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7화
드라이 리허설, 카메라 리허설까지 마친 소녀연맹은 대기실로 돌아왔다.
백설하는 메이크업 테이블 앞에 앉아 거울을 바라보았다. 곧바로 스태프가 달라붙어 메이크업을 수정했다.
문득, 그녀는 거울로 대기실을 훑어보았다.
‘단독 대기실.’
소녀연맹이 다른 그룹이나 아티스트와 대기실을 공유하지 않게 된 지는 꽤 시간이 지났다.
이젠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백설하는 이 상황이 생소했다.
마치 막 데뷔했는데 큼지막한 단독 대기실을 받은 느낌이다.
백설하는 자신의 입술이 말라 있단 것을 깨달았다. 입술을 혀로 핥자니, 스태프가 틴트를 발라주었다.
‘붉다.’
그녀의 입술은 눈이 따갑도록 붉었다. 그렇다고 아예 농후하고 묵직한 붉은색은 아닌, 생기 있는 분홍빛이 더 강조되는 색이었다.
하지만 백설하는 자신의 입술이 너무나 붉게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마주해서 혈류가 빨라진…….’
사랑이란 숨길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입술이 붉어지고, 뺨이 붉어지고, 목과 얼굴 전체가 붉게 물든다.
숨기려고 횡설수설하며 고개도 돌려보지만, 상대는 금세 이런 낌새를 눈치채겠지.
‘나는…….’
백설하는 완벽히 사랑에 빠진 소녀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뺨을 훑었다.
메이크업 스태프가 당황하면서 눈을 크게 떴다. 백설하가 금세 손을 내렸다.
“메이크업 되게 잘된 거 같아서요.”
“아아, 네. 감사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갑자기 뒤에서 성필이 나타났다.
백설하는 거울 속에 비친 그를 바라보았다.
성필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의 눈가에, 그를 처음 만났을 땐 없던 주름이 얇게 새겨져 있었다.
“설하, 아주 소녀 다 됐네.”
“아앗 안 돼요!”
리카가 급히 성필을 백설하에게서 한두 걸음 떨어뜨렸다.
“쌤 앞에서 나이 이야기를 입에 담으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끄으으윽……!”
“내 앞에서 나이 얘기를 꺼내는 자는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고멘나사이잇(죄송합니다앗)……!”
백설하에게서 풀려난 리카는 헐레벌떡 조아라에게로 달려가 하소연했다. 조아라가 자연스럽게 리카의 등을 토닥였다.
백설하는 다시 앉아 메이크업을 받았다.
“이사님.”
“응.”
“웃을 때 눈가 주름이 보이는 남자는 여자가 많이 꼬인대요.”
“뭐어?”
성필이 어처구니없단 듯 웃었다. 그의 눈가에 또 얇은 주름이 잡혔다.
“그럼 뭐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근처에 여자가 많아진단 거야?”
“잘생긴 남자만요.”
“그건 눈가 주름이 문제가 아니잖아.”
성필은 백설하 앞의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였다.
백설하는 그가 눈가를 검지로 톡톡 두드리는 것을 보곤 배시시 웃었다.
“아이크림이 효과가 없나?”
“이사님.”
“응?”
“사랑이 뭐예요?”
“사랑…….”
대기실의 이목이 성필에게로 쏠렸다.
가볍게 답하려던 성필도 갑작스레 쏟아진 관심에 역력히 당황했다. 그러곤 멋진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폼을 잡았다.
“자신을 모두 쏟아붓는 거.”
“에휴.”
백설하가 장난스럽게 한숨을 뱉었다.
성필은 헤실헤실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상대와 나 사이에 만들어질 이상향을 믿는 거. 겁먹지 않고 과감하게 상대를 품에 안으려는 힘. 미래의 불안 대신 현재의 행복에 집중하는 거. 걱정하며 숨기지 않고 기대하며 드러내는 거. 요컨대…….”
사랑이란.
“현재를 즐기는 마음가짐이지. 어때?”
리카와 조아라가 웃으면서 성필을 향해 야유를 보냈다. 성필은 부끄러움 때문에 뺨이 살짝 붉어졌지만, 아이들의 야유에 굴하지 않았다.
백설하는 입꼬리를 올렸다.
“네. 도움이 됐어요.”
“다행이네.”
“저, 사랑하고 있어요.”
“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백설하에게 이목이 쏠렸다. 메이크업을 마친 백설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아이돌을 사랑해요.”
나의 삶을 사랑하고 있다.
* * *
오후 1시 30분.
사전녹화 본무대 촬영까지 30분.
소녀연맹은 방송국 복도를 걸었다. 무대까지 가는 길 동안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동료 아이돌들에겐 활기차게 ‘안녕하세요’라 말하며 가볍게 묵례했다.
방송국 관계자들에겐 ‘잘 부탁드립니다’라며 허리를 살짝 숙이면서 인사했다.
이 좁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 맺어지는 모든 관계는 유기적인 기계와 같다.
과거의 백설하는 이 복도를 걸어갈 때마다 자신이 잘 짜 맞추어진 톱니바퀴처럼 느껴졌었다.
‘잘해야지.’
톱니바퀴답게 삐걱거리지 않고 부드럽게 작동할 것이다. 약속 시간에 늦지도 않고, 정해진 것에서 벗어나지 않고, 오로지 본분에 맞춰 행동해야 한다.
그리 생각했었지만, 이젠 달랐다.
백설하는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기분을 느꼈다.
방송국 복도의 구석구석까지 자신의 움직임에 맞추어 돌아간다.
그건 아마…….
‘나는 톱니바퀴가 아니니까.’
오늘 백설하가, 소녀연맹이 선보이는 건 그녀들 자신이다.
아이돌은 상품이다. 대중들에게 팔리기 위해 기획된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상품.
알맞은 규격과 색, 형태를 지니고 세상에 태어났다. 자신보다 자신을 더 잘 아는 기획자들의 손에 따라 가꾸어지길 반복한다.
그 안에 아이돌 개인의 색은 바랠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순간 기획품에서, 상품의 틀에서 벗어난다.’
아티스트가 된다.
그건 험난한 길임이 틀림없다.
남들과 다른 길을 간다는 건, 실패했을 때 남을 탓할 수 없단 것을 뜻한다.
만약 이번 프로젝트가 실패한다면 그 비난은 기획사가 아닌 백설하에게 박힌다.
성공과 실패 모든 게 자신의 것이다.
안정된 길에서 벗어나 맛보는 냉혹한 자유. 괴로울 게 틀림없는 자유지만, 백설하는 이 순간에 와서 확신하게 됐다.
‘나는 자유를 바라.’
나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나를 지켜보고 응원하는 모두를 위해서.’
아이돌은 대중에, 시장에 맞추어진 상품.
하지만 아이돌이 특이한 건 아니다.
세상에 상품이 아닌 이들이 어딨을까.
사회가 맞춘 규격에 따라 재단되길 반복하는 인간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상품이란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세상은 너무나 참혹하게 보일 테니까.
‘나의 자유는 한계에 갇혀 신음하는 모두를 위해서.’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의 기대에 따라. 이웃의 기대에 따라. 학교의 기대에 따라. 회사의 기대에 따라. 가족의 기대에 따라 살아간다.
자신이 아닌 것들의 기대로 만들어진 게 인간이란 존재다.
하지만, 누가 ‘나는 나야’라고 말하고 싶지 않을까? 자신이 개성적인 존재이며, 남들과 다른 존재라고 말하고 싶지 않을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선을 벗어나지 못한다.
‘남들이 그어둔 선을.’
어느새, 백설하와 소녀연맹은 무대 위에 서 있었다. 그녀들을 보러 사전녹화 무대까지 온 팬들이 보인다.
환호가 몰아친다.
아직 소녀연맹은 자리를 잡지 않았다.
백설하는 바닥을 보았다. 그녀들이 서야 할 자리가 옅은 색의 테이프로 작게 표시되어 있었다.
‘저게 선이다.’
출발선.
남들이 그어둔 선을 탈출할 수 있는 지점.
백설하는 출발선으로 다가갔다.
‘나는 아이돌.’
모두의 우상.
예전에 성필이 이리 말한 적이 있었다. 팬들은 아이돌을 검투사로 여긴다고.
자신이 현실에선 거둘 수 없는 승리를, 아이돌이 거두어 주길 바라며 응원한다고.
그래서 아이돌이 흘리는 피, 땀, 눈물에 팬들은 열광한다. 자신이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아이돌이 감내하기에. 그 고통이 끝끝내 승리로 이어지리란 사실을 굳게 믿기에.
‘이뤄줄게요.’
오늘, 백설하는 남들이 그어둔 선을 넘는다.
모든 인간을 규격에 맞는 상품으로 변환시키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백설하는 외치고자 한다.
“안녕하세요.”
나는 남들이 멋대로 재단하고 기대하는 존재 그 이상이라고.
그리고 백설하는 자신의 도전으로 하여금, 모두가 그리 외칠 수 있기를 바란다.
소녀연맹이 처음 자유와 저항을 부르짖었던 것처럼, 자기 자신의 개성을 확신하고 표현할 수 있기를.
그래, 이 자유의 시작은 강제적이었다.
백설하는 성필에게 강제적으로 내던져졌다. 나침반 하나 찾을 수 없는 고독과 자유의 광야로.
그곳에 내던져진 백설하는 목놓아 울었더랬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하지만 결국엔 일어서서 길을 찾기 시작했고.
찾아냈다.
“우리들의 연맹.”
소녀연맹은 줄곧 자유와 저항을 부르짖었다.
억압하는 세계를 향해 투쟁하는 모두가 바로 소녀연맹…….
하지만 이제 외부를 향한 투쟁은 끝이다. 그것은 반쪽의 투쟁일 뿐이니까.
소녀연맹은 자신의 내부를 변혁한다. 혁명한다.
실존(實存)을 찾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거대한 질서와 운명, 규율과 진리에 앞서는 절대적인 명제.
그건 바로 ‘나의 존재’이다.
“소녀연맹입니다!”
그렇다, 백설하는 자유로 내던져졌다. 마치 태어났을 때처럼, 그녀는 자신의 의지 없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었다.
그리고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자신을 자유로 내던진다.
이번에는 그녀 자신의 의지로.
“‘애플 크러쉬’.”
백설하의 저항은 사랑으로부터 시작한다.
사랑은 진정으로 인간을 바꿀 수 있는, 인간을 근원에서부터 뒤흔드는 유일한 감정이다.
“저희들의.”
사랑 노래가 너무 가볍다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 흔해 빠져서 아무런 감흥도 없다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은 절대 가볍지만은 않다.
오히려 세상 무엇보다 무겁다. 모든 철학은 사랑에서 시작됐기에, 사랑에서 출발하지 않은 것은 철학에 이를 수 없기에.
인간의 내부를 혁명하는 유일한 감정이기에, 백설하는 사랑을 보여주고자 한다.
“소녀연맹의 사랑입니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그 유명한 책의 제목처럼, 백설하는 세상을 향해 사랑을 강요한다.
* * *
[애플 크러쉬 뮤직비디오]
멤버들이 사과나무 아래로 몰려왔다. 그녀들은 나무에 탐스럽게 열린 붉은 사과를 바라본다.
리카는 나무를 타고 올라간다. 너무 높아서 도중에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백설하는 사다리를 가져와 올라가려 했지만, 사다리가 짧아서 사과에 손이 닿지 않는다.
조아라는 사과 아래에 입을 벌리고 가만히 앉아 있다.
신아름은 집게를 가져와 끙끙대며 사과를 따보려고 한다.
장하양은 총을 들고…….
‘안 돼!’
멤버들이 장하양을 제압해서 바닥에 눕혀둔다.
멤버들은 저마다 사과로 무엇을 할지 상상해본다.
리카는 애플파이를 떠올린다.
백설하는 생으로 사과를 아삭아삭 씹어 먹는 모습을 떠올린다.
조아라는 조각조각 예쁘게 썰어 먹는 자신을 떠올린다.
신아름은 즙을 짜서 쥬스로 만들어 먹으려고 한다.
장하양은 아까우니 껍질만 핥…….
‘야한 건 안 돼!’
멤버들이 장하양을 제압해서 바닥에 묶어둔다.
사과를 얻지 못해 고전 중인 소녀들. 갑자기 사과 탈을 쓴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탐스러운 껍질을 손으로 훑으면서 멤버들에게 손을 내민다.
소녀연맹은 동경하는 시선을 보이다가, 곧 그를 향해 손을 뻗치기 시작한다.
탐욕스러우리만치 일렁이는 손길이 사과 탈의 왕자를 향해 다가간다.
왕자는 뒤늦게 위기를 깨닫고 말머리를 돌리지만…….
* * *
무대 뒤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미려한 것을 넘어 아름답기까지 한 3D 애니메이션이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변한 멤버들은 무지개를 타고 사과나무를 오른다.
그녀들의 커다랗고 순수한 눈망울엔 별빛이 어려, 동경하는 사랑을 향한 열정이 그대로 엿보였다.
그 앞의 무대에서, 소녀연맹은 ‘애플 크러쉬’를 펼친다. 담대하게 사랑을 움켜쥐려는 소녀들이, 청춘의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하고 있었다.
“아…….”
성필은 옅은 신음을 흘렸다.
드디어 이 순간이 왔다.
아끼고 아껴왔던 이 단어를 꺼낼 순간이.
‘고맙다, 리카.’
성필은 일본어를 배울 계기를 만들어준 리카에게 항상 감사한다.
그는 아이돌에 대해 아름답다, 멋지다는 말을 너무나 많이 사용해왔다. 그 이외엔 표현할 말이 마땅치 않았던 터라, 다른 단어들보다 훨씬 많이 사용해온 것이었다.
이번에도 닳디 닳은 ‘아름답다’란 단어를 끌어와야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
인류가 언어를 발명한 순간부터, ‘아름답다’란 말은 아름다운 것들을 표현하는 데만 허용되었고 헌신해왔다.
인류 문명의 역사 6,000년간 질리도록 사용되었던 터라 그 단어는 아우라를 잃어버렸다.
아니, 성필이 아이돌을 향해 너무 자주 썼기에 아우라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성필은 아이돌에게, 소녀연맹에게 ‘아름답다’고 할 때마다 말 못 할 죄책감마저 가졌다.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가 이토록 짧다는 게 괴롭기까지 했다.
그래서 성필은 어느 단어를 아껴오고 있었다.
‘외국어로 말하는 아름다움.’
성필이 최초로 소녀연맹에게 사용할 그 단어는, 지금까지 그의 입에서 아이돌 그룹을 향해 발음된 적이 없다.
따라서 그가 이 단어를 말하는 순간 그 단어는 가장 싱그럽고 적확하며 또한 가장 본질적일 것이다.
성필은 말한다.
아끼고 아껴두었던 최초의 언어를.
‘奇麗(가려, 아름답다)…….’
말했어야 하는데, 말해야 하는데, 성필은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무대 위의 백설하가 손을 앞으로 확 뻗었다. 그녀의 손을 따라 사랑이 전해진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에너지가, 그녀의 얼굴이, 그녀의 몸이, 그녀의 모든 게 너무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표현해야 한다.
이 순간이 지나가면, 더 이상 이때의 감흥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못 해…….’
할 수 없었다.
그녀를 순간적 직관에서 영속적 언어와 이미지로 치환시키는 순간, 그 작업을 행한 소설가와 예술가는 천고의 형을 받게 될 것이다.
감히 완벽한 환상을 불완전한 표상으로 박제했노라고, 영원토록 지옥에서 불탈 운명을 선사받을 것이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저열한 표절작이나 모방품인 언어로 변환할 수 없다. 그러는 순간 의미를 잃을 테니까.
‘그러니.’
그냥 보기만 하자.
그게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예의이다. 또한 불완전한 기억 속에 퇴색되는 게, 성필의 눈에 박힌 아름다움에 대한 의무이다.
성필은 이 순간을 아낌없이 사랑하고, 감동하고, 놓아주려 한다.
찰나만이 존재하는 청춘의 한 페이지를.
성필은 탈색될 때까지 지켜보려 한다.
대신, 그는 눈물이 차올라 흐린 눈가를 그대로 두었다. 눈물을 책갈피로 쓰기 위해서.
“봐봐…….”
성필은 자주 멤버들의 퍼포먼스를 불꽃이나 열기와 같은 단어로 표현해왔다.
하지만 그보다 더 자주 떠올랐던 단어는 별이었다.
별을 두고 굳이 불꽃이라고 표현해왔던 건, 멤버들이 처한 중간적인 상태 때문이었던 듯싶다.
“있잖아…….”
불꽃.
언젠가 사라진다.
그것은 끝없이 창공을 갈구하여 위로 또 위로 올라가 사라진다.
그 끝은 별이다.
세상을 태울 기세로 상승을 거듭하던 그녀들은 마침내 불꽃이란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자신이 생각했으니까…… 자신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거…….”
그녀들이 내뿜는 아우라는 성필의 망막을 태울 듯한 기세로 빛났다.
“아티스트잖아…….”
불꽃.
꽃…….
단어의 끝자락을 붙잡는 동시에, 성필은 그 단어를 하늘로 날려보냈다.
오직 별만이 남았다.
* * *
[애플 크러쉬 뮤직비디오.]
정호환은 작업실에 앉아 스크린에 그것을 띄워두었다.
사람들이 최고의 하이라이트라고 꼽는 애니메이션 파트가 지났다.
그곳에 도달할 때까지, 정호환은 지루한 느낌을 조금도 받지 못했다.
‘총 세 번 반복되는 후렴구. 아니, 1절, 2절, 3절…… 이라고 표현해도 되겠지. AAA구조니까.’
반복되는 세 번의 구조는 모두 같은 멜로디다.
댄스곡에 쓰기엔 실험적이기까지 한 구조로, 과거 정호환이 븨이에스의 ‘포트레이트 인 유’에서 사용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했었다.
세상 누구도, ‘포트레이트 인 유’를 표절하지 않는 이상 이 구조로 아이돌곡을 감히 쓰진 못 하리라고.
하지만 아니었다.
소녀연맹의 ‘애플 크러쉬’가 그러했다.
‘멤버들이 가진 음색을 최대한 활용해서 같은 멜로디라도 뉘앙스를 다르게 가져간다. 후렴구인데도 반복된단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아.’
무엇보다 정호환이 놀란 건, ‘애플 크러쉬’가 지닌 개성이었다.
아이돌곡이 지닌 특징인, 곡의 완성도를 위해 개인성을 희생하는 기법이 쓰지 않았다.
소녀연맹 멤버들은 자신들의 개성을 온전히 간직한 채 퍼포먼스에 임한다. 그런데도 충돌이 전혀 없다.
이 정도의 프로듀싱 테크닉을 구사하기 위해선 멤버들에 대한 이해도가 엄청나야 할 것이다.
‘정지음 작곡가, 박성필 이사…….’
두 이름을 떠올린 정호환은 흠칫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곡의 메인 프로듀서는 설하.’
소녀연맹의 백설하다.
모니터에서 재생되던 ‘애플 크러쉬’ 뮤비가 끝났다. 아니, 곡이 끝났다.
마지막까지 멤버들은 사과를 얻지 못한다.
다들 상심하면서 위만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사과가 툭 떨어진다.
그리고, 멤버들에게 제압당해 묶여 있던 장하양의 입으로 사과가 쏙 들어왔다.
[아삭.]
애플 크러쉬.
화면이 암전되고, 소녀연맹의 로고 모션이 떠올랐다.
정호환의 눈은 영상의 아래로 향했다.
[인기 급상승 음악 #1]
조회 수, 공개 12시간 만에 1,000만 돌파.
“……태섭아.”
어두운 작업실 안.
정호환은 머리를 쥐어 싸매면서 한숨을 뱉었다. 그의 쓸쓸한 뒷모습이 모니터의 전자광을 받아 더 처량해 보였다.
* * *
“월요일 좋아!”
리카가 밴 뒷좌석에서 흥얼거렸다.
그 미친 소리를 듣고 조아라와 신아름이 반응했다.
“월요일 좋아!”
“월요일 너무 좋아!”
왜냐하면, 월요일엔 음악 방송 녹화가 없으니까!
소녀연맹의 컴백은 일요일 음악 방송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오늘 컴백의 부담감을 한껏 안고 무대를 소화한 뒤에 쉴 수 있었다.
“아아, 진짜.”
조아라는 ‘월요일 좋아’ 노래를 완창한 후, 의자에 깊이 몸을 묻고 야릇한 신음을 흘렸다.
“오랜만에 인민이들 보니까 되게 좋더라.”
“리얼. 근데 우리 한 번 만에 녹화 끝나서 인민이들한테 쫌 미안했어.”
“아, 글치. 예의상 한두 번 실수할걸.”
“다음부터 그럴까?”
“얘들 뭐래는 거야.”
조수석의 성필이 눈치를 주자, 조아라와 신아름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었다.
조아라가 조수석으로 고개를 쭉 뺐다.
“우리 오늘은 봤어요.”
“뭐?”
“아저씨 우는 거요.”
성필이 또 눈물을 흘렸다.
“아저씨 왜, 왜애?!”
“조아라 너 왜 팀장님 울려!”
“아, 아니야아! 내가 안 울렸어!”
“미안, 얘들아. 아직 감동이 안 가셔서…….”
“또 책갈피를 끼우신 건가요!”
어째선지 리카가 추궁하듯이 물었다.
예전에 가로 엔터 건물 1층에서 백설하와 나누었던 오글거리는 대화 때문이었다.
가로 엔터의 모든 사람들이 ‘성필 백설하 고백 사건’이 실재임을 확신한 날이었다. 그때 성필이 자신의 눈물은 책갈피니 뭐니, 그런 말을 했었다.
“오늘은 책갈피 열다섯 개 정도는 끼워야지…….”
“많아요! 그러다가 탈수로 쓰러지시겠어요!”
“그럼 더 좋아. 오늘을 더 강렬하게 기억할 수 있잖아…….”
“박 이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장하양이 말했다.
“박 이사님이 쓰러지시면 제가 업어서 옮길게요.”
“고마워 하양아…….”
그렇지만, 장하양이 건장한 성인 남자를 업어서 옮길 거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성필은 절대 탈수로 쓰러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어디로 옮기실 건가요!”
“으음, 우리 숙소로 옮길까?”
“좋아요! 지갑을 빼앗은 다음 꽁꽁 묶어서 보일러실에 가둬둬요!”
“거긴 먼지가 많아서 폐에 안 좋아. 우리 방송하는 안방에 두자.”
“뭘 그딴 걸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어?! 그리고 리카 넌 돈도 많으면서 왜 내 지갑 뺏는데!”
“돈은 많을수록 좋아요! 그렇죠, 쌤?”
리카는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백설하에게 말머리를 넘겼다.
백설하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리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응?”
“에에, 저희 얘기 하나도 안 들으셨나요?”
“아, 미안. 뭐라고 했어?”
“박 이사님을 납치해서 저희 숙소에 가둬두는 이야기예요!”
“그런 걸 왜?!”
성필은 백설하가 고마웠다.
그나마 정상적으로 반응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설하야, 아직 얼떨떨하지?”
“아…… 네.”
백설하가 폰을 손안에서 이리저리 굴렸다.
그녀는 아직 인터넷 반응을 확인하지 않고 있다.
당당하게 자신의 프로듀싱 사실을 만방에 공개했으니, ‘애플 크러쉬’로 얻는 부정적인 반응은 이전보다 훨씬 날카로울 것이다.
무서워하는 것도 이해가 단다. 그래서 다른 멤버들도 폰을 안 보고 있지 않은가.
“너도 이제 아티스트로 한 걸음 내디딘 거야. 나중에 소녀연맹 끝나고 독립해서도 큰 자양분이 될 거고.”
“하하…… 레이블이라도 하나 차려볼까요?”
“오, 가로 엔터랑 경쟁하게? 그땐 적으로 만나겠네. 그래도 소녀연맹으로 있는 동안은 친하게 지내자.”
백설하는 싱긋 웃을 뿐이었다.
성필은 자신의 농담이 잘 통하지 않자 시무룩해졌다.
밴은 가로 엔터 앞에 무사히 도착했다.
컴백 기념으로 간단하게 홍규헌과 직원들에게 인사한 후, 멤버들은 휴식을 위해 숙소로 돌아갈 것이었다.
건물로 향하는 길, 성필은 백설하의 곁에서 함께 걸었다. 해가 졌지만, 여름의 열기가 한가득 남아 거리를 덮이고 있었다.
“설하야, 많이 덥지?”
“네? 네에.”
“빨리 가자. 에어컨 바람 쐬러.”
성필이 걸음을 빨리했다. 그가 몇몇 멤버들을 추월할 때까지, 백설하는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성필이 뒤를 돌아보았다.
백설하는 ‘그냥 걸어가면 되지 왜 굳이 빨리?’란 뜻을 담아 성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중이었다.
아마 무대 때문에 힘을 많이 써서 지친 듯했다. 그래서, 성필은 다시 그녀에게 다가가 손목을 잡았다.
“어?!”
“가자.”
성필이 그녀를 이끌고 다른 멤버들보다 빨리 회사 문으로 향했다.
“아앗! 박 이사님이 쌤을 납치한다!”
“아저씨 뭔데.”
다른 멤버들도 성필을 이상하게 여겼다.
하지만 직접 끌려가는 백설하만 할까.
그녀는 당황하면서도 착실하게 성필에게 끌려갔다.
“이, 이사님 저 그렇게 덥진 않…….”
문이 열리고.
“소녀연맹 축하해!”
사방에서 축하 폭죽이 터졌다.
형형색색의 종이 끈과 작은 색종이들이 눈이 내리는 것처럼 백설하의 시야를 물들였다.
가로 엔터 직원들이 환호와 박수로 멤버들을 반겨주었다.
백설하는 얼떨떨하게 서 있기만 했다. 그녀의 머리 위에 기다란 종이 끈들이 내려앉았다.
“이, 어, 아…… 컴백 축하…….”
백설하도 상황을 파악한 듯 따스하게 웃으면서 머리 위에 올라간 폭죽 부스러기들을 쓸어냈다.
그런데 그때 구석에서 한구인과 정지음이 바퀴 달린 화이트보드를 끌면서 나타났다.
화이트보드엔 여러 색의 마카를 이용한 화려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한구인이 개선장군처럼 우렁차게 외쳤다.
“프로듀서 설하 씨, 소녀연맹 여러분, 정말 축하드립니다!”
정지음과 한구인이 힘을 합쳐 화이트보드를 백설하 쪽으로 홱 돌렸다.
커다란 보드에 적힌 화려하고 커다란 글씨를 보고, 백설하가 입을 막았다. 이윽고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서렸다.
‘어어어……’라며, 직원들은 백설하가 울자 낮은 신음을 흘렸다.
민경섭이 ‘울지 마!’를 선창하자, 다른 직원들도 ‘울지 마!’를 반복했다. 그러자 백설하는 아예 오열했다.
갑자기 불이 꺼졌다.
“짜잔.”
홍규헌이 휴게실에서 케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사과 케이크의 위엔 초가 25개 꽂혀 있었다. 홍규헌은 케이크를 들고 조심조심 백설하의 앞까지 다가왔다.
백설하는 여전히 눈가를 거칠게 닦으면서 오열하고 있었다.
홍규헌이 한 손으로만 케이크를 들고, 나머지 손으로 백설하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백설하, 언제까지 울 거야. 너도 박 이사처럼 청춘의 한 페이지에 책갈피 끼우는 거야?”
“진짜 낭만적인 말 한 번 했다고 얼마나 창피를 주려는 거예요.”
성필이 투덜대자 홍규헌은 픽 웃었다. 그리고 어린아이를 달래듯 백설하의 옆 엉덩이를 두드려주었다.
“자, 울지 말고. 눈물 대신 다른 걸로 기쁨을 표현해봐.”
백설하는 그 말을 듣곤 코를 훌쩍였다.
마침내 그녀가 눈가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그녀는 양손을 머리 위로 가져갔다.
백설하가 활짝 웃으면서 한 번 폴짝였다.
“우우, 우파루파아……!”
포브스 선정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25살.
우파루파 백설하가 25개의 초를 모두 불어서 껐다. 사방에서 다시금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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