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58화 (458/760)

458화

“그런데, 아티스트 이미지 브랜딩이라뇨?”

성필, 리카가 앉은 연습실의 구석.

그곳에 에리카가 녹차를 들고 다가왔다. 종이컵 안에는 짧은 시간 우려낸 인스턴트 녹차가 들어 있었다.

리카는 소리를 지르느라 목이 탔는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녹차를 홀짝였다.

에리카는 그런 리카를 보며 싱긋 웃었다.

“아이스로 가져다줄까?”

“괜찮아!”

사실, 리카는 차가운 음료가 먹고 싶었다. 하지만 에리카의 선택을 이해했다.

에리카는 에어컨이 빵빵 나오는 연습실 안에만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따뜻한 음료를 가져온 것이겠지.

‘그리고 더는 에리쨩한테 빚을 만들고 싶지 않아.’

비록 그게 아주 아주 사소한 부탁일지라도 말이다. 그 사소한 빚이 쌓여, 리카가 의도치 못한 부채 의식을 성필에게 지울 수도 있다.

“아티스트 이미지 브랜딩이란 건.”

성필은 아까 에리카가 했던 질문에 답했다.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우리들의 프로듀싱’에서도 밝혀졌다시피, 소녀연맹의 최종적 목표는 자체 제작형 아이돌이거든요. 대중이 소녀연맹에게서 캐릭터성이 아니라 퍼스널리티까지 보는 것. 그게 저의 프로듀서로서의 목표이고…….”

10대, 20대에게 소구(訴求)하는 아이돌 문화.

한국 출산율의 저하로 시장 축소가 확정되다시피 한 이 문화를 살려낼, 성필이 생각한 방안이다.

“아이돌로서 소화하는 배역(配役)이 아니라, 인간성 자체를 목표로 한단 거네요.”

에리카는 의외로 성필의 설명을 진지하게 들었다. 그것을 넘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기도 했다.

“괜찮네요. 확실히, 일본에서도 그런 사례가 존재해요.”

“존재해요?!”

“모르셨나요?”

“일본에도 그런 사례가 있는 줄은 몰랐어요.”

프로듀싱받는 위치에서 하는 위치로 나아가 창작형 뮤지션으로 성공한 이들.

성필이 아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보이그룹 엔싱크 소속이었던 저스틴 팀버레이크. 테이크댓 출신의 로비 윌리엄스. 그리고 비틀즈다.

일본에도 그런 이들이 있는가?

“일본은 아이돌계의 대기업 독점이 강력해요.”

성필도 익히 아는 바였다.

가로 엔터와 협업 중인 웨벡스 사무소도 에리카가 말한 대기업 중 하나이고 말이다.

“자회사가 아닌 아이돌은 아예 묻어버려서 뜨지 못하게 만든다…….”

“…….”

“정도는 아니지만, 기회가 불공평하게 분배되는 건 사실이죠. 사실 한국도 어느 정도는 비슷하고요. 그런 상황에서 데뷔한 그룹 중, 아예 독점체제에서 벗어나려고 도전했던 분들이 계세요. 일본은 아이돌과 뮤지션을 엄격히 구분하니까, ‘우리는 아티스트예요, 뮤지션이에요’라고 광고한 거죠.”

“그게 먹혔나요?”

성필은 에리카의 이야기에 거의 홀리듯 했다. 소녀연맹을 위한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증명이 필요했죠. 그 증명이란 건, 스스로 프로듀싱할 것. 그게 첫 번째 조건이에요. 일본이 아이돌과 아티스트의 구분이 엄격한 건, 예술가의 자격이란 게 명확히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어떤 식으로요?”

“클래식 피아니스트는 아티스트인가요?”

“아티스트…… 죠. 독자적인 해석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창작은 하지 않죠?”

“네에, 뭐.”

“그런 의미에서, 클래식 피아니스트는 아티스트가 아니에요. 창작자라기보다 기능인(技能人)이죠. 피아노 잘 치는 사람, 그 정도.”

성필은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창작 과정이 없더라도, 해석은 제2의 창작이라고도 부를 수 있지 않은가?

그 의문을 에리카는 바로 캐치해냈다.

“클래식으로 이해가 안 가신다면, 전통 무용가는 어떤가요? 전해지는 과거의 무보(武步)를 해석해서 공연하는 사람은요?”

“……아, 그런 식으로 이해되는 거네요.”

창작자와 기능인을 구분한다.

온전한 창작을 하지 않고서야, 그들은 아티스트라기보다는 어느 분야의 전문가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케이팝 아이돌은 아티스트보다 기능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죠.”

춤과 노래를 익힌 기능인.

그곳에 해석의 여지가 있다지만, 일본에선 아티스트로 불릴 수 없다.

“그러니까 그분들이 ‘우린 아티스트예요’라고 광고하려면 증명이 필요했던 거예요.”

일본 아이돌계의 대기업 독점을 빠져나가려, 그들은 아티스트란 이름을 얻으려 했다.

“일본에선 아이돌과 아티스트의 개념이 나뉘는 것처럼, 청취층도 그에 따라 갈려요. 일본의 아이돌은 뭐랄까, 귀여움받는 게 일이에요. 한국이랑은 개념의 차이가 있어요. 인기 있으면 아이돌이에요.”

만약 한국에도 아이돌이 그러한 용법으로 통했다면, 스트리머나 BJ, SNS 인플루언서도 아이돌로 불릴 수 있다.

“아이돌의 세계에서 아티스트로 나아가는 건, 더는 사람들이 귀엽게 봐주지 않는단 걸 뜻해요. 아티스트가 되면 혹독하지만, 그만큼 새로운 기회가 열려요.”

그러곤, 에리카는 핸드폰을 들어 성필에게 톡을 보냈다. 방금 설명한 그룹의 라이브 영상이었다.

“그분들이 걸어온 길이 박 이사님과 소녀연맹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나중에 검색해서 찾아보시면 좋을 거예요.”

“더 듣고 싶…….”

에리카가 성필의 옆으로 곁눈질했다.

성필이 옆을 보았다.

어느새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변한 리카가 있었다. 그런 리카는 뾰로통하게 성필을 보는 중이었다.

“……이제 서론은 끝났으니, 리카의 아티스트 이미지 브랜딩을 위한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신나게 둘이서 이야기하다 동정하듯 말머리를 넘겨도 기쁘지 않다구요!”

라고 말하는 리카는, 드디어 성필의 관심이 자신에게 넘어와서 기뻐했다.

“그럼, 협력 프로듀서 리카 님. 제 곡에 대해 어떤 생각이라도 있으실까요?”

“에리쨩, 후회할 거야!”

“후회?”

“아타시(나)를 박 이사님한테 꿰어져 오는 1+1이라고 생각한 거!”

“후회하게 해봐.”

“혼또니(진짜) 그렇게 생각했다고?! 아아앙 이사님 에리쨩이 저 괴롭혀요오! 어떻게 해주세요!”

“에리카 씨, 리카 괴롭히지 마세요.”

“네.”

“괴롭혔단 거 인정하니까 더 열받아!”

억울해하던 리카. 그녀는 순식간에 기세등등한 태도로 바뀌었다.

“에리쨩의 믹스테입은 사운드 포그에 올라가는 거지?”

“응. 뮤직비디오는 아이튜브에 올릴 생각이야. 믹스테입이니 수익 창출은 할 수 없어. 네 이름이 크레디트에 올라가더라도 보상은 없단 뜻이야.”

“나도 알아! 왜냐면 나도 해봤으니까!”

“……?”

성필이 어안이벙벙해서 리카를 쳐다보자, 그녀는 어쩔 수 없단 듯 고개를 저었다.

“원래 이건 더 성공하고 나서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기회가 왔으니 어쩔 수 없네요! 자, 보세요!”

그러고 나서 리카가 보여준 건 가히 충격적이다시피 했다. 특히 에리카가 그러했다.

“팔로워가 천 단위잖아…….”

리카의 사운드 포그 계정을 보고, 에리카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운드 포그

인디 음악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자유롭게 선보일 수 있는, 어찌 보면 많은 음악가들이 커리어를 시작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음원 공유 사이트다.

하지만 큰 조회 수는 기대하기 어렵다. TOP50만 가보아도, 조회 수가 1만을 넘기 힘드니까. 물론 불법적으로 공유되는 메이저 아티스트들의 음원을 제외하곤 말이다.

누구나 곡을 등록할 수 있기에 퀄리티가 보장되지 않는다.

음원 차트만 가도 자본력으로 도배된 고퀄리티의 음악들이 있는데, 왜 굳이 사운드 포그까지 들어와서 품질 떨어지는 곡들을 일일이 찾고 있겠는가.

그렇기에 고작 천 단위의 팔로워라도…….

“에헤헤, 어때? 대단하지?”

“응.”

에리카가 쉽게 인정하자 리카는 머쓱하면서도 행복한 미소를 보였다.

“곡 조회 수 대부분도 천 단위야. 진짜 대단해…….”

“거기서 끝이 아니야!”

이번에 리카가 보여준 건 아이튜브 계정이었다.

계정의 구독자 수는 무려 2만 단위.

계정에 등록된 곡들의 조회 수도 거의 다 만 단위에서 놀고 있었다. 때로 십만 조회 수를 넘은 것도 존재했다.

그것을 보자 에리카는 아예 얼어붙었다. 리카가 생각보다 훨씬 대단했기 때문이다.

“아타시(나)…….”

리카가 갑자기 폼을 잡았다.

“혜성처럼 나타난 카와이 베이스계의 천재, 플로리걸. 사실 그 정체는 케이팝 아이돌인 카와이 베이스의 신 이시카와 리카였다!”

“어, 언제부터 시작한 거야?”

성필은 보고도 못 믿을 사태를 마주하자 말까지 더듬었다.

설마 리카가 가로 엔터에 비밀로 하며 작곡가로서 활동하고 있었을 줄이야.

비록 수익 창출도 뭣도 안 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이룩해낸 성과는 굉장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아라베스크’ 앨범 전부터 시작했어요!”

“왜?”

“왜라뇨, 그거야 당연하지 않나요!”

리카가 자랑스레 가슴을 폈다.

“아타시(저)의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싶었어요! 과연 아티스트로서의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마아(뭐어), 실험해볼 필요도 없었네요!”

그러고 나서 리카는 칭찬을 바라듯 성필을 흘끔흘끔 보았다.

성필은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난 옛날부터 애들한테 아티스트십을 강조했었지.’

설마 창작을 도전하며, 그 결과물을 세상에 공개한 멤버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심지어 그 성과가 이렇게나 눈부시다니.

그때 에리카가 입을 열었다. 리카의 눈치를 보면서.

“저어, 그런데 이래도 괜찮나요? 들어보니, 리카는 회사에 허락도 안 받은 거 같은데…….”

“소속 뮤지션은 회사의 허락 없이 상업 활동을 할 수 없죠. 매니지먼트권을 회사에 위임했으니까요. 그 말은, 상업 활동이 아니면 할 수 있단 뜻이에요.”

회사의 기획이나 의도를 벗어나는 것까진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기획이나 의도란 게 참으로 미묘한 것이라, 법정까지 가서야 겨우 결판이 날 주제이다.

당연히 그런 진흙탕 싸움까지 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회사든 아이돌이든 기운만 빼게 되니까.

게다가 멋대로 비상업적 앨범을 발매했다 하더라도, 결국 법은 아이돌의 편을 들어주게 될 것이다. 이 나라는 개인의 자유에 큰 가치를 두니까.

계약에 명확히 나와 있지 않은 제약 사항으로 소속 뮤지션에게 처벌을 내릴 순 없다. 회사가 명백한 손해를 증명해내지 않는 이상에야.

“그런데 리카 진짜 대단하다.”

성필은 리카의 아이튜브 계정을 쭉 훑어보았다. 활동을 시작한 건 약 1년 반 정도 전이었다.

고작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수요층이 적은 장르로 이만한 성과를 내다니.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이건 정말, 음악만으로 인정받은 거잖아.”

현대의 음악 산업은 프로모션이 반이라고 할 만큼 홍보의 중요성이 크다.

일단 사람들이 들어줘야 돈이 벌리니 말이다.

좋은 음악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음악을 듣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프로모션은 제2의 매니지먼트이자 프로듀싱이다.

베토벤 교향곡 5번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사람들이 몰라주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음악 산업에선 ‘좋은 음악을 만들기만 하면 된다’라는 말이 통용되지 않는다.

“회사의 홍보력을 빌리지 않고, 소녀연맹의 리카란 이름 없이 이렇게나 크게 성장했어. 진짜, 정말…….”

“에엑 이사님 우시나요?!”

“아니, 아냐, 우는 게 아니라…….”

성필이 눈가를 검지로 쓸어냈다.

장성한 자식을 보면 이런 기분일까.

리카는 진실로 창작자가 되었다. 가로 엔터를 나가서도 먹고 살 걱정은 없을 듯했다.

“이사니임…….”

감동하여 훌쩍이는 성필을 보자 리카도 감정이 북받치는지, 그를 위로하려 그의 앉은 다리 위에 손을 올렸다.

성필이 그 손을 바로 쳐냈다.

“히도이(너무해)! 감동을 나누려고 한 건데!”

“허벅지 말고 어깨도 있잖아. 어깨가 제일 무난해.”

“그래서 저흴 격려할 때도 어깨만 두드리시는 거였네요!”

“아무튼, 잘 컸다 우리 리카…….”

리카는 한 번 울음을 참듯 입술을 앙다물더니, 웃음을 쥐어짜며 성필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런데.”

에리카가 입을 열었다.

그녀도 성필과 리카의 감동스러운 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지만, 도저히 궁금증을 참기 힘들었다.

“이렇게 인기를 얻는 게 음악만으로 가능한 거야? 채널을 운영한 지 1년 조금 넘었을 뿐이잖아. 그런데 2만 명의 구독자…… 고정 청취층을 확보하는 게 가능해?”

아무리 생각해도 운이 따랐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리카는 모든 곡을 무료 사용이 가능하도록 했다. 그 때문에 여기저기로 곡이 퍼져나가 유명세를 얻은 것일까?

우연히 유명한 아이튜버가 영상에 사용했다거나?

“아까 박 이사님이 음악만으로 인정받은 거라고 했지만…….”

“아니야?”

“당연하지! 아타시(나)는 보기보다 철두철미해! 카와이 베이스의 신인 나라도 곡을 올리기만 해선 뜰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단 건 알아!”

“그럼 홍보한 거야?”

“물론!”

“어떻게?”

설마 소녀연맹의 리카라는 이름을 조금 이용한 것일까? 그렇다면 성필이 모를 리가 없는데…….

모두의 기대감이 집중되자 리카가 엄숙히 선언했다.

“이 업계에선, 여자인 것만으로도 스펙이야!”

“…….”

“…….”

“이쪽 오타쿠 문화는 남초니까!”

“…….”

“…….”

“그래서.”

리카가 본인의 트잇터 계정을 보여주었다.

아니, 리카의 계정이 아니라 ‘플로리걸’의 계정이었다. 가끔 올라오는 ‘더워’나 ‘힘들어’ 등 짧은 트잇이 대부분이었으나, 사진도 있었다.

모자에 마스크, 선글라스까지 쓴 리카의 모습.

입은 옷은 시티보이룩이었다. 상의와 바지까지 오버사이즈라 헐렁하지만, 여성성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리카란 것을 특정할 순 없지만, 여자란 건 알 수 있다.

“사소한 정보 공개만으로도 관심을 받아! 그래, 카와이 베이스만으론 관심을 받기 어렵지! 하지만 그 관심을 얻어내는 게 홍보이며 마케팅! 홍보의 무기는 바로 여자란 사실 그 자체야!”

미소녀(아마)가 작곡하는 카와이 베이스.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하다.

리카는 그리 판단하고 오래도록 ‘플로리걸’의 이미지를 브랜딩해왔다. 이름에 굳이 ‘걸’을 넣은 것도 그러한 전략의 일환이었겠지.

성필과 에리카는 서로를 보았다.

두 사람의 눈에는 같은 감정이 흘렀다.

‘아직 리카가 플로리걸로 활동했던 커리어를 전부 모르니 확신할 순 없지만.’

리카는 이미 프로듀서로서의 경험을 풍부히 겪었다고 말해도 좋은 경지이다.

시장 분석에 이어 홍보 수단 강구, SNS를 통한 이미지 이용, 거기에 시장의 요구에 부합하는 곡을 꾸준히 작곡하여 올리기까지.

리카 혼자 한 일이라 스케일이 작을 뿐, 그녀에게 회사 규모의 자본이 주어지면…….

‘진짜 프로듀서가 될 수도 있겠어.’

리카의 진정한 재능은 외모나,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퍼포먼스, 그런 게 아니었다.

용감히 도전하고 본인의 목적을 이뤄내는 자세 그 자체였다.

아이돌 중 리카 정도의 추진력을 가진 이가 얼마나 있을까. 이렇게나 열의가 있는 아이돌이 또 몇이나 있을까.

성필과 에리카, 둘 다 그 사실을 깨달았다.

‘에리카 씨의 목적인 믹스테입. 그 주제에 한정해선, 나보다 리카가 훨씬 더 도움이 될지도 몰라.’

성필은 어찌 됐든 회사를 배후에 둔 채 진행한 홍보 경험밖에 없었으니까 말이다.

소규모 자본으로 제작되는 믹스테입이란 과제에선, 성필보다 리카의 경험이 더 귀중할지도 모른다.

“……런데 이 방법은 별로 추천 안 해! 가끔 사람들이 치근덕대거나 이상한 사진을 DM으로 보내기도 하거든!”

“리카.”

에리카가 리카의 손을 맞잡았다.

한껏 자기 자랑을 늘어놓던 리카는 갑작스러운 에리카의 반응에 당황했다.

“아니, 협력 프로듀서님. 잘 부탁드립니다.”

“에, 에?”

리카는 얼떨떨하여 성필을 보았다.

그리고 성필의 얼굴에 깊은 신뢰가 배어 있는 것을 보곤, 언제 당황했냐는 듯 오만하기까지 한 미소를 보였다.

“아타시(나)만 믿어!”

* * *

에리카와의 회의를 마친 후, 성필과 리카는 건물을 빠져나와 차에 탔다.

“리카.”

“하이(네)?”

“이거 그냥 내 착각일 수도 있고, 아니면 걍 나 혼자 창피해할게. 그러니까 뭐 하나 물어볼 건데…….”

“뭐든 물어보세요!”

“혹시 저 채널 시작한 거, 나 때문이야?”

“박 이사님 덕분이죠!”

리카가 시원스레 답했다.

“제가 아팠을 때 기억하시나요!”

“응.”

“그때 기뻤어요!”

성필은 리카가 아프단 말에, 당장 회사에서 뛰쳐나가 소녀연맹의 숙소로 들이닥쳤었다.

“네가 성인영화 보고 있던 그때 말이지.”

“그건 엣찌(음란)한 영화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하나요! 발레리나들의 불꽃 튀는 암투를 다룬 서스펜스 스릴극이라구요!”

“알아. 기뻤단 건?”

“제가 꼭 아티스트가 아니어도 된다고 했던 거요! 제가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구요! 기뻤어요! 그래도……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가만히 있나요.”

리카는 소녀연맹의 첫 번째 연습생이었다.

성필이 기대하는 게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신한다. 그렇기에, 리카는 그 기대를 이뤄주고 싶었다.

아직은 모자라기만 한 자신이기에, 언젠가 기회가 오면 그 기회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미리 경험을 쌓았어요! 어떤가요! 감동하셨나요!”

“응.”

“그게 끝?!”

“무리하는 건 아니지?”

성필은 리카가 대견한 동시에 걱정됐다.

아이돌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인 ‘플로리걸’을 유지하는 건 힘든 일임이 분명하다.

사실상 직업을 두 개 맡은 것이니까.

리카는 그런 우려를 향해 단호히 NO라고 답했다.

“저의 가능성을 계속해서 인정받아요! 힘들 리 없어요!”

“……그렇구나.”

“또 우시려면 제 가슴…… 아니, 배……? 으음, 어디가 가장 적당할까요. 아! 어깨에 안겨서 마음껏 우세요!”

“어떻게 어깨에 안기는데.”

“제 키가 10cm만 더 컸어도 꽤 모양새가 나왔을 거예요!”

리카가 여기서 10cm 더 자라나면 181cm다.

성필이 올려다봐야 한다.

역(逆) 설레는 키 차이가 된다.

“제가 하는 ‘우리들의 프로듀싱’을 기대하세요!”

“그럼 바로 다음 타자로 들어갈래?”

“주인공은 마지막이에요!”

“역시, 다들 하기 싫어하나?”

“부담스러우니까요! 하지만, 저는 다들 할 수 있다고 믿어요! 그럴 능력이 있어요! 저희 모두 박 이사님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봐왔어요. 부담스럽지만,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백설하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멤버들이 저마다 가슴 속에 감추고 있는 개성. 그것을 숨기기보다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순간, 만인을 매혹할 수 있는 아우라가 생겨날 것이다.

“……그래.”

성필은 그러리라고 믿고 싶었다. 동시에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백설하가 겪었던 고통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창작자라면 자연스레 거치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어찌 됐든 결과는 좋았으니까. 게다가 백설하도 종국엔 자신감을 얻었었다.

‘설하는 자신을 믿게 됐어. 그게 가장 큰 성과라고 보아도 좋겠지.’

그렇지만, 다른 멤버들이 ‘우리들의 프로듀싱’ 자체를 꺼린다면. 최후의 결과가 좋더라도 그게 옳은 걸까.

용광로를 통해 순도 높은 금속이 산출된다고 하더라도, 멤버들을 그 용광로로 밀어 넣는 것 자체가 올바른 방향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방향만 다를 뿐, KS 엔터가 다키스트에게 했던 걸 똑같이 하는 게 아닐까.’

신뢰와 기대란 이름으로 포장된 강요를 멤버들에게 행하려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백설하의 눈물 어린 고백을 보며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가지 않았었다.

성필은 한숨을 뱉으며 시동을 걸었다.

이제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 합숙소로 가야 한다. 리카를 숙소까지 태워준 후 바쁘게 운전해야 그나마 9시 전에 도착할 수 있겠지.

“이사님.”

차가 출발하자 리카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전과 달리 차분했다.

“에리쨩이랑…… 화해했나요?”

“화해? 아, 내가 멋대로 그만하겠다고 한 거?”

“하이(네).”

“나중에 따로 말씀드리려고.”

“……저 때문이었어요.”

“그러지 마.”

리카는 다른 소녀연맹 멤버들보다 떨어진단 생각에, 병에 걸릴 정도로 몸을 혹사하기까지 했던 아이다.

그 열등감은 리카를 작곡가의 길로 이끌기까지 했었다. 그만큼 자기 계발 의지가 뛰어난 아이다.

확실치는 않지만,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며 열등감을 가지는 성향은 KS 엔터 시절부터 비롯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단 거 이해해.”

KS 엔터의 연습생 생활은 가로 엔터와 달리 무한경쟁의 지옥이었을 것이다.

한없이 아름다우며 빛나는 보석들 틈에서, 리카는 끊임없이 불안을 느꼈을 것이었다. 불안을 넘어서서 아예 짙은 열등감마저 가졌으니.

그중 에리카를 가장 신경 썼을 터다.

그런데 본인이 속한 그룹의 프로듀서가 그 에리카를 도와주겠다고 하니, 눈이 도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애들은, 특히 리카는 나를 많이 믿고 의지하니까.’

성필은 그걸 알기에, 리카가 다그쳤을 때 바로 에리카와의 만남을 끝낸단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만…….”

“저는 박 이사님의 친구예요!”

리카가 성필의 말을 끊었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다’라고 말할 걸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리카는 이 일은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치만, 박 이사님의 친구는 저뿐만이 아니에요! 저도 그렇고요! 모든 관계가 소중해요! 그러니, 제 고집만으로 에리쨩과의 관계를 끊으라고 했으면 안 됐어요. 안 됐던 거예요…….”

“…….”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 최신화에서, 하슬 언니가 이사님을 시험했었잖아요. 사랑을…… 증명받고 싶다고…….”

“음, 어. 그랬었지.”

“저도, 저도 그랬던 거 같아요.”

차가 출발한 지 몇 분이 지났다.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의 소음이 성필의 차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시끄러웠으나, 둘 사이에 감도는 공기는 정적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었다.

둘에겐 서로의 목소리만이 유일한 자극이 되었다. 다른 소리는 모두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저랑 에리쨩을 저울 양쪽에 두고, 박 이사님한테 한쪽을 선택하라고 강요한 거예요. 시험한 거예요. 아니, 협박이었어요…….”

나를 골라라.

나를 고르는 게 당연하다.

나는 가로 엔터 소속이고, 소녀연맹이며, 네가 깎아낸 보석이니까.

네가 책임을 지고, 다른 저울에 걸린 에리카를 발로 차서 떨어뜨려라.

“그렇게 극적으로 풀릴 줄은 몰랐지만, 결국 박 이사님이 에리쨩을 차버릴 줄 알았어요.”

“‘찼다’는 건 어폐가 있지.”

“아타시(저)는 외국인이에요! 사소한 실수에 하나하나 꼬투리 잡지 마세요!”

리카는 거의 한국어 원어민 수준이지만, 아무튼.

“그건 친구로서 하면 안 되는 행동이었어요. 아니, 사람으로서도 하면 안 됐어요. 인간의 가치를 가르라고 요구하는 건…….”

리카가 눈을 감고 한숨을 깊이 내뱉었다.

“제 고집이고, 욕심이었어요. 죄송합니다 이사님. 앞으로도 에리쨩이랑 친구로 지내주세요.”

“그, 미안한 건 알겠는데. 결론이 이상하지 않아?”

“토모(친구)…… 죠? 에리쨩이랑? 저 때문에 어색해지거나 그런 거 아니죠?”

“음.”

곧 있으면 소녀연맹의 숙소다.

성필은 합숙소까지 가면 몇 시일지 대강 짐작해보았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할 수 있을 듯하다.

“리카, 난 에리카 씨랑 친구가 아니야.”

“……에?”

“굳이 표현하자면 같은 업계 동료겠지.”

“그, 그치만…….”

“에리카 씨가 나를 신경 쓰는 건, 너한테 이야기하지 못할 이유가 있어서 그래. 빚이라고 봐도 좋아.”

“빚?”

“응, 빚. 애초에 어떻게 아이돌이랑 친구가 되겠어. 안 그래? 말이 안 되잖아.”

리카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성필의 이야긴, 리카가 생각하는 성필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었으니까.

숙소 앞에 도착했다.

그 순간, 성필이 쾌활하게 말했다.

“단 하나의 예외만 빼고. 너야, 리카.”

“…….”

“넌 내 유일한 아이돌 친구야. 전(前) 아이돌인 혜빈 누나 빼고.”

“…….”

“참고로 친구란 건 이성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없단 뜻이야.”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 정돈 저도 알아요! 것보다 그런 거 신경 쓰는 이사님이 이상한 거예요! 앗, 설마 그런 상상을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단톡방에 공개할 거예요!”

“아무튼, 그래. 친구한테 친구의 정의를 설명하는 것도 이상하긴 한데……. 알겠지만 우리 관계가 일반적이진 않잖아. 거리감이…….”

성필이 리카와 자신 사이의 거리를 손으로 왔다 갔다 하며 표시했다.

“나도 너 같은 애를 처음 만나봐서 힘들 때가 많은데…….”

“저 같은 애라뇨!”

“아마 서로서로에게 세상에서 예시를 찾기 힘든 기묘한 관계일 테니까, 둘 다 노력해보자.”

“……그런 걸로 고민하실 줄 몰랐어요.”

“하지, 그럼. 쑥스러우니까 그만 얘기하자.”

“실버타운 메이트?”

“응.”

리카는 배시시 웃더니 문을 열고 차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성필은 그녀가 숙소를 올라갈 때까지 볼 작정으로 창문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자 창문에서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창을 내리자 리카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 놓고 갔어?”

“이사님, 에리쨩이랑 친구로 지내달란 건 빈말이 아니에요. 진짜 부탁이에요.”

“어?”

“지금 에리쨩의 목표는 정호환 이사님께 인정받는 거지만, 저는 그것보다 그 이후가 걱정이에요.”

“…….”

“케이어스로서의 성적에 익숙한 에리쨩이, 믹스테입으로 거둔 성과에 만족할 가능성은 0이에요. 분명 실망하고, 어쩌면 절망할지도 몰라요.”

현대 음악 산업은 홍보가 절반.

그러니 홍보가 없는 에리카의 믹스테입은, 케이어스 팬덤의 힘을 빌려도 저조한 성적을 거둘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믹스테입이란 카테고리로 한정하면 에리카의 성공은 보장되어 있다.

하지만 에리카의 비교 대상은 다른 믹스테입이 아니라, 아이돌들의 성적일 것이었다.

유명한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이라도 솔로로 나오면 맥을 추지 못하고 잊히기 일쑤다. 회사가 정식으로 도와줘도 그럴 지경인데, 믹스테입이면 오죽하겠는가.

“정호환 이사님께 인정받고 믹스테입을 발매한다. 그 이후가 에리쨩에겐 가장 큰 벽일 거예요. 그리고 그때 에리쨩을 넘어지지 않게 할 수 있는 건 주변의 인정이에요. 버팀목이 필요해요. 프로듀서인 박 이사님이, 그 역할을 하실 수 있어요.”

리카가 창밖으로 고개를 뺐다.

“콘서트가 끝나면 허탈해요. 열광의 세계에서 침묵의 세계로 넘어오는 건 힘들어요. 에리쨩은 그런 상태에 놓일 거예요. 그러니까, 에리쨩을 도와주세요.”

그 말을 끝내고 리카는 숙소를 올라갔다.

성필은 리카가 남긴 말을 곰곰이 되새겨보았다.

‘그렇겠네. 아니, 분명 그럴 거야.’

옛날에, 성필은 리카에게 이런 설명을 한 적이 있었다.

엔터 업계에선 아이돌이 혼자 뭘 해보겠다고 하면 ‘대가리가 굵어졌다’고 표현한다고.

그리고 그 ‘대가리 굵어짐’의 치료제는 명백하다. 진짜 아이돌이 하고 싶은 대로, 눈 딱 감고 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럼 아이돌 멤버는 그룹 성적과 비교했을 때 처참하기 그지없는 솔로 성적을 보곤, 금세 ‘대가리 굵어짐’이 치료된다.

그룹 없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금세 좌절한다.

‘이미 눈이 그룹의 성적에 익숙하니까. 눈높이가 올라가 있는 상태야.’

거기서 무너지면 정말 끝나는 것이고, 그 지점에서 99%가 나가떨어진다.

그 시점에서 계속 나아가는 1%들이 성공을 거머쥘 가능성을 얻어낸다.

‘에리카 씨가 무너질 수도 있다, 라…….’

아이돌인 리카이기에 할 수 있는 우려였다. 아니, 이미 믹스테입을 낸 인디 아티스트이기에 생각할 수 있는 걱정이겠지.

그리고 리카는 그 해결책이 버팀목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프로듀서인 성필이 넘어진 에리카를 다시 일으켜 세워줄 수 있을 거라고.

‘맞는 말이야.’

아이돌은 활동하는 동안 평생 먹을 욕을 전부 먹는다. 매일 매시 매분 매초, 인터넷에 조금만 검색해도 자신을 향한 비난과 쉽게 마주한다.

그럼에도 아이돌이 버틸 수 있는 건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 주변인의 격려와 응원 덕분이다.

얼굴도 안 보이는 이들의 욕보다, 함께 지내는 이들의 칭찬이 더 강력한 건 당연한 일이다.

‘믹스테입 이후가 진짜란 건가…….’

* * *

KS 엔터 수석 프로듀서, 강동현.

그가 정호환에게 소식을 전했다.

정호환은 소식을 듣자마자 손을 벌벌 떨었다. 강동현은 면목 없단 듯 고개를 숙였다.

“다시, 말해주겠나?”

강동현은 입술을 꽉 물었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피가 나올 정도까지.

이 소식에 충격을 받은 건 정호환만이 아니었다. A&R팀 전체가 흔들렸다.

“프, 프로듀싱 파트 전체에서…….”

강동현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폭풍우 치는 밤의 바다처럼 출렁거렸다.

“투표를 통해, 새로운 총괄 프로듀서를 뽑아 추천하라고…….”

강동현은 목이 탔다.

입 안에 남아 있지도 않은 침을 어떻게든 그러모아 꼴깍 삼켰다.

“추천하라고, 했습니다. 저, 정호환 이사님을…… 제외한…… 프로듀서를…….”

“내가, 아, 내가…….”

정호환이 비틀거리자 강동현이 재빨리 그에게로 달려가 부축했다. 그러고도 정호환은 자세가 무너져, 책상을 짚으려던 손이 책상 위의 물건들을 전부 쓸어 떨어뜨렸다.

정호환은 양손으로 책상을 짚고서야 겨우 선 자세를 유지했다.

“내가…….”

정호환.

KS 엔터 프로듀싱 총괄.

A&R팀의 수뇌.

회장의 지침에 불응한 죄로.

“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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