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화
정호환은 집무실의 푹신한 의자에 깊이 몸을 묻고 있었다.
고가의 스피커로는 소녀연맹과 케이어스의 노래가 반복 재생되었고, 그런지 벌써 수 시간이나 지났다.
눈을 감은 정호환은 음악을 듣는 동시에 과거에 빠져 있었다.
과거, 그가 아직 젊었던 시절로.
서울대학교 철학과 재학생.
운동권에 투신하여 활동하던 중 체포되어 집행유예. 이후 학업에 열중하고 대학원에 진학. 하지만 ‘유지태와 친구들’을 보곤 돌연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입문.
이게 세간에 잘 알려진 그의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엔, 그가 이 업계로 들어온 이유가 오직 ‘유지태와 친구들’인 것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아니었다.
물론 직접적인 계기는 ‘유지태와 친구들’이었지만, 그 이전에 겪었던 사건이 없었다면 그는 이 업계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체포되기 전…….’
누구에게나 존경받았던 선배가 있었다.
고등학교 선배이자 대학교 선배이기도 한 그는, 정호환이 운동권이 되었던 이유나 다름없었다.
이젠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는 어느 날, 그 선배가 다른 학생과 시비가 붙었다.
아마 의견 차이였을 것이다.
선배는 자신의 말이 먹히지 않자 화가 머리끝까지 나, 그 학생에게 폭력을 행사했었다.
심지어 주변에서 지켜보던 이들은 말리지 않았었다. 맞는 학생을 보고 정권의 하수인이라며 욕하기 바빴다.
‘나는…… 나도…….’
정호환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거대한 충격에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폭력을 용인하는 넘실대는 분노를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선배와 동료들은 시위에 나섰다. 서로 팔짱을 끼고 정의와 자유를 부르짖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민중가요를 불렀더랬다.
동료들이 전경에게 맞고 체포되는 것에 분노했던 이들은, 정작 같은 학교의 학생에게 그처럼 폭력을 썼었다.
그러고도 입에선 정의란 단어가 나왔고, 눈엔 분개의 눈물이 흘렀었다.
“…….”
정호환이 눈을 떴다.
그리고 그날, 정호환도 눈을 떴었다.
그는 더 이상 정의의 구호와, 정의의 이념과, 정의의 심판과, 정의의 논변을 믿지 않게 됐다.
정권이 바뀌면, 정치가 바뀌면, 사람이 바뀌면, 뭐든 좋아질 거란 말도 믿지 않게 됐다.
결국 정치와 경제는 역사의 표면일 뿐이고, 다 똑같이 얄팍한 인간이 쥐고 흔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그는.
‘나는 문화를 믿는다.’
문화의 힘을 믿게 됐다.
스피커에서 케이어스의 ‘넥타르’가 울려 퍼졌다. 사랑을 신의 음료로 표현하는 노래이다.
신화 속의 ‘넥타르’처럼 사랑이란 달콤하고도 황홀한 것이라고. 오직 사랑의 순수성만이 노랫말을 가득 채우고 있다.
정호환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노래는, 그날 선배와 동료들이 눈물을 흘리며 불렀던 민중가요를 닮아 있다. 같은 학생을 두들겨 팬 다음 날 울려 퍼졌던 정의의 노래를.
그날만은, 정호환의 눈시울을 뜨겁게 달구었던 민중가요가 군사정권의 이데올로기 선전용 노래와 다를 바 없이 들렸었다.
‘무언가의 가치를 과대포장하고 완전무결한 것인 양 떠드는 노래…….’
케이어스의 ‘넥타르’에는 영혼이 없다.
누구도 이 곡에 몰입할 수 없다. 심지어 케이어스 본인들조차도.
이 곡은 완벽하게 꾸며져 있어, 아름답지만 감히 손댈 수 없는 공예품을 연상시킨다.
사람들은 그 만듦새에 감탄할지언정, 표면 외의 무엇도 상상할 수 없다.
‘넥타르’가 끝나고, 소녀연맹의 ‘애플 크러쉬’가 재생됐다.
‘하지만 애플 크러쉬는…….’
인간의 영혼이 보인다.
사랑하는 이의 절절한 욕망이 들린다.
소녀연맹이 가진 투명한 고백이 곡 전체에 배어 있다. 당연하다. 이건 소녀연맹 본인들의 고민을 담은 곡이었으니까.
‘애플 크러쉬’엔 투명한 영혼이 있다.
그렇기에 듣는 이의 마음을 비춰볼 수 있다.
‘애플 크러쉬’를 듣는 사람은 소녀연맹의 고백을 받는 ‘그’일 수도 있고, 고백하는 ‘그녀’나 ‘그’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감정을 이입할 수 있다.
노래가 인간 그 자체를 비추고 있으니까. 그러니, 이 곡은 거울이다.
“……태섭아.”
요즘 이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는지 모르겠다. 이전 어디에서 뭘 하는지도 모르는 옛 친구의 이름이다.
‘유지태와 친구들’이 일으킨 음악 혁명.
그 수혜는 힙합이 받게 될 거라고 예상했던 친구이자, 정호환처럼 문화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친구이다.
‘결국 음악 혁명을 계승한 건 아이돌이었지. 내가 옳았어.’
보이밴드와 걸그룹, 아이돌.
그리고 래퍼, 힙합.
이 두 가지는 당시엔 선진 문물이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로 정호환과 태섭이 달성하고픈 목적은 비슷했다.
둘 다 술을 마시면 흔히 보들레르를 인용하며 이리 말했었다.
‘원죄의 자국을 지우자고.’
한국.
인간 개개인의 자아보다 집단의 정체성을 중요시하는 나라.
튀면 안 된다.
다르면 안 된다.
이래선 안 된다. 저래선 안 된다.
‘나’보다 ‘우리’다.
우리는 옳고 저들은 그르다.
이 나라엔 나와 너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와 너희들뿐이다.
이 숨 막히는 사회를 바꾸는 법은 자기애와 자아의 소중함을 설파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건 문화로만 가능할 것이었다.
태섭은 힙합의 저항 정신과 진솔한 태도가 해답이라고 생각했다.
정호환은 10대를 아우르는 아이돌의 무결성과, 젊은층에게 얻어내는 선망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태섭의 말처럼 아이돌이란 인더스트리 베이비에 진솔함 따윈 없겠지만……, 정호환은 그렇더라도 아이돌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믿었다.
‘그런데…….’
소녀연맹은 정호환의 예상을 한발 더 나아가서, 아이돌은 절대 될 수 없으리라 여겼던 아티스트의 선마저 넘어갔다.
태섭이 바랐던 진솔한 태도까지 얻어냈다.
‘도박이나 마찬가지인, 아이돌이 프로듀싱한단 사실을 대대적으로 광고까지 해가면서.’
물론, 정호환은 이런 방식의 성공이 지속적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백설하가 프로듀싱을 맡았단 것을 진실이라고 완전히 믿지도 않았다.
다만, 이런 식의 마케팅 전략이 성공했단 것에 감탄할 따름이었다. 그게 진실이든 아니든, 이만한 성공을 거두었단 데 순수하게 놀랐다.
‘창조성을 부각하는 건 딱 팬들이 좋아할 만큼만.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토록 전면으로 부각하는 게 먹히다니…….’
아니.
정호환이 감탄하는 건 그 이상의 무언가였다.
무언가.
그래.
‘아티스트를 만들어냈다.’
아이돌 중에서도 창조성이 넘치는 이들이 있었다.
그건 낭중지추와 같은 것이어서, 억지로 뽑아내어 부각해낸 재능이 아니었다.
하지만 성필은 인간의 창조성을, 마치 개발할 수 있는 능력처럼 취급하여 마침내 세상에 드러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가진 자신만의 개성, 자신만의 이야기를 정제된 상품으로 만들어낸 거야.’
아이돌의 탄생 과정은 한국 사회의 축소판 같다.
눈물과 땀으로 이루어진, 극히 소수만이 올라갈 수 있는 아이돌이란 발판. 그리고 또 그 위로 더 올라가기 위한 끝없는 투쟁.
그곳에 인간 개개인의 개성을 위한 자리는 없다.
그저 사회가 요구하는 규격에 맞춰진다. 허용되는 예외는 일부일 뿐이다.
하지만 성필이 프로듀싱한 소녀연맹은 그런 시스템에 반기는 드는 것 같다. 시스템 속에서 탄생한 이단아다.
‘처음부터 안 되는 건 없어. 재능이 아니라 환경의 차이야. 너희들도…….’
할 수 있다.
틀을 깨고 나아갈 수 있다.
그러니 남이 그어둔 선을 보고 지레짐작 겁먹지 마라.
‘이렇게까지 각 잡고 보여주는데, 호소력이 있을 수밖에 없지…….’
정호환은 양손을 모으고 꼼지락거렸다.
그는 케이어스에게 초동판매량 50만 장 돌파라는 전무후무한 성적을 안겨준 ‘넥타르’가, 그 넥타르가…….
‘토할 거 같군.’
역겹게 느껴질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더 끔찍한 건, 자신이 ‘넥타르’와 다른 곡을 만드는 법을 모른단 것이었다.
그는 이제 영원히 넥타르와 같이 아름답고 장엄하며 완벽하게 꾸며진, 하지만 영혼이 없는 곡밖에 만들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멈춘다면.’
정호환이 의자에 묻어두었던 허리를 곧게 폈다.
‘여기서 그만둔다면, 그러겠지.’
정호환은 1세대 아이돌이 몰락하고 찾아온, 아이돌의 유구한 암흑기에도 아이돌을 포기하지 않았었다.
모두가 ‘아이돌은 끝났다’고 했을 때, 그는 아이돌의 새로운 부흥기를 창조했다.
2세대가 끝나갈 무렵 ‘아이돌은 이제 다 판에 박혀서 발전할 요소가 없어’라고 할 때도.
그는 3세대의 문을 열어젖히며 새로운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었다.
‘난 영원토록 청춘이다. 없는 영혼은 내가 채운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청춘이어야만 하고, 내가 채워야만 한다.’
정호환은 노트북을 꺼내어 작곡 프로그램을 켰다.
‘내가 업계에 몸담은 세월이 약 30년.’
그 30년은 아이돌의 역사이며.
곧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이고.
또한 한국 문화의 역사.
그렇기에.
‘내가 문화 그 자체다.’
30년 동안 문화를 선도하고 발전시켜온 게 바로 그, 정호환이었다.
방향과 속도는 그가…….
‘내가 정해.’
집무실엔 오래도록 ‘애플 크러쉬’가 울렸다.
청춘의 투명한 고백이 영원토록 퍼져나갔다.
* * *
박성필.
인생에서 가장 기괴한 제안을 받다.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요?”
[예.]
장하양이 자동차의 유리를 주먹으로 부숴서 화제가 되었던 예능, ‘우리는 산다’.
그쪽의 작가진 중 한 명에게서 성필에게로 연락이 왔다. 용무는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이란 예능의 출연 제의였다.
성필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 그 예능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사실, 딱히 전생의 기억이 없더라도 무슨 예능인지는 제목만으로도 추측할 수 있었다.
‘연애 관찰 예능이네.’
사람들은 연애 소설, 연애 드라마와 영화를 넘어 실제로 벌어지는 연애를 보고 싶단 욕망까지 드러내게 됐다.
그 결과 연애 관찰 예능이란 게 생겨났다.
남녀를 모아두고 사랑과 갈등이 싹트는 것을 지켜보는 종류의 예능이었다.
‘인기가 좋아서 제목만 다르고 비슷한 플롯의 예능이 마구마구 생기고 있지.’
성필도 가끔 텔레비전에서 보곤 한다.
그런데 설마 자신이 출연 제안을 받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어음, 어어…….”
성필은 세이코에게 했던, 그리고 멤버들 앞에서 했던 5년간 연애 금지 선언을 떠올렸다.
그것 때문에라도 이 제안은 거부해야만 했다.
“죄송한데, 제가 연애할 생각이 없어서요.”
그러자 전화 반대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박 이사님, 그냥 예능이에요. 분위기만 즐기셔도 돼요. 촬영 들어가기 전에 출연자분들께 양해 구하셔도 되구요.]
작가는 ‘직접 해보면 생각 달라지실걸요?’란 말은 삼켰다.
설령 ‘놀려고 나가는 거지’라고 생각하더라도, 노골적으로 매력 경쟁이 되는 상황에서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 리 없다.
누구든 남자로서의, 여자로서의 매력을 증명하고픈 욕구가 샘솟기 마련이다.
“그래요?”
성필은 작가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하긴, 연애 예능이 끝나고 난 뒤의 근황들을 살펴보면 출연자들이 관계를 이어가는 경우가 드물긴 하다.
애초에 진짜 사랑할 사람을 찾고 싶다면 예능에서 구할 리가 없지.
‘노는 감각인 건가?’
“저어, 그런데 왜 제가 섭외되는지 모르겠어서요.”
[박 이사님 인기 엄청 많으실 거예요!]
작가는 열띤 어조로 성필의 장점을 여럿 열거했다. 듣던 성필의 얼굴이 다 붉어질 정도였다.
“예에…… 그럼 생각해보고 연락드릴게요.”
[넵, 기다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성필은 얼떨떨해져서 사무실로 돌아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민경섭이 호들갑 떨면서 다가왔다.
“형! 우리 애들 TOP10이랑 실시간 차트 동시에 계속 걸려 있어요! 내려올 생각이 없어요!”
“컴백했을 때부터 계속 그랬잖아. 뭘 새삼스레.”
“오올, 당연하단 거예요? 형 이제 임원 티가 나네요?”
“뭔 소리야. 나 원래부터 냉혹, 엄격, 철저한 프로듀서 이미지였잖아.”
“형 거의 나일강이잖아요. 주기적으로 눈물이 범람해서. ‘나 이사님’이라고 불러드려요?”
“……그러냐.”
성필은 우물쭈물하다가 던지듯이 물었다.
“경섭아. 나 연애 관찰 예능 섭외받았어.”
“네?”
“연애 관찰 예능. ‘러브 시그널’ 같은 거 있잖아.”
“……?”
민경섭은 쉽사리 성필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째서 연예인도 아닌 성필이 예능에 섭외된단 말인가?
하지만 몇 초가 지나, 성필이 한 이야기의 의미를 이해하게 됐다.
민경섭이 눈을 크게 뜨고.
“손나(그런)!”
그렇게 외쳤다.
자연스레 근처의 이목도 성필에게로 쏠렸다.
“지, 진짜예요?”
이유이도 민경섭처럼 못 믿겠단 투로 물어왔다. 성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연애 예능 진짜 좋아해요! 꼭 나가세요!”
“유이 씨가 좋아해서요?”
“네! 박 이사님이 관계 형성 실패해서 토라지시는 거 꼭 보고 싶어요! 저는 꼭 파트너한테 선택 못 받은 사람한테 끌리더라고요!”
“심보 한번 고약하네 진짜!”
이유이가 배실배실 웃었다.
“약간, 그런 거 있지 않나요? 물론 거기 나오시는 분들은 외모가 다들 준수하시지만요. 사아알짝 외모적으로 호불호가 갈리는 분들이 잘 선택을 못 받잖아요. 전 그런 분을 응원하게 돼요.”
“예, 얼평 잘 들었어요. 제가 신경 안 쓰는 동안 사내 풍토가 많이 안 좋아졌네요. 유이 씨 1개월 감봉할게요.”
“노, 농담이었어요!”
“감히 나, 박 이사님한테 농담?”
이유이가 시선을 구석으로 돌렸다.
한구인과 권아인 경리 쪽이었다.
권아인 경리가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한구인에게 말했다.
“한 이사님.”
“왜 그러십니까 아인 씨.”
“태양이 두 개였으면 좋겠어요.”
“예?”
“SunSun(선선)해지잖아요.”
“으하하하!”
권아인 경리가 ‘해냈다’는 듯 뿌듯한 미소를 띠었다.
그 광경을 본 성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한테 농담할 수도 있죠 뭐.”
“그쵸?”
“근데…… 예능 나갈 거면 한 이사님이 더 적격이지 않을까요.”
“그건 안 돼요!”
“왜요?”
“밸런스 붕괴잖아요.”
그럼 성필은 밸런스가 맞춰졌단 건가?
“형, 근데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우리 애들 홍보도 될 텐데.”
“애들?”
“네. 형 소개할 때 뭐라고 소개하겠어요. 소녀연맹 프로듀서라고 소개하겠죠. 그거 보는 사람들 소녀연맹 궁금해서 다 검색해볼걸요.”
“음…….”
“형이 ‘애플 크러쉬’나 ‘우파루파’도 춰주면 금상첨화고요.”
“그렇구만.”
애들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지.
성필은 폰을 꺼내어 한구인의 사진을 찍었다.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의 모습은 직장인 컨셉의 배우 화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 이사님.”
“예?”
성필의 부름에 한구인은 보지도 않고 답했다.
“한 이사님 사진 좀 써도 될까요?”
“어디 쓰시는 겁니까?”
“한 이사님한테 관심이 있을 만한 친구가 있어서요.”
“여성분이라도 소개해주실 생각이십니까?”
한구인이 픽 웃으면서 답했다.
“드디어 저에게도 이런 기회가 오는군요. 아름다우십니까?”
“그럼 쓸게요.”
“또 죄 없는 여성분을 울리게 됐군요…….”
“왜 성에 안 차시는 걸 고정값으로 두고 계시는 거예요.”
성필은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 제안을 주었던 작가에게 한구인의 사진을 보냈다.
서울대 졸업, 미국에서 경영학 석사를 취득했고 유명 투자회사에서 근무, 현재는 가로 엔터 이사로 재직 중. 이런 정보와 함께.
얼마 안 있어 작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제발 이분 꼭 출연시켜주세요! 얼굴만으로도 시청률 나오겠어요! 아니, 이분이 진짜 이사예요? 가로 엔터 소속 배우 아니고요?!]
“옙, 답 잘 받았습니다.”
성필은 전화를 끊고 한구인을 불렀다.
“한 이사님, 상대분한테 이사님 번호 드려도 될까요?”
“어, 바, 바로 말입니까? 제가 괜찮으시답니까?”
“네.”
“어…….”
한구인.
연애 안 한 지 어언 십 년을 찍기 직전.
오직 가로 엔터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그에게도 볕들 날이 온 것일까?
한구인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이 나이에 기뻐하는 티를 내면 품위가 없어 보일까 걱정됐다.
“……한 이사님.”
곁에서 사태를 불안하게 지켜보던 권아인 경리가 한구인을 불렀다.
“연애 쉰 지 얼마나 되셨어요?”
“그, 어, 너무 오래돼서 안 세봤습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여자들이 막 달려들지 않았어요?”
“저기, 이런 말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그런 식으로 다가오시는 분들은 조금 가벼운 느낌이 들어서…….”
호감을 품고 다가오는 여자가 가볍게 보인다고? 그럼 대체 어떻게 인연을 시작해야 하는 거지?
로맨스 소설처럼 드라마틱한 사건에 연루되어 생사의 고비를 함께 넘을 정도는 되어야 할까?
‘이게 말로만 듣던 철벽남인가?’
권아인은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박 이사님이 소개해주시는 분은요?”
“이젠 저도 나이가 차서 사람 가릴 처지가 아닌 듯싶어……. 이 나이면 주변에서 소개가 뚝 끊기는 터라…….”
가드 엄청 낮아졌네?!
철벽남 어디 갔어!
“게다가 박 이사님이 소개해주시는 분이니 어느 정도 증명이 됐지 않겠습니까?”
“하하, 제 신뢰도가 높은 거 같아서 기분이 좋네요.”
“저와 생사결을 펼치시고픈 게 아니면 아무나 소개시켜주진 않으시지 않겠습니까.”
“…….”
“생사결을 펼칠 생각이셨던 겁니까?”
“아, 아뇨.”
“어…….”
권아인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이사님은 연애가 매우 매우 고프신 거란 말씀이시죠?”
“해도 좋고 아니어도 좋단 느낌…….”
“뭐예요 그게.”
“아인 씨.”
성필이 단호하게 말했다.
“한 이사님은 너무 오랫동안 외로우셔서 본인이 외로운지도 모르는 상태이신 거예요.”
“박 이사님처럼요?”
성필이 살포시 눈을 감았다. 그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저는…… 아이돌이…… 있으니까요…….”
“연예인도 차버리신 박 이사님은 그렇다 치고요.”
“이젠 회사에 세이코 씨 얘기도 퍼진 거예요? 우리 애들 진짜 안 되겠네. 내 얘기가 공공재야 뭐야.”
“한 이사님은 그럼 아무나 대시하면 막 받아들이시는 상태란 거예요?”
권아인이 농담인 양 어조를 하이톤으로 바꾸어 말했다.
“막 제가 은근슬쩍 사귀자고 농담해도 진짜인 줄 알고 넙죽 절하신다거나?”
“저도 눈치는 있습니다. 젊었을 때라면 순수한 호의로 받아들이겠지만, 지금 저는 늙었으니…….”
한구인이 추욱 쳐졌다.
“그런 일은 벌칙 게임에서밖에 벌어지지 않는단 걸…… 압니다…….”
“그러며언…….”
권아인의 말이 끊겼다.
한구인의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기 때문이다. 그는 숙련된 태도로 즉시 전화를 받았다.
“예, 가로 엔터 한구인 이사…….”
그의 입이 뚝 다물어졌다.
잠시 후, 전화를 끊은 그가 벌떡 일어나 성필에게 외쳤다.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한 이사님 방송 데뷔 축하드립니다!”
한구인, 연애 관찰 예능 출연 결정!
그리고 잠시 후, 또 성필에게 연락이 왔다.
[아예 두 분 다 나오실래요?]
“으에?”
박성필, 한구인.
연애 관찰 예능 동반 출연 결정!
“아, 아니 저는…….”
그때 한구인이 다가와 성필의 어깨를 꽉 쥐었다.
“제가 나가서 ‘애플 크러쉬’를 추고, 박 이사님이 ‘우파루파’를 추시면 되겠습니다. 분골쇄신하여 소녀연맹을 조금이라도 더 알립시다. 같이 로드 매니저로 뛰던 시절의 추억을 되살리면서요.”
“…….”
출연 확정!
* * *
‘넥타르 댄스 챌린지’에 소녀연맹 멤버 몇몇이 참가했다.
에리카는 소녀연맹의 인성질로밖에 느껴지지 않았지만, 주변에선 다르게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예를 들어 지금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하는 매니지먼트 1팀장.
“옛날에 네가 소녀연맹이 ‘뉴아사’ 나갔을 때 도와줬었잖아.”
에리카가 세이코의 ‘롯폰기의 아방튀르’를 커버해줘서, 한국에 세이코란 가수의 대단함을 알렸던 일이 있었다.
소녀연맹 입장에선 은혜를 입은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거 때문 아닐까. 경쟁자이지만 서로서로 돕는 거지.”
여전히 에리카는 소녀연맹의 인성질로 생각했지만, 1팀장의 해석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언니, 아라 씨 보십쇼. 춤 잘 춤미다.”
진저는 여느 때처럼 조아라에게 빠져서, 조아라가 춘 ‘넥타르 댄스 챌린지’를 보여주었다.
“멋지지 않슴미까?”
“진저, 그만 놀고 연습해야지.”
“아, 죄송함미다…….”
진저가 시무룩해져서 연습실 중앙에 섰다.
‘에리카 언니 아직도 힘드신가 봐.’
요즘 에리카가 바뀌었다.
에리카는 때때로 무서운 사람이다. 하지만 평소엔 한없이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다.
회사 사람들 모두 에리카를 좋아한다.
아니, 세상에 에리카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에리카는 그 빛을 잃어갔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사는, 벚꽃처럼 화려하게 일렁이는 아우라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한때 피는 벚꽃과 같이 시들어가는 듯 보였다.
‘기운을 차리게 해드리고 싶은데…….’
진저로서는 그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자, 그럼.”
에리카가 연습실을 둘러보았다.
스포츠 음료 애호가 김민주는 또 화장실에 갔고, 진소유는 여전히 구석에 앉아서 핸드폰을 보는 중이었다.
며칠 전부터 계속 ‘하양이가 언제 우리 챌린지 영상 올릴지 몰라’라면서, ‘넥타르 댄스 챌린지’ 태그가 붙은 영상을 초 단위로 검색 중이었다.
그거 외엔 일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소유야, 이제 그만하…….”
“음?”
폰만 바라보던 진소유가 고개를 갸웃했다.
진저와 에리카의 이목이 그녀에게 집중됐다. 설마, 정말 장하양이 올린 챌린지 영상을 찾기라도 한 것일까?
그렇다면 정말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이거 가로 엔터 박성필 이사님 아니야?”
진소유가 폰을 에리카와 진저의 방향으로 돌렸다. 화면 안에는 능숙하게 ‘넥타르’의 하이라이트를 추는 성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