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45화 (445/760)

444화

맹약(盟約)

1. 맹세하여 맺은 굳은 약속.

2. 동맹국 사이의 조약.

“맹약……?”

장하양의 입에서 나온 맹약이란 단어는 일상생활에서 들어 볼 기회조차 없는 것이라, 그녀의 말에 실린 무게는 엄청났다.

‘저희의 맹약’이라니.

성필이 아연실색 반문하자, 장하양은 충격받은 듯 눈을 크게 떴다.

만약 손에 애플파이가 든 접시가 하나 더 있었다면, 또 떨어뜨려서 깼을 것이다.

“잊어버리셨어요……?”

“맹약은 모르겠는데, 하양이가 무슨 말 하는지 대충 감은 오네.”

성필이 세이코와 소녀연맹 멤버들 앞에서 했던 5년 연애 금지 선언을 말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잘됐어.’

성필은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에 출연하게 됐지만, 이를 다른 직원들이나 소녀연맹 멤버들에게 떠들고 다니진 않았다.

일단 부끄러우니 말이다.

방송에 나간다는 게 자랑도 아니고.

‘여기서 들켰으니 애들한테 설명할 수 있게 됐잖아.’

성필은 맹약(장하양의 표현)을 깰 생각이 없었다.

설령 꿈에만 그리던 이상형이 유혹하더라도, 한여름 밤의 아방튀르를 떠날지언정 연인 관계로 발전하진 않을 것이다.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에 나가는 건 오직 소녀연맹을 홍보하기 위해.

‘그리고 내 연애 세포가 쪼그라들어 미라가 아니란 걸 어느 정도 확인하기 위해…….’

그 두 가지 이유로 나가는 것일 뿐이다.

성필이 설명하려던 찰나, 조아라가 선수 쳤다.

“아저씨 뭔데요. 우리한테 거짓말한 거예요 그럼? 우리 프로듀싱하는 데 집중하려고 연애도 안 한다면서요.”

조아라의 말투에는 진득한 억울함이 배어 있었다. 솔직한 감상으로, 성필은 그녀가 이해되지 않았다.

‘내 연애 금지 선언에 제일 반발했던 게 아라였는데?’

조아라는 어떻게 성필에게 그토록 비인간적인 처사를 강요하냐며 열변을 펼쳤었다.

그때 성필은 당황하긴 했지만, 살짝 감동도 했었다. 조아라가 이렇게나 자신의 인권을 신경 써주는구나 하고 말이다.

그런데 현재의 조아라는.

“사람이 왜 그렇게 살아요.”

그때와 180도 바뀌어 있었다.

얼핏 들으면 공격적으로까지 느껴졌다.

“아라쨩 말투가 너무 거칠어!”

리카가 조아라의 어깨를 붙잡고 그만하라는 듯 가볍게 흔들었다.

“그야 박 이사님이 약속도 안 지키는 무뢰배인 건 맞지만 이사님이잖아!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아저씨 나이 34살이야.”

“에? 아, 마아(뭐어).”

“저 나이에 연애하면.”

조아라가 단정하듯 말했다.

“95퍼센트 결혼까지 이어져.”

리카가 움찔했다.

과연 조아라의 논리에는 흠이 없었다.

한국 사회는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면 여기저기서 눈총이 들어온다. ‘결혼 적령기’라는 폭력적인 단어가 그 현실을 설명하는 증거였다.

“나루호도(과연)……. 정신적 나이가 청춘이신 박 이사님도 사회적 압력에는 굴할 수밖에 없어!”

“아저씨가 거기서 연애하고, 설령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계속 관계가 이어지면, 급한 마음에 결혼할 거라고.”

주변이 묘하게 조용했다.

다들 조아라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한 것이다.

사실 성필이 연애 금지 5년을 선언했지만, 그에 강제력이 있을 리는 없다. 파기하더라도 아무런 불이익이 없다.

있다고 해봐야, 장하양이 마주 선언했던 ‘저도 남은 5년간 연애 안 할게요’란 약속의 효력이 사라지는 것 정도일까.

아무튼 누구도 34살 성필의 연애를, 과거의 약속을 들먹이며 막을 명분은 없었다. 사람 앞길 막으려는 것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아라는…….’

조아라는 너무나 당당하게 성필을 비난하고 나섰다. 마치 성필의 행동이 파렴치한에 무뢰배, 인륜 절단자라도 된 것처럼.

그 이유가 무엇일지, 다들 궁금했다.

궁금했기에 침묵했다.

설마 조아라가…….

“일단 우리를 속이고(속인 적 없음) 그런 프로에 나가는 것부터가 나쁜 짓이긴 하지만, 지금이라면 멈출 수 있어요.”

“뭘?”

“아저씨가 거짓말쟁이가 되는 거요.”

“……?”

조아라는 이제 아예 일어나 있었다.

일어서서 모두에게 강변(强辯)했다.

“아저씨한테 신뢰 빼면 뭐가 남아요? 우리한테 노력이 있으면 아저씨는 신뢰잖아요. 근데, 우리 다섯 명 다 있을 때 한 약속을 깨버리면 지금까지 아저씨가 쌓아온 건 다 어떻게 되는데요? 나는…….”

조아라가 마침내 기나긴 연설의 마침표를 찍었다.

“아저씨 인생에 거짓말쟁이란 낙인이 찍히게는 안 둬요.”

“……이게, 그렇게 큰일이야 아라쨩?”

“당연하지! 아저씨 연애하고 결혼하면 평생 우리한테 배신자나 거짓말쟁이라고 놀림당하면서 살 텐데! 아저씨, 그런 수모를 감내할 수 있으면 가요.”

이야기의 말미에 조아라는 협박하듯 말했다.

거기서 성필은 딱 느낌이 왔다.

조아라는 이제부터 합법적으로 성필에게 모욕을 줄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해 빌드업을 쌓아온 것이다.

앞으로 성필이 뭐만 하면 연애 예능 출연을 들먹일 생각이겠지.

하지만 성필은 조아라에게 ‘박성필 무제한 모욕권’을 줄 생각이 없었다.

“나 연애할 생각으로 나가는 거 아니야. 너희 홍보하려고 나가는 거지. 봐봐, 한 이사님이랑 같이 가잖아.”

“한의사님 뭐 아저씨 보호자예요?”

“아라 씨, 박 이사님은 프로그램 작가님께도 미리 양해를 구하셨습니다. 최선은 다하겠지만, 진심으로 연애할 생각은 없으시다고 말입니다.”

“……진짜요?”

“그럼. 맹약이니까.”

그때 건조한 박수가 흘러나왔다.

장하양이었다. 그녀는 ‘그럼 그렇지’라는 듯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린 채 박수를 쳤다.

“믿고 있었어요.”

“하양 언니 방금까지 주먹 쥐고 있었어요!”

“박 이사님은 저희에게 한 약속은 전부 지켜주셨어요. 이번에도 그러시리라고 믿었어요. 박 이사님이 하시는 거니, 큰 뜻이 있을 거라고요.”

“그래, 약속을 어기면 너희 말고도 세이코 씨 볼 면…….”

“프로그램 방영 기대할게요.”

장하양은 세이코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칼같이 성필의 이야기를 잘라냈다.

“어, 응. 내가 너희들 열심히 홍보하는 거 지켜봐 줘.”

“뭔데요. 이렇게 훈훈하게 마무리되면 나만 이상한 년 되잖아요. 근데 거기 가서 우릴 어떻게 홍보해요?”

“내가 ‘우파루파’ 추고 한 이사님이 ‘애플 크러쉬’ 추시기로 하셨어.”

“카와이(귀여워)!”

그렇게 성필과 한구인은 프로그램 촬영을 위해 떠나갔다. 통유리벽 너머로 비치는 성필의 뒷모습이 경쾌해 보이는 건 착각이겠지.

세 멤버는 떠나가는 두 이사의 등을 바라보며 애매모호한 감정을 곱씹었다.

“씁, 근데 아저씨가 계속 숨긴 거 보면 켕기는 거 있는 거 아녜요?”

“아하하, 타이밍을 못 잡으셨겠지.”

“아라쨩 사람을 좀 믿어!”

“못 믿는 게 아니라……. 진짜 생각도 못 한 일이잖아.”

멤버들은 성필에게 뭐라 하긴 했어도, 그가 댄 이유인 ‘소녀연맹 홍보’를 믿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성필이 프로그램에 출연할 이유가 없으니까.

성필이 4년 넘도록 그녀들에게 보여준 진심과 신뢰는, 비록 말뿐이지만 그를 전적으로 믿게 만들기 충분하고도 넘쳤다.

“그런데 너희들 느꼈어? 박 이사님 요즘…….”

장하양이 묘하게 들뜬 어조로 말했다.

“케이어스 이야기를 많이 안 하셔.”

“앗, 생각해보니 정말 그래요!”

“옛날엔 우리가 싫대도 가끔씩 계속 덕심을 드러내셨잖아. 그런데 요즘은 아니야.”

성필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그녀들이기에, 성필이 케이어스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성필이 케이어스에 대한 사랑이 식어가는 것 또한 잘 알 수 있었다.

“정말 우리가…….”

소녀연맹이.

백설하가.

“케이어스를 밀어낸 거 아닐까.”

성필의 마음속에서 말이다.

케이어스를 이기는 건 소녀연맹의 오랜 숙원이었다. 물론 ‘이긴다’의 정의는 여러 가지이기에, 아직 케이어스와 결판을 지어야 할 영역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 영역 중 하나는 성필의 마음이었다.

소녀연맹이 압도적인 빛을 발하여, 마침내 성필의 가슴속에서 케이어스를 모조리 밀어내는 것.

그것도 소녀연맹이 꿈꿔왔던 승리의 형태 중 하나였다.

세 멤버들은 뿌듯한 미소를 띠며 저 멀리 떠나가는 성필과 한구인의 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짧은 간격으로 모르는 차가 가로 엔터의 주차장 부지로 들어왔다. 그곳에서 에리카와 KS 엔터 직원인 신태웅이 같이 내렸다.

“……?”

에리카와 신태웅이 입구로 다가오자, 리카는 얼떨떨해하면서도 호다닥 달려가 문을 열었다.

“에리쨩!”

“리카!”

리카가 에리카에게 달려들어 안겼다.

둘은 오랜만에 만난 죽마고우처럼 서로의 온기를 한껏 느끼면서 포옹을 이어갔다.

“리카 뽀뽀!”

에리카가 뺨을 들이밀자 리카가 당연하단 듯 ‘쪽’ 소리를 내며 뽀뽀했다. 에리카가 리카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랑스럽단 듯 또 껴안았다.

조아라는 그 모습을 기분 나쁘단 티를 내며 보았다.

에리카는 리카와의 포옹을 끝내고 조아라와 장하양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도 인사를 돌려주었다.

“에리쨩 무슨 일이야! 앗, 설마 아타시(내)가 그리워서?”

“으음, 그러면 좋겠지만 아니야.”

“손나(그런)! 에리쨩 너무해!”

“리카는 내 마음속에 저장돼 있으니까.”

“그런 것 치곤 연락이 너무 뜸하다고 생각합니다!”

“폐가 될까 봐.”

“전혀 아니야! 마아(뭐어), 나도 가로 엔터로 오고 나선 에리쨩한테 연락 안 했으니 쌤쌤이로 칠게! 헤헤, 나도 에리쨩이 폐라고 생각할까 봐 함부로 연락 못 했었어…….”

“전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쌤쌤이가 뭐야?”

“세임 세임(Same).”

“아, 그런 뜻.”

“그럼 오늘은 왜 왔어?”

“박 이사님한테 전해드릴 게 있어서.”

에리카가 들고 온 쇼핑백을 흔들어 보였다.

“박 이사님이 ‘넥타르 댄스 챌린지’ 특별 당첨자로 선정되셨어.”

“……?”

모두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성필이 ‘넥타르 댄스 챌린지’에 특별 당첨자로 선정됐다고? 그 말은, 성필이 그 챌린지에 참여했다는 소리인데…….

“몰랐어?”

에리카는 폰을 꺼내서 성필의 영상을 보여주었다. 리카, 조아라, 장하양이 옹기종기 모여 그 영상을 보았다.

‘넥타르’를 능숙하게 추는 성필의 모습이 보였다.

“마침 용무도 있고 해서 내가 직접 왔…….”

에리카의 목소리는 세 사람의 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세 사람은 같은 생각을 했다.

‘케이어스에 대한 애정이 식긴 뭐가 식어…….’

게다가 에리카가 직접 회사까지 찾아오는 것을 보니, 토모다치(친구) 관계도 잘 이어 나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 * *

응접실.

에리카는 리카와 마주 앉았다.

에리카의 용무는 성필을 만나는 것. 혹은, 만약 성필이 없다면 백설하를 만나는 것이었다.

‘프로듀싱에 관해 여쭈고 싶은 게 있어서.’

에리카는 그리 말했었다.

성필도 백설하도 없단 말을 듣곤 돌아가려 했지만, 리카가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아타시(나)한테 뭐든 물어봐! 어쩌면 가로 엔터의 뮤직 프로듀서가 될지도 몰라!’

실제로 리카는 소녀연맹이 해체된 후, 가로 엔터의 뮤직 프로듀서가 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카와이 베이스 전문 작곡가를 가로 엔터에서 영입할지는 미지수였지만, 리카가 혼자 고려하고 있을 뿐이니.

아무튼 에리카는 리카가 상담 상대로 적절하다 여겼는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어보기로 했다.

“이건 뭐야?”

에리카는 리카가 가져온 걸쭉한 녹빛의 액체를 보며 물었다.

“한 이사님이 만드신 건강즙이야!”

“아아, 건강즙.”

에리카는 건강즙을 한 모금 마시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리카는 그 모습을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써도 몸에는 좋아!”

“응, 몸에 좋은 맛이네.”

자, 그럼.

에리카는 폰을 꺼내어 미리 작성해두었던 질문 목록을 확인했다.

“이번 소녀연맹 앨범, 설하 언니가 프로듀싱하신 거지?”

“응!”

에리카는 리카의 심기를 상하게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게 실례되는 질문일 수도 있거든.”

“괜찮아! 에리쨩의 실례라면 몇 번이라도 받아줄 수 있어!”

“설하 언니가 프로듀싱했단 건, 마케팅적인 의미가 아니지?”

리카는 에리카의 생각을 짐작했다.

에리카는 백설하가 정말 프로듀싱 과정에 참여했으며, 백설하의 의견이 앨범 전반에 반영되었단 사실을 의심하는 것이었다.

딱히 실례도 아니고, 새롭지도 않은 반응이다.

아이돌이 프로듀싱에 참여했단 기사나 정보가 퍼질 때마다, 대중뿐 아니라 케이팝 팬들도 의심을 눈초리를 보내곤 하니까 말이다.

“정말이야.”

리카가 단호하게 답했다.

“‘우리들의 프로듀싱’ 봤어?”

“응.”

“그거 전부 리얼 다큐멘터리야!”

“어떻게…….”

에리카가 신기하단 듯 질문을 이어갔다.

“그럴 수 있으셨어? 전문적으로 프로듀싱을 배우지도 않으셨잖아. 그러니까, ‘어떤 의견이 있다’는 주장의 선에서 그치지 않고 전문적으로 프로듀싱 과정에 참여한다는 건…….”

아이돌에겐 벅찬 일이 아닐까?

아이돌이 프로듀싱 과정에서 ‘이거 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본인이 직접 프로듀싱을 한다면, 단순히 ‘하고 싶어’의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건 정말 전문적인 기술을 요하는 작업으로 변모한다.

어떻게 백설하는 그게 가능했지?

“박 이사님이 도와주셨으니까!”

대답은 간단했다.

“당연히 쌤 혼자 프로듀서 자리에 앉으면 아무것도 못 했을 거야. 하지만 다들 도와주셨으니까!”

성필뿐 아니라 가로 엔터의 모두가 합심하여 백설하를 서포트했으니까.

백설하는 자신의 개성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던 것이다.

애초에 프로듀싱이란 건 초인 한 명이 모든 사항을 결정할 수 없는 작업이다. 대통령이 국가의 모든 중대사와 분야를 파악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박 이사님이 도와주셔서…….”

에리카는 고개를 끄덕인 뒤, 질문을 더욱 세부적으로 가다듬었다.

어떤 과정이나 갈등이 있었는지, 그 해답은 무엇이었는지, 백설하의 참여도는 어느 정도였는지.

리카가 답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에리카는 적당히 그녀의 답을 해석하여 본인만의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약 1시간이 지났다.

그제야 에리카는 만족한 듯 질문을 그만두었다.

“미안 리카. 많이 힘들었지?”

“아냐 재밌었어! 인터뷰하는 거 같아서! 그리구 에리쨩의 미모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으니까!”

“얘는.”

에리카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런데.”

본론이 끝난 듯하자, 리카가 소소한 잡담으로 들어가려는 것처럼 진지함을 지웠다.

“에리쨩 요즘도 박 이사님이랑 연락해? 토모다치(친구)야?”

에리카는 컵에 남은 건강즙을 다 마시고 컵의 바닥을 드러낸 참이었다.

입술을 향해 컵을 45도 정도 기울인 자세. 그 자세에선, 리카는 에리카의 표정을 볼 수 없다. 컵과 손으로 에리카의 얼굴이 가려져 있었으니까.

그리고 현재 에리카의 표정은…….

‘리카 너…….’

흥분으로 얼굴 여기저기가 움찔거렸다.

‘질투하는 거니?’

사쿠라바 에리카.

삶이 지겨운 그녀에게 유일한 자극이 되는 건 바로 사랑 이야기였다.

물론 그 사랑이란 소설이나 드라마의 잘 꾸며진 수족관 같은 것이어선 안 됐다.

에리카는 진짜 사랑을 원했다.

그런 그녀가 마음속 1번 관심사로 두고 있는 건, 뭐니 뭐니 해도 리카와 성필의 관계였다.

‘아직도 사귀고 있구나.’

에리카는 표정을 원래대로 돌리고, 컵을 테이블 위로 조심스레 두었다.

에리카가 성필과 리카의 관계를 짐작한 건 소녀연맹이 데뷔했을 때였다. 그때 방송국 휴게 공간에서, 성필과 리카의 밀담을 우연히 들었더랬다.

‘얼마나 가슴 뛰는 광경이었는지.’

그리고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에리카는 성필의 외도 행각을 발견했었다.

‘음악을 위한 동행’ 촬영 당시, 성필은 새벽에 백설하의 방에서 나왔었다. 남자가 여자의 방에서 새벽에 나왔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설하 언니는 리카에게 부정한 행각을 저지른 게 들키셨을까? 아니면 하룻밤의 장난이었던 걸까? 박 이사님은 양다리를 걸치고 계시나?’

망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하지만 지금은 망상보다 급한 일이 있다.

에리카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커다란 자극, 리카를 보았다. 당돌하게도 자신에게 질투를 품은 듯한 소녀를.

‘내가 박 이사님과 친하게 지내는(에리카의 생각) 게 마음에 안 드는 거구나? 어쩜, 귀여워라…….’

에리카가 가볍게 답했다.

“응. 연락도 자주 해.”

“왜?”

“……응?”

“왜?”

에리카는 당황했다.

그게 에리카를 더 당혹시켰다.

에리카의 마음은 호수였다. 표면이 잔잔하여 거울처럼 하늘을 비추는 호수.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흐트러지는 경우가 없다시피 하다. 특히, 고작 말 따위로는 표면에 일렁임조차 없다.

“왜?”

그런데, 리카의 밑도 끝도 없는 ‘왜?’라는 질문에는 당황했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리카의 질문은…….

‘왜 내가 박 이사님이랑 친구냐고……?’

그렇게, 너무나 폭력적인 의미를 품고 있었으니까.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폭력성이다.

네까짓 게 어떻게 성필과 친구냐.

성필 따위의 사람과 네가 어떻게 친구냐.

왜 성필과 친구를 하고 있느냐.

기타 등등, 웬만해서는 포장이 불가능하다.

“에리쨩, 박 이사님한테 원하는 게 있어?”

“왜 그렇게 생각해?”

“친구란 건…… 같이 있어서 즐거운 관계란 뜻이잖아. 박 이사님은 에리쨩이랑 있는 게 물론 즐겁겠지만, 에리쨩은?”

즐거울 이유가 있나?

“KS 엔터로 찾아갈 때마다 박 이사님한테 노래를 불러주고. 먼저 연락하고. 굿즈도 주러 오고. 1년에 몇 번 만나지도 못하는 사이인데, 심지어 띠동갑인데…….”

리카의 입꼬리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여느 때의 리카가 지을 법한 표정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만큼은 평소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위화감이 들 정도로 공격적이다.

‘아.’

에리카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리카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챘다. 연습생 시절의 그녀라곤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그녀의 어투가 공격적이라고까지 느껴지는 이유…….

‘날 추궁하고 있잖아?’

에리카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그녀의 머릿속에선 연습생 시절의 리카가 떠다녔다. 에리카에게 의지하며, 함께 고향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삼켰던 그녀.

그런 그녀가 이렇게나 성장했다.

‘감히 나를 추궁할 정도로…….’

사랑에 진심이구나!

에리카는 마치 아침드라마의 조연이 될 것만 같아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졌다.

“이게 실례되는 질문일 수 있는데.”

리카는 아까 에리카가 질문의 서두에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아까 리카는 실례될 수 있는 질문에 답해주었으니, 에리카도 그러해야 하리라. 그런 뜻이 담긴 발화(發話)였다.

“에리쨩이 박 이사님을 좋아하는 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는 거 같아서.”

리카가 헤 웃었다.

연습생 시절보다 확연히 성숙해진 얼굴이지만, 아직 그때의 앳됨이 남아 있었다.

웃는 순간 시원하게 펴지는 아담한 얼굴.

에리카는 저 순수한 얼굴 안에, 연습생 시절의 단짝인 자신마저 몰아붙이는 사랑의 불꽃이 있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참고 싶었는데, 지금 이 말을 하지 않고는 평생 두고두고 후회할 듯했다.

“아…….”

에리카의 호흡이 볼품없이 떨려왔다.

아마 얼굴이 흥분으로 붉어져 있을 듯했지만, 에리카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연기하기에 적합한 얼굴이 되었겠지.

“안 돼?”

마침내 말했다.

“좋아하면 안 돼?”

자, 어떻게 반응할 거야.

리카, 뭐라고 대답할 거야?

어떤 답을…….

“응.”

리카가 즉답했다.

“안 돼.”

‘애인은 나야’도 아니다(실제로 아님).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잖아’도 아니다.

‘네가 어떻게 그래?’도 아니다.

그저 간단하기 그지없는…….

“다시 말할게.”

너무나도 간결한…….

“안 돼.”

그저, 명령.

리카는 답을 준 게 아니었다.

에리카에게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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