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57화 (457/760)

457화

에리카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이건 소녀연맹을 압박하거나 빚을 갚으라고 하는 게 아니란 점을 몇 번이고 강조했다.

그저 에리카 자신의 추측일 뿐이라고 말이다.

[추측이지만, 거의 확실해.]

리카는 벌써부터 에리카에게 믿음이 갔다.

에리카는 머리가 좋다.

인간의 지능을 파악하는 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에리카는 굳이 그런 복잡한 검사를 거치지 않고서도 머리가 좋단 게 눈에 보인다.

무엇이든 놀랄 만큼 빠르게 배우니까.

그 재능은 배움에서 그치지 않고, 상대의 심정을 파악하거나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히 하는 데서도 발휘된다.

‘에리쨩은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머리가 좋아.’

연습생 시절부터 몇 번이나 감탄하곤 했었다.

에리카는 마치 미래라도 보는 것처럼, 모든 사건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조정하는 능력이 있었다.

만인에게 사랑받는단 사실이 그것을 증명했다.

모두의 호감을 산다는 꿈과 같은 목표를, 에리카는 너무나 쉽게 이루곤 했었으니까.

그러니 리카는 에리카의 추측을 가벼이 흘려들을 수 없었다.

“대충…… 예상은 가지만…….”

[박 이사님도 그렇게 생각하실진 모르겠단 거지? 내가 먼저 박 이사님이 부채감을 가지고 있단 걸 깨달았을 때는, ‘뉴아사’ 이야기를 하셨을 때야.]

소녀연맹이 일본 경연 프로그램인 ‘뉴아사’에 출연하여 세이코와 맞붙게 되었을 때, 소녀연맹은 물론 가로 엔터와 한국의 인민이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세이코에게 지기라도 했다간 한일전에서 패배한 축구선수들처럼 온갖 모욕을 받게 될 터였다.

그 충격을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해, 인민이들은 세이코란 가수의 대단함을 알리려고 했었다.

[그땐 고마웠다고 말씀하시더라.]

인민이들의 전략은, 케이어스 에리카가 세이코의 ‘롯폰기의 아방튀르’를 커버함으로써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에리카의 커버 곡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한국에서 세이코란 가수를 알리는 불씨가 됐었다.

예상과 달랐던 점은, 에리카가 세이코를 알린 게 훨씬 더 긍정적으로 작용했단 것이었다.

[덕분에 ‘국뽕연맹’이란 이름도 얻으셨다고.]

“…….”

[별로 듣기 좋은 이름은 아니지? 미안.]

“이에(아니)…….”

[거기서부터였어. 박 이사님이 날 돕기로 한 이유를 눈치챈 건.]

듣자 하니, 왠지 모르게 성필은 자꾸만 에리카에게 미안한 티를 냈다고 한다.

마치 큰 빚을 지거나,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말이다.

에리카는 처음엔 자신과 성필의 관계가 어색하여 그런 거라고 여겼었으나, 점점 더 아니란 확신이 들었다.

[박 이사님은 정말 빚을 졌다고 생각하시는 거야.]

“…….”

[여기까지 말했으면 리카 너도 떠오르는 게 여러 가지 있겠지. 다시 말하지만, 이 이야긴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니야. 네가 박 이사님의 마음을 이해하길 바라서. 그래서 너와 박 이사님의 사이가 조금이나마 개선되길 바라서…….]

“알아. 독촉이나 압박 같은 게 아니잖아.”

[좋아. 그럼 먼저…….]

아이돌 육상 금메달.

신아름은 이어달리기 도중 김민주와 승부하며, 막판에 증오 가득한 외침으로 김민주를 불렀었다.

현장에서 듣던 모든 이가 기겁할 정도였었다.

만약 그 장면이 방송을 타면, 신아름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누구든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왜 민주가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름 씨를 부축해서 친구인 것처럼 보이게 했잖아. 덕분…… 아니, 덕분이란 말은 안 쓸게. 그 때문에 둘이 친구 사이인 걸로 돼서, 아름 씨의 외침은 친구 간의 경쟁심이란 걸로 포장됐고.]

이후에도 김민주는 신아름과 아이튜브 예능을 함께 찍어서, 두 사람이 친구 사이란 포장을 완성했다.

[그리고 ‘음악세상’ 박재환 PD님과의 갈등도 있었지. 민주가 남홍범 이사님께 부탁드려서 없던 일로 만들었어.]

리카도 그때를 기억했다.

김민주와 신아름이 함께 했던 특별 무대. 그게 다 끝나고, 신아름은 ‘내가 다 망쳤다’면서 울적했었지.

소녀연맹은 음방 하나를 영원히 출연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혹은, 그 음방이 있는 방송국 모든 예능에 출연치 못했을 수도 있고.

그 위기는 김민주가 남홍범에게 한 부탁으로 모두 무마되었었다.

[진저는 가로 엔터 신입 사원 채용 홍보 영상에 출연했어. 그때, 당연하지만 매니지먼트 팀장님이 안 된다고 하셨거든.]

에리카의 말마따나, 정말 당연한 것이다.

당연히 안 된다.

케이어스 멤버가 어째서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작은 회사의 홍보용 영상에 출연한단 건가?

[진저가 이사님께 직접 부탁드려서 출연을 허락받았어. 그건 박 이사님의 부탁이었지만, 동시에 가로 엔터의 부탁이기도 했었지.]

진저는 순수한 호의로, 이사에게 부탁까지 해가면서 영상에 출연한 것이다.

[그리고, 리카.]

“…….”

리카는 에리카가 무어라 말할지 벌써 예상이 갔다.

에리카가 소녀연맹의 프로듀서, 성필에게 도움을 받았다. 그 때문에 리카가 화냈었다.

그런데, 리카도 케이어스의 프로듀서인 정호환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네가 주인공인 자체 예능이 있었지. 자정의 인터뷰. 거기 시즌2의 첫 번째 인터뷰이로 정호환 이사님이 출연해주셨어. 정호환 이사님은 미디어 출연을 극히 꺼리시지만, 받아들이셨어. 정호환 이사님이 어째서 그러셨는지는 모르지만……, 이사님을 모시는 데 적당한 대가가 주어졌을 거라곤 생각할 수 없겠지.]

다키스트, 븨이에스, 케이어스, 그 외 수많은 KS 엔터 아이돌을 프로듀싱했던 전설적인 작곡가.

정호환의 미디어 출연은 엔터 업계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었다.

그런 정호환을 부르는 것에, 리카가 지불한 대가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게다가 리카가 얻은 건 단순히 정호환의 출연으로 인한 영상 조회 수만이 아니었다.

‘작곡가로서의 마음가짐.’

그가 한 몇 마디, 고작 몇 마디.

그 고작 몇 마디가 리카가 넘지 못했던 벽을 넘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로써 만들었던 곡은 소녀연맹의 일본 앨범에 수록되어, 리카가 본격적인 작곡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이야기까지 나오자, 리카는 미세하게 떨리는 왼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계속 말해서 지겹겠지만.]

에리카가 가볍게 말했다.

현재의 리카에겐 무겁기 그지없는 말을.

[대가를 바란 게 아니야. 나도 그렇고, 모두 스스로가 좋아서, 그러길 바라서 한 일들일 뿐이야. 자그마한 호의에 불과해.]

작은 호의…… 가 아니었다.

적어도 받고도 입을 싹 닦을 만한 게 아니다.

소녀연맹이 걸어온 3년의 시간. 그 길의 곳곳엔 케이어스가 도와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우리도 너희 덕에 받은 게 많으니까.]

에리카는 케이어스가 소녀연맹에게 준 것을 표현할 때 ‘덕분’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녀연맹에게 받은 게 있다고 말할 땐 너무나도 쉽게 ‘너희 덕분’이라고 표현했다.

이게 에리카가 만인에게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겠지. 그녀는 자신의 장점이나 베푼 것을 지니고 뻗대지 않는다.

이번만을 제외하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호의. 실제로 우린 신경 쓰지 않아. 하지만, 박 이사님은 신경 쓰셨던 거야.]

“…….”

[갚길 바라셨겠지. 바라셨지만, 나한텐 ‘빚을 갚는다’곤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어. 그런 분이셔.]

받은 게 있으면 나중에 되돌려 준다.

호의는 호의로 갚는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호의가 순환한다.

세상은 이런 방식으로 작동해야 한다고, 성필은 그리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서로 간의 배려와 베풂이,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세계.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란 박 이사님 같은 분을 말하는 걸지도 몰라.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야. 박 이사님이 경쟁사 아이돌을 도와준 것에 대한 이유. 어때?]

에리카가 되물었다.

[납득이 가는 이유니?]

가다마다.

에리카가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기 전, ‘심리적 부채’를 언급했던 순간부터 리카는 성필의 심정을 온전히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후회했다.

조금 더 빨리 이 가정을 떠올렸다면, 성필에게 소리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다만 한 가지 화나는 건…….

“왜 그런 걸 혼자 짊어지시려는 건데…….”

[그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분이겠지.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안다. 그런 거 아닐까.]

“그냥 바보잖아…….”

[리카.]

심각했던 에리카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학교에서 ‘도련님’ 배웠잖아.]

“나쓰메 소세키?”

[세상은 거짓말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 같다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바보로 취급한다고. 사회는 그걸 권장한다고. 남을 속이며 위로 올라가는 게 당연하다고. 그렇지만 도련님은 안 그러잖아.]

“……응.”

도련님은, 그러지 않는다.

이럴 거면 차라리 도덕 시간에 ‘거짓말하지 마라’라고 가르치지 말라고 생각하며.

교사의 선서를 읽어보곤 ‘난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라며, 교사가 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인간이다.

[박 이사님은, 그야 물론 너한테 거짓말을 하셨지만. ‘도련님’ 같은 분이야. 그게 주변에선 바보처럼 보일지 몰라도, 나는 그런 박 이사님이 굉장하다고 생각해. 있잖아, 리카.]

“응.”

[난 착한 마음씨를 보고 반한다, 는 말은 안 믿었었는데. 이젠 믿을 수 있을 거 같아.]

“이사님을 사랑해?!”

[내가?]

에리카가 크게 웃었다.

[그럴 일 절대 없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걱정 안 했어.”

[알겠어, 그래. 친구라 이거지? 아무튼, 다시 물을게. 어때?]

리카는 열기 때문에 아지랑이가 끼인 야경을 바라보면서, 뜨거운 숨결과 함께 말했다.

“납득했어.”

[둘은 아직 친구지?]

“친구야.”

[나 때문에 사이가 나빠지진 않는 거지?]

“안 그래.”

[다행이다. 그 말이 듣고 싶었어.]

“할 이야기는 그게 끝?”

[리카.]

에리카가 리카를 불렀다.

그 부름은 맥락이 없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전부 단절하고 새로운 이야기로 들어가려는 것처럼, 에리카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맥락을 끊어냈다.

[넌 나보다 부족하지 않아. 모든 인간은, 다른 인간보다 부족하거나 더 많이 가진 게 아니야. 저마다의 색으로 빛나는 거야.]

그럼, 잘 자.

에리카가 전화를 끊었다.

리카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냈다. 오래도록 붙이고 있어서 액정은 리카의 땀 때문에 번들거렸다.

덥다.

리카는 베란다 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갔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멤버들의 탄식이 동시에 불어왔다.

“아니, 아저씨는 저걸 또 사과하고 있네.”

텔레비전 안에서, 성필은 김하슬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그날 너무 모질게 대해서 미안하다고.

멤버들이 보기엔 업무 연락이라고 했는데도 끈질기게 핸드폰을 보자고 했던 김하슬 쪽이 훨씬 나빴지만.

성필은 자신이 죄인인 것처럼 김하슬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전했다.

“아오, 저……!”

신아름이 또 방언 같은 욕설을 뱉으려 할 때.

“사람이 왜 저렇게 착해빠진 거야.”

리카가 조용히 읊조렸다.

그 읊조림은 작았지만, 모든 멤버가 들었다.

그리고 멤버들은 여느 때의 리카와 확연히 다른 목소리 때문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리, 리카?”

소파에 앉은 백설하가 걱정스레 리카를 불렀다. 그런데도 리카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화면 안, 진심의 사과를 전하는 성필을 바라볼 뿐이었다.

“착해빠졌어…….”

* * *

성필의 앞엔 한구인이 서 있었다.

한구인은 노란 바탕에 보라색 꽃무늬가 가득한 하와이안 셔츠 차림이었다.

성필은 그를 유심히 보다가, 옷의 재질을 확인하려 옷깃을 검지와 엄지로 비벼보았다.

“의외로 재질이 부드럽고 괜찮네요. 덥진 않으세요?”

“예, 괜찮습니다.”

이 하와이안 셔츠는 어바이비와의 콜라보를 통해 탄생시킨 소녀연맹 굿즈였다.

장하양이 ‘아니’ 뮤비에서 입었던 것과 같은 디자인이다.

처음 어바이비가 이 하와이안 셔츠를 공식 굿즈로 내자기에, 성필은 어바이비 디자인팀이 제정신을 잃을 줄 알았다.

‘이런 걸 누가 입어?’

휴양지에서나 분위기를 내려 입을 스타일이 아닌가.

그런데…….

“오케이. 이대로 홍보 사진 찍죠.”

“옷이 마음에 드시는 모양이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너무 튀는 것 같습니다만.”

“홍보 모델은 한 이사님이에요.”

“예?! 제, 제가 말입니까?”

“곧 한국에 열풍이 불겠네요.”

가로 엔터에도 돌풍이 불 것이다.

한구인 모델화, 혹은 배우화 계획이 말이다.

항상 정장 차림의 한구인만 보아서 그런가, 하와이안 셔츠 차림의 한구인은 눈에 띄게 화사했다.

사람들도 패션 카탈로그에서 한구인이 입은 하와이안 셔츠를 본다면 구매하지 않곤 버틸 수 없을 것이다.

“농담이고요. 스읍, 흐음…….”

한구인에겐 잘 어울리지만, 이 셔츠를 굿즈로 내는 건 무리가 있다.

소녀연맹의 모든 것을 소장하고픈 열혈 팬이 아니고서야, 이 셔츠를 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쉽게 소화하지 못할 스타일이니 말이다.

하와이안 셔츠는 빼고, 일반적인 티셔츠 쪽으로 밀어야 하나 생각하던 차.

성필은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한 이사님.”

“배우론 활동 안 할 겁니다. 연기도 배운 적 없습니다.”

“데미안은 왜 마지막에 싱클레어한테 키스한 거예요?”

“어머니의 키스를 싱클레어에게 전해준 겁니다.”

“와.”

성필이 감탄했다.

“바로 답이 나오시네요.”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십니까?”

“둘 다 남자인데, 이상하다고 생각해서요. 어릴 적에 읽었던 거라.”

“우애의 표시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우애(友愛)라.

그러고 보니 리카는 본인을 데미안에, 성필을 싱클레어에 비유했었다.

친구란 점에선 꽤 잘 들어맞는 비유였다.

마지막에 키스하는 건 빼고.

‘리카가 말했었지. 날 악의 구렁텅이에서 구해냈다고.’

실제로 그러할지도 모른다.

만약 이 사무실에, 성필이 에리카를 도왔단 소식이 퍼진다면 그냥은 안 끝날 테니까.

부모에게 비행 사실이 들키는 것과 비슷하겠지.

리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박 이사님을 위선의 구렁텅이에서 구하러 왔어요!”

문이 벌컥 열리며 리카가 등장했다. 자연스레 사무실 직원들의 이목이 그녀에게 쏠렸다.

갑작스러운 동시에, 리카이기에 이해가 갈 만한 돌발 행동이었다. 다들 놀랐지만 당황하진 않았다.

성필이 리카를 조용히 불렀다.

“리카.”

“하이(네)!”

“실례잖아. 문을 쾅 열면 안 되지. 다 집중해서 일하고 있는데.”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야?”

“박 이사님을 위선의 구……!”

성필은 그냥 리카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무슨 이야기인지 감도 안 잡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조용히 일하는 직원들을 방해해선 안 됐다.

“그게 무슨 소…….”

“응접실로 가요!”

“뭐야. 중요한 얘기야?”

리카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중요한 일이라고 하니, 성필은 순순히 리카를 따라나섰다.

응접실에서 둘은 마주 보며 소파에 앉았다.

“날 위선의 구렁텅이에서 구하겠다고?”

“네!”

“전엔 악의 구렁텅이에서 구했다면서.”

“네!”

“에리카 씨랑 관련된 일이야?”

“……네!”

리카는 갑자기 눈을 질끈 감더니, 한쪽 뺨을 성필에게 들이댔다.

“때리세요!”

“뭐?”

“분이 풀릴 때까지 때리세요!”

“내가 왜?”

“먼저 사과드릴 게 있어요!”

“그럼 그거부터 말해야지, 다짜고짜 때리라고 하면 내가 뭘 어떡해.”

“아, 그렇네요!”

리카가 눈을 뜨자, 주먹을 치켜올린 성필이 보였다. 리카는 기겁하며 몸을 뒤로 뺐다.

“끼에에엑!”

“뭐야. 네 각오는 겨우 이 정도였어?”

“진짜 때리란 뜻이 아니었어요! 제 각오를 보여주려는 거였다구요!”

“그래서, 또 뭘 잘못했는데.”

“또?! 아타시(저)는 그렇게 자주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요!”

“그럼?”

“박 이사님을 미행한 거요.”

“아, 그거…….”

어이가 없긴 했다.

만약 에리카의 일이 없었다면, 성필은 리카를 호되게 꾸짖었을지도 모른다.

“뭐, 결과론적으론 네가 옳았지. 날 악의 구렁텅이에서 구했잖아. 그러니까…….”

“또.”

리카는 아까 ‘또’란 말에 극렬히 반발했으면서, 자기 입으론 쉽게도 ‘또’란 단어를 꺼냈다.

“친구로서, 친구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거요.”

“응?”

“아타시(저)는 저희가 지음(知音)이라고 생각했어요.”

“지음이?”

“지음 오빠 말구요! 고사성어예요!”

“아, 지음.”

연주하는 악기 소리만 듣고도 그 친구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단 고사(古事)이다.

“이대로면 실버타운에 가서도 행복할 수 없어요! 아타시(저)가 들어놓은 사기업 연금저축이 쓸모없어질 거예요!”

“연금저축 드는 22살은 처음 본다. 아니면 주식 세제 혜택 때문에 들었어?”

“저 진지하니까 진지하게 들어주세요!”

“이 얘기는 그만하자.”

성필이 서글픈 투로 말했다.

“그 얘기는 없던 일이잖아. 없던 일로 하기로 했잖아. 아직도 앙금이 남은 거면…….”

“불리하면 옛날 일 가져와서 욕하는 애인 같은 짓은 안 해요! 정말 잊으려고 했는데요! 그랬는데요오……!”

리카의 얼굴이 물러터진 찐빵처럼 변했다.

울먹이기 직전이란 뜻이다.

“에리쨩한테 들었어요! 이사님이 에리쨩을 도와준 이유요!”

“…….”

성필은 최악의 가정을 떠올렸다.

그는 후회할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초능력이다. 그리고, 이런 능력을 세상에서 자신 혼자만 가지고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혹시 에리카 씨한테 독심술이 있나?’

성필이 회귀했단 사실을 알아냈나? 그래서 죄책감 때문에 도와줬단 걸 눈치챘고?

그게 아니라면, 성필이 에리카를 도와준 이유를 추측한다고 해봤자 ‘케이어스 너무너무 좋아 영원히 함께야’ 정도밖에 없을 텐데?

“이사님은 바보예요!”

그러곤, 리카가 사건의 전말을 들려주었다.

듣는 내내 성필은 감탄했다.

‘이거, 내가 들키면 회사에 하려고 했던 변명들인데?’

성필 나름 에리카를 도와주는 이유를 합리적으로 쌓아 올린 것이었다. 그것을, 에리카는 당사자도 아니면서 전부 맞추었다.

“회사 차원에서 케이어스나 KS 엔터에 빚을 갚을 수 없단 건 알아요!”

리카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감정이 쌓이면 쌓일수록 높아지길 반복했다.

“저희 회사는 아직도 너무 작으니까요! KS 엔터가 바라는 걸, 케이어스가 바라는 걸 가지고 있을 수 없어요! 그렇다고 박 이사님이 그걸 전부 맡으실 필요는 없으시잖아요!”

그렇구나.

성필은 리카의 심정을 대강 파악했다.

‘리카 눈에, 나는 한없이 착한 바보로 보인단 거네. 명확한 대가나 부채 청산을 제시하지도 않으면서, 심리적인 죄책감만으로 타인을 도우려는…….’

남이 몰라도 나만 알면 된다. 그런 마음가짐을 지닌 성인(聖人)으로 보는 것이다.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성필은 ‘아니다’ 다음 이어질 말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다.

그가 자조했다.

‘봐. 난 진실이 아니면서도, 형편 좋은 상황이 만들어지면 얼마든지 입을 다물 수 있는 놈이야.’

리카, 네 생각처럼 난 그렇게 착하지 않아.

에리카를 도우려 했던 건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적어도 리카가 걱정했던 것처럼 ‘케이어스 너무너무 좋아 영원히 사랑해’는 아니지만, 결국 성필 개인의 오만한 만족 탓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상황이 잘 풀리겠지만, 리카가 오해하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게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야. 말할 순 없지만, 그래.”

성필이 담담히 고백했다.

리카는 그것마저도 성필의 바보처럼 착한 천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무력감에 가득 차서, 울분 가득한 얼굴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성필은 얼떨떨하여, 그저 반사적으로 그녀와 손바닥을 맞추었다.

“짐의 절반은 제가 받아 갈게요!”

“어?”

“그리고 박 이사님이 숨겨야 할 이유도 없애 드릴게요!”

“응?”

“박 이사님의 심장에 걸린 족쇄를, 제가 조금이나마 덜어드릴 거예요! 친구로서 함께 나아가요! 박 이사님이 괴로워하는 건 못 봐요!”

“……뭘 어쩌려고?”

리카는 머리 끈을 질끈 동여매는 제스처를 취하곤.

“아타시(저), 협력 프로듀서가 됩니다!”

당당히 선언했다.

* * *

김민주가 빌린 연습실.

그 구석 방인 작업실.

에리카는 책상 앞에 앉아 우울한 눈길로 노트북 모니터만 들여다보았다.

“또 까였어?”

김민주가 책상 위에 스포츠 음료를 올려두었다. 에리카는 작게 ‘고맙다’고 말하곤, 김민주를 향해 눈웃음을 보냈다.

“벌써 네 번째야.”

“이렇게 연속으로 보여드려야 해? 정 이사님 아예 마음이 없어 보이시던데.”

“그 마음조차 돌리면 내 승리야.”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프로듀싱팀 자체가 바빠 보인다고.”

“A&R이?”

“무슨 큰일이 있나 봐.”

“큰일…….”

“그니까 걍 시간 좀 지난 뒤에 보여드려. 무슨 숙제냐? 며칠이 멀다 하고 찾아가서 검사받게.”

“…….”

에리카는 노트북 위에 놓인 수첩을 펼쳐보았다. 김민주도 에리카의 어깨에 턱을 걸치며 같이 수첩을 보았다.

“나 봐도 안 덮네? 옛날엔 나 나타나면 화들짝 놀라서 숨기기 바쁘더니.”

“티 났어?”

“나지, 그럼. 우리가 몇 년이나 같이 살았는데.”

“옛날엔 창피했어. 그런데, 박 이사님한테 몇 번 보여드리고, 정 이사님한테 몇 번 까이니까, 별거 아니더라.”

애초에 창작자란 자신의 창작물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니까.

거절당하는 경험조차 에리카를 성장시킨다.

“예산이 500만 원이네. 이걸로 누구 코에 붙여? 아니, 레코딩에서 뮤비 촬영까지 다 할 수는 있어?”

“있어.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

케이어스가 앨범마다 억 단위의 돈을 쏟아붓는 것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에리카에겐 최대한의 자금이다.

“좀 빌려줘?”

“괜찮아. 내 일이니까.”

“음, 그래.”

김민주는 별 미련 없이 에리카에게서 떨어졌다.

“난 간다.”

“잘 가, 민주. 사랑해. 고마워.”

“……무리하진 마.”

에리카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놀란 눈은 곧 애정을 듬뿍 담아 부드럽게 휘었다.

“응.”

다시 조용해진 방 안에서, 에리카는 머리를 쥐어 싸맸다.

고통스럽다.

이게 창작의 고통이구나.

그렇지만 동시에.

‘즐거워.’

창작 자체가 행복하다.

그녀는 기획을 수정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

‘박 이사님이 나에게 해준 건 조언뿐만이 아니야.’

성필은 프로듀서가 보는 시야를 알려주었다.

‘그 시야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다시 해보자.’

그러고 몇 분이 지났다.

에리카가 펜을 놓았다.

그녀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둘이서 하는 데 익숙해져서 그런가. 조금 외롭네. 그래도 해야지. 이제 도와줄 사람은 없어. 나 혼자만의 싸움이야.’

에리카가 다시 집중하려던 찰나,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민주가 돌아왔나 싶어 고개를 돌렸다.

열린 문밖으로 눈을 빼꼼 내미니,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 보였다.

곤란한 표정의 김민주.

그 뒤에 선 두 명의 남녀.

여자 쪽이 튀어나왔다.

“천재 프로듀서 이시카와 리카 님을 고용하는 첫 번째 조건! 믹스테입 크레디트에 아타시(나)의 이름을 에리쨩 바로 다음으로 넣어줄 것! 그리고 두 번째 조건!”

리카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잠시 후, 당차게 선언했다.

“두 번째는 생각 안 했다!”

직후, 김민주의 뒤에서 남자 쪽이 나왔다.

“에리카 씨.”

“박 이사님? 어떻게…….”

“부탁드리려고 왔어요.”

“부탁요?”

“아앗! 부탁이 아니에요! 빚을 지우는 거라구요!”

“리카를 피처링으로 써주실래요?”

“피처링이 아니라 협력 프로듀서예요!”

에리카는 성필과 리카의 만담을 보고 있다가, 포근하게 웃으면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건, 박 이사님의 독단일까요?”

“리카의 아티스트 이미지 브랜딩을 위한, 가로 엔터의 정식적인 요…….”

에리카가 성필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리카는 그것을 보자마자 길길이 날뛰었고, 김민주는 에리카가 미친년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았다.

성필은 에리카의 손에 입이 막혀서, 경악하여 눈을 한계까지 크게 뜨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에리카의 손에선 체리블로섬 향이 났다. 아마 손목에 바른 향수의 향이겠지. 그녀에게 다가가면 은은히 풍기는 것을 보면, 귀 뒤와 목에도 자주 바르는 듯했다.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게 아니니까.

“와타쿠시(저), 에리카가 정식으로 가로 엔터에 요청드릴게요. 리카를 피처링으로 쓸 수 있을까요?”

“아타시(나)는 피처링이 아니야아앗! 빨리 그 손 떼!”

리카가 에리카의 손을 붙잡고 성필의 입에서 떼어냈다. 입이 자유로워지자마자, 성필이 상쾌하게 말했다.

“예, 얼마든지요.”

“피처링이 아니라니까요?!”

“아, 협력 프로듀서로요.”

“이제 와서 끼워팔 듯 말하지 마세요!”

“네, 좋아요. 환영해요.”

“협력 프로듀서가 된 건 아타시(나)인데 왜 이사님한테 인사하는 거얏!”

“리카도 환영해.”

“‘도’?! 주인공은 나인데에!”

그 난장판을 보고 있던 김민주.

그녀는 살짝 우울해졌다.

‘여기 주인은 나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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