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37화 (437/760)

김채현은 그 1화를 클릭했다.

[처음이라 떨리고 긴장도 되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백설하는 본격적으로 프로듀싱에 뛰어들었다.

처음 이 시리즈가 나왔을 때 인민이들의 반응은 반반으로 나뉘었었다.

물론 소녀연맹 멤버들을 사랑하지만, 그녀들이 이룩한 성과 때문에 팬질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전문가가 아닌 멤버가 프로듀싱에 손을 댔다가, 소녀연맹의 성과가 끊길 수도 있으니까.’

그에 비해 백설하를 응원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 둘 사이의 긴장은 팽팽했었다.

하지만, 백설하를 응원하던 이들도 불안감을 감추지는 못했다. 과연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예상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만약 망하기라도 하면…….

[아, 네, 힘들…… 무서워요…….]

어느새 시리즈는 몇 화를 건너뛰어져 있었다.

김채현은 영상을 잠시 멈추었다.

여기다.

백설하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눈물을 보인 순간.

‘설하가 울어…….’

트레이닝을 견디기 힘들어서?

몸과 컨디션이 받쳐주지 않아서?

‘소녀연맹 비긴즈’ 시절의 백설하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니었다.

[제가 모든 책임을 진다는 건 뮤지션으로서 당연한 거지만…… 그게 무서워요…….]

백설하는 오로지 압박감 때문에 울었다.

카메라를 향해 그것을 있는 그대로 고백했다.

김채현의 가슴이 미어졌다.

이다음의 대사를 들으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울게 되겠지.

[팬분들을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 않은데……. 저, 저희 팬인 게 자랑스러우셨으면 하는데……. 제가 그걸 망칠 수도 있으니까…….]

이후, 백설하는 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작곡에 참여하고, 앨범 구성을 점검하고, 안무를 발주한 후 결정하고, 비주얼 파트를 살피고, 뮤직비디오 스토리보드 회의에도 참여하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에 뛰어든다.

‘그게 더 슬퍼.’

백설하는 가면을 쓰고 있는 듯했다.

고뇌와 불안을 숨기고 일에만 몰두한다.

인민이들 중에는 멤버들 분석에만 목숨을 건 이도 있었다.

그런 인민이는 멤버들의 동작이나 말투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멤버들의 캐릭터를 해석하려 안간힘을 쓴다.

그들이 보기에, 백설하는 부담감이 상당하다는 듯하다. 그런데 굳이 그렇게 해석하지 않아도, 힘들어한단 건 알 수 있었다.

‘멤버들이 SNS에서 티를 내니까.’

소녀연맹 멤버들은 팬들과의 소통으로 유명하다. 인민이들이 선정한 ‘세상에서 제일 효도 잘하는 아이돌 1위’이니, 공신력마저 있다.

다른 멤버들은 자주 백설하와 찍은 사진이나 백설하의 이야기를 올려서, 팬들이 응원해주도록 유도하곤 했었다.

[네, 지켜봐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어느새 시리즈의 마지막에 이르렀다.

김채현은 자신이 멍하니 있었단 것을 깨달았다.

이미 몇 번이나 본 영상이어서 그런가, 집중하지 않아도 내용을 다 알 듯해서 넋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회의실.

임직원들을 향해 허리를 숙인 백설하. 그녀는 카메라에 등을 돌리고 있었다.

인사를 마친 백설하는 뒤로 돌아 카메라를.

김채현을 바라보았다.

[지켜봐 주세요.]

영상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1 끝]

이 영상이 올라온 날짜는 이틀 전이었다.

그리고 내일, 소녀연맹이 컴백한다.

김채현은 몇 시간 만에 의자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가방 안엔 음방 사전녹화에 가서 쓸 물건들이 가득했다.

‘공방 뛰는 건 얼마 만이지.’

친구들은 그녀를 보고 미쳤다고 했다.

고3인데 뭐 그런 데다 시간을 버리냐고.

‘아니.’

김채현이 가방의 지퍼를 잠갔다.

‘시간을 버리는 게 아니라, 채우는 거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 시간을 조금이나마 밝고 다채롭게 채우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공방에 가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꼭 소녀연맹의 데뷔 같다.

‘데뷔…… 라고 할 수도 있겠지.’

소녀연맹은 새롭게 태어난다. 그녀들 스스로 자신만의 길을 고를 수 있게 됐다.

그건 아이가 부모의 품을 떠나 독립하는 것과 비슷하다. 새로운 탄생과 버금가는, 아늑했던 세계를 부수는 일이었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김채현의 가슴이 소녀연맹의 데뷔 때와 같이 거세게 떨리는 건.

‘설하야.’

김채현은 가방을 침대 머리맡에 두었다.

‘넌 우리가 너흴 자랑스러워하길 바란다고 했지만, 우린 이미 네가 자랑스러워.’

아이돌의 앞에는 선이 있다.

그것을 넘으면 아이돌이 아니라는, 세상 사람들이 멋대로 그어둔 선이다.

넘는 순간 ‘너 그거 왜 넘어?’란 비난이 꽂히는 지점이, 분명 존재한다.

다른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넘어 다니는 선이건만, 아이돌들은 스스로를 가두고 그 안에서 갈팡질팡한다.

그 선을, 백설하가 넘었다.

모두의 이목이 그녀에게로 쏠린다.

본분을 벗어난 자에게 꽂히는 화살과 같은 비난의 시선. 그 시선들에게서, 인민이들은 백설하와 소녀연맹을 지켜낼 것이다.

팬미팅에서 장하양이 김채현에게 했던 말대로.

‘우린 함께 올라갈 거니까.’

소녀연맹 컴백까지 18시간.

* * *

홍규헌, 성필, 한구인은 사장실에 모여 담소를 나누었다. 한동안 하하 호호 웃으면서 대화하던 중, 갑자기 홍규헌이 서랍에서 얇은 서류 뭉치를 꺼내었다.

그것을 본 성필이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한구인은 눈을 빛내며 홍규헌에게서 서류를 받아들였다.

세 사람은 같은 내용의 서류를 눈으로 훑었다.

“이거 읽으니까.”

홍규헌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초등학생 시절의 여름방학을 그리워하는 것만 같은, 과거를 향한 노스텔지아가 짙게 배어 있었다.

“박 이사 막 들어왔을 때 떠오르네. 리카 데려오고 나서 이걸 봤던가.”

“그쵸. 사장님 댁 침대에서 잔 다음 날이었을걸요.”

“그립군요. 그때 박 이사님이 사장님께 무릎 꿇으셨지 않습니까.”

“진짜 뭔 일 있었다고 생각했다고요. 아니, 사장님이 절 속이셨어요.”

“속인 게 아니라면?”

“에엑?!”

홍규헌은 피식 웃었다.

옛날엔 성필이 이런 성격을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었다. 누가 30대의 남자가 일본인 소녀의 성대모사를 밥 먹듯이 할 거라고 예상하겠는가.

“책임져요!”

“500년 전에서 왔어? 다 한 여름밤의 아방튀르였지 뭐어.”

“그때 여름 아니었어요.”

“한 겨울밤의 아방튀르였지.”

두 사람은 문득 대화를 멈추고 한구인을 바라보았다.

한구인은 서류, 성필의 기획서를 읽으며 시종일관 입가에 미소를 걸고 있었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지자, 한구인은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러고 보니, 한 이사는 그거 처음 봤을 때도 막 감탄했었지?”

“그렇습니다. 다시 읽어도 명문이군요.”

음악은 비즈니스가 아니라 음악과 아티스트를 중심으로 발전해야 한다.

음악은 인류의 사상과 감정을 담는다. 살아온 환경, 국가, 문화권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이 전체를 표현하는 게 음악이며, 그 창조자인 아티스트는 상품으로서 대해지면 안 된다.

우리의 아이돌이 음악에 담아야 할 건…….

“자신만의 꿈과 생각, 사랑, 삶, 아름다움이다. 팬의 입장에서 교감하고 위로하며 함께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아이돌은 삭막한 현대 사회에 인간애와 인본주의를 전파할 것이다. 메시지는 변하지 않는 트렌드다. 획일적인 능력주의, 경쟁주의, 캐피탈리즘과 메리토크라시를 벗어나 인간의 다원성과 가치를 존중하는 음악을…….”

도중, 한구인은 말을 멈추었다.

“이제야 여쭤봅니다만, 능력주의와 메리토크라시를 왜 반복하신 겁니까? 따로 의도가 있으십니까?”

“급하게 쓴 거라서요. 메리토크라시 대신 테크노크라시라고 적었어야 했어요.”

“아, 미묘한 어감 차이를 고려하신 줄 알았습니다. 하하, 괜히 생각만 깊었던 거군요.”

한구인은 기획서를 곱게 접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정말 이 기획서대로 될 날이 오리라곤…….”

기획서를 읽고 마음이 울렸던 한구인이지만.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치. 박 이사가 뜬구름을 거하게 잡는 줄 알았어. 근데, 리카가 작곡해서 결과를 내기 시작하니까 ‘어?’ 소리가 절로 나오더라.”

“그리고 드디어…….”

‘우리들의 프로듀싱’이 세상에 공개된다.

백설하가 ‘인트로: 러브’ 앨범을 프로듀싱하여 소녀연맹의 컴백을 주도한다.

“미래를 그린 계획이 현재가 됐군요. 지금까지, 박 이사님이 그리신 그림은 전부 들어맞았습니다.”

얼핏 과투자처럼 보이는, 해외 팬을 위한 콘텐츠 인프라 확충.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지속적이고 깊은 수준의 소통.

수익을 희생하고서라도 멤버들의 스케줄을 최소화. 대신 앨범 제작에 총력을 기울이도록.

무대 장악력과 라이브를 기본으로 하는 퍼포먼스형 그룹.

데뷔 후에도 이어지는 기량 향상을 위한 트레이닝.

“이 모든 게 소녀연맹분들의 성공에 기여한 건 틀림없겠죠. 그리고 이제 마지막 단계입니다.”

창작형 아이돌의 탄생.

자체 프로듀싱 능력을 갖춘…….

“능력을 갖추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예?”

“본인을 표현할 용기와 의지, 기회를 갖는 게 중요해요.”

“……그렇군요.”

메시지는 변하지 않는 트렌드다.

그 메시지는 아티스트 본인의 의지에서 나와야 하리라.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마지막 단계입니다. 박 이사님은 이번에도 성공을 확신하십니까?”

성필은 잠시 대답을 미루었다.

사장과 가장 가까운 동료의 시선이 천천히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다.

“확신…….”

한다.

확신한다, 당연히.

왜냐하면, 성필이 기획서로 냈던 모든 내용은 전생의 케이어스가 받았던 평가였으니까.

케이어스는 성필이 목표로 했던 이상향 그 자체였다.

물론 정호환과의 대화로 전생의 모습이 전부 꾸며진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긴 했다.

그렇기에 더 오기가 생겼다.

가짜가 아니라 진짜를 만들어내겠노라고.

‘케이어스는 성공했어.’

성필의 기획서는 성공으로 이어지는 지도였다.

전생의 미래엔 그 지도를 그렸던 천재적인 프로듀서, 정호환이 존재한다.

그 지도로 나아간 최고의 아이돌, 케이어스가 존재한다.

그 지도를 따라 나아간 길엔, 반드시 성공이 존재한다.

물론, 전생의 케이어스가 가짜라면 성필은 가짜를 따라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그는 가짜의 가짜가 되고 말 수도 있다.

“예, 확신합니다.”

가짜로 그려진 지도를 따라가던 성필은, 어느 순간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 지도는 가짜이지만 진실되었다.

“믿음직스러워, 우리 박 이사.”

“감사합…….”

그때 누군가 사장실 문을 노크했다.

들어오라고 하자, 민경섭이 모습을 드러냈다.

“민 팀장 무슨 일이야?”

“아, 그게요, 설하가 애들이랑 마지막으로 퍼포먼스 점검한다고 해서요.”

백설하와 멤버들은 1층 휴게 공간에서 긴장을 풀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들은 컴백 전엔 괜히 긴장된단 이유로 퍼포먼스를 맞춰보는 일이 드물었다.

“혹시 생각 있으시면 보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해서…….”

“음.”

홍규헌이 일어났다.

그녀를 따라 성필과 한구인도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사장실 밖을 나서자 연습실 밖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직원들이 보였다. 밤늦게까지 남아 있던 이들이 전부 모인 듯했다.

가로 엔터의 전통이 되어버린, 컴백 전날 환송(자발적임)을 위해 퇴근하지 않고 남은 인원들이었다.

성필과 홍규헌, 한구인도 그 대열에 꼈다.

“들어오셔도 돼요.”

백설하가 연습실 문 앞에 옹기종기 모인 직원들을 향해 말했다.

멤버들은 거울을 향해 자세를 잡고 섰다. 그 뒤로 열 명이 넘는 직원들이 바라보고 있었다.

성필은 백설하의 안색을 살폈다.

‘긴장하고 있나……?’

그야 당연히 긴장할 것이다.

성필도 처음 프로듀서로서 첫발을 내디뎠을 때 얼마나 긴장했던가. 소녀연맹이 데뷔하기 전엔 온몸의 털이 삐쭉 서 있을 정도였었다.

‘퍼포먼스를 점검하는 것도 불안의 표현이겠지.’

성필은 백설하를 걱정했다.

하지만 점점 백설하에게선 불안 외의 다른 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긴장하고 있다기엔 침착함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1분.”

백설하가 말하자, 멤버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몸을 풀었다.

리카는 무대에라도 오른 듯 직원들을 보며 손 키스를 마구마구 날렸다. 여기저기서 리카의 귀여움에 앓는 소리가 들렸다.

조아라는 하던 대로 전신을 꼼꼼하게 스트레칭했다. 그리고 춤 때문에 살짝 앞으로 굽어 있던 자세를 완전히 똑바로 폈다.

장하양은 가만히 서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입이 살짝씩 달싹이는 게, 가사를 외우며 무대 전체를 점검하는 듯했다.

신아름은 기다리는 1분마저 지루한지 바닥을 툭툭 차거나 하품을 했다.

그리고 백설하는.

백설하는.

‘아우라.’

가만히 서서 앞을 보고 있을 뿐인데도 아우라가 사방으로 퍼지는 듯했다.

배우를 보고서 아우라를 느낀다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외모가 뛰어나 그런 것이겠지만, 숙련된 배우는 자세에서부터 모종의 에너지를 방출한다.

자세가 굽어진 일반 사람들만 보던 이들이, 정순한 연기를 위해 외형을 바르게 다잡은 배우를 보면 당연히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다.

보통 사람에게선 찾을 수 없는 아우라다.

백설하도 그러했다.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자세를 체득하고 있으니.

‘그런데, 그 이상으로 뭔가 보여.’

그건 영혼의 에너지일 것이다.

현대의 아이돌은 과거였으면 왕이나 귀족만이 받을 수 있는 막대한 양의 관심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 관심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속한 아이돌에게 힘을 부여한다.

태어날 때부터 지닌 우월한 유전자, 개인이 차근차근 쌓은 노력, 인간을 영웅의 경지까지 격상시킬 수 있는 미디어란 존재, 냉정하고도 때론 맹렬한 자본의 파도, 하늘이 내려준 운.

이 모든 요소가 중요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힘은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나온다.

아이돌은 존재 자체로 수만, 수십만, 수백만의 관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백만 쌍의 눈이 항상 그들을 감시하고, 평가하고, 욕하거나 칭찬한다.

‘그걸 한 몸에 받으며 사는 거야.’

아이돌은 그 관심들을 자신의 안에 모아 폭발시킨다. 그것 자체가 일인 동시에 힘이기도 하다.

손짓 한 번에 수만 명을 열광시킬 수 있는 힘을, 역사상 얼마나 되는 인간이 누렸을까.

하지만 행복하지만은 않다.

항상 셀 수 없는 눈이 그녀들을 바라보기에. 역설적으로 그녀들은 세상 누구보다 외롭거나 괴로울지도 모른다.

대중들은 항상 이전보다 나은 것을 요구하기에, 아이돌은 온전히 자신인 채로 있을 수 없다.

폭풍우 속의 파고(波高)처럼, 높이를 예상할 수 없는 대중의 변덕은 받아내는 것만으로도 인간을 파괴한다.

‘그럼에도, 버틴다.’

백설하는 버티고 있다.

저 작은 몸에 셀 수 없는 인간들의 눈과 귀를 박아 넣고 당당히 서 있다.

그게 연예인, 아이돌의 자격일 것이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쌍욕, 환성, 날 선 비판, 온기 서린 칭찬. 이 모든 것으로 이루어진 폭풍을, 백설하는 가슴에 품고서 버틴다.

그게 백설하가 내뿜는 아우라의 근원.

‘보통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영웅으로서 선 인간이 방출하는 힘이었다.

“간다.”

소녀연맹의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모두 숨 소리도 내지 않고 그것을 감상했다. 어쩌면 그녀들이 내뿜는 열기가 모든 이의 숨구멍을 막아버린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들의 모든 동작이 한계까지 버려져 있다. 약 2년 동안 아이돌로 활동하며 습득했던 기량이, 이 순간 형태를 갖추어 작렬한다.

태양처럼.

“…….”

퍼포먼스를 마친 백설하는 엔딩 포즈를 풀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빛이 위를 향한 그녀의 턱부터 목까지 매끄럽게 따라 떨어졌다.

빛을 받던 그녀가, 말했다.

“케이어스…… 멋졌어요. 이번 ‘넥타르’는 보자마자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소름이 돋을 정도로요. 예술적이에요. 작품이죠. 곡이든 안무든, 그래요.”

그녀가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의 눈동자가 모든 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엔 수십만 명에 버금가는 힘이 보였다. 그녀의 눈빛에 서린 찬사와 비판들이 쌓이고 쌓여, 막대한 질량을 형성해 인력을 발생시킨다.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그런데, 무거워요. 세상엔 가볍게 노래를 듣는 사람이 대다수예요. 극단적으로, 귀로 흘리면서 가볍게 즐기는 정도가 노래의 가치겠죠. 대중 가수라면, 그런 가벼운 유희를 대중에게 제공하는 게 의무일 거라고 생각해요.”

백설하가 뒤로 돌아 거울에 비친 직원들이 아닌, 진짜 직원들을 눈에 담았다.

“저는 진짜 대중음악을 하고 싶다고 했었어요. 아티스트는 아티스트적인 관점에서, 작품성에서 한발 물러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집착을 덜고서라도…… 케이어스를 이기길 바랐습니다.”

물론.

“조회 수, 판매량, 차트가 전부는 아니에요. 사랑받는 방법은 사람의 수만큼 많으니까요. 자기만의 길을 걸으면 된다…… 라고 하실 수도 있어요. 애초에 뮤지션 간에 승리, 패배, 그런 게 없다고 하실 수도 있고요. 맞아요. 없어요. 성공과 실패뿐이죠. 하지만.”

백설하가 미소 지었다.

지금까지의 그녀에게선 찾을 수 없는, 경쟁심과 투쟁심이 한계까지 응축된 미소였다.

“뮤지션에겐 없더라도 개인에겐 있어요. 케이어스를 처음 본 순간부터, 저는 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기는 건 힘들겠지만, 지고 싶지 않아요. 아니.”

이기고 싶다.

한 번이라도 시원하게 승리를 선언하고 싶다.

“제가 프로듀싱에서 추구했던 건, 예, 가벼움이에요. 말씀드렸다시피, 가벼운 유희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자 했어요. 어쩔 수 없이 소신을 접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오히려 한없이 가볍길 바랐습니다.”

니체가 말했다.

좋은 것은 가볍다.

모든 신성(神性)은 부드러운 발로 달린다.

“그리고.”

백설하의 유리알같이 투명했던 눈동자에 물감이 번졌다. 붉은 물감이 아름답게 차올랐다.

“확신이 섰어요. 제가 이겼습니다.”

백설하가 직원들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모자란 저를 서포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연습실이 열기로 가득 찼다.

멤버들만이 아닌, 직원들도 흥분에 빠졌다.

전장에 나가기 전의 전사들처럼 주체할 수 없는 투쟁심에 불탔다.

“다들, 컴백 후가 진짜 싸움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백설하는 허리를 펴곤.

“저에게.”

주먹을 들어 보였다

“승리를 주세요.”

투쟁, 해방, 소녀, 연맹, 승리.

구호.

그리고 박수, 환성.

모든 소란스러움이 연습실에 몰아쳤다.

백설하는 환호 속에서 연습실을 나섰다. 그녀의 뒷모습에서, 이번에야말로 확실한 아우라가 넘실거렸다.

인더스트리얼 베이비, 산업이 낳은 아기는 이제 스스로 걷기 시작했다.

아티스트란 이름을 향하여.

모든 찬사와 비난이 자신의 것이 되는, 차갑고도 아름다운 세계를 향하여.

* * *

토요일에 방영되는 음악 방송.

김채현은 그곳에 출연하는 소녀연맹을 보기 위해 오전부터 스튜디오 앞에 도착했다.

이미 줄은 길게 늘어서 있었다.

김채현은 줄 끝으로 간 후 앞에 선 사람들의 수를 대강 세어보았다.

‘100번은 넘을 거 같네. 총원이 150명이니까 늦게 온 편이구나.’

아쉽다.

50번 이내로 왔으면 멤버들을 가장 앞에서 볼 수 있는 스탠딩석을 얻었을 텐데.

김채현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태양 볕에 따가웠다.

가방에서 꽁꽁 얼려둔 얼음물을 꺼내 목을 축였다.

이제 목구멍은 촉촉해졌는데, 김채현은 연신 물을 들이켰다. 긴장 때문에 뭐라도 하지 않곤 배길 수가 없었다.

‘다들 그런 거 같아.’

소녀연맹의 사전 녹화는 오후 2시다.

그걸 기다리는 이들의 뒷모습에선 숨길 수 없는 불안과 긴장이 엿보였다.

소녀연맹의 컴백을 기대하는 동시에, 백설하가 맡은 ‘우리들의 프로듀싱’ 프로젝트를 걱정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프로듀싱’, 아이돌이 직접 자체 제작에 뛰어드는 프로젝트. 그런 이들은 항상 아이돌계에 존재했지만, 이렇게나 대대적으로 홍보한 적은 처음이다.

소녀연맹은 여태껏 모아뒀던 인지도를 모두 소모하여 온갖 예능과 라디오에 출연했다. 그녀들의 컴백 소식이 언론을 뒤덮었다.

‘한국이…… 아니야.’

해외의 케이팝 커뮤니티에서도 소녀연맹을 주목하고 있다. 과장이지만, 세계의 이목이 그녀들에게 쏠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걱정된다.

이번 소녀연맹의 성적이 안 좋으면 쏟아질 대중의 질타.

안 그래도 소녀연맹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KS 엔터의 팬덤이 쏟아낼 비난.

그게 걱정돼서 견디기 힘들었다.

“여기 소녀연맹 사녹 줄 맞나요?”

“네, 맞…….”

익숙한 목소리였다.

반사적으로 답하던 김채현은 홱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유용태가 웃고 있었다.

“이열, 채현이.”

“오빠? 아, 역시…….”

“뭐가?”

“백수였구나. 직장인인 것도 거짓말이죠?”

“오늘 휴일이거든?!”

유용태는 분을 삭이곤,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떠올렸던 의문을 비추었다.

“너 왜 교복이야?”

“이거요? 음, 뭐랄까, 모르겠어요, 저도.”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아 모른다구요.”

“……음, 근데 옛날 생각나네. 벌써 네가 고3이고. 시간 참 빨라.”

옛날 생각.

김채현은 그 단어가 자신의 상태를 표현해준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굳이 교복을 입고 이곳에 온 이유는 추억 때문일지도 몰랐다.

처음 소녀연맹을 사랑하길 시작했던 때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 시절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이 소중한 시간을 영원히 추억 속에 박제하기 위해.

그녀는 이 모습으로 이곳에 왔다.

“그러게요. 옛날엔 오빠도 백수셨는데.”

“나 그때도 직장인이었어!”

“직장인이 어떻게 아육금이랑 팬미팅, 음방에 그렇게 자주 와요?”

“자주도 아니야…….”

유용태는 김채현이 걱정됐다. 그녀는 머릿속에서 멋대로 유용태를 현실과 취미 생활을 구분 못 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근데, 오랜만인데도 별로 안 어색하네요.”

“안 고독한 소련방에서 계속 얘기하잖아.”

“아니, 얼굴 보는 건 다르죠. 다를 줄 알았는데…….”

“인민이니까.”

유용태가 씨익 미소를 띠었다.

“같은 사람을 좋아하니까.”

“……하긴.”

같은 그룹을 덕질한단 것만으로도 십년지기 친구처럼 변하는 게 팬이다.

“출석 체크할게요!”

줄 앞에서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출첵표를 꺼냈다.

“이번엔 아름이 스티커 받았음 좋겠다.”

“저는 하양이요.”

“아니다, 누구라도 상관없어 이젠.”

“저도요.”

둘은 매니저에게 신원을 확인받곤 스티커를 얻어냈다.

김채현은 리카, 유용태는 조아라의 것이었다.

둘은 서로를 보곤 크게 웃었다.

소녀연맹, 컴백 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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