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화
붙지 마.
그것은 명백한 경고였다.
해석해보자면 성필에게 달라붙지 말란 뜻이겠지.
리카는 뽀뽀 대신 그 속삭임만을 남기고 에리카에게서 떨어졌다.
속삭일 때의 표정은 보지 못했지만, 에리카에게서 떨어진 리카는 싱글싱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야?’
에리카의 심장 밑바닥에서부터 불길이 올라온다. 감히 리카 주제에, 자신에게 이렇게나 불손한 태도를…….
‘뭐야 뭐야 뭐야!’
……같은 건 아니었다.
에리카는 방금 리카의 행동에 그야말로 치여버렸다. 만약 리카가 드라마나 만화 캐릭터였다면 당장 덕질을 시작했을 정도로, 치여버렸다.
‘지키려는 거야?’
내가 박 이사님한테 접근하지 못하게?
마치 주인에게 다른 개가 못 달려들게 막으려는 꼴이 아닌가.
‘사람이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거야? 리카 너 사람이 아니라 개 아니야? 어떻게 이렇게 귀여워?’
에리카는 웃음 때문에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고정시켜두었다. 그럼에도 입가가 바들바들 떨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리카는 그것을 굴욕의 표현이라고 받아들였는지, 에리카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성필의 곁으로 돌아갔다.
성필 곁에서 의기양양 가슴을 펴는 게, 마치 개선가를 외치는 장군 같았다.
‘그런데, 뭐지?’
성필과 리카는 헤어진 게 아니었나?
둘이 사귀는 사이라면, 리카가 특이 취향을 가지지 않는 이상 연애 예능 출연을 허가해 줄 리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에서 보이는 성필과 김하슬의 모습은 꿀이 떨어지다 못해 두 사람 자체가 꿀이 되어버렸으니까.
‘내가 리카였으면 당장 김하슬한테 찾아가서 으름장을 놓았을 거야.’
그럼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리카는 아직 박 이사님을 놓지 않았다.’
그렇다, 그런 거군, 그렇군…….
비록 자신의 소유는 아니지만, 근처에 다른 이들이 꼬이는 건 못 봐주겠다. 리카는 그런 마음가짐일 게 분명하다.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 출연은 리카로서도 막을 수 없던 불가항력 같은 것이었을 테고.
그렇다면…….
‘더 보고 싶어.’
에리카는 반대쪽 좌석을 손짓했다.
“아직…….”
성필이 에리카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주문 안 했죠? 갑자기 리카도 같이 데려와서 죄송해요. 얘가 에리카 씨 보고 싶다고 계속 성화여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에리카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여기 예약제 식당이에요. 메뉴도요. 코스로 나와요. 아, 베이징 덕 좋아하세요?”
“없어서 못 먹죠. 코스면 1인 추가할 수 있을까요? 얼마죠?”
“인당 50,000원이요.”
“흐엑, 비싸라. 베이징 덕은 예약이고, 코스는 예약 아니죠? 벨이…….”
성필이 두리번거리며 벨을 찾으려던 때.
“박 이사님.”
에리카가 말했다.
“말씀대로 리카가 갑자기 찾아온 건 조금 그러네요.”
“……네?”
성필이 당황을 표하자, 에리카는 그를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리카에게로 날카롭게 시선을 돌렸다.
“저희 둘이서 한 약속이잖아요. 외부인이 들어오는 건 좀…….”
축객령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미소로 범벅이 되어 있던 리카의 표정이 서늘하게도 굳어갔다.
‘리카, 보여줄래?’
에리카의 눈가엔 온기가 번졌다.
리카는 입가엔 미소를 짓고, 반대로 눈가는 굳어선 에리카를 응시했다.
리카가 생각했다.
‘이젠, 오해하고 말 것도 없네. 확실해.’
그렇게, 오해에서 비롯된 두 사람의 싸움이 시작됐다.
* * *
성필은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리카, 왜 왔어?”
“에리쨩 보고 싶어서!”
“그래? 그럼 나중이어도 됐을 텐데.”
로 시작했던 이야기는, 코스 요리가 추가될 때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듯 상승을 반복했다.
처음엔 간단한 인사로 시작했던 대화가, 현재 이르러선 이렇게 변했다.
“에리쨩, 포기해.”
약 한 시간에 이른, 서로의 본심을 숨긴 암투가 이어지다 마침내 리카가 직격탄을 날렸다.
에리카의 말이 잠시 끊겼다.
그동안, 성필은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어어, 그래, 리카 말이 맞네. 확실하네 진짜.’
에리카는 자신을 사랑한다.
이렇게나 티를 내는 데 모를 수가 없다.
에리카가 어떻게든 성필과 대화를 이어가고 모종의 시그널을 보내려고 하면, 리카가 순식간에 달려들어 맥락을 끊어놓았다.
이어서 두 사람은 뼈가 담긴 말을 여러 번 주고받는다. 그런 상황이 계속 이어지니, 성필도 모를 수가 없었다.
젓가락의 쥔 그의 손이 벌벌 떨렸다.
‘나, 나 혹시 연예인한테 잘 먹히는 그런 아우라가 있나?’
바보 같은 생각이다.
우연과 행운이 겹쳐 우연히 발생한 일이겠지. 지금은 그런 자만감에 빠져있기보다, 현재를 직시해야만 한다.
“포기?”
에리카가 반문했다.
“뭘?”
“이제 그만 숨기자 에리쨩. 박 이사님 말하는 거야.”
“왜?”
“또 말해줘야 해?”
성필은 에리카가 감탄스러웠다.
리카의 말투는 듣는 이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런데도 에리카는 시종일관 만족감이 짙게 배어 나오는 미소를 유지했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표면이 단단하지?’
면전에서 쌍욕을 먹어도 깨지지 않을 만한 멘탈이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
“…….”
리카는 에리카의 눈동자 속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도저히 깊이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리카는 그냥 눈을 돌려버렸다.
“박 이사님!”
어느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리카가 성필에게 요청했다.
“말씀해주세요!”
“나, 나?”
“세이코 선배님 앞에서 하셨던 것처럼요!”
“아, 아…….”
리카는 성필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막 움튼 새싹을 밟아버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성필은 그 말에 따라야만 했다.
그래야만 했다.
“에리카 씨…….”
“네, 박 이사님.”
에리카는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대고, 양 손등으로 턱을 괸 자세였다.
그녀의 손등 위에 자리한 얼굴은 성필과 같은 인간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그 얼굴에 담긴 이목구비는 신이 손수 빚은 것처럼 오밀조밀하고 정교했으며 아름다웠다.
이목구비로 만들어내는 표정엔 아메노우즈메(일본의 신)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동굴에 숨은 태양신 아마테라스를 유혹해서 이끌어낸, 신화적인 미(美)의 재림이었다.
그 에리카를 향해, 성필은 말했다.
“저는…….”
에리카가 턱을 괸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제지하듯이.
그만 말하란 뜻이었다.
봄바람이 불면 자연스레 벚꽃이 펴듯이, 성필의 입은 그녀의 손짓에 따라 자연의 순리대로 다물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리카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으신가요?”
“네?”
“이젠 애인 사이도 아니잖아요.”
“네……?”
“아까부터 리카가 이래라저래라 사인을 보내지만, 솔직히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거든요. 굳이 박 이사님이 리카 말을 들을 필요도 없구요.”
“어…… 네?”
“그러니까…….”
“무슨 소리세요?”
성필이 어벙하게 되물었다.
에리카는 또 그가 본심을 숨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성필의 어벙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보아하니 뭔가가 이상했다.
에리카는 리카를 보았다.
리카의 표정은 아까와 달랐다.
얼음장같이 혈색이 보이지 않던 뺨이 사라지고, 봄의 산천처럼 생기가 가득했다. 뺨이 붉어졌단 소리다.
“리카랑 제가…… 어…… 저희가…….”
성필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에리카는 이건 비밀이 들켜서 하는 부정이 아니다, 란 판단이 곧바로 섰다.
“애인…… 요?”
“…….”
평온한 미소만 감돌던 에리카의 표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리카와는 다른 의미로 뺨이 붉어졌다.
그건 에리카가 느끼기 매우 매우 매우 힘든 감정, 그래서 현재의 그녀가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감정, 하지만 다른 이들이라면 쉽게 명칭할 수 있는 감정.
에리카는 굴욕, 치욕, 수치는 느껴봤어도 이 감정은 처음이었다.
바로, 창피다.
“…….”
“…….”
“…….”
이 무슨…… 굴욕.
치욕.
아아, 이게 오만에서 빚어진 벌이란 거구나.
어째서 오만이 칠대 죄악인가, 이제 알게 됐다.
그러나, 설령 신에게서 선고받은 벌이라 할지라도 피할 틈을 찾는 게 인간.
인간의 위대함은 거대한 존재로부터 반기를 드는 오만함에서 나온다. 그렇기에, 에리카는 저항해보려 한다.
“아하하.”
에리카가 양손을 뻣뻣하게 펼쳤다.
“노, 농담…….”
“…….”
“…….”
“…….”
“저, 에리카 씨 혹시나 해서 여쭈는 건데요. 저와 지금까지 관계를 형성해왔고, 그 관계를 이어 나갔던 데 그 오해가 어느 정도 영향을…….”
“에리쨩 남의 남자를 뺏는 게 인생 목표라거나 그런 거야?”
“…….”
에리카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이건, 이제 죽음으로밖에 명예를 되찾을 수 없겠군.’
안녕히 계세요 박 이사님.
앞으로, 저는 박 이사님의 마음속에서 죽습니다. 모르는 사이로 살아가는 거예요.
박 이사님의 눈물을 보지 못한 건 아직도 속이 쓰리지만, 앞으로 이사님을 보면 수치심 때문에 제가 눈물을 흘릴 거 같네요.
오늘은 제 인생의 오점이 아니라, 수치로 찍힌 방점이 될 겁니다. 그러니 그 구제 불능한 점을, 그냥 오려내어 인생에서 덜어내려 합니다.
“에리쨩 자? 눈 좀 떠봐. 응? 응? 에리쨔아아앙. 푸하핳!”
리카가 테이블을 쾅쾅 두드리면서 웃었다.
“코이츠 오모시로이나아하하핰(이 녀석 재밌네에헤헤헼)!”
“리카, 숙녀답지 못해. 조금 시간을 드리자.”
사쿠라바가(家)의 에리카.
일생일대의 치욕!
* * *
“지금까진 가벼운 유희였어요.”
에리카가 가방에서 헤드폰 케이스를 꺼내며 말했다.
“저희의 대화에 독특한 플레이버를 넣기 위해 제가 준비한 쇼였던 거죠.”
성필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었습니다.”
“에리쨩이.”
“리카!”
성필이 리카의 어깨를 장난으로 찰싹 때렸다. 리카가 아힝 소리를 내면서 움츠러들었다.
“남의 상처에 난 딱지를 떼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아직 딱지도 안 앉았어요…….’
에리카가 헤드폰 케이스를 성필에게 내밀었다.
성필은 안에서 잭과 헤드폰을 꺼내어 연결하고, 잭의 끝 부분을 에리카에게 주었다.
에리카는 잭을 자신의 폰과 연결했다.
“에피타이저는 끝났어요.”
“에에, 맛있었는데 더 주면 안 돼? 아앗 맞다! 에리쨩 스탠드 업 코미디 할 생각 없어? 대성할 거 같아! 아니다, 일본에서 미녀 만담가 컨셉으로 활동하는 거야! 팬 100만 찍을 수 있어 분명!”
“리카아!”
성필이 리카의 정수리를 주먹으로 콩 때렸다. 리카가 아얏 소리를 내면서 배시시 웃었다.
“더 하면 나 화낸다!”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박 이사님. 장난이었으니까요. 리카도 저한테 장난칠 수 있죠. 재밌네요.”
“소오(그래)? 그럼…….”
에리카가 리카를 향해 눈을 번뜩였다.
그러자 리카는 어둠 속에서 짐승을 마주한 것처럼 온몸이 굳었다.
리카는 인간의 영혼에 새겨진 격, 에리카의 눈동자 속에 자리한 어둠을 보았다. 눈빛 한 번으로 인간을 목석처럼 굳게 만드는 힘이었다.
아니면 에리카가 극진 공수도를 배웠기 때문이거나.
“회사 내부 프로듀서님들한테 들려드리면 정 이사님한테까지 올라갈 테니까요. 이왕 들려드리는 거면, 제가 만족하고 ‘이제 됐다’고 판단했을 때 들려드리고 싶어요.”
“저를 베타 테스터로 선택해주셔서 감사해요.”
“베타…… 테스터요?”
“그냥, 외부인 중에서 가장 먼저 들려주셔서 감사하다고요.”
“토모다치(친구)니까요.”
“어, 그거 아직 하는 거예요?”
“친구란 건 진심이에요.”
잠시 침묵.
“물론, 사전적 의미의 친구에선 거리가 좀 멀긴 하죠.”
“에리카 씨의 상처에 소금 뿌리는 걸 수도 있는데요. 에리카 씨는 저를…… 저와 계속해서 관계를 이어 나가는 이유가요…….”
리카와 성필의 좌충우돌 우당탕탕 러브 코미디를 보기 위해서, 가 아니라면 이제 성필과 에리카의 기묘한 관계는 끝나는 것일까?
성필의 걱정에 에리카가 빠르게 답했다.
“제가 처음 박 이사님한테 토모(친구)라고 부른 게 언제인지 기억하시죠?”
“물론이죠. 프랑스…….”
앗, 머리가……!
성필은 환각처럼 나타난 담배 냄새 때문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박 이사님은 특별해요. 저는 특별한 사람을 좋아해요. 설명이 됐으리라고 믿어요.”
담배 입막음 때문이란 뜻이구나.
성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같이 듣고 싶어. 에리쨩, 박 이사님이랑 이어폰 한 쪽씩 끼고 들으면 안 돼?”
“미안, 리카. 일단 박 이사님이 감상하시고 들어봐.”
“에리쨩 왠지 아타시(나)한테 차가워진 거 같아!”
“와타쿠시(내)가?”
둘은 서로를 보고 씩 웃었다.
“그럼, 틀게요.”
에리카가 폰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녀의 눈동자가 곧바로 성필에게 향했다.
성필은 헤드폰이 귀에 밀착하도록 양손으로 헤드폰을 꽉 누르고 있었다.
성필에겐 들리지 않겠지만, 에리카는 리카에게 변명 같은 말을 뱉었다.
“믹스테입을 내려고 해. 내 이름 일곱 글자 내걸고. 아니, 아티스트명은 예명으로 해야겠네. 그럼 내 이름 세 글자를 거는 게 되겠다. 예산은 500만 원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 당연히 사비야. 돈이 쓰일 만한 부분은 레코딩 정도일까. 회사 시설을 빌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왠지 내 사욕 때문에 회사 자원을 쓰는 기분이니 안 내켜. 오직 내 힘만으로 하고 싶어. 아마 돈이 가장 많이 쓰일 곳은 뮤직비디오겠지. 고민하고 있어. 장소며 스태프 등등. 최소한의 인원으로 진행해야 하는데, 섭외부터가 난관이야. 그야, 나 이런 거 해 본 적이 없으니까. 채용 사이트 같은 데 올리면 사람들이 지원하는 걸까? 아니면 회사 같은 데 의뢰하는 걸까? 모르겠어.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혀. 그래서 설하 언니한테 물어보고 싶었던 건데. 아, 박 이사님이 감상 끝내면 여쭤보면 되겠다. 그런데 이런 인디곡…… 이라고 해야 하나. 믹스테입은 박 이사님도 경험이 없으시겠지? 도와주실까? 너무 시간을 뺏고 싶진 않아. 우리 회사엔 믹스테입을 낸 선배님들이 안 계시거든. 검색해보니까 다른 회사엔 몇 분 계시던데. 나중에 방송국에서 만나면, 조금 쑥스럽더라도 여쭤볼까 봐. 그런데 나는…… 박 이사님?”
횡설수설하던 에리카는 이상을 눈치챘다.
헤드폰을 누르는 성필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동공은 전쟁터에서 적을 마주한 병사처럼 한계까지 확장되어 있었다.
그는 곡이 끝날 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정신이 마음속 깊은 어딘가에 매몰되어 있어서 주변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이 곡은…….’
성필은 들은 기억이 있다.
정확하게는, 이 멜로디 라인을 알고 있다.
‘전생에서 에리카 씨가 발표했던 솔로곡이잖아…….’
멜로디 라인이 완벽히 같지는 않다.
하지만, 하이라이트만큼은 소름 돋도록 똑같다.
멜로디를 받쳐주는 트랙, 반주는 전생과 완전히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다르다.
그래도 하이라이트는, 성필이 착각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일치한다.
‘이, 이게 가능해?’
성필이 회귀한 까닭에 케이어스의 방향성마저 바뀌었다. 그런데, 에리카가 만든 곡의 멜로디가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현재에서 미래까지 이어진 직선.
그 직선의 각도를 살짝만 틀어도, 미래의 각도는 현재와 비교할 수 없을 수준으로 벌어진다. 현재를 바꾼다는 건 그런 의미다.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수준으로까지 미래의 궤적이 달라진다는 뜻.
‘그런데 에리카 씨의 솔로곡은 원형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고?’
성필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
‘에리카 씨가 정말 작곡을 하잖아……?’
이 곡은 명실상부, 전생에서 발표되었던 에리카의 솔로곡 ‘에러(Error)’의 프로토타입이다.
‘아냐, 그럴 리 없어. 정 이사님은 분명 케이어스가 드러내는 창조성이 만들어진 거라고 했어. 그러니까, 전생에서 케이어스 멤버들이 보여줬던 아티스트십은 전부 꾸며낸 거…….’
였을 텐데…….
성필은 살짝 떨어뜨렸던 시선을 올려 마주 앉은 인물을 바라보았다.
사쿠라바 에리카.
동시에, 전생의 광경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수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연장.
연말 음악 시상식 무대다.
그 스테이지 위로 에리카가 당당하게 올라간다. 그리고 MC가 선언한다.
[베스트 프로듀서상(賞), 에리카입니다!]
스테이지 위에 오른 에리카는 관객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그녀의 상징과 다름없는 따스한 미소를 보인다.
세상이 분홍빛으로 물드는, 벚꽃이 만개하는 듯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웃음.
그와 함께 에리카가 가볍게 말한다.
무겁기 그지없는, 현세대 최고의 아티스트의 이름을.
[사쿠라바 에리카입니다.]
그 기억까지 떠올린 성필은, 여태껏 자신이 가졌던 어느 관념이 오해란 데까지 생각이 닿았다.
전생에서 케이어스가 보여주었던 창조성이 전부 꾸며진 것이다. 현생에서 정호환과의 대화로 그런 결론을 내렸건만.
‘아니었어.’
어쩌면, 전생의 케이어스가 보여주었던 모습은 꾸며낸 게 아닐 수도 있다.
그녀들은 진정으로 빛나는 창조성을 지니고 세상을 빛냈던 것이다.
그 증거가 성필의 눈앞에 존재했다.
“곡 어땠나요?”
사쿠라바 에리카.
케이어스의 리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