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화
“애니메이션 오프닝이요?”
성필이 난색을 표하자, 히무라는 예상했단 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일본에서는 애니메이션의 파워가 큽니다. 대형 기획사들은 소속 가수의 홍보를 위해, 애니메이션에 투자하면서 소속 가수의 곡을 실어주길 요구하곤 하죠. 일단 애니메이션 수록곡이 되면, 그 곡은 애니메이션 팬에 한해서만큼은 고정 청취층을 보유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말입니다.]
성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서 드라마 OST로 아이돌 그룹의 곡이 쓰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물론, 한국은 일본처럼 제작위원회 시스템으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투자를 빌미로 한 소속 가수 밀어 넣기는 통하지 않는 편이다.
그보다는 기획사 자체가 지닌 방송국과의 커넥션이 관건이다.
“홍보력은 확실하다, 는 소리네요.”
[그렇습니다.]
히무라는 굉장한 확신이 있어 보였다.
가로 엔터가 반드시 받아들여야 한다는 압박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저기.”
하지만 바로 OK 사인을 보낼 수는 없다.
웨벡스는 가로 엔터에게 아주 소중한 협력사이지만, 소녀연맹의 이미지를 해치면서까지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으니까.
“어떤 애니메이션인지 여쭤도 될까요.”
성필은 히무라가 조금 부담스러운 종류의 애니메이션을 가져왔을까 걱정됐다. 성필은 리카 덕에 서브 컬처 지식도 있었기에, 걱정이 꽤 구체적이었다.
‘이세계로 갔더니 엄청 세져서 여자가 대여섯 명씩 달라붙고 뭐 그런 종류…….’
포스터에 남자 한 명 여자 다섯 명이 그려져 있는 그런 애니메이션이라면, 소녀연맹의 이미지에 심대한 타격을 줄 게 틀림없다.
[아직 못 정했습니다.]
히무라가 맥 빠진 대답을 돌려주었다.
성필이 어이없단 표정을 지어 보이자, 그가 미소 지었다.
[최대한 좋은 작품을 고르고 있습니다. 박 이사님이 걱정하시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요.]
“그건 다행인데요. 소녀연맹이 애니 오프닝을 맡는단 건, 그걸 주력으로 컴백해달란 뜻인가요?”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애니메이션 주제곡은 홍보용입니다. 이번 소녀연맹의 컴백 앨범, ‘인트로: 러브’ 일본판 리패키지 앨범의 특별 수록곡으로 넣어주셨으면 합니다.]
“아예 그 노래가 저희 애들 앨범으로 들어오는 건가요? 그럼 애니메이션 팬분들도 저희 애들 앨범을 사겠네요.”
[그건 아닙니다. 애니메이션 판 싱글 앨범이 또 따로 발매됩니다.]
하긴, 억지로 소녀연맹 앨범에 애니메이션 주제곡을 욱여넣으면 끼워 팔기와 다를 게 뭔가.
[소녀연맹분들이 담당할 작품이 정해지면 그때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다.
다시 연락이 온 히무라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정해졌습니다.]
스크린에 떠오른 그의 얼굴이 프레젠테이션 이미지 화면으로 전환되었다.
그곳엔 애니메이션 포스터가 있었다.
“끼아아아악!”
성필이 비명을 질렀다.
우려했던 대로 개방적인 복장의 여자 캐릭터가 떡하니 정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
면식이 있는 작품이었다.
탱크톱에 여기저기 스크래치가 나 있는 청바지.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망토 안에 번쩍이는 권총을 숨기고 있는 여자 캐릭터…….
“시세리?”
성필이 그 이름을 말했다.
[알고 계시는군요. 벌써 한국에도 알려졌다니, 의외입니다.]
만화 ‘웨스턴 불렛’.
알 수밖에 없었다.
리카가 자꾸만 보라고 성화였던 만화이니까. 참고로 한구인은 리카의 성화에 못 이겨 이미 보았다는 모양이다.
“어, 음, 주인공이 여자인데 소년만화고, 엄청 인기인…….”
[정확합니다. 이번에 애니메이션화가 되는데, 이 작품의 오프닝을 맡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인기…… 라고 알고는 있는데요. 어느 정도로 인기가 있나요?”
[최신 권은 초동 판매량 약 20만 권입니다.]
소녀연맹의 앨범과 비슷한 수준이다.
성필이 감을 못 잡고 있자, 히무라는 더 쉽게 예를 들어주었다.
[단행본 10만 이상이면 히트작, 100만 이상이면 유례를 찾기 힘든 대히트작입니다.]
히트작이라. 아마 만화계의 소녀연맹쯤 되는 모양이었다.
히무라가 오늘 연락한 건 이 기쁜 소식을 최대한 빨리 전하기 위해서일 뿐, 본격적인 설득은 추후 전체 회의 때 하겠다고 말했다.
연락을 끊고, 성필은 1층의 가로 엔터 공유 문고로 향했다. 그곳엔 리카가 꽂아둔 ‘웨스턴 불렛’의 1권부터 7권까지가 있었다.
가로 엔터 강력 추천 코너에 꽂혀 있는 것을 보니, 리카가 어지간히 좋아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성필은 1권을 뽑아 들었다.
‘히무라 실장님이 관련 자료를 준비해주시겠지만, 그래도 미리 읽어보는 편이 좋겠지.’
웨벡스와의 협력을 담당하는 매니지먼트팀에게도 ‘웨스턴 불렛’을 읽어보라고 말해둬야겠다.
‘혹여나 소녀연맹의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면 단호하게…….’
그날, 성필의 하루는 그대로 삭제됐다.
* * *
인류가 산업혁명에 도달하지 못한 미래.
그런 세계의 아메리카 대륙.
서부 개척이 시작되기도 전, 미국의 서쪽에서 침략자들이 들이닥친다.
동방의 대제국 송(宋)의 개척민들이었다.
미국은 영국에게서 독립을 이루었던 것처럼 송의 개척민들에게 저항했으나, 그들에게 머스킷 총을 기반으로 한 전술은 통하지 않았다.
‘오행기관(五行器官).’
목(木), 화(火), 금(金), 토(土), 수(水).
다섯 원소를 기반으로 성립하는 신기술.
그것은 인간의 신체를 무쇠로 바꾸고, 근력을 짐승과 맞먹는 수준으로 만들어준다.
미국의 군대는 오행기관을 장착한 송의 무사들에게 처참히 패배했다.
이미 수십 년 전 유럽은 동방에서 밀려오는 송의 군대와 전쟁을 벌이느라 신대륙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유럽과의 연결도 막힌 미국에게 남은 미래란, 송의 속국이 되어 노예처럼 사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송의 반식민지가 되어, 극히 일부만이 처절한 투쟁을 이어나가던 중.
희망이 빛을 발한다.
‘주인공 시세리 콜트.’
오행기관의 등장으로 총기의 발전이 끊어진 세계에서, 그녀의 아버지는 기적과도 같은 발명을 이루어낸다.
양산 가능한 리볼버 권총.
그러나 송의 금군(禁軍)에게 붙잡혀 아버지 콜트는 처참한 죽음을 맞게 되고.
딸인 시세리는 아버지의 유산인 콜트 리볼버 두 자루를 지니고 복수를 다짐한다.
목표는 아메리카에서 송을 몰아내는 것.
두 자루의 권총에 인간성을 간직하고, 초인 무사들과 고독한 전쟁을 벌이는…….
“시세리의 성장과 싸움을 담은 가슴 뛰는 소년만화!”
성필이 숨을 헐떡이며 설명을 마쳤다.
“그 ‘웨스턴 불렛’이 애니메이션으로 나오는데, 너희가 오프닝을 부르는 거야!”
“박 이사님도 보셨네요!”
“이야, 재밌더라.”
“아타시(저)는 철광산 습격전이 제일 좋았어요!”
“눈물바다였지.”
“많은 동료를 잃었지만, 이제 총을 대량 생산할 재료가 모였어요! 드디어 반격 시작이에요!”
“난 시세리가 혼혈인 점도 좋더라. 어머니는 송나라 사람이니까.”
“송과 싸우는 시세리의 고민이 돋보이죠!”
리카와 성필이 화기애애하게 토크를 나누던 중, 백설하가 손을 들었다.
“어, 설하야.”
“저어…… 그 만화가 재밌단 건 아는데요……. 아이돌이, 그러니까, 애니메이션 오프닝을 부른다는 게…….”
요컨대 이미지에 어울릴까 하는 것이었다.
백설하의 생각으론, 만화나 애니메이션은 어린아이들이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서브 컬처 소비자들과 아이돌 팬은 겹치지 않지 않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뭔가 저희가 감당할 범위를 벗어난 느낌…… 아닌가요?”
“아, 그러니까 우리 나와바리를 벗어났단 뜻이지?”
“나, 나와바리…… 라고 하면, 네에…….”
“의외로 애니메이션 주제곡으로 홍보하는 법은 세계에서 많이 쓰여. 팝스타들도 그렇고.”
백설하가 의문을 띄웠다.
팝스타들이 애니메이션 주제곡을 부른다고?
성필은 재빨리 참고 자료를 켰다.
미국의 아동용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이었다. 어느 캐릭터가 콘서트장에서 힘껏 노래를 불렀는데, 그 목소리가…….
“쏘이잖아?!”
백설하가 경악했다.
쏘이는 미국의 팝스타로, 강렬한 자의식과 충격적인 퍼포먼스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한국에선 쏘이의 ‘브란덴부르크 스트리트’가 가창력 시험 곡으로 자주 쓰이곤 하니, 한국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가수였다.
아기자기한 캐릭터가 쏘이의 목소리로 노래를 하니, 백설하는 인지부조화가 올 지경이었다.
“그 외에도…….”
성필은 여러 자료를 보여주었다. 미국만이 아니라 일본, 한국의 예시들이 가득했다.
“어때, 이 정도면 나와바리 침범 아니지?”
“아니죠!”
“……리카는 이거 하고 싶어?”
“하이(네)!”
백설하는 눈을 반짝이는 리카를 보며 어쩔 수 없단 듯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성필은 가장 중요한 것을 말했다.
“이 곡은 너희가 밴드로 연주할 수 있는 것. 그게 조건이야. 일본 음악 프로그램 나가서 퍼포먼스 보여야 해.”
멤버들에게 힘든 조건은 아니었다.
어차피 일본 컴백은 ‘인트로: 러브’의 리패키지 앨범으로 진행된다.
소녀연맹은 일본에서 활동하더라도, 한국에서 지겹게 선보였던 ‘애플 크러쉬’와 ‘우파루파’만 보여주면 된다.
일본 컴백을 위해 밴드 연습을 할 시간은 충분했다.
“박 이사님! 시세리 코스프레 하고 나가도 되나요!”
“하하, 안 돼.”
“즉답?!”
“하고 싶으면 혼자 하고 SNS에 올려.”
“하면 봐주실 건가요!”
성필은 시세리 코스프레를 한 리카를 떠올렸다. 시세리는 차가우면서도 다정다감한 인상이지만, 아무래도 차가움 쪽에 무게가 쏠린다.
귀여운 타입인 리카가 감당하기엔 어려운 캐릭터일 것이다.
“네가?”
성필이 장난으로 무시하듯 말하자, 리카는 승부욕을 불태웠다.
“두고 보세요! 원작자님한테서도 ‘시세리다!’란 말이 나올 정도로 퀄리티 높게 할 테니까요!”
“그래, 적당히 기대할게.”
“많이 기대하세요!”
“그럼.”
성필은 좌중을 둘러보았다.
“이만 해산…….”
“잠깐만요!”
조아라가 성필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저씨, ‘우리들의 프로듀싱’은요?”
“그건 일본 활동하면서 생각하자.”
“빨리 안 정해도 돼요?”
“너희들 아직 앨범 활동도 안 끝났잖아. 그러니까 한국에서 일 끝내고, 행사 조금 돌고, 휴식 가진 뒤에 생각해도 괜찮아. 아니면 아라, 프로듀싱 맡고 싶어서 안달 난 거야?”
조아라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성필은 그런 그녀를 귀엽단 듯 바라보곤, 이번에야말로 말했다.
“그럼, 해산, 하기 전에.”
“뭔데요.”
“너희 콘서트 있어.”
“또요?!”
소녀연맹의 콘서트 투어가 끝난지 고작 반년 남짓 흘렀다. 그런데 또 콘서트가 있다고?
아직 소녀연맹이 추가한 앨범이라곤 백설하가 프로듀싱한 ‘인트로: 러브’가 전부였다.
설마 억지로 곡의 볼륨을 늘려서 감행한다던가…….
‘그럼 스케줄이 엄청 가혹할 텐데.’
백설하가 걱정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자 성필은 단칼에 그녀의 걱정을 지워주었다.
“이번엔 일본 한정 투어야.”
“……일본 한정요?”
“응. 이전 월드 투어에서 일본에선 모든 콘서트 총합 관객수 8,000명이었잖아. 너희들의 인기를 다 담기엔 무리였지.”
일본에서 소녀연맹의 인지도나 인기는, 고작 2,000석 규모 콘서트 네 번으로 충족될 만한 게 아니었다.
“만약 해외 투어 일정이 빡빡하게 짜여 있지만 않았으면 한국처럼 공연을 늘리고 싶었지만, 못 했었지. 다른 나라들도 돌았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이번 기회에, 이전 콘서트 투어로 해소되지 못했던 일본 팬들의 열망을 해결해주려 한다.
리카가 손을 번쩍 들었다.
“투어면 여러 곳에 가는 건가요!”
“그렇지.”
“부도칸이 있으면 좋겠네요!”
“부도칸이라…….”
이번 소녀연맹 일본 컴백이 예상한 성과를 거두기만 한다면…….
‘가능할지도 몰라.’
* * *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 합숙소.
성필과 한구인은 출연자들과 함께 저녁 식사 시간을 가진 후, 숨을 돌릴 겸 해서 합숙소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합숙소를 나오자마자 한숨을 뱉었다.
“진짜 기가 다 빨리네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두 사람은 처음 촬영에 들어가고 나선 기운이 넘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피로도가 진해졌다.
퇴근해도 퇴근한 게 아닌 기분이다.
퇴근한 후의 일상을 만인에게 보인다고 상상하니,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곳에 카메라가 있더군요. 심지어 개인 방 안에도 말입니다.”
“어쩔 수 없죠. 365일 카메라맨이 같이 있을 수가 없으니까요. 그나마 오늘은 데이트 가시는 분이 안 계셔서 카메라맨은 없으시네요.”
“그래도, 재밌긴 합니다.”
한구인이 따스한 미소를 보였다.
성필은 그를 멀거니 쳐다보다가, 별거 아니란 듯 물었다.
“한 이사님은 인터넷 반응 보세요?”
“예, 봅니다.”
“……아무렇지 않으세요?”
한구인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무리 이미지가 좋은 연예인이라도 악플은 피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미지가 좋다 나쁘다 할 것도 없는 일반인이 방송에 나왔으니 오죽하겠는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죠. 그래서 점점 더 이곳이…….”
한구인은 담장 너머 불이 켜진 합숙소를 바라보았다. 멋들어진 이층집, 저택이라고 불러도 될 법한 사이즈의 건물이었다.
“답답하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눈이 뜨이는 거 같더군요.”
“어떤 게요?”
“소녀연맹 멤버분들은 항상 이런 갑갑함 속에서 살아왔구나 해서 말입니다.”
“…….”
성필은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래요?”
“매장에 말입니까?”
“그냥 편의점이요.”
두 남자는 밤거리를 터덜터덜 걸었다.
“박 이사님이 예전에 하셨던 음악사 수업 있잖습니까. 거기서 인상 깊게 보았던 게 있습니다. 마이클 잭슨 다큐멘터리 말입니다.”
“어떤 부분이요?”
“마이클 잭슨이, 백화점을 전세 내어 쇼핑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단순했다.
제발 거리에서 누군가 자신을 알아보지도, 몰려들지도 않고, 조용히 쇼핑할 수 있을 것.
그는 결국 백화점을 전세 내는 방법으로 소원을 이루었더랬다.
물론 온전히 그의 바람을 이룬 건 아니었지만, 그때만큼은 얼굴에 자그마한 평온이 감돌았었다.
“그때 박 이사님이 멤버분들께 말하셨지 않습니까. 평범함을 포기하는 대가로, 멤버분들은 보통 사람이 가질 수 없는 행복을 거머쥐게 될 거라고 말입니다. 저는…… 그래도 연예인으로서 얻는 게 잃는 것보다는 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카메라 앞에서 살아보니 아니죠?”
“예. 오늘은 오면서 어떤 분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셨습니다. 숨이, 막히더군요.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단 사실이…….”
한구인은 깨달았다.
자신은 상상 이상으로 익명성을 바라왔노라고.
적어도 편의점에 들어갔는데 누군가 호들갑을 떨면서 사진 찍어달라고 하는 건, 그가 바라는 일상이 아니었다.
“물론 연예인의, 멤버분들이 지닌 힘은 그런 관심에서 나온단 걸 압니다. 마치 폭풍 안에 들어간 것처럼, 폭풍 안에 있기에 멤버분들은 수십 수백만 명의 이목을 끌 수 있는 거겠죠. 그래도 천지가 뒤집히는 광경을 수년 동안 보고 있자면, 힘드실 수밖에 없을 거 같습니다.”
“그럼 제 계획은 폐기해야겠네요.”
“……계획?”
“한 이사님 배우 데뷔 계획이요.”
“대체 누가 기획한 겁니까?!”
한구인은 질색하면서 성필에게서 떨어졌다.
성필은 크게 웃으면서 농담이란 듯 손을 저었다.
“그래서, 저는 애들한테 더 잘 대해주려고 노력해요. 소녀연맹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싫어하는 사람도 같이 늘어나거든요. 칭찬과 비난이 같이 거세지는 상황 속에선, 사람은 안타깝게도 비난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와요. 그러니까…….”
성필은 그녀들의 곁을 항상 따스하게 채워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녀들이 비난에 꺾이거나 압도당하지 않고, 세상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길 바라면서.
“그렇군요.”
한구인은 뭔가 깨달은 듯 나지막이 말했다.
“저도 더 노력해야겠습니다.”
“아뇨, 한 이사님은 딱 그쯤이 좋아요.”
“예?”
“거기서 더 노력하면 플러팅이 되잖아요.”
“그렇군요. 확실히 현재의 저는 보통이 아니니까요.”
“이 뭔.”
“모테키 한구인입니다.”
둘은 웃으면서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어, 구인이랑 성필……!”
편의점 직원이 성필과 한구인을 알아보았다.
“사진, 사진 좀 찍을 수 있을까요?”
“…….”
“…….”
찍었다.
둘은 해맑게 인사하는 직원을 뒤로하고, 각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 편의점을 나왔다.
“한 이사님.”
“예.”
“가로 엔터가 300억 정도 현금을 쥐려면 얼마나 있어야 할까요.”
한구인이 난색을 표했다.
그는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더니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만약 소녀연맹 여러분이 낼 이익으로만 한정하자면, 해체할 때까지도 불가능할 겁니다.”
300억.
KS 엔터의 2분기 순익을 합쳐도 달성할 수 있을까 말까 한 어마어마한 돈이다.
수많은 아티스트를 보유한 KS 엔터도 6개월, 혹은 9개월간 손가락을 쪽쪽 빨며 모아야 하는 돈.
그것을 소녀연맹만으론 달성할 수는 없다.
“300억이면, 혹시…….”
한구인은 성필이 왜 그 말을 꺼내는지 짐작한 눈치였다. 성필은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그의 예상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석세스 엔터의 최대 주주가 되기 위해 필요한 최소자금이에요.”
거기에 이어, 김태훈을 대표 이사 자리에서 해임하기 위해선 치열한 물밑 작전과 주식 추가 매수가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한구인은 소녀연맹이 해체할 때까지도 300억을 모으지 못 하리라고 예상하고 있다.
가로 엔터가 성장을 완전히 포기하고 자본 축적에만 전념한다면 할 수 있을까? 그래도 힘들 것이다.
애초에 자본을 축적한다는 발상 자체가 바보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럴 바엔 재투자에 쓰는 편이 훨씬 현명하니까.
‘설령 내가 지금부터 배우 매니지먼트에 뛰어든다 해도…….’
기적과 같은 매니지먼트로 톱배우 10명을 탄생시키더라도, 연간 순익 100억 언저리에도 못 간다. 순익 100억은커녕 매출 100억도 힘들다.
아이돌과 마찬가지로, 배우는 기계가 아니니까. 지속적으로 촬영에 투입할 수 없다.
만약 성필이 활동하는 무대가 한국이 아닌 할리우드였다면 이야기가 좀 달랐겠지만, 어쨌거나.
‘남은 시간은 5년, 아니. 이제 4년 반도 안 남았지. 1년, 2년 뒤에 보이그룹을 내놓는다 하더라도 안정적인 수익화에 들어가기까지는 3년……. 소녀연맹처럼 기적을 쓴다고 치면 2년.’
보이그룹의 평균 매출액을 생각하자면, 소녀연맹과 같은 3년 차에 진입했을 땐 그보다 매출이 훨씬 크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이미 글로브는 해체 수순에 돌입할 것이다.
‘소민이랑 한 약속을 못 지키게 돼.’
방법은 두 가지다.
소녀연맹이 최고의 아이돌이 된다.
그리고 그 후속 그룹도 소녀연맹 못지않은 대박을 터뜨린다.
이어서…….
“상장(上場).”
한구인이 말했다.
“박 이사님의 목표를 제한 시간 이내에 이루기 위해선, 상장밖에 답이 없군요.”
“……네.”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기묘함.
그것은 주가, 시가총액이 회사의 매출액이나 순익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단 것이다.
소속 아티스트의 이미지에 따라 나락을 갔다 천국을 갔다를 반복한다.
즉, 가로 엔터가 소녀연맹을 최고의 아이돌로 올리고 후속 그룹도 대박을 터뜨린다면…….
“지분 매각으로 인수 자금을 마련할 수 있어요.”
“인수까진 무리더라도, 충분히 영향력을 발휘해서 대표 이사를 해임, 교체할 수 있는 수준까진 갈 수 있겠죠.”
석세스 엔터가 갑자기 지분 방어를 위해, 여기저기 퍼뜨려 놓았던 지분을 대규모로 사들이지 않는 이상.
가로 엔터는 석세스 엔터의 최대 주주로 군림하는 게 가능하다.
“석세스 엔터는 제 한 몸 가누기도 힘듭니다. 지분 방어까지 할 여유는, 추후 몇 년 동안 없을 겁니다.”
“……상장이라.”
소녀연맹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가로 엔터는 후속 그룹을 만들고 성공시킬 수 있단 역량을 증명해야만 한다.
사람들이 회사에 투자하는 건, 현재 그 회사가 지닌 가치뿐 아니라 지속 가능성과 발전 가능성을 보기 때문이다.
“제한 시간, 4년 남짓.”
성필과 한구인이 합숙소 입구 앞에 섰다.
“저흰 이미 성공의 계단에 올랐어요.”
“그렇습니다.”
“계단 몇 단계 정도는 뛰어서 올라갈 수 있겠죠?”
“제가 지켜본 바대로라면, 가능할 겁니다. 박 이사님은 항상 기적을 쓰셨지 않습니까.”
“한 이사님도 그렇고,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그렇죠.”
진심이다.
현재 가로 엔터에 모인 인원들이라면 가능하다. 이들과 함께 가로 엔터를 천상계로 끌어 올린다.
“박 이사님, 일단 매출 극대화를 위해선 일본 시장이 가장 중요합니다. 리카 씨가 들으면 뭐라고 하시겠지만, 일본은 그야말로 돈이 자라는 밭입니다. 지금보다 일본 활동을 늘리는 것도 고려해주셔야 할 겁니다.”
“그렇죠. 동시에 미국도 노리고요.”
“미, 미국 말입니까?”
한구인은 미국에 진출하려다 숱한 패배를 맛본 여러 아이돌들이 떠올랐다.
“걱정 마세요. 기를 쓰고 진입하려곤 안 할 테니까요. 하고 싶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시장도 아니고요. 하던 대로만 하면 돼요.”
“다행입니다. 그럼…….”
“숙소 앞에서도 일 얘기예요?”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두 남자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보았다.
김하슬이 피곤한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슬아?”
“하슬 씨?”
“방금 퇴근했어요. 아, 피곤해.”
김하슬이 허리를 숙이곤 자신의 발목을 꾹꾹 주물렀다. 성필은 그녀가 하이힐을 신고 있는 것을 보곤 재빨리 길을 비켜주었다.
“빨리 들어가자.”
“드라이브하고 싶은데.”
“응?”
“성필 오빠, 드라이브 시켜줘.”
김하슬이 주머니에서 티켓을 꺼냈다.
그녀가 게임에서 따낸 데이트권이었다.
성필과 한구인이 서로를 보았다. 한구인은 슬쩍 물러나 합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입구 앞엔 두 남녀만 남겨졌다.
김하슬은 피로와 기대감이 절반씩 섞인 웃음을 보였다.
“싫어?”
* * *
합숙소의 저녁.
김하슬은 거실 소파 구석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때 현관에서 성필이 들어왔다.
그는 뒷짐을 진 모습이었는데, 등 뒤로 꽃다발을 숨기고 있었다.
김하슬은 인기척을 느끼곤 어깨 너머로 성필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오빠 왔어?]
[응, 짠.]
성필이 숨겼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김하슬의 눈가에 놀라움이 나타나고, 입가엔 기쁨이 맴돌았다.
[웬 꽃?]
[너 생각나서.]
[고마워.]
김하슬은 꽃다발을 받곤 향기를 맡았다.
[그리고 또, 짠.]
성필은 이번엔 다른 선물을 꺼냈다.
쇼핑백 안에서 드러난 건 유리 꽃병이었다.
김하슬이 웃음을 터뜨렸다.
[꽃이랑 꽃병이랑 세트야?]
[꽃 선물은 받을 땐 좋은데, 막상 처리하기가 힘들잖아. 내가 처리할 거까지 생각해왔지.]
[아주 섬세하셔.]
[섬세해야 아이돌을 키우지.]
둘은 같이 주방으로 향했다.
성필이 꽃병을 씻고, 김하슬이 꽃다발 안에서 꽃을 뽑아내어 가지런히 뿌리 부분을 모았다.
김하슬은 성필이 물을 채워 넣은 꽃병에 꽃을 꽂았다.
[더 생기가 도는 거 같아. 예쁘네.]
김하슬은 반짝이는 눈으로 꽃병에 꽂힌 꽃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옆에서 시선을 느끼곤 그곳을 보았다.
성필이 김하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김하슬을 뚫어져라 보면서.
[응, 예쁘네.]
“미친 거 아니야?!”
에리카가 거의 비명을 질렀다.
“…….”
진저는 불가해한 자연재해를 바라보듯, 할 말을 잃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 여러 감정이 소용돌이쳤지만, 누구도 그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미쳤다 미쳤어.”
김민주는 흥분하면서 에리카의 어깨를 찰싹찰싹 때렸다. 에리카가 극진 공수도 정권 자세를 취하자 그만두었지만 말이다.
“호응해주는데 왜 때리려고 하는데. 너 분조장이냐?”
“내가 미쳤다는 건…….”
김민주처럼 ‘연애세포가 물 먹고 쫙 살아나는 거 같아 미쳤어 증말!’ 같은 뜻이 아니다.
에리카는 진짜 ‘박성필이 미쳤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어떻게 리카 같은 애를 차버리고 저런 아줌마(에리카의 기준)랑?’
에리카로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사태였다. 리카를 차버린 것도 모자라, 대놓고 연애 예능에 나가 저런 꿀 떨어지는 연기나 하고 있다니.
에리카가 이를 갈았다.
‘궁금해 궁금해 궁금해 궁금해서 미치겠어!’
성필과 리카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세컨(에리카의 표현) 백설하는 어떻게 된 거지? 한여름 밤의 유희 상대였을 뿐일까?
차라리 이게 드라마였으면 다음 화를 기다리기라도 하지. 성필과 리카의 사이는 그럴 수도 없었다.
‘이젠 못 참겠어.’
에리카는 결심했다.
‘만나러 가야 해. 만나서 사건의 전말을 전부 들어야겠어.’
가는 김에, 자작곡 평가도 받고 말이다.
에리카가 사랑의 흥분으로 눈동자 속 불꽃을 활활 태우고 있던 때, 진저는 에리카와는 반대로 멍하니 텔레비전만 바라보았다.
“이게 박 이사님이 진심일 때의 모습임미까…….”
진저가 웅얼거렸다.
* * *
“으음.”
리카는 노트북으로 ‘웨스턴 불렛’의 주인공인 시세리 코스프레 복장들을 살폈다.
인터넷에서 파는 건 한눈에 보아도 품질이 조악했다. 천이 죄다 번쩍이고 싼 티가 나는 것이, 입으면 별다른 폼도 나지 않을 듯했다.
“직접 만들어야 하나…….”
하지만 리카는 재봉 경험 따위 없었다.
홀로 고민하던 중, 옆에 앉아 있던 조아라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내가 만들어줘?”
“에, 아라쨩이?”
“너 기억 안 나? 우리 연습생 월평 때 의상도 내가 거의 다 만들었잖아. 나 학원에서 언니들이랑 무대 뛸 때 밤새워서 옷 만들고 그랬어.”
“아라쨩 스고이(대단해)! 하지만 시세리 옷은 난이도가 높아! 찢어지고 헤진 부분의 디테일을 잘 살려야 해!”
“유이 언니한테 부탁하면 되지.”
“……맞다! 가로 엔터엔 진짜배기 패션 디자이너가 있잖아! 아라쨩 이제 필요 없어!”
“죽일까?”
그때 성필이 리카와 조아라의 옆을 자연스럽게 지나갔다.
두 사람은 가로 엔터 1층의 입구 옆 휴게 공간에 있었기에 자연스레 오고 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둘은 지나가는 성필을 물끄러미 보았다.
“아저씨 스톱.”
성필이 멈칫했다.
“쓰읍, 이상한데. 평소였으면 인사라도 했을 텐데, 왜 그냥 가요?”
“뭐가. 난 바빠. 이사라고. 인사 정도야 안 할 수도 있지.”
“뿌뿝! 검문이 있겠습니다!”
리카가 성필의 앞을 막았다.
성필이 난색을 표하며 리카를 지나쳐가려고 했다. 리카는 미식축구 가드에 빙의하여 성필의 앞을 요리조리 막아섰다.
“뭐야. 비켜줘요.”
“어디 가는지 말 안 하면 안 비켜줄 거예요!”
“야 리카, 그냥 보내줘. 보나 마나 케이어스 만나러 가는 거겠지. 아니고서야 우리 무시 안 하지.”
“…….”
성필이 침묵하자 조아라가 늘어졌던 자세를 풀었다.
“아니, 진짜? 진짜요? 만나러 간다고? 누구요? 진저?”
“아라쨩.”
리카가 조아라의 어깨를 짚었다.
“이제 그만하자. 더는 뭐라고 할 단계가 아닌 거 같아. 박 이사님의 친분을 인정해드리자.”
“누가 뭐래? 그냥 묻기만 하잖아.”
“아라쨩 너무 질척거려!”
“그, 에리카 씨 만나러 가.”
“에.”
리카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녀는 잠시 굳어 있다가, 마치 가면을 쓰듯 이마부터 턱까지 손바닥으로 훑었다.
“박 이사님, 잠시만.”
리카가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성필과 조아라가 자기도 모르게 긴장할, 그런 서늘한 목소리였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성필은 리카에게 붙잡혀 건물 구석으로 가고 있었다.
“리카?”
“박 이사님, 이건 꼭 말씀드려야 할 거 같아요. 아니고선, 박 이사님은 계속 당하실 거예요.”
“어?”
“이건 에리쨩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예요.”
리카는 그러고도 몇 초를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입을 뗐다.
“실은, 에리쨩은 박 이사님을…….”
성필의 눈이 점점, 점점 커다랗게 변해갔다.
세상의 모든 경악을 담으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