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40화 (440/760)

439화

성필은 새로운 선반을 주문했다.

박스를 뜯어 조립하고 나니 5층짜리 선반이 모습을 드러냈다.

약 1시간을 들여 가구 배치를 조금씩 바꾸어 선반이 들어갈 자리를 마련했다.

“다행이다. 딱 맞네.”

성필은 내구도를 점검하기 위해 선반의 각 층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두었던 거치대를 가장 위층에 올렸다.

투명한 크리스탈 재질의 거치대는 책 하나 정도를 놓을 만한 크기였다.

성필은 그곳에 ‘인트로: 러브’ 앨범을 두었다. 그리고 앨범 구성품인 굿즈들을 가장 예쁘게 보이는 형태로 배치했다.

“으음.”

성필은 고민되는 게 하나 있었다.

‘인트로: 러브’의 구성품 중에는 멤버들의 종이 스탠드가 있었다.

멤버들의 전신 사진이 빳빳한 종이 재질로 인쇄되어, 순서에 맞추어 발판을 조립하면 평평한 곳에 세워 둘 수 있는 굿즈였다.

당연히 성필은 멤버별 스탠드를 전부 가지고 있었는데…….

‘앨범 앞에 둘까. 아니면 앨범 옆?’

고민을 이어가던 성필은, 멤버들의 종이 스탠드가 앨범을 빙 둘러 감싸는 형태로 배치했다.

그제야 성필이 만족스레 웃었다.

그렇게, 선반의 5층은 소녀연맹 ‘인트로: 러브’ 앨범과 굿즈들로 가득 차게 됐다.

성필의 시야가 아래로 내려왔다.

‘앞으로 4층, 3층, 2층, 1층도 차게 되겠지.’

그곳엔 다른 멤버들이 프로듀싱한 앨범과 굿즈들이 들어가게 될 것이다.

언제 이 선반을 다 채우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그날이 올 게 틀림없다.

성필은 한동안 선반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자, 그럼.’

성필은 취미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모니터 옆에 있는 탁상시계를 보며 만족했다.

‘자기 전까지 1시간 정도는 해도 되겠어.’

성필은 아이튜브의 바다를 돌아다니면서 케이어스 관련 영상을 찾았다.

케이어스 관련 영상이라고 해봤자 다 비슷하다. 편집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매력이 있긴 하지만, 성필은 원본까지 전부 보았기에 큰 감흥은 없었다.

‘이 사람 편집 재밌게 하네.’

케이어스 진저의 발음이 또렷해질 때만을 모은 영상이었다.

진저가 한국에 온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슬슬 한국어가 유창하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케이어스의 팬덤인 ‘유스’는 진저의 발음이 유창해지는 순간을 ‘컨셉 붕괴’라고 불렀다.

‘일부러 발음을 못 하는 것도 아닐 텐데.’

팬들이 진저를 놀리려고 하는 말이겠지만, 진저는 내심 슬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 팬들과 더 잘 소통하고 싶어서 한국어를 연습하는 것일 텐데, 팬들은 진저가 한국어를 잘하면 ‘컨셉 붕괴’라고 한다.

오히려 발음이 씹히는 쪽을 선호하는 것이다.

‘뭔가 노력이 부정받는 기분 아니실까.’

그렇지만, 성필도 진저의 발음이 일정 수준 어눌한 쪽이 더 매력적이란 것을 인정했다.

‘전생에서도 해체할 때까지 진저 씨의 발음은 안 고쳐졌으니까.’

노래할 때를 제외하고, 진저의 말투는 데뷔할 때부터 크게 바뀌지 않는다.

어쩌면 팬들이 자신의 어눌한 말투를 좋아한단 사실을 알고 한국어 공부를 그만하게 된 건 아닐까.

그리 생각하면 씁쓸하기도 하다.

“…….”

성필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이곳은 자신의 집이다. 다른 누군가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필은 인기척이 느껴지진 않는지 확인했다.

스스로도 찔리는 일을 하기 전의 신호였다.

성필은 의자에서 일어나 전신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폰으로 아이튜브에 접속한 후, ‘넥타르 댄스 챌린지’를 검색했다.

케이어스 멤버들이 약 15초의 짧은 시간 동안, 이번 컴백 타이틀곡인 ‘넥타르’의 하이라이트를 간소화시켜 추는 영상.

성필은 그것을 보면서 조금씩 춤을 연습했다.

‘당첨자 다섯 명한테 친필 사인 앨범 준다니까.’

선정 기준은 랜덤일 것이었다.

이렇든 저렇든, ‘넥타르’와 비슷한 모양새가 나오게 추면 된다.

약 15초의 안무를 체득한 성필은 폰을 침대에 던지고 본격적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약 20분 정도 연습하자 어느 정도 태가 났다.

‘이 정도면 됐겠지.’

이제 찍어서 올리기만 하면 된다.

‘넥타르 댄스 챌린지’ 관련 영상만 수천수만 개다. 그중에서 성필의 영상이 우연찮게 소녀연맹이나 케이어스 멤버들에게 발견될 일은 없다.

성필의 영상이 이벤트에 당첨되지만 않는다면야.

‘수십만 분의 일 확률일 텐데 당첨될 리 없지.’

이 이벤트에 참여하는 의의는, 챌린지 참여 영상 수가 늘어난다는 것에 있다.

참여자 수는 곧 케이어스의 영향력으로 이어진다. 케이어스를 위해서라도, 팬들은 당첨 확률이 극악한 챌린지에 도전하는 것이다.

재밌기도 하고 말이다.

성필은 영상 녹화를 시작한 후, 폰을 올려둘 만한 곳을 찾았다. 그의 눈에 새로 산 선반이 눈에 띄었다.

소녀연맹의 굿즈가 올려져 있는 선반이.

“…….”

성필은 불현듯 현타가 와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아직도 케이어스의 팬일까?’

앨범도 사고, 영상도 찾아보고, 고화질 사진도 보는 족족 저장하니 팬이라고 해야겠지.

하지만 옛날만큼의 열정이 있느냐고 한다면, 아니라고 답해야 한다. 특히 이번 소녀연맹의 컴백으로 의견이 완전히 뒤집혔다.

‘케이어스의 팬이었던 시절이 전생까지 합쳐서 10년이 넘었잖아.’

그러면, 이제 그만 식어도 된다.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만큼 오래도록 팬질을 해왔다.

그리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공허했다.

여태껏 케이어스는 성필의 버팀목이었다. 그가 아이돌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였다.

자신에게도 아직 누군가를 이토록 열렬하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다는, 그런 증거였다.

‘그런데 이젠…….’

케이어스를 사랑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케이어스가 사랑받을 힘을 잃은 것일지도 몰랐다.

성필은 녹화를 종료하고 선반의 5층을 바라보았다.

‘인트로: 러브’ 앨범을 보자마자, 백설하가 프로듀싱하는 동안 겪었던 수많은 고난이 떠올랐다. 힘든 과정을 거치고 마침내, 백설하는 성공을 거머쥐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더랬다.

성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우리 애들을 좋아하는 건 팬심이랑은 약간 달랐는데…….’

성필이 보는 건 아이돌로서의 그녀들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모습이었으니까.

게다가 깨어 있는 내내 그녀들을 마주하고 있는 데다가 매사에 열정적으로 대한다.

하지만 이제는 진심으로 그녀들의 팬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설하는 더욱더.’

이미 그녀들을 캐스팅하는 과정에서 아이돌이 갖추어야 할 신비의 장막은 깨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이제, 성필은 백설하에게서 신비를 본다. 아우라를 본다. 인간을 인간 이상의 존재로 만들어주는 에너지를 느낀다.

백설하는 아티스트다.

매일 마주하며 대화를 나누는데도, 먼발치에서만 지켜보던 아이돌과 대면하는 것처럼 가슴이 설레 온다.

‘그게 우리 애들이, 설하가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증거야.’

성필은 너무나 팬답게 바랐다.

‘설하야, 네가 바라는 걸 꼭 얻을 수 있길 기도할게.’

가로 엔터의 이사이자 소녀연맹의 프로듀서.

그 모든 입장을 버리고, 성필은 순수하게 백설하를 응원해주었다. 그녀가 바라는 대로 세상이 움직이길 기도해주었다.

‘이번에야말로 반드…….’

[케이어스 진저 님이 리트잇함:

‘넥타르 댄스 챌린지’ 관련 글입니다. 유스들이 어렵다고 하는 파트 있다고 해서 강의를 찍어봤습니다. 도움이 됐길 바랍니다.]

“…….”

성필은 진저의 강의 영상을 본 후, 영상을 찍어서 챌린지에 참여했다.

그리고 아무 일 없단 듯 선반 앞에 서서 다짐했다.

‘얘들아,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이기자.’

투쟁, 해방, 소녀, 연맹, 승리.

* * *

글로브의 팬덤인 ‘어스’는 유난히 순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SNS든 커뮤니티건 시비가 걸리는 일도, 시비를 거는 일도 드물었다.

다른 그룹의 꼬투리를 잡아 패지도 않고, 다른 팬덤 커뮤니티에서 분탕질도 치지 않고, 괜스레 글로브를 자랑하느라 다른 그룹을 내려치는 일도 없었다.

그런 어스들에게 사상 최대의 사건이 벌어졌다.

[승리를…… 주세요…….]

글로브의 리더인 라희가 갑자기 방송을 켜곤 팬들에게 부탁했다. 성적을 죽도록 신경 쓰니 이길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이다.

이에 글로브 팬덤은 우왕좌왕했다.

순한 이들만 모여 있는 만큼 조직적으로 움직인 경우가 드문 ‘어스’였다.

해본 거라곤 스트리밍 보은 정도가 고작이니, 조직력이 있을 리 없었다.

[어떡하지? ㅠㅠ]

하지만 손을 놓지는 않았다.

어스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글로브가 데뷔 이래 최대의 성공을 구가하는 지금, 어째서 라희가 그런 말을 했을까?

팬들은 석세스 엔터의 현 상황에서 이유를 찾았다.

[회사가 많이 힘든가 봐…….]

‘인민’이었으면 진작 회사를 쥐어팼겠지만, 어스는 그러지 못했다.

대신 그들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스트리밍하고, 앨범을 더 사서 인증하고, 멤버들의 영상 조회 수를 올려주고, 소심하게나마 다른 커뮤니티에 글로브를 영업했다.

하지만 산발적이었을 뿐이었다.

결국, 그나마 글로브 팬들이 조직적으로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글로브 마이너 갤러리’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도와달라고 해보자.]

누구에게?

[‘엡실론’ 팬덤.]

엡실론.

석세스 엔터 소속 보이그룹.

석세스 엔터의 대들보를 마련했다고 평가받는 그룹으로, 그들의 팬덤은 기가 세기로 유명했다.

이름도 없는 중소기업의 보이그룹, 엡실론. 그 초창기 팬들은 전투적으로 자신들의 그룹을 결사적으로 옹위해왔다.

‘어차피 한두 해 지나면 없어지겠지’란, 중소 보이그룹에게 쉽게도 쏟아지는 무시와 비난에 맞서 오래도록 싸워온 이들이다.

[‘델타’한테 부탁해보자.]

엡실론은 그리스어 알파벳으로 E를 뜻한다.

그들의 팬덤인 델타는 D, 즉 엡실론보다 먼저 존재했던 이들이란 뜻을 지니고 있었다.

엡실론은 자신들의 팬덤에게 그토록 소중한 의미를 주었으며, 팬덤도 그에 보답해왔다.

긴 세월 엡실론에 헌신해온 코어한 팬이 많은 게 특징이며, 한때는 사상 최악의 팬덤이라고도 불린 게 바로 ‘델타’인데…….

[돕자!]

‘델타’는 빠르게도 결론을 내렸다.

그들도 라희의 라이브 방송 소식을 진작 접하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석세스 엔터의 안위를 걱정했었다.

석세스 엔터가 위험하면 글로브건 엡실론이건 존재할 수가 없으니까.

[글로브 이번에 성적 못 내면 회사 거의 망하나 봐!]

보이그룹 팬덤은 인터넷에서 가장 적극적이며 영향력이 강한 집단이다. 부정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 그 영향력은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제외하고, 무언가에 열광한 집단이 어디까지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델타’가 ‘어스’와 손을 잡았다.

[총공(총공격의 준말) 절차와 방법.]

이런 일에 잔뼈가 굵은 ‘델타’인 만큼 곧바로 지령이 사방으로 하달됐다.

음원 스트리밍, 음원 다운로드, 라디오 곡 신청, 아이튜브 뮤비 조회 수 상승, 야자수 뮤직 BGM 설정, 음악방송 투표, 트잇터 여론 주도,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장악, 글로브 관련 기사 댓글 도배 등등.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체계적인 절차로 실행되었다.

그리고.

[원래 케이어스에서 민주가 춤 제일 잘 춰?]

겸사겸사 ‘델타’는 글로브의 최대 적인 케이어스 팬덤의 분열을 유도했다.

[넥타르 보니까 민주가 춤 선이 남다르던데.

― 포지션은 없는데 메댄 제일 많이 서는 건 진저]

이렇게 상식적인 댓글이 달리면, ‘델타’는 곧바로 본격적인 공격으로 들어선다.

[멤버들 다 소중한데 급 가리지 마

― 내가 급 가렸음? 메댄 제일 많이 서는 게 진저랬지.]

이런 식으로 장작을 계속 부어 넣는다.

댓글엔 계속 정체를 숨긴 ‘델타’가 등장해서 누구의 편을 들어주거나 다른 사람을 까 내리고, 혹은 상식적으로 보이는 의견을 갑자기 내서 논쟁을 이상한 방향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들어간다.

몇 분, 혹은 십수 분 진행된 이 논쟁을 캡처해서 커뮤니티와 SNS로 퍼 나르는 것이다.

[케이어스 팬들은 그룹팬보다 개인팬이 많은 듯]

[이거 보니까 유스 중에 악개(악성 개인팬) 많은 거 확 체감된다]

[유스 커뮤는 걍 악개판임]

물론 글로브 팬덤인 어스는 이런 것까지는 몰랐다. 글로브가 여기저기서 화제가 되는 듯 보이니 기쁘기만 했다.

‘유스’는 난데없이 케이어스가 여기저기서 처맞고 있으니 어리둥절했지만, 어스가 그 원인이란 데까진 닿지 못했다.

아무튼 어스는 행복했다.

비록 본인들의 능력으로 글로브를 온전히 돕지는 못했지만…….

[얘들아 항상 응원해 ㅜㅜ]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을 위해서라면, 수단이 어떻든 상관없었다.

어스는 글로브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만 있다면 만족하고 또 행복했다.

그렇게, 사상 최초 석세스 엔터의 팬덤 연합은 커뮤니티와 SNS 여기저기서 총공격을 이어가길 반복했다.

* * *

곧 생방송의 끝을 장식할 1위 발표다.

무대로 나가기 전, 글로브 멤버들은 연습실에 모여 있었다.

“얘들아.”

라희가 말했다.

“우리가 1위 후보에 오를 건 확실해.”

1위 후보로 오르는 건 일반적으로 세 곡이다.

그중 케이어스와 글로브가 포함될 것이다. 그리고 이번엔, 글로브의 승리를 점칠 만한 점수가 모였다.

“지금까지…….”

라희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녀의 눈앞으로 글로브가 겪었던 힘든 시절이 지나갔다.

“지금까지, 우리 정말 열심히 했어. 그런데 이번에 우리가 후보로 올라서 케이어스를 이기게 돼도, 그건 완전히 우리 덕은 아니야.”

글로브의 팬들 덕분이다.

팬덤. 아이돌의, 아니. 대중 예술가의 모든 것.

세상 모든 이들이 열렬한 팬덤을 가지고자 한다. 팬덤은 예술가가 먹고살 수 있게 해주며, 동시에 예술가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알려주기도 한다.

“‘어스’에게 감사하자. 과분하게도 우리들을 사랑해주시는 분들에게, 항상 감사하자.”

글로브는 노력해왔다. 그건 자신들에게 열광해주는 팬을 위해서라기보다, 윤상열에게 인정받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달라야 한다.

물론 글로브가 사랑받는 건 윤상열의 프로듀싱 덕이기도 하다. 그가 준비한 안무와 곡, 컨셉이 대중을 매혹할 만큼 뛰어났다.

그래도 만약 이번에 케이어스를 이긴다면, 가장 큰 공은 팬에게 돌아가야 옳았다.

“얘들아.”

라희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가자.”

* * *

생방송의 마지막, 1위 발표.

케이어스는 음방의 마지막 무대를 장식했던 터라, 대기실로 돌아가지 않고 백스테이지에서 대기했다.

곧이어 음방에 출연했던 모든 아이돌과 뮤지션이 무대 위로 올랐다.

무대 위를 가득 채운 수십 명의 인원 가운데, 케이어스는 가장 주목받는 중앙 자리를 차지했다.

그곳에서 에리카는 양손을 공손히 앞으로 모은 채 서 있었다.

“…….”

얼마 안 있어 1위가 발표된다.

케이어스가 출연하는 음악 방송은 일주일에 세 개다. 케이블 음방엔 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음악 방송이다.

‘여기서 또 1위를 따내면 명예의 전당으로 가고, 그대로 음방 활동은 끝나.’

케이어스에게는 익숙한 일이다.

음악 방송 명예의 전당은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도, 케이어스에게 너무나 쉽게 자리를 내어주어 왔다.

‘이번에도 그럴 거야.’

그래야만 한다.

에리카는 손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손바닥을 마주하고 꼭 쥐었다.

이 감각, 옛날에 느껴본 적이 있었다.

‘소녀연맹이 아라베스크로 컴백했을 때.’

그때 아주 우연히도 소녀연맹이 케이어스를 제치고 1위를 달성했었다.

에리카는 그 일을 두고 성필에게 뭐라 한 적이 있었다. 뭐라 했더라.

‘고작 한 번뿐인 승리. 수십 번의 승부 중 고작 한 번…….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다고…….’

실제로 소녀연맹의 승리는 그 한 번이 전부였다. 이후로는 케이어스에게 1위를 계속 내줬어야만 했으니까.

이번에도 그 비슷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다만, 상황이 역으로 바뀌어서.

‘소녀연맹은 음원 성적이 높으니까.’

하지만 케이어스가 소녀연맹과 만날 리는 없다. 이번 주는 소녀연맹의 점수가 집계되지 않기에, 그녀들은 1위를 할 수 없다.

‘이대로 우리는 명예의 전당으로 올라간다.’

3주 연속 1위를 차지해서, 소녀연맹이 따라잡지 못하는 곳으로 올라갈 것이다.

그렇게 케이어스는, 에리카는 영원히 승리자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져서는 안 된다.

‘지고 싶지 않아.’

KS 엔터 사람들이 말했다.

케이어스는 전무후무한 성과를 거두었노라고. 몇 개월, 어쩌면 몇 년간 어느 걸그룹도 달성하지 못할 위업이나 다름없다고 말이다.

KS 엔터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었다.

케이어스가 음방 1위 한 번 놓친다고 축제가 끝나지는 않겠지만…….

‘나는 아니야.’

특히 이번에는 절대로.

에리카는 직감했다.

만약 이대로 케이어스가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지 못하고 2주 더 활동해야 한다면…….

‘역으로 소녀연맹한테 내리 질 거야.’

무대에 설 때마다 ‘1위는 소녀연맹입니다!’ 같은 말을 들어야 하리라.

자신은 박수 기계가 되어 미소나 짓겠지.

에리카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아래로 쓸었다.

‘이 무슨 치욕…….’

사쿠라바 에리카.

인생이 게임이다. 공략집이 동봉된 게임.

평생 성공만을 알고 살아왔다.

성공만을 알아야 하는 삶이다.

인생에 단 하나의 오점도 찍고 싶지 않았다. 아니, 자그마한 오점 몇 개는 디자인이라 치고 넘길 수 있다.

그러나 케이어스의 2주 연속 패배는, 심지어 그게 소녀연맹에게 지는 거라면…….

‘오점 수준이 아니라, 지울 수 없는 방점(傍點).’

하지만 그것보다 에리카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1위 후보, 앞으로 나와주세요!]

케이어스가 앞으로 몇 걸음 내디뎠다.

그 옆을 글로브가 차지했다.

에리카는 그쪽을 보았다. 글로브의 리더인 라희의 시선도 케이어스를 향했다.

그 순간 에리카와 라희의 눈이 맞았다.

라희가 희미한 눈웃음을 지었다.

에리카의 눈가에 남들은 볼 수 없을 변화가 일어났다. 혈관으로 피가 모여 핏발이 섰다.

‘저런 거에…….’

아니, 아니다, 아니야.

‘글로브, 평생 신경 쓰지도 않았던 무언가랑 동일선상에 있다는 게…….’

에리카에게 더할 수 없는 굴욕을 안겨주었다.

마치 게임 난이도를 ‘쉬움’으로 설정했는데도 NPC에게 절절매는 기분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래선 안 되는데.

이게 원래 이런 게 아닌데.

‘그래도.’

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 물론 케이어스가 명예의 전당에 오르지 못한다면 이후로 소녀연맹에게 1위를 자동으로 헌납하게 되겠지.

소녀연맹의 음원 점수는 압도적인 수준이니까.

‘하지만 우린 이대로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

글로브에게 지지 않는다.

질 수 없다.

지지 못한다.

‘그래…….’

에리카가 자신의 얼굴을 가리던 오른손을 떼어냈다. 그녀는 어느새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1위는!]

‘회사 사람들이 말씀하셨다시피, 우리는, 나는.’

전무후무(前無後無).

공전절후(空前絶後).

관전절후(冠前絶後).

‘어쩌면 추후 몇 년간 어느 걸그룹도 따라잡지 못할 위업을…….’

[……입니다!]

에리카의 눈가가 굳었다.

잘못 들었나 싶었다.

MC가 ‘케이어스’라고 발음하지 않은 건 알겠다. 그런데, 너무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이었다.

축하 폭죽이 터지기까지의 고작 0.몇 초.

에리카는 세상이 멈춘 듯한 착각까지 느꼈다.

그리고.

“우효오오―!”

괴상한 외침들이 관객석에서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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