박수가 160은 넘어간 것 같다. 숨이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목을 태우는 고통이 느껴진다. 그 고통이, 역설적으로 에리카에게 살아있단 실감을 주었다.
“재밌었어.”
“그 느낌 꼭 기억해!”
리카가 계단을 한 발자국 올랐다.
“사람들의 평가를 받는 것도 중요해. 하지만 만들 때 즐거운 게 제일 중요한 거야! 그게 아니면 할 이유가 없잖아!”
“아…….”
그렇다.
만들 때 즐겁지 않다면, 창작을 왜 하겠는가.
에리카는 작업을 하면서도 정호환에게 받을 평가만 신경 썼었다. 그래서 과정의 즐거움을 놓치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나 신나고 즐거운 일이다.
원래 믹스테입이란 검열도 뭣도 없이, 뮤지션의 순수한 감정을 표현하는 거니까. 그런 감정의 분출을 위해 믹스테입을 만드는 거다.
“빨리, 사람들이 더 모이기 전에 가……!”
위치가 바뀌었다.
에리카가 리카를 앞질러 그녀를 끌어당겼다. 리카는 당황하면서 에리카에게 끌려갔다.
에리카가 리카를 돌아보았다.
“응, 빨리!”
에리카의 웃음.
그건 아이의 것처럼 순도 높은 행복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역의 출구로부터 비쳐 들어오는 빛과 함께, 그녀의 웃음은 사방을 화사하게 바꾸었다.
“다음 촬영으로 넘어가자!”
빛을 향해 올라가는 소녀들.
성필은 핸드폰 렌즈 안에 그녀들을 담아냈다.
* * *
홍보 부서로부터 급한 소식이 전해졌다.
그 정보를 입수한 매니지먼트 1팀장은 아연실색했다. 당장 컴퓨터 앞에 앉아 SNS 등지에 에리카를 검색했다.
그러자 길거리나 지하철역, 공원에서 버스킹하는 모습의 에리카가 잔뜩 나왔다. 그녀의 옆엔 항상 소녀연맹의 리카가 트럼펫을 불고 있었다.
잘 부른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1팀장은 당장 에리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통화음이 그의 마음을 평온하게…….
‘에이 씨, 왜 하필 내가 오늘 주말 근무인 건데에……. 2팀장이랑 바꾸는 게 아니었는데에…….’
평온하게 만들어주지 못했다.
세상을 원망하는 사이 에리카와 연결됐다.
[여보세요?]
에리카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 헐떡임 안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과 웃음이 자리했다.
1팀장은 잠시 자신이 불청객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하지만 곧 본분을 기억해내곤 목소리를 높였다.
“에리카 너 뭐 하고 다니는 거야! 갑자기 버스킹?”
[네, 그런데요?]
“당장 그만하고 돌아가!”
[왜요?]
“……뭐?”
[버스킹하면 안 되나요?]
1팀장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위, 위험하잖아! 돌아다니려면 매니저 불러서…….”
[저 오늘 쉬는 날이에요 팀장님. 제가 노는 데 매니저님까진 필요 없어요. 보셔서 아시겠지만, 리카와 함께 온 가로 엔터 쪽 분이 계세요. 안 위험하니까 걱정 마세요.]
“너, 너 이렇게 멋대로 행동하면 안 돼!”
소속 아이돌이 회사의 통제를 벗어난 행위를 한다. 이는 그 자체로 문제다.
물론 아이돌은 자유로운 개인이니 쉬는 날에 뭘 하건 회사는 알 바 아니다. 하지만 그건 원론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질지 몰라.’
1팀장은 오랜 세월 이 업계에 몸담아왔다. 그러는 동안 자연스레 프로듀싱 지식도 습득하게 됐다.
그가 배운 바대로면, 아이돌은 인간이 아닌 창조된 캐릭터에 가깝다. 회사가 만든 틀에 인간을 구겨 넣어 창조한 캐릭터 말이다.
그렇기에 가장 경계해야 할 건…….
‘캐릭터성의 붕괴.’
인간성, 그러니까 퍼스널리티가 아이돌의 캐릭터를 잡아먹는 순간 회사가 만들어 낸 유리성엔 금이 가기 시작한다.
아이돌 팬들이 기대하는 완벽한 모습에서 어긋나기 시작하면, 그 자체로 회사에겐 리스크가 되어버린다.
‘아이돌도 사람이야. 그건 알아. 술 먹고 뻗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남자나 여자에 미쳐 있을 수도 있어. 욕을 입에 달고 살 수도 있고, 팬을 증오하거나 집안 꼴이 개판인 애도 있어. 이성 관계가 문란하거나 개인적으로 시작한 사업에서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는 새끼도 있어. 하지만 그건……!’
회사가 만든 캐릭터성으로 철저히 은폐되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돌은 인간이 아니다.
새장에 갇힌 채, 언제나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주어야 한다.
에리카가 멋대로 버스킹을 한다?
그래, 그러라고 하자.
옆에서 그녀의 일탈을 막아줄 인간만 있다면. 감시만 당하면. 언제나 주변에 CCTV만 둔다면, 에리카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즉, 목줄만 채워놓을 수 있다면…….
[저는 계약서에 제시된 사항을 모두 지키고 있어요.]
에리카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떨림은 에리카의 두려움을 드러냈다. 그녀도 자신이 반항하고 있단 것을 알았다.
[단 하나도 어긋나지 않았어요. 의심되시면, 제가 사인한 계약서를 읽어보세요.]
안 읽어도, 1팀장은 케이어스 멤버들의 계약서에 명기된 사항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안다.
매니지먼트 계약서는 수백 장도 더 넘게 읽어보았으니까.
그중 에리카의 행동을 제지할 만한 조항은 존재하지 않는다. 확대해석을 해야만 그녀에게 그럴듯한 강제성을 행사할 수 있겠지.
그러한 강제성도 회사가 ‘할 수 있다’라고 표현되니, 1팀장이 에리카에게 강요하기 위해선…….
‘매니지먼트팀 회의를 열어서 회의록을 남겨야 해.’
에리카의 불손한 말투를 들으니, 절대 제 발로 숙소로 돌아가진 않을 것 같다.
1팀장은 직장인이다.
이 사실이 나중에 위로 올라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으니, 면피는 해야만 한다.
“너 지금 어디야. 매니저 보낼게.”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회사와 한 약속 중 그 어느 것도 어기고 있지 않아요.]
“너 진짜 나랑 끝까지 가보게? 어? 진짜 그럴 생각이야?”
[못 할 것도 없죠. 저는 제 행동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원론적인 얘기일 뿐이잖아!”
[지키지도 않을 거면 원론이 왜 있나요?]
1팀장은 답답함에 말문이 턱 막혔다.
[저는 제가 동의한 부분까지만 회사의 지시를 따라요. 그러기 위한 계약서였어요. 그럴 생각으로 사인한 거예요.]
세상사 전부 원칙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떳떳한 인간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논쟁에선 원칙이 가장 우위에 있는 법이다.
지켜야 하기에 원칙이다.
옳기에 원칙이다.
그것을 따르는 인간이 소리를 높인다면, 말로는 제압할 수 없다.
도덕성은 그 자체로 권위다.
“알겠다.”
1팀장은 더는 말을 끌지 않고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한 매니저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평소엔 1팀장을 놀리지 못해 안달인 팀원들은, 다들 초조한 눈빛으로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시간으로 회의실 하나 예약해.”
“네, 네.”
“그리고 성철이, 내 입에서 나오는 말 다 받아적어. 회의록.”
1팀장은 회의를 하지 않고 회의록을 작성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팀과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회, 회의록은 왜요?”
“나중에 위에서 뭐라고 하면 변명거리는 있어야지. 그리고 절대 그럴 일은 없지만, 이 일로 법원까지 갈 상황을 대비해야지.”
“법원요……?”
진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이유는 훗날 에리카를 협박하기 위함이다.
‘고작 20대 초반의 어린 여자애야. 법을 가져다 대며 윽박지르면 따를 수밖에 없어.’
1팀장은 스트레스 때문에 눈앞이 침침해졌다.
‘보통 이런 일은 5년 차쯤에 생기는데, 에리카 얘는 왜 벌써…….’
심지어 그 이유가 버스킹이라니.
참으로 순수한 일탈이다…….
‘븨이에스 수련이가 남자 아이돌 세 명 동시에 사귀었을 때보다 수천 배 낫긴 하네…….’
* * *
“그러니까…….”
마지막 촬영지로 이동하는 동안, 성필은 에리카가 궁금해하는 것에 성심성의껏 답해주었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건 당연하고, 법적으로 해결할 수도 없어요. 해결하지도 않을 거고요.”
“왜요?”
“법원 앞엔 항상 기자들이 있어요. 별다른 소식이 없을 때도요. 당연히 연예인이 들어가면 옳다구나 하고 추측 기사부터 쓰죠.”
“기획사는 이미지 때문에 소속 아티스트를 고소할 수 없단 거네요.”
“그렇죠. 기획사들이 트러블을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바로 덮는 거예요. 드러낸 후 문제를 다루기보다, 아예 덮어서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없애고자 하는 거죠.”
기획사에겐 이미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주주들은 회사의 실적보다 회사의 이미지를 우선하기도 한다. 연예 기획사는 이미지가 좋을 때, 다른 종류의 기업보다 주가 상승이 훨씬 크니까.
역으로 말하면, 이미지로 하락하는 주가가 다른 기업보다 훨씬 크단 뜻이다.
“최악의 경우는 면하겠네요.”
“에리카 씨가 과하게 걱정하시는 거예요.”
에리카가 안도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성필이 사족을 붙였다.
“그런 상황까지 안 가는 게 가장 중요하죠. 회사도, 소속 아티스트도요. 회사와 아티스트는 적대자가 아니라 함께 나아가는 동료잖아요. 양보할 곳은 양보하는 자세가 필요해요.”
“……제가 한 행동이 심했을까요?”
“그냥, KS 엔터는 놀랐을 거예요. 에리카 씨는 모범생이셨잖아요.”
원래 불량하던 이들이 입에 욕을 담는 건 선생들도 크게 놀라지 않는다.
하지만 모범생이 작게라도 욕을 하면 선생들은 호들갑을 떨며 ‘쟤가 왜 저러지?’라고 한다.
충격량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데뷔했을 때부터 사고 좀 칠 걸 그랬어요.”
“이참에 크게 치는 건 어때? 에리쨩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잠적하는 거야!”
에리카는 리카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히도이(너무해)…….”
“여긴가 봐요.”
에리카가 지도와 현재 위치를 비교했다.
마지막 촬영 장소는 눈앞의 카페에서 이뤄진다.
서울 시내가 훤히 보이는 2층 뷰로, SNS에서 유명한 카페란 모양이다.
에리카는 2층의 테라스석을 배경으로 마지막 장면을 찍을 예정이었다.
‘서울 시티 보이의 뮤비는 두 장면을 번갈아서 보여줘.’
에리카와 리카의 버스킹.
그리고 에리카를 곁에서 지켜보는 ‘서울 시티 보이’의 관점. 즉, 에리카를 여주인공으로 설정하고 뮤비를 보는 이가 1인칭 시점에서 몰입하도록 하는 것이다.
버스킹 장면은 해가 지기 전에 촬영을 마쳤고, 1인칭 장면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빨리 끝내고 쉬자! 아타시(나) 다리가 아파…….”
“응, 일단 커피라도 마시면서…….”
에리카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하다가 갑자기 시야가 한 곳에 꽂혔다.
성필과 리카가 의아해하며 에리카의 시선을 따라갔다. 여러 건물의 뒤, 배경으로 버젓이 존재하는 산이 보였다.
낙산이다.
낙산공원으로 유명한 그곳.
곧 노을이 자취를 감추고 어둠이 내려올 것이다. 그 때문인지 산의 곳곳에선 어렴풋한 조명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저기 저거, 전망대인가요? 난간이 있어요.”
“네.”
“박 이사님은 가보신 적 있으세요?”
“몇 번 정도요.”
“누구랑 오셨어요? 맞춰볼게요. 여자친구?”
성필이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에리카가 미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죄송해요.”
“아녜요. 저기 가보고 싶으세요?”
“네. 뮤비 속의 교토걸은 밤의 데이트 장소로 카페보다 공원을 고를 거 같아요.”
“언제 데이트로 바뀌었어요?”
“시간 변화에 따라 교토걸의 마음도 변해가요. 가사도 2절에서 하이라이트로 넘어갈 때 분위기가 바뀌잖아요.”
“결국 서울 시티 보이를 사랑하게 되는 거네요. 저, 궁금한 거 있는데요. 결국 둘이 사랑하나요?”
“사랑하죠.”
“그런데 나라가 다르잖아요. 헤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에리카는 카페 대신 낙산공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랑은 길게 이어지지 않더라도, 단 하루뿐이라도 가슴 설레고 아름다운 거니까요. 여행지에서의 뜻하지 않은 만남은 모두의 판타지 아닌가요?”
“그렇긴 하죠.”
“공원으로 가죠.”
그때 리카가 에리카를 가로막았다.
“그, 그냥 카페가 좋을 거 같아!”
리카는 횡설수설했다.
낙산공원은 생각보다 볼 게 없다느니.
사진빨도 잘 안 받는다느니.
산에선 애플 제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니.
진짜 횡설수설이었다.
“아니면 여기서 찍어보고 마음에 안 들면 공원으로 가자! 아, 아냐! 여기보다 더 좋은 공원이 있어! 나랑 아라쨩이 갔던…….”
“내가 저기 가면 안 될 이유가 있니?”
“지가우(틀려)! 아타시(나)는 에리쨩의 뮤비가 더 좋았으면 해서 제안하는 거야!”
리카가 명백히 거짓인 당당한 태도를 연기했다.
“나는 협력 프로듀서니까!”
“박 이사님, 리카가 왜 이러죠?”
“저도 몰라요.”
에리카는 어깨를 으쓱하곤 걸음을 옮겼다. 리카는 ‘으으, 으우’ 같은 소리를 내면서 에리카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세 사람은 산을 오르고 올랐다.
“박 이사님, 길이 어느 쪽이에요?”
“저도 흥인지문 쪽으론 처음 와요.”
다행히 에리카의 고민은 빠르게 해결되었다.
곧바로 조명을 받아 멋들어지게 빛나는 성곽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에리카는 그 풍경으로부터 로맨틱한 분위기를 느꼈다.
“제가 생각했던 장소예요.”
“와, 오랜만에 봐도 장관이네. 그치 리카?”
리카는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에리카는 리카에게로 눈을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에리카의 시선을 받은 리카는 더욱 쩔쩔맸다.
“리카.”
“으, 응?”
“박 이사님이랑 여기 온 적 있어?”
“…….”
“알겠다, 나 막은 이유. 박 이사님이 너랑 여기 온 추억에, 내 추억이 덮어쓰게 될까 봐 그랬던 거지?”
에리카는 리카를 놀리듯이 ‘어머 어머’ 손뼉까지 쳤다. 리카는 바들바들 떠는 게, 곧 폭발할 모양새였다.
성필이 에리카의 인성질을 멈추려 하자.
“소다(그래)! 어쩔래! 맞으면 여기 내려갈 거야?!”
“진짜라고?!”
성필이 화들짝 놀랐다.
“너 그게 무슨 소름 끼치는 이유야!”
“소름이라뇨?!”
“우정이 너무 무겁잖아! 사람과의 추억을 무슨 컬렉션 취급하고 있어!”
“에…….”
리카가 상처받은 것처럼 움직임이 멎었다.
그에 성필이 또 당황했다. 당연히 리카가 장난으로 한 말인 줄 알아서 똑같이 장난으로 되돌려준 거였는데…….
“박 이사님.”
에리카가 성필의 어깨 위에 무거운 손을 올렸다.
“여자들끼리의 우정엔 그런 면이 있어요. 이 경우는 그러니까…… 전 애인이랑 놀러 갔던 장소에 현 애인을 그대로 데려오는 그런 느낌이에요.”
“그런 거예요?”
“스파이스 걸스의 ‘Wannabe’ 아시죠?”
“모를 수 없죠…….”
세계에서 가장 성공했던 걸그룹이니까.
문자 그대로 남녀노소가 사랑했던 그룹이며, 영국은 물론 세계 문화계에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긴 그룹이다.
“그곳의 가사처럼, 우정은 사랑만큼 큰 무게가 있어요. 사랑과 동등한 선상에서 고려해주세요.”
“네…….”
“어쩌면 그게 하슬 님한테 자꾸만 거절당하는 이유일 수도 있어요.”
“……?”
“리카.”
에리카는 풀 죽은 리카의 손을 잡고 화사하게 미소 지어주었다.
“내려가자.”
결국 세 사람은 원래 가기로 했던 카페로 향했다. 올라온 보람도 없이 말이다.
내려가던 도중, 리카가 걸음을 멈추었다.
“리카?”
“……그냥 여기서 찍자.”
“괜찮아, 나는…….”
“아티스트의 작업에 주변 동료의 사심이 개입되면 안 돼.”
“…….”
“에리쨩이 여기가 최고라고 판단했잖아. 그럼 그 신념을 지켜.”
“……그래도 괜찮을까?”
리카가 에리카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에리쨩은 아타시(나)의 토모(친구)잖아!”
에리카는 잠시 리카가 내민 주먹을 바라보다가, 기꺼이 주먹을 마주쳤다.
“고마워. 그럼 다시 올라가자.”
셋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와 촬영을 준비했다. 리카가 에리카의 폰을 받아 서울 시티 보이의 관점으로 촬영을 시작했다.
에리카는 벽에 기대어 포즈를 잡거나, 공원 여기저기를 뛰어다니거나, 앉아서 기타를 치기도 했다.
작업물을 본 에리카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알겠다.”
“나니가(뭐가)?”
“시점이 묘하게 낮아.”
“에에, 발끝까지 세워서 찍었는데?”
촬영 시점은 서울 시티 보이, 즉 남자의 시점이다. 에리카가 강력히 주장한 바에 따르면, 서울 시티 보이는 에리카와 이상적인 키 차이인 15cm를 가지고 있다.
“박 이사님이 찍어주실래요?”
“제가요?”
성필은 버스킹 촬영으로 임무를 다했다.
서울 시티 보이 시점 촬영에선 옆으로 빠져 있었는데, 그로선 당연했다.
남자인 성필이 연인 시점으로 촬영하는 건 불순하니까. 또 리카가 이 일을 들먹이며 평생토록 성필을 갈굴 게 틀림없다.
“한 장면만 찍으면 돼요.”
“박 이사님 나랑 3cm밖에 차이 안 나!”
“4cm야.”
“정말요? 어, 진짜네?”
“박 이사님은 원래 키보다 커 보이시긴 해! 비율이 좋거든!”
“분명 리카 키가 훨씬 작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에리쨩, 혹시 친해지면 욕하는 타입? 그런 타입? 그런 거면 친해지고 싶지 않아…….”
성필은 에리카에게서 폰을 넘겨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에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박 이사님 걸로 해주세요.”
“저는 애플 아닌데요?”
“박 이사님한테 가장 익숙한 시야로 저를 담아주세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게 가장 좋을 거 같아요.”
성필은 기꺼이 그러했다.
폰을 꺼내어 가로등 빛을 받은 에리카를 화면 안에 담았다.
“까치발 드세요.”
“…….”
어머니, 아버지, 10cm만 더 크게 낳아주시면 안 되셨습니까?
“한 이사님 정도만 됐어도 이런 모욕은 안 당했을 텐데…….”
성필이 자존감을 발판 삼아 까치발을 들었다. 그것을 보고 에리카가 살포시 미소 지었다.
“한 이사님 키가 박 이사님보다 10cm 크신가요?”
“한 이사님 아세요?”
“네.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 보니까요.”
“아, 그렇겠네요.”
“한 이사님 개그는 누가 알려주신 거예요?”
“권아인 경리라는 분이 계세요.”
“그분이 원흉이었네요.”
“저는 좀 웃기던데.”
“전 한 번도 웃은 적 없어요.”
원흉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에리카는 한구인의 필살 유머를 그다지 탐탁지 않아 하는 듯했다.
성필은 카메라 초점을 맞춘 후 에리카에게 OK 사인을 보냈다. 에리카는 연기자가 그러하듯 심호흡으로 연기 모드에 들어섰다.
그녀는 사랑에 빠진 교토걸을 연기하려 했으나, 잘되지 않는 듯 자꾸만 표정을 바꾸었다.
“상대가 나라서 그래요?”
“네.”
“흐끄으극……!”
“그런 의미가 아니라요, 카메라맨이 바뀌어서…….”
“카메라우먼이얏!”
“……카메라휴먼이 바뀌어서 그런지, 익숙하지 않네요. 긴장 좀 풀어주세요.”
“네?”
“프로듀서가 스태프에게 전하는 지시예요. 어서 긴장 풀어주세요.”
긴장을 풀어달라…….
성필은 핸드폰 안의 에리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정말 별거 아니란 투로 말했다.
“오늘은 전기장판 끄고 자야겠어요.”
“왜요?”
“쿨쿨(Cool Cool) 자야 하니까요.”
한구인이 방송에서 했던 필살 유머 3번.
그것을 들은 에리카는 순간 넋을 잃었다.
그러더니.
“쿠흨…….”
곧 만면에 화사한 웃음을 띠며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어찌나 재밌었는지, 그녀는 옆의 성곽을 손바닥으로 짚은 채 땅을 보고 시원한 웃음을 연신 터뜨렸다.
그녀가 눈가에 맺힌 물기를 손으로 가볍게 닦아냈다.
“아 뭐예요오.”
“봐요, 직접 들으니까 은근히 재밌죠?”
에리카는 겨우 웃음을 멈추곤 카메라를, 성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달처럼 은은하고 부드럽게 휜 눈가, 그 안에 보석처럼 박힌 눈동자가 빛났다. 그리고 방금 에리카처럼, 이번엔 성필이 넋을 놓았다.
“네, 재밌네요.”
그 순간, 성필의 핸드폰이 진동을 토해냈다.
전화였다.
그곳에 새겨진 이름을 보자마자 성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정호환 이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