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으면 청소를 하고 싶다. 일에서 회피하고픈 인간의 나약함이 반영된 행위이다.
정호환도 그런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예를 들어 지금이 그러했다.
“음?”
정호환은 작업실 테이블 아래의 박스 더미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몇 년 전의 추억이 담긴 작은 상자를 발견했다.
안에는 케이어스가 만들어지기 전, 연습생들의 사진이나 신상 명세 등이 들어 있었다.
정호환은 사진 몇 개를 꺼내어 살펴보았다.
‘소유는 지금이랑 똑같군.’
연습생을 시작했을 때 이미 성인이었으니, 지금과 같은 모습일 만하다.
‘민주는 옛날보다 근육이 많이 줄었고.’
사진 속의 김민주는 나시를 입고 있었다. 형광등의 빛을 받은 그녀는 어깨와 팔의 근육을 선명히 내보이고 있었다.
케이어스의 팬덤인 유스는 KS 엔터 내부의 운동 시설을 폐쇄하라고 농담 삼아 말하곤 한다.
이러다가 김민주가 다시 육상 선수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진저는 젖살이 빠져서 얼굴이 많이 날카로워졌어.’
진저의 몸 자체는 연습생으로 들어왔을 때 성장을 끝마쳐 있었다. 물론 그때는 성장할 여지가 남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처음 진저가 연습생으로 들어왔을 때, 그녀는 170cm가 넘는 키에 흉부와 둔부는 소년의 것처럼 굴곡이 적었다.
이대로 나이를 먹어가다 보면 여성적 특징이 도드라지리라고 예상했으나, 도드라지기보단 물결처럼 부드럽고 잔잔한 곡선만을 보였다.
진저가 생각하기엔 어떨지 모르겠으나, 신인개발부의 신태웅이 말하기론 무용수로서 축복받은 몸매라고 한다.
‘에리카는…….’
에리카는 보면 볼수록 오묘하다.
예전의 사진도 그러하고, 현재의 모습도 소녀와 숙녀의 형태를 반반씩 간직하고 있다.
때론 소녀처럼 해맑고 순수한 미소를.
때론 숙녀처럼 고혹적이고 야릇한 웃음을.
에리카는 마치 분위기를 버튼 하나로 조절하는 능력이 있는 것만 같았다. 연기자가 되었어도 천의 얼굴이란 호칭이 붙어 대성했을 듯싶다.
정호환은 에리카의 사진을 넘기고 다음 것을 보았다.
“……흐음.”
사진에 보이는 건 리카였다.
그녀는 신인개발팀 직원들에게 생일 케이크를 선물받곤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중이었다.
다른 멤버들보다 확연히 앳된 티가 난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누가 이 사진을 보고 과거의 리카라고 맞출 수나 있겠는가? 그런 의문마저 들었다.
“리카…….”
리카는 두말할 나위 없는 원석이었다. 누군가 깎아주기만을 기다리던 원석.
케이어스가 되었다면 명실상부한 보석으로 거듭났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케이어스가 되지 못했다. 다른 원석들이 더 빛났으므로. 그럼에도 정호환은 리카를 버리길 아까워했다.
만약.
‘구유한이 없었다면…….’
KS 엔터는 데뷔조에서 탈락한 연습생들을 놓아주지 않았었다.
연습생들은 비유하자면 기업의 자원이었다. 몇 년간 수천만, 수억 원을 들여 키워놓았는데 다른 회사로 빼앗기만 아깝지 않은가.
물론 정호환은 그런 비인간적인 비유보다는, 인간적인 비유를 댈 수 있다.
‘놓기 아깝다.’
KS 엔터로 들어오는 연습생들은 수천 대 1, 수만 대 1의 경쟁을 뚫고 입사한 것이다.
하나하나가 보석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수집가가 수집품 하나를 버리길 아까워하듯이, 정호환은 연습생 하나 허투루 놓아주길 바라지 않았었다.
구유한이 없었으면, 리카 또한 연습생 계약이 종료될 때까지 KS 엔터에 붙들려 있었으리라.
구유한의 목소리가 정호환의 귓가를 맴돈다.
‘다음 그룹 데뷔조가 될 수도 있다고요? 아직 어리니까…… 라고요…….’
구유한은 작은 웃음을 뱉었었다. 무례한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어쩌면 비웃음일 수도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돈 얘기로 가지도 않겠습니다. 다만 여쭈고 싶은 건, 그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의 미래를 망치신 겁니까?’
그 말이 치명타였다.
이미 대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었지만, 정호환은 그제야 ‘데뷔조 확정 이후 연습생 방출’이란 결정에 마음 깊이 동의할 수 있었다.
리카를 비롯한 연습생들은 자발적으로 회사를 나가 여기저기로 흩어질 것이었다.
나의 보석, 나만이 가장 아름답게 깎을 수 있는…….
‘리카.’
케이어스 데뷔조가 확정되고 나서 단 한 번, 정호환은 리카와 독대할 기회가 있었다.
리카.
빛나는 원석.
그렇지만 케이어스 데뷔조 네 명에는 미치지 못하는, 그런 원석.
그녀가 미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살짝 칭얼대듯이 말했었다.
‘다섯 명이면 안 되나요!’
정호환은 침묵으로 일관했었다.
대신 질문을 던졌다.
‘나갈 거니?’
리카는 슬픔에 코를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정호환이 말했다.
‘만약이지만, 계속 네가 남길 택한다면, 몇 년 후에는 데뷔할 수 있을지도 몰라. 넌 아직 어리니까.’
그리고 리카가 답했다.
그녀의 모습은 이때까지 정호환이 본 모습과 전혀 달랐다.
동글동글한 찐빵, 이라고 하면 리카가 화내겠지만, 그런 말랑한 이미지의 리카가 아니었다.
그녀의 동공은 얼음으로 조각한 것처럼 수많은 직선이 모인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단단하고도 정교하며, 차가웠다.
‘아직 저를 불러준 곳은 없어요! 나가서도 어떻게 될지도 몰라요! 그래도, 앞으로 몇 년, 사오 년을 이곳에 더 있을 순 없어요.’
리카는 ‘어리광 같지만, 다시 여쭐게요!’라고 말했다.
‘다섯이면 안 되나요!’
정호환이 침묵을 지키자, 리카는 장난이었단 듯 해맑게 웃었다. 아까의 차가운 모습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항상 무섭기만 했던 이사님이었는데, 끝이라고 생각하니 말이 잘 나오네요!’
무서울 게 있나.
월말 평가마다 뒤에 서 있었을 뿐이었는데.
정호환이 애매한 미소를 보이자, 리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리카와의 독대가 끝났다.
아마 리카는 앞으로 몇 주, 혹은 몇 달간 더 KS 엔터에 남아 있을 것이었다.
그러다가 다른 곳에서 캐스팅 제안이 오거나,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굳히면 회사에서 나가겠지.
정호환은 감상에서 빠져나와 스케줄을 확인했다. 그리고 어느 연습실로 향했다.
그 연습실 안에는 케이어스가 될 이들이 모여 있었다.
에리카, 김민주, 진소유.
세 사람이 정호환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그것을 보자, 정호환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전부 사라졌다.
‘난 이 넷을 위해 나머지를 전부 버렸다. 그럴 가치가…….’
있다.
정호환이 고개를 끄덕이던 때, 마지막 멤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순간, 정호환은 똑똑히 들었다.
“리카…….”
라고 작게 말하던 에리카는, 문을 열고 들어온 메이(진저)를 보고 당황했었다. 그 당황은 금세 지워졌지만 말이다.
리카…….
정호환은 그리움 때문에 미처 지우지 못한 그 이름을 가지고, 연습실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겨울이지만 창문을 열었다.
찬 공기를 들이마시니 머릿속을 채우던 열기가 죄다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잘 가라, 리카. 너는 말하지 않았지만,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구나.’
정호환은 눈을 감음으로써, 눈꺼풀에 새겨져 있던 리카와 다른 연습생들의 환영을 지워버렸다.
그때였다.
그에 화답하듯 리카의 환청이 들렸다.
‘에에에에엣?! 키미(당신)!’
창문 밖 저 멀리서 불어오는 듯한 그 환청을 듣고, 정호환은 미소를 띠었다.
어떻게 작별도 이토록 이상한지.
그는 환청과의 작별을 마치고, 뒤로 돌아 케이어스 멤버들을 보았다.
‘환영한다.’
케이어스…….
정호환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리카의 사진을 박스 안에 넣었다.
‘그때 네가 했던 말에, 드디어 답을 돌려줄 수 있게 됐구나.’
아니, 다섯은 안 된다.
“지금의 넷이기에 케이어스고, 내가 그게 최고라고 판단했다.”
티 없이 맑으며 언제까지나 순수함을 간직할 소녀, 리카. 그녀는 케이어스에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리카는 정호환이 상상하던 것 이상의 별이 되었으나, 그럼에도 케이어스에 어울리지 않았다.
똑똑.
누군가 작업실 문을 노크했다.
들어오라고 하자, 수석 프로듀서 강동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사님.”
“무슨 일입니까.”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저…….”
강동현은 우물쭈물 말을 삼켰다.
윤상열을 이어 수석 프로듀서가 된 그는, 윤상열과 정반대의 인간이었다.
강압적이고 모두의 위에 군림하려던 그와 달리, 강동현은 소심한 데다 커뮤니케이션은 물론 명령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수석 프로듀서라는 위치보단, 독립적으로 작업하면서 곡만 보내는 협력 프로듀서가 어울릴 법한 인간이었다.
“프로듀싱 회의에 이사님이 안 계시니…….”
케이어스가 역대급 음반 판매량 달성이 확정되다시피 한 날, 그날의 전략 기획 회의 이후.
정호환은 모든 프로듀싱 회의에 불참하고 있었다.
“그, 회장님 지시 때문에 부담되시는 건 이해하지만요…….”
그날 정호환은 자신이 비판받으리라 예상했다. 그리고 그 비판을 담담히 수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정말 대단하네 정 이사!’
회장은 만족했다.
그에 이어 구유한 이사마저 정호환을 인정했다. 설마 걸그룹으로 이 정도의 수익성을 낼 줄은 상상조차 못 했노라고.
그리고 회의에서 한 사항이 결정됐었다.
‘케이어스의 현재 이미지와 전략을 고수할 것.’
즉, 정호환이 ‘실패했다’고 판단한 전략을 계속해서 이어가란 뜻이었다.
당연히 정호환은 반박했다. 그러나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구유한은 이전에 정호환을 비판했던 것을 전부 잊은 듯, 그를 한껏 추켜올리며 이리 말했었다.
‘판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사님이 바꾸신 겁니다. 역시, 문화의 선도자다우십니다.’
그날부터, 정호환은 모든 프로듀싱 회의에 불참했다.
프로듀싱팀과 수석 프로듀서 강동현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정호환이 없다고 팀이 안 돌아가는 건 아니지만, 그의 판단 없이 계속 작업을 진행하는 건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부담?”
정호환이 반문하자, 강동현은 자신의 말버릇이 안 좋았단 것을 깨달았다.
감히 정호환에게 ‘회장님 지시 때문에 부담되는 건 이해하지만’이라고 말하다니!
“아, 아니…….”
“그래, 회의, 그럼 바로 가지.”
“예? 아, 아아, 예!”
“구유한 이사도 부르게.”
강동현이 움찔했다.
구유한 이사를 부르라고? 어떻게 부르지?
엮일 일이 없는 인간이라 방법도 모르겠다. 경영기획부에 연락해서 불러달라고 하면 되나?
강동현이 쩔쩔매는 것도 모르고, 정호환은 다짐했다.
‘회장님한테 바람을 넣은 게 네놈이겠지.’
판이 바뀌어?
아니.
‘이미 만들어진 판을 빨아먹는 거다.’
케이어스는 그러기 위해 존재하고, 창조된 그룹이 아니다.
‘소비층이 형성됐다고, 기업이 성공 공식대로만 제품을 만들면 고이기 마련이다.’
어느 콘텐츠 업계든 비슷하다.
게임. 만화. 소설. 드라마. 영화.
진정한 성공은 답습이 아니라 도전에서 나온다. 그리고 도전은 기업의 미덕이며, KS 엔터는 그 미덕을 체화한지 오래이다.
언제까지고 승자이자 선도자로 남기 위해.
‘돈놀이하는 인간들 판단대로 성공을 재단했으면, 아이돌은 진즉 망했다.’
정호환은 본인의 신념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 * *
티 없이 맑으며 항상 순수한 채로 남아 있을 것만 같은 소녀, 리카.
그녀의 표정은 현재 더없이 진지했다.
“농…….”
성필은 절로 혀가 굳었다.
몇 번이나 소리를 내려 노력했지만, ‘농’이란 음을 내뱉고 더듬거리기만 할 뿐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목청을 가다듬고 나서야 겨우 그럴듯한 말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농담하지 마 리카.”
“농담 아니에요.”
“말이 돼?”
“에리쨩이 직접 말했어요.”
리카는 말의 끝에 소리를 높이는 버릇이 있다. 한국어 발음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모습의 조각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은 한국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평탄하면서 정확한 어조를 구사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신뢰감을 주었다.
만약 이게 농담이라면, 정말 성필을 속이기로 작정한 게 틀림없었다.
“박 이사님, 이상하다고 생각하신 적 없나요.”
“이상해?”
“에리쨩이 자꾸 박 이사님한테 사적으로 연락하고, 굿즈를 주러 찾아오고, 볼 때마다 ‘예에, 토모다치’라고 말하면서 붙어오는 거요.”
“이상…… 특이하긴 하지.”
“박 이사님한테 바라는 게 있지 않은 이상, 그건 과도하게 꾸며진 모습일 수밖에 없어요.”
성필에게 바라는 것.
그에 대해 짐작 가는 게 있다.
성필은 에리카의 흡연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에리카는 성필이 그 비밀을 발설할까 걱정되어, 성필이 배신하지 못하도록 친분을 가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면 에리카 씨가 너무 음흉한 인간 같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맞아.’
걱정이 과한 타입이라고 생각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
성필은 에리카가 자신에게 순수한 우정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싶다. 하지만 에리카가 성필에게 다가오는 건, 친분으로 입을 막고 싶단 계산도 어느 정도 있을 게 분명하다.
성필은 침을 꼴깍 삼켰다.
‘리카한테 그걸 말할 순 없지.’
리카는 에리카가 성필을 좋아한단 것을 확신하는 듯 보였다. 그 오해를 풀고자 에리카가 흡연자란 사실(금연 중이긴 함)을 발설할 수는 없었다.
“아니, 에리카 씨가 직접 말하셨다고? 그냥 너 놀린 거 아니야?”
“아니에요. 제가 직접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에리쨩이…….”
좋아하면 안 돼?
라고 되물었었다.
성필이 본인의 입을 턱 막았다.
‘에리카 씨가 리카를 놀리고 있다…….’
그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단순히 놀린 거라면, 나중엔 농담이었다면서 오해를 풀어야 해.’
에리카는 그러지 않았다.
‘왜?’
약점을 하나 더 발에 매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왜 굳이 리카가 오해하도록 놔둔 것일까?
‘나를 좋아한다는 게 농담이 아니라서……?’
성필은 문득 일본에서 진소유와 함께 식사했던 것이 떠올랐다.
과하게 친밀감을 보이는 진소유를 보고, 성필은 진소유가 자신을 유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니었지.’
그래, 애초에 그럴 이유가 없다.
앞날이 창창한 20대 아이돌이 늙은 데다 시들기 직전인 남자 박성필을 좋아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내 외모가 객관적으로 뛰어나고(주관적임), 또래에 비해 관리가 잘됐고, 바디 프로필 찍을 만큼 몸이 좋고, 입담이 코미디언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굉장하며, 키케로의 환생이 아닌가 할 정도로 연설에 재능도 있는 데다가, 프로듀싱 능력까지 갖춘 팔방미인이라더라도, 말이 안 돼.’
정말 놀라운 사실이지만, 성필에게도 젊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기에 젊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한다.
젊은 시절엔 외모가 깡패다.
과장 조금 보태서 다 얼굴 보고 사귄다. 얼굴이나 몸이 최고의 스펙이다.
그런데…….
“말이 안 되잖아!”
성필이 부정하기 시작했다.
“에리카 씨가 왜 다 시들고 늙어빠진 나를 좋아한단 건데! 에리카 씨가 마음만 먹으면 미남, 부자, 축구선수도 원하는 대로 꼬실 수 있을 텐데!”
“박 이사님이 생각하는 남자의 최고 스펙이 미남에 부자에 축구선수인가요! 그럼 여자 최고 스펙은 뭔가요!”
흥미가 동했던 리카는 반짝였던 눈빛을 금세 지우고, 다시 본론으로 넘어갔다.
“아타시(저)도 이해가 안 가지만, 아예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에요.”
“납득이 간다고?!”
“자신감을 좀 가지세요! 일단 자신감을 가져야 이야기가 진행돼요!”
“그, 그래. 내가 한 이사님이랑 동급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에리쨩이 아니, 에리카 씨가 날 좋아한다고? 진짜?”
“그렇잖아요. 제가 뭐라고 떠벌릴지도 모르는데, 에리쨩이 그걸 굳이 밝힐 이유가 없어요! 진심이 아니고서야!”
“왜 너한테 그런 말을……?”
“모르겠어요.”
“그럼 농담일 가능성은 여전히…….”
“20대 초반 초미녀 아이돌이 박 이사님을 자꾸 불러내고 연락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
합당한 이유가, 솔직히 없다.
사랑이 아니고서야.
흡연 사실? 성필은 증거도 없다. 아무 데나 떠들어봤자 믿을 사람 하나 없겠지. 그나마 에리카가 심리적 불안감을 가지겠지만, 마음먹자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다.
안 그래도 바쁠 텐데, 굳이 시간을 쪼개서 성필에게 연락하고 만날 이유가…….
“사랑이에요! 사랑밖에 없어요!”
“손나 바카나(그런 바보 같은)……. 나한테도 찾아온 거야? 모테키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고 이성적으로 생각하세요! 처음부터 받아들일 수 없고, 받아들여서도 안 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얘기잖아요!”
“왜!”
“왜?!”
리카가 뒷목을 잡았다.
“벌써 맹약을 잊으신 건가요! 자나 깨나 제 생각이란 말씀은 거짓이었나요!”
“‘제’가 아니라 ‘저희’가 옳지.”
“이상한 데서 이성 찾지 마세요!”
“하지만, 하지만…….”
리카는 충격받았다.
성필이 이렇게나 흔들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쿨하게 ‘저런, 거절해야겠군…….’이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애초에 에리쨩의 고백을 받아들이면 가시밭길밖에 없어요! 에리쨩 주변에 멋진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주변이 다 아이돌이에요! 박 이사님의 심장은 말라비틀어진 사과처럼 성할 날이 없을 거예요!”
“…….”
“왜 고민하나요! 한 번 하면 그만이란 건가요?! 사람을 무슨 트로피 취급하고 있나요 이 짐승!”
“그딴 생각 안 했거든?!”
다만, 성필은 전생의 신아름이 떠올라서 잠시 굳었던 것이었다.
성필과 조아라의 연애 사실이 드러난 후, 신아름은 줄곧 그 관계가 오래 이어지지 못할 거라고 했었다.
일단 조아라는 꽃뱀이며, 12살 차이는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곤 극복이 불가능하며, 관계를 이어 나가 봤자 성필에겐 고통뿐일 거라고.
신아름도 그리 말했었다.
“나도…… 알아…….”
성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받아들일 생각 없어. 케이어스에 대한 내 사랑은, 단 1ml도 에로스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 않으니까…….”
“목소리 떠는 거나 그만두세요!”
“아무튼, 알겠어.”
성필은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다급한 투로 이야기를 마치려 했다.
“그 시계 마하라 디자이너님한테 받은 거 아닌가요! 중요한 일일 때만 차는 건데 오늘 차셨단 건 역시……!”
“아니 그냥 우연히 눈에 들어와서 찬 거야! 진짜 그런 속셈 하나도 없었어! 근데 나 이제 진짜 가 봐야 해. 약속 늦겠어. 리카 네 말은 알겠어, 일단. 그런 분위기로 흐를 거 같으면 바로 차단할게.”
“그런데 에리쨩은 왜 만나는 건가요?”
“곡을 만드셨대. 나보고 들어달라고 하시더라.”
“에.”
에리카가 작곡을?
그럼…….
“캐릭터가 겹치는데요?!”
“뭐?”
“일본인! 초절정 미인! 거기에 작곡까지!”
“음. 음? 음.”
“초절정 미인 부분에서 왜 납득 못 하는 건가요! 아타시(저)는 예쁘다구요!”
리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쩔 수 없네요. 가로 엔터의 평화를 위해 확실히 매듭을 지어야겠어요!”
“어쩌게?”
* * *
성필은 중식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에리카는 성필과 만나기로 한 장소를 중식집으로 정했다.
“거기 룸 있나요? 네에, 그럼 그렇게 예약 부탁드립니다.”
연예인은 친구나 지인과 만날 장소가 마땅치 않다. 그 때문에 프라이빗한 룸이 구비된 식당이나 술집을 선호한다.
에리카도 선배들에게 배운 것이다.
‘좋아. 일단 식사하면서 리카와는 어떻게 된 건지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보자.’
물어보지 않곤 더는 못 견딜 만큼 궁금하다.
그리고…….
‘내 자작곡을 들려드리는 거야.’
어떤 평가가 나올까.
에리카가 듣기엔 환상적이지만, 현역 프로듀서의 의견을 예상하긴 어려웠다.
에리카는 미리 식당으로 가서 성필이 오길 기다렸다. 어느 정도 기다렸을까, 문이 열리면서 성필이 나타났다.
“아, 박 이사님.”
에리카는 밝게 웃으면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먹을 성필에게 내밀었다.
“예에, 토모(친구)…….”
그때였다.
성필의 뒤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누군가가 나타났다.
모자와 마스크를 벗고 정체를 드러낸 그녀는…….
“에리쨩!”
“리카?”
리카가 성필에게 주먹을 내민 에리카에게 달려들어 품에 안겼다. 그리고 뽀뽀하려는 듯 그녀의 뺨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에리카는 살짝 놀랐지만 자연스럽게 뺨을 내밀…….
“붙지 마.”
리카가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