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0화
평범한 교실의 풍경.
창가 뒷자리에 앉은 남학생은 선생의 수업을 듣고 있다. 대충 들리는 말을 교과서에 필기하던 학생은 문득 창문을 바라본다.
창밖으로 푸른 물이 가득 차 있다.
학교는 바다 안에 잠겨 있다. 창밖으로는 우중충한 빛깔 속에서 헤엄치는 이름도 모를 물고기가 가득하다.
학생은 한숨을 쉬더니 다시 교과서로 눈을 돌린다.
지루함만이 이어지는 일상.
그 순간.
쨍그랑!
누군가 창문을 발로 차 부수며 교실로 들어온다. 푸른 물결에 실려 돌고래 튜브와 함께 나타난 그녀는 물바다가 된 교실 가운데에 착지한다.
검은색 수영복 바지와 래쉬가드, 그 위에 붉은 구명조끼를 입은 그녀.
[사랑의 응급구조 요원!]
우효민이 창문 쪽으로 손을 뻗었다.
물고기들이 마이크를 가져와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녀는 마이크를 입에 가져가는 동시에, 반대 손으로는 브이를 학생에게 내민다.
[러브 레스큐, 효민!]
교실 안은 난장판이 됐다. 여기저기서 경악의 비명과 우왕좌왕한 움직임이 퍼져나갔다.
하지만 물 범벅이 된 남학생은 엉덩방아를 찧은 채 우효민을 올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한다.
[지루함에서 너희들을 구하러 왔어!]
우효민이 마이크로 사랑의 화살을 쏜다.
일상의 관성에 물든 학생들과 교사는 도망가려 하지만, 우효민의 공격을 맞곤 정신을 차린다.
구조 작업을 끝낸 우효민은 이마를 닦곤 쓰러진 학생에게 손을 내민다.
[웃어.]
우효민이 미소 지었다.
[웃게 해줄게!]
남학생은 운명을 직감하고 우효민의 손을 맞잡는다. 그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진다.
[지금까지 많이 지루했지?]
이건.
[이제 걱정하지 마!]
일상에서 기적을 찾는 이야기.
[가자!]
남학생은 우효민을 따라, 아니.
우효민에게 구조되어, 한없이 갑갑하기만 한 학교를 탈출한다.
왠지 모르겠지만 돌고래를 타고서.
‘이런 나…… 싫지 않을지도?’
여름이었다.
* * *
“우효오오!”
“고맙다 우효민수야!”
“초(超)럭키다!”
관객석에선 열광적인 환성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분명 우효민의 팬은 소수겠지만, 그 열기는 케이어스의 팬덤 못지않았다.
우효민은 1위 트로피를 들고 당당히 무대 앞으로 나섰다.
“고마워요 럭키들!”
‘럭키’는 우효민의 팬덤 이름이었다.
포유가 해체되고도 우효민의 팬이길 자처하고, 우효민의 팬으로 남길 택한 이들.
우효민은 라이브 방송에서 ‘여러분들이 저를 택해주신 걸 인생 최고의 행운으로 만들어드릴게요’라고 했었다.
거기서 따온 팬덤 이름이었다.
“정말, 정말 고마워요!”
우효민의 눈가에 눈물이 번져갔다.
포유가 해체되고 나서 앞으로 어떻게 될까 싶었다. 한국은 솔로 아이돌 가수의 무덤이나 다름없는 곳이 되었으니까.
프로젝트 그룹 포유의 리더였지만, 다른 멤버들에 비해 주목받지 못한 자신이 잘 헤쳐 나갈 수 있을까 걱정도 됐었다.
“여러분이 주신 이 순간을…….”
걱정했지만, 결국엔 이 자리에 올랐다.
우효민은 자신이 잘났기에 음방 1위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자신을 지지하고 믿어주는 팬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절대 잊지 않을게요!”
우효민의 이번 타이틀곡인 ‘러브 레스큐’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물을 닦지 않고 마이크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앙코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없이 빛나는 무대 위에서, 사랑하는 팬들을 향한 마음을 담아.
“지루함에서 너희들을……!”
우효민이 외치자, 럭키가 답했다.
“구하러 왔어―!”
* * *
[효민 - Love Rescue]
[현재 주간 음원 차트 3위]
[앨범 초동판매량 56,777장]
* * *
어두운 작업실.
혼자만의 공간.
윤상열은 그곳에 앉아 음악을 들었다.
주요 음원 차트의 일간 TOP10을 듣는 건 그의 오래된 일과 중 하나였다.
눈을 감고 음악을 감상하던 도중, 그는 갑자기 눈을 떠서 음원 크레딧을 확인했다.
[효민 - Love Rescue
작곡 - 엘릭, 신서윤, 에펠탑 브라더즈, 우효민
편곡 ― (생략)]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는 순서는 곡의 기여도로 결정된다.
우효민은 작곡란의 말미에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기여도가 한미한 수준일 것이다. 고작해야 멜로디 라인 살짝 바꾼 게 전부겠지.
‘언론에 실을 홍보 문구 한 줄이라도 더 추가하려고 용을 썼군.’
어쨌든, 아무런 쓸데없는 정보였다.
윤상열은 러브 레스큐의 메인 작곡가만 알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엘릭. 소녀연맹에게 ‘팅글’이란 곡을 넘긴 작자였다.
잠시 불쾌감에 인상을 찌푸린 윤상열은 곡 분석을 시작했다. 직접 프로그램으로 찍어보면서 어떤 악기를 사용했는지, 레퍼런스는 무엇인지 확인했다.
‘00년대 초중반의 팝 펑크, 팝의 히트곡 스타일을 차용한 건가. 확실히 이 시대로 다시 가져오니 새롭긴 하군.’
윤상열은 수첩에 몇 마디를 끄적였다. 그는 어느새 수첩이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른 것을 눈치챘다.
글로브가 데뷔한 후, 몇 주간 참 부지런하게도 새로운 그룹과 곡에 대한 내용을 필기해왔다.
“……글로브.”
We are the One.
We are the World.
Globe.
이 구호는 석세스 엔터의 출가외인인 성필이 만들었음에도 아직까지 사용되고 있었다.
윤상열이 구호 따위 어찌 됐든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도 있었지만, 사실 그는 이 구호가 썩 마음에 들었었다.
‘세계 그 자체가 될 소녀들…….’
이젠 아무래도 좋지만 말이다.
글로브의 한계는 명확하다.
데뷔 3년 차에 이른 그녀들은 케이팝 팬에게 어필할 특징적인 요소가 없다시피 했다.
대기업도, 중소기업도 아닌 어중간한 중견 기업에서 탄생했다는 적당한 서사.
딱히 모자란 점도 특출난 점도 없는 고만고만한 멤버들.
그렇다고 컨셉에 과한 변화를 주면 기존의 팬을 떠나보낼 위험성이 너무 크다.
‘태생부터가 글러 먹었어.’
적당한 컨셉으로 적당히 굴리면서 회사의 자금줄로 이용하면 될 일이다.
그래, 그러면 된다.
그러면 될 거다.
“라희야!”
그때 문이 열리면서 매니지먼트 1팀장의 비명이 작업실을 울렸다.
과연 갑자기 들린 외침엔 윤상열도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황급히 돌아보자, 라희가 서 있었다. 그 뒤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1팀장이 보였다.
“PD님.”
라희가 윤상열을 불렀다.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마치 ‘할 이야기가 있으니 시간을 내라’고 협박하는 듯했다.
윤상열은 라희의 어깨 너머로 1팀장을 보았다. 그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서 있기만 했다.
라희를 말리러 들어가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었다.
“나가봐.”
“아, 예!”
1팀장이 공손히 문을 닫고 사라졌다. 그 조심스러운 움직임에선 안도감마저 보였다.
이윽고 어두운 작업실 안에서 윤상열과 라희가 마주 보게 되었다.
윤상열은 앉아서.
라희는 서서.
라희가 성큼성큼 윤상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1위 했어요.”
두 개의 트로피였다.
윤상열이 트로피 아래쪽을 읽으니, 케이블 음방이 아니라 공중파 음방의 것이었다.
이번 주, 글로브는 두 개의 공중파 음방에서 1위를 얻어냈다. 나머지 하나는 우효민이 차지했고 말이다.
“케이어스, 이겼어요.”
윤상열은 침묵을 지켰다.
굳이 여기서 구구절절 설명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1위 한 번 했으면 뭐? 케이어스가 글로브나 우효민과 동급이 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어쨌거나 라희는 이야기를 이었다.
“팬분들 덕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구걸로 얻어냈다느니 뭐니 하지만요. 또, 팬 중에서도, 제가 도와달라고 안 했어도 1위 했을 텐데 왜 굳이 오점을 만들었냐고 하시는 분도 계세요.”
물론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팬…… ‘어스’ 덕분…… 이에요.”
라희는 트로피를 살짝 더 앞으로 내밀었다. 윤상열에게 ‘받으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치만, PD님 덕이기도 해요. 이거 드릴게요. 가지세요.”
윤상열은 받지 않았다.
트로피는 글로브를 위한 것이지 윤상열을 위한 게 아니었다. 음악 시상식 같은 곳에서 주는 프로듀싱 부문 상이면 몰라도, 자신의 물건이 아닌 것을 작업실에 두고픈 마음은 없었다.
“저는 PD님이 저희한테 주는 곡을 들을 때마다 느껴요. 저희 한 명씩 전부 생각하면서 쓰셨구나 하고요. 저 말고 다른 애들도 느낄 거예요. 물론 PD님의 방식은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사지만…….”
“그런 얘기.”
드디어 윤상열이 입을 열었다.
“너한테 들을 게 아니야.”
라희는 싱긋 웃기만 하고 이야기를 이었다.
“반감을 사지만, 그래도, 저희는 한 팀이라고 생각해요.”
“……한 팀?”
“받아주세요.”
라희가 기어코 앉은 윤상열의 다리 위에 트로피 두 개를 올려두었다.
“저희의.”
그러고 라희는 두 걸음 물러났다.
“프로듀서님.”
윤상열은 자신의 다리 위로 올라온 두 개의 트로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척 느끼기에도 가벼운 것이 싸구려임이 틀림없다.
총 여섯 개의 음악 방송에서 주마다 1위 출연자들에게 주는 것. 1년에 약 300개의 트로피가 만들어진다.
무게감이라곤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그게, 저희가 PD님에게 바치는 처음이자 마지막 승리예요.”
무게감은 없을 텐데, 윤상열은 다리 위로 올라온 트로피가 무겁게만 느껴졌다.
“PD님의 말마따나, 저희는 이제 어디에도 닿을 수 없겠죠.”
“…….”
“PD님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받아들일게요. 하지만 저희는 멈추지 않을 거예요. 계속 나아갈 거예요. 지금까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라희가 허리를 숙였다.
“앞으론 저희를 버리셨다고 생각할게요.”
“……어쩔 생각이냐.”
“모르겠어요. 총괄 프로듀서가 마음을 거둔 팀은 어떻게 되나요? 잘은 모르겠지만, 옛날처럼은 안 되겠죠. PD님은 저희가 좇아야 할 별을 걸어두셨지만, 지금은 그걸 치우셨어요. 아마 저희 대신 후배들에게 그 별을 보여주시겠죠. 저희는…….”
라희가 숙였던 허리를 들었다. 그녀는 작별에 어울리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새로운 별을 찾아볼게요.”
작업실은 다시금 윤상열 혼자만의 공간이 됐다. 라희가 나간 후, 그는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라온 두 개의 트로피를 들어 보였다.
공중파에서 따낸, 케이어스를 제치고 얻어낸 1위의 증거품이었다.
“…….”
윤상열은 트로피를 책상 위에 올려둔 후 다시 수첩을 들었다.
수첩은 마지막 페이지에 달해 있었다. 가장 첫 장을 보았다. 그곳엔 그룹 ‘글로브’를 위한 여러 방침이나 컨셉, 프로듀싱 스타일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건 몇 페이지 이어지지 않았다. 최근에 바꾼 수첩이라, 글로브와 관련된 내용은 얼마 없었다.
“…….”
윤상열은 수첩을 보느라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풍경이 변해 있었다.
초록 들판의 정원이었다.
윤상열은 쪼그려 앉은 채 지평선 멀리까지 이어진 들판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때, 저 멀리서 피어난 아름다운 네 송이의 꽃이 눈에 들어왔다.
참으로 아름답게도 피었다.
윤상열은 시선을 자신의 아래로 돌렸다. 초라한 일곱 송이의 꽃들이 보였다.
‘글로브.’
그중 두 개는 억지로 뜯은 흔적이 역력했다. 꽃잎의 빛깔은 무르익지 못했고, 강제로 열린 잎은 힘없이 아래를 향해 있었다.
그래도 펴긴 폈다.
다른 네 개는 꽃봉오리만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
윤상열이 기대한 색은 아니지만, 다른 꽃들을 감싸듯 자애로운 빛을 뽐내며 피어난 녀석이 하나 있었다.
그는 다시 저 멀리, 빼어나게 아름다운 네 송이의 꽃으로 눈을 돌렸다.
‘아름답다, 아름답지만.’
자신이 피운 게 아니다.
윤상열은 일곱 송이의 꽃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의 정원에 피어난 것들이다.
잡초가 자라지 않도록, 땅에 양분이 가득하도록, 주변에 태양 빛을 가리는 게 없도록, 신경 쓰고 또 신경 썼다.
비록 심을 때부터 피어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들이라지만, 윤상열은 자신의 손에서 탄생한 꽃들을.
꽃들을.
이 꽃들을…….
“…….”
그 감정은 영원히 언어로 표현하지 못 할지도 모른다. 그러기엔 윤상열의 자존심이 너무나 강했으니까.
윤상열은 수첩을 양손으로 잡았다.
글로브의 후속 그룹을 위한 아이디어가 모두 모인 수첩.
윤상열이 그것을 시원하게 찢었다. 그리고 비료처럼 꽃 주위로 뿌렸다. 흰 종이가 하늘하늘 꽃을 향해 쏟아졌다.
‘아이돌은 일반적인 아티스트와 다르다.’
아이돌이 표현하는 건 개인의 자아가 아니다.
프로듀서의 자아다.
아이돌은 프로듀서의 자아와 개성, 능력과 사상이 표상이 되어 드러난 물건이다.
그러니, 아이돌을 부정하는 건 곧 프로듀서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글로브를 놓기로 한 후, 계속해서 심장이 찢겨갔던 건.
‘나는 나를 포기할 수 없어.’
글로브는 윤상열의 조각이나 마찬가지다. 그의 몸을 이루는 부분으로서 기능한다. 그러니 버리고 말고 할 것도 없다.
프로듀서로서, 주인으로서 벗을 수 없는 책임을 지니고 함께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정호환, 너의 한계는 네 부분인 다키스트를 부정했단 데 있었다.’
윤상열은 그와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은 정호환처럼 아이돌들을 다음 세대 그룹을 위한 프로토타입으로 여기진 않는다.
애초부터 ‘븨이에스’를, ‘케이어스’를 위한 교육비이자 희생양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글로브는 내가 만들었다.’
그러니 이것저것 잴 것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품어야지.’
* * *
새벽, 에리카는 숙소 방 안에서 기타를 쳤다.
기타를 치다가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으면 작곡 프로그램에 기록했다.
그러길 계속 반복했다.
“언니.”
진저는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눈을 비비며 에리카의 방을 찾았다.
“샵 가야 함미다. 이제 나와야 함미다.”
“응, 알겠어.”
케이어스 멤버들은 샵으로 향해 메이크업과 헤어 스타일링을 받았다.
샵에서 나오니 새파란 하늘이 반겨주었다. 밤이 가시지 않았지만, 아침이 찾아온 시각. 아침과 밤이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동거를 이어가는 시간이었다.
케이어스 멤버들은 짙푸른 공기 속에서 밴에 타 간단히 도시락으로 아침을 때웠다.
“에리카 언니, 안색이 안 좋슴미다.”
진저가 에리카를 걱정하며 말했다. 에리카는 아무것도 아니란 듯 고개를 저었다.
에리카는 새벽까지 작곡했던 멜로디를 입으로 흥얼거렸다. 그러면서 다른 멤버들의 기색을 살폈다.
다들 놀랍도록 평온해 보였다.
‘……어째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케이어스는 공중파 음방들에서 명예의 전당 입성에 실패했다. 그 말인즉, 앞으로 2주간 소녀연맹과 마주해야 한단 뜻이었다.
음원 차트를 박살 내는 중인 ‘애플 크러쉬’와 맞대결을 펼쳐야 한다. 아니, 그건 대결이란 이름도 뭐하다.
‘질 거야, 확실하게.’
소녀연맹은 케이어스보다 3주 늦게 컴백했다. 케이어스의 음원 파워가 수그러들고, 반대로 소녀연맹의 음원 파워는 정점에 달했을 시기다.
‘그런데 다들 어떻게 이렇게 평온해?’
에리카는 김민주를 보았다.
‘민주, 넌 누구보다 승리를 갈망했잖아. 승부에 민감하잖아. 작은 승부라도, 아니, 그게 승부의 구색만 맞추어도 쉽게 흥분했었잖아.’
에리카는 진소유를 보았다.
‘소유, 넌 뚜렷한 자기 확신이 있잖아. 네가 최고라는 확신이. 근데 그게 깨지게 생겼어. 네가 항상 고고하게 관망만 할 순 없는 처지란 걸 깨닫게 생겼다고.’
에리카는 진저를 보았다.
‘진저, 넌 죽을 만큼 노력해왔잖아. 그건 승리를 약속받기 위함이었어. 케이어스가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영원토록 승리를 약속받기에, 그 약속을 얻고자 죽도록 노력했잖아.’
그런데.
모두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앞으로 이어질 2주 동안 전부 박살 날 상황인데.
‘너희들은 왜?’
어째서 그렇게나 아무런 동요도 안 보일 수 있어?
에리카는 손마저 미세하게 떨었다.
그녀는 하늘로부터 영원히 패배를 모를 운명을 선사받았다. 그렇게 믿어왔다.
‘그럴 텐데…….’
사람들은 쉽게 게임에 빠진다고 한다.
성취감이 있으니까.
게임에서 얻는 성취감은 현실에서 비교 대상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에리카는 굳이 게임 같은 것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인생에서 뛰어드는 어떤 분야마다 짜릿한 승리가 뒤따랐으니까.
옛날에는 그게 지겹기도 했지만, 아니었다.
승리는 몇 번을 해도 즐겁고 행복하다. 그 인생이 영원토록 이어질 거란 건 축복이나 다름없겠지.
‘그런데, 그런데…….’
그 당연한 진리가 깨지게 생겼다.
앞으로 몇 시간 뒤…….
“에리카.”
에리카가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백설하가 있었다.
‘앞으로 몇 시간 뒤…….’
아니, 앞으로.
‘고작 2시간 뒤.’
어느새, 시간은 생방송 1시간 전으로.
장소는 방송국 대기실이 있는 복도 앞이었다.
에리카는 아침부터 몇 시간을 거의 넋 놓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마취에 깨어난 사람처럼 어렴풋하게 정신이 깨어나기 시작했고.
방금 깨어났다.
“아, 드디어 만났다. 아까 인사하러 갔는데 대기실에 없어서.”
백설하가 수줍게 미소 지으면서 다가왔다. 다가오는 백설하를 보고, 에리카는 우습게도 두려움을 느꼈다.
마치 저승의 판관이 다가오는 듯했다.
백설하가 에리카 앞에 섰다.
‘아.’
그제야 에리카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내가 이렇게나 두려워하는 이유.’
분명 에리카는 성필에게 말했었다.
음방 1위, 고작 몇 번의 승리 정도, 얼마든지 소녀연맹에게 줄 수 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나 겁을 먹는 건.’
에리카는 소녀연맹의 콘서트를 떠올렸다.
리카의 디제잉 퍼포먼스 무대를 떠올렸다. 그녀가 즉흥으로 선보이는 디제잉과, 그녀가 작곡했다는 곡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리고 현재 에리카의 앞엔 백설하가 있다.
‘애플 크러쉬’와 ‘인트로: 러브’ 앨범을 프로듀싱한 아이돌이, 에리카의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부러워하는 것이다.
또한 동경하는 것이다.
백설하의 창조성을.
동시에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창조성으론, 에리카는 영원히 그녀들과 겨루고 승리할 수 없을 테니까.
KS 엔터. 성공을 만들어내는 기계들이 있는 한, 에리카가 지닌 조막만 한 창조성은 영원히 고개를 쳐들지 못한다.
‘애초부터 승부에 임할 수조차 없기에…….’
에리카는 소녀연맹과 만나는 것을, 백설하와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은 오늘, 2시간 후 실현된다.
* * *
소녀연맹.
미니 앨범 ‘인트로: 러브’.
초동판매량: 239,152장.
‘애플 크러쉬’ 뮤직비디오, 공개 약 10일 차 조회 수 5,000만 회.
‘애플 크러쉬’ 음원, 현재 워터멜론 차트 주간 2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