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4화
성필은 미행에 면역력이 있다.
전생과 현생을 합친 매니저 경력 덕분이었다.
팬 문화가 충분히 성숙하기 전, 사람들은 아이돌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자 미행하는 것도 서슴지 않곤 했었다.
그것을 자랑스레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리곤, 오늘 누구누구는 뭘 먹었네 뭐네. 그런 사실을 자랑하듯 떠벌리곤 했었다.
아이돌이 있는 건물 앞에 진을 치고 있거나, 자주 가는 식당에 종일 기다리거나, 아예 차를 가져와 아이돌이 탄 밴을 추적하거나.
심지어 아이돌이 자주 주문하던 배달음식점의 배달원을 따라 건물에 침입한 이도 보았었다.
‘저 차, 도로를 바꿔도 계속 나를 따라와.’
단순히 가는 길이 같은 게 아니다.
방향이 같은 것 정도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서울에 차가 얼마나 많은데 성필과 동선이 겹치는 차가 한 대도 없을까.
하지만 성필의 차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건 명백히 수상하다.
‘일부러 옆으로 빠져볼까. 그럼 진짜 확실해질 텐데.’
성필은 초조함이 들어 핸들을 검지로 톡톡 치길 반복했다.
전생에서 그룹의 매니저를 맡았을 적, 그들이 탄 밴을 쫓아오는 이가 있단 것을 깨달았을 때.
뒤에 탄 아이돌들이 두려워하던 게 떠올랐다.
그럴 때면 성필도 무섭기 그지없었다.
차까지 가지고 와 뒤를 밟는 인간은 대체 어떤 정신 상태일까?
‘잘은 몰라도 제정신은 아니겠지.’
그런데.
‘이상하군.’
성필이 탄 차는 두말할 나위 없이 그의 차다.
소녀연맹 멤버들이 타고 다니는 밴이나, 개인 스케줄을 위해 사용하는 회사 차와는 전혀 다른 기종이다.
‘우리 애들을 스토킹하는 거라면, 내 차를 좇아올 리가 없는데. 우연히 착각한 건가?’
그 순간 성필은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목표는 나?’
충분히 그럴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성필은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에 출연 중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일반인들이 찍은 출연자 도촬 사진들이 커뮤니티를 돌아다닌다.
그중에는 시시한 스포츠, 연예 신문 기자들이 각 잡고 출연자를 쫓아다녀 찍은 사진들도 존재했다.
방송에 출연하기만 할 뿐,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들에게 이런 단어를 써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의 출연자들에겐 파파라치가 붙어도 영 이상하진 않다.
“말도 안 돼…….”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성필은 무심코 속마음을 입 밖으로 뱉어버렸다.
‘그럼 내 사진이 내일 찌라시나 가져다 쓰는 삼류 인터넷 신문 페이지에 올라오는 거야?’
신호가 바뀌었다. 성필이 변속기를 스릴러 영화배우처럼 멋들어지게 조작했다.
‘이게 연예인의 고충, 슬픔.’
성필의 머릿속엔 마이클 잭슨을 다룬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이기에, 마음 놓고 쇼핑 한 번 하는 게 꿈이던 사람.
그는 기어코 백화점을 하루 대절하여 평온한 쇼핑을 즐겼더랬다.
성필은 조금이나마 그의 기분을 이해하게 됐다.
그렇지만.
‘나는 내 일상을 뺏기지 않아. 압도적인 격의 차이를 느끼고 포기하게 만들어주마.’
박성필.
전생과 합쳐 운전 경력 25년 이상.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라.’
그가 액셀을 밟았다.
* * *
성필이 갑자기 한적한 도로로 빠져나갔다.
퇴근 시각의 서울 도로는 정체되어 있는 구간이 정해져 있다.
오랫동안 서울에서 자차가 있는 직장인으로 살아왔다면, 밀리지 않는 구간도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
“음?”
조수석에 타고 있던 리카는 잠시 의문을 보인 후 다시금 추리를 시작했다.
3년 차 아이돌로서, 서울 구석구석 매니저와 함께 돌아다닌 감을 살렸다.
현재 리카의 머릿속엔 서울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성필이 가는 방향이라면…….
‘어디지?’
모르겠다.
“아!”
그때 신준성이 낭패란 듯 신음을 뱉었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바로 앞 모퉁이에서 꼬리를 감추는 성필의 차를 보았기 때문이다.
신준성은 어떻게든 성필의 차를 따라가려 했다. 그리고 마침내 모퉁이를 넘었을 때, 또 바로 앞 모퉁이에서 보일 듯 말 듯 꼬리를 감추는 성필의 차를 발견했다.
신준성의 턱을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들켰어.”
“하이(네)?”
“우리가 쫓아가는 걸 들켰어.”
“손나(그런)!”
“이, 이제 그만하자 리카. 응?”
더는 감당할 자신이 없다.
이러다가 성필이 어느 순간 차를 멈추고 신준성의 차 번호판을 찍기라도 하면 어떡하는가.
혹은, 이미 성필이 신준성의 차를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성필이 가로 엔터 주차장에 나타나는 차들의 주인을 모두 알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적지만 말이다.
“그만하나요?”
“그래야지.”
“못 쫓아갈 거 같아서요?”
“……뭐?”
리카는 예상했단 듯 실망을 가득 담은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미련 없이 신준성에게 예정되어 있던 추가 근무 수당을 내밀었다.
“내려 주세요! 아타시(저)는 택시를 타고서라도 좇아가야겠어요! 그게 아니면…….”
리카가 품에서 추가 근무 수당의 두 배나 되는 돈을 또 꺼냈다.
“이 정도면 동기부여가 되나요!”
신준성이 입술을 꾹 물었다.
“돈 때문이 아니야.”
“하이(네)?”
“이 정도, 아무것도 아니야.”
신준성의 차가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속도로 추격을 시작했다.
그러자 상황이 바뀌었다.
성필과의 거리가 점점 줄어든다. 신준성은 어떻게 한 건지 시야에서 사라졌던 성필의 차를 재주 좋게도 전부 찾아내어 추적했다.
곧 성필을 놓치겠단 리카의 걱정이 무색하게, 오히려 성필과의 거리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동시에 차의 속도도 올라갔고 말이다.
“너무 빠른 거 아닌가요!”
리카는 안전벨트가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적발하게 잡으면서 물었다.
“제한 속도 지키고 있어!”
신준성은 오랜만에 피 끓는 호승심을 느꼈다.
성필의 놀랄 만한 운전실력 때문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성필을 놓칠 뻔하고, 또 따라잡을 때마다 신준성은 말로 표현 못 할 쾌감을 느꼈다.
그의 취미는 카레이싱이다.
‘요즘 일이 바빠서 트랙데이(기업이나 단체가 트랙을 전세 내어 여는 레이싱 이벤트)도 못 갔는데.’
신준성은 평범한 차에 1,000만 원 이상 돈을 부어 튜닝을 마쳐두었다. 20대 직장인 치고는 나름대로 돈을 쏟았다.
그러나 성필을 쫓을 수 있는 건, 신준성의 애마인 ‘블랙 이글’의 성능 덕이 아니었다.
신준성 자체의 능력 덕분이었다.
“곧 따라잡는다.”
“미행이니까 따라잡으면 안 되는데요?!”
세상에서 가장 순간 판단력이 높은 직업은 무엇일까?
1초의 판단으로 캐릭터의 생사가 갈리는 프로게이머?
초를 잘게 나눈 시간 동안 쏟아지는 주먹을 피하거나 막아야 하는 복서?
모두 아니다.
카레이서다.
인간의 뇌는 글을 쓰거나 생각하기 위해 진화한 게 아닌, 운동하기 위해 진화했다.
로봇공학이 아직 인간의 움직임을 자연스레 재현할 수준까지 발달하지 못한 게, 인간의 움직임에 내재한 복잡성과 정교함을 대변한다.
그러나 카레이싱은 운동능력을 위해 진화한 인간의 능력마저도 한없이 넘어선 스포츠다.
카레이서는 기차가 개발되기 전까지 인간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속도, 그 훨씬 너머의 세계에 산다.
뇌가 처리할 수 있는 한계 용량을 매 순간 초월해야만 생명을 보장받을 수 있는 직업…….
“됐다, 다음 코너에서 잡는다!”
“잡으면 안 된다니까요?!”
성필도 한계에 다다른 것일까.
갑자기 그는 저 멀리에서부터 속도를 늦추었다.
신준성은 어깨를 붙잡으며 울상이 되어 말리는 리카를 뿌리치고, 희열에 가득 차서 성필을 추격했다.
그리고.
“보인다.”
마침내 도달했다.
“빈틈의 실!”
[30m 앞 스쿨존입니다. 속도를 줄여주세요.]
“손나(그런)!”
* * *
털털털털.
왠지 모르게, 성필은 그의 차가 내뿜는 엔진음에 피로가 묻어 나오는 것처럼 느꼈다.
차는 피곤함을 억지로 숨기며 꾸역꾸역 주인을 목적지까지 데려왔다.
성필은 근처에 차를 세우고, 애완견을 쓰다듬듯 차의 보닛을 손바닥으로 쓸어 주었다.
“수고했다.”
정말이다.
갑자기 미행하는 차가 거의 박아댈 기세로 좇아오기에, 성필은 대경실색하여 어떻게든 멀어지려고 했었다.
무서워서 눈물도 나올 뻔했다.
그 사실이 부끄럽진 않다.
어떤 강인한 인간이라도, 웬 검은 차가 죽일 기세로 좇아오면 울려고 할 것이다.
모든 도로의 제한 속도를 지켰단 점에서 일반인을 뛰어넘은 신념, 광기가 느껴졌었다.
성필은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진정시킨 후, 목적지의 빌딩을 올랐다.
도착한 곳은 3층.
한쪽의 시야를 차단하는 흐린 무늬가 새겨진 유리문을 열자마자.
“30분 지각이에요.”
에리카가 문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성필은 깜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해요. 차가 많이 막혀서요.”
그랬더니 에리카는 심각하게 굳었던 표정을 풀곤 느슨하게 웃어 보였다.
“대신 오늘 자 보수는 절반만 지급할 거예요.”
보수.
미래에 케이어스가 정산을 받으면, 성필에 대한 자문료로 지급하기로 한 돈을 뜻했다.
“제가 늦으려고 늦은 것도 아닌데 너무하시잖아요.”
“늦은 건 늦은 거예요. 명확한 인과에 이유를 붙이면 한도 끝도 없어요.”
성필이 과장되게 실망한 티를 냈다.
어차피 전부 농담일 테니까.
진짜 에리카가 회당 30만 원에 이르는 자문료를 지급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가요.”
성필과 에리카는 둘에게 주어진 장소로 향했다.
이곳은 김민주가 따로 빌린 연습실이다. 옛날에 신아름이 김민주에게 생일 선물을 줬을 때 온 적이 있었다.
‘생각도 못 했어.’
이곳은 김민주의 공간이나 마찬가지다.
김민주를 제외하면 웬만해선 누구도 오지 않는다. 성필이 제시했던 둘만 있으면 안 된단 조건과, 에리카가 제시했던 타인의 시선이 있어선 안 된단 조건 모두에 들어맞는 곳이다.
드넓은 연습실 중, 에리카와 성필에게 주어진 곳은 탈의실로 쓸 법한 작은 방이었다.
‘여기 안 쓰니까 여기서 해.’
김민주는 그리 말하며 흔쾌히 방을 빌려주었다.
하긴, 김민주 혼자 쓰다시피 하는 공간이니 탈의실이 필요 없겠지.
넓은 연습실 한가운데서 옷을 훌렁훌렁 벗어도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그렇게 에리카는 탈의실을 본인의 작업실로 꾸몄다.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작업실로 들어온 성필은 2만 원도 안 될 법한 투박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불평할 수는 없었다.
에리카가 앉은 건 근처 학교 폐품장에서 주워온 나무 의자였으니까. 에리카 나름 성필에게 배려를 해준 것이었다.
작업실에 있는 건, 에리카가 앉은 의자처럼 낡은 책상 하나가 전부였다.
‘그나마 여길 작업실처럼 보이게 하는 건…….’
벽에 설치한 선반 가득 꽂혀 있는 앨범들이었다. 성필은 가만히 앨범들을 살폈다.
일본 전통 악기 밴드부터 일렉트로닉 DJ까지, 장르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었다.
시대의 스펙트럼도 굉장했다. 정통 재즈 싱어인 프랭크 시나트라부터, 현대의 디바인 비욘세까지.
‘어떻게 이렇게나 취향의 범위가 넓지?’
놀라울 지경이다.
보통 사람들의 음악 취향은 10대에 굳어진다. 웬만해선 바꾸기가 쉽지 않다.
사람들이 나이를 먹고 음원 차트에 오른 곡을 들으면서 ‘이게 뭐냐?’란 반응을 보이는 건, 음악 취향이란 쉽게 바뀌지 않는단 증거였다.
새로움을 받아들이기 가장 힘든 것 중 하나가 바로 음악적 심미성이다. 입에 밴 음식 취향만큼이나.
‘이 정도면…… 그냥 차트에 오른 음악들만 들은 수준이 아니야.’
이만큼 넓은 스펙트럼과 심미성을 알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에리카는 우연히 모든 음악을 즐겁게 들을 수 있는 감각의 소유자로 태어난 게 아니라, 특정 장르의 장점을 알 때까지 듣고 또 듣는 일을 반복했을 터였다.
성필은 며칠 전, 에리카에게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아티스트가 누구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에리카가 시원스레 답했었다.
‘세이코요. 마츠다가 아니라 후나비키. 사실, 지금도 그래요.’
그 답으로 생각하면, 에리카의 취향 자체는 평범한 젊은이일 것이다.
대중음악을 즐기는 일반인 말이다.
그런 그녀가 산교쿠(三曲)에서 재즈 딕시랜드 빅밴드를 거쳐 로큰롤, 일렉트로닉 하우스까지 즐기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했을까.
“뭐 하나 빌려드릴까요?”
성필은 앨범 선반에서 에리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에리카는 성필이 넋 놓고 앨범을 살피는 모습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눈을 빛내며 선반으로 손을 옮겼다.
“어떤 장르 좋아하세요? 아, 여쭐 필요도 없었나요?”
성필이 당연히 팝에 관심이 있으리라 예상한 물음이었다.
“아뇨, 그냥 생각 좀 하느라 보고 있던…….”
그때 성필의 머리에 어느 곡의 이름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When I fall in love’란 곡 아세요? 재즈곡이에요.”
가로 엔터 야유회를 끝내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길, 한구인과 이어폰을 한 쪽씩 끼고 들었던 곡이었다.
그날의 감성과 분위기는 성필의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아직도 살랑이는 봄바람처럼 불어오곤 할 때가 있었다.
한구인과 함께 앉아 같은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었던 기억이 살랑이는 봄바람 같았단 게 아니다.
“‘When I fall in love’요?”
“아세요?”
“네. 유명한 재즈 스탠더드예요.”
“……스탠더드?”
듣자 하니, 일종의 공유곡이라고 한다. 명예의 전당에 등극한 곡이라 봐도 좋고.
재즈 아티스트들이 많이 커버한 곡을 스탠더드 곡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냥 그 곡이 담긴 앨범을 달라고 하시면 마땅히 답을 드릴 수 없어요. 많은 뮤지션들이 커버했으니까요. 그래도 여기 있는 것 중에서 제가 추천드리는 건…….”
에리카는 냇 킹 콜, 카르멘 맥레이, 마일스 데이비스의 앨범을 꺼냈다.
“이 세 앨범에 든 ‘When I fall in love’예요.”
“아는 이름은 마일스 데이비스뿐이네요.”
“좋아하세요?”
“곡은 들어 본 적도 없어요. 이름만 알아요.”
“대중음악 프로듀서시면서, 마일스 데이비스도 안 들어 보셨어요?”
에리카가 짓궂게 물었다.
성필도 겸연쩍게 답했다.
“제 음악 지식은 록부터 시작해서요. 아, 그럼 빌 에반스 건 있나요? 제가 옛날에 들었던 게 그건데.”
“있죠. 저는 별로 안 좋아해요.”
한구인은 좋아하던데.
성필은 그녀에게서 빌 에반스의 앨범을 받았다. 그런데 앨범의 제목이 눈에 익었다.
“포트레이트 인 재즈? 혹시, 븨이에스의 ‘포트레이트 인 유’가 이 앨범에서 영향을 받은 거예요?”
“아마 제목만 그럴걸요. 자주 쓰는 어구도 아니니까, 제목을 거기서 따온 건 확실해요.”
“그렇구나…….”
성필은 앨범 커버를 장식한 빌 에반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60년대 뉴욕의 말끔한 회사원처럼 생겼다.
이런 사람이 그렇게 로맨틱한 곡을 연주한 건가.
“들어 보실래요?”
“네? 아니…….”
오늘 둘에게 주어진 시간은 30분도 안 남았다. 안 그래도 해야 할 이야기가 많은데, 음악을 듣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건…….
“박 이사님 기억에 남을 만한 곡이면, 저한테 영감을 줄지도 모르잖아요.”
“들어 보신 거 아니에요?”
“들어 봤죠. 한…….”
두세 번 정도일까?
“스무 번?”
“엄청 자주 들으셨잖아요. 안 좋아하신단 거 거짓말이죠? 너무 많이 들어서 질리셨다거나.”
“재즈 역사의 기념비라잖아요. 뭐가 대단한지 알아야죠.”
에리카는 성필이 말릴 새도 없이 일어나, 열린 작업실의 문을 넘어 연습실 구석에 놓인 CD 플레이어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 성필을 향해 오란 듯이 손짓했다.
결국, 성필도 그녀의 곁에 다가가 앉을 수밖에 없었다.
에리카가 앨범을 넣자 곡이 재생됐다.
“제가 들었던 ‘When I fall in love’랑 다르네요. 역시 재즈는 즉흥이라 그런가, 들을 때마다 다르네요.”
“다른 곡이니까 다르게 들리죠. ‘When I fall in love’는 4번 트랙이에요.”
“…….”
그나저나, 정호환이 영감을 받은 앨범이라.
“부끄러우신 거예요? 귀 붉어지셨다.”
비록 제목뿐일지라도 나중에 전부 들어봐야겠다.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죠.”
과거, 정호환은 케이어스가 보여 줄, 그리고 보여 주는 창조성은 꾸며낸 거라고 했었다.
“너무 창피해하지 마세요.”
하지만 이젠 상황이 바뀌었다.
상황이 어떻게 흐를지 모르지만, 정호환은 어느 순간 갑자기 마음을 바꾼다.
언젠가 케이어스 멤버들이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줄 것이다.
자기 자신이 생각했기에, 만들었기에, 자기 자신이 남들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무언가.
성필이 전생의 그에게 감명받아 좇아가고자 노력했던 이상향에, 정호환은 도달할지도 모른다.
“알겠어요. 제가 다 잊을게요.”
“정말이죠? 오케이.”
성필이 슬레이트를 내리듯 양 손바닥을 짝 소리 나게 겹쳤다.
그걸 보자 에리카는 어이없어하면서도 풋풋한 웃음을 보였다.
“네, 벌써 잊었어요. 그럼 뒤로 돌릴게요.”
‘When I fall in love’가 시작됐다.
역시나, 곡을 듣자마자 그날의 기억이 살아난다. 야유회 때의 추억이 망각의 안개를 걷어내고, 피부에 닿던 바람의 감촉 하나하나까지 들춰낸다.
음악 곳곳에 껴 있는 치지직 소리는 과거 녹음 기술의 한계를 느끼게 하지만, 오히려 그게 향수를 자극하는 면이 있었다.
이게 60년 전 사람들이 들었던 대중음악.
‘그때 사람들은 이 곡이 발매되고 어떤 감상을 품었을까.’
현대인들처럼 인터넷에 감상평을 올릴 순 없겠지만, 카페나 바 같은 데 모여 삼삼오오 곡에 대해 떠들었겠지.
이 곡은 좋네, 별로네, 괜찮네 등등.
성필은 모래로 뒤덮인 무덤을 파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모래를 한 알씩 걷어내어 과거의 단면을 보는 듯이, 설레면서도 씁쓸하다.
언젠가 자신의 세대도 이처럼 모래에 묻히겠구나 생각하면서.
“When I fall in love.”
갑자기 에리카가 노래를 불렀다.
성필이 놀라서 옆을 보니, 그녀가 헤실거리며 웃었다.
“원래 가사가 있어요.”
그러더니, 그녀는 빌 에반스 트리오의 연주에 맞춰 노래를 이어갔다. 완전히 멜로디와 들어맞진 않지만, 분위기에 어울리는 노래를.
When I fall in love(내가 사랑에 빠질 때).
It will be forever(그건 영원할 거예요).
Or I’ll never fall in love(아니라면 난 영원히 사랑에 빠지지 않겠어요).
에리카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함께 곡은 끝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악기의 소리가 멈추고, 치지직 소리를 마지막으로 끝을 고했다.
“아.”
에리카는 여운에 잠긴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이 앨범 안 좋다고 한 거 취소해야겠어요. 좋네요.”
“그래요?”
“아마 같이 듣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가 봐요.”
성필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곤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서 메모했다.
“뭐 하세요?”
“메모요. 방금 에리카 씨가 하신 말씀.”
“네? 왜, 왜요?”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에서 써먹으려고요.”
“써먹다니…….”
에리카가 어처구니없단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연애 스킬들을 갈고 닦으신 거예요?”
“사람의 마음에 감명을 주는 방법을 갈고 닦는 거죠.”
다음으로 신나는 분위기의 곡이 흘러나왔다.
둘이 슬슬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려 할 때.
“아주 살림을 차렸구나.”
뒤에서 김민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필은 깜짝 놀라 일어나서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민주 씨! 그, 남의 집에 와서 너무 격의 없이 있었죠?”
“아뇨. 이사님한테…… 아니, 박 이사님한테 뭐라고 한 게 아니라요.”
김민주는 방금 말린 단발을 다시 손으로 한 번 털어냈다.
“점점 여기 에리카 쟤 물건이 늘어나요. 저 CD 플레이어도 그렇고요.”
“고마워 민주야, 사랑해.”
“박 이사님은 편히 있다가 가세요.”
김민주는 에리카의 ‘사랑해’를 무시하곤 연습실을 나갔다.
그제야 성필은 에리카를 보고 탓하듯이 말했다.
“민주 씨가 계셨어요?”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세면장에 계셨던 거예요?”
“네. 연습 끝내고 샤워하고 있었어요.”
“샤…… 아, 네에…….”
“샤, 뭐요? 뭘 생각하셨어요?”
“…….”
“알겠어요, 방금 그거도 잊을게요.”
에리카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리카 씨, 케이어스는 스케줄 없나요?”
“요즘은요.”
아무리 앨범 활동이 끝났다 하더라도, 이렇게나 케이어스에게 자유가 주어질 수가 있나?
“회사가 많이 바쁜 거 같아요.”
바쁘다, 라…….
아무리 그래도 케이어스를 매니지먼트할 여력까지 없을 린 없는데. 케이어스를 관리하느라 다른 부서가 소홀해진다면 모를까.
다시 작업실로 가는 길, 성필은 시계를 보곤 시간이 촉박하단 것을 깨달았다.
아직 작업실엔 도착하지도 않았지만 바로 본론을 꺼냈다.
“정호환 이사님은 뭐라고 하셨어요?”
에리카가 고개를 저었다.
성필이 답답함에 한숨을 쉬었다.
“벌써 세 번째네요.”
정호환은 세 번이나 에리카의 청을 거절했다.
첫 번째는 에리카가 기획했던 초안이었지만, 두세 번째는 성필의 도움을 받은 안들이었다.
그것마저 거절당했다.
‘믹스테입인데 너무 기준이 깐깐한 거 아닌가.’
에리카의 작업물들은 믹스테입에 처음 도전하는 이치고는 꽤 짜임새가 있었다.
성필이 도와주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벌써 세 번째 거절이다.
성필은 우울해지려 했다.
‘역시…….’
에리카의 곡을 전생의 방향으로 이끄는 수밖에 없나. 그런데 그게 잘될지는 의문이다.
‘지금까지도 언뜻언뜻 에리카 씨를 이끌려고 해봤지만, 제대로 되지가 않아.’
일단 곡이 전생의 형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크게 빗나가고 있다.
곡이 바뀌니, 그에 수반되는 의상이나 뮤비 스토리보드도 바뀔 수밖에 없다.
점점 더 전생과는 멀어진다.
성필이 아예 전권을 잡으면 몰라도…….
“제가 부족한 거겠죠.”
갑자기 에리카가 말했다. 성필이 입을 닫자, 그가 실망한 거라고 생각하여 위로해주려는 것이었다.
혹여나 성필이 지칠까 봐. 프로듀서인 자신이 도왔는데도 정호환의 성에 차지 못한다면, 자존심에 타격을 받을까 봐.
에리카는 자신을 깎아 성필을 위로했다.
“더 잘해볼게요. 결국은 저한테 달렸잖아요.”
성필은 그런 에리카의 심중을 단번에 파악했다. 그렇지만 뭐라 돌려줄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저 미소만 띠었다.
그때였다.
연습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민주가 뭔가 두고 간 걸까?
“아앗!”
그리고 들려온 소리는, 이곳에서 절대로 들려선 안 될 목소리였다.
성필과 에리카가 기겁하며 문 쪽을 보았다.
아연한 얼굴의 김민주. 그리고 그 뒤에서 한 여자가 김민주 앞으로 튀어나왔다.
“역시나 외도(外道)였어요!”
리카가 도끼눈을 뜨며 성필에게 삿대질했다.
“바람이얏!”
그리고 성필.
성필은…….
“…….”
진짜 외도하다 걸린 남편처럼, 그만 넋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