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44화 (444/760)

443화

“진짜임미다.”

진저가 위조지폐 감정사처럼 진중한 어투로 말했다. 그녀는 몇 번이나 눈을 찌푸렸다가 부릅떴다를 반복하며, 진소유의 폰에 떠오른 성필의 모습을 확인했다.

“진짜 박 이사님임미다!”

“소리 안 질러도 박 이사님인 거 알아.”

“죄송함미다…….”

에리카의 지적에 또 진저가 시무룩해졌다.

‘소녀연맹한테 1위를 빼앗긴 게 그렇게 괴로우신 걸까.’

진저는 소녀연맹에게 1위를 몇 번이나 빼앗기든 상관없었다. 아니, 빼앗긴다는 표현 자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음방 순위 같은 거야 천지신명님도 모르는 건데.’

실력이 뛰어나다고 1위를 하나?

곡이 좋다고 1위를 하나?

퍼포먼스가 완벽하다고 1위를 하나?

영향이 없다곤 못 해도, 음방 1위란 건 훨씬 복잡한 것이다. 인간이 계산할 수 없는 많은 변수가 작용한다.

애초에 아이돌이란 게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대중의 기호를 맞추는 직업 아닌가.

‘날아갈 때가 있으면 날개를 접고 쉴 때도 있는 건데.’

에리카는 그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진저는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에리카를 보면 납득이 갔다.

자세히 이야기는 들은 적은 없지만, 에리카는 좋은 집안에서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자랐을 것이었다.

세상의 호의를 받는 데만 익숙한 사람이니, 세상이 부여하는 시련을 견디지 못할 만도 하다.

‘삼국지의 류베이(유비)도 항상 일이 잘 풀리진 않았으니까.’

물론 진저도 당연해야 하는 일이 당연하지 않았을 때 얼마나 짜증 나는지 안다.

미국에 춤을 배우러 갔을 적, 자랑이던 연습 시간으로 조아라를 이기지 못했던 때가 딱 그러했었다.

“진짜 케이어스 팬이신가 보네.”

진소유가 새삼 신기하다는 듯 말하자 진저가 발끈했다.

“박 이사님은 진짜 케이어스 팬임미다!”

“알아. 그런데 적지 않은 연세에 챌린지 영상까지 찍으시는 거 보니까 신기해서 그래.”

“역시 적지 않은 연세끼리는 통하는 검미까?”

“메이, 너도 에리카 따라 날카로워지려고? 하기사 넌 2년 정도 전부터 과하게 사람 되긴 했지. 옛날엔…….”

“그건 질풍노도의 시기였을 뿐임미다.”

“그래.”

갑자기 에리카가 말했다. 그녀의 흐릿했던 눈동자에 빛이 차올랐다.

“만나러 가야겠어.”

“누구 말임미까?”

“박 이사님.”

“……예? 왜?”

“‘왜‘?”

“왜, 왜 만나러 감미까?”

“토모(친구)니까. 가는 김에 챌린지 당첨 선물도 가지고.”

“에리카 너 뭐 잘못 먹었니?”

진저도 동감이었다.

대체 무슨 의식의 흐름을 겪었기에 갑자기 성필을 만나러 간단 것인가.

‘……혹시 에리카 언니의 기분이 안 좋았던 건 소녀연맹 때문이 아니라, 박 이사님 때문인 거야?’

진저의 머릿속에 불길한 망상이 솟구쳤다. 이건 케이어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좌시할 수 없었다.

“챌린지 당첨자는 랜덤임미다. 저희가 드리고 싶다고 콕 집어서 드릴 수 없슴미다.”

“그래?”

“그렇슴미다.”

“그래?”

“그, 그렇슴미다.”

“흐음, 그래?”

“…….”

진저의 머리 위로 에리카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진저가 바들바들 떨었다.

그때 김민주가 연습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오는 길에 스물아홉 살 븨이에스 박수련 선배님 만나서 신세 한탄 들은 썰 푼다. 들을 사람?”

“저 듣고 싶슴……!”

에리카가 달아나려는 진저의 어깨를 붙잡았다.

“내 부탁 들어주고 들어.”

* * *

KS 엔터 매니지먼트 1팀장에겐 나름의 경보 등급이 있다.

1급 경보, 임원이 사무실로 들어옴.

2급 경보, 진저가 들어옴.

3급 경보, 담당 아티스트가 들어옴.

현재 2급 경보 발령 중.

“뭐? 챌린지 당첨자를 한 명만 골라도 되냐고?”

“안 됨미까?”

“안 되지.”

“그렇슴미까…….”

1.5급 경보, 진저가 실망한 티를 내며 어깨를 추욱 늘어뜨림. 가까운 시간 내에 1급 경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음.

1팀장은 필사적으로 진저를 설득하려 했다.

“이벤트잖아. 공정함이 생명이잖아. 것보다 너 이번에도 이사님들 불러오면 나 진짜 때려치고 친구랑 인터넷 쇼핑몰 하러 간다?!”

“인터넷 쇼핑몰?”

“아…….”

직장인은 누구나 가슴에 사표를 품고 산다.

1팀장의 사표는 친구가 제안한 인터넷 쇼핑몰 동업 제안이었다.

남몰래 품고 있던 생각이었는데, 진저와 마주하니 생존본능이 발동되어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지금이라도 적성을 찾으셔서 다행임미다. 가기 전에 챌린지 당첨자나 지정하고 가주시기 바람미다.”

“동료라고 생각했는데에……!”

“우우우우! 진저 씨 사과해요!”

“팀장님 보기엔 저래도 여린데!”

“이번엔 진저 씨가 잘못했다!”

1팀장이 감동했다.

평소엔 진저에게 무슨 말만 하면 1팀장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팀원들이, 이번엔 자신의 편을 들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과연 진저도 기세에 밀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잘못했슴니다…….”

“우우우우! 팀장님 사과하세요!”

“진저 씨가 얼마나 여린데!”

“이번엔 팀장님이 잘못했다!”

“…….”

1팀장은 KS 엔터 매니지먼트팀의 풍토가 굉장히 좋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가족같이 친근한 직장이 또 있을까?

고작 10년 넘게 동고동락했다고 친구처럼 대하는 꼴을 보라지…….

“누구한테 주려는 건데?”

“박 이사님임미다.”

“가로 엔터?”

“예.”

“생각해보면, 네가 여기 오는 일의 태반이 가로 엔터 관련된 거 같네.”

“그렇슴미다.”

“안 돼.”

진저가 시무룩해져선 등을 돌렸다.

그러자 1팀장이 선수 쳤다.

“선물을 드리고 싶은 거면, 그냥 너희 사인 CD를 드리면 되잖아? 챌린지 당첨자 상품이 그거기도 하고.”

“사인 CD는 소녀연맹이 컴백했을 때 대기실에서 이미 드렸슴미다.”

“……?”

“저는 박 이사님을 만날 명분이 필요한 검미다.”

“……?”

“알겠슴미다. 깔끔하게 받아들이겠슴미다.”

애초에 진저 자신이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리고 아마, 케이어스의 미래를 위해선 이뤄지지 않는 편이 좋을 일이었다.

“자, 잠깐 진저.”

1팀장이 나가려는 진저를 붙잡아 세웠다.

“만날 명분이 필요하단 게 무슨 뜻이야?”

“모르겠슴미다.”

그 말이 1팀장에겐 이렇게 들렸다.

‘저도 제 마음을 모르겠슴미다. 이유가 있어야만 만날 수 있는 이 관계를, 저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슴미다. 아무것도 모르겠슴미다. 저도 넥타르를 마셔버린 검미다. 아니면 애플 크러쉬임미다. 참고로 크러쉬에는 과즙이란 의미도 있슴미다.’

1팀장은 다급히 책상 아래, 주변 친구들이 부탁하곤 하는 케이어스 관련 굿즈가 든 쇼핑백을 꺼냈다.

아들이 좋아한다, 딸이 가지고 싶어 한다, 이런 부탁을 많이 받는 1팀장이다.

그런 부탁을 받을 때마다 케이어스에게 요청하긴 껄끄러우니, 미리 몇 개씩 받아서 쟁여두고 있었다.

1팀장은 그중에서도 한정 굿즈를 골라내어 새 쇼핑백에 담은 다음 진저에게 주었다.

“대충 뭐 특별 당첨이라고 둘러대. 그리고 가져다드려.”

“그래도 되는 검미까?”

“돼. 대신 만나러 갈 때는 태웅 씨랑 같이 가.”

신태웅은 진저와 친한 신인개발팀 직원이었다.

전에 가로 엔터로 간다고 했을 때도 함께 보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진소유와 진저가 대학 축제를 보러 갔을 때도 신태웅이 동행했었다.

그라면 믿을 수 있다.

“알겠슴미다.”

진저는 1팀장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단 기색이었으나, 쉽게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진저가 나가고, 1팀장의 속은 먹구름으로 가득 찼다.

“얘들아.”

팀원들이 그를 보았다.

“어떤 사람을 보러 가는데 명분이 필요한 일이면…… 뭐가 있을까?”

“잘못한 게 있거나.”

“그냥 보러 가기엔 부끄럽거나?”

1팀장은 두려움에 떨었다.

케이어스의 연애 금지 종료까지 약 6개월.

그 이후 어떤 소식들이 들려올지, 벌써부터 두렵기 짝이 없었다.

* * *

소녀연맹이 공전절후의 히트를 기록하며 앨범 활동을 이어 나가는 중인 현재.

주 6일 음악 방송 스케줄을 소화하는 소녀연맹은 힘들면서도 보람찬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무대에서 노래하고 팬들의 환성을 받으며, 왠지 당연하다시피 느껴지게 된 1위 트로피를 받는 건 행복하다.

하지만 일주일에 딱 하루뿐인 휴일, 월요일만큼은 일을 다 잊고 쉬고 싶었다.

“쉬고 싶다면서?”

정지음은 작업실 소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조아라를 어처구니없단 눈길로 바라보았다.

“들를 때마다 삭신이 쑤시네 아프네 별말을 다 했으면서.”

“걍요.”

조아라는 A&R팀의 보물상자 안에 든 곡들을 한 번씩 들어보는 중이었다. 아까부터 소파에 앉아 줄곧 음악만 듣고 있었다.

“쉬어도 쉬는 기분이 아니에요.”

“넌 쉴 때도 춤추니까.”

“아니,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고요.”

“왜?”

조아라는 헤드폰의 노이즈 캔슬링 모드를 껐다.

“다음 ‘우리들의 프로듀싱’ 차례 결정해야 하잖아요. ‘애플 크러쉬’ 활동 종료 전에 정할 거 아녜요.”

그제야 정지음은 조아라의 마음을 이해했다.

소녀연맹이 공전절후의 히트를 기록 중.

그러니 다음 차례가 부담될 수밖에 없다.

‘설하의 부담은 케이어스란 상대로부터 나왔지만, 다음 차례가 느낄 부담은…….’

백설하로부터 나온다.

여름과 사랑이란 컨셉을 극대화한 앨범, ‘인트로: 러브’의 협력 프로듀서인 백설하.

그녀의 후광을 넘어서는 게 다음 차례에 올 멤버의 과제이다.

“또 쌤 때처럼 아저씨가 아무나 시킬 수도 있고. 그게 내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조아라가 노이즈 캔슬링 모드를 다시 켰다.

“미리 봐둬야…….”

정지음이 조아라의 헤드폰을 붙잡고 벗겼다.

“그건 우리 A&R팀이 미리 걱정하고 있을 테니까, 넌 지금에 집중해.”

“아 뭔데요.”

“휴식도 일이야. 휴일에 걱정 사서 하면서 끙끙대면 잘도 휴식이 되겠다. 위에 올라가서 성필이 형 주접이라도 들어.”

조아라는 무어라 항변하려 했지만, 정지음이 워낙 강경한 터라 입만 비쭉이며 작업실을 나섰다.

‘뭐야 다. 지음 오빠도 그렇고 한의사님도 그렇고, 전부 다 나 어린애처럼 대하고.’

조아라는 괜히 계단을 쿵쿵 밟으며 올라갔다.

‘아저씨도…….’

‘아라베스크’ 작업 때 어린애처럼 안 대한다고 약속했으면서, 아직도 애 다루듯 달래는 태도를 고치지 못했다.

‘진짜 내가 애처럼 보이나? 나 성인인데?’

작업실 출구 계단을 전부 오르자 1층 홀의 풍경이 환히 들어왔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입구 근처의 휴게 공간.

소파에 성필과 리카가 앉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성필이 말했다.

“이 나이쯤 되면 주변의 시선이 느껴지지. ‘아니 너 결혼 언제 해?’라는 질문에서, 꼭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거 같은 뉘앙스가 느껴져. ‘어? 왜 저 나이에 독신?’이라는, 그런 느낌. 이해해?”

“아타시(저)도요! 곤란하다니까요! 위장 결혼이라도 해야 할까요?”

“하나도 이해 못 하고 있잖아.”

조아라는 리카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성필과 어깨가 닿을락 말락 한 애매한 거리, 거기에 자신이 한 농담이 재밌단 듯 웃으면서 성필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때린다.

‘영락없는 여우짓인데…….’

리카가 하니까, 어린아이가 거리감 조절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만 보인다.

실제로 위화감 같은 게 안 느껴진다.

‘리카랑 나는 동갑이니까…….’

다른 사람들 눈에는 자신도 저렇게 보인단 거지. 그야 회사 사람들은 자신이 미성년자일 때부터 봐 왔으니까 애처럼 보이겠지.

조아라는 새삼스레 자신의 위치를 자각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면서 두 사람이 앉은 소파로 다가갔다.

조아라가 성필의 옆에 앉자마자 리카가 눈을 빛내면서 달려들었다.

“아라쨩!”

리카가 성필의 허벅지 위로 엎어지는 동시에, 그 자세 그대로 성필 건너편의 조아라를 껴안으려 했다.

그러자 성필이 리카를 밀쳐서 반대로 우당탕탕 눕혔다.

“그엑?!”

“와, 대박. 리카 너 진짜 날아갔어. ‘더 킹’ 출 때 신아름 같았음 리얼.”

“이사님 히도이(너무해)! 아타시(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 소파 저 멀리 밀쳐져야 할 정도로 큰 잘못이었나요! 진상규명을 요청합니다!”

“넌 내 프라이버시 라인을 넘었어.”

“진작 말씀하셨어야죠! 어디까지인가요!”

성필이 검지를 자신의 어깨에 붙였다. 그리고 5cm 떼어냈다.

“이 정도.”

“무슨 오오라의 갑옷인가요?! 그 정도까지 들어오는 걸 허용하면 금방 당한다구요! 그럼 이건 괜찮나요!”

리카가 성필의 어깨 근처에서 손을 붙였다 뗐다를 반복했다.

“앗, 정말 5cm까지는 반응을 안 하그엑?!”

리카가 또 반대편으로 밀쳐졌다.

“방금 0.1cm 더 안으로 들어왔어.”

“우소츠키(거짓말쟁이)! 제가 어깨 찰싹찰싹 때렸을 땐 아무것도 안 했으면서!”

“아저씨 나 와서 부끄러워서 그래.”

“에엑?! 아라쨩이 뭐길래요! 앗, 아니…….”

리카가 헤죽헤죽 웃었다.

“뭔가, 아라쨩이 있으면 멀어지는 사이란 건 시크릿한 느낌이네요! 다른 사람한테 들키면 안 되는 건가요!”

“방금 프라이버시 라인 10cm로 늘었어.”

“손나(그런)!”

리카는 굴하지 않고 성필의 피부 바깥 10cm에서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벌였다.

“그런데 접근하면 안 되는 거리란 건 낭만 있네요! ‘웨스턴 불렛’의 주인공인 시세리 같아요! 10m 이내로 들어오면 권총으로 다 쏴 죽여요!”

“그게 뭔데 씹덕아.”

“에엑, ‘웨스턴 불렛’도 모르시나요! 엄청 인기인 만화라구요! 소년만화라구요! 주인공이 여자이긴 하지만 소년만화예요! 곧 애니메이션화도 돼요!”

“아, 기억났다.”

“앗, 역시 한국에서도 유명하군요!”

“한 이사님이 ‘이런 건 왜 보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던 그거네.”

“한 이사님 너무해애……. 정말 재밌어서 추천드린 건데에…….”

“주인공이 여자라서 그런 거 아닐까.”

“다시 말하지만, 남녀노소에게 인기 있는 엄청 유명한 만화예요! 소년만화요!”

아무래도 좋다.

사실, 성필은 리카와 대화할 때마다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게 ‘아무래도 좋다’였다.

백설하와 성필은 관심사가 맞아서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진다. 프랑스에 뮤비 촬영을 갔을 땐 4시간 동안 센 강을 걸으면서 대화만 나누었을 정도였으니까.

그에 비해 리카는 대화가 이어지긴 하지만, 대부분 리카의 아무 말 대잔치였다.

지금처럼 말이다.

재미없는 건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기가 빨린다.

“가로 엔터 공유 문고에 1권부터 7권까지 뒀으니까 꼭 보세요!”

“시간 나면. 난 아라가 뭐 보고 있는지가 더 궁금해.”

“손나(그런)!”

조아라는 아까부터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뭐 보…….”

성필이 그녀에게 살짝 더 가까이 다가가 폰을 보니, 그녀가 급히 폰을 숨겼다.

“뭐요.”

조아라가 얼핏 경멸하는 듯 눈썹을 세웠다.

그것을 보자 성필의 심장이 철렁였다.

‘그런가…… 이 정도로 거리감을 좁히려는 것만으로도 어쭙잖게 호의를 사려는 걸로 보이는…… 기분 나쁘게 친절한 중년 남성으로 보이는 나이가 되어 버린 거군…….’

성필은 슬퍼졌다.

“아타시(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요!”

젊음에서 나오는 호의는 상쾌하지만 그보다 나이가 들면 왠지 우중충하며 저의가 있어 보인다.

심지어 독신이라면…….

“박 이사님 아까부터 독신이란 거에 굉장히 신경 쓰시네요!”

만약 성필이 젊었을 때 조아라에게 저런 시선을 받았다면, 집으로 돌아가 처절하게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베개가 흥건해져서 남아나질 않았겠지.

다행이다, 인생의 경험이 많이 쌓인 후에 조아라에게 경멸받아서.

“아라쨩 히도이(너무해)!”

“아저씨 나 멕이는 거예요 뭐예요. 뭔 속마음 같은 걸 입 밖으로 내고 있어요.”

“독신이라서 그런가 혼잣말이 입에 배어버렸네…….”

성필은 애처롭게 눈을 감곤 ‘수림아 보고 싶다’ 같은 말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조아라와 리카는 그런 성필을 그냥 내버려두었다.

‘야.’

조아라가 입만 움직여 리카를 불렀다.

리카도 입만 움직였다.

‘아, 라, 쨩, 사, 랑, 해, 나, 랑, 결, 혼, 해, 줘, 세, 컨, 이, 라, 도, 좋, 아.’

‘퍼스트도 없거든. 이거나 봐.’

조아라가 배시시 웃으면서 폰의 화면을 리카의 방향으로 돌렸다.

그곳엔 아래 각도에서 찍은 성필의 굴욕 사진이 있었다. 계속 폰을 보고 있던 건 이것을 찍기 위함이었다.

리카가 소리 내지 않고 크게 웃었다.

조아라는 테이블 위에 올라온 성필의 핸드폰을 검지로 가리켰다.

‘톡으로 보낼 거임.’

‘사장님이랑 한 이사님 계신 단톡방에도 올리자! 그리고 아라쨩 사랑…….’

조아라는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성필과의 개인톡으로 굴욕 사진을 보냈다.

1초.

두근두근.

2초.

두근.

3초.

……?

‘안 울리잖아?’

뭐지.

회사 와이파이가 안 좋나?

성필의 데이터 잔여량이 다 떨어졌나?

아니면…….

‘뭐, 뭔데.’

아저씨가, 내 갠톡 알람을 꺼뒀어?

조아라가 믿기지 않는단 듯 리카를 보았다. 리카도 상황을 파악하고,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성필에게 갠톡을 보냈다.

[톡왔쪄여!]

귀여운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성필의 폰을 울렸다. ‘수림이’ 타령만 하던 성필은 눈을 뜨곤 폰을 보았다.

[아라쨩, 솔직히 박 이사님 조금 기분 나쁘지 않음? 어떻게 34살 취미가 아이돌 덕질임 코이츠 오모시로이(이 녀석 재밌네)wwwww]

[갓직히 소녀연맹이면 봐주는데 케이어스 덕질하는 것부터가 이미 절레절레 근데 또 킹직히 에리쨩 예쁜 건 인정함]

[아, 톡방 착각했네요 고멘나사이;]

[‘실버타운 메이트(이거 바꾸면 15분 대화 금지예요!)’님이 나갔습니다.]

“진짜 세상 살기 싫어진다……. 그냥 죽자…….”

“에에,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는데요. 그냥 견디시는 게? 키미노 카와리난데 이쿠라데모 이루케도(네 대신 따위야 얼마든지 있지만).”

“이 사이코패스으……!”

조아라는 더 충격받았다.

리카의 개인톡은 알람이 되어 있는데, 자신의 개인톡은 알람이 꺼져 있다.

대체 왜?

애초에 잘 보내지도 않는데?

왜 굳이?

해석할 수 없는 사태를 앞에 두고, 조아라는 말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것을 캐치한 리카는 성필과 만담을 주고받는 게 문제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가만히 두고 볼 문제가 아니야! 이를테면 스타그래프 언팔로우 같은 거라구!’

리카가 성필에게 통렬한 일침을 날려주려던 순간.

“박 이사님, 이제 가야 하지 않습니까.”

한구인이 나타났고.

“……!”

“……!”

리카와 조아라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

덩달아 성필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박 이사님은 아침에 보셨지 않습니까.”

“다시 봐도 놀랍네요.”

오늘의 한구인.

메이크업함.

헤어 세팅이 평소보다 기합 들어가 있음.

아껴서 입던 명품 클래식 정장.

백화점 오픈런으로 입수한 명품 시계가 왼 손목을 차지하고 있음.

’이걸 왜 쓰는지 모르겠다‘고 하던 클러치 백까지 들고 있음.

“한의사님……?”

“손나(그런)!”

리카가 분연히 일어났다.

“왜 여자 헤테로섹슈얼(이성애자)과 남자 호모섹슈얼(동성애자)을 죽이려는 세팅을 하고 계시는 거죠!”

“리카 씨, 예전부터 언어 선택이 너무 과잉 교정되고 계십니다. 웃기려고 하신 거라면, 안 웃깁니다.”

“웃긴 건 한 이사님의 착장이에요! 대체 무슨 일인가요! 에엑, 그러고 보니 박 이사님 비비크림도 평소보다 톤이 살짝 더 밝은 거 같아요!”

한구인이 어색하게 웃었다.

“말씀 못 들으셨습니까? 박 이사님과 저는…….”

대답이 이어지고, 잠시 침묵.

그리고.

쨍그랑.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장하양이었다. 그녀는 애플파이를 담은 접시를 가져오다 놓쳐버린 듯, 바닥에 간신히 깨지지 않은 접시와 일그러진 애플파이가 뒹굴었다.

“박 이사님?”

“하양이 괜찮아?”

성필이 헐레벌떡 일어나 장하양에게 다가갔다. 안절부절못하고 장하양의 근처를 살피니, 유리 조각은 없었다.

“안 다친 거 같네. 다행…….”

“연애 예능이요? 저희의 맹약(盟約)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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