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47화 (447/760)

446화

여자 출연자들은, 남자 출연자들의 표정이 어색해지는 것과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

그리고 또 남자 출연자들과 다르게, 소녀연맹 멤버들은 의아해했다.

사람들이 웃고 있다. 정확히는, 여자 출연자들이 세상이 떠나가라 웃고 있다. 한구인의 개그를 듣고서…….

“어, 어라?”

리카가 눈을 비볐다.

“아타시(나), 모르는 사이에 이세계로 온 거야?”

매력 어필 시간에 성필이 소녀연맹의 프로듀서란 게 소개되고, 성필과 한구인이 함께 ‘애플 크러쉬’와 ‘우파루파’를 추었다.

이윽고 출연자들끼리 함께 저녁을 먹으며, 앞으로 몇 주간 이어질 합숙 생활을 잘해보자는 뜻으로 건배했다.

그렇게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이 시작됐다.

그리고 하이라이트, 하루가 끝나는 시점의 문자 교환이었다.

“이거 한 사람한테만 보낼 수 있는 거지?”

매일 각 출연자는 단 한 사람에게만 문자를 보낼 수 있다. 이른바 관심을 표하는 기회였다.

이로써 시청자들은 서로의 마음이 누구에게 향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당연하다고 할까, 한구인은 연달아 세 사람에게 문자를 받았다. 당황하면서도 기뻐하는 기색의 한구인이 카메라에 비춰졌다.

“한 이사님 인기 많으시다.”

백설하가 새삼 감탄했다.

소녀연맹 멤버들은 한구인과 너무 오래 보고, 자주 만나서인지 그의 아우라를 쉽게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역시나 처음 보는 사람들은 한구인의 외모에 압도당하는 모양이었다. 어째서인진 모르겠다만 개그가 잘 먹히기도 하고 말이다.

“다른 남자 출연자들이 불쌍해요…….”

“어쩔 수 없지. 연애 시장은 각박하니까.”

백설하가 백전노장처럼 말했지만, 설득력은 없었다.

아무튼 오늘 회차는 한구인이 모든 여자들의 문자를 받음으로써 마무리…….

[음?]

카메라에 샤워를 하고 나온 성필이 비쳤다. 때마침 테이블 위에 올려진 핸드폰이 불빛을 뿜어냈던 것이다.

“아 진짜 팀장님…….”

신아름이 창피해서 얼굴을 가렸다.

성필은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이었는데, 너무 후줄근한 티가 났다. 정말 집에서 입는 옷을 가져온 듯했다.

“신경 좀 쓰지…….”

[어?]

성필의 당황한 목소리.

신아름이 얼굴을 가렸던 손바닥을 치웠다. 그러자 보인 건, 성필의 핸드폰 화면이었다.

성필이 문자를 받았다.

“얏타(해냈다)! 박 이사님이 문자를 받……!”

“어떤 년이야.”

신아름이 텔레비전 안에 들어갈 듯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곧 문자를 보낸 이의 정체가 밝혀졌다.

[어, 리카 무슨 일이야? 전화는 왜?]

리카였다.

모두의 시선이 리카에게로 향했다.

리카가 자신의 머리를 콩 때렸다.

“박 이사님 분량 챙겨주려고 저녁에 전화 드렸어!”

“…….”

성필과 리카의 짧은 만담이 지나가고, 성필은 침대에 풀썩 누웠다. 그는 베개 머리맡 선반 위의 스탠드를 켜고 책을 읽었다.

“결국 한 이사님이 다 가져가는구나.”

멤버들은 시원하면서도 씁쓸하게 성필을 지켜보았다.

“그래도 아타시(제)가 전화 드려서 분량은 챙겼……!”

그때였다.

또 성필의 핸드폰이 번쩍였다.

모두 리카를 보았다. 리카는 이번엔 자기가 아니라면서 고개를 저었다.

[어?]

성필이 침대에서 일어나 자세를 바로 하고, 소개팅녀에게 문자가 온 듯 폰을 소중하게 양손으로 붙잡았다.

[왔네…….]

여자 출연자 1번, 가장 먼저 합숙소에 들어와 있던 이였다. 성필과 함께 합숙소를 약 20분간 돌아다니면서 대화했던…….

“광고 회사 직원 김하슬.”

장하양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김하슬. 그녀는 멤버들이 설마 설마 했던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성필이 문자를 보낸 이였으니까.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의 첫날 규칙 중 이런 게 있다. 만약 첫째 날 쌍방향 문자를 주고받으면, 데이트권을 얻는다.

“박 이사님 스고이(대단해)! 첫날부터 데이트권……!”

“팀장님은 왜 저딴 년한테 문자 보낸 건데에!”

“아하하, 하아…….”

“이, 이러면 그냥 커플 탄생하는 거 아니야? 끝나는 거 아니야? 박 이사님이랑 데이트까지 하면 진짜 다 끝나는 거 아니야?!”

“…….”

리카는 말을 아꼈다.

다음부터 이 프로그램은 혼자 봐야겠다고 다짐하면서.

* * *

소녀연맹 동생 라인의 방.

여느 때처럼 리카는 조아라의 침대에 함께 누워 있었다. 침대 맞은편에선 신아름이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내가 봤을 때 김하슬 그 인간 팀장님한테 마음 없어. 원래 한 이사님한테 보내고 싶었는데, 자기가 못 먹을 거 아니까 방향 튼 거야.”

“헤에, 그렇구나.”

리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게시판에 장문의 글이나 욕설을 적어두는 인간들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시간이 많기도 하지, 그리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신아름을 보니 이해가 확 간다.

어떤 것에 과몰입하게 되면, 자신이 가진 생각이 옳든 그르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게 되는 것이다.

이해는 돼도, 신아름처럼 되고픈 마음은 없었다.

“아니 씨, 데이트권 그거도 이상해. 왜 팀장님이 코스를 다 짜는데? 그럼 김하슬 그년은 뭐 하는데? 가서 홀랑 팀장님이 준비한 거 즐기기만 하고 와? 그럼 팀장님한테 뭐가 남는데?”

“번식 기회…….”

“뭐?”

“이, 이에(아니).”

리카는 한구인에게 배운 종인류학 지식을 써먹을 틈도 없이, 신아름에게 일갈을 먹곤 입을 다물었다.

‘아름이는 박 이사님을 정말 아끼는구나.’

신아름은 성필이 방송에 나간단 사실을 밝히던 순간에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그에게 매달려서라도 말렸을 것이다.

‘아름이는 걱정하는 거야.’

신아름은 아이돌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관심이 얼마나 괴로운지 잘 안다.

오늘만 해도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의 커뮤니티 게시판이나 SNS에 수백 수천 개의 글이 올라왔다. 댓글은 그보다 많을 것이다.

만약 성필이 그것들을 전부 보게 된다면, 어쩌면 적잖은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욕만 상처를 주는 게 아니다.

타인이 자신을 멋대로 해석하고 단정 짓는 것 또한 괴로움을 준다. 다 안다는 식으로 프레임 안에 가두는 것 말이다.

‘우리는 연예인이라지만…….’

성필은 아니니까.

신아름은 성필을 걱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겪는 고통을 박 이사님도 겪으실까 봐.’

신아름은 걱정에서 비롯된 불만을 투덜거리다가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잠들 때까지 리카는 충실하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신아름이 잔 것을 확인하고, 리카는 조아라에게로 몸을 돌렸다.

리카는 창밖으로 흘러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 조아라의 얼굴 윤곽을 가늠했다. 리카는 실실 웃으면서 조아라의 콧대로 손을 가져갔다.

“아라쨩 잘생…….”

“나 안 자.”

“에엑?! 지금까지 우리 이야기를 엿들은 거야? 아라쨩 엣찌(음란)!”

“뭐가.”

“우리가 시끄러워서 못 잔 거야?”

“아니.”

조아라는 리카가 꼬물꼬물 품으로 파고드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옛날엔 덥다면서 밀어냈지만, 요즘은 익숙해진 까닭에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리카.”

“응? 드디어 고백 받아줄 생각이 들었어?”

“아저씨 말야.”

“아직도 그거 생각하고 있어?”

조아라는 요새 한 가지 고민에 빠져 있다.

어째서 성필은 조아라의 톡 알람을 꺼두었는가.

오랜 실험 끝에, 성필의 톡 알람은 조아라를 제외한 모든 멤버가 켜져 있단 사실이 밝혀졌다.

그게 조아라를 더 충격에 빠뜨렸다.

“아타시(내)가 물어봐 줄까?”

“……내가 아저씨한테 뭐 잘못했나?”

“자꾸 굴욕사진 보내서 그런 거 아냐?”

“아니거든? 그때 한 번 한 거야…….”

“으음.”

친구의 문제를 깊이 고민하던 리카는 갑자기 그럴듯한 가설이 떠올랐다.

“박 이사님은 프라이버시 라인에 민감하셔!”

“뭐?”

“전에 날 마구 내던지셨잖아!”

“그건 장난이잖아.”

“장난이 아니야! 단언할 수 있어!”

리카는 성필과 건전한 친구 관계를 이어 나가기 위해 여러 번 거리감을 쟀었다.

그때마다 느낀 건, 성필 나름의 벽이 있단 사실이었다.

리카가 생각하기에 자신과 성필은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이지만, 친구로서도 넘어선 안 될 선이 존재했다.

“예를 들어, 나랑 아라쨩은 이렇게 붙어있을 수 있지? 친구잖아.”

“그건 친구보다 성별이랑 더 연관이 깊잖아.”

“친구에 성별은 관계없어! 마아(뭐어), 난 그렇게 생각하지만 박 이사님은 아닌 거지. 사람마다 관계에 그어둔 벽이 달라. 혹시, 아라쨩이 그 선을 넘은 게 아닐까?”

“선을 넘어?”

어이가 없는 결론이다.

선을 넘은 것으로 치면 리카가 백 번은 더 넘었을 것이다. 요즘은 그런 일이 드물지만, 연습생 시절엔 성필은 막 뒤에서 껴안기도 했었으니까.

“진지하게 대답해줄 생각 없으면 그만…….”

그 순간 조아라의 머릿속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유난히 달빛이 선명했던 날, 서늘한 계곡의 바람을 맞으며 서로를 보았던 때.

가로 엔터 야유회.

조아라와 성필은 새벽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더랬다. 그날은 확실히, 각자를 향해 그어져 있던 선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정확히 표현하면, 조아라가 바쿠스(디오니소스)의 세례 아래에서 선을 발로 비벼 잠시 지워버린 것이었다.

“…….”

그땐 술에 취해 있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조아라의 머릿속에 과하게 선명히 남아 있었다.

애매모호함만이 가득했던 서로의 목소리와 주고받은 말은, 리카의 말마따나 관계의 경계가 흐릿해졌던 듯하다.

설마 그거 때문에 성필이 경계심을 느껴서…….

“난 진지해! 아라쨩 일엔 뭐든 진지하다구!”

조아라는 작게 성내는 리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성필이 한구인과 함께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을 촬영하러 갈 때가 떠올랐다.

프라이버시 라인을 침범했다면서, 다가오는 리카를 저 멀리 떨쳐냈던 성필.

“아라쨩?”

“…….”

“아라쨩 자?”

“…….”

리카가 조아라의 뺨으로 자신의 입술을 내밀었다. 조아라가 리카를 확 밀었다.

“그엑?!”

침대 아래로 떨어진 리카가 신음했다.

“히도이(너무해)!”

“너 방금 내 프라이버시 라인 넘었어.”

“입술이 문제구나! 그럼 손은 괜찮아?”

“오늘은 신아름 침대 가서 자.”

“손나(그런)!”

자신의 톡 알람만 꺼져 있다.

별거 아니라고 넘길 수도 있으리라.

혹은 가볍게 물을 수도 있겠지만.

조아라는 그럴 수 없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원인부터 속속들이 알고, 해결하길 바랐다.

‘정말 그날의 일이 문제라면…….’

이 오해…… 그래, 오해.

오해라고 하자.

성필과의 관계를 원래대로 돌리기 위해서라도, 오해를 풀어야만 한다.

때마침 내일은 시간이 난다.

성필이 소녀연맹 멤버들을 회의실로 불렀으니.

‘아마, 다음 프로젝트의 주인공을 정하려는 거겠지.’

백설하의 다음은 누구일까.

굉장한 중대사인 터라 위가 아파 올 지경이지만, 조아라에게 또 다른 중대사가 생겨났다.

‘회의 전에 물어볼까? 아님 회의 후에?’

조아라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그러는 사이, 리카는 조아라에게 버림받아 끙끙 앓으며 신아름의 침대로 파고 들어갔다.

“아름아 도와줘…….”

“팀장님한테서 떨어져 썅년아…….”

“…….”

리카는 신아름의 잠꼬대를 한 귀로 흘리며, 그녀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잠을 청했다.

* * *

“이열 성필이이!”

사무실로 들어가자마자 손혜빈이 밝게 인사해주었다.

“하슬 씨랑 잘됐어?”

“미리 말해주면 안 되지.”

“에이, 뭐 어때. 조금만 말해줘. 데이트는 뭐 할 거야?”

“콘서트.”

“뭐?”

“시에이스 콘서트 갈 거야.”

손혜빈의 얼굴이 썩어들어갔다.

마치 자그마한 친절을 사랑의 씨앗으로 오해한 남자가 공개 고백 이벤트를 준비한 상황과 마주한, 그런 사람의 얼굴이었다.

“진심이야?”

“여자들, 보이그룹 좋아함. 그분, 여자임. 데이트, 보이그룹 콘서트. 오케이?”

“미쳤군.”

“농담이야. 디너 크루즈 하려고.”

“야 씨, 나나 데려가라. 나 한강유람선 한 번도 못 타봤는데.”

“누나 서울 사람 맞아?”

“그니까 나 데려가라고오.”

손혜빈은 장난으로 성필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때 한구인이 출근하여 사무실로 들어왔다. 항상 누구보다 빨리 사무실에 오는 그였는데, 요즘은 그런 일이 적었다.

“한 이사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박 이사님.”

“어, 왜 둘이 같이 안 오고?”

성필과 한구인은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 촬영 때문에 같은 합숙소에서 산다.

그런데 굳이 따로 올 필요가 있나?

“아, 그게…….”

듣자 하니, 한구인은 자가용이 없는 여자 출연자의 출근을 도왔다고 한다.

“와, 한 이사님 세게 나가네. 거의 다른 남자들한테 ‘얘 내 거니까 건들지 마라’라고 한 급 아니에요?”

“그분이 부탁하셨습니다.”

“왜 여자를 철면피에 염치도 없는 년으로 만들어요?!”

“예, 예?”

한구인이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그, 그런 겁니까?”

“누나, 그분이 한 이사님한테 작업 치고 있는 거잖아. 한 이사님은 딱히 어느 분한테 마음 없으셔.”

“그래? 그럼 그분이 저돌적인 거네. 하긴, 한 이사님 보면 다 저돌적으로 변하겠지. 별 희한한 개그도 다 먹히더만.”

“그렇습니다.”

“왜 이렇게 자신감 넘치신대.”

“저 한구인, 옛날의 제가 아닙니다.”

한구인은 현재 성필에게 뼛속 깊이 감사하는 중이었다.

그의 연애 경력은 별로 순탄치 않았는데, 그가 지닌 진지한 성격과 유머의 결여 때문이었다.

어른들이 결혼은 얼굴을 떼어먹고 사는 게 아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외모가 훤칠해도, 그것만으로 버틸 수 있는 시기엔 한계가 있었다.

한구인 입장에선 억울하기 그지없던 일이지만 말이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는데, 너무 진지하다고 헤어지자니…….

‘하지만 이제 나는 다르다.’

한구인은 각성했다.

성필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일부 습득하여, 새로 만나는 사람들과 건전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게 됐다.

소녀연맹 멤버들이 그 증명이었다.

누구 하나 한구인을 좋아하지 않는가.

가로 엔터 직원들도 그러하다.

‘드디어 찾아왔다.’

모테키(モテ期)!

인생에 반드시 찾아오는 인기 절정기를 뜻한다.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가 소설에서 언급하여 유명해졌다는데, 한구인은 그 설이 확실한지는 몰랐다.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은 ‘인간실격’과 ‘사양’ 정도밖에 읽지 않았으니.

‘언제 다른 것도 읽어봐야겠군.’

정말 모테키가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에 인용되었을까? 한구인은 불확실한 지식을 싫어했다.

이번 주말에 시간을 내어 찾아보…….

‘어쨌거나 난 예전의 내가 아니다.’

한구인은 기세등등했다.

하지만 왜일까. 마음속 한구석이 공허한 것은.

“그러고 보니, 한 이사님 요즘 많이 피곤해 보여요.”

성필이 걱정스레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퇴근해도 합숙소로 가서 촬영을 해야 하니. 게다가 여러분을 동시에 배려하고 신경 쓴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열받네.”

“예?”

“하긴, 저도 그러니까요. 뭔가, 퇴근하면 편하게 덕질도 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한구인이 작게 웃었다.

“그래서 침대맡에 불을 켜두고 책을 읽으시는 겁니까?”

“컨셉 잘 잡았죠? 원래 자기 전엔 아이돌 영상 보면서 자야 하는데.”

“동감입니다.”

“박 이사님은 그 하슬 씨와 잘되고 계십니까?”

“잘되고 말 것도 없죠. 그리고 설령 잘되더라도…….”

성필은 제약을 달고 있다.

아니, 맹약에 구속되어 있다.

씁쓸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만약 맹약이 없었으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마음을 닫은 사람이 됐을 테니까.’

성필은 세상 누가 고백해와도 현재는 사귈 생각이 없었다. 세이코에게 했던 말대로, 성필은 자나 깨나 소녀연맹 생각뿐이니까.

“그런데 박 이사님은 저와 달리 점점 기력을 찾아가시는 거 같습니다.”

“그쵸? 저도 느껴요. 꼭 젊었을 때로 돌아간 거 같다니까요. 근처에 이성이 있으면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싶네요.”

사무실 여자 직원들의 이목이 그에게로 쏠렸다.

“가, 가로 엔터는 사내연애를 권장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성적 매력이 없다는 게 아니라요……. 지, 진짜예요! 뭐 좀 꾸미고 다녀라, 이런 뜻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게 절대 아니에요 제발 사장님한테 이르지 마세요 저는 진짜 순수하게 말한 거예요!”

성필이 황급히 발언을 수정했다.

여자 직원들이 다시 본래 업무에 집중했다.

성필은 잘 수습된 듯하여 안심했다.

“한 이사님, 커피 가지러 가실래요?”

“앉아계십시오. 모테키인 제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뭔진 모르겠는데 짜증 나네요.”

“하하.”

모테키 한구인은 사무실을 나섰다.

그가 나가자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 화제가 끝나고, 성필과 손혜빈 사이엔 새로운 화제가 찾아왔다.

“오늘 애들한테 말하는 거지?”

“응.”

“앨범 활동 끝내자마자 고생이네.”

“어쩔 수 없잖아.”

아이돌의 생명은 한정적이니.

“달릴 수 있을 때 계속 달려야지.”

* * *

한구인이 사무실을 나선 순간.

“한의사님.”

어딘가에서 조아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구인이 두리번거리자, 복도 저 끝 모퉁이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조아라가 보였다.

조아라가 손을 까딱이며 한구인을 불렀다.

한구인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라 씨?”

“이쪽으로.”

조아라가 한구인의 손목을 잡고 더 구석으로 들어갔다. 한구인은 의문을 느끼면서도 착실히 그녀를 따라갔다.

‘아라 씨가 뭔가 할 말이 있으신가? 나한테 할 말이…….’

그 순간, 모테키 한구인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설마!’

이럴 수가.

신이 준, 아니, 악마가 준 재능이 이런 참극을 벌이다니! 아아, 신이시여 어찌 이런 시련을 가로 엔터에 부여하나이까!

이처럼, 한구인은 현재 제정신이 아니었다. 거의 10년 만에 본인이 지닌 외모적인 힘을 확인하니,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이른바 연예인병이다. 다른 이들의 연예인병과 다른 점은, 한구인이 정말 연예인으로서의 외적 자질을 갖췄다는 것이었다.

“아, 아라 씨.”

그가 미약하게 조아라에게 저항했다.

조아라는 한구인이 자신의 손을 소심하게 뿌리치자, 그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한의사님 바빠요?”

“아라 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네?”

“제, 제가 아라 씨한테 잘해드린 건 어디까지나 같은 회사의 동료로서입니다! 물론 아라 씨의 마음은 기쁘지만 이 이상으로 나아가면 안 됩니다! 이 일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상처받지 마시고…….”

“고백도 안 했는데 차였네.”

“역시……!”

“고백할 생각도 없고요.”

“예?”

조아라가 픽 웃었다.

“다시 봤네. 한의사님도 쌤이랑 같은 과네요? 쌤도 아저씨가 의미심장한 말 하면 혼자 오해해서 거절부터 하고 그랬었는데.”

“창피하다고 변명하시는 겁니까?”

“이건 뭐 쌤보다 한술 더 뜨네. 진짜 연예인 앞에서 연예인 병이 걸리면 어떡해요.”

“그럼 정말 아닙니까?”

한구인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고 앞.

웬만해선 직원들이 쉽게 발을 디디지 않는 곳이었다. 여기까지 조아라가 자신을 불러낼 일이 뭐가 있지?

한구인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조아라는 그제야 본론을 꺼내려는 듯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

조아라가 습관처럼 자신의 머리를 배배 꼬았다.

“아.”

“아?”

“아저, 씨 좀, 불러줄, 래요?”

“……예에, 뭐. 알겠습니다.”

생각보다 싱거운 이유였다.

한구인은 또 조아라가 성필에게 창피를 겪었거나, 사과할 일이 있겠거니 싶었다.

근 4년, 그런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메인 프로듀서인 성필과 소녀연맹이 써 내려간 역사 중엔, 남들이 보면 창피한 일도 많았다.

‘잠깐.’

이번엔 뭔가 다르다.

모테키 한구인, 현재 연애로 머리가 절여진 그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챘다.

‘이건, 그거다.’

리카가 빌려준 러브 코미디 만화에서 자주 보던 장면. 고백을 위해 친구를 전령으로 보내어 상대를 데려오는 것.

한구인이 자신의 날카로운 촉에 스스로 전율했다.

‘전부 간파했다!’

…….

……뭐라는지.

한구인은 스스로도 자신의 생각이 우스워졌다.

“바로 모셔오겠습니다.”

한구인은 조아라에게서 등을 돌리고, 자신의 유머 감각에 만족하며 사무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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