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화
소녀연맹의 컴백이 3주 밀린 후, 매니저들은 방송국을 찾아다니면서 온 힘을 다하여 사죄를 전하고 다녔다.
역시나 방송국들은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에 난색을 표했다.
총 여섯 개의 음악 방송 중, 깔끔하게 컴백을 3주 미룰 수 있던 건 세 개뿐이었다. 나머지는 한 주를 더 미루고서야 간신히 허락받을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좋아, 급한 불은 껐네.”
민경섭과 매니지먼트팀은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여름답게 아이스크림 케이크까지 사 와, 매니저 대기실을 훈훈한 분위기로 꾸몄다.
“팀장님 고생 많으셨어요.”
“너희들도 잘 따라와 줬어.”
음악 방송은 아이돌 컴백의 꽃이자 모든 것이라고 부를 만하다.
그 음악 방송 스케줄 조정이 오늘 모두 끝났다. 계속해서 답을 미루고 있던 음방에게, 드디어 확답을 받은 것이다.
“하필 하나가 계속 밀려서 가슴 졸였지만, 어떻게든 좋은 답을 얻어냈네.”
음악 방송은 모든 것.
그러니 음악 방송 스케줄 조정이 끝났단 건 곧 모든 게 끝났단 뜻이기도 하다.
‘예능 출연 스케줄 조정도 몇 개 남았지만, 음방만 하겠어. 잘 끝나서 다행이다.’
매니저들은 오순도순 모여 앉아 느긋하게 쫑파티 분위기를 즐겼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성필이 들어왔다.
“경섭이 있었네.”
“형? 마침 잘 왔어요. 여기 아이스크림 케이크 좀 먹어봐요.”
“어? 아아, 너희 일 잘 끝냈다고 파티하는 거구나. 진짜 잘해줬어.”
메인 프로듀서의 칭찬에 매니저들이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인 민경섭과 이 중에서 가장 연차가 높은 김수희, 안이상이 도맡듯이 한 일이라 그 아래의 매니저들은 딱히 자랑스러워할 것도 없었다.
“우리 가로 엔터 매니지먼트팀의 미래가 밝아.”
“형 자꾸 왜 그래요 창피하게.”
매니지먼트 팀원들은 자부심이 넘쳤다. 아무렴, 이렇게나 커다란 고비도 넘겼으니 앞으로 뭐가 두려울까?
소녀연맹이 컴백하면 그 이후는 매니지먼트의 독무대다. 험난한 고비를 넘은 기세를 살려, 이번 소녀연맹의 컴백을 최고로 만들…….
“지금 방송국 가서 사녹 무대 두 타임 받을 수 있는지 PD님들한테 여쭤보고 올래?”
“……?”
“커피 잘 챙겨가고.”
“……?”
“뭐 궁금한 거라도 있어?”
민경섭이 손을 들었다.
“사녹 무대 두 타임이요?”
“‘우파루파’ 무대.”
“아아, 우파루파요?”
“응.”
“그걸 왜 이제 말해요?!”
“아니…….”
성필이 멋쩍은 웃음을 띠었다.
“우리가 더블 타이틀까진 아니더라도, ‘우파루파’도 간단하게 선보이면 좋을 거 같아서.”
“진작 말하지…….”
“너 ‘음방 스케줄 3주 미뤄주세요’랑 ‘맞다, 그리고 사녹 무대도 한 타임 더 주세요’ 같이 말할 자신 있어?”
“…….”
미안하다고 고개 숙이러 가는 처지에 뭘 더 달라고 하긴 어려운 법이다.
“그리고 그땐 확정도 아니었으니까. 끌다가 오늘 확답받은 방송국은 빼고, 저번에 답 받았던 곳에 가서 흘리듯이 물어봐.”
“흘리듯이요?”
“A&R팀에서 갑자기 정한 거잖아. 우리도 양심이 있어. 꼭 받아오란 말은 안 해.”
민경섭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케이크 먹는 속도를 올렸다.
“‘우파루파’는 갑자기 왜요?”
“우리가 ‘우파루파’도 무대 프로듀싱 하고 있던 건 알지?”
“네. 더블 타이틀 못 돼도, ‘우파루파’는 공연 레퍼토리로 많이 쓰일 거 같다면서요.”
“안무나 스타일링 이것저것 합쳐서, 오늘 퍼포먼스가 확정됐거든. 근데 보니까 와…….”
“버리기 아까워요?”
“응. 방송에 잠시라도 비쳤으면 좋겠어. 1분 30초짜리 무대라도 좋으니까.”
“다 안 된다고 하면, 6주 활동 끝낸 뒤 추가 무대 잡도록 해볼까요?”
“으음…… 그건 괜찮아. 안 그래도 3주 미뤘는데 앨범 활동 기간을 더 늘릴 순 없으니.”
“알겠어요.”
민경섭과 함께 안이상과 김수희가 동시에 일어났다. 그들은 허겁지겁 먹은 탓에 입가에 아이스크림이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티슈로 간단히 입 주위를 닦은 그들의 눈에서 사명감이 불탔다.
“무대 설치는요?”
“스크린만 쓸 거라 시간 안 걸려.”
“그럼 어찌어찌 시간 받을 수도 있을 거 같네요.”
매니지먼트팀은 최선을 다한다.
모든 건 소녀연맹의 성공을 위해서.
“얘들아, 가자.”
성필은 반드시 얻어낼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민경섭의 생각은 달랐다.
‘반드시 얻어낼 마음으로 간다.’
안 그래도 염치 불고한 마당이니 확률은 매우 적겠지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그렇게 매니지먼트팀이 결연히 회사를 나간 지 2시간 후.
민경섭이 굳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성필은 그를 보기만 해도 결과를 알 수 있었다.
성필이 민경섭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고생 많았다. 힘들었지?”
“세 군데나 해준대요.”
“으엉?”
성필은 왜 민경섭의 얼굴이 굳어 있었는지 알게 됐다. 민경섭도 성필처럼 이해가 안 가는 것이었다.
“그게, 정확하진 않은데요. 아마 다 기대하고 있는 거 같아요. 화제 쫙 모을 수 있을 거라면서요.”
“기대?”
“네. 케이어스가…….”
음원 차트에서 맥을 못 추고 있으니까.
지금까지 당연하단 듯 TOP5 안에서 놀았던 케이어스다. 그런데 지금은 10위권 밖으로도 튕겨져 나갈 기세였다.
실제로, 재생 횟수가 중복으로 집계되는 TOP 100 차트 안에선 10위권 내에 위치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회원마다 재생 횟수를 단 한 번만 집계하는 24시간 차트에선 10위권에서 튕겨져 나간 지 오래였다.
“다들 드라마 한 편 보길 바라는 거예요.”
“드라마라면…….”
“언더독의 반란이요.”
항상 케이어스와 겹친 시기에 데뷔, 컴백하여 1등과 연이 멀었던 소녀연맹.
오죽하면 사람들이 무관연맹이라고까지 부르겠는가.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다르길 바란다.
“어쩌면, 사녹 무대 따로 떼주길 거부했던 나머지 세 곳에서도 연락 올지도 몰라요.”
소녀연맹이 다른 음방들에서 무대를 두 타임 얻어냈단 소문을 접하면, 거부한 음방에서도 초조한 나머지 무리해서라도 한 타임을 더 줄 가능성이 있다.
만약 소녀연맹이 정말 케이어스를 꺾는다면, 음방 입장에선 소녀연맹의 무대 영상을 얻는 게 화제를 모으는 지름길이 될 테니까.
모든 음방에 ‘우파루파’의 무대가 포함된다면 딱히 메리트가 생기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파루파’의 무대가 없단 건 확실히 디메리트가 된다.
“형이 진짜 방송국 가봐야 해요. 전부 소녀연맹 얘기만 하고 있어요.”
소녀연맹을 온갖 예능에 출연시키고, 자체 프로듀싱으로 언론에 홍보하고, 인지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렸던 전략.
그 성과가 지금 돌아왔다.
“……3주 미룬 의미가 없는데?”
“네. 완전히 케이어스랑 승부하는 것처럼 돼버렸어요.”
아예 세상이 콜로세움을 만들어주고 있다.
* * *
글로브 멤버들은 샵 대기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들의 눈은 거의 충혈되기 직전이었다.
07시 59분.
“1분.”
주요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들은 팬덤의 지나친 줄 세우기를 방지하기 위해 새벽 집계를 막아둔다.
08시 00분.
TOP100 차트가 갱신되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쥔 라희가 새로고침을 눌렀다.
“어제 41위로 끝냈지?”
라희는 혹시 몰라 50위부터 살피기 시작했다. 천천히 위로 올렸다.
40위까지 글로브의 곡이 보이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살짝 불안해졌다.
리스트를 더 올렸다.
30위까지 보이지 않았다.
“50위보다 더 떨어진 거 아냐?”
위세라가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그리 말했다. 다들 재수 없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차트에 집중하느라 입도 뻥끗할 수 없었다.
20위까지 보이지 않았다.
액정을 누르는 라희의 검지가 천천히 떨려오기 시작했다. 아예 손까지 떨려서, 잘못하면 핸드폰을 떨어뜨릴 것 같기도 했다.
라희의 검지가 액정을 누르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차트를 위로 올렸다.
19위.
없다.
18위.
없다.
17위.
없다.
16, 15, 14, 13, 12.
모두 없다.
“에이 씨…….”
정진은 벌써부터 울상이었다.
이번엔 앨범 초동 판매량이 많이 나와서 차트를 쭉쭉 오를 줄 알았건만.
전부 꿈이었던 모양이다.
그때.
“있어.”
라희가 말했다.
그녀가 화면을 아래로 죽 끌어당겨, 4위에서 11위 사이가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 순간 위세라가 자신의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마치 심장 안에 불덩이라도 들어간 것만 같았다.
순식간에 혈관으로 퍼지는 환희.
“우리, 있어.”
TOP10.
글로브.
“이렇게 빨리…….”
라희가 글로브가 거둔 성과를 축하하려던 순간, 갑작스레 거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두 믿을 수 없는 결과에 어느 정도 벅찬 감정이 몰려왔으나, 방금 들린 울음은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격을 달리했다.
울음의 주인공은 양소민이었다.
그녀는 아예 꺽꺽 소리를 내며 울었다.
“야 소민아 울면 어떡해!”
양소민은 방금 메이크업을 마쳤다. 그런데 눈물을 흘리면 새벽부터 샵에 와서 들였던 공이 전부 허사로 돌아간다.
그것을 본 매니저는 허겁지겁 양소민에게 달려갔지만, 그녀가 우는 것을 제지할 수 없었다.
어느새 글로브 멤버들이 양소민을 사방에서 끌어안고 있었으니까. 마치 갓 태어난 고양이들이 온기를 갈구하며 형제자매들과 뭉친 모양새였다.
그 사이에서 양소민은 울고 또 울었다.
매니저는 그것을 지켜보다가, 메이크업 스태프를 부르기 위해 조용히 자리를 떴다.
* * *
아침.
석세스 엔터의 대표인 김태훈은 출근하자마자 기분이 좋았다. 그도 그럴 게, 글로브가 차트 TOP10 안에 들었으니까.
TOP10 안에 들어오지 못한 채 불꽃을 맞은 파리처럼 툭툭 떨어지는 그룹이 허다하다.
아무리 한국 음악계의 주류가 아이돌이라 해도, 차트 TOP10 안에 들었단 건 대성공이 아닐 수 없었다.
‘고비를 넘겼어.’
연예 기획사의 이미지는 곧 소속 아티스트의 성공으로 결정된다.
순익이 얼마냐, 매출이 얼마냐, 그런 건 기묘할 정도로 영향을 크게 미치지 못한다.
오직 외부에 보이는 이미지뿐이다.
KS 엔터보다 매출이 2배나 적은 SMS 엔터가 KS 엔터와 비슷한 주가를 유지하는 것만 보아도 그러하다.
흔히 대형 삼사라 불리는 대형 기획사들은, 서로 매출이 큰 차이가 나지만 시가 총액은 엇비슷한 수준이다.
‘대형 기획사’라는 프레임과 이미지가 허상과 같은 회사 가치를 지탱한다.
‘글로브가 큰일을 해준 거야.’
그런 의미에서, 석세스 엔터는 글로브 덕분에 한시름 놓았다고 할 수 있었다.
위기가 겹쳐서 암흑기를 보내고 있으나 그것도 곧 끝날 것이다. 글로브의 성장과 성공은 이걸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그래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요.”
김태훈은 평소에도 다른 이들에게 친절했다. 하지만 오늘은 한층 더 친절했다.
그는 윤상열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그의 작업실로 향했다. 가는 동안, 글로브 멤버들과의 단톡방을 보았다.
‘대표님 감사합니다’로 도배되어 있었다.
가장 위에는 글로브의 타이틀곡이 TOP10에 진입한 캡처 사진이 보였다.
‘귀여운 녀석들.’
회사의 보배다.
아마 윤상열도 글로브 멤버들에게 이와 비슷한 메시지를 받았을 것이다. 그도 김태훈처럼 기분이 좋겠지.
요즘 들어 항상 우중충하기만 했었는데, 오늘만큼은 밝은 모습을 보여줄지도 몰랐다.
‘이 기회로 글로브 애들 갈구는 것도 조금은 덜어주려나.’
김태훈은 활짝 웃으면서 작업실 문을 열었다.
코를 찌르는 술 냄새에, 맑게 펴져 있던 김태훈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그는 빠르게 작업실을 살폈다.
평소처럼 어둡기 그지없는 공간이다. 윤상열은 바닥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의 손엔 값비싼 양주가 들려 있었다.
윤상열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
“…….”
두 남자는 한동안 서로를 보기만 했다.
사진처럼 멈춰 있던 풍경은, 윤상열이 술병을 입에 가져감으로써 깨졌다.
김태훈이 물었다.
“축하주야?”
“아니요.”
“아니라니?”
김태훈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윤상열의 핸드폰을 찾았다. 김태훈의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
주우려 허리를 굽혔다.
핸드폰 화면엔 단톡방이 보였다. 글로브 멤버들이 ‘PD님 감사합니다’란 톡을 연달아 보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광경이다. 그런데, 윤상열은 이것을 보고 핸드폰을 집어던진 듯했다.
“금은 안 갔네.”
김태훈은 핸드폰을 주워 윤상열에게 다가갔다. 핸드폰을 내밀었지만, 윤상열은 받지 않고 병 주둥이를 입에 박았다.
꿀꺽, 꿀꺽.
그가 병에서 입을 떼자 또 달짝지근한 술 냄새가 김태훈의 코를 찔렀다.
“왜 그래? TOP10에 진입했잖아.”
“했죠.”
“케이어스를 못 잡아서 그래? 야, 당연해. 일이 주 동안은 이름빨로 계속 버틸 거야. 이후로 하락세 타겠지. 케이어스 이름값 생각하면 거의 망한 거나 마찬가지야.”
“알아요.”
“아는 놈이 왜 그래. 그에 비해 우리 애들 봐. KS 엔터같이 든든한 빽 없고서도 이렇게 올라왔잖아.”
“그렇죠.”
김태훈은 아귀가 맞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윤상열은 아까부터 순순히 글로브의 업적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김태훈은 왠지 모르게 윤상열을 계속 달래야 한단 생각이 들었다.
“미디어 나가서 이름 알리고 홍보 이어가면, 케이어스 같은 건 금방 따라잡아.”
“알아요.”
마침내, 김태훈은 줄곧 찜찜했던 것을 물었다.
“우리 애들이…… 느리게 이기는 게 싫은 거야? 아예 등장하자마자 케이어스를 팍 잡아먹길 바랐어?”
김태훈이 실실 웃었다.
“아무리 너라도, 그건 너무 심보가 고약하지 않냐?”
“형.”
“어.”
“케이어스 컴백한 지 일주일도 안 지났죠?”
“그렇지.”
“앨범 몇 장 팔았죠?”
“이제…… 40만 장 넘었댔나. 그런데 판매량은 걸그룹…….”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요?”
윤상열이 목소리를 높였다.
40도가 넘는 양주를 절반 이상 빠르게 비웠단 것을 고려하면, 그의 목소리는 멀쩡한 축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술기운에 삼켜져 흐물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술은 눈동자에 든 불꽃을 키웠다.
“걸그룹이 대중성을 밀고 나갈 수밖에 없던 건 팬덤 파이가 작기 때문이었어요. 대중들한테나 알려져야 먹고 살 수 있으니까요. 행사 뺑뺑이나 돌려야 수익을 얻을 수 있으니까!”
“…….”
“명백히 보이그룹보다 기대치가 낮다. 낮은데, 그런데도 걸그룹이 계속 나오는 건 보이그룹보다 수익을 내기 쉬우니까. 천장이 낮은 대신 어느 정도 벌어 먹고살긴 보이그룹보다 쉬우니까. 그거였는데…….”
드디어 윤상열은 취한 사람답게 거칠고 몽롱한 웃음을 뱉어냈다.
진짜 기뻐서 내뱉는 웃음은 아니었다.
“시발, 일주일도 안 돼서 40만 장? 걸그룹이?”
“…….”
“형, 판이 바뀌었어요.”
윤상열의 예상보다 케이팝 시장이 훨씬 더 커졌다. 또한, 시장의 방향성은 그의 예상을 크게 빗나갔다.
“이젠 걸그룹도 대중성 지랄 그딴 거 찾을 필요가 없게 됐다고요. 음원 차트 1위 따고 사람들이 좋아해서 행사 여기저기 가면 뭐 해요? 아이돌 혹사시켜서 돈 모아 봤자……!”
윤상열이 검지와 엄지로 원을 만들었다.
방의 크기에 비해 작디작은 원을.
“시바 존나 먼지 한 톨 정도 벌지. 사람들이 알아주고 돈 적게 벌면, 사람들이 모르고 돈 많이 버는 놈들보다 나아요? 아니!”
앞으로 걸그룹의 성공 척도는 대중성이 아니게 될 것이다.
팬덤의 크기다.
누가 더 큰 팬덤을 구축했느냐가 성패를 결정한다.
옛날에는 걸그룹에게 벌어질 거라 상상도 못 했던 일이 지금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다.
기적이다.
그 기적을 보여주고 있는 게 케이어스였다.
“세상 모든 뮤지션들은 팬덤을 만드는 게 목적입니다. 최대한 큰 팬덤요. 걸그룹 이건 팬이래 봤자 별로 모이지도 않아서, 울며 겨자 먹기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유행가나 나불댔는데…….”
이제 그럴 필요는 없다.
케이어스는 새로운 수익 모델을 만들어낸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게 통한다’라는 것을 증명해냈다.
“내가 설정한 방향이 틀렸어요, 형. 내가 골랐던 싸움터가 틀렸다고요.”
한때 신드롬을 일으켰던 연습생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졌던 걸그룹의 총매출은 50억 원이었다.
다음 해, 그 프로그램이 배출한 보이그룹의 총매출은 1,000억 원이었다.
걸그룹과 보이그룹의 수익성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결과였다. 둘 다 신드롬을 일으켰지만, 수익으로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지경이다.
이게 윤상열이 절망을 느끼는 지점이었다.
윤상열은 걸그룹이 계속 그 꼴로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많이 알아주지만, 수익성은 보이그룹과 비교할 수 없으리라고.
하지만 아니었다.
KS 엔터, 정호환은 당연하단 것처럼 윤상열의 예상을 뛰어넘어 다음 단계로 가고 있었다.
“이런데 내가 뭘 좋아해요? 차트 높이 올라갔다고 좋아해봤자 뭘 어쩌는데요?”
“……그러니까.”
묵묵히 듣고 있던 김태훈.
그가 아연실색하며 물었다.
“애들이 차트 TOP10 올라간 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네.”
왜? 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김태훈은 이미 답을 알았다. 답을 알지만, 그로선 이해할 수 없는 답이었다.
윤상열이 이러는 까닭은.
‘져서.’
그의 말대로라면 음원 순위가 어떻든, 글로브는 케이어스에게 패배한 것이다.
케이어스에게 패배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만약 걸그룹 성패의 기준점이 거대한 팬덤의 확보로 나아간다면, 글로브는 영원히 케이어스에게 이길 수 없으리라.
윤상열은 그리 판단했기에 절망한 것이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윤상열이 자신의 머리를 감쌌다.
“글로브, 이것들은 잘못 만들어졌어…….”
글로브의 메인 프로듀서, 윤상열.
그가 판결을 내렸다.
글로브는 기획부터 잘못된 그룹이노라고.
만들어진 순간부터 실패했다.
* * *
KS 엔터는 업계의 선두 주자로서, 단순히 수익을 극대화하는 데만 집중하지 않는다.
연구 재단과 교육 재단을 설립하여 다방면의 도전을 위한 추진체도 확보하는 중이다.
본인들의 능력을 문화기술이라고 자부하는 만큼, 기술의 미래 또한 큰 관심사다.
어떻게든 시장에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당연히 현재만이 아닌 미래도 염두에 둔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을 생각한다.
‘만약 자율주행이 대중화된다면, 사람들은 운전하지 않는 시간에 뭘 할까?’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이지만, 그에 적합한 콘텐츠를 상상하고 개발하려 노력한다.
혹은.
‘콘서트를 DVD로 팔지 않고,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전 세계 동시 중계할 수 있지 않을까?’
명확한 수익 모델이 있지도 않고, 실현 가능성이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지만, KS 엔터는 실시간 스트리밍 콘서트 기술을 개발 중이다.
물론, 갑자기 세계를 뒤덮는 역병이 창궐하여 다들 집 문을 잠그지 않는 이상 스트리밍 콘서트 같은 게 상용화와 대중화에 이를 리는 없다.
세상에, 콘서트는 직접 가고 말지 누가 컴퓨터 모니터로 비싼 돈 주며 보려 하겠는가?
아무튼, KS 엔터는 업계를 선도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다.
그중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건 시장의 파이를 키우는 것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시장이 성장해야 회사도 클 수 있으니까.
이 비전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건 정호환이었다.
그 정호환은, 케이어스가 컴백으로 거둔 성과를 보았다.
컴백 일주일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앨범 판매량이 40만 장을 돌파했다.
하지만 차트에선 살충제 맞은 모기처럼 천천히 하락을 이어가고 있다.
대중과 케이팝 팬의 평가도 엇갈리며, 평론가들의 반응마저 일정하지 않다.
보통 사람이 생각하면, ‘어찌 됐든 수익성이 극대화됐단 거니까 좋은 일 아닌가?’라고 할 수 있다.
“이건…… 이러면…….”
하지만 30년간 케이팝 시장을 이끌다시피 한 정호환이 보기에,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안 되는데.”
더 심각한 건, 이런 평가가 정호환의 것만이 아니란 사실이다. KS 엔터의 비전은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니까.
KS 엔터는 같은 비전을 지니고 함께 나아간다.
물론, 직원급에서 그 비전을 알 수는 없다.
회사의 향방을 결정하는 임원끼리만 비전을 공유한다. 문화는 소수가 이끈다는 게 정호환과 KS 엔터의 철학이니까.
“이런 모양이 나오면 안 돼…….”
이건 단기적인 성공이자 장기적인 실패다.
애초에 케이어스의 최초 기획에도 벗어난다.
정호환은 급히 앨범이 판매된 국가 비율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국내가 압도적인 수준이다.
케이팝 시장 전체의 추세와 엇나간다.
“이런 식이면 안 되는데…….”
정호환의 가슴에 먼지가 쌓여갔다.
그때 내선 전화가 울렸다.
정호환은 답지 않게 화들짝 놀라기까지 했다. 그는 짧은 심호흡으로 동요를 지우고 침착하게 전화를 받았다.
[이사님, 전략 기획 회의까지 10분 남았습니다.]
“……알겠어요.”
전화를 끊은 정호환은 생각에 잠긴 채 재킷을 집어 들었다. 문을 나서는 그의 걸음은 평소보다 느리고 둔중했다.
정호환은 KS 엔터 사옥 최상층에 위치한 대회의실로 들어갔다.
U자형 회의 테이블에 앉은 임원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장 상석에 앉은 인물이 따스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어서 와요, 정 이사.”
여름이라서일까.
짧은 거리를 걸었을 뿐인데, 정호환의 이마에는 땀이 흥건히 배어 있었다.
정호환은 침을 꼴깍 삼켰다.
“예, 회장님.”
대회의실의 문이 닫혔다.
* * *
성필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머리맡 선반에 올려진 주황색 무드등이 방을 은은하게 밝혔다.
그는 악력기를 느슨하게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천장을 자세히 살폈다.
소녀연맹 멤버들의 브로마이드가 원형을 그리며 바깥쪽을 향해 붙어 있었다.
그 때문에, 성필에게 정면으로 보이는 건 장하양의 브로마이드뿐이었다. 브로마이드 안의 장하양은 성필을 향해 보라색 튤립을 내밀고 있었다.
“…….”
성필은 갑자기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책장 옆에 쌓인 지관통 무더기를 살폈다.
지관통 겉엔 성필이 네임펜으로 이름들을 적어두었다. 그 가운데서 케이어스의 데뷔 앨범 구성품으로 온 지관통을 찾아냈다.
성필은 안에서 케이어스 4인 단체 포스터를 꺼내 보았다.
정면을 바라보는 네 명의 소녀들.
‘딱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케이어스.’
그 뒤로는 모든 게 바뀌었다.
더는 성필이 아는 케이어스가 존재하지 않았다.
딱히 에리카의 흡연 사실을 알게 돼서.
과즙미 뿜뿜 케이어스의 비타민 김민주의 성깔을 알게 돼서.
진저가 원래는 팬을 싫어했단 걸 알게 돼서.
진소유의 성격이 상상 이상으로 기묘했단 걸 알게 돼서.
그래서 ‘성필이 아는 케이어스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에리카 씨의 흡연은 충격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전생과 가까워져서 케이어스에게 품었던 환상이 깨진 건 아니다.
말 그대로, 성필이 아는 케이어스가 존재하지 않는단 의미였다. 전생과 비교하면 가장 극적으로 바뀐 그룹이니까.
‘뭣 때문에 케이어스의 방향성이 달라진 건지는 모르지만, 내가 과거로 돌아와서 바뀐 건 확실하다.’
성필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성필 때문에 케이어스가 바뀌었다면, 그는 역사에 죄를 지은 것일지도 모른다.
현재 끝을 모르고 성장 중인 케이팝 시장은 어느 순간 뚝, 성장세가 꺾인다. 주식에서 흔히 쓰는 말로, 박스권에 갇힌 것이다.
사람들은 2세대의 끝자락처럼, 새로운 세대가 도래하기 전의 상태로 보기도 했었다.
‘언제까지고 한정된 파이를 가지고 싸우진 않을 거라면서.’
3세대가 아이돌 시장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키고. 4세대가 초창기에 그 낙수효과를 누리며 케이팝의 잠재성을 증명했던 것처럼.
여느 때처럼 게임 체인저가 등장할 거라고 했었다.
참으로 낙관적이며 운명론적, 순환론적이기까지 한 예상이었다. 놀라운 건 그게 사실이었단 사실이다.
‘그 게임 체인저가 케이어스였다.’
케이어스는 데뷔 4년 차에서 5년 차 사이, 박스권에 갇힌 케이팝 시장을 부수고 나갔다.
다들 부서진 천장에서 들어오는 샘물로 목을 축이기 바빴었다.
그야말로 케이어스는 게임 체인저이자 구세주였고, 시장의 선도자가 되었었다.
‘그런데…….’
현재는 다르다.
그야 케이어스는 괄목할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건 선배들이 만들어준 낙수효과를 극대화한 것에 불과했다.
케이어스는 단지 선배들이 뚫은 수맥에 입을 꽂고 빨아들이기만 할 뿐.
전생의 케이어스를 아는 성필로선, 현재의 케이어스에게서 전생과 같은 혁신성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게 성필을 불안하게 했다.
‘나 때문에 바뀐 거면, 내가 미래를 바꾼 거면, 이대로 케이어스란 구세주가 사라진다면…….’
케이팝 전체 시장의 성장은 거기서 끝일 것이다. 이미 만들어둔 파이 안에서 팬들의 입맛을 맞추는 데만 급급할 뿐이겠지.
이 가능성을 처음 떠올렸을 때처럼, 성필의 등에 다시금 소름이 돋았다.
그건 그의 머릿속에서 너무나 명확한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며, 그 결론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케이어스는 틀렸어.’
이래선 안 된다.
이대로 가면 전생의 발끝도 못 따라간 채 끝나고 만다.
성필이 올콘을 돌 정도로 열광했던 케이어스는 다시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보다.
‘내가 아이돌 문화의 성장을 멈추게 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
성필은 포스터를 소중히 지관통 안에 넣곤,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여름임에도 이불을 어깨 끝까지 끌어당겼다.
천장을 보았다.
장하양이 꽃을 내밀고 있었다.
‘만약 내 예상이 사실이라면.’
성필이, 이제는 영원히 사라져버린 케이어스를 대신해서 구세주를 만들어내야 한다.
‘소녀연맹이 전생의 케이어스를 대신해야 해.’
성필의 시선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회사 사람들과 소녀연맹에게 ‘케이어스는 경쟁자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건 후회할 미래를 봤기 때문에 짜낸 궁여지책에 가까웠다.
스스로도 그걸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달라졌다.
‘케이어스는 경쟁자가 아니야.’
그녀들이 앨범을 얼마나 팔건, 정말 아무런 상관도 없다.
‘내가, 소녀연맹이, 우리가 상대해야 할 건…….’
케이어스보다 훨씬 거대하고 이기기 어려운 것이다.
시장(市場).
성필과 소녀연맹이 싸워야 할 건 시장 그 자체이다.
성필이 천장을 향해, 소녀연맹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닿아야만 해.’
케이어스가 없는 세계에서, 성필은 케이어스와 정호환이 해냈던 위업을 재현해내야 한다.
최고의 아이돌.
그 찬란한 이름마저 넘어선 지점까지 닿아야만 한다.
‘반드시.’
미래를 바꾸기 위한 싸움.
그 첫 번째 계단.
소녀연맹 컴백까지 하루.